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 게시 시스템에서의 언어 사용

!@#… 이런… 트랙백도 제대로 작동 안되는군. 네이버… 이게 무슨 블로그란 말이야!!! 뷁!!!

!@#… 아 뭐 여하튼. ‘연구자’들이 쉽게 간과하는 지점이 있다. 바로, 현실세계의 변화를 스스로 체험하고 즐기면서 사는 것에서 나오는 통찰력. 종종 그것은 학술적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형태라든지, 완성된 논리로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훌륭한 통찰과, 더 많은 깊은 생각을 위한 단서를 던져주는 수가 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글 말이다:

웹 게시 시스템에서의 언어 사용 (http://pocorall.net/v2/archives/000279.html)

!@#… 자, 이제 근거를 조사하고 이론을 세팅하고 방향성을 잡고 실용과 대안을 만드는 것은 내 몫이다…라고 생각한다.

 

—- Copyleft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건담 F91 1/100> / 건담 F91

!@#… 건담의 장대한 스토리라인…은 사실상 88년의 극장판 ‘역습의 샤아’로 한번 커다란 매듭을 지었다. 3배 빠른 샤아와 아버지한테도 안맞아본 아무로의 전 우주를 건 자존심 대결의 어처구니없는 마무리. 그리고는 0080이라는 이전 시기를 무대로 하는 ‘외전’이 나왔을 뿐. 아 생각해보면 뉴타입에 100년 뒤의 우주세기를 다룬 <가이아 기아>가 연재되고 있었고, 소설 ‘섬광의 하사웨이’도 있구나… 음음음.

!@#… 아 뭐 여하튼. 이전의 ‘연을 끊고’, 새로운 건담 시리즈를 시작해보고 싶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감독이고 제작진들이고, 얼마나 시달렸겠나. 건담 시리즈는, ‘오타쿠 팬들이 사후에 설정을 만들어주다시피’한 물건인데다가 그 성공에 비례하는 엄청난 외압…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세기라는 개념은 아직 버리지 못하는 그 미련도 동시에 존재하고. 그래서 1991년, 역습의 샤아로부터 30년이 지난 시점을 상정한 새 작품이 만들어졌다. 극장판 <건담F91>.

!@#… 하지만 반응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래서 30년간의 간극을 메꾸는 실루엣 시리즈라든지, 이후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차기 시리즈 모두 좌절.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을 도입하는 주제에 극장판으로 승부를 하다니, 애초부터 무모했단 말이다. 게다가 프랑스 혁명기의 공포정치식 악(?)의 세력이라는 컨셉은, 이전의 지온공국에 비하면 일본인들에게 호소력이 턱없이 부족하고. 사실 작품이나 세계관으로 놓고 볼 때, 꽤 괜찮은 물건이었는데 아깝다. 메카닉도 꽤 괜찮고. 특히 모형으로 나오면서, F91 프라모델 시리즈들은 명품의 양산소였다. 높은 퀄리티의 색사출, 훌륭한 프로포션, 유연한 관절구조, 후까시 넘치는 실루엣. 이후 HG시리즈의 초석을 만들어줬다고나… 그 중에서도 명품 중에 명품은, 단연 주역메카인 건담 F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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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저편으로 – <미스터 레인보우> [으뜸과 버금 0404]

무지개 저편으로 간 만화 – <미스터 레인보우>

김낙호 (만화연구가 / 웹진 <두고보자> 편집장)

  예를 들어 비가 온 직후처럼 수분이 채 증발하기 전인데, 갑자기 햇살이 비추는 순간이 있다. 이 때, 운이 좋으면 빛이 대기중에서 파장길이에 따라서 분광현상을 일으키면서 커다란 곡선을 그려내는 경우가 있다. 생활용어로, 이것을 우리는 ‘무지개’라고 부른다. 무지개를 보면 괜스레 사람들은 기분이 좋아지고는 한다. 비온 직후 찬란한 햇빛과 함께, 마치 대자연의 힘이 우리에게 희망의 선물을 던져준 듯 한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대홍수 이후 신과 노아의 약속의 징표로 여겨졌으며, 서양 민담에서는 무지개의 ‘저쪽 끝’에는 행복과 보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정말로 무지개의 희망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생식에 얽매인 사랑을 넘어선 사람들, 바로 동성애 인권운동의 현장이다. 동성애 커뮤니티의 다양성을 상징하는 무지개깃발은 78년 처음 만들어진 이래로 대중적인 코드가 되었다. 아마도 그 무지개의 저편에는, 이들이 꿈꾸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인정받는 그런 세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스터 레인보우>(시공사, 1권 발매중)의 주인공은 동성애자다. 사실 ‘야오이’라는 장르가 만화팬들에게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된지 오래인 지금, 그것이 무슨 특징이 되겠냐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여느 동성애 판타지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미스터 레인보우>의 하덕구는 생활인이다. 지금 이곳, 한국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청년인 것이다. 고스란히 있는 편견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커밍아웃을 피하고, 좁디 좁은 동성애자의 커뮤니티에서 위안을 받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활세계 속에서 사랑을 찾아나선다. 밤에는 자신의 동성애 정체성을 잔뜩 부풀려서 폭발시킬 수 있는 직업인 게이바 여(…)가수를 하면서, 낮에는 그런 사실을 숨기고는 사회에서 ‘정상인’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유치원 교사를 한다. 정체성과 사회적 삶을 동시에 유지하려면, 여러모로 바쁠 수 밖에 없는 사회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작가는 꽤나 착한 사람이다. 가끔 희화화되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코믹한 상황의 연속임에도 불구하고, <미스터 레인보우>는 결코 자신의 주인공들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한 유치원생의 잘생긴 아버지에게 연모의 정을 불태우며 소란스러우면서도 진지하게 사랑을 고민하는 덕구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따뜻하기 그지없다. 나아가 그의 주변 인물들 조차도 코믹하고 궁상맞으면서도 따뜻하게 감싸안고 싶은 사람들 투성이다. 대학생 시절부터 덕구를 좋아했던 한 후덕한 여학생, 덕구의 할머니, 허영끼 많은 유치원장, 덤덤한 동료 여교사… <취중진담>등 이전 작품들보다 더욱 편안해진 펜선과, 기교를 가다듬은 화면 연출이 안정감 있게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다. 동성애와 성전환증의 개념이 혼용되고 있다든지, ‘남성답지 않게 여성스러움’ 등 동성애에 대한 막연한 사회적 고정관념을 무비판적으로 재연하고 있다든지 하는 등은 지적의 대상이다. 나아가 아직 완전히 정돈되지 않은 이야기 전개의 호흡도 이후의 발전을 기대하게 만든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 부족했던 부분들은 작가의 손을 떠나서 독자들의 상상력 속에서 완성을 시켜야 할 듯 하다. <미스터 레인보우>의 작가는 최근 급성 폐렴으로 인하여, 무지개의 저편으로 돌아오지 않는 여행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좋은 작품, 더 좋아질 것이 한없이 기대되던 작품을 중간에 남겨두고 가신 고 송채성씨의 명복을 빈다.

[으뜸과 버금 200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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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분량도 capcold답지않게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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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가 —

캐릭터 예찬: 박쥐 옆에 개똥지빠귀

!@#… 2002년 가을 정도, 이라는 괴(?) 동인지가 나와서, 코믹 행사에 부스까지 내서 판매된 적이 있다. 아주 드물게도 – 아니 제가 기억하는 한에서는 최초의 – 미국만화 전용 동인지였던 것이다! 미국만화 정보 사이트 카투넷의 운영자 Majorglory님의 주도하에 여러 작가들과 필자들이 참여했다…심지어 형민우, 강찬호님 등 프로 작가들도 다수. 미국식 이슈 판형을 염두에 둔 편집이 빛나는, 지금은 레어 아이템. 여하튼, 그 지면에 기고했던 글. 2호가 나오면 <영웅이라면, 스판덱스다!>라는 글을 기고하겠다고 미리 아이디어까지 다 잡아놨지만… 2호는 나오지 않고 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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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예찬: 박쥐 옆에 개똥지빠귀

  2001년 미국 프로야구 월드시리즈 우승팀인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1,2선발 랜디 존슨과 커트 실링을 두고, 한국의 각종 일간 찌라시들은 ‘원투펀치’라는 정체불명의 별명을 달아주었다(야구의 권투화?). 하지만 미국 현지에서 이들을 부르는 진짜 별명은 따로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랑스러운 “Dynamic Duo”다! 뭐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Dynamic Duo라는 것은 바로 ‘배트맨과 로빈’을 칭하는 말이다. 슈퍼히어로계의 전설, 궁극의 2인조팀의 별명을 부여받은 두 투수들에게 영광이 깃들기를.

  배트맨과 로빈은 톰과 제리, 콩쥐와 팥쥐 만큼이나 ‘and’가 어울리는 대명사가 되어있다. 배트맨 하면 로빈이 저절로 떠올라야 하는 것이 순리라는 듯이 말이다. 원래 밥 케인이 배트맨을 처음 만들었을 때에는 배트맨은 펄프 문학이나 라디오 드라마(이 중에는 한참 나중에 영화로도 만들어진 ’쉐도우‘도 있다)의 인기장르였던 느와르 풍 범죄 수사물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배트맨은 트렌치코트 대신에 망토를 두르고, 중절모 대신 가면을 쓰고 있을 뿐 원래는 ‘탐정’이었다. 그리고 그 장르의 관습들을 적극 차용해 들여오다 보니, 자연스럽게도 배트맨은 다른 슈퍼히어로들보다 꽤 하드하고 어두운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 주류 만화에서 슈퍼 히어로 장르가 점점 강력한 위세를 떨쳐나가면서, 배트맨 시리즈도 느와르풍보다는 뭔가 ‘히어로물 다운’ 이미지들을 적극 도입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우선은 그 어둡고 하드한 범죄수사 이미지를 벗고, 화려한 액션과 색감의 향연을 펼칠 수 있도록 배트맨에게 또다른 반쪽을 붙여주는 것이 필요했다; 짜잔! 그리하여 로빈이 탄생했다. 때는 1940년, Detective Comics#38호였다.

  로빈은 배트맨의 파트너이자, 모든 면에서 배트맨에 대한 반대말이다. 배트맨을 표현하는 이미지가 중년, 까다로움, 진지함, 신중함, 좋은 체구, 흑청색 계열의 단색 등이라면, 로빈은 청년(혹은 ‘소년’), 경솔함, 대범함, 작은 체구다; 그리고 어둠의 피조물 배트맨과는 정 반대로 빨간 웃통과 초록색 바지, 노랑 망토를 휘날리는, 걸어 다니는 색칠공부 같은 녀석이다. 박쥐와 개똥지빠귀. 당연히 대단히 부조화를 이루며 작위적인 느낌을 줄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파트너쉽이 그렇게도 최강으로 꼽힐 수 밖에 없게 된 것은, 로빈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어두운 배트맨에 대한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저스티스 리그 아메리카같이 단지 다양한 캐릭터들을 골고루 크로스 오버 출연시켜서 마케팅하기 위한 조합이 아니라, 파트너쉽을 만들기 위해서 아예 상대 배역을 만들어낸 것이다. 마치 슈퍼맨의 애인역할이 되기 위해서 탄생한 로이스 레인처럼 말이다.

  배트맨 최상의 파트너이기 위해서 탄생한 로빈. 배트맨과 로빈은 단순한 업무상의 파트너 이상으로, 마치 중년 아버지와 청소년 아들에 가까운 가족급 관계를 보여주기도 하는, 서로 끈끈히 연결되어 있는 파트너다. 특히 배트맨의 지나치게 초인적이고 빈틈없는 능력에 대해서 일종의 핸디캡으로서 작용해준 덕분에, 로빈은 배트맨의 극적 긴장감을 높여주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로빈은 슈퍼 히어로의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보다 ‘인간적’이라는 점에서 참으로 정겨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배트맨 만화를 가장 열성적으로 보는 독자층인 ‘소년’들의 대변자 아니던가! 여하튼, 로빈이 배트맨의 파트너가 되어준 덕에 스토리들에는 더욱 다양한 인간적 긴장관계가 저절로 도입된 셈이 되었다.

  물론 파트너쉽이라는 것은 대단히 미묘한 관계다. 특히 범죄수사물을 기반으로 시작했던 만큼, 비중있는 ‘우리편’ 여성캐릭터가 없는 상태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게다가 로빈의 주요 역할(?) 가운데 하나가 악당들에게 납치 당해서 배트맨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는 점점 심각해진다. 여기에 더하자면, 로빈 – 혹은 딕 그레이슨 – 은 서커스 공중곡예단이었던 부모들이 살해당한 후, 브루스 웨인네 저택에 입주해서 눌러앉아 동거생활을 하게 된다. 이 모든 단서들을 다 더해보고도 배트맨과 로빈의 관계가 동성애 코드로 읽히지 않는다면 오히려 신기한 일일 것이다. 필자같은 건전무쌍한(-_-;;;) 사람도 그런 결론에 달하고 있는데, 눈에 불을 켜고 트집을 잡고자 하는 당시의 검열주의자들에게는 오죽했으랴… 짜잔~ 그리하여 ‘배트걸’이 탄생했다. 여하튼 우리편에 여자도 있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배트걸의 도입은 로빈에게 있어서는 물론, 배트맨 시리즈 전체에 있어서도 사실은 백해무익했다(무슨 유치원 교사가 남녀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을 가는 것도 아니고…). 배트걸이라는 작위적인 캐릭터는 로빈이 맡고 있던 여러 역할들을 잠식해 들어갔고, 배트맨과 로빈의 파트너쉽이 뿜어내던 조화나 호흡은 사정없이 깨졌다. ‘Dynamic Duo’는 깨지고, ‘Dynamic Trio’의 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한 상태로 극적 긴장만 해친 꼴이 된 것이다. 배트맨은 배트맨대로 계속 나름의 입지를 지니고 돌아다녔지만, 배트걸은 로빈을 감싸안고 자폭한 꼴이 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배트맨의 인기와 작품적인 잠재성을 극대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80년대 이후의 재해석에서 로빈의 역할은 점점 더 격하되어 왔다(뭐 배트걸은 거의 완전히 무시당해버렸지만 말이다). 어디, 배트맨 ‘공식 스토리라인’를 한번 살펴 보자. 딕 그레이슨은 배트맨 스토리 안의 시간으로 6년간 파트너를 하다가, 한번 거의 죽을뻔 한 후 브루스가 그의 안위를 걱정, 팀을 깨버렸다. 그레이슨 군은 현재는 ‘나이트윙’이 되어서, 여전히 영웅질을 하고 있다. 뭐, 일종의 다 큰 자식 자립시킨 꼴이지만, 여하튼 이제는 어엿한 DC 세계관의 일원이 되어있다. 이 다음에는 제이슨 토드라는 녀석이 배트맨 자동차(배트모빌)의 타이어를 훔치려다가 2대 로빈으로 등극한다. 그리고는, 2년 정도 활동하다가 조커에게 허무하게 죽어버린다. 그리고 지금은 팀 드레이크라는 녀석이 21세기형 3대 로빈을 맡고 있는데… 이 녀석은 14세, 말 그대로 ‘애’다! 컴퓨터 능력도 출중하고… 더더욱 파트너라기 보다는 꼬마 조수, 마스코트처럼 격하되고 있다. 정사는 아니지만, 배트맨 세계관 재해석의 신호탄을 날린 프랭크 밀러의 명작 ‘The Dark Knight Returns’에서도 로빈이 죽어 없어져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배트맨은 은퇴상태로 중노년에 돌입. 그리고 당돌한 고등학생 아가씨(!!!) 캐리 켈리가 로빈을 자청하고 나선다. 아, 그러고 보니 DKR의 후속편인 ‘The Dark Knight Strikes Back’이 최근에 시작되었는데, 캐리 켈리는 여기서 캣 우먼으로 전업을 했다고 전해들었다(이런…-_-;). DC 세계관의 종합선물세트 ’Kingdome Come‘에서도 배트맨은 독자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이래저래, 한때 배트맨의 위풍당당한 파트너였던 로빈은 동네북 신세로 전락했다. 툭하면 죽고, 무시당하고, 없어지고, 바뀌고…

  아, 물론 배트맨의 가장 강력한 매력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 어두움과 음험함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그 지점들을 상당히 좋아한다; Arkham Asylum에서처럼 누가 광인이고 누가 정상인인지 혼란스러워 하는 광기, 그것은 배트맨 시리즈에서만 가능한 재해석이다. 음험한 광기는, Joker니, Two-Face니, Mad Hatter니, Dr.D니, Scarecrow니 등등 워낙 잘 만들어진 수많은 미친 악역들을 통해서 전달할 수도 있다. 게다가, 배트맨 아저씨의 더러운 성깔머리도 만만치 않게 어둡지 않은가.

  하지만 문제는 오히려 이쪽으로만 너무 흘러오다 보니, 배트맨에서 몸과 몸이 부딪히는 화끈한 액션, 곡예성 스턴트들이 너무나 매말라버렸다는 것이다. 더 이상 그다지 ‘Dynamic’하지 않다는 것이다. 화끈한 액션활극 + 수사극 + 슈퍼히어로 모험의 풍미가 담겨있던 한 시대의 향수는, 역시 로빈이라는 캐릭터를 다시금 그리워하게끔 만든다. 로빈과의 파트너쉽을 통한 뜨거운 남자들간의 로망을 왜 무시하냔 말이냐! ‘dynamic duo’라는 옛 모토를 다시금 강조하는, 진짜 ‘구식 그대로의’ 배트맨 어드벤처를 한번쯤 다시 보고 싶어진다.

  필자가 지금 진짜로 보고 싶은 배트맨 재해석은, 배트맨과 로빈이 우정과 연애감정의 가느다란 경계 위에서 위태로운 곡예타기를 하는, 므흐흐한 물건일지도 모른다(동인들이여! 달려들기를!). 아니면 ‘영웅본색’ 같은 오우삼 영화에서나 보는 끈끈한 남자간의 애증과 파트너쉽의 뜨거운 스토리를 보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앞으로도 ‘배트맨의 숨은 균형추’ 로빈이 맡아야 할 임무는 크다.

 

— 2002. Copyleft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 개작불허/영리불허 —

존재가치 소멸

!@#… 이제 남성들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효용도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 대략 근미래… 자신들의 무가치함에 좌절한 남성들이, 패닉에 빠져서 퇴행현상을 일으키며 ‘범 남성 연합체’를 만들어서 반사회적 파괴활동을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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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컷 정자없이 새끼낳는다    

<앵커> 수컷 쥐의 정자없이도 암컷의 난자만으로 새끼 쥐를 낳게 하는 실험이 일본에서 성공했습니다. 생명윤리 측면에서 또 한차례 논란이 일 것 같습니다. 도쿄에서 양윤석 특파원의 보도입니다.

<기자> 이번 실험에서는 난자가 정자없이도 화학적 자극으로 세포분열하는 ‘단위발생’이라는 방법이 사용됐습니다. 유전자를 조작한 암컷 쥐로부터 채취한 난자의 핵을 다른 암컷 쥐의 난자에 이식한 다음, 화학물질로 자극을 줘서 세포분열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는 곤충이나 어류, 또 조류에서는 특별한 조작없이도 자연상태에서 관찰되지만, 포유류에서 이같은 실험이 성공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일본 언론들은 370여 개의 난자 가운데 정상적으로 태어난 쥐는 2마리이고, 나머지는 사산하거나 태어난 직후 죽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살아남은 쥐는 여러 마리의 새끼를 낳는 등 아직까지 정상적이라고 전했습니다. 이번 실험에 성공한 도쿄농대의 가와노 교수는 “가축 품종 개량에 유용한 방법이지만 지금 단계에서 인간에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여성의 난자만으로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것으로 생명윤리 측면에서 논란이 일 것으로 예상된다고 일본 언론들은 전했습니다.  

SBS   2004-04-22 07:25:10 

보여주면서 말하기: 만화로부터 배우기 [계간 새야 04봄]

[계간 <디자인 교육 새야> 2004년 봄호에 실린 글입니다… 전에 인하대 온라인 강좌에서 써먹은 강좌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보여주면서 말하기의 장점을 설명하는 글인 주제에, 그림 올리기가 귀찮다는 이유로 여기는 그냥 글만 올립니다. -_-; ]

 

보여주면서 말하기: 만화로부터 배우기

김낙호 (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학생들이 필자에게 “멀티미디어란 무엇인가요?”라고 문의해오면 항상 들어주는 사례가 있는데, 바로 <가족오락관>의 ‘스피드 퀴즈’다. 이런 장면을 기억해보자: 한 출연자가 어떤 단어를 열심히 말로 설명해서, 다른 팀원 한명이 해답을 맞출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다가 다른 색깔의 카드에 쓰여진 단어가 나오면, 말을 그만두고 몸짓만으로 여러 흉내를 내며 같은 목표를 향해서 매진한다. 두 가지 시도 모두 보통 상당히 어색하면서도 처절하기 마련인지라, 시청자와 관람객의 폭소를 유발하곤 한다. 왜 그럴까? 평소에는 우리가 그만큼 말하기와 보여주기를 동시에 자연스럽게 구사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이상의 방식을 동시에 결합해서 표현하는 행위, 즉 가장 근본적인 차원의 멀티미디어인 것이다.

보여주며 말하기를 지면이라는 공간으로 옮긴 것이 바로 그림과 글의 결합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림과 글의 결합은 글이나 그림 각각이 전달하는 바 이상으로 효과적이고 자연스러운 표현을 가능하게 해준다. 하지만 얄궂게도 결합 자체에서 나오는 힘이 워낙 강한 덕분에, 단지 특정한 하나의 표현방식을 한없이 자세하게 파고들면서 표현의 정수를 찾아내고자 하는 일부 ‘고급예술’ 진영으로부터 저급한 것으로 핍박을 받기도 했다. 그 핍박받는 대상의 대표주자가 바로 만화인데, 그만큼 만화가 글과 그림의 결합을 통한 새롭고 효과적인 표현의 개발에 있어서 선두 역할을 해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보여주면서 말하기가 단지 보여주기와 말하기를 산술적으로 각각 합친 것 이상의 효과를 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선 ‘말하기’에 해당하는 문자언어를 살펴보자. 문자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발명품 가운데 하나인데, 지극히 표준화된 일련의 기호들의 조합으로 넓은 범위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문자를 ‘선들의 조합’이 아닌, 하나의 기호화된 문자로서 인식한다는 것 – 즉 독해력(literacy)이라고 부르는 기능은 정보전달의 효율성을 통해서 인류의 문화를 바람직하든 말든 간에 다음 단계로 올려놓았다. 지금 PC를 켜고 메모장을 열어서, 이 글 가운데 한 페이지 분량을 타이핑하고 저장해 보자. 대략 5-6KB 정도의 용량의 파일이 생긴다. 이제, 그 똑같은 내용을 출력해서 그것을 스캐너에 넣고 스캐닝을 하고, JPG 등의 그림 파일로 저장을 해보자. 읽을 수 있을 정도의 해상도로 저장하려면 아무리 못해도, 5-60KB (경우에 따라서는 그보다 훨씬 큰) 파일이 생긴다. 즉 선들의 조합이 아닌, 하나의 기호로서 인식하게 될 때 정보의 전달은 훨씬 표준화되고 효율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1: 문자로 인식될때 소실된는 다양한 시각 정보] ⓒ맥클라우드

하지만 문자는 나름대로의 단점이 있다. 기호라는 형식으로 표준화시킨다는 것은, 그 만큼 미묘한 차이들이 사라진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춘기 소녀의 연정이 담긴 예쁜 글씨의  러브레터도, 원고마감에 즈음하여 긴박하게 악필로 갈겨쓴 글도, 문자라는 차원에서는 내용 이상의 차이가 없다. 다시 말해서 미묘하고 풍부한 시각적 의미가 거세된, 내용만 남는다. 이러한 약점을 커버할 수 있는 것은 예전부터 그림의 영역이었고, 글은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여 글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살릴 수 있는 부분, 즉 추상의 영역이나 수사학 등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림 역시 글을 통해서 전달할 수 있는 이야기나 정서의 전달보다는, 시각적 실험에 집중했다. 즉 그림과 글은 자신들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일종의 분업관계로 발전해 나갔다는 말이다 (사실 이런 분업은 주로 서양에서 일어났던 것이며, 동양의 경우는 시화라든지, 서예 등 글과 그림의 연결고리가 일정부분 돈독하게 유지되기도 했다). 글과 그림이 각자의 방향만 보고 달려나간 분업체제 하에서는, 두 가지가 점점 서로의 연결고리를 잃어갔다. 소위 고급예술은 각 매체의 가장 미묘한 가능성들이나 미학을 파고 들어가는 것 – 즉, ‘표현’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에 중독된 나머지, 모든 매체의 원래 목적인 효과적인 공유/교류라는 지점을 놓쳐버리는 경향이 생겨났다. 즉 가능성의 실험에 매진하다가 정작 실용성을 잃은 것이다.

이에 비해서 태생적으로 대중성을 기반으로 해왔던 만화라는 장르는, 정반대의 위치를 고수하면서 발달했다. 가장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서, 기존의 법칙이나 규율을 무시하거나 의도적으로 파괴해나간 것이다. 하나의 그림 안에서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한다는 회화의 규율을 벗어던지고 여러 그림들을 연속시켜서 읽도록 만들었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서 그림에 글을 삽입하여 활용했다. 미적인 아름다움으로서의 표상들이나 기법들보다는 효과적으로 형상과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간략화된 카툰화법을 도입했고, 이러한 요소들을 때로는 한꺼번에, 때로는 하나씩 사용했다.

그림과 글의 접합 방식은, 현대만화에 이르러서 강력한 새로운 이정표들을 몇가지 맞이 했다. 단지 글과 그림이 병렬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문자 기호들이 그림 속으로 적극적으로 파고들어가는 양상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의성어/의태어 삽입이다. 의성어/ 의태어 삽입은 만화의 극중(diegetic) 공간의 한복판에 문자로 된 기호들을 넣는 방식으로, 현실공간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구상(具象)과 상징계의 공존을 만들어 낸다. 단적으로, 현실세계에서 자동차가 큰 소리를 내며 브레이크를 밟을 때 하얗고 큰 ‘끼이이익~’하는 글자들이 바퀴에서 쏟아져 나오는 일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자들이 만화 속에 나올 때 독자는 그것을 시각요소가 아닌, 청각 등 다른 감각에 호소하는 자극으로 받아들인다. 이 과정은 우리에게 지금은 많이 익숙해져 있지만,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너무나 놀라운 과정이다. 의성어로 쓰인 문자의 그래픽적인 배치에 따라서 화면상에서 그 소리의 음원과 방향 등을 나타내 줄 수도 있다. 나아가, 글자체, 크기, 크기변화, 필체 변화 등 수많은 시각적 요소들을 통해서 그것이 표상하는 오감의 성질을 다양하게 규정지을 수 있다. 극중 공간 속으로 들어간 의성어/의태어는 문자이면서도, 필요에 따라서 그림으로서의 속성을 얼마든지 살려낼 수 있는 독특한 만화 표현 장치인 것이다.

[그림2: 말풍선의 유희적 활용] ⓒ끼노

두 번째는 바로 ‘말풍선’이다. 단순한 그림과 글의 병렬 – 예를 들어서 그림 밑에 글이 자막처럼 쓰여져 있는 방식 -을 넘어서서 말풍선이라는 기구가 발명된 이유는, 바로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진행 묘사 때문이다. 말풍선은 극중 공간 속에, 그 공간과는 분리된 다른 차원의 별도 공간 – 즉, 언어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의성어/의태어의 경우 역시도 시각 세계와는 다른 것을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연현상을 만들어 내는 기구다. 하지만 말풍선은 아예 현실의 감각영역이 아닌, 추상의 공간을 접합시킨다. 그리고 그 속에 극중 인물이 말하는 언어가 문자로서 표현이 된다. 하지만 말풍선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꼬리에 있는데, 그 것이 특정한 극중 인물을 가리킬 때 그 공간 속의 언어는 바로 그 인물의 것이 된다. 말풍선의 발명 덕분에, 만화에서 화자(話者)의 개념이 태어났고, 세부적이고 드라마틱한 서술이 가능해졌다. 말풍선은 극중 공간의 흐름을 크게 방해하지 않으면서 언어의 세계와 현실세계를 교묘하게 병존시킨다. 말풍선은 그림으로 묘사된 이야기 세계 속으로 언어를 끌고들어왔으며, 그 덕분에 소설 등의 다른 이야기 문학이 지금까지 이루어놓았던 업적들을 흡수할 수 있는 강력한 기반을 이룩했다. 또한 말풍선을 만들어냄으로서, 말풍선의 모양 그 자체를 이용하거나 말풍선의 안과 밖에 들어가는 언어를 차별화하여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나아가, 말풍선은 ‘생각풍선’이라는 변형도 낳았다. 화자를 향한 꼬리를 일련의 동그라미로 처리함으로써, 만화는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까지도 가볍게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물론 말풍선은 ‘언어’의 공간이기는 하지만, 만화라는 시각 매체 속에서는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서라면 그 규정 역시 절대적이지 않다. 말풍선 속에서도 글자체, 글자크기, 크기의 변화에 따라서 말의 크기나 어감, 목소리, 속도 등이 대단히 다양하다. 심지어 그림의 요소들을 말풍선 안으로 끌고 들어와서 언어의 공간과 그림의 공간의 경계선을 가볍게 허물어버리는 표현들도 등장한다. 그만큼 만화라는 양식에 있어서는 글과 그림의 혼합, 경계선의 월경 등이 필요에 따라서 자유롭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의성어/의태어, 말풍선 등 흔히 알려져있는 만화의 ‘보여주며 말하기’ 기법 이외에도 다양한 방식들이 필요에 따라서 만들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서 칸 경계선을 글자로 만들어서 그 칸에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를 잡아주거나, 만화 칸의 배경을 자잘한 글씨의 글로 채워서 잡담같은 분위기를 만들거나, 아니면 칸 바깥의 공간에 글을 배치시킴으로서 그 페이지 분량에 해당되는 사건 전개 전반 위로 흐르는 거대한 나레이션으로 기능하게 하는 등, 작가의 의도에 따라서 다양한 표현을 주저없이 활용해볼 수 있다.

[그림3: 말풍선의 안과 밖] ⓒ카고 신타로

글과 그림이 이야기 전달을 위해서 결합하는 파트너쉽 관계에 관해서, 만화이론가 스콧 맥클라우드는 이 분야의 고전인 <만화의 이해(Understanding Comics)>에서 몇가지 이분법적인 전제를 하고 있다. 우선, 이야기의 전달은 중심적인 상황묘사(줄거리)와 심화되거나 자유로운  표현방식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야기상의 장면을 묘사하는 역할을 그림이 맡아주면 글이 보다 넒은 영역을 자유롭게 탐색할 수 있으며, 반대로 줄거리 묘사를 글이 맡아줄 경우 그림이 그만큼 실험적인 모험을 감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 만화에서 글과 그림이 결합되는 방식을 크게 7가지로 거칠게 구분하여 서술하고 있다:

1) 글 중심: 글이 중요한 서술도구이며, 그림은 글에 대한 간단한 도해에 그친다.
2) 그림 중심: 그림이 중요한 서술도구이며, 글은 의태/음향효과에 그친다.
3) 이중 결합: 글과 그림이 같은 상황을 중복적으로 전달한다.
4) 첨가 결합: 글과 그림이 서로의 내용을 좀 더 강력하게 보좌해준다.
5) 병렬 결합: 글과 그림이 각각 일견 서로 무관한 내용을 보여준다.
6) 몽타쥬: 글이 그림의 일부로 녹아들어간다.
7) 상호의존적 결합: 글과 그림을 둘 다 독해해야 하나의 상황이 이루어진다. 

비록 애매한 범주이기는 하지만, 이 가운데 만화에서 가장 정교하게 발달시킨 것은 상호의존적 결합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글과 그림은 엄격한 분업관계가 아니라, 결합을 통해서 원래의 글과 그림 이상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전개함에 있어서, 글은 그림과 역할분담이 자연스럽게 서로 섞여있다. 여기에 만화의 또다른 강력한 표현적 강점으로 꼽히고 있는, “상황 그림의 연속성”이 더해지면 그 효과는 더욱 무궁무진해진다.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별적인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그림이 담긴 각 칸마다, 글과 그림이 만들어내는 균형이 조금씩 변형되고 흔들릴 때, 독자는 이야기속으로 하염없이 빨려들어가고 만다.

[그림4 : 명료함은 반드시 쉬움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필링엄/수서

예술적 실험이 아닌 설명을 위주로 글과 그림이 결합할 때 나오는 가장 선명한 효과 가운데 하나는, 내용이 구체적이고 명료해진다는 것이다. 글과 그림은 서로의 의미를 확장시켜주기보다는, 구체적으로 제한한다. 한 예를 들어보자. “새가 날고 있습니다”라는 글과 결합되어 나오는 비둘기 그림은, 사람들이 글만 읽었을 때 상상할 수 있었던 새의 범주(독수리, 참새, 기러기 등)를 일거에 정리해버린다. 또한 글은, 그림 속에서 비둘기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형상이 보도블럭 위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이 아닌, 하늘을 날고 있다는 상황으로 규정한다. 속칭 ‘학습만화’로 불리우는 실용만화들의 높은 교육적 효과는 바로 이러한 특성에 기인한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유의해야할 지점은, ‘명료함 = 쉬움’ 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설명대상에 대해서 핵심적인 개념 위주로 요점정리하는 것에 성공한다고 할지라도, 그 핵심개념 자체가 저절로 커버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아무리 깔끔하고 작게 압축해서 짐가방을 꾸린다고 할지라도, 짐의 무게 자체는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따라서 글과 그림의 결합을 통해서 내용을 명료화시키는 것은, 보다 다양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서술 방식을 통해서 내용을 풀어주는 것과 동행할 때 비로소 효과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떤 학습만화는 머리만 아프고, 어떤 학습만화는 알찬 지식으로 다가오는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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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글과 그림의 창조적인 결합방식과 그 의미를 만화라는 양식을 중심으로 몇가지 살펴보았다. 애초에 만화학 개론을 강의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논의를 접고자 한다. 분명히, 다른 영역의 여러 표현양식들이 성공적으로 결합될때 일어나는 신비한 결과는 흥미롭다. 그것은 이야기와 정서, 생각들의 더욱 효과적인 전달을 가능하게 하며, 보다 깊은 의미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필자가 이 지면에서 하고 싶은 말은 단순히 만화라는 양식에서 만들어낸 개별적인 글-그림 결합 기술들을 참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만화라는 양식이 견지해온 자세, 즉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서는 자유로운 창조정신으로 매체간 벽을 허물고 넘나들 수 있다는 마인드 자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분과 학문이나 전통적인 형식구분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동원하고 결합시킬 수 있다는 자유로운 발상이 필요하다. 굳이 말하자면, “만화를 읽듯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것이 좋다”.

[그림5: 초보적인 글-그림 결합이 적용된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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