한국 만화의 거장, 故고우영을 돌아보다 [한겨레21/050504]

!@#… 이번 주 한겨레21에 들어간 글. 이번주, 각 시사주간지들마다 문화면은 이 이야기였을터. 故고우영 선생 돌아보기. 그런데, 어차피 ‘고우영 만화와 함께 한 추억’은 60년대생들이 나보다 훨씬 더 듬뿍 애정어린 눈으로 써내고 있고, ‘작품 연보’는 자료만 열심히 뒤지면 신문기자들이 더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capcold는 좀 다른 부분에 집중하기로 한 거다. 바로, “고우영 만화가 어떻게 대단하다는 말인가“. 추억담보다는 훨씬 메마르고 연보보다는 덜 정보적이겠지만, 그래도 이런 부분이야말로 누군가가 확실하게 짚어줘야한다고 생각하니까.

!@#… 여담: 한겨레21 기사에서는, “…75년 소년지에서 연재된 무술가 최배달의 일대기인 <대야망>…” 이라는 대목이, “75년 <소년>지에서 연재된 무술가 최배달의 일대기인 <대야망>” 라고 편집되어 나왔다. 헛, 소년만화잡지라는 말이었는데, 편집기자님이 잡지 이름으로 아셨나보다. 하필이면 작품이 연재된 잡지의 실제 이름은 <새소년>.

결과적으로 절묘하게 중간에 걸친 오타가 되어버렸다. OTL

(어디선가 누군가는 “저 인간, 잡지 이름도 제대로 모르면서 무슨 전문가 행세야! ㅋㅋㅋ” 하면서 비웃음을 던질지도)

!@#… 여튼 대체로 그렇게 해왔듯이, 여기에 올리는 것은 원본. 잡지에 실제 실린 데스크 거친 버젼과는 대소제목, 문단구분 등이 약간씩 다를 수도 있음. 아니, 다름. -_-; 

!@#… 본문에 언급한 ‘노가리 만화’라는 명칭을 이번 기회에 완전히 공식 용어로 정착시켜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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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만화의 거장, 故고우영을 돌아보다

김낙호(만화연구가)

취향변화가 극심하고 상호모방과 가치절하가 만연되어 있는 현대 대중문화에서, ‘거장’이라는 호칭이 부여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우선 여러 시대와 세대를 넘나들며 고르게 명작을 탄생시켜야 한다. 예술적 성취와 대중적 호응을 동시에 거머쥐어야 한다. 나아가 하나의 흐름을 만들고, 해당 문화장르 자체의 사회적 입지까지 향상시켜 줄 수 있어야 한다.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를 충족시킨다면 논란의 여지가 없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2005년 4월 25일 타계한 故고우영 선생은 대중문화 가운데에서도 가장 대중문화적인 분야인 만화가 배출한 진정한 거장이라고 할 수 있다. 향년 67세, 그 중 50여년을 고스란히 만화에 바친 거장의 빈자리는 크다.

고우영 만화의 발자취

고우영이라는 이름 석자가 지난 반세기동안 한국만화계에서 차지해온 위치는 각별하다. 그의 작품 경향은 몇가지 갈래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초창기의 명랑만화들이다. 이 시기에는 추동성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비교적 당대 명랑만화 문법에 충실했는데, 익살스러운 모습의 박사와 아들의 좌충우돌 모험을 그린 <짱구박사>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에 머물지 않고, 작가는 72년 <임꺽정> 연재를 필두로 성인취향 연재만화의 영역을 개척했다. 이러한 작품들의 확고부동한 히트는 현재까지도 하나의 공식으로 남아있는 스포츠신문과 만화 사이의 파트너십을 새로이 발명해냈다. <삼국지>, <수호지> 등 중국고전의 재해석 및 <일지매>등 창작사극을 통해서 고우영식 만화의 개성이 확립되었고, 이후 그의 대표적인 작품색으로 남게 되었다.

성인 연재만화를 대표 장르로 하면서도, 청소년 만화 작업 역시 지속되었다. 75년 소년지에서 연재된 무술가 최배달의 일대기인 <대야망>이 대표적인데, 한껏 성인만화에서 실험하고 있던 해학이나 농담보다는 우직한 극화 스타일의 전개가 특징이다. 또한 창작 만화 작업 이외에도 평소 작가가 여행한 명소들을 중심으로 엮여진 기행문 서적, 도서 삽화 작업 등 다방면에 작가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러한 작업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유려한 솜씨는, “만화가가 글도 잘 쓴다”는 식의 세간의 편견과 달리 “글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기 때문에 만화가를 할 수 있다”는 단순한 진실을 증명하는 좋은 사례가 되어주고 있다. 94년부터 단행본으로 출시된 <십팔사략>은 이전의 신문연재 사극만화와도 다시금 궤를 달리한다. 이 작품은 단행본 총서류에 적합한 호흡으로 만들어졌으면서도 특유의 해학은 그대로 살아있다. 그리고 뚜렷한 주인공들보다는 커다란 흐름을 묘사하는 것에 집중하여, 드라마와 사서 사이에 있는 영역을 개척하는 일에 성공하며 고우영 만화의 또 다른 도약을 예고했다. 항상 동시대적 호흡을 놓지 않고 현역으로서 진화를 거듭해온 행보를 보였기 때문에, 이제는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게 된 <한국만화야사> 등이 더욱 아쉽다.

고우영식 서술방식과 ‘노가리 만화’

흔히 고우영 만화라고 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그런 문법을 확고하게 해준 것은 그의 신문 연재만화들인데, <임꺽정>에서 시작하고 <일지매>에서 가다듬어져서 <삼국지>에서 전성기를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스포츠신문은 당대의 떠오르는 오락 언론매체였고, 작가는 지면특성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방식의 만화문법을 지속적으로 개발해냈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이야기 서술 방식의 유연함이다. 고우영 만화에서는 기본적으로 작품 속 주인공들이 극을 전개시켜나가면서도, 필요에 따라서 작가가 직접 개입하여 해설과 해석을 달아주고 있다. 때로는 마치 판소리의 소리꾼마냥 걸죽한 입담, 때로는 주인공들의 박진감 넘치는 상호작용으로 이야기를 이끄는 자연스러움이 독자들을 쉽게 몰입시킨다. 이것은 마치 고전소설 또는 판소리를 연상시키는 방식인데, 특히 작중 상황들을 현실 세태에 빗대어 풍자한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단순히 줄거리가 전개되는 모습 자체에 의존하기보다는, 마치 술자리에서 입담 좋은 선배 하나가 웃음과 울분으로 세상 사는 이야기보따리를 하나 풀어내듯이 – 속칭 “노가리를 까듯이” – 작품 속 이야기는 살아있는 우리네 세상 이야기가 된다. 만약 작가가 개입하는 지점이 지나치게 설교조로 가거나 주인공들이 극중 흐름에 너무 경직되어 있을 경우는 독자들의 외면을 살 수 밖에 없겠지만, 故고우영 선생은 특유의 거리두기와 화려한 입담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풍자의 칼날은 표현으로서는 우회적이었으나, 독해 과정 속에서는 통쾌한 날카로움을 잉태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노가리 만화’는 필연적으로 서민적 정서, 인간적 내음을 진하게 담고 있었으며, 통기타와 생맥주의 70년대 청년정서와 잘 맞아 떨어졌다. 이후 그 전통은 강철수, 배금택, 한희작 등의 작품을 통해서 현재까지도 스포츠신문 만화의 유구한 흐름으로 이어져 왔다. 나아가 일기체로 서술되는 여러 온라인 만화 작품들에서도 그 영향력을 간간히 찾아볼 수 있다. 고우영 만화는 바로 그 시조이자, 마지막 순간까지 최고 수준의 현역선수였다.

캐릭터성의 선구자

시각적 측면에서도 고우영 만화는 탁월함을 발휘한다. 유려한 선의 힘을 이용하여 고전 동양화를 강하게 연상시키는 풍경묘사는 물론, 해학적 필치와 진지한 선의 힘을 조율하여 헐렁한 유머와 강렬한 전개를 오고 가는 솜씨 역시 달인의 경지다. 이러한 시각적 탁월함의 가장 큰 이점은 바로 캐릭터성의 창조다. 효과적인 시각화 덕분에 등장인물들의 감정 상태와 내적 변화과정은 선명하게 줄거리 속에 각인되어 각 캐릭터의 개성을 만들어낸다. 또한 고우영 만화에서 등장인물들은 아무리 많은 이들이 등장해도 누구 하나 서로 혼동되지 않을 정도로 뚜렷하게 차별되는 모습을 지니고 있다. 나아가 성격과 모습의 일치에서 오는 강력한 효과가 발군이다. 이전 어느 누가 삼국지의 저돌적인 맹장 여포를 멧돼지 같은 얼굴로 묘사했으며, 눈치 많이 보는 유비를 아예 사시로 그려냈던가. 신출귀몰한 일지매를 변장에 능한 중성적 미소년으로 만들어낸 것 역시 무릎을 치게 만든다.

이렇듯 캐릭터성이 강하게 작용하다 보니, 고우영 만화의 등장인물들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우스움과 진지함, 강함과 나약함을 오가며 상황에 따른 내적 감정변화가 선명하다는 것은 곧 독자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특히 고전을 다루면서 기존의 박제화된 인물묘사를 벗어나 인간적인 일화들을 대폭 심어 넣은 것 역시 크게 일조하고 있다. 일지매든 임꺽정이든 장비든 삼황오제든, 어떤 근엄한 역사적 등장인물이라도 고우영 만화에서는 시시한 농짓거리 또는 소소한 질투 한번 안 해보는 사람이 없다. 언젠가부터 캐릭터성이 장르문화의 파급력을 이야기하기 위한 중요한 잣대로 동원되곤 하는데, 그렇다면 고우영 만화야말로 캐릭터의 힘을 극대화시켜서 성공을 거둔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한국만화, 포스트 고우영의 시대

이러한 것들을 차치하고서라도, 결국 독자들에게 그가 남긴 최대의 업적은 바로 만화의 즐거움이다. 만화로 이야기하면 얼마나 재미있는지, 그리고 그 즐거움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얼마나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그 즐거움은 이미 시대를 초월하여, 군홧발에 짓이겨졌던 <삼국지>를 원형대로 복원해낸 새 삼국지가 2000년대에 다시한번 큰 히트를 기록했다. 나아가 <일지매>, <수호전> 등도 재발간되어 단지 옛날만화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동시대 젊은이들에게 호소력 있는 작품으로서 자리매김했다. <수레바퀴>, <십팔사략> 등 90년대 이후의 근작들도 당연히 자기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다만, 평생현역을 고수했던 작가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이제는 더 이상의 고우영 만화가 나올 수 없게 되었다. 이미 나온 여러 명예의 전당급 작품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제 그가 세운 커다란 산을 넘어서 더 큰 봉우리를 만드는 과제가 후배 작가 세대에게 떨어졌을 따름이다.

여담이지만, 만화가에 대한 존칭으로 ‘화백’이라고 부르는 것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화백은 그림 그리는 사람에 대한 극존칭인데, 만화가는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동시대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는 그림이야기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故고우영 선생 같은 탁월한 이야기꾼에게, 화백이라는 호칭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간 만화들이 주었던 즐거움에 감사하며, 다시금 고인의 삼가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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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 만화 대표작 5선]

굳이 이런 것을 소개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미 잘 알려진 작품들이지만, 이번 기회에 세트로 하나씩 소장해서 두고두고 읽어보면 좋을 만한 작품들을 엄선해서 몇 가지 뽑아보고자 한다.

일지매 (애니북스/전8권)

양반계층의 사정으로 버려지게 된 서자 일지매가 기구한 운명을 겪으며, 청나라와 일본에서 수련한 무술을 바탕으로 의적이 되어 부패한 조선사회에서 활약을 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은 창작사극. 고우영식 해학과 풍자, 자유로운 서술방식이 거의 완전히 제 모습을 갖춘 명작. 특히 일지매라는 주인공 캐릭터의 복합적인 심경묘사와 변천과정은 섬세함의 극치를 이룬다. 하지만 사회 모순에 대한 분노가 개별 악당들을 넘어 제도 전체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지지는 못하는 것은 아쉬운 지점이다.

삼국지 (애니북스 / 전10권)

<고우영 삼국지>는 삼국지가 원래 가지고 있었을 법한 본연의 서민적인 재미를 극대화하여, 해학과 동시대적인 풍자정신으로 완전무장한 걸작이다. 인물들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 역시 발군인데, ‘싸나이 조조’ 대 ‘쪼다 유비’의 대결구도라든지, 관우와 제갈량의 신경전 등이 그 어느 다른 판본보다도 더욱 인간적이다. 흔히들 이야기하듯이 삼국지가 인간사에 대한 종합백과사전이고 처세전략의 교과서라면, <고우영 삼국지>는 한국에서 출판된 모든 삼국지들 가운데 으뜸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가루지기 (자음과 모음 / 전2권)

성인만화를 표방하지만, 대체로 고우영 만화는 질펀한 농담이 가끔 나오는 정도일 뿐 그다지 성적인 방향으로 심취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성애를 소재로 한 이야기에 도전한 것이 바로 <가루지기>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계통의 영원한 주인공 변강쇠와 옹녀의 이야기다. 물론 여기서도 지극히 해학적으로 접근해서, 끈적거림보다는 유머러스함이 돋보이는 작품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것이 바로 청소년의 성장기 성적 환상이 아닌 진짜 성인들의 에로문화가 추구해야할 경지가 아니던가.

십팔사략 (애니북스 / 전10권)

증선지가 편저한 고전 <십팔사략>은 창세부터 송나라까지 이어지는 중국의 고대사를 다룬 역사서다. 전설과 역사가 뒤섞였으며, 수많은 난세의 영웅들이 피고 졌던 이 광대한 줄거리를 만화로 제대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어느 한 명을 떠올릴 것이다. 십팔사략은 신문연재가 아닌 기획총서의 형식에 맞게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으며, 대중문화의 예술품이나 오락물로서뿐만 아니라 학습서로서도 탁월하다. 두산동아 출판사에서 원고를 전량 분실했던 안타까운 전력도 있다.

대야망 (학산문화사 / 전6권)

극진가라데의 창시자 최배달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 발표 시기 및 지면상 가라데가 아니라 태권도로 번안하였으며 일본에서의 여러 초기 일화들이 빠지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작품 자체로서는 탁월한 재미를 지닌 청소년 극화. 고우영 만화 특유의 풍자정신과 해학, 다양한 밀도를 오고가는 그림체의 변화무쌍함은 그다지 들어있지 않아서 아쉬움을 남긴다. 하지만 굵은 선과 역동적인 질감은 이후에 당시 문하생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방학기의 <바람의 파이터>에서 고스란히 계승되었다.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 수정불가/영리불가 —

고우영, 거장의 흔적 – <삼국지>와 <일지매> [기획회의 050502]

!@#… 5월 2일자 기획회의용 원고(따라서 2005.5.2까지는 이동불허. 그 정도 네티켓은 알아서 다들 지켜주리라 믿는다). 아직 개제안된 원고를 사전공개하는 건 평소 신조나 일반 도의에 어긋나지만, 시기가 시기인만큼 편집부도 너그러이 윤허해주겠지.

!@#… 여담이지만, 나는 만화가를 ‘화백’이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한다. 화백은 그림그리는 사람에 대한 극존칭인데, 만화가는 단순히 그림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림이야기꾼이기 때문이다. 화백이라는 용어를 이쪽에 가져다 붙이는 것은 왠지 미술계에 대한 자격지심의 표시 – 즉, 만화가도 그림 제대로 그릴 줄 안다는 식의 소극적 선언같이 들린다. 특히 고우영 선생같은 길이 남을 탁월한 이야기꾼에게, 화백이라는 호칭은 턱없이 부족하다. …여튼,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전까지는, 종목을 초월한 극존칭인 ‘선생’으로 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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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 거장의 남겨진 흔적 – <삼국지>와 <일지매>

2004년 4월 25일, 한국 만화의 큰 별이 떨어졌다. 한 시대를 풍미한, 아니 여러 시대를 관통하면서 계속 풍미해온 명실상부한 거장 고우영 선생이 지병으로 별세한 것이다. 일찍이 70년대에 스포츠신문이라는 공간에 연재만화라는 훌륭한 파트너를 소개한 <임꺽정>을 필두로, 마지막 그날까지 항상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역으로 특유의 해학과 입담을 발휘했다. 갑자기 이 지면에서 고인에 대한 추모 투의 평가를 할 생각은 없지만, 이번 기회에 고우영이라는 이름이 남기고 간 한국만화의 걸작들을 두 편만 다시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에서 발간된 수많은 삼국연의 판본 가운데 지금까지 가장 잘 팔린 것은 이문열 삼국지다. 하지만 가장 재미 있는 것을 꼽으라면 단 0.1초도 주저하지 않고 <고우영 삼국지>(애니북스, 전10권)를 선택하겠다. 단지 오락성이 뛰어나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삼국지가 원래 가지고 있었을 법한 본연의 서민적인 재미가 뛰어난 해학과 동시대적인 풍자정신 속에서 발현되고 있는 역작이다. 인물들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 역시 발군이어서 비단 ‘싸나이 조조’ 대 ‘쪼다 유비’의 대결구도뿐만 아니라, 관우와 제갈량 사이의 신경전이라든지 손씨 가문 여인들의 강인함에 대한 동경이라든지 하는 설정들이 독자들을 즐겁게 한다. <고우영 삼국지>의 등장인물들은 그 어느 다른 판본보다도 더욱 인간적이며, 우리 독자들의 모습에 가깝다. 흔히들 이야기하듯이 삼국지가 인간사에 대한 종합백과사전이고 처세전략의 교과서라면, <고우영 삼국지>는 한국에서 출판된 모든 삼국지들 가운데 으뜸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고우영식 고전 서사연출은 이 작품에서 찬란한 빛을 발한다. 때로는 마치 판소리의 소리꾼마냥 걸죽한 입담으로, 때로는 주인공들의 박진감 넘치는 상호작용으로 이야기를 이끄는 자연스러움이 독자들을 쉽게 몰입시킨다. 작가의 해설은 동시대(현대)의 여러 맥락들을 섬세하게 풍자하고, 내부의 주인공들 역시 그 과정에 천연덕스럽게 동참해버린다. 단순히 극이 전개되는 모습 자체에 의존하기보다는 마치 술자리에서 입담 좋은 선배 하나가 기분 좋게 세상사는 이야기 보따리를 하나 풀어내듯이 – 속칭 “노가리를 까듯이” – 고전은 고전이 아닌, 살아있는 우리네 세상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노가리 만화’의 전통은 스포츠신문 만화의 터주대감 같은 이미지로 굳어있는데, 고우영 만화가 바로 그 시조이자, 선구자이자, 마지막 순간까지 최강의 현역선수였던 것이다. 시각적 측면에서도 <고우영 삼국지>는 탁월하다. 선의 힘을 조율하여 헐렁한 유머와 강렬한 전개를 오고 가는 필치는 이미 달인의 경지를 오래전에 넘어섰고, 등장인물들을 묘사함에 있어서도 누구 하나 서로 혼동되지 않을 정도로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고우영 삼국지>의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제갈량의 죽음과 함께 이야기가 다소 급작스럽게, 실질적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물론 유씨 3형제와 제갈량이라는 주인공들이 극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첫 시작부분에서 황건적을 다룰 때 보였던 평범한 민초들에 대한 애착이 연재 종결의 시점에서는 다소 약해졌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아마 긴 연재기간동안 주인공들에게 생긴 애정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리라.

故고우영의 사극들은, 고전의 재해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순수창작물인 <일지매>(애니북스, 전8권) 역시 원전이 있으리라는 오해를 종종 사고는 한다. <삼국지> 직전에 그려진 이 작품이 그만큼 유명 고전들과 견줄 만큼 이야기의 스타일이나 완성도가 뛰어나다는 칭찬으로 해석해도 큰 무리가 없을 듯 하다. 버려진 서자 일지매가 청국과 일본에서 각종 신기한 기술을 익혀서 의적활동을 하게 되는 이야기인데, 일지매의 기구한 운명 속에서 당대 조선조 양반사회의 부패, 청나라와의 국제 정세 등이 가감 없이 펼쳐진다. 비록 권말해설에서 평론가 박인하가 지적했듯이 그 모순에 대한 분노가 왕조 자체나 시스템 전체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지지는 못해서 아쉬움을 남기지만, 일지매라는 일개 의적(!)에게 너무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당연한 행보일수도 있다.

<일지매>에는, 훗날 <삼국지>에서 완성되는 능청스러운 재담의 원형이 가득하다. 칸과 면을 가지고 하는 만화적 장난은 물론, 현실세계의 맥락을 자꾸 환기시키는 농담이 사이사이에 삽입되는 것 역시 여기서 이미 선보이고 있다. 목표를 위해서 여장을 일삼는 미형 남자주인공이라는 당시로서는 꽤 파격적인 설정도 고우영식 재담 속에서는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다. 그러면서도 진지한 극 전개가 필요할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색을 하고 나서는데, 그 분위기 전환이 너무나도 능숙하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을 떠나보내는 일지매의 비극이 절절하게 느껴지며, 양반의 부패에 속수무책 당하는 사람들이 연민을 자아내는 것이다. 이렇듯 비극과 희극이 끊임없이 교차되는 것이 바로 인생 그 자체 아닌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지매>는 오랜 연재기간동안 독자들을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만큼 본질적인 재미를 지니고 있기에, 연재 후 거의 3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 읽어봐도 그 재미가 고스란히 다시 느껴진다. 사람들은 보통, 이런 효과를 지닌 작품들을 ‘고전’이라고 부른다. 물론 장기 연재작이다보니 이야기의 흐름이 중간에 너무 확연하게 바뀌어버린다거나, 때로는 흐름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너무 많이 흘러가버린다든지, 주요 이야기 단위 간의 균형이 약간 어색해 보인다든지 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능숙하게 모든 것을 감싸안는 그림이야기 솜씨라면, 얼마든지 재미를 느끼고 감동을 받아줄 준비가 되어있다.

아쉽게도, 이제는 더 이상의 고우영 만화가 나올 수 없게 되었다. 명예의 전당감인 여러 작품들이 그의 업적을 기릴 뿐이다. 고우영이라는 높은 산을 넘어서 한국만화의 더욱 높은 경지를 개척할 숙제가 이제 후배 세대에게 남겨졌다. 그가 남긴 만화 유산들이 더 좋은 만화를 일구어내는 씨앗이자 거름이 되어주기를 바라며, 다시금 고인의 삼가 명복을 빈다. 일지매와 관우와 임꺽정이 그를 만화의 천국에서 반갑게 맞이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 Copyleft 2005 by capcold. 하지만 2005.05.02까지는 이동불허 —

통속성이 빛을 발하다 – <엠마> [으뜸과 버금 0504]

메이드, 즉 하인 내지 하녀라는 소재는 무척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가능하게 해준다. 우선 헌신이라는 이미지를 통해서, 현모양처 또는 자상한 아버지형 캐릭터를 쉽게 창조할 수 있다. 자기 집단 내에서 어울릴때는 발랄한 노동자이며, 기품 있는 집안에서 일을 돌보고 있는 동안에는 예절과 품격을 지킬 줄 아는 멋쟁이. 상류층의 공간에서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류층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생기는 격차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 나아가 서비스를 하는 자와 서비스를 받는 자 사이에서 생겨날 수 밖에 없는 우정이나 애정. 뭐랄까, 너무나 이야기의 규격이 맞춤형처럼 확연히 눈에 보인다. 그리고 당연히도 그것을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써먹어서, 이제는 정말이지 지겨울 정도다. 특히 특정 소재나 표현요소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일본에서 90년대 이후 정착된 소위 ‘모에’라고 불리우는 소비성향 물결 속에서 메이드 – 특히 여성 메이드는 한층 더 정형화된 욕정과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통속성이 극단으로 치닫다가 이상한 변이를 맞이해버린 셈이다.

하지만 통속성이, 꼭 이러한 어두운 결말으로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엠마>(모리 카오루, 북박스 / 현재 4권 발매중) 같은 소중한 사례가 있기에 희망을 가질 수 있다. 19세기 영국에서 한 메이드와 귀족 남성의 신분을 초월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려나가는 이 만화는, 수많은 메이드물에 익숙할 대로 익숙할 만한 만화팬들 사이에서 오히려 더욱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우선 전제를 하건데, 이 작품은 메이드물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다른 여타 공산품 만화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작가가 메이드에 대한 진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집착을 한다는 점이다. 메이드의 생활을 묘사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고증하여 재구성한 19세기 영국의 거리를 비롯해, 당시의 생활습관 하나하나를 되살려낸다. 그 결과 메이드는 성적 환상으로 버무려진 복종하는 존재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노동자이자 품격 있는 집안의 주인들이 되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 작품의 미덕은 빛을 발한다.

이러한 집요함은 작가가 만화를 연출하는 모든 방식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1권 첫 대목에서 주인공 엠마가 등장할 때, 그녀가 청소하는 방의 풍경을 훑어주며 일하는 엠마의 손놀림, 목선, 표정을 하나씩 훑어나가는 시선처리는 어떤 영화나 사진으로도 재현할 수 없는 만화 본래의 효과다. 메이드들의 활기찬 집단 노동 장면에서 묻어나오는 에너지 역시 메이드 층의 다양한 속성들을 보여주기에 가장 효과적인 시퀀스들로 압축되어 묘사된다.

물론 <엠마>는 통속적이다. 신분의 벽을 뛰어넘는 사랑이라니, 지난 2000년 인류 문학의 과거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갈 정도로 전형적이다. 주말 드라마 마냥, 나중에 뻔히 맺어질 것이 보이는 두 신분차이나는 마음의 연인들이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적당히 시련도 닥치고, 방해자들도 끼어든다. 그 과정이 특별히 특이하지도 않고, 캐릭터들 역시 파격적인 무언가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재미있다. 그 기본공식 위에 작가는 자신이 집착하고 싶은 메이드라는 흥미로운 소재거리에 하염없이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솜씨가 가히 녹록치 않아서, 독자들이 공감하고 따라온다.

결국 좋고 재미있는 만화가 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통속성/참신성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통속적이라면, 아예 확실하게 그것을 인정하고 집요하게 끝까지, 맨바닥까지 밀어붙이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엠마>를 추천한다.

 

[으뜸과 버금 2005.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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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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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둘리, 다시 만나다 – <아기공룡 둘리 애장판> [기획회의 050418]

!@#… 뭐야, 300번째 게시물이잖아 (경악. 100개를 채우기 전에 나간다고 내심 다짐했건만) !!! 음 뭔가 좀 더 강력한 걸로 채우고 싶었던 이벤트 번호였지만, 뭐 알께뭐람.

!@#… 새삼 느끼는 바지만, 이 지면처럼 한 원고지 15매 정도는 최소한 되어야 ‘신간소개’를 하면서도 뭔가 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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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둘리, 다시 만나다 – <아기공룡 둘리 애장판>

‘국민캐릭터’라는 천박한 표현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폭넓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덕택에 어떤 시에서 주민등록증도 부여받을 정도로 활용가치가 높은 가상적인 인기인이라면 나름대로 무언가로 불러줘야 할 법 하기는 하다. 워낙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전력질주하다 보니 여러 세대가 같이 즐길만한 공동의 무언가가 생겨나기 참 힘든 이 땅에서, 그런 국민캐릭터가 존재한다면 얼마나 보람찰까. 하다못해 부모세대가 자신들의 어린 아들딸들한테 문화적 취향을 즐겁게 자랑이라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 상에 가장 가까운 것을 억지로라도 하나 뽑아보라면, 열중 아홉은 분명히 한 만화캐릭터를 지목할 것이다: 아기공룡 둘리라는 녀석을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있다. 부모세대가 봤다는 아기공룡 둘리와, 지금 어린 아이들이 알고 있다는 그 아기공룡 둘리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부모는 아마 82년 보물섬에서 연재된 만화를 보았을 것이고, 87년 TV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된 스페셜을 보고 즐겼을 것이다. 지금의 아이들은? 아기공룡 둘리라는 캐릭터 이미지를 알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둘리의 배낭여행 DVD를 한번쯤 봤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하지만 둘리가 빙하타고 내려와서, 청승파 구박덩어리 더부살이로 시작했다가 점차 눈물겨운(?) 투쟁으로 하나씩 가족으로서의 위상을 얻어나간 과정을 공유하고 있을까. 집안의 가장 고길동이 애완동물 길동이 취급당하며 명랑만화식 환타지 모험길에 끌려다니고 겪는 고초에서 우러져나오는 서민적 페이소스를 같이 공감할 수 있을까.

글쎄, 모르겠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공감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작년 말부터 발간되기 시작한 <아기공룡 둘리 애장판>(김수정, 키딕키딕. 현재 3권 발매중) 덕분에, 이제는 적어도 이런 작품이라고 이야기를 건네볼 수는 있게 되었다. 이전에 나왔던 여타 판본들과는 달리, 이번 애장판에서는 드디어 작품 전체를, 양호한 인쇄품질로 만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작가와의 인터뷰 등은 반가운 보너스이기는 하지만, 작품 자체를 드디어 제대로 모아둘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마음은 풍족하다.

둘리를 동시대의 다른 명랑만화와 차별화시켰던 것들, 둘리를 둘리답게 만들어주었던 것들을 다시 한번 들춰본다. 라면 박스로 만들고, 오징어가 끌고가는 산타클로스 썰매. 은행을 건물채로 뜯어가는 엽기성. 타임코스모스를 움직이며 집주인을 애완동물로 아는 빨간 내복의 변태괴짜, 도우너의 충격적인 데뷔. 아 그래, 이런 것들이었지. 착할 겨를도, 교훈적인척하고 내숭을 떨 넉살도 없는 순수하고 직선적인 명랑함. 구석구석 찌들어 있는 생활의 무게와 그 향기까지. 기억이 돌아온다. 둘리는, 재미있는 만화였다. 귀여운 캐릭터이고 국민 어쩌고 이전에, 불온한 상상력으로 중무장한 도발적 개그였다. 둘리 만화가 완결된 이후의 90년대 이래로, 둘리의 이미지를 이어받아 재생산된 모든 여타 둘리 프랜차이즈에서 깨끗하게 도려내졌던 바로 그 부분이다. 지금은 마치 티본 스테이크 같이 포장되어 칭송받지만, 원래는 비계가 덕지덕지 끼어있는 구수한 삼겹살이었다. 바로 그 비계맛 때문에 둘리는 특별했던 것이다.

<아기공룡 둘리 애장판>은 지나치게 멋부리지 않아서 반가운 책이다. 물론 번들거리는 은색의 하드커버 표지는 확실히 이질감이 들지만, 상품을 고급스러워 보이게 하고싶다는 의도의 그 정도 오버는 그냥 대범하게 받아들여주자. 하지만 요새 아이들의 취향에 맞춘다고 공연히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 채색을 집어넣어서 풍미를 해치지도 않았고, 요즘 감수성에도 통할만하다고 자의적으로 선별한 소위 베스트 에피소드들만 골라 넣는 만행도 저지르지 않았다. 날림으로 대충 넘겨서, 완성도가 떨어지는 일화들일지라도 굳이 잘라내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원래대로 우직하게 내준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물론 작가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부족한 지점, 아쉬운 부분들이 많이 눈에 들어와서 몸둘바를 몰랐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정도는 독자들의 즐거움을 위해서 참아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소원이 이루어져 있다. 정말 별것 아닌것처럼 그대로 내는 것이야말로 ‘별 것’이다. 유능한 작가가 젊은 날의 가장 찬란했던 때의 에너지를 쏟아넣은 작품이 얼마나 멋진 빛을 발할 수 있는지, 감탄해볼 기회이기도 하다. 어설프게 멋진 작품을 보면, 작가가 이후의 이야기를 계속 그려줬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하지만 이 정도로 완성된 재미의 작품을 본다면, 작가가 제발 절대 이 작품에 화사첨족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물론 많은 것을 감수해야 한다. 우선 원래대로 나왔음에 반가워할만한 독자들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둘리는, 추억상품으로 포장하고 향수를 자극해서 어른 매니아들을 노리기에는 너무 지금까지도 이미지가 대중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좀 더 최신 유행을 따라 다니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 취향 속에 캐릭터 이미지로서의 귀여운 둘리는 있지만, 구박받고 청승맞으며, 동시에 기발한 역전의 칼날을 가는 80년대 정서 가득한 서민 둘리는 없다. 아니 그런 둘리는 아예 이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이 책을 사랑해준다는 말인가?

이 책을 사랑해 주어야할 사람들은, 좋은 만화를 보고 즐긴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지를 잊어버리지 않은 – 혹은 않았다고 자부하는 – 모든 이들이다. 좋은 만화는 취향은 탈 수 있지만 원형적인 재미를 간직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현실세계의 시간의 오랜 흐름에 따라서 시대적 맥락의 효과가 사라질 수는 있지만, 좋은 만화를 보다보면 그 맥락들이 다시 하나씩 머릿속에서 되살아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진정한 만화 즐김이들 말이다.  국민캐릭터 둘리가 아닌, 즐거운 만화 둘리로 다시 돌아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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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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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만화, 삶을 제대로 건드리다 – <휴머니멀> [기획회의 050404]

!@#… 언제나처럼, 이번에 발간된 기획회의의 원고. 박순구 작가의 작품들은 soon9.com 에 가면 연재를 볼 수 있다.

!@#… 여담. 비평 본문에서는 살짝 언급했고 그다지 이 작품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하드하게 엮어낼 필요성은 느끼지 않았지만, 가해자가 입은 피해에 대한 묘사방법이라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 물론 가해자도 궁극적으로는 가해/피해자를 만들어내는 시스템의 ‘피해자’고 어쩌고… 뭐 다 좋단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해자가 입힌 피해와 그 가해자가 입은 피해를 같은 레벨에서 다루어버리면 강력한 부작용 한가지가 생긴다: 가해-피해 관계에서 발생한 해악 자체가 희석된다 (주류 일본인들이 히로시마 원폭 타령할때 맨날 써먹는 비열한 방법 아니던가).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에게 동정을 던지기 보다는, 가해와 피해의 모순 자체를 부각시키는 성찰적인 접근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가해자에게는 가해자로서의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언젠가 다른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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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만화, 삶을 제대로 건드리다 – <휴머니멀>

인간은 자신을 여타 동물과 구분 짓기 좋아하는 신기한 동물이다. 그래서 인간적인 속성들에 대한 수많은 규정들을 마련해놓고는, 그것에 집착적으로 매달린다. 역설적으로, 그런 근거 빈약한 자존심의 결과 이야기로서 강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의인화’된 동물들의 이야기다. 동물들에게 인간적인 속성을 부여해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은 동물들과 꽤 근본적으로 다르며, 몇 안되는 공통점을 발견했을 때 그것이 대단히 빛나 보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는 것이다. 게다가 사실, 인간이라는 종족은 워낙 상상력이 빈약해서 자신들의 생활과 사회관계의 틀과 비슷한 모습으로 치환해서 보여주지 않으면 이야기로서의 재미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니까 말이다. 한쪽 측면에서는 의인화된 동물의 이야기가 우리와 의외로 닮았다는 것을 보면서 현실에 대한 풍자나 성찰을 느끼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동물 이야기로 표현되었다는 것에서 안도감을 느끼면서 부담감을 줄어든 채로 받아들인다. 한마디로 의인화된 동물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그것이 뻔히 우리 이야기인 줄 알면서도 기꺼이 남의 이야기인양 속아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미키마우스라는 쥐는 2차 대전 징병에 앞장섰고, 반대로 아트 슈피겔만의 <쥐>에 등장하는 쥐들은 아우슈비츠의 과거와 유산을 담담하게 뒤돌아보게 만들었다.

<휴머니멀>(박순구/황매)은 동물을 등장시켰지만 사실은 인간 이야기를 하겠다는 동물 의인화 계통 작품의 본질을 그대로 건드려 보겠다는 의지가 제목에서부터 물씬 풍겨나오는 작품이다. 휴먼+애니멀, 이 정도면 대단히 노골적인 포부다. 그 다음으로 궁금해지는 것은, 인간들 살아가는 모습의 어떤 부분을 뒤돌아보게 만들 것인가라는 점이다. 보통 의인화 동물 이야기에서는 친구들 간의 실랑이나 성격 다른 사람들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주로 구사하곤 한다. 그쪽이 훨씬 쉽기 때문인데, 거꾸로 이야기하자면 그만큼 얄팍한 수준에 머무를 가능성 역시 높다. 그런데 <휴머니멀>은 그보다 훨씬 우직하다. 그의 흰 생쥐는 이라크로 파병을 나가서 슬픈 최후를 맞이하고, 생쥐 마을에 온 침팬지 아저씨는 불법노동으로 연행된다. 비둘기는 교육현실에 갑갑해하며 탈출의 용기를 이야기하며, 수달들은 철거촌에서 쫒겨난다. 허투루 채우지 않고 진지하게 덤벼들었다는 점에서 우선 합격점을 부여하고 작품을 감상해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작품 자체의 알찬 구성과 치밀한 그림실력을 보며 이내 다시금 평가를 한 단계 더 높인다. 평평한 색감의 2차원에서 토실토실한 털 질감까지 자유자재로 오가며, 각각의 단편 스토리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그때그때 그림의 밀도를 조절하는 실력은 만화라는 매체에서 빛을 발한다. 원래 개인 홈페이지에서 웹 연재했던 칸구성을 책 형식과 잘 조화시켜서 출판물로서 깔끔하게 읽히게 만든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기술적 능력을 믿고 과욕을 부리지 않고 꽤 직선적으로 한 가지 이야기씩 정리해나가는 호흡이 좋다.

개별 작품들은 오랜기간 동안 자유롭게 하나씩 발표된 것들이다 보니, 하나의 주제로 완전히 엮여진다거나 혹은 모두 동일한 수준의 완성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게다가 각각 작품이 만들어졌던 시기적 맥락을 단행본에서는 전혀 밝혀주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런 지점들이 더욱 혼란이나 오독의 여지를 남길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이라크 파병반대라는 시기적 맥락이 상당히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는 첫 번째 이야기 <어느 흰 쥐 이야기>는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 전쟁의 비극을 감성적으로 그려내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 속의 한국군 이라크 파병이 어디까지나 가해자(의 친구를 빙자한 부하) 입장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그런 가해와 피해 사이에 있는 모순을 직시하지 않고 다소 평면적으로 접근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또 한 치와와 견의 마지막 비극적 사랑을 그린 <사랑합니다>라는 단편은 동물을 통해서 인간사를 바라본다는 이 시리즈의 전체 컨셉에서 볼 때 다소 이질적이다. 결국 우리들이 어떤 사랑하는 대상을 오매불망 그리는 것을 비유하는 느낌이라기보다는, 그냥 동물이 주인을 기다리는 ‘집 찾아간 백구’의 감수성에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하필이면 책표지에 인용된 두 작품을 위에서 언급하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이 책은 빛나는 순간들이 더욱 많고 돋보인다. 골목에서 술먹고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을 외쳐보는 팬더의 걸음을 따라가는 <당신의 골목은 어떤가요>는 동물 의인화의 매력을 극대화하고 있다. 느리게 어슬렁거리는 팬더의 움직임이, 이 작품에서는 취기와 실연의 슬픔이라는 감정을 부여받는다. 골목에 울려 퍼지는 미소와 눈물은 요새 유행어로 치자면 ‘백만불’ 짜리다. <나에게 쓰는 편지>에서 치매 걸린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눈작고 얼굴 비슷한 동물인 두더지를 활용한 센스는 절로 감동을 불러온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작품이자 가장 백미인 단편인 <고래가 되고 싶어요>에서는 철거민 이야기를 천연기념물인 수달에 비유해서 풀어나가고 있다. 어린이 그림일기를 통해서 묘사되는 어린이 시각으로 걸러진 현실과 진짜 현실의 비정함의 대비는 오세영의 걸작 <부자의 그림일기>의 적자로 견줄 수 있는 강력함을 발휘한다. 그리고 단지 우린 참 불쌍해요라는 논조가 아니라, 우리 집이  허물어지고 새 집을 짓는데 우리는 거기서 살 수 없다는 것의 부조리함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통찰이 녹아들어가 있기에 더욱 값지다.

수많은 에세이툰이니 감성만화니 하는 것들이 항상 인간성을 이야기하고 따스함을 주장한다. 그러나 진짜 인간성과 따스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말랑말랑한 감성의 달콤한 조미료에 도취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살아가는 세상의 현실이라는 ‘진국’에 대한 직시다. <휴머니멀>이 한참 에세이툰이 붐을 이루었던 2-3년 전에 나왔더라면, 이쪽 장르는 아마도 지금보다 수십배 더 좋은 방향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뭐, 사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휴머니멀>의 파급력이 널리 퍼져서 많은 독자들이 감성만화에 대한 새로운 – 아니 애초부터 근본적이었던 – 즐거움에 눈뜨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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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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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등한 만남을 위하여 – <오세영 한국 단편...> [기획회의 050320]

만화와 소설, 대등한 만남을 위하여 – <오세영 한국 단편소설과 만남>

공식기관에서 ‘명작’ 한국 만화를 꼽아야 할 때마다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품이 있다. 대중적인 인기로 세상을 휘어잡은 것도, 희대의 컬트로 숭배받은 것도 아닌데 거의 예외가 없어서, 최근 프랑크푸르트 도서박람회를 위해 선정된 100대 도서에도 한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오세영의 <부자의 그림일기>라는 작품집이다. 80년대 <만화광장> 류의 성인만화잡지에서 발현되기 시작했던 진지한 사회발언과 만화양식의 가능성에 대한 추구가 꽃을 피웠던 모범사례중의 하나가 바로 당시 창작되어 나왔던 오세영의 단편 작품들이었다. 성인만화를 휩쓸던 리얼리즘 풍 이야기와 민중문화 담론 에서 열심히 주장해온 민중적 시각의 사회참여의식 등 다양한 시대정신의 영향을 소화해낸 작품들이었던 것이다. 90년대 초에 묶여져 나온 이 작품집에서 또하나 즐거운 발견은 바로 월북작가 단편소설 작품선이었다. 두고두고 오세영의 최고작 중 하나로 인용되고 있는 안회남 원작의 <투계> 등이 특유의 집요하게 토속적인 화풍으로 펼쳐졌던 것이다.

최근 <오세영 - 한국 단편소설과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이러한 단편소설 원작의 오세영 만화 단편들을 묶어낸 작품집이 출간되었다. 마치 수록 작품들의 문학적 권위를 형상화라도 하는 듯, 한 권의 묵직하고 커다란 800페이지짜리 하드커버 양장본으로 나와서 책장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작품들은 <부자의 그림일기. 작품집에도 실렸던 월북 작가 단편선, 이후에 작업되어 단편문학선이라는 시리즈로 나온 바 있는 여러 작품들이 고루 집대성되어 있다. 그 중에는 <메밀꽃 필 무렵> 같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원작도 있고, 문학 전문서 귀퉁이에서조차 찾기 힘들었던 것도 (예를 들어 월북 작가) 많다. 이 책에서 원작으로 선택된 작품들은 주로 1900년대 전반의 단편소설에 집중되어 있는데, 생각해보자면 그 당시 많은 작품들이 바로 고된 사회적 현실 속에서 살아나가는 민중들의 삶을 비정할 정도로 생생하고도 비극적으로 그려냈던 경향이 있었다. 바로 80년대식 리얼리즘/민중문화와 일맥상통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런 감수성을 확실하게 재현하고 싶은 작가적 욕구에 충실하게, 오세영이 재창조한 만화들은 적극적인 재해석보다는 충실한 재현에 무게를 두고 이루어진다.

원작에 있는 대사는 토씨 하나 생략하지 않고 그대로 재현해내는 것이 기본이며, 각 장면의 풍광이나 캐릭터들의 생김새와 행동거지 또한 대단히 자연스럽다. “쇠똥을 그릴 줄 아는 작가”, “할아버지를 할아버지 처럼 그리는 작가” 등의 찬사 처럼 시각적 장면묘사의 충실함은 특히 한국의 근대나 토속적인 풍광을 보여주는 이야기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원작자가 소설에서 묘사한 것 보다도 더욱 원작같이 느껴질 정도로 그 작품들의 원작 충실도는 대단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들이 사진집이나 영화 스틸컷 모음 같은 느낌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88올림픽 전후를 무대로 하는 단편 ‘부자의 그림일기’에서 선보인 그림일기 + 무성극 만화의 교차편집이라는 형식실험이 보여주었듯, 오세영은 만화형식의 장점을 적극 활용하는 것에 결코 문외한이 아니다. 칸 간 시선흐름을 고려한 화면구도라든지, 극적 긴장감을 높여주는 만화적 전개방식 등은 원작소설 만화화 작품에서도 충분히 사려깊게 활용되고 있다. 다만 원작의 유려한 흐름에 거스르지 않도록 명백하게 파격적인 쾌감을 극도로 자제할 뿐이다.

이 작품들에서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하기로 작정한 접근의 장점은 명확하다. 문학적 평가가 높은 소설들을 애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적당히 마음대로 단순화시켜온 대다수의 ‘명작만화’ 류들이 쌓아온 만화에 대한 편견을 무너트리는 것이다. 문학이 진화의 과정 속에서 쌓아온 섬세미묘한 다층적 의미와 감성의 서술구조들을 과연 만화에서도 해낼 수 있을까라는 폄하는 ‘투계’ 같은 작품을 보면 확실히 날려버릴 수 있다. 영화화 등 다른 매체이식에서 항상 문제시되는 원작의 문제의식이나 감수성의 왜곡이라는 부분 역시 이 정도의 재현 충실성 앞에서는 내밀 자리가 없다. 그렇다면 단점은? 쉽게는 ‘독자적인 해석이 들어가지 않았으니 그 작가의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는 식의 단순한 비난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원작의 선정에서 이미 작가의 자의식이 개입되고 충실한 재현이 바로 창작의 의도라면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다. 단점으로 제기할 만한 보다 중요한 지점은 이 책에 묶인 작품들이 상당수가 90년대 및 그 이후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80년대의 작품 또는 당시의 문제의식에 기반하여 만들어내는 작품들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리얼리즘이나 민중문화 개념이 항상 강조해온 것이 바로 현실참여이라는 측면을 놓고 생각해볼 때, 오늘날의 세상과 문제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80년대식 경향의 프리즘으로 투과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동시대적인 문제의식이라는 척추가 빠지고 ‘순수문학’의 예술지향적 자아도취에 빠질 위험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그것이 바로 작품에 투여된 노력과 재능이 생명력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진짜 고민이다.

앞서 말했듯, 책의 출판상태는 그야말로 성의있는 프로듀싱의 결실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만화책들은 각각의 실제 내용에 어울리는 책 모양새가 아니라 일괄적인 저가 대중오락물의 모양새라는 틀을 강요당했다. 자가 대중오락물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만화의 폭넓은 세계를 그 범주안에 다 우겨넣을 수 있을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오세영 작품집은 고전 문학의 깊이와 만화작품의 진지한 접근의 무게에 걸맞는 무게의 책으로 나왔기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옥의 티는 오히려 과잉 프로듀싱이라는 부분인데, 말미에 순 우리말 용어에 대한 해설집을 첨부한 것은 좋지만  본문내용에 각주표를 달아서 독서의 흐름을 끊기게 했다든지 하는 등의 과유불급성 결과가 여기에 속한다.

이 책은 소설 원작 만화 작품을 모은 만화책이다. 하지만 소설을 읽기 싫어서 쉽게 슬쩍 줄거리만 훑어보려는 게으름증을 해소하기 위한 만화들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오히려 소설을 읽어보고 그것을 만화로도 다시 한번 읽어보거나 또는 반대 순서로 읽어서, 그 감상을 증폭시키기 위한 것에 가깝다. 만화와 소설의 대등한 만남, 그리고 독자에게는 그 화학작용에서 오는 몇갑절로 증폭된 감상을 주기 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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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