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풀의 연재만화 ’26년’ 종결. 더도 덜도 아닌 딱 필요한 그만큼의 결말. 이로써 강풀은 ‘대가’의 경지를 향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사족: 무르익은 스크롤 연출도 필견. 특히 첫 저격샷의 긴박감은 후에 두고두고 모범 사례로 인용될 가치가 있다)
!@#… 강풀의 연재만화 ’26년’ 종결. 더도 덜도 아닌 딱 필요한 그만큼의 결말. 이로써 강풀은 ‘대가’의 경지를 향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사족: 무르익은 스크롤 연출도 필견. 특히 첫 저격샷의 긴박감은 후에 두고두고 모범 사례로 인용될 가치가 있다)
!@#… 그냥 하염없이 프로젝트용 데이터 수집하다가 잡스럽게 모둠. 포쓰 넘치는 댄스가 등장하는 뮤직비디오 특집.
!@#… 지난 씨네21 570호(그러니까 지지난주)의 ‘한국만화의 영화화’ 특집에서 한 꼭지로 실린 글.
이 만화를 노려라!
<돌아온 자청비> <바람의 나라> <폐쇄자> 등 영화가 탐낼 만한 한국 만화 추천작
김낙호(만화연구가)
영화는 만화를 사랑한다. 영화가 오래전부터 스토리보드라는 공정을 통해서 만화언어를 제작과정에 활용한 역사를 고려하자면, 90년대 중반 이래의 만화 원작 영화제작 붐이 오히려 지나치게 늦었다고 느껴질 정도다. 물론 다른 매체양식을 옮겨오는 과정은 생각보다 수월하지 않기에 <비천무>(김혜린)의 경우처럼 어설픈 캐릭터 해석과 낮은 영화적 완성도로 오히려 원작 팬들의 원성만 산 경우도 있다. 하지만 원작의 몇 가지 핵심 정서를 효과적으로 영화만의 색으로 녹여낸 <비트>(허영만·박하)라든지, 원작의 설정과 이야기 뼈대를 전혀 새로운 주제와 결론으로 이끌어낸 <올드보이>(쓰지야 가론·미네기시 노부아키) 같은 매력적인 성공 사례들이 있다. 나아가 최근의 <신 시티>(프랭크 밀러)처럼 아예 만화의 시각적 표현 하나하나를 그대로 이식하는 것만으로도 영화예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디서 어떻게 영화로 이식하면 좋은 도전이 되어줄 만한 원작 만화를 찾아볼 수 있을까. 해답은 간단하다. “드넓은 만화의 바다 그 어디에나 있다.” 이미 영화화 기획이 진행 중인 <위대한 캣츠비>나 <로맨스킬러>(강도하), <26년>(강풀) 등 인기 만화들 말고도 시기나 장르 가릴 것 없이 고르게 한번 후보군을 모아보는 것이 어떨까.
!@#… 유명해진 작품의 프랜차이즈를 자꾸 늘리려다 보면, 속편을 만든다. 그런데 속편을 만들고 또 만들다가 완전히 이야기가 엉망이 되어버리면? 작가는 마무리지어버리고, 회사는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우려먹으려고 한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외전’. 본편 이야기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본편의 세계관에 그럴싸하게 끼워넣을 수 있는 부수적인 다른 이야기. 그렇기에 외전이 넘쳐나는 것은 곧 프랜차이즈로서의 성공의 상징. 미국의 가장 대표적 사례라면 스타워즈, 그리고 일본이라면 당연히 건담. 그 중 특히 일년전쟁(기동전사 건담)과 그리프스 전쟁(제타건담) 사이의 구간이 특히 외전을 집어넣기가 참 좋은데, 작품 설정상 7년이라는 공백기를 남겨둔데다가 로봇들의 스타일이나 정치구도 등등 워낙에 급격한 변화가 많은 대목이니까.
!@#… 그런 외전 가운데 비교적 최근에 인지도를 쌓고 있는 것이 바로 AOZ. 어드벤스 오브 제타 (모형 전문잡지 전격 하비에서 주로 밀어주고 있음). 티탄즈가 결성되고, 건담의 후계기를 놓고 여러 업체들이 표준안을 경쟁하고, 그 와중에 지온 잔당이니 연방 본대와의 마찰이니 그런 것들. 하지만 뭐 이야기야 그렇다치고, 정작 중요하게 인기를 끄는 것은 바로 메카닉. 20년 뒤에야 나온 외전에서 본전에 충실한 메카닉 설정을 바라는 것은 무리겠지만, 오버스펙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특히 ‘워터십다운의 토끼들’에서 이름을 죄다 따온 헤이즐 건담 시리즈들은 완전히 시대착오. 설정에 끼워맞추기에는 지나치게 모던한 디자인, 지나치게 뛰어난 성능. 하지만… 결정적으로… 뽀대난다. 뭐 사실 그거면 된거다. 별로 이야기로서 기대하는 것도 아니고, 0083처럼 정본에 넣을까말까 고민이라도 조금 될락말락 하는 작품과는 달리 그냥 건담세계관의 동인지로 취급하면 딱이니까. 여하튼, 그런 생각을 다들 해서인지 반다이의 HGUC 1:144 라인에서 주역 기체들이 출시되고 있다. 워낙 호평속에 발매된 지라, 한번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지난 여름에 손 대봤던 물건. 헤이즐 개량형, 일반 버젼.
!@#… 몇주 전, 국내 언론에 전 세계가 알아준 한국의 기타천재가 나왔다느니 하는 기사들이 한동안 연예란과 사회란을 꽤 뜨겁게 도배한 적이 있다. 논설위원급의 세설까지도 나올 정도로 불타올랐다가도 (네이버 기준으로 찾아보니 300건이 넘어간다;;;), 당연히 이 판이 보통 그렇듯 약간 지나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 사그라들었지만.
여하튼 이미 널리 알려졌다시피, Funtwo라는 아이디로 동영상 서비스 사이트 유튜브에 올라간 전자 기타 속주 동영상이 인기를 끌었는데 그 주인공이 누군지 밝혀졌다는 뉴욕타임즈의 기사 한 편이 그 한바탕 붐의 바탕에 있다. 뉴욕타임즈에 뜨자마자 기사내용은 한국의 수많은 언론들에 의하여 수입. 뭐, 여기서 괜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간단한 생각이야 이런 것일 터이다. 에잇, 이 담론 사대주의자들, 미국이 히트시켜주니까 부화뇌동해서 설레발이구나, 동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온지는 8개월이나 됐고 또 히트친 현상 자체도 상당히 오래 되었는데 직접 발굴할 능력도 관심도 없다가, 미국 유명지가 프레임을 던져주니까 그대로 받아먹었구나… 뭐 그런 뻔한 이야기들. 담론 종속성에 대한 의구심. 하지만 뭐 그런 건 어제 오늘일도 아니니 언젠가 다른 기회에.
그보다 이번 건에서 재미있는 점은, 뉴욕타임즈 보도가 나가자마자 한국에서는 주인공 임정현씨를 스타만들어주기 프로젝트가 곧바로 발동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당시 나온 대부분의 기사들은 전형적인 연예스포츠 신문 삘의 스타 만들기였는데, 한마디로 “뉴욕타임즈에도 나온 훌륭한 기타 신동이다” 라는 식이었다. 8월 마지막-9얼 첫째주에 나온 기사들이 뉴욕타임즈 기사에서 인용한다고 클리핑한 부분을 보면, 맨 연주 실력 칭찬 부분 뿐이다. 세계가 칭찬하는(즉, 미국님이 칭찬해주시는) 기타천재 나셨네, 하고 빵빠레. 스위핑을 잘한다고 말씀해주셨다, 하지만 우리 겸손한 주인공님은 잔실수 많다고 스스로 인정도 한다 쪽 내용만 깨끗하게 추출했다. 거기에 한국의 프로 기타리스트도 칭찬했다는 나름대로 자체 취재도 살짝 곁들여서. (주: 뭐, 정식 언론학 연구였다면 기사들을 주욱 모으고 내용분석을 해서 통계를 내야했겠지만… 이건 연구 아니라 잡설이니까 그냥 위대한 멘트 하나로 넘어가자: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그런 언론보도들을 바탕으로 여러 국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역시 임정현씨의 연주실력이 진짜 그만큼 세계적 수준으로 훌륭하네 아니네 이야기 투성이였다. 한마디로, 출중한 스타냐 아니면 그냥 운좋은 스타냐 하는 것.
아니 그런데… 정작 진짜 뉴욕타임즈의 기사의 핵심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바로, 유튜브라는 동영상 사이트를 통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패턴 자체. 즉 동영상을 올려서 수백만 조회수의 스타로 등극할 수 있다는 ‘시스템’에 대한 소개고, 그것을 위한 사례로서 이번 건이 등장한 것. 애초에 동영상이 올라간 제목은 달랑 ‘guitar’였고, 무표정하게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던 그 미스테리 주인공이 밝혀졌다는 것. 인터넷 특유의 ‘익명성’, 그리고 ‘무명의 실력자들의 데뷔 무대’ 개념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기에 너무나도 좋은 사례란 말이다. 그에 비해서 정작 파헬벨 카논 록버젼이라는 이 곡을 처음 쓰고 연주했던 대만인 기타리스트 제리창은 이미 성립된 스타인데다가, 얼굴도 이름도 이미 처음부터 밝혀져있던 상황이기에 메인으로 올라가지 않았던 것 뿐이다. 특히 후반으로 가면 클래식을 락으로 연주하는 것, 하나의 히트를 서로서로 연주 경연하며 올리는 것 등에 대한 이야기에 할애하는 부분을 보면 이런 전체 주제가 더욱 명확해진다. 즉 스타에 대한 주목을 빌미로, 실제로는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현상에 주목하는 것이다. 기사가 대단히 잘 쓰여진 심층 기사라는 것은 물론 아닌데다가 이 동네 기사치고는 상당히 ‘햝아주는’ 내용 투성이이기는 하지만, 최소한 방향성은 제대로 그 쪽으로 향해 있다는 말이다.
흥미로운 차이다. 원래의 기사는 어찌되었든 사회의 소통 방식의 새로운 진화에 대해서 재미있고 흥미로운 사례를 담아내려 하는 기사다. 그게 유튜브의 히트로 어안이 벙벙해하는 이쪽 동네의 진짜 이슈니까. 그런데 그것이 큰 물을 건너오자, 스타탄생 기사로 변신한다. 왜 그럴까. 인터넷으로 스타될 수 있다는 식의 아이템이 워낙 한국에서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고, 그것에 대해서 원래부터 계속 모두들 통찰을 해왔으니까? 에이. 시스템이고 통찰이고 자시고 스타 띄워주는 게 가장 기사쓰기 쉬우니까, 그리고 미국도 인정하는 한국의 별이 납셨네 쪽이 안정적으로 화제 끌기 더 좋으니까 쪽에 500원 건다. 현상 자체에 주목하는 예외적 기사들도 한 두개 있었고, 연예프로들을 도배하던 임정현씨의 스타효과가 사그러들자 약간씩 방향이 바뀌고 있기는 하지만, 그럴수록 리플러(…)들의 주목은 바닥권. 뭐, 쓰는 사람 읽는 사람 수준이 비슷비슷하니까 장사해먹고 사는 것 아니겠나. 게다가 애초 초창기 기사들이 뉴욕타임즈에서 클리핑했다는 부분이 너도나도 같은 것으로 보건데, 왠만해서는 원본 기사도 제대로 안읽고 그냥 서로 베꼈다에 또 500원 건다. 그리고, capcold가 여기서 이런 이야기로 깐죽대봤자 현장 기자들은 코웃음도 치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이딴 식의 기사를 써댈 것이라는 데에 또 500원 건다. 그게 잘 팔리는 뉴스 수입상의 자세이며, 안정적으로 화제성을 끌어모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패턴이니까.
하지만 한번쯤 상상을 해보는 것은 괜찮을 듯 싶다. 만약 좀 더 취재력과 진짜 통찰력을 가진, 실력있는 기자의 기사가 나왔더라면 어땠을까. 사실 뉴욕타임즈에서는 몰랐겠지만, 그 기사가 나오기 좀 더 전에 한국에서는 인터넷 전자 기타 동호회 mule의 여러 회원들이 각자 연주한 파헬벨 캐논 락 동영상을 빠른 편집으로 엮어넣은 동영상이 좀 ‘눈치빠른 누리꾼’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다. 무명 전문가, 익명성 같은 패턴에다가 심지어 한국식 인터넷 문화 특유의 교류성까지 잘 나타내주는 매력적인 아이템. 상상속의 그 기자의 그 기사는, 뉴욕타임즈 기사가 나오고 나면 아마 두 동영상들을 가져다가 비교해보며 인터넷 문화의 속성을 생각해보겠지. 짠하고 스타가 되기 위해서 어쩌고 한다기보다, 그냥 즐거워서 하고는 그것을 마음껏 서로 ‘공유’하고 ‘교류’한다는 것. 그 공유와 교류 속에서 발전하고, 그러다 보면 히트쳐서 스타가 되기도 한다는 것. 바로 인터넷의 협업, 새로운 스타일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뭐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말자. 상상은 상상일뿐, 파고들면 짜증만 증가한다. 언론의 위기? 뉴스 작성 실력의 위기겠지.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사족) ‘눈치빠른 누리꾼’ 개념은 다른 기회에 한번 다뤄볼 생각. 얼리어답터, 트렌드세터 뭐 그런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다시 다듬어야 하기에 궁리중인 개념.
설정과 표현과 이야기 -『귀신』
김낙호 (만화연구가)
99년부터 한 3-4년간, 한국에는 유럽만화 출간 붐이 일어났던 적이 있다. 홍대 앞 미술전문서점이나 미술평론가들의 소개글에서나 볼 수 있었던 『니코폴』이나 『잉칼』, 『쌍브르』같은 예술적 성취도가 높이 평가받는 작품들이 썩 괜찮은 번역과 출판 품질로 한국 독자들 앞에 선보인 것이다. 비록 그쪽 작품들의 이야기 표현 방식이나 상상력의 방향 등이 아시아 만화권의 화법에 익숙한 국내 독자들에게 큰 호소력을 지니지 못했기에 붐은 저조한 판매 속에서 이내 사라졌지만, 적어도 그 작품들이 주었던 시각적 임팩트만큼은 강렬하게 자리매김했다. 흑백이 아닌 컬러, 그것도 익숙한 셀 애니메이션풍이 아닌 다양한 기법들의 향연은 만화 속 그림 자체의 쾌감을 일깨워주는 힘이 있었다. 주류 흑백 장르만화라는 출판형태에 얽매이지 않는 출판형태가 곳곳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내, 한국 작품 중에도 그런 식의 강력한 그림실력과 표현력을 온전히 발휘하도록 허용 받는 형태의 책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때맞춰 컴퓨터 모니터와 컬러링에 익숙한 젊은 작가 세대가 데뷔를 해주었다. 한국에서 만화라는 분야는 한층 더 자신의 운신의 폭을 넓힌 것이다.
그 중에는, 만화 특유의 과장을 절제하고 사진에 가까운 수채화풍 그림체로 높은 인지도를 쌓아올린 작가 석정현이 있다. 그가 작업해온 일러스트들은 대중적 인기에서 부족함이 없었고, 가끔 선보이는 단편들은 감동 에세이 스타일이든 짧은 개그물이든 감각적인 위트를 갖추고 있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작가의 본격적인 극만화가 완성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폐간된 ‘영점프’ 등 여러 지면에서 작가 자신이 오래 동안 구상하고 있던 근미래 군대경찰 이야기의 설정은 그런 기대를 더욱 부풀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작품, 『귀신』(석정현 / 길찾기)이 출간되었다.
『귀신』은 평화가 너무 오래 지속되어서 군대가 할 일이 없어진 한반도 서울시의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의문의 테러 사건이 일어나고, 사태를 해결하려는 군인들의 활약과 그 이면에 있는 군대와 미디어 등이 뒤얽힌 커다란 음모가 복잡하게 진행된다는 것이 자세한 내용 누설을 방지한 상태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주요 줄거리다. 사회와 미디어, 생체병기로 비유되는 비인간성, 평화의 의미 등에 대한 여러 화두들이 그 속에서 던져진다.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미 예상 가능했듯 시각적 쾌감의 즐거움이다. 섬세한 필치의 고밀도 그림들은 지나친 부담감 없이 페이지 속에서 멋진 사건 시퀀스들을 연출해낸다. 화려하면서도 현실적인 액션 연출, 역동적인 포즈, 많은 구상을 투여한 흔적이 엿보이는 각종 기계와 소품 디자인 등은 이 작가에게서 기대했던 바를 어김없이 충족시켜준다. 세계관에 대한 설정 역시 치밀하여 작품 속에 그려지는 제도와 사회가 정말 “그런 상황이라면 분명히 있을 법한” 곳으로 느껴지도록 만드는데, 근미래 SF로서 중요한 미덕을 충족시킨 것이다. 또한 이 장르 특유의 현실적인 문제제기와 매력은 이 작품을 만화로서 읽고 소장할 정도의 명분은 충분히 채워주고도 남는다.
하지만 아직, 그 이상의 점수를 주기는 망설여지기도 하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좋은 문제의식과 섬세한 세계관의 반대편에는, 그것을 풀어내는 주제와 이야기 전개의 미숙한 부분들이 그림자를 드리우기 때문이다. 우선 가장 큰 차원에서는, 좋은 문제의식 방향 설정을 피상적 고민으로 승화시키는 선에서 머물렀다는 것이다. 미디어의 대중 여론 조작이라든지 평화의 진정한 의미란, 현실 속에서는 다양하고 미묘한 모순들로 가득하다. 평화를 바라는데 그것이 오히려 평화를 옭아맨다든지, 더한 미디어 자극을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자극에 둔감하게 만든다든지, 사회속의 누구나 결국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이며, 보호자이자 동시에 감시대상이라는 점 등 복잡하기에 더욱 중요한 지점들이 많다. 하지만 『귀신』은 아쉽게도 너무나 쉽고 빠르게 주연들과 조연들, 하나의 시스템과 다른 시스템 사이에 선악의 선을 그어버리고 후반으로 갈수록 헐리우드식 주류 액션 활극의 방향으로 달려 나간다. 실제 현실의 중층적 모순을 다루기 좋은 주제와 세계관을 가지고, 어째서 이 정도까지로 타협했는지 아쉬움이 남을 따름이다.
주제라는 큰 차원을 떠나서, 사람들이 펼치는 이야기로서의 재미 역시 아직 미완성이다. 여러 매력적인 설정을 지닌 주요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그 중 누구에게도 공감할 여지가 충분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독자는 등장인물의 행동 동기와 패턴에 어떤 식으로든 공감해야 작품을 행위자들의 이야기로서 즐길 수 있다. 그렇기에 작가는 인물들의 감정과 행동에 필연성을 부여하고 극의 완급을 끌고 나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귀신』에 등장하는 여러 매력적인 인물들은 그런 부분이 피상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오히려 처음 시퀀스의 이름 없는 희생자로 잠깐 출연한 젊은 연인들이 훨씬 효과적으로 이야기 속에서 인물구축이 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주인공이 소위 ‘귀신’이 된 이유에 대해서 궁금증이 일어나지 않으며, 부대원들이 재등장할 때 통쾌한 반전의 기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다시금 인물들의 행위를 통해서 표현되어야 할 주제의식의 효과적인 발현에도 방해가 된다. 예를 들어 미디어를 통해서 주인공들에게 닥쳤던 비극은 공감 가능한 절망이 아닌 ‘설정’으로서만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명실상부한 2005년도 최고의 활극 모험 영화 가운데 하나인 『킹콩』에서 피터잭슨이 3시간 영화 중 무려 초반의 1시간여를 감정이입 가능한 캐릭터의 구축에 할애했던 전례를 참조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전체적으로 『귀신』은 탄탄한 시각표현과 상상력으로 제작되었으나 결정적인 주제 표현과 캐릭터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에 실패한 몇몇 대형 블록버스터 장르 영화들과 비슷한 장단점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은 단위 시퀀스 내에서 감수성 있는 전개를 보여주는 것 까지는 당초 작가에게 기대한 만큼의 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주제와 설정의 무게가 부담을 주었는지, 정작 필연성 있는 캐릭터들의 일관된 이야기로 성립시키는 것에 있어서는 아직 다듬을 여지가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단편과 일러스트에서 뛰어난 감수성을 인정받은 신인이, 중/장편 극만화 작품 첫 데뷔작에서 나름의 희망을 던져주며 동시에 일종의 통과세를 지불한 셈이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