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는 자들에 관하여: <로또 블루스>[책속해설]

!@#… 최근 출간된 변기현 단편집 <로또 블루스> 책내 서평. ‘이쪽 계열 작가들’에 대해서는 이래저래 선호가 좀 있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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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가는 자들에 관하여: <로또 블루스>

김낙호(만화연구가)

대중 오락문화로서의 만화는 종종 “현실도피”라고 폄하되고는 한다. 하지만 이 분야가 누려온 폭넓은 인기를 상기해볼 때, 아마도 사람들은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무척 꿈꾸고 있음이 틀림없다. 때로 그 도피행은 장미빛 희망으로 가득한 가상세계로 향하거나, 소심한 현실에서는 엄두도 못낼 멋진 모험 이야기로 귀결된다. 하지만 만약 압박을 주는 현실과, 그것으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하는 도망자의 모습 그 자체에 집중한다면 어떨까. 도피는 현실에 대한 외면이 아니라, 어떤 가상적 비유를 통한다고 할지라도 결국 독자들로 하여금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변기현의 만화에서 반복적으로 채용되는 모티브는, 도망치는 주인공이다. 커다란 시스템의 아래에서 오랫동안 충실하게 ‘적응’하며 살아왔던 듯한 주인공이 있다. 요쿠르트로 감정을 통제하는 도시든(요쿠르트 도시의 사랑), 식용인간을 길러내는 가상세계든(FOOD), 위선적 착실함을 강요받는 교회든(로또 블루스), 과장된 남녀 연예관계든(레이디 앤 젠틀맨) 말이다. 그런데 그는 어떤 작은 계기를 통해서 자기 생활세계의 이상함을 느낀다. 결코 근본적이고 대단한 깨달음은 아니지만, 마치 선악과를 탐하고 낙원에서 추방된 인류의 조상들 마냥 이제는 더 이상 그 시스템 속에 속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도망친다. 하지만 그것은 시스템에 대한 반항이라든지 개혁을 위한 내딛음 보다는,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에 가깝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기현의 단편들을 단순히 염세적이라고 치부하기는 적합하지 않다. 여하튼 살아남고자 달려가는 사람들의 생명력 덕분이다. 주인공들의 도피 자체가 적어도 독자들에게 만큼은 삶의 의지이며 희망이 되어 주는 것이다. 아니 그런 거창한 결과까지 굳이 가지 않더라도, 적어도 자기 자신의 “도망치고 싶어질 정도의 현실”에 대해서 한번 더 성찰할 수 있는 기회 정도로는 충분하다.

이 책은 변기현의 여러 단편들을 모아놓은 작품집이다. 발표맥락의 편차가 있기 때문에 서로 이질적인 느낌도 있고, 가끔 표현이나 이야기솜씨가 덜 다듬어진 구석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최근 발표작으로 올수록 빠른 속도로 자기 작품색과 세계관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 모습을 명확하게 각인시키고 있으며, 이미 ‘유망주에 대한 기대’라는 수준을 가볍게 넘어선다는 점이다. 변기현의 작품들은 찰나적이고 인공적인 에피소드들 또는 진부한 대중문화 코드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환타지 세계가 지배하는 젊은 만화 창작 풍토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그렇고 그런 세상에 대한 세밀한 관찰을 극화풍의 이야기로 풀어나간다.

극화풍 이야기를 이끌어나가기 위한 중요한 도구는 역시 극화풍 그림체다. 변기현의 그림은 동글동글한 미형 캐릭터들이 얄팍한 감성을 설파하며 돌아다니는 근래의 유행과는 궤를 달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80년대 극화마냥 경직되어 있는 모습이 아니라, 거칠게 과장된 듯한 모습 속에 숨어있는 탄탄한 기본기와 확고한 세련됨을 갖추고 있다. 그가 묘사하는 인간군상은 표정이 살아있으며(특히 좌절과 난감한 상황에서 일그러지는 모습이 일품이다), 그렇기에 담담한 무표정의 순간 속에서마저 확실한 감정상태, 즉 내면의 이야기가 전달된다. 다양한 시선 각도라든지 역동적인 칸 진행 역시 이러한 바탕 위에서 비로소 자유롭게 춤을 춘다. 작품마다 조금씩 다른 필체와 채색방식을 시도해서 극의 흐름에 가장 적합한 시각연출을 찾아나서는 모습 역시 이 젊은 작가의 만화에 대한 집념을 가늠하도록 해준다.

비록 작품집으로서는 첫 출간이지만, 변기현은 이미 최규석, 석정현 등 일련의 젊은 작가군과 함께 극화의 새로운 물결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스타일리쉬한 화풍을 구사하면서도 단순한 시각적 실험에 빠지지 않고 이야기의 서사성을 고집하며, 만화 특유의 시각적 비유를 애용하면서도 리얼리즘적 흐름을 놓치지 않으며, 신랄한 현실을 이야기하면서도 블랙코미디의 유희성을 버리지 않는다. 이 만화들은 이전 세대 리얼리즘 극화의 모습들을 단순반복하지 않고, 일본 장르만화들과 인터넷 만화들과 시각실험들이 난무했던 90년대 이후의 만화유산들을 고스란히 흡수 및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리얼리즘 사조를 강하게 연상시키는 감수성을 중심축으로 하되 그 방법에 있어서는 문자 그대로 혼합적인, “하이브리드 리얼리즘” 만화라고 감히 부를 수 있을 듯 하다(아마 후세의 사람들이 좀 더 적합하고 매끄러운 명칭을 새로 발명해주리라고 믿는다). 만화가 지니는 본연적인 혼합성과 자유로움을 정면으로 소화해내고자 하는 이들의 시도에 좋은 결과가 오기를 바란다. 사실, 이미 좋은 조짐이 넘실대고 있는 셈이다.

말이 길어졌지만 어차피 이미 작품들을 모두 감상한 후, 말미에 한번 곱씹어보기 위한 글에 불과하다. 이런 글은 닫아버리고, 다시 한번 변기현의 ‘야쿠르트’와 ‘로또’와 ‘닭다리’의 세계로 돌아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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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의 조건 – 이와아키 히토시의 <히스토리에> [기획회의 050605]

!@#…지난호 기획회의. 우연찮게 비슷한 시기에 씨네21(507호)에서도 리뷰가 올라왔던데… 비교하며 읽어봐도 재밌을지도.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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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의 조건 – 이와아키 히토시의 <히스토리에>

꽤 옛날, 한 왕이 있었다. 그 때 왕들이 의례 그렇듯이, 어디론가 남의 땅에 들어가서 말달리고 싸우고 이김으로서 ‘정벌’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뭐가 그리 속에 불길이 타올랐는지, 정벌을 하고 나서 그 다음 그곳을 지배하고 가꾸는 것에 큰 신경을 쓰지 않고, 곧바로 다음 목적지를 향해서 나아갔다. 정벌하고 정벌하고 또 정벌한 결과, 어느틈에 지중해 연안에서 아시아 전역을 다 휩쓸고 다녔다. 뭐 그러다가 결국 죽었지만, 그의 정벌 자체에 대한 그 무한한 집착과 성과는 어째서인지 후세에서 높이 평가받아,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불렀다. 여하튼 그저 끊임없이 정벌을 반복하는 모습은 단순한 권력이나 지배욕과도 뭔가 다르며, 오히려 마치 병정개미와도 같은 순수한 본능에 가까워 보일 정도다. 그 과정을 바로 옆에서 냉정하게 지켜보는 입장이라면 어떨까? 사회적 명분을 뒤로 하고, 사실상 생물학적 특성인 듯한 그 행위들을 주욱 따라간다면 무슨 느낌이 들까.

알렉산더의 파란만장한 시대를 다루는 만화 <히스토리에>(이와아키 히토시 / 서울문화사 / 2권 발행중)의 주인공은 특이하게도 알렉산더 본인이 아니라 그의 개인 서기관이었던 에우메네스다. 에우메네스는 서기관이라는 입장에서 알렉산더의 기행(奇行)을 지켜보았으며, 총명한 두뇌와 리더십을 바탕으로 알렉산더 사후에 군대의 전권까지도 얻게 되는 인물이다. 물론 완전히 돋보이기 전에 결국 배신당해서 사망하지만, 확실히 특이한 경우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이와아키 히토시라는 작가가 과연 누구였던가. 인류가 사실은 생태학적으로 문제가 많은 종족이며, 그래서 먹이사슬을 복원하러 정체불명의 포식자들이 나타나서 인간의 몸에 기생, 인간으로 둔갑하여 들어간다는 충격적인 세계관으로 90년대 고품격 일본만화의 정점을 이루었던 <기생수>의 작가다. 그 작품에서 중요하게 사용되었던 모티브는 인간 바깥의 시선으로 인간을 냉철하게 바라보건데, 사실 인간이란 것이 별 것 없을 수도 있다는 섬뜩한 관찰담이다, 말도 안되지만 너무나도 순수할 정도로 직선적이고 본능적인 기행을 냉정하게 목격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에우메네스에게 그 접근법과 문제의식이 그대로 계승된다.

그 문제의식이란 바로 인간됨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히스토리에> 초반의 배경이 되는 고대 그리스권 도시국가들을 아크로폴리스니 민주주의의 시발점이니 하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모든 시민은 평등하지만, 시민이라는 계급은 전혀 평등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민의 성숙함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은 그들과 다른 종족들을 바바로이(야만인)라고 부르며 폄하하며 노예로 삼아버렸다. 여성과 아이는 물론 정치적 참여권을 가진 일반 시민이 아니며, 게다가 혈통이 중시되었다. 그런데 그렇다면 바바로이와 문명인의 경계, 즉 시민과 노예의 경계는 도대체 얼마나 명확한 것인가. 사실 전혀 명확하지 않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일 뿐, 그리 선천적이고 절대적인 기준 따위는 없다. 그것은 바로 인간적이라고 부르는 성숙함의 경계선 역시 사실 별 것 아니라는 이야기와도 같다. 그럼에도 자꾸 자신들을 ‘인간’으로 자처하게 만드는 이성과 감성의 기준을 만들어 내며 자족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하지만 이성과 감성에 우선하는 것은 바로 생물로서의 본능 그 자체다. 그 중 하나는 개체의 생존본능, 또 다른 하나는 그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정복이나 복수 등 외적 공격성향이다. 고리타분한 고대 모험담이나 신화 섞인 전쟁이야기나 나오기 쉬운 이 시대와 역사를 배경으로, <히스토리에>는 인간에 대해서 논한다. <기생수> 당시보다도 더욱 진하고 집요하게.

인간(들)의 본질을 캐내기 위하여, 바깥의 자가 인간 활동 패턴을 관찰한다는 감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캐릭터들의 무심한 표정 덕분이다. 사실 이 작가는 그다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만한 팬시 느낌 강한 미소년 미소녀를 묘사하지도 않을 뿐더러, 표정묘사 역시 지극히 부족하다. 아니 사실 데생이나 그림체 자체가 뭔가 ‘끌리는 맛’이 부족하다. 하지만 지금 기준에서 지극히 야만적이고 잔인한 제도들을, 당연한 문명의 꽃으로 인정하고 있는 이쪽 세계의 괴리감에는 그런 멍하고 무표정한 모습들이 오히려 확실한 효과를 준다. 그에 비해서 일반적인 연출방식은 대단히 완성도가 높아서 긴장 넘치는 복선은 물론, 난데없는 상황 반전 내지 급진전이라는 강력한 작품 통제력을 자랑한다. 특히 트라쿠스가 오랜 노예생활에서 풀려나서 햇살을 움켜쥘 듯 하늘에 손을 대는 희망의 모습과, 바로 그 다음 두 페이지를 장식하는 강렬한 죽음의 이미지의 대비는 이 만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시각 연출의 백미다.

항상 그렇듯이, 티 없는 옥은 없다. 예를 들어 작품에서 필요 이상으로 자주 등장하는 잔학성은 작품의 내적 리얼리티와 ‘인간이란 게 다 그런거지’ 식의 시니컬한 메시지를 잘 살려주지만 독자층을 좁게 만드는 요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히스토리에>의 경우 가장 큰 잠재적 문제는 연재 작업 그 자체다. 일본 현지에서도 월간지 연재작인터라 단행본 발간주기에 특별히 연연할 것은 아니지만, 우선 내용 전개가 확실히 느리다. 현재 발간된 2권까지의 분량에서는, 에우메네스의 현재 모습과 유년기 경험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아직 알렉산더의 부하로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게다가 장편시리즈이기 때문에 엿가락 늘리기식 지속을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요소까지 겹치면, 정말 난감해진다.

사실 말이 옥의 티지, 사실은 투정이다. 더 빨리 더 많이 에우메네스의 모험담을 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라서 그런 셈이다. 그 멍한 청년과 함께,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 논하고 싶다. 에우메네스는 모르겠지만, 사실 작가는 이미 자신의 견해를 꽤 명확하게 표출을 해버리고 있다. 2권 마지막 페이지, 어린 에우메네스가 감정과 생존본능의 무게중심을 비견하여 결론에 도달하는 대목을 보며 작가에게 마음 속으로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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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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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우리나라 – <조선왕조실록>[기획회의 050605]

!@#… 이번 월간 인물과 사상에 쓴 <만화 박정희> 글(발간 후 올릴 예정)과 다소간 이어지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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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우리나라 – <조선왕조실록>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나라의 정권을 잡는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크게 신기할 것도 없는 노릇이다. 권력의 가장 물질적인 형태는 바로 무력이고, 그 무력을 손에 쥐고 있는 자가 서서히 나머지 권력 형태들을 갈구하여 어느날 갑자기 실력행사에 나선다는 시나리오는 동서고금 막론하고 항상 있어왔던 이야기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 사람들이 너무 쉽게 생각하는 말이 하나 있다: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하리라”. 이 말은 어디까지나 무력의 폭풍 앞에 억압당한 불쌍한 우리네 중생들을 위한 위로의 한마디일 뿐이다. 칼로 일어선 자가 칼로 망하리라는 보장 따위는 어디에도 없으며, 행여나 망한다 할지라도 이미 충분한 권세를 누린 다음에 망하는 경우가 사실은 더 많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칼로 일어난 자를 사후에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도 한다. 별로 정당화할 구석이 없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구국의 결단’이니, ‘그래도 덕분에 경제는 살아서 밥은 굶지 않게 되었다’, ‘각하는 청렴하신 분이었다’는 등의 사실검증과는 상관없는 어거지 신화들을 마구 동원한다. 물론 권력을 잡은 자가 스스로 그런 프로파간다를 실시하는 경우도 많지만, 사실 더 중요한 점은 그들의 아래에서 권력의 대상이 되었던 백성들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어느 틈엔가 그것을 인정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권력에 복종을 하며 살아왔던 자신들의 정체성에 혼란이 오니까(심리학에서 ‘인지부조화이론’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그것이 약간 오버를 하면, 하나의 종교와도 같은 신념이 된다. 아주 단순한, 권력의 생리다.

박정희 이야기를 시작하자는 것이 아니다. 약간 더 – 한 500년 정도는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한 군인이 있었다. 그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기존의 나라를 뒤엎고 새 왕이 되었다. 그리고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뿌리도 뭣도 없이 왕 노릇을 하면 분위기가 좀 거시기해지기 때문에, 고려 후기에 원나라의 관리 노릇을 한 그의 고조를 시작으로 해서 ‘조선왕조’를 상정했다. 그리고 그의 자손대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왕조의 역사를 주욱 묶어내서 만든 기록이 바로 그 유명한 ‘조선왕조실록’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5권 발매중, 휴머니스트)은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만화로 된 현대적인 화답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갖가지 일화들과 큰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현대의 독자들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적절한 현대적 비유와 그것을 만화적 연출로 버무리는 솜씨를 발휘한다. 진지한 내용과 독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대화 건네기, 그것을 딱딱하지 않게 감싸는 유머감각. 그리고 그 속에 명확하게 묻어나오는 작가 자신의 역사와 사회에 에 대한 시각.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를 베스트셀러로 만들어주었던 장점들을 이 작품 역시 고스란히 갖추고 있다. 해외문물에 대한 소개라는 화제성과 보수/수구적인 가치관과는 달리, 자세히 알든 말든 우선 사람들이 지겨워하고 보는 한국사 이야기라는 약점과 진보적인 가치관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조선왕조의 역사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그 속에서 벌어진 일들 이상으로 무척 흥미롭다. 작가는 그 역사가 권력의 암투를 통해서 진행되는 정치사라는 뚜렷한 줄거리를 읽어낸다. 그 정치과정 속에서는 구악을 멸하지 못하여 뒤통수를 맞는 이야기, 힘의 흐름에 따라서 철새짓을 반복하는 군상들, 무력과 모략의 미묘한 결합, 다툼의 속에서 가장 먼저 증발해버리는 신뢰와 사상, 민생 따위의 가치들 등, 무척 친숙한 테마들이 잔뜩 버무려져 있다. 역사가 의미 있는 것은 그것이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라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조선왕조의 역사는 바로 권력의 거울이다. 한국사를 다뤄온 다른 어떤 만화보다도 권력의 생리를 입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것은 바로 현재의 모습과 닮아있다. 멀게만 느껴졌던 ‘조선’이라는 사회가,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곳이 된다. 먼나라, 우리나라인 셈이다.

특정 인물이나 정파에 대한 일방적인 편들기도, 양비론적 패배주의에도 빠지지 않는 절묘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은 작가의 오랜 신문시사만화 경력 덕분인 듯 하다. 혹은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원작 자체가 가지고 있는 풍부함 역시 작용했을 것이다. 권력의 작용 뿐만 아니라, 시대적인 사회상과 민중의 동향 등 총체적인 해석을 통해서 조선 역사를 단순한 탐욕스러운 개개인들이 벌이는 궁중드라마로 격하시키지 않은 점이 바로 이러한 두 가지 배경이 합쳐졌을 때 나올 수 있는 미덕이다. 그림체 및 시각연출 방식 역시 지나치게 설명조도, 지나치게 설명이 없어서 불친절할 정도도 아닌 균형을 맞추고 있다. 선은 명확하며 단순하고, 극적인 과장이나 섬세한 세부묘사에 빠지는 일 없이 가장 필요한 만큼의 정확한 장면묘사를 일삼고 있다. 물론 등장인물이 워낙 많다보니 캐릭터들이 간혹 서로 헷갈린다거나 하는 문제도 있지만, 이만하면 ‘양반’이다.

이 시리즈는 워낙 장편으로 기획되어 있고, 이제 한 고비를 넘겼을 뿐이다. 비록 간혹 스케쥴이 삐걱거리고 있지만, 용케 마지막 권까지 무사히 나와 줬으면 하고 바란다. 벌써 이 정도 수준의 1부라면, 마무리되는 것만으로도 이미 박수를 받아 마땅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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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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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딱뚝딱, 인권을 짓다 – <뚝딱뚝딱 인권짓기> [으뜸과 버금 0505]

!@#… 이런 주말은, 밀린 투고문들 올려놓는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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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딱뚝딱, 인권을 짓다 – <뚝딱뚝딱 인권짓기>

이미 널리 알려져 있듯이, 만화는 정보전달에 있어서 효과적이다. 그렇기에 한국전쟁 당시 남북이 서로 뿌려댔던 삐라에 만화가 난무한 것이고, <먼나라 이웃나라>가 일종의 세계화 시대 교과서로 장기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신문만평들이 정치 칼럼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힘은 종종 잘못 평가되고는 하는데, 단지 만화로 하기만 하면 그런 좋은 효과들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착각이다. 다른 어떤 분야라도 마찬가지이듯 결국 어느 정도 이상으로 잘 만든 만화가 효과적인 것이지, 그냥 아무렇게나 만들어도 단지 만화이기 때문에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관심의 손길을 당기지만 결국 허접한 품질 때문에 오히려 쓴웃음만 짓게 만드는 수많은 국정 또는 기업 홍보 만화들을 생각해보라.

인권이라는 분야가 있다. 소위 ‘개발 독재’라는 명목하에 자신들에게 부여되었던 말도 안되는 억압을 오히려 그리워하는 이상한 변태피학성 체질을 지닌 사람들이 많은 어떤 이상한 나라에서도, 특히 90년대말 이후로 이 화두가 꽤 주류적인 담론으로 떠올라 있는 상태다. 인권운동가들의 오랜 끈기 있는 노력을 바탕으로, 정치 사형수 출신 대통령이 주도한 인권위원회 설립으로 본격화된 이 움직임은 무척 긍정적이다. 하지만 항상 부딪힐 수 밖에 없는 문제가 하나 있으니, 바로 인권 개념 자체의 난해함이다. 인권이 하나의 궁극선으로 추구되어야 한다는 이념은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지만, 그 인권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가, 무엇이 인권을 침해하는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도 어렵다. 범위도 넓을뿐더러, 우리 일상생활 속에 뿌리 깊게 침투해 있는 – 특히 인권을 사치로 여기는 기이한 사회가 수십년간 유지되어 오는 통에 완전히 세뇌 당해버린 내면적 파시즘을 직면시키는 작업은 엄청난 대장정을 요구하고 있다. 어렵다. 설명과 교육으로 계도해야 하는 부분이 많다. 쉽게 이해시키기 어렵다. 자, 그럼 이제 해결사가 나타날 차례다. 바로, 만화다. 그렇게 해서 이미 인권위원회에서 기획한 인권 관련 만화 단편모음집 <십시일반>(창작과 비평, 2004)이 탄생해서 다소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이제, 좀 더 본격적으로 인권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차례다.

<뚝딱뚝딱 인권짓기>(인권운동사랑방 글, 윤정주 그림/야간비행)가 바로 그런 책이다. 부제인 ‘만화 인권 교과서’가 표방하는 포부 그대로, 인종주의, 장애우 차별 문제, 빈부격차, 성차별, 평화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가장 날것 그대로의 문제의식을 풀어낸다. 월간 <고래가 그랬어>에 연재된 분량 가운데 13개 주제를 묶어낸 것인데, 각 주제는 얼핏 거창해질 수 있는 인권 이슈들을, 우리가 지극히 일상적으로 보고 듣는 생활 현실 속에 잠복해있는 모습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이끌어낸다. “장애인 인권을 보장하라!”라는 거친 구호가 아니라, ‘작게 낮게 느리게 함께 걸어요’라는 권유를 하는 모습이 바로 이 만화의 절대적인 미덕이다. 독자대상층은 초등학생 정도에 맞추어 문체와 그림체 등을 조절했는데, 어른들도 전혀 무리없이 독자층으로 포섭할 수 있을 정도의 깊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작품이 가능한 것은 역시 인권운동 사랑방이라는 이 분야 최강의 베테랑 집단이 작품에 들어갈 내용을 조율했기 때문이다. 인권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나 감상적인 공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왜, 어떻게, 앞으로 무엇을’이라는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방향을 제시해온 이들의 내공이 담겨있다.

물론 좀 더 만화로서 재미있는 서사를 추구했으면, 좀 더 세련된 표현기술들을 구사했으면 하는 자잘한 아쉬움은 여럿 있다. 하지만 그것은 100점에서 99점으로 감소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은 초등학생 자녀에게 줄 수 있는, 혹은 자녀를 핑계 삼아 부모들이 사서 직접 읽는 선물로서 최상의 아이템이다. 부디 이 ‘만화 인권교과서’가 진짜 교과서가 되어서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해주었으면 한다.
[으뜸과 버금 2005.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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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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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의 본연으로 – <버추얼 그림동화> [기획회의 050516]

동화의 본연으로 – <버추얼 그림동화>

한국에서 동화(童話)라고 불리우는 일련의 이야기들은, 사실 원래는 그다지 아이들이라는 특정한 대상을 위해서 만든 이야기라고 보기 힘들다. 민담과 신화들이란 것은 애초부터 인간사의 여러 모습들에 대한 비유로 가득차 있고, 당연히 성적이든 폭력적이든 미성년자 관람불가일 법한 내용이 많을 수 밖에. 사실 한발 더 나아가서, ‘어린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의 발명품이라는 것도 지금쯤은 이미 정설로 굳어져있다. 일정한 나이를 정해놓고는 그 이하의 사람들을 일종의 사회적 온실 속에서 보호받아야 할 종자로 취급하는 행태가 고래부터 항상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간혹 사람들은 ‘동화’라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세상살이의 회한을 깊이 담고 있는 잔혹한 이야기들인지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고는 한다. 그 때 흔히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현대적인 ‘어린이’ 개념을 애써 도입해서 모든 사회적 요소들, 잔혹한 표현, 성적 뉘앙스 등을 억지로 거세시켜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 결과 동화는 무척 재미없어질 뿐만 아니라 핵심 메시지까지도 퇴화해버리지만, 그 빈 자리에는 꿈과 낭만, 보수적인 가족 이데올로기, 귀여운 동물 캐릭터들을 적당히 끼워넣는다. 다른 방법은, ‘알고 보면 잔혹한 동화’ 투로 선정적인 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다소 변태성 악취미에 가까운데, 원래의 동화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쇼킹한지를 가지고 오히려 상업화를 시켜서 성인독자를 노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동화의 본연의 목적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우리가 사는 지금의 현실에 대한 교훈을 얻는 것이다. 먼 동화속 유럽 나라의 신데렐라가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 속에서 벼락출세를 꿈꾸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동화는 멍청하지 않다. 권선징악에는 댓가가 따르고, 어떤 억울함도 100% 해소되는 일 따위는 없다. 이해관계의 충돌과 약육강식이 선악의 모습으로 치환될 뿐이다. 교훈은 제3자들의 낭만적인 이야기 속에서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대한 이입을 통해서 삶을 대처해나가는 힌트를 얻음으로서 얻어낸다. 이런 요소들이 빠진다면, 동화는 그 잘못 붙여진 이름 그대로, 온실속 아이들을 위한 싸구려 엔터테인먼트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강경옥의 <버추얼 그림동화>(콘텐츠와이드/2권 발매중)는, 이러한 동화 본연의 목적의식이 잘 살아있는 작품이다. 이미 여러 단편들을 통해서 상상 속 세계와 가상의 설정을 통해서 현실의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져온 작가이기에, 이런 류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사실 당연한 행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80년대 이래로 작가가 계속 관심을 보여온 ‘무덤덤한 주인공이 감정을 획득해나가는, 또는 무의식적으로 외면/봉인하고 있던 감정을 재발견해내는 과정’의 이야기라는 소재가 결합하면서 이 작품이 완성된 것이다.

내용은 에피소드 방식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주인공들이 어떤 수상한 가게에 들러서 가상현실 기계로 특정한 동화 내용을 직접 등장인물이 되어 체험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현실세상에서 일어났던 문제점들을 직시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매번 주인공은 달라지고 그들의 사연과 경험하게 되는 동화 역시 바뀌지만, 변함없는 것은 가게주인 뿐이다. 이들이 겪게 되는 동화는 우리에게 친숙한 작품들이면서도 왠지 현실적인 설정들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정도의 이야기다. 아예 과격하게 인물들을 통째로 재해석을 해버리는 것 없이, 그냥 은근하게 친밀하다. ‘라푼첼’이야기라든지, ‘푸른수염’이라든지 말이다.

매번, 동화 속 인물들의 관계와 행동거지는 주인공이 현실에서 고민하고 있는 그 사람들의 관계와 유사하다. 그것을 반영해주면서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진짜 감정을 끄집어내서 직면하게 만든다. 주인공은 자신이 실제 그 등장인물이 아니고 단지 가상의 체험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처지를 그대로 경험하면서도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그리고 물론 동화속 해피엔딩이 항상 현실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확실한 선을 그어주고 있지만, 작품 속 주인공들에게 나름의 교훈을 주기에는 충분하다. 주인공들은 동화를 통해서 현실도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히 자신의 처지를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현실 속에서 그 교훈을 실천하기 위해서 충만한 마음으로 가게를 나선다. <버추얼 그림동화>의 동화체험은, 사실상 전형적인 심리치료 과정에 가까운 것이다. 특히 트라우마와 불안, 우울 증세 등에 대한 치료적 접근에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다. 잔혹동화의 탈을 쓴 심리치료 만화인 셈이다.

2000년대 들어서 주로 과거 작품의 복간에 머물 뿐 확실한 신작 장편이 나오고 있지 않아서 독자들을 아쉽게 했던 한국 순정만화계의 중견인 강경옥의 복귀작으로 이 작품은 썩 만족스러운 편이다. 엄청난 혁신을 가지고 왔다기 보다는, 강경옥 만화가 너무 낡지 않은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물론 단점 역시 원래 성향 그대로다. SF의 외피를 쓰고 있으면서도 실제 우주선이나 물리학적인 개념에서는 팬들을 안타깝게 만들고 말았던 <별빛속에>의 악명(?) 그대로, <버추얼 그림동화> 역시 디테일에 대해서는 무척 무신경한 편이다. 동시대적인 감수성보다는, 근본적인 감정과 관계맺음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쪽을 선택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림체나 시각연출 역시 현대적 감각의 스타일리쉬함보다는, 감정선의 변화에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기에 한눈에 보기에 ‘80년대틱하다’는 느낌을 받기 십상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강경옥 만화의 올드팬들에게는 나름의 친숙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듯하지만, 새로운 젊은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에는 상당한 악재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이 작품이 연재되던 엠파스 연재만화란이 사업을 접어서 현재 연재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비록 어디서 끝맺어도 크게 이상할 것 없는 에피소드 방식이기는 하지만, 역시 오랜만에 다시 상승세를 타고 있는 작가의 작품이 두 권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단행본이 많이 팔리면 창작 지속에 도움이 되려나? 모르겠다. 이런 상황과 관련된 동화는 없으려나, 괜히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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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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