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에 관하여 by 스콧 맥클라우드 [TED 강연]

!@#… 만화는 물론, 시각 인터페이스나 대중문화 연구 일반에서 종종 필독서로 꼽히는 ‘만화의 이해’ 연작의 작가 스콧 맥클라우드가 TED에서 2005년 강연한 내용의 한글자막판이 공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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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만화의 조건들 [무크지 ‘에로틱’ / 0702]

!@#… 앞에서 대중문화의 ‘연애’ 포스트를 올렸으니, 다음 자연스러운 수순은 ‘에로’ 포스트. 아동 신간에도 소개된(핫핫) 만화무크지 ‘에로틱’에 실린 글. 여담이지만 이번 무크지는 키워드가 ‘밥’이었던 지난 호보다 훨씬 반응이 뜨겁다고 한다. -_-;;; 에로만화 본연의 매력에 대해서 설파한다는 꽤 난이도 있는 임무를 부여받고 착수했던 물건이다. 그런데 쓰고 보니 (마치 무크지 자체도 그렇듯) 글의 타겟층이 창작자 대상인지, 매니아성 독자 대상인지, ‘만화계’ 외부용인지, 일반 독자 대상인지 좀 애매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 아니 조금씩 다 다루어버렸다. 여튼 여기는 편집을 거치지 않은 탈고버젼. 글을 읽다가 솔깃하면 책을 사서, 에로틱한 수록 작품들을 감상하길. 아마 이 포스트 때문에, 검색엔진에서 에로만화 찾다가 이 엉뚱한 블로그로 흘러들어오는 비극적 사례들이 속출할 것으로 보인다.

 

우훗, 좋은 에로만화 – 혹은 에로만화의 조건들

김낙호 (만화연구가)

에로만화의 즐거움

생물의 기본법칙이란 바로 생명 현상의 유지고, 그 목표를 충족하기 위한 의지가 바로 욕망이다. 그 중 식욕이 양분의 흡수를 통해서 개체의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라면, 성욕은 유전자의 혼합과 번식행위를 통해서 종의 생존을 추구하는 것. 그런데 두 본능 모두 인간사회의 발전 과정 속에서 특유의 사회적 체계화 및 그에 대한 반대급부의 쾌락이 더해졌으니, 식욕은 식사를 통한 모임과 미식의 쾌락이 그것이고 성욕은 연애행위와 에로틱한 쾌락이 그것이다. 식욕이 테이블매너와 요리라는 형식으로 사회적 통제의 대상이 된다면, 성욕은 법적 연령, 결혼관계, ‘건전한 성관계’ 등의 개념으로 통제되곤 한다. 이런 와중에서 통제와 욕구의 괴리를 극복하며 나름의 쾌락을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매체를 통한 대리만족인데, 그렇기에 에로 장르는 사회의 통제가 고도화됨과 동시에 점점 더 발달하곤 한다.

거창하게 이야기를 꺼냈지만, 결국 하려는 말은 에로물이라는 것은 그만큼 근본적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에로를 즐기는 수많은 에로 매체 가운데, 특히 에로 만화는 단연 에로의 꽃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에로만화는 단순한 생식작용을 클로즈업해주는 포르노 비디오보다 풍부한 상상력을 자극하며, 야설에는 없는 시각적 즐거움을 겸비하는 절충적인 에로 매체이기에 독특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때로는 이야기에 집중할 수도, 때로는 강렬한 시각묘사 한가지에만 집중할 수도 있는 표현의 유연성 역시 만화의 에로적 활용성을 높여주곤 한다. 나아가 편하게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는 점 덕분에, 사회적으로 금지되었으나 생체적으로는 마구 솟아오르는 정욕을 해소해야 하는 비운의 청소년 시기에 학급에서 돌려보며 책상 밑에 놓고 몰래 읽던 에로만화들은 한줄기 희망의 빛이었다. 성행위 없이도 성적 에너지를 열심히 소비시켜주는 상상력 풍부한 이미지로 표현되는 이야기들, 그것이 바로 에로 만화의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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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의 인위적 구축에 관하여 -『유리의 도시』[기획회의 060501]

!@#… 정작 출판을 하는 사람들이 만화의 표현양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아무리 훌륭한 작품을 들고 오더라도 상당부분 망가질 수 밖에. 그리고 한국에서 단지 멋있게 보이려고 그래픽노블이라는 명칭 쓰는 것, 무척 짜증난다. 뭐 그것을 무려 그래픽 소설이니, 그림소설이니 직역해서 쓰면서 정작 그게 만화를 지칭한다는 것 자체도 제대로 모르는 글쟁이들을 보면 더 짜증나지만 (만화의 지위니 뭐니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도대체 무엇에 대해서 글을 쓰고 있는지조차 모르면서 글을 뱉어낸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라고나). 하지만 여전히, 작품 자체는 강추하니까 리뷰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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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의 인위적 구축에 관하여 -『유리의 도시』

김낙호(만화연구가)

소설 원작 『유리의 도시』는 폴 오스터의 대표작 『뉴욕3부작』의 첫 작품이고, 잘 알려져 있듯 이 작가는 현대문학의 대표적 문인 가운데 하나다. 사실 줄거리는 간단하게 시작한다. 가명으로 탐정소설을 쓰는 퀸이라는 주인공이,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고는 한 여성 고객에게 탐정일을 의뢰받아서 수상한 노인 박사를 미행하다가 점점 더 큰 음모의 소용돌이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형적인 느와르풍 펄프 탐정소설의 외관 속에서 중첩된 정체성, 언어적 기표와 기의의 혼란, 그리고 결국 분열증적 도피에 대한 중층적인 이야기들이 장르적이면서도 동시에 해체적으로 펼쳐진다.

최근 한국에서 만화판 『유리의 도시』(오스터 글/ 마주첼리, 카라식 그림/ 황보석 역/ 열린책들)가 출시되었다. 한국에 폴 오스터의 책들을 소개해온 출판사가, 원래 오스터의 책들을 번역해온 번역가를 거쳐서 일종의 소품으로 들여온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이 94년에 만화로 만들어진 것은 작가의 친구이자,『쥐』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골수 뉴요커 아트 슈피겔만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슈피겔만은 부드러움과 비정한 도시가 공존하는 탁월한 느와르 그림체를 선보인바 있는 마주첼리를 끌어들였으며, 원작이 지니는 관념적 세계관과 기이한 연출방식을 만화 특유의 방식으로 소화해낼 인재로 자신이 창간한 대안만화잡지 <로>의 편집인 출신인 카라식을 한 팀으로 엮었다. 결과는? 마치 『유리의 도시』는 애초부터 당연히 만화로 그려졌어야 했을 작품이라는 인상을 풍긴다. 만화판 『유리의 도시』는 만화적 표현력의 극단에서 폴 오스터가 펼쳐낸 복합적 세계관을 완전하면서도 독자적으로 소화해내고 있다.

가장 돋보이는 것 가운데 하나는 도시적 경직성을 나타내는 연출의 형식미다. 세로 페이지를 세로의 9개 칸으로 균등하게 분할하는 칸 연출은 뉴욕의 바둑판식 도로의 이미지이자 고층빌딩의 창문, 그리고 나아가 감옥문을 연상시키는 경직성을 자연스럽게 전달한다. 하지만 그 속에 사는 인간군상은 도시 자체와는 달리 둥그런 필체로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생을 영위한다. 하지만 그 정상성 가운데 때로는 선이 거칠게 갈라지면서 속에 담아둔 광기와 혼란의 내면이 슬쩍 엿보이는 순간이 다가오기도 한다. 또한 언어적 기호와 도상 기호의 자유로운 혼합 역시 만화적 연출의 힘을 과시한다. 이 작품에서 궁극의 인위적 구조이며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기제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도시’, 다른 하나는 바로 문화적/사회적 코드로서의 ‘언어’다. 언어는 세계의 자연스러운 모습들을 인위적 기호로 치환하며, 그 속에서 때로는 갑갑한 현기증을 일으키도록 하는 주범인 셈이다. 그런데 도상 기호의 자유로운 흐름, 언어(문자)와 그림의 혼합을 가장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매체가 만화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자연언어를 발견하려는 실험을 당한 후유증으로 보통의 언어구조와 다른 사고방식을 지니게 된 극중 인물 피터 스틸맨 (아들)이 주인공 퀸에게 말을 거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하나의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로 자유롭게 치환되며, 그 전체를 아우르는 것은 스틸맨의 입에 완전히 붙어서 나오고 있는 말풍선 속의 메마르고 모호한 말들이다.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기표와 기의의 분리관계를 이야기하듯, 말과 그림은 서로와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하는 명 시퀀스다. 혹은 존 밀턴의 실낙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읽어나가는 장면 역시 탁월한 사례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아담의 행위는 그대로 만화의 칸 속에서 문자가 되어 바닥에 그림자로 달라붙고, 세상 사물의 자연스러운 모습과 문자라는 언어기호의 인위성이 그로테스크한 대비를 이룬다. 작품의 세계관을 그대로 옮겨놓은 이러한 탁월한 연출효과를 그 어떤 다른 매체에서 흉내낼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이러한 요소들은 반대로 생각하면 만화 특유의 자연스러운 독서를 방해하는 단점을 초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줄거리 요약만 하는 명작문학 학습만화가 아니라 또 다른 버전의 ‘폴 오스터 소설’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독자들이기를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게다가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형식적 미학을 추구하기 위해서 줄거리 진행의 재미를 놓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원래 원작 자체는 팜므파탈, 수상한 과거를 가진 용의자, 미궁으로 빠져드는 사건, 그 속에서 모호해지는 정체성 등 장르 탐정소설의 얼개는 줄거리적 재미를 충분히 보장한다. 혹은 줄거리가 해체적으로 변모하는 말미까지 전부 포괄하더라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도시 버전, 혹은 정신분열증 증상 전개의 비유적 표현이라는 틀에서도 새롭게 읽어낼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해석의 방식을 가로막지 않는 포괄적 그림체의 열린 연출은 이 작품에 작가팀이 들였을 세심한 고민을 엿보게 한다. 이렇듯 미학과 재미 두 요소들을 종합해서 판단을 내리자면, 만화판 『유리의 도시』는 명작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걸작의 경지를 기웃거리는 매우 우수한 작품으로 별 무리 없이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우수성과는 별개로, 이번에 출시된 한국어판은 편집 제작상의 몇가지 큰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만화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인하여 작가들의 세심한 연출이 상당부분 뭉개지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 표지의 일러스트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미국에서 원래 출시된 판본은 주인공 퀸의 정상적 외관부터 시작하여 완전히 갈라진 선으로 그려진 내면의 혼란의 묘사까지의 중간과정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한국어판은 마지막 혼란의 그림을 생략하고 중간과정까지만 잘라버리는 실수를 범했다. 더욱 큰 문제는 바로 글꼴의 사용이다. 이 작품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 그렇기 때문에 원어 판본은 경직된 분위기의 곧은 글꼴, 제3자적 시선의 타자기 글꼴,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담아내는 부드러운 글꼴 등을 포함, 다양한 글꼴들이 효과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세심한 연출의도는 한국어판에서 일괄적으로 가벼운 글꼴 하나로 통일해버리는 통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보도 자료에서 만화라는 용어의 사용을 의도적으로 꺼리며 ‘그래픽 노블’이라는 어휘로 한껏 멋을 부려보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렇다면 그에 합당한 세심한 미학적 관심을 먼저 발휘해 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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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웹만화 제작툴 Tarquin Engine 일반발매

!@#… 작가 E-Merl이 고안해낸 웹만화 제작툴 Tarquin Engine이 드디어 일반 공개되었다. 혁신적일 정도로 직관적인 줌인-줌아웃 방식으로 무한 캔버스를 자유로이 누빌 수 있는 독서 인터페이스를 가능하게 해주는 장비. 그냥 같은 칸 크기로 한 4칸 쯤 세로 스크롤하는 방식을 취하는 웹만화의 경우는 그다지 효용성이 없지만, 여러 칸 크기와 방향을 오고가는 복합적인 독서방식을 도입하고자 할 경우 꽤 좋은 선택. 

!@#… 기본적으로는 플래시에서 구동시키는 소스파일. 음… 유료판매군. -_-; 20달러. 뭐 소프트웨어치고는 그렇게까지 헉!하고 비싼 가격은 아니지만, 여튼 유료군. 혹시 생각 있는 사람들은 알아서 구해보길. (혹은 ㅊ대ㅁ과 ㅂ학과장에게 졸라서 학과차원에서 단체구매?)

여기서 산다:

http://www.webcomicsnation.com/tarquin/

이걸로 이런 식의 만화를 만든다:

http://e-merl.com/pocom.htm

http://e-merl.com/form.htm

만화와 이야기와 그림 도착증.

!@#… 저번 씨네21 원고에서, 만화가의 존칭이 ‘화백’으로 통용되는 현실을 싫어한다고 밝힌 바 있다. 화백은 원래부터 미술계의 용어로서 그림 잘 그리는 이에게 붙이는 것인데, 만화는 그림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만화는 어떤 감성과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하는 매체이며, 그 이야기의 수단으로서 그림이라는 표현방식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이런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 분업화의 시대, 스토리 작가가 따로 있는 경우는 어쩌고? : 스토리 작가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 하지만 결국 만화작가가 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사람. 각본가와 감독의 차이다. 사실 분업화가 좀 더 되면, 그림도 직접 다 그리지 않게 된다(어시/문하생을 시킨다). 그 경우 더더욱 화백과 거리가 멀어지지.

 * 여하튼 그림을 그리니까 화백이라고 하는데 뭐가 불만이냐: 호타준족에 지능형 플레이까지 하는 야구선수에게, 당신은 최고의 육상선수라고 ‘나름대로 추켜세우면’ 좋아하겠나. 영화감독을 사진가라고 부르는 격이랄까. 원래 화백은, 신문사에서 신문만화가를 부른 호칭이다. 다른 부분은 어차피 다 빽빽하게 글인데, 만화만 그림이 들어가서 확실히 차별화가 되니까. 그뿐이다. 

 * 그래도 화백이라고 하니까 폼나잖아?: 정확히 하자. 화백이라고 부르면 폼이 나는 것이라고 서로 어느틈에 합의를 했을 뿐이다. 단적으로, 내가 보기에는 하나도 폼 안난다. 고작 그 정도 호칭에 편승하고자 만화를 미술계 담론의 하위분류 중 하나로서 전락시켜버리면서 그게 무슨 폼인가. 그래서, 그냥 보편적인 극존칭인 ‘선생’을 쓰는 것이 좋다. 이야기꾼, 혹은 아예 그림 이야기꾼에 대한 극존칭 단어가 새로 생겨나기까지는. 아니 생겨나지 않아도 사실 상관없다. 영화판에서, 명감독에 대한 전용 극존칭이 따로 있던가?

!@#…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볼 때, ‘화백’ 호칭은 만화계의 만성적인 그림 도착증의 여러 결과중 하나에 불과하다. ‘미술’에 대한 하등 필요 없는 혼자만의 열등감. 

http://montblanc-kay.com/blog/archives/2005_05.html 참조.

…유효적절한 문제제기다. 확실히, 상당수/대다수의 본격 만화 커뮤니티들은 그림 페티쉬에 걸려있다. 이야기의 부재를 메꿔주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오히려 DC 카겔 같은 곳들의 여러 개인플레이어들. 하지만 사실 그 쪽도 90%는 서사적 완성도에 대한 고민보다는 즉각적인 아이디어를 4칸 속에서 발휘하는 것에 매진하고 있다. 물론 만화를 창작함에 있어서,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흉이 아닐 뿐더러 굉장한 장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림 잘 그리는 것이 장땡이라서가 아니라,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나감에 있어서 시각적 연출의 선택의 폭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 만화에서 좋은 그림이란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 “적합한 그림”이다. 그런데 애초에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도 없는 주제에 그림만 딥따리 수련한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좋은 만화를 만들어내겠다는 것인가. 그런데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우선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소위 대학이라는 곳의 만화학과에 필요한 “교양과목”은 교육학 개론이니 일본어회화니 일과 윤리니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근현대사와 철학사와 세계신화학이라는 말이다. 그런 고민들을 갖추지 못하면 단지 속이 빈, 즉각적인 이미지만 난무하는 때깔좋은 쭉정이가 될 뿐. 화려하니까 독자들이 몰려들었다가, 얕으니까 이내 실망하고 우루루 흩어지는 패턴의 반복에 불과하다. 똑같이 그림 도착증에 걸려있는 창작 지망생들에게나 선망의 대상이 될 뿐, 이야기를 느끼고 싶어하는 일반 독자들과는 점점 멀어진다. 

!@#… 뭐 기술이 본질을 압도하는 이런 현상이 오로지 만화만의 문제인 것도 아니다. 영화든 소설이든 뭐든, 현대 이야기 매체들의 보편적인 골칫거리. 기술을 갖추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리고 기술만 갖춰도 얄팍하게나마 호응을 얻어낼 수 있는 듯 보인다(화려한 의상으로 TV화면에서 열심히 춤추는 붕어 엔터테이너 – 자칭 가수 – 들을 생각해보라). 그것이 목표하는 바라면, 말리지 않겠다. 하지만 10명 중 1명, 아니 100명 중 1명이라도 본질적인 길을 갈 때 비로소 만화는 진화한다.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 /수정자유 / 영리자유 —

만화가 강도영, 강풀만화를 그리다 [시사저널 050130]

!@#… 시사저널 올해 설특집호에 기고한 또 하나 글 기고. 항상 그렇듯이 여기 올리는 것은 원래 보낸 오리지널 버젼, 잡지에 실리는 것은 그쪽 편집부를 거친 버젼. 예를 들어 잡지기사에는 ‘칸을 없앴다’라는 그림설명이 나오지만, 사실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건 ‘경계선을 없앴다’지, 칸 구분 자체를 소멸시킨 건 아니니까. 뭐 원래 전문지가 아닌 일반 저널리즘의 차원에서는 그런 식의 미묘한 문제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누가 행여나 이 글을 퍼나른다면, 개인적으로는 역시 이쪽 버젼이 퍼날라지는 것을 선호.

!@#… 본문에도 언급한, ‘온라인 만화 1세대‘라는 호칭의 작위성에 대한 생각. ‘세대’라는 건, 그 이후나 이전 세대와 확실한 성격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경향성을 파악하기 위한 범주구분이다. 무슨 등수놀이니 원조 경쟁이니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한마디로, 2세대 없이 1세대를 이야기하는 건 완전한 엉터리라고. 특히 1세대, 최초 어쩌고 하는 것은 훨씬 더 많은 주의를 필요로 하는데, 자칫하면 그 이전의 역사를 리셋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순정만화는 80년대에 생겨났다”고 하면, 필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이전 순정만화의 모든 역사 – 민애니, 엄희자 등등 커다란 이름들과 그들의 독자, 문화들 – 이 그 존재 자체를 깡그리 소멸당하게 되는 것이다. 초보자나 문외한들이 그런 부주의한 소리를 하고 다니는 건 일정 정도 어쩔 수 없지만, 이쪽 판의 ‘선수'(또는 선수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그러고 다니는 건 무척 당혹스러운 일이다. 뭐… 그냥 푸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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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강도영, 강풀만화를 그리다

김낙호 / 만화연구가

  작년, 한국의 수많은 온라인 사용자들은 <순정만화>라는 당혹스러운 제목의 만화를 우연히 발견했다. 아니, 작품 제목이 그냥 순정만화라니, 마치 주말 연속극 제목을 ‘멜로드라마’라고 붙이는 격 아닌가. 하지만 작품은 무척 재미있었고, 특히 온라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 결과 조회수가 하루 200만까지 올라 가고, 단행본이 출판 불황 속에서도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며, 일본과 1억원짜리 출판계약을 맺는 등의 성공을 보여줬다. 강도영이라는 본명보다 강풀이라는 필명이 더 잘 알려져 있고 그 이름을 딴 ‘강풀만화’라는 총칭이 어느 틈에 마치 하나의 장르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된 지금, 그 작품들이 폭발적 인기를 끌게 된 매력이 과연 무엇인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온라인에 적응하는 법

  강도영의 그림체는 기존의 만화 장르관념에서 보자면 애매한 위치에 놓여있다. 왠지 4등신스러운 인체비례를 지닌 깔끔하고 귀여운 모습이라고 보기는 힘든 캐릭터들, 그렇다고 해서 강한 개성의 스타일리쉬한 매력을 발휘하지도 않는다. 그 때문인지, 실제로도 데뷔를 위해서 여러 출판사를 전전했지만 거듭 실패했던 과거를 스스로 고백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몇몇 잡지, 그리고 한창 젊은 작가들의 짦막한 개그물을 새로 수용하려고 움직이고 있는 스포츠신문에서 가끔 작품발표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에 그쳤다.

  하지만 강도영이 ‘강풀’로서 대중적 사랑을 받는 스타로 발돋움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인터넷이라는 둥지를 통해서라고 할 수 있다. 강풀만화의 첫 대중적 히트작은 고료를 받고 잡지에 연재했던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홈페이지인 강풀닷컴(http://www.kangfull.com)에 그냥 그리고 싶어서 그렸다는 만화들이었다. ‘지치지 않을 물음표’라는 범주로 묶어서 2002년부터 그려온  이런 일련의 만화들은, 크게 세 가지 이야기 거리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엽기 개그, 생활 속에서 겪은 황당한 상황을 담은 재담, 80년대 대중문화에 대한 향수인데, N세대니 P세대니 하면서 한참 폭발적인 성장세를 타고 있던 온라인 사용자들의 문화적 취향과 시의적절하게 맞아 떨어졌다. 심지어 다소 부족해보이던 그림체마저도 그런 구수한 내용에 오히려 적합하다고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입소문에 힘입어 메일과 각종 개인게시판으로 활발하게 ‘펌질’ 당하고, 온라인의 강풀이 오프라인의 강도영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명성 덕분에 대형 포털 사이트의 만화코너에 영화 해설 만화를 연재하기에 이르렀고, 후속작으로 같은 공간에서 온라인 장편 연재작품인 <순정만화>를 연재하도록 해주었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온라인 만화가 1세대’라는 이유 없이 작위적인 호칭은 곤란하지만, 확실히 강풀만화는 온라인 문화의 특성을 긍정적으로 활용한 좋은 사례다. 특히 온라인에서 자신의 만화를 퍼나름에 대한 공식적인 허락과 몇가지 규칙까지 공지하는 등 온라인 문화의 핵심적인 특성인 ‘커뮤니티성’을 적극 지지함을 독자들에게 증명하기까지 했다. 나아가 천성적인 붙임성을 무기로 하여 동료 작가들끼리의 커뮤니티를 적극 주도했는데, 그 결과 몇몇 온라인 만화 작가들의 친목에서 시작했다가 점점 규모가 커지고 있는 자선 이벤트 “러브콘서툰”이 탄생하기도 했다.

칸 경계선을 버리고 독자에게 말을 건네다

  모니터를 통한 상호대화로 특징지을 수 있는 온라인 공간에 적극적으로 적응해 나가면서, 만화의 표현 형식 측면에서도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중에서도 칸 경계선을 버린 것과 스크롤 효과의 적극적인 채용이다. 즉 만화의 페이지 공간을 개방함으로써, 책으로 만들어진 만화를 억지로 저해상도 모니터 화면에 맞추어 넣었다는 느낌을 없애고 읽기 수월하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원래 만화의 칸 경계선은 각 칸 속에 그려진 장면을 하나의 정해진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로 인지되도록 만든다. 영화의 한 장면이나 취재사진처럼, 그 순간을 목격한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칸 경계선을 지우면 그것은 세상의 모습을 잡아낸 하나의 구체적인 장면이라기보다는, 누군가가 그 상황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해주는 듯한 감각으로 바뀐다. 칸과 칸 사이의 연결이 훨씬 덜 명확해지고, 그 연계성을 서술하는 대사와 이야기의 흐름 자체가 부각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의 주관적 해석으로 받아들여지도록 하기 좋다는 것이다. 사연을 소개하는 재담이나(‘일쌍다반사’), 편안한 설명이나(‘영화야 놀자’), 혹은 주인공들의 주관적인 시점전개에 의한 줄거리 진행(‘순정만화’)에 적합한 양식이다. 이와는 반대로 사건을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보게 만들어서 서스펜스의 집중력을 높이는 데에는 효과적이지 못한데, 납량물 <아파트>(연재 당시는 ‘미스테리 심리 썰렁물’)에 대한 평가가 상대적으로 좋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세상에서 사람 사는 이야기

  강풀만화가 온라인 만화의 범람 속에서도 확고한 인기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결국 한 가지 철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 세상에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만큼 재미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강풀만화의 개그는 대부분 대중문화의 장르패러디 같은 고난이도의 배경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의 황당한 사건들이다. 감동적인 부분 역시 대단히 드라마틱한 만남과 헤어짐보다는, “맞아, 내 주변에도 저런 사람이 있었지”라고 해도 좋을 만한 일상성의 영역이다. 그리고 세상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냉소로 충격을 주기보다는, 희망적인 시선을 던져주는 방향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 대신에, 이야기가 확실히 말이 되고 흡입력이 있도록 구성하는 데에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치밀하고 놀라운 가상세계를 구축하는 부분을 포기하고, 대신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달하는 방법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을 촌스럽다고 치부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가장 우직하게, 확실히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방법인 셈이다.

  최근 연재중인 온라인 작품은 <바보(순정만화 시즌2)>로, 무르익은 연출실력과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 그리고 우리와 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 소외층에 대한 애정이 이전보다도 더욱  농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우직한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는 한, 강풀만화의 인기와 성장은 앞으로도 계속 현재진행형일 것이다.

 

— Copyleft 2005 by capcold. 영리불허/동의없는 개작불허/이동자유 —

아스키 미소녀…

!@#… 고작 약간의 문자부호들이 나열되어있을 뿐… 그런데 그 속에서 결국 미소녀를 발견해내는 것이야말로 인간두뇌의 숙명. (사람에 따라서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 심지어는 이런 캐릭터라면 초반에는 이런 성격에, 결국은 이런 성격으로 돌변해서 이런 주인공과 맺어진단 말이야! – 까지)

http://check-it.org/14/log/02a/04c.html

(혹시 나중에 지워질까봐 백업)

 

 

온라인 만화, 펌질 열풍! [한겨레21/534호/041111]

!@#… 이번주 한겨레21 기고글. 다행히도 3면이나 할애해줘서 하고 싶은 말을  어느 정도까지는 할 수 있었음.  하지만 독자층을 고려해서, 마지막에 작품 소개 파트는 무척이나 일반적인 것 위주로 소개. 개인적 기호가 듬뿍 담긴 매니악한 아이템을 소개하고 싶은 욕구는…그냥 참았다. 블로그에는 투고글 그대로고, 게재 버젼은 여기에 (아마 로그인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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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인터넷에 자리잡다
 – 만화는 어떻게 온라인에서 새로운 성공을 거두고 있는가

  대중문화의 각 장르 가운데, 온라인이라는 환경의 수혜를 제대로 누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온라인 영화관의 붐은 일어나기도 전에 져버렸고,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는 분쟁의 와중에서 지지부진한 고착상태에 빠졌다. 온라인에서는 “자본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독립 아티스트들이 향유자들과 직접 만날 수 있는 자유로운 발표의 장이 펼쳐진다”는 옛 희망들은 이제는 좀처럼 설득력이 없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의 움직임을 볼 때, 아직도 예의주시할 만한 분야로 꼽히고 있는 것은 바로 ‘만화’다.

  그도 그럴 것이, 출판계 전반의 불황, 특히 애초부터 제작 유통망이 부실했던 만화 분야에 대해서 들려오는 여러 암울한 전망들은 온라인 세계에서 만큼은 전혀 공감이 가지 않는다. 수많은 커뮤니티와 개인 홈페이지에서 너도나도 유명 만화를 돌려보고 있으며, 대형 포털 사이트들은 만화 연재 지면을 지속적으로 늘려나가고 있다.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 연재된 강도영의 <순정만화>가 매회 연재가 갱신될 때마다 1일 200만회라는 기록적인 조회수를 올렸다는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온라인 만화는, 고작 수천부의 판매고를 올려도 안도의 한숨을 쉬는 현 출판만화 업계의 현실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호황 국면을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온라인 만화의 인기는 단지 온라인에 머물지 않고 만화계 전체로 영향력이 확장되고 있다. 이미 작년에, 인터넷 연재 만화인 <마린블루스>이 독자만화 대상과 대한민국 만화대상을 동시에 석권한 바 있다. 또는 고우영의 <삼국지> 무삭제 복간본이나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처럼 온라인 연재를 통한 인기몰이를 바탕으로 단행본을 출판하여 히트하는 경우도 이제 전혀 낮설지 않다. 더욱 주목할 만한 현상은, 온라인이 전통적인 종이만화까지도 흡수해 나아가는 경향이다. 현재 가장 널리 ‘펌’(또는 ‘펌질’. 특정 사이트의 그림이나 글을 다른 홈페이지로 ‘퍼 나르는’ 행위를 일컫는 은어) 당하는 작품인 <츄리닝>이나 <트라우마> 등은 원래 스포츠 신문의 일간 연재물이지만 온라인 상에서 더 큰 독자층을 누리고 있다.

만화, 온라인에서 인기몰이를 하다

  만화가 온라인이라는 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한 시도는 비교적 일찍부터 있었다. PC통신의 온라인 만화방 서비스를 필두로, 인터넷 보편화가 막 이루어지고 있던 99년에 이미 ‘이코믹스’, ‘N4′, ’코믹스투데이‘ 등 대형 만화 포털 사이트가 독자몰이에 나섰다. 하지만 만화방이라는 표어대로 해당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하고 유료결제를 하면 기존 종이만화의 스캔본을 볼 수 있도록 서비스하는 방식에 그쳤고, 그 결과 일부 성인 에로 만화를 제외하고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인쇄를 전제로 하는 장편 만화 작품들을 모니터 화면으로 온전히 즐기기에는 해상도 문제, 독서 자세의 불편함 등 기술적 난맥상이 있었던 것이다. 컴퓨터로 만화를 본다는 특성을 살리기 위해서 소리를 넣거나, 작은 움직임을 부여하는 식의 시도도 일부 있었지만, 만화 독서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간주될 뿐이었다.

  온라인 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하고 키워준 것은 바로 독자 자신들이었다. 인터넷 메일과 게시판을 통한 소통이 생활화되면서 서로 온라인에서 발견한 재미있는 만화 작품을 1-2개짜리 첨부 파일로 올려주는 새로운 유행이 생겨난 것이었다. ‘N4’에서 연재되었던 플래시 애니메이션 작품인 <마시마로 숲 이야기>가 언젠가부터 ’엽기토끼‘라는 별명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며, 신문사의 온라인 사이트에 올라오는 카툰 연재물 역시 각광받았다. 이러한 트렌드 속에서, <스노우캣>을 필두로 하는 인터넷 상의 일기체 만화들이 특히 주목을 모았다.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에 짦막한 이야기를 며칠 간격으로 올리는 방식을 통해서, 비슷한 취향을 공유하는 독자층에게 거의 중독적인 흡입력을 행사한 것이다. 그리고 이내 수많은 아마추어 만화 작가들이 유사한 작업을 시도했고, 하나의 장르를 이루게 되었다.

  이렇듯 ‘펌’과 취향 공유에 기반을 둔 자발적인 확산에 의해서 온라인 만화는 삽시간에 거대한 독자층을 확보해 나아갔다. 그리고 사람들이 온라인에 접속해 있는 시간이나 돌아다니는 폭이 점차 늘어남에 따라서, 온라인 만화 역시 한층 깊숙하게 독자들의 일상 속에 자리 잡았다.

온라인 환경에 적응하다

  온라인이라는 환경은, 그것에 잘 어울리는 특정한 양식의 만화들을 선호하도록 만들었다. 우선, 펌질을 중심으로 확산되다 보니 수십 수백 페이지로 이루어진 장편 보다는 짧은 호흡으로 끊어지는 만화들이 쉽게 주류로 부상했다. 또한 단행본으로 출간된 만화의 스캔본 보다는, 개인이나 포탈, 언론사 사이트 등을 통해서 온라인 연재 중인 작품들이 선호된다.

  마찬가지로, 온라인 만화 작품들 역시 온라인에서 효과적으로 감상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종이의 페이지 넘김에 해당되는, 스크롤이라는 화면 이동 기능이 온라인 만화에서 중요한 표현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대형 포털 사이트에서 인기리에 연재중인 양영순의 <1001>의 한 화에서는 주인공들이 물 속에서 재회하는 모습을 긴 세로 칸 한 개로 그려냈는데, 이것을 위아래 크기의 제한이 있는 컴퓨터 화면 창 속에서 스크롤해서 내리면 자연스럽게 바다 속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느낌과 함께 장면이 전환되는 효과가 만들어지도록 연출했다. 물론 이것은 기존의 종이만화에서는 구현할 수 없었을 연출방식이지만, 온라인으로 만화를 읽는 독자들에게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소위 ‘무한 캔버스’라고 불리우는 이러한 창틀 효과 이외에도 하이퍼링크 기능이라든지, 선택형 스토리, 다방향 만화 등 다양한 온라인 특유의 표현방식들이 이미 독자들에게 자연스러운 독서방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온라인 만화에서 가장 특기할만한 현상은, 전자게시판의 활성화 덕분에 독자와 작가 사이에 다양한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편집부를 거쳐야 했던 독자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전혀 걸러지지 않고 매 연재분량마다 덧글로 달리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즉 독자의 취향에 한층 민감해 질 수 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독자-작가 간 뿐 아니라, 작가들 사이에서도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있다. 온라인을 주요 활동무대로 삼고 있는 젊은 작가들이 주축이 되어 하는 연례 자선 콘서트 ‘러브콘서툰’ (http://www.lovetoon.co.kr)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올해 초에 여러 온라인 작가들이 서로 돌아가며 한 화씩 그려나간 <탄핵반대 릴레이 만화> 역시 이러한 커뮤니티적인 결집력의 결과물이었다. 물론 이외에도 수많은 만화 창작 동호회, 취향 공유 만화 동호회들이 온라인 상에 수도 없이 많이 활동중이다.

온라인 만화의 향후 전망

  하지만 온라인 만화의 앞날이 현재의 액면 인기만큼 밝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수익성이다. 대부분의 온라인 콘텐츠가 무료 공개 서비스 위주로 배치되어 있는 국내의 실정에 비추어 볼 때, 수십 수백만 번의 열람이나 펌질은 수익증대를 보장해주지 못한다. 온라인 만화 작품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수익은 현재는 포탈 사이트나 언론사에 연재할 경우 받을 수 있는 원고료, 그리고 만약 종이책으로 출판했을 경우 얻는 인세가 전부다. 유명세에 비해서 실익이 적은 셈인데, 대중문화라는 영역에서 이 점은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한다. 대중문화는 재능 있는 인재의 신규 진입이나 활동 중인 창작인력의 유지, 다양한 장르의 실험과 발전에 대한 동기부여 등 다양한 측면에서, 산업적 성공과 문화적 활력이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 만화의 인기를 직접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익모델을 고안해내지 못할 경우, 온라인 만화의 대중적 인기는 물론 질적인 발전 역시 결국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

  또 다른 문제는 일상화된 조급증이다. 일일 또는 격일 단위로 신작 연재분량이 나오는 짧은 호흡의 일기 만화나 일간지 사이트 연재물에 익숙해진 온라인 만화 독자들에게, 종이로 된 기존의 월간 잡지 마냥 다음 화를 위해서는 다음 달까지 기다리라고 부탁하는 것은 이미 무리가 되어버렸다. 창작의 측면에서는 장기적인 사전 준비라든지 연재 진행 과정 중에 성찰이 필요한 작품을 시도하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의미이며, 특히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은 개인 홈페이지 연재물인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 결과 다양한 작품이 만들어지지 못해서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다시금 독자들 자신이다. 이미 현재 <1001> 같은 극히 소수의 작품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온라인 만화들이 짦막한 에피소드 방식의 개그물로 수렴되고 있는 불길한 징조가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라인 만화의 향후전망을 종합해보자면 적어도 한동안은 계속 양적, 질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설득력 있다. 사람들은 앞으로도 더욱 더 많이 온라인의 세계를 떠돌아다닐 것이고, 그림들과 글들이 효율적으로 결합한 표현 방식인 만화는 그곳에서 무척 효과적인 장르다. 게다가 출판시장의 장기적인 불황 덕분에, 작가와 기획자들은 온라인에서라도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종이만화를 완전히 대체해 줄 것이라든지, 온라인에 한국만화계의 미래가 달려있다든지 하는 근거 없는 과도한 희망을 걸지만 않는다면, 온라인 만화는 앞으로도 충분히 기대해볼만한 영역인 셈이다.

(박스처리 또는 주석 처리)======================
2004년 특기할 만한 국내 온라인 만화 5선

– 1001 (양영순) : ‘아라비안 나이트’의 독창적인 재해석. 장편의 호흡으로 연재중.
http://news.paran.com/scartoon
– 순정만화 (강도영/완결) : 이야기성과 온라인 만화로서의 연출력이 돋보이는 연애드라마.
 http://cartoon.media.daum.net
– 츄리닝 (이상신, 국중록) : 온라인 상에서 더 지명도가 높은 스포츠 신문 연재 개그만화.
http://cartoon.stoo.com
– 스노우캣 (권윤주) : ‘귀차니즘’, ‘혼자놀기’ 등 일련의 트렌드를 촉발한 작품.
http://www.snowcat.co.kr
– 마린블루스 (정철연) : 작가 자신의 일상생활을 바탕으로 한 의인화-해물-개그만화.
http://www.marineblues.net

 

—- 2004. Copyleft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한국만화 무엇이 OSMU 성공을 끌어들이는가 [계간만화 04/가을]

!@#… 계간만화 04년 가을호 원고. OSMU라는 ‘누구나 다 이야기하기에 오히려 뻘쭘해지기 쉽상인’ 주제를 과감하게 정면돌파..; 언제나처럼, 여기 올리는 건 ‘오리지널 버젼’. 실제 버젼, 그리고 무엇보다 이 글이 속해있는 특집기획 전체를 제대로 읽으려면 <계간만화> 가을호를 구해보시길 (http://www.qcomic.com). 아니, 꼭 구해 볼만한 가치가 충분함.

!@#… 어차피 항상 나오는 이야기인 ‘만화에는 OSMU가 중요하다 / OSMU에는 만화가 중요하다’ 같은 이야기나 ‘만화는 원작산업이니까 이제 라이센싱 개념을 제대로 잡자’ 식의 이야기는 다른 분들이 이미 오랫동안 열심히 하고 계시기 때문에, capcold 성격상 남들이 안하고 지나간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봤다. 뭐냐하면, “그럼 만화가 좋은 원작이 되려면 구체적으로 뭘 갖추어야 하는가?” 라는 것. 만화를 만드는 입장에서도, 혹은 좋은 만화를 고르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다른 분야의 입장에서도 먼저 짚고 넘어가야할 지점 아닐까, 라고 생각한 것이다. 뭐 그래서 이런 글이 되었다. …꽤 길다… -_-;

!@#… 그러고보니 요새 기억력이… 지난 여름호에 쓴 ‘독자의 진화’ 글도 여기 안올렸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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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라는 소스, 그 맛의 비결을 찾아서

 – 한국만화의 무엇이 OSMU를 성공으로 끌어들이는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자. 원소스멀티유즈(줄여서 OSMU)를 하는 이유는 뭘까? 대답은 한 글자면 충분하다. “”. 이런 단순명료한 전제만으로도 OSMU가 추구해야할 핵심적인 방향성은 확실해진다. OSMU는 문화의 논리가 아닌, 산업의 논리다. 문화의 논리를 조금이라도 고려하는 것은, 재료로 다루는 문화상품의 품질을 관리할 때 뿐이다. “모두를 감동시키는 훌륭한 작품이 나와주면 저절로 모든 분야로 뻗어나가면서 대박이 터질꺼야”라는 순진발랄한 문화 논리와 산업적 성공은 대략 900광년쯤 떨어져 있다. 이것은 그다지 분노할만한 일도 아니고, 거부감을 가질 일도 아니다. 애초에 OSMU는 그런 개념이니까.

  한국의 만화에 있어서, OSMU는 좀 더 복잡미묘한 상대이기는 하다. 만화는 단지 산업적 이해 이상으로, 문화적 위상 자체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지난 10여년 동안 이 개념에 매달려 왔으니까. 물론 이러한 개념혼동은 많은 시행착오와 멍청한 발상들(‘정부가 주도하는 중견 작가 인큐베이팅’이라든지)을 탄생시켰지만, 지금에 와서는 적어도 대중문화 산업 일반이 만화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도록 하는 경지까지는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하지만 과연 만화가 OSMU 거래의 현장에서 내밀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밀 준비는 되어 있는걸까? 점검의 시간이다.

[] 비주얼과 이야기

  만화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역시 그림이다. 카툰화법으로 그려진 그림 한 장만 봐도 앗 만화다!라고 할 정도로 익숙하며, 쉽게 받아들여진다. 캐릭터 라이센싱/프랜차이즈 사업에게 ‘캐릭터 산업’이라는 (오해의 여지가 많은) 호칭을 붙여주고 한창 거품을 키워낸 것도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이쪽 분야 대다수 상품들이 명백히 만화라는 장르에서 발달시켜온 시각적 기법들(그림체, 표정, 상황 묘사 등)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만화가 비주얼이라는 측면으로 큰 매력을 행사한다는 인식은 꽤 그럴 듯 하다.  만화의 비주얼 속성으로 승부한 아기공룡 둘리 프랜차이즈의 성공이라든지, 박희정, 권신아 등 화려한 비주얼을 뽐내는 만화 계열 일러스트레이션의 인기가 좋은 사례다.

  하지만 비주얼 그 자체만으로 행사할 수 있는 힘은 무척이나 제한적이다. 94년, 이현세/야설록의 만화 <아마게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개봉되었다. 당시 제작사측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내세운 부분이 비주얼의 완성도였는데, “이현세 그림이 움직인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강조했다. 즉 이전의 TV물에서 망가졌던 그림체가 아니라 이현세 만화 특유의 비주얼을 제대로 구현했다는 자랑이며, 당시 이현세 만화의 비주얼이 가지고 있던 대중적 인기를 노린 발언이었다. 물론 애니메이터들의 노고에는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문제는 관객들은 그런 부분은 그다지 신경을 안썼고, 결국 흥행참패를 했다는 것이었다. 비록 원작만화의 그림체를 형편없이 뭉개버리고도 <달려라 하니>, <머털도사>등의 애니메이션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애니메이션 같은 미디어 상품 분야에서는 이야기의 재미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재미있는 이야기와 결합한 훌륭한 비주얼은 더욱 재미를 배가시켜 주지만, 이미 재앙급으로 망가진 이야기를 구원해줄 힘 따위는 애초에 없다.

  비주얼의 매력만으로 승부할 수 있는 분야는 팬시 상품 프랜차이즈의 일부 분야일 뿐, 현대 OSMU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는 미디어 문화상품의 핵심적인 매력포인트는 ‘이야기’다. 이야기가 재미있고, 그것에 어울리는 비주얼이라면 심지어 초등학생 낙서 같은 작대기 인간(‘졸라맨’)이라도 대형 스타 캐릭터가 되는 것이 오늘날의 풍경 아닌가. 만화는 애초부터 이야기 매체다. 비주얼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서술하기 위하여 비주얼을 도입한다. 게다가, ‘한국만화는 비주얼이 너무 구려서 못써먹겠어’라고 푸념할 정도로 그래픽 기술력이 떨어지는 시대도 아니지 않는가. 설령 정말로 구리다면, 더 유능한 그래픽 디자이너 인력들을 동원해서 다시 디자인하면 된다. 한마디로, OSMU 프로젝트 속에 있는 만화의 입장에서라면, 비주얼은 (비록 욕심은 날지언정) 굳이 끝까지 책임져야할 분야가 아니라는 말이다. OSMU라는 네트워크에서 구석구석 만화의 힘을 발휘하고 싶다면 명백하게 신경써야할 우선순위는 이야기다.

[] 이야기성: 줄거리인가 캐릭터인가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가 연달아서 히트를 쳤다든지, 만화 원작의 영화가 무더기로 제작된다든지 하는 것은 별로 새로운 뉴스거리도 아니다. 영화를 필두로 하는 영상 미디어 분야가 워낙 급속하게 부흥하면서, 소재로 쓸 수 있는 이야기 거리에 대한 수요 역시 급증한 것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만화라는 분야가 꽤 흥미로운 것이다. 이미 비주얼로 풀어서 서사를 하고 때문에, 그 이야기가 영상화에 적합한지 좀 더 확실한 선택을 할 수 있다. 게다가 연재물 만화의 경우 극 진행의 독자와 밀고 당기기 호흡이 이미 레디메이드로 갖추어져 있기까지 하다. 이제야 만화 원작이 이렇게 붐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만화와 영상의 파트너쉽은 천생연분이다.

  사실 만화의 입장에서도 영상과의 결합은 매력적이다. 문화상품의 OSMU 프로젝트가 성공하려면, 강력한 핵심 미디어 상품 하나가 전체 프랜차이즈의 이미지를 강력하게 통제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만화가 OSMU 논리를 필사적으로 추구해왔다는 점을 뒤집어본다면, 그만큼 만화가 그 자체로서는 산업적 활력이 소진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인식이 나온다. 즉 만화 산업은 현대적인 OSMU에서 ‘허브’역할을 할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다(주1). 하지만 현재 영화나 TV드라마는 히트작 한번만 나오면 ‘경제효과 수백억’이라는 등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주고 있다. 윈-윈의 공생관계를 노릴 이유가 충분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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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만화시장 자체가 기형적으로 크기로 소문난 일본의 경우라 할지라도, 히트작의 일반적인 성공 패턴은 인기를 검증받은 만화를 애니메이션화(특히 텔레비전 장기 방영 시리즈)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2001년부터 월간지 ‘소년 강강’에 연재중인 <강철의 연금술사>의 경우 단행본 권당 20만부 가량 판매되던 중형 인기 만화이었다가, 2003년에 애니메이션 방영개시된 이후 수요가 급증, 2004년 7월 현재 발매중인 단 7권만으로도 누적판매 1200만부라는 어마어마한 히트로 피드백된 사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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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식적으로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야기를 통째로 가져가는 것이다. 이왕 기승전결 다 맞추어놓은 것, 그냥 그대로 쓰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날로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연재든 단행본이든, 만화는 독자적인 매체로서 특유의 소비/향유 양식을 구축해왔다. 그것에 알맞도록 구성된 이야기 전개나 호흡이 다른 곳에서 그대로 통한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예를 들어서 최근 영화화 논의가 진행중이라는 <도시정벌>의 경우, 만화원작이 대본소용 성인만화의 독서패턴 – 즉, 만화가게에서 수십권 분량의 책을 잔뜩 쌓아놓고, 밤새 가끔 딴짓도 하면서 물 흐르듯 줄줄 읽어내려가는 식이다. 두 시간 동안 어두운 극장에 앉아서 스크린에 집중해야 하는 극영화에서 그런 이야기 전개를 구현할 수 있을리 만무하다. 즉 이야기의 큰 얼개만을 따온 상태에서 전체 내용을 완전히 새로 짜맞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최근 제작되어 나름의 성과를 올린 영화  <바람의 파이터> 역시, 방학기 원작만화로부터는 거의 제목만 빌려왔다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전체 구성이 확연히 다르다.

  덤으로 시기적인 유행의 문제도 있다. 만화 원작이 발탁(?)되는 시점은 보통 연재가 한참 징행되었거나 아예 완결이 된 이후다. 영화나 드라마 등 이후 미디어 상품의 제작기간까지 고려하면 그 시간차이는 더욱 벌어진다. 특히 한국같이 자고 일어나면 사람들이 다른 곳에 우루루 모여 있는 사회에서, 시대에 뒤떨어지는 요소들의 재창작은 필수적이다.

  이러한 방향의 극단으로 갈 때, 원작의 줄거리는 커다란 기본 이벤트 몇 개만 남길 뿐, 나머지는 새로운 창작으로 채워진다. 그 때 결국 이식되는 것은 줄거리라기보다는 ‘캐릭터’다. 엄밀하게 말해서 등장인물들의 특정한 현재 성격, 그것을 형성해준 과거 경험,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서로 엮어주는 관계설정 등을 말하는 것이다. 폐인 신드롬을 낳은 미니시리즈 <다모>를 생각해보자. 만화팬 사이에서는 “방학기에서 김혜린으로 변신”했다고 불리워질 정도로 전체적 감각에 차이가 크다. 남은 것은 잠입 여형사라는 설정과 기본적인 주변 인물들의 관계다. 정작 히트를 친 요소들인 멜로드라마적인 이야기투르기, 와이어 액션 무협, 장중한 대사 등은 원작과 관계없다. 게다가, 캐릭터를 이식한다고 해서 반드시 원작의 캐릭터 설정 전체를 가져올 필요도 없다.  엘리와 라이더가 그냥 한국인 이야기로 바뀐 <풀하우스>는 어떨까? 원작과 다른 주인공 성격 때문에 원작팬들과 풍파를 일으키지 않았던가. 일본만화 원작의 영화 <올드보이> 역시, 쫒는 자와 쫒기는 자의 현재 구도는 가져오되, 그들을 형성한 과거의 사연은 완전히 다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만화원작의 역할이 미미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만화에서 창작자가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서 완성도를 높이고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활용하고자 하는 다른 분야의 입장에서 보자면 말 그대로 ‘소재’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OSMU의 관점에서 만화가 할 역할은, 어떤 특정한 줄거리와 캐릭터들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하나의 사례를 증명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최초’, 혹은 ‘현존 최강’의 사례일 경우 비로소 줄거리와 캐릭터를 다른 분야에 대여해주면서 원작으로서 가치를 획득하고, 결국 비싼 라이센스비를 챙길 수 있다. 따라서 OSMU를 통한 성공을 꿈꾼다면, 현재 각 분야에서 유행하는 요소들을 매 순간 반영한 캐릭터와 이야기를 무한대로 이어가면서 ‘기본빵’을 지키는 것이 대수가 아니다. 일관성있는 완성된 이야기를 만들어내서 특정한 소재로서 활용될 수 있도록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것이 중요하다. 연재의 와중에 캐릭터의 성격이 통일성 없이 망가지면 아웃이다. 어설픈 전개로 인하여 줄거리의 얼개 자체가 이해불능의 경지로 떨어져도 아웃이다. 괜히 “나중에 드라마화하려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려면 어떤 줄거리, 어떤 캐릭터들이 필요할까”라는 고민에 귀중한 시간과 뇌세포를 할애할 필요도 없다. 만화로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져서 많은 독자들을 감동시키고 높은 인지도를 끌어냈다면, 그것을 소재로서 활용할 방법을 궁리하는 것은 그쪽 분야 전문가들의 몫이다(그리고, 그들의 실력은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 쉽게 생각하자. 만화가 OSMU에서 당당하게 자기 위상을 획득하고 싶다면 생각할 것은 단 하나, 매력적인 줄거리와 캐릭터로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서만화로서 독자들을 설득시키는 것 뿐이다.

[] 세계관

  앞서 스쳐지나가듯 OSMU의 ‘허브’라는 개념을 언급하면서 영화나 TV드라마를 예로 들었다. 그런데, 최근 수년간 한국에서 허브 역할을 해줄 강력한 매체로 떠오른 신흥 강자가  있다. 그것도 심지어 산업 성장성 등에 있어서 무척 전도유망하기까지 하다. 그 이름도 찬란한 ‘온라인 게임’이다. 확실히 한국에서 온라인 게임의 사용자층, 확산력, 영상으로서의 비주얼, 응용분야의 다양성 등을 놓고 볼때 만화는 당장 온라인 게임과 혈맹이라도 맺어야 할 것만 같다. 하지만 문제는 (항상 그렇듯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온라인 게임에서는 캐릭터와 줄거리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이야기 매체에서 독자는 특정한 캐릭터, 즉 주인공이나 그 주변인물들의 모험을 관찰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게임 속에서는 자기 자신이 하나의 캐릭터로서 주인공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정해진 줄거리에 따라서 정해진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과 의지에 따라서 움직인다. 그 결과 바로 앞에서 이야기했던 만화의 핵심적인 역할, 즉 이야기 소스로서의 기능이 무용지물이 된다. 곤란하다. 그렇다면 만화는 게임이라는 멋진 허브를 포기해야할까? 물론 아니다. 만화 원작이 이러한 OSMU 모델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은 따로 있다. 바로 ‘세계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세계관은 작품의 시공간, 그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 등장인물들의 특성 등을 직접적으로 관할하는 규칙이다. 그것은 크게는 <팔용신전설> 마냥 전체 세상을 통째로 창조해내는 것일 수도 있고, 작게는 <파이트볼>처럼 단지 스포츠의 룰 정도에 해당하는 작은 것일 수도 있다. 작품 속에서 모든 등장인물들은 이 규칙을 지켜나가며, 모든 갈등의 발생과 극복 역시 그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전형적인 무협만화의 세계관에서는 레이저 병기로 상대를 날려버리지 않는다; 비급을 찾고 수련을 해서 무예의 힘으로 상대를 극복하는 것이 이 세계의 규칙인 것이다. 하지만 총과 미래형 병기들이 허용이 되는 세계관을 지닌 작품이라면 어떨까? 새로운 방식의 대결이 가능해질 것이고, 총보다 빠른 무공이 소재로 도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를 관장하는 규칙을 지켜가면서 목적을 이루는 서사구조’라는 차원으로 놓고 봤더니, 이제야 만화와 게임의 중요한 연결고리가 생겨났다. 게임은, 다양한 만화원작에서 창조한 세계관을 차용해서 멋진 작품을 탄생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실제로 만화는 그 표현적 자유도 덕분에, 현실 세계의 제약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허용되었다(그 덕분에 황당하고 허황된 것을 “만화 같은” 이라고 폄하하는 기분나쁜 관습도 생겼지만 말이다). 따라서 다양한 특이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작품들이 많다. 비단 본격적인 환타지나 SF뿐만이 아니라도, 생략과 과장을 통해서 특정한 하나의 요소를 ‘작품 속 세계에서 그 어떤 다른 것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포장해내는 이야기가 많다. 예를 들어 일본만화 <유희왕>의 세계관 속에서는 특정한 규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트레이딩 카드를 통해서 격투를 하고, 그 속에서 강적을 물리치고 승리해야 세계를 구원한다. ‘고작’ 초등생들 사이의 카드게임이 이 작품 속에서는 세계의 운명을 좌우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만화가 일정정도 인기를 끌자 TV 애니메이션이 방영되고, 이 세계관을 바탕으로 당연히 실제 카드게임을 만들어서 상품화했다. 그것은 경쟁심 강한 남자 초등학생 층에게 크게 어필했고, 그 결과 세계적인 OSMU 대형 성공 사례로 자리매김했다.

  한국 온라인 게임의 대명사격으로 군림해온 <리니지>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신일숙의 동명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만화원작과 비주얼도 다르고, 특별히 줄거리나 캐릭터를 가지고 온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단지 제목이 같기 때문에 원작이라는 말인가? 만화 <리니지>를 원작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혈맹이라는 세계관 때문이다. 혈맹이라는 단위로 아군을 만들고 적군을 구분하는 방식은 온라인 세계의 패거리 문화와 찰떡궁합을 이루어 이후 ‘공성전’ 등 특유의 집단 놀이문화의 촉발점이 되어주었고, 그 결과 큰 히트를 쳤다. 온라인 게임 <라그나로크 온라인>의 경우는 더욱 흥미롭다. 동명 원작만화의 작가인 이명진이 게임 디자이너로 직접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작의 주인공 캐릭터들이나 핵심 줄거리는 전혀 인계되지 않았다. 심지어 온라인게임의 인기를 바탕으로 일본에서 제작된 TV애니메이션 시리즈 역시 원작만화와는 아예 연결고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세계관 구성만은 이 다양한 활용처(‘멀티유즈’)들을 하나의 프로젝트로 묶어주는 진정한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작품을 만들어나감에 있어서, 사실 세계관을 신경써서 만들어 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당히 원래 있는 굉장히 잘 구축된 세계관 위에서 자기 캐릭터들로 다른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정도로 만족하는 작품들도 많다. <반지의 제왕>의 중간계 세계관을 고유명사만 조금씩 바꾼 채로 그대로 가지고 와서 적당히 스토리를 꾸미는 수많은 환타지 만화가 범람하는 것은 사실 비단 한국만의 예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OSMU의 입장에서 다른 미디어 상품이 그런 작품들을 소재로서 발탁해야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여하튼, 만화가 OSMU에서의 폭넓은 성공을 꿈꾼다면, 세계관이라는 요소를 주의깊게 가꾸어야할 필요가 있다. 꼭 방대한 설정자료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야기의 전개 과정 속에서 이 작품의 세계에서 중요한 핵심 가치, 사람들의 행동 원칙을 통일성 있고 집요하게 강조해주는 작업이면 충분하다. 이쯤 되면 이미 눈치챈 분들도 있겠지만, 세계관이라는 것은 바로 작품의 주제 자체를 형상화한 것이다. 세계관이 부실하다는 것은 작품의 주제(즉 작품을 통해서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 자체)가 명확하지 않고, 구심점이 되는 핵심 소재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말과 동의어다. 한마디로, 작품으로서 부실하다는 이야기다. 만화자체로서 좋은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이렇듯 여러 가지 의미로 만화 원작 OSMU 성공을 위한 필수조건인 셈이다.

[] 매력을 유지해주는 미덕: 지속성과 스타성

  작품의 구성요소는 아니지만, 만화가 강력한 원소스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핵심적인 미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바로 지속성이다. 문화 상품의 소비라는 것은 결국 그 안에 담긴 ‘이야기’의 소비다. 성게군이 그려진 다이어리를 사는 이유는 단지 그림이 예뻐서가 아니라 성게군이라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매력 때문이고, 그 매력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실제 작품인 <마린블루스>의 개별적인 이야기 속에서 펼쳐진다. OSMU라는 말 자체가 결국 속되게 표현하자면 한가지 매력적인 아이템을 가지고 끝까지 뽕발을 뽑자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매력의 핵심이 되는 이야기 자체가 계속 새로 만들어지거나, 적어도 한번 만들어진 이야기가 계속 인기를 끌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마시마로>의 사례처럼, 팬시상품 시장에서 잘나가고 있는데 정작 그 유행의 근원이 되었던 원작 이야기 자체가 기약 없이 중단되어 버렸다고 한다면 전체 프로젝트는 아주 쉽게 김이 빠진다.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것은 토끼 주인공의 허를 찌르는 성격과 에피소드들, 즉 ‘엽기토끼’ 였지, 무슨 귀여운 외모의 다양한 캐릭터들이니 어쩌니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두 번째는 ‘스타성’이다. 반드시 만화로서 대박을 터트려야한다거나, 엄청나게 작품성이 우수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수많은 만화들 가운데, 소재를 찾고 있는 OSMU 종사자들의 눈에 들어올 수 있기 위해서는 뚜렷한 지지층이 있는 것이 좋다. 즉, 이 작품을 누가 왜 좋아하고 싫어하는 지가 명백하게 드러나 주어야 산업적인 전략 구상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구상이 가능해야만 OSMU 산업으로서 성립이 된다. 또한 비슷한 작품군들 가운데 바로 이 작품이 선택되어야 하는 이유가 명확해야 한다. 그것 역시, 단지 일개 전문가의 식견이 아니라 작품의 지지층을 보고 판단하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서 <신암행어사> 애니메이션이 만화를 어느 정도 이상 친숙하게 읽고 있는 청소년층을 타겟으로 하는 극장용 장편으로 제작되고 있는 것은 분명히 만화 원작의 지지층 성향에 맞춘 기획인 것이다. 성공을 할지 실패를 할지는 나중에 차차 증명될 일이지만, 적어도 명백한 전략을 짜고 제대로 부딪혀볼 수 있는 최소조건은 되어주기 때문이다.

***

  이상으로 수박 겉햝기로나마, OSMU 프로젝트에서 만화가 내밀 수 있는 카드패, 그리고 그것이 정말 쓸만한 것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을 주욱 훑어보았다. 다양한 요소들을 언급했지만, 정작 이야기의 결론은 결국 하나로 돌아오고 있다: 우선 만화로서 완성도 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놓고 나서 협상 테이블에 올려야 한다. 애니메이션 풍, 영화 풍, TV드라마 풍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화로서 취할 수 있는 자유로운 발상으로 흥미로운 세계관을 구축하고, 그 속을 모험하는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만화 특유의 표현법과 향유 패턴 속에서 팬층을 다지고 명망을 얻으면 된다. OSMU는 작품의 부족함을 메꾸어주거나 문화적 위상을 높여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원래부터 가능성 있는 작품의 상업적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비즈니스 개념이다. 문화산업 논리의 성공적인 정착에 따라서, 멀티유즈를 하겠다는 – 즉 자신들의 훨씬 더 장사가 잘 되는 미디어로 만화의 어떤 부분을 같이 데려가 주겠다는 – 파트너들은 속속 나타나고 있다. 이제, 만화가 득의양양하게 보따리를 풀어놓을 차례다. 사실, 한국만화는 많은 것을 비축해놓고 있다. 하지만 소진되기 전에, 계속해서 그 보따리를 다시 채워 넣는 것은 이제부터의 임무인 셈이다.

 

—- 2004. Copyleft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온라인 만화와 창작환경의 변화 [계간만화 04봄]

!@#… 원 출처는 <계간만화 2004년 봄호 (통산3호)>. 이건 뭐랄까, 맨 처음에 쓴 오리지널 버젼. 잡지상에는 지면 한계로 축약. 물론 오리지널이라고 해서 꼭 더 좋은 건 아니지만.

!@#… http://manhwaiyagi.com/bb/zerotb.php?id=mhhh&no=3 에 가면 이 특집기획의 다른 꼭지 중 하나인 ‘만화판의 주체들’을 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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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만화와 창작환경의 변화

김낙호 (만화연구자 / 웹진 ‘두고보자’ 편집장)

오래 지나지 않은 한 때, 온라인과 만화의 만남이 갖은 장밋빛 희망으로 포장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출판만화의 위기를 타개할 새로운 돌파구이니, 작가와 독자가 직접 만날 수 있는 새로운 통로니 하는 훌륭한 이야기들이 온 주변에 파다했다. 그리고 수년간 여러 가지 시도들이 이어져왔고 때로는 예상대로, 때로는 예상외로 현재의 판도에 이르렀다. 시장유통에서의 여러 실패담과 희망은 다른 지면에서 다루어보도록 하고, 본 지면에서는 창작이라는 측면에 집중해서 그 현황과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해보자: 온라인은 만화 창작환경의 새로운 돌파구가 되어주었는가? 대답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하지만 기존에 있던 몇가지 가능성들을 좀 더 표면화시켜 주었다”.

1) 표현의 확장 가능성

((도판: I can’t stop thinking 중 아무 장면이나))
((도판: e-merl 의 PoCom의 전체 회로도 또는 확대된 장면 하나))

우선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쉽게 끌 수 있는 것은 바로 표현적 측면인데, 기존의 종이 만화들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만화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세계적으로 전파하고 다니는 선구자는 <만화의 이해>의 저자인 스콧 맥클루드인데, 온라인을 통해서 만화의 표현적 가능성을 넓혀나간다는 것, 새로운 방식의 만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의 즐거움을 역설하고 있다. 온라인 만화의 가능성에 대한 생각을 온라인 만화의 형식으로 직접 제안하고 있는 <생각이 멈추지 않아요I can't stop thinking> (http://www.scottmccloud.com에 원문이, http://www.kcomics.net에 한국어판이 있다)에서 제안한 연결선 위주 칸 이동 방식, 하이퍼링크의 적극적인 활용, 그리고 무엇보다 속칭 ‘무한캔버스’의 도입 등이 그런 취지하에서 발명되었다. 단순히 동영상과 음악 등을 입히는 초보적인 멀티미디어가 아닌, 만화 특유의 공간적 매력을 살린 시각적 실험의 향연은 수많은 국내 및 해외의 작가들의 영감을 자극한다. 이러한 시도들은 대부분 페이지 넘기기의 전형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만화 독서방법을 제안하는데, 톰 스택폴은 <보이지 않는 힘Invisible Forces> (http://www.pvcomics.com/free/invisibleforces/)에서 사용자의 조작에 따라서 하나의 페이지내부에서 일부분만을 보여주며 조금씩 변형시켜나가는 방식이 좋은 예다. 온라인에서만 가능한 새로운 독법에 대한 실험정신은, 18명의 작가들이 함께한 프로젝트인 ‘PoCom UK 001’ (http://www.e-merl.com/pocom.htm)에 이르러서는 전통적 독법에 익숙한 독자들과의 한판승부를 벌이다시피 한다. 물론 한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모난돌 스튜디오의 ‘디지털 카툰’을 위시한 수많은 작가들이 모니터 속에서 놀랄만큼 효과적인 새로운 표현들을 시도하고 있다. 표현이라는 측면에서 온라인은 다양한 새로운 실험과 놀이의 장을 마련해주었고, 기존 종이지면에서 할 수 있었던 것도 대부분 그대로 흡수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새로운 창작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표현적 측면이라는 것은 결국 창작자의 상상력과 기술소화 능력의 문제다. 이야기를 계속하기 앞서 ‘디지털’과 ‘온라인’ 사이의 혼동을 해명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은 만화작품을 전산정보로 만들어서 작업하고 보관한다는 지극히 도구적인 개념이지만, 온라인은 디지털화시킨 작품을 소통시키는 과정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작품의 발표공간이 종이에서 모니터 화면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이야기를 짜고 그것을 칸 속에 그림과 글의 형태로 치환하여 표현해낸다는 본질적인 작업성격에는 변하는 것이 없다. 온라인에서의 발표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디지털 도구(즉, 컴퓨터)의 사용이 더욱 보편적이 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차피 종이만화라 할지라도 도구의 발전에 따른 당연한 귀결일 뿐이다. 여전히 만화는 가내수공업에 더 가까운 창작활동이며, 그것이 계속 장점이자 한계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작가가 원고를 디지털로 스캔해서 전자우편으로 잡지 편집부에 보낸다든지 하는 도구적인 효용도 물론 있지만(물론 벽지 또는 해외에서 작가의 창작 활동이 수월해지는 등, 이 자체로서도 상당한 창작환경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온라인의 이러한 속성이 창작환경에 미친 영향은 좀 더 미묘하다.

2) 타이밍의 문제

((도판: 스노우캣 다이어리 중 아무거나))

창작물을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온라인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개재 타이밍을 들 수 있다. 종이지면의 경우 잡지의 발간시기라든지, 책의 제작기간 등 다양한 물리적 제한에 따라서 작품의 창작이 이루어졌지만, 온라인의 경우 상대적으로 그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 ‘수시 업데이트’가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 홈페이지 방식의 공간은 물론, 종이잡지의 운영형식을 그대로 옮겨온 웹진 시스템에서도 마찬가지다. 잡지의 발간 스케쥴에 따른 것이 아닌, 작가 자신의 창작 페이스에 따른 창작 연재가 주는 창작여건 개선의 가능성은 그 자체로서는 분명히 희망적이다. 예를 들어 개인 홈페이지 방식으로 운영되는 <스노우캣>의 경우 작가 자신의 페이스에 따라서 매일 또는 띄엄띄엄 한 화씩 업데이트를 하고 있는데, 작품 전반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귀차니즘’과 ‘하고 싶을 때에나 한다’는 정서에 알맞은 소통방식이다. 수익모델의 다변화 가능성은 또 어떤가. 라이센싱이 아닌 만화 자체의 수익모델이 잡지고료 및 단행본 인세에 한정되었던 것이 전통적 모델이었다면, 기존의 모델에 더하여 사이트 유료 회원제라든지, 클릭 수 기반 수익 등 다양한 새로운 발상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코믹플러스>등 대형 온라인 만화포털은 물론, 개인 사이트에서도 소액결제를 통한 유료 서비스를 시도해왔다. 이외에도 독자와 창작자 간의 직접적이고 동시적인 의견교환, 커뮤니티 활성화 등의 기능들이 온라인 만화의 긍정적인 새로운 창작환경으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지난 수년간의 경험은, 가능성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확인하는 계기이기도 하였다. 누구나 작가가 작품을 직접 쥐고 독자들과 직접 만나며 소통을 하고 풍부한 수익을 창출하는 새로운 창작환경의 혜택을 볼 수 있을 듯 하였지만, 생각보다 이상은 먼 곳에 있었다. 예를 들어, 전통적 연재만화 시스템의 기반인 정기적인 마감 압력의 감소가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하나의 줄거리로 긴 호흡을 구사하는 작품의 온라인 연재는 속속들이 중도 하차하고, 짧은 호흡으로 이야기를 끊는 단편들, 또는 에피소드 방식의 전개가 결국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언제 끝날지, 언제 고조될지 불분명한 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은 원래부터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긴 호흡의 이야기일수록 일정한 속도의 업데이트에 의한 안정된 전개가 더욱 필요하다. 작품 연재의 페이스 자체가 안정되어 있어야, 독자들의 몰입도를 해치지 않고 다양한 드라마 투르기를 통해서 극적 긴장감을 만들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주말 드라마에 비유하자면, 다음 회가 다음 주말에 할 것을 알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 작품에 대한 몰입이나 관심을 시청자가 스스로 조율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음 화가 언제 하는지 일정하지 않다면? 관심의 패턴은 불규칙해지고, 많은 경우 아예 흥미 자체를 잃어버릴 수 있다. 온라인 만화 연재의 경우, 정기적 마감의 압박이 줄어들었을 때 작가가 결국 스스로 그 페이스를 놓쳐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잡지지면에서의 활동에 익숙한 작가들이 온라인에서 자신의 작품연재를 의욕적으로 새로 시작한 경우, 이러한 과정을 거친 경우가 다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전용 홈페이지를 통해서 서비스된 김준범의 의 경우를 상기해볼 수 있는데, 수익성 부족이라는 문제와 결합하여 결국 의욕적인 시작에 걸맞지 않은 이른 실질적 연재중단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덕분에, 많은 수의 온라인 만화들은 짧은 호흡의 에피소드 방식으로 승부하는 쪽으로 진화하였다. 한 화가 그 자체로서 완결적이기 때문에 비정기적인 수시 업데이트를 하더라도 이야기 전체의 페이스를 해치지 않을 수 있다는 장점 덕분이다. 물론 포털 사이트 등을 통해서 정기적으로 업데이트 일정을 고정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그 경우 역시 많은 경우 짧은 호흡의 완결성 있는 에피소드를 선호하고 있다. 한번에 많은 이야기를 구상하거나, 전체 작품의 커다란 형상을 계속 고민하지 않고 각 화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창작의 부담 자체가 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속칭 ‘감성 에세이툰’과 짦막한 ‘개그물’, 혹은 두 가지의 감수성을 엮어넣은 일기형식의 만화들이 온라인 만화의 절대적인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3) 수익성의 문제

((도판: WE6 메인화면))

‘수익성’이라는 현실적 과제 앞에서, 온라인 만화는 몇가지 부류로 나누어진다. 만화 연재 자체를 통한 직접적 수익은 염두에 두지 않는 개인 홈페이지형 모델과, 웹진 연재-고료지급형 모델이다. 개인 홈페이지형 모델은 만화 연재 자체에서 창작자에게 수익을 가져다주는 부분이 없는, 자발적 업로드를 특징으로 한다. 이 경우 수익은 단행본화나 관련 라이센싱 사업 등에서만 가능하다. 이 경우 연재는 작품의 인지도/지명도를 높이기 위한 수단이며, 출판사에 의하여 발탁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예 표현욕구 또는 소통욕구로 인하여 연재하는 아마추어 정신을 지향하는 경우가 많은 모델이다. 웹진 모델의 경우, 실제로 작품을 연재하면서 그에 대한 고료를 지급받는 방식으로, 기존의 종이잡지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물론 고정 고료를 받는 경우와 클릭수에 기반한 인세를 제공받는 방식 등 다양한 세부 모델이 가능하지만, 연재 자체가 수익을 낸다는 본질은 변함이 없다. 물론 이 경우도 단행본 발간과 라이센싱이라는 선택은 가지고 있다.

혹은 두 가지의 장점을 결합시키고자 한 시도도 있다. 여러 중견 작가들이 온라인에서 자신들의 둥지를 튼 ‘WE6’의 경우, 작가들이 직접 나서서 웹진 형태로 운영하며 자유로운 창작 업데이트를 하도록 하며, 유료회원을 통한 수익을 배분하는 방식을 표방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온라인 업데이트 특유의 ‘마감 압박 부족’으로 인하여, 개별 작품들의 연재 페이스가 불규칙한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여하튼, 유료회원을 통한 수익모델 창출은 일부 성인만화 사이트를 제외하고는 아직은 그다지 확실한 해결책이 아니며, 많은 경우 중도에 좌절을 맛보았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광고를 기반으로 하는 확실한 수익모델을 지니고 있는 포털 사이트(다음, 네이버 등)의 만화코너가 각광받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결과다. 분명히, 앞으로의 과제는 개인 홈페이지형의 창작 활동에서도 수익성을 낼 수 있는 다양한 소액결재 방법들을 개발하는 것이다. 창작 환경이라는 측면에 집중하자면, 작가가 자신의 수익모델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개입해야 한다는 의미다. 고료를 받고 연재를 하거나, 곧바로 단행본으로 내고 인세를 챙기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던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더욱 다양해진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3) 독자와의 정면승부

((도판: http://www.dcinside.com 카툰 연재 갤러리 중, 독자리플 쌓여있는 모습 아무거나))

독자와의 만남이라는 것도, 당초에 예상한 만큼 달콤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온라인 만화가 창작 환경에 소통과 피드백을 주는 방식은 이전의 팬레터들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지니고 있었다. 연재되는 한화 마다 곧바로 직접적으로 독자들이 반응을 할 수 있으며, 많은 의견을 실시간으로 내놓기가 더 쉬워진 온라인에서 그것은 종종 날 것 그대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전이라면 좋아하든 싫어하든 일정정도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소통을 시도했겠지만, 온라인에서는 누구나 지나가면서 한마디 던지기가 용이한 것이다. 덕분에 정리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표현들이 난무하여, 여린 마음의 작가라면 큰 상처를 받고 칩거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의견들도 많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팬레터의 시절과는 달리 그러한 의견들을 중간에서 필터링해주는 편집부가 없이 직접적으로 소통이 이루어지며, 심지어 전자게시판으로 공개되어 의견들이 계속 축적되는 경우도 많다. 작가가 자신의 독자들과 얼마나 동시대적으로 호흡을 하고 있는가가 작품의 생명력을 결정하는 주된 요인이라는 것은 이전부터도 하나의 진리였지만, 온라인의 소통기능 덕분에 그 명제는 더욱 더 절실해진 것이다. 작가가 자신의 독자들과 매순간 정면승부를 해야하는 창작환경이 도래한 것이다.

4) 무엇보다 중요한 것

((도판: 강풀 <순정만화> 중 아무 장면이나…))

길게 이야기했지만, 여하튼 결국 온라인이라는 공간은 이미 주어진 조건이며, 온라인 만화 특유의 창작환경에 적응하며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좋다는 주장일 뿐이다. 유동적인 변화과정에 있는 이런 상태에서 모범답안이 있을 수야 없겠지만, 최근의 사례에서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원래 오프라인으로 데뷔했었던 ‘파페포포’ 시리즈는 논외로 하자면, 최근 온라인 만화에서 가장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사례는 강도영의 <순정만화>다. <순정만화>는 잘 알려져있다시피 국내 최대 규모의 포털사이트인 ‘다음’에 연재중인 만화로, 이 가운데 전반부에 해당하는 20여 화가 문학세계사에서 최근 출간되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막강한 인터넷 포탈의 힘이 아니더라도, <순정만화>는 어차피 히트를 기록했을 법하도록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만한 요소들로 가득하다. 작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극장에서 커플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솔로들의 저주를 한몸에 받은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그 ‘어떻게’라는 과정은 다양하게 펼쳐놓는 것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재미를 준다.

하지만 누구나 알만한 이런 큰 원칙을 좋은 작품으로 소화해내는 것은, 역시 작가 자신의 능력이다. 자신의 사이트 강풀닷컴을 비롯해서 여러 온라인 만화지면을 통해서 수련된 연출호흡은 모니터 친화적이며, 동시에 인터넷 독자들의 독서 및 반응 패턴을 정확하게 맞추어주고 있다. 한 회의 연재분량은 하나의 이야기를 에피소드식으로 끊어나가며, 그 속에서 자기 완결적인 기승전결으로 사람이 만나고 사랑이 깊어지는 과정을 묘사한다. 그 이야기는 결코 지나치게 장황하게 나아가지 않고,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방식 보다는 한 페이지 안에서 마우스를 움직여 ‘스크롤’해도 짜증나지 않을 정도의 길이를 취하고 있다. 나아가 작가는 단지 수평적인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늘어놓는 패턴에 함몰되지 않고 연속극 방식의 내용연결로 이야기의 전개를 축적하여 점점 몰입도를 높여나가는 방식을 도입했는데, 온라인 만화 특유의 짧은 호흡을 보완해나가는 매우 효과적인 방식인 것이다. 말하다 보니 대단히 어려운 개념같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결국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힘을 잘 다루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온라인 연재시에 <순정만화>를 수작의 반열에 올려주었던 여러 장점들이 하나의 단행본으로 묶여져 나올 때 과연 살아있을 것인가. 다음 연재분을 기다리게 만드는 이야기꾼의 힘이 다음 페이지면 다음 이야기가 있는 단행본에서도 통할 것인가. 또한 마치 가려진 부분들을 조금씩 펼쳐보는 듯한 재미를 주던 한 페이지 내에서의 스크롤 방식이, 여러 페이지로 분절된 책 속에서 과연 매력을 발할 것인가. 나아가, 모니터 화면의 저해상도 불빛에 맞추어 놓은 여유로운 컬러 그림과 경계없는 칸의 매력이 종이 위에 빽빽하게 박혀서도 그 투박한 멋을 발휘할까.

출간된 책을 펼쳐본 결과,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재미있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하는가’의 기술 그 이상으로,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 자체의 힘이 강력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좋은 만화의 진정한 힘,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온라인이라는 창작환경 이전에, ‘만화’를 만들어 나가는 힘 자체가 더 결정적이다.

  좋은 만화작가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환경은, 그 탁월한 이야기꾼이 자신의 작품이 창작되고 수익을 창출하고 독자들과 소통되는 각 단계에 좀 더 깊숙하게 직접 관여하도록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여러모로, 온라인을 통해서 창작자의 작품에 대한 책임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보여주면서 말하기: 만화로부터 배우기 [계간 새야 04봄]

[계간 <디자인 교육 새야> 2004년 봄호에 실린 글입니다… 전에 인하대 온라인 강좌에서 써먹은 강좌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보여주면서 말하기의 장점을 설명하는 글인 주제에, 그림 올리기가 귀찮다는 이유로 여기는 그냥 글만 올립니다. -_-; ]

 

보여주면서 말하기: 만화로부터 배우기

김낙호 (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학생들이 필자에게 “멀티미디어란 무엇인가요?”라고 문의해오면 항상 들어주는 사례가 있는데, 바로 <가족오락관>의 ‘스피드 퀴즈’다. 이런 장면을 기억해보자: 한 출연자가 어떤 단어를 열심히 말로 설명해서, 다른 팀원 한명이 해답을 맞출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다가 다른 색깔의 카드에 쓰여진 단어가 나오면, 말을 그만두고 몸짓만으로 여러 흉내를 내며 같은 목표를 향해서 매진한다. 두 가지 시도 모두 보통 상당히 어색하면서도 처절하기 마련인지라, 시청자와 관람객의 폭소를 유발하곤 한다. 왜 그럴까? 평소에는 우리가 그만큼 말하기와 보여주기를 동시에 자연스럽게 구사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이상의 방식을 동시에 결합해서 표현하는 행위, 즉 가장 근본적인 차원의 멀티미디어인 것이다.

보여주며 말하기를 지면이라는 공간으로 옮긴 것이 바로 그림과 글의 결합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림과 글의 결합은 글이나 그림 각각이 전달하는 바 이상으로 효과적이고 자연스러운 표현을 가능하게 해준다. 하지만 얄궂게도 결합 자체에서 나오는 힘이 워낙 강한 덕분에, 단지 특정한 하나의 표현방식을 한없이 자세하게 파고들면서 표현의 정수를 찾아내고자 하는 일부 ‘고급예술’ 진영으로부터 저급한 것으로 핍박을 받기도 했다. 그 핍박받는 대상의 대표주자가 바로 만화인데, 그만큼 만화가 글과 그림의 결합을 통한 새롭고 효과적인 표현의 개발에 있어서 선두 역할을 해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보여주면서 말하기가 단지 보여주기와 말하기를 산술적으로 각각 합친 것 이상의 효과를 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선 ‘말하기’에 해당하는 문자언어를 살펴보자. 문자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발명품 가운데 하나인데, 지극히 표준화된 일련의 기호들의 조합으로 넓은 범위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문자를 ‘선들의 조합’이 아닌, 하나의 기호화된 문자로서 인식한다는 것 – 즉 독해력(literacy)이라고 부르는 기능은 정보전달의 효율성을 통해서 인류의 문화를 바람직하든 말든 간에 다음 단계로 올려놓았다. 지금 PC를 켜고 메모장을 열어서, 이 글 가운데 한 페이지 분량을 타이핑하고 저장해 보자. 대략 5-6KB 정도의 용량의 파일이 생긴다. 이제, 그 똑같은 내용을 출력해서 그것을 스캐너에 넣고 스캐닝을 하고, JPG 등의 그림 파일로 저장을 해보자. 읽을 수 있을 정도의 해상도로 저장하려면 아무리 못해도, 5-60KB (경우에 따라서는 그보다 훨씬 큰) 파일이 생긴다. 즉 선들의 조합이 아닌, 하나의 기호로서 인식하게 될 때 정보의 전달은 훨씬 표준화되고 효율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1: 문자로 인식될때 소실된는 다양한 시각 정보] ⓒ맥클라우드

하지만 문자는 나름대로의 단점이 있다. 기호라는 형식으로 표준화시킨다는 것은, 그 만큼 미묘한 차이들이 사라진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춘기 소녀의 연정이 담긴 예쁜 글씨의  러브레터도, 원고마감에 즈음하여 긴박하게 악필로 갈겨쓴 글도, 문자라는 차원에서는 내용 이상의 차이가 없다. 다시 말해서 미묘하고 풍부한 시각적 의미가 거세된, 내용만 남는다. 이러한 약점을 커버할 수 있는 것은 예전부터 그림의 영역이었고, 글은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여 글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살릴 수 있는 부분, 즉 추상의 영역이나 수사학 등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림 역시 글을 통해서 전달할 수 있는 이야기나 정서의 전달보다는, 시각적 실험에 집중했다. 즉 그림과 글은 자신들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일종의 분업관계로 발전해 나갔다는 말이다 (사실 이런 분업은 주로 서양에서 일어났던 것이며, 동양의 경우는 시화라든지, 서예 등 글과 그림의 연결고리가 일정부분 돈독하게 유지되기도 했다). 글과 그림이 각자의 방향만 보고 달려나간 분업체제 하에서는, 두 가지가 점점 서로의 연결고리를 잃어갔다. 소위 고급예술은 각 매체의 가장 미묘한 가능성들이나 미학을 파고 들어가는 것 – 즉, ‘표현’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에 중독된 나머지, 모든 매체의 원래 목적인 효과적인 공유/교류라는 지점을 놓쳐버리는 경향이 생겨났다. 즉 가능성의 실험에 매진하다가 정작 실용성을 잃은 것이다.

이에 비해서 태생적으로 대중성을 기반으로 해왔던 만화라는 장르는, 정반대의 위치를 고수하면서 발달했다. 가장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서, 기존의 법칙이나 규율을 무시하거나 의도적으로 파괴해나간 것이다. 하나의 그림 안에서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한다는 회화의 규율을 벗어던지고 여러 그림들을 연속시켜서 읽도록 만들었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서 그림에 글을 삽입하여 활용했다. 미적인 아름다움으로서의 표상들이나 기법들보다는 효과적으로 형상과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간략화된 카툰화법을 도입했고, 이러한 요소들을 때로는 한꺼번에, 때로는 하나씩 사용했다.

그림과 글의 접합 방식은, 현대만화에 이르러서 강력한 새로운 이정표들을 몇가지 맞이 했다. 단지 글과 그림이 병렬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문자 기호들이 그림 속으로 적극적으로 파고들어가는 양상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의성어/의태어 삽입이다. 의성어/ 의태어 삽입은 만화의 극중(diegetic) 공간의 한복판에 문자로 된 기호들을 넣는 방식으로, 현실공간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구상(具象)과 상징계의 공존을 만들어 낸다. 단적으로, 현실세계에서 자동차가 큰 소리를 내며 브레이크를 밟을 때 하얗고 큰 ‘끼이이익~’하는 글자들이 바퀴에서 쏟아져 나오는 일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자들이 만화 속에 나올 때 독자는 그것을 시각요소가 아닌, 청각 등 다른 감각에 호소하는 자극으로 받아들인다. 이 과정은 우리에게 지금은 많이 익숙해져 있지만,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너무나 놀라운 과정이다. 의성어로 쓰인 문자의 그래픽적인 배치에 따라서 화면상에서 그 소리의 음원과 방향 등을 나타내 줄 수도 있다. 나아가, 글자체, 크기, 크기변화, 필체 변화 등 수많은 시각적 요소들을 통해서 그것이 표상하는 오감의 성질을 다양하게 규정지을 수 있다. 극중 공간 속으로 들어간 의성어/의태어는 문자이면서도, 필요에 따라서 그림으로서의 속성을 얼마든지 살려낼 수 있는 독특한 만화 표현 장치인 것이다.

[그림2: 말풍선의 유희적 활용] ⓒ끼노

두 번째는 바로 ‘말풍선’이다. 단순한 그림과 글의 병렬 – 예를 들어서 그림 밑에 글이 자막처럼 쓰여져 있는 방식 -을 넘어서서 말풍선이라는 기구가 발명된 이유는, 바로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진행 묘사 때문이다. 말풍선은 극중 공간 속에, 그 공간과는 분리된 다른 차원의 별도 공간 – 즉, 언어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의성어/의태어의 경우 역시도 시각 세계와는 다른 것을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연현상을 만들어 내는 기구다. 하지만 말풍선은 아예 현실의 감각영역이 아닌, 추상의 공간을 접합시킨다. 그리고 그 속에 극중 인물이 말하는 언어가 문자로서 표현이 된다. 하지만 말풍선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꼬리에 있는데, 그 것이 특정한 극중 인물을 가리킬 때 그 공간 속의 언어는 바로 그 인물의 것이 된다. 말풍선의 발명 덕분에, 만화에서 화자(話者)의 개념이 태어났고, 세부적이고 드라마틱한 서술이 가능해졌다. 말풍선은 극중 공간의 흐름을 크게 방해하지 않으면서 언어의 세계와 현실세계를 교묘하게 병존시킨다. 말풍선은 그림으로 묘사된 이야기 세계 속으로 언어를 끌고들어왔으며, 그 덕분에 소설 등의 다른 이야기 문학이 지금까지 이루어놓았던 업적들을 흡수할 수 있는 강력한 기반을 이룩했다. 또한 말풍선을 만들어냄으로서, 말풍선의 모양 그 자체를 이용하거나 말풍선의 안과 밖에 들어가는 언어를 차별화하여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나아가, 말풍선은 ‘생각풍선’이라는 변형도 낳았다. 화자를 향한 꼬리를 일련의 동그라미로 처리함으로써, 만화는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까지도 가볍게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물론 말풍선은 ‘언어’의 공간이기는 하지만, 만화라는 시각 매체 속에서는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서라면 그 규정 역시 절대적이지 않다. 말풍선 속에서도 글자체, 글자크기, 크기의 변화에 따라서 말의 크기나 어감, 목소리, 속도 등이 대단히 다양하다. 심지어 그림의 요소들을 말풍선 안으로 끌고 들어와서 언어의 공간과 그림의 공간의 경계선을 가볍게 허물어버리는 표현들도 등장한다. 그만큼 만화라는 양식에 있어서는 글과 그림의 혼합, 경계선의 월경 등이 필요에 따라서 자유롭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의성어/의태어, 말풍선 등 흔히 알려져있는 만화의 ‘보여주며 말하기’ 기법 이외에도 다양한 방식들이 필요에 따라서 만들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서 칸 경계선을 글자로 만들어서 그 칸에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를 잡아주거나, 만화 칸의 배경을 자잘한 글씨의 글로 채워서 잡담같은 분위기를 만들거나, 아니면 칸 바깥의 공간에 글을 배치시킴으로서 그 페이지 분량에 해당되는 사건 전개 전반 위로 흐르는 거대한 나레이션으로 기능하게 하는 등, 작가의 의도에 따라서 다양한 표현을 주저없이 활용해볼 수 있다.

[그림3: 말풍선의 안과 밖] ⓒ카고 신타로

글과 그림이 이야기 전달을 위해서 결합하는 파트너쉽 관계에 관해서, 만화이론가 스콧 맥클라우드는 이 분야의 고전인 <만화의 이해(Understanding Comics)>에서 몇가지 이분법적인 전제를 하고 있다. 우선, 이야기의 전달은 중심적인 상황묘사(줄거리)와 심화되거나 자유로운  표현방식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야기상의 장면을 묘사하는 역할을 그림이 맡아주면 글이 보다 넒은 영역을 자유롭게 탐색할 수 있으며, 반대로 줄거리 묘사를 글이 맡아줄 경우 그림이 그만큼 실험적인 모험을 감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 만화에서 글과 그림이 결합되는 방식을 크게 7가지로 거칠게 구분하여 서술하고 있다:

1) 글 중심: 글이 중요한 서술도구이며, 그림은 글에 대한 간단한 도해에 그친다.
2) 그림 중심: 그림이 중요한 서술도구이며, 글은 의태/음향효과에 그친다.
3) 이중 결합: 글과 그림이 같은 상황을 중복적으로 전달한다.
4) 첨가 결합: 글과 그림이 서로의 내용을 좀 더 강력하게 보좌해준다.
5) 병렬 결합: 글과 그림이 각각 일견 서로 무관한 내용을 보여준다.
6) 몽타쥬: 글이 그림의 일부로 녹아들어간다.
7) 상호의존적 결합: 글과 그림을 둘 다 독해해야 하나의 상황이 이루어진다. 

비록 애매한 범주이기는 하지만, 이 가운데 만화에서 가장 정교하게 발달시킨 것은 상호의존적 결합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글과 그림은 엄격한 분업관계가 아니라, 결합을 통해서 원래의 글과 그림 이상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전개함에 있어서, 글은 그림과 역할분담이 자연스럽게 서로 섞여있다. 여기에 만화의 또다른 강력한 표현적 강점으로 꼽히고 있는, “상황 그림의 연속성”이 더해지면 그 효과는 더욱 무궁무진해진다.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별적인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그림이 담긴 각 칸마다, 글과 그림이 만들어내는 균형이 조금씩 변형되고 흔들릴 때, 독자는 이야기속으로 하염없이 빨려들어가고 만다.

[그림4 : 명료함은 반드시 쉬움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필링엄/수서

예술적 실험이 아닌 설명을 위주로 글과 그림이 결합할 때 나오는 가장 선명한 효과 가운데 하나는, 내용이 구체적이고 명료해진다는 것이다. 글과 그림은 서로의 의미를 확장시켜주기보다는, 구체적으로 제한한다. 한 예를 들어보자. “새가 날고 있습니다”라는 글과 결합되어 나오는 비둘기 그림은, 사람들이 글만 읽었을 때 상상할 수 있었던 새의 범주(독수리, 참새, 기러기 등)를 일거에 정리해버린다. 또한 글은, 그림 속에서 비둘기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형상이 보도블럭 위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이 아닌, 하늘을 날고 있다는 상황으로 규정한다. 속칭 ‘학습만화’로 불리우는 실용만화들의 높은 교육적 효과는 바로 이러한 특성에 기인한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유의해야할 지점은, ‘명료함 = 쉬움’ 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설명대상에 대해서 핵심적인 개념 위주로 요점정리하는 것에 성공한다고 할지라도, 그 핵심개념 자체가 저절로 커버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아무리 깔끔하고 작게 압축해서 짐가방을 꾸린다고 할지라도, 짐의 무게 자체는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따라서 글과 그림의 결합을 통해서 내용을 명료화시키는 것은, 보다 다양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서술 방식을 통해서 내용을 풀어주는 것과 동행할 때 비로소 효과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떤 학습만화는 머리만 아프고, 어떤 학습만화는 알찬 지식으로 다가오는 차이다.

***

여기까지 글과 그림의 창조적인 결합방식과 그 의미를 만화라는 양식을 중심으로 몇가지 살펴보았다. 애초에 만화학 개론을 강의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논의를 접고자 한다. 분명히, 다른 영역의 여러 표현양식들이 성공적으로 결합될때 일어나는 신비한 결과는 흥미롭다. 그것은 이야기와 정서, 생각들의 더욱 효과적인 전달을 가능하게 하며, 보다 깊은 의미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필자가 이 지면에서 하고 싶은 말은 단순히 만화라는 양식에서 만들어낸 개별적인 글-그림 결합 기술들을 참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만화라는 양식이 견지해온 자세, 즉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서는 자유로운 창조정신으로 매체간 벽을 허물고 넘나들 수 있다는 마인드 자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분과 학문이나 전통적인 형식구분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동원하고 결합시킬 수 있다는 자유로운 발상이 필요하다. 굳이 말하자면, “만화를 읽듯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것이 좋다”.

[그림5: 초보적인 글-그림 결합이 적용된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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