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어디에? 황빠 담론 선동가들을 기억하며 (v1.4)

!@#… 누구나 주지하다시피, 이번 황우석 사건은 일종의 담론전쟁이었다. 평범한 대형 과학 사기 사건으로 끝났어야 할 사건이 국익이 어쩌니 희망이 어쩌니 하면서 무슨 국가의 운명을 건 대단한 것으로 포장되어, 오히려 가장 간단한 사회적 공공선의 지향점인 “나쁜 짓 하면 벌받는다”는 진리마저 당연하다는 듯 부정되도록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혁혁한 뻘타로 사태를 악화시킨 황빠 담론 주범들과 공범들이 참 많이 있었는데, 워낙 일들이 많이 일어나다 보니 다 기억하기도 힘들지 않던가. 그래서, 좀 적어놓을까 한다. 특성상 언론 미디어계가 중심이 되겠지만, 그 못지 않은 활약을 보인 일반인들도 넣어서. 리플반영 업데이트한, ver.1.2(06.5)에, 약간 코멘트와 내용 추가한 ver.1.3(06.6), 그리고 ‘학계’라는 치명적인 누락을 발견한 ver 1.4 (06.11). 설명도 중간중간 새로 파악하는 상황에 따라서 업데이트.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끝까지 읽기(클릭)

애국적 열망과 숭고한 과학…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

!@#… 황우석 과학 사기사건과 저널리즘에 대해서 열심히 이야기해온 만큼, 결국 논문 작업까지 이어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 최근 서울대학교 언론정보 연구소에서 이번 사건에 대해서 국제 세미나 행사 “방송 탐사 저널리즘의 이론과 현실”(클릭)실시. 여기서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강명구 선생님 주도로 수행한 연구 Patriotic Passion and ‘Sublime’ Science: Un-searching for Journalistic Truth (한국어 제목: 애국적 열망과 숭고한 과학: 진실추구를 억압한 저널리즘)에 2저자로 참여. 아직 작업중인 논문이기는 하지만, 여튼 첫 공개.

!@#…제목에서 볼 수 있듯 사기사건 자체보다 그것을 다루는 저널리즘의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기자들도 속았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보다 저널리즘적 진실 추구의 과정 자체를 적극적으로 억압했다는 문제를 지적. 뭐 결국 여기 블로그에서 계속 해오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_-; 주로 집중한 부분은 저널리즘적 실천의 담론전략과 맥락조건, 그리고 무엇보다 결국 그 절대적인 황우석 만세 분위기가 뒤집혀 나갔던 “담론 균열의 기제”. 특히 capcold로서는 담론 균열의 기제 부분에서 분석틀을 의욕적으로 고안해낸 만큼, 이후에 분리해서 개별 논문으로 총대 매고 직접 진행하고자 한다. 행사 자료집은 위의 링크에 있고, 여기에는 당시 발표자료로 사용한 요약판 파워포인트 자료를 링크한다.

영어판은 이쪽 클릭!
한국어판은 이쪽 클릭!

 

— Copyleft 2005 by 강명구/김낙호/김학재/이성민. 이동자유/수정불가/영리불가 —

그래, 그러니까 PD수첩이 죽일 놈들인가?

!@#… 카페애니메이트 크로스카운터란의 “PD수첩이 틀리다면 앞으로 결과는?”(강조는 여기 전용). 쓰레드에 달아 놓은 글. 미디어를 공부한다는 capcold로서 작금의 여론/언론 개판 모드에 대해서 도저히 아무 말 안하고 있기가 힘든데, 정작 취지는 사람들이 쓰잘데기 없이 말들만 많다는 것. 미묘한 모순이다.

!@#… 이번 건에서 느끼는 바는, 평소에는 꽤 멀쩡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의외로 많이 피디수첩 때려죽이자 또는 우석오빠 만세 광기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 2005년, 한국사회를 설명하는 최고의 키워드는 ‘대세‘라고 정하기로 하겠다. 이건 이제는 심지어 집단 전체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파시즘도 뭣도 아니다. 국익 어쩌고는 변명일 뿐이고(아니 뭐가 국익인지 이미 사고를 포기한 것 같다), 이제는 그냥 대세에 같이 편승해서 맹목적으로 그저 피디수첩을 때려부수고 싶은 것 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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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 깁니다만, 카페란을 얼룩지게 하는 것 보다는 크카가 훨씬 이런 취지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여기다가 올립니다.

(1) 원래 PD수첩에서 다루고자 했던 본체가 바로 복제 체세포의 진위여부 자체였고, 난자기증 윤리문제 건은 기껏해야(?) 워밍업 정도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난자기증 건은 PD수첩에서 뭔가 새로운 문제지적을 했다기 보다, 이미 세튼 결별 건으로 이미 다 실질적으로 드러난 것을 취합하고 약간 증언을 더 확보해서 보도한 것 뿐이죠. PD수첩에서 한번 그런식으로 다루었다고 해서 특별히 국제적으로 새로운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국익'(그게 도대체 뭔지 도저히 모르겠지만)에 실질적으로 침해되는 것도 아니죠. 연구과정의 윤리문제야 워낙 간단히 정리됩니다: 황교수가 뻥쳤다, 라는 것. 법적으로 문제없고, 연구성과도 보존되기로 했으니 남은 이슈라고 해봐야 그것 뿐이죠. 하지만 그것마저도 황교수 기자회견을 통해서 봉합. 저는 왜 그 정도 방송에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오버해서 우석 오빠 건들지마를 외쳤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조동이 합심해서 MBC 때리기에 나선 것은 어제 오늘일이 아니니 그렇다 치더라도.

(2) PD수첩 따위가 감히 검증을 하려고 해, 라는 괘씸죄 여론은 더더욱 이해가 안갑니다. 학술지에 나간 것은 이제 이것이 진리다, 라는 마침표가 아닙니다. PD수첩이 아니라 일개 고등 학교 과학서클이라도 “어, 뭔가 수상쩍은데” 싶으면 검증을 나설 수 있는 것이 바로 학술의 세계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황랩에서 협조를 해주느냐 안해주느냐는 그들 스스로 결정할 문제고 말이죠. 그런데 PD수첩건의 경우, 귀찮아서 그랬든 어쨌든 체세포를 일정량 줬습니다. 자, 이거 먹고 떨어져라, 전문검증 기관에 가지고 가서 검증해봐라. 그래서 검증을 해본 겁니다.

(3) PD수첩은 왜 이렇게 돌쇠짓을 하는 것일까요. 연구 결과에서 편법이 있었다는 인사이더 제보가 들어옵니다. 그 제보를 살펴보니, 연구실 핵심 인력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것을 취재하는 것이 언론의 본분입니다. 취재하고 나서 근거가 충분히 모이면 보도를 하는 것이고 말이죠. 그런데 취재를 위해서 검증을 하는 중, 기관에서 직접 받은 체세포들이 4개는 판독불가(훼손), 1개는 불일치. 국익이니 윤리니 우석오빠 사랑해요를 다 떠나서, 이 결과 자체만 놓고 판단했을때 과연 어떤 판단을 내리는 것이 좋겠습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다시 검증 해보자”. 지금 상황이 정확히 여기까지입니다. 취재를 통해서 제보된 의혹들에 대한 충분한 검증이 끝나면, 그때가서 방송을 합니다. 검증이 안되면 방송이고 뭐고 못하죠. 혹은 의혹 자체의 존재 대해서만 이슈를 정리해서 보도하거나. 지극히 상식적이지 않습니까.

(4) 물론 PD수첩의 보도방식이나 여론 향방에 대한 대처방식이 세련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고 봅니다. 방송도 아직 안나간 상태에서 이따위로 추측보도들이 마구 나오도록 정보가 세어나갔다는 것, 그래서 무려 취재 과정에 대한 기자회견까지 한다는 자체가 전혀 프로답지 못하죠. 외부 영향을 최소화해야하는 시사 고발 프로그램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주먹구구입니다. 도저히 이번 건을 어떻게 수습하려는 것인지, 그 자충수의 끝이 전혀 짐작도 안갑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영향을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열광적인 지지자들 스스로가, 황랩의 연구가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성과에 대한 의혹을 한번 제기한다고 해서 무너져내릴 만한 만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국익’이라는 모호하지만 이상하게도 공감대가 넓은 이데올로기에 묻어가서 ‘잘난 언론’에 대한 평소의 불만과 스트레스를 이번 기회에 한번 터트려보자는 것에 불과하지 않는지. 한번 생각해볼만한 일입니다.

PS. 100분토론에서 중앙일보 홍혜걸 기자(예, 학술지 엠바고를 깨서 물의를 일으켰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가 출연해서 굉장한 말을 하더군요. 요지는 “진실보도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파장을 고려해서 해야한다”.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그 파장을 고려하는 기준이 하필이면 그 분에게 있어서는 ‘국익’이더군요! 기자가 무례한 취재질을 허락받고, 명예훼손 고소로 부터 그나마 상당부분 제외되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기자들은 진실 오타쿠 들이다’라는 사회적 역할 합의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근본적인 자기 기반을 타협해버릴 수 있는 기준이 고작 실체도 모호한 ‘국익’이라니, 스케일이 너무 작아서 실망했습니다. 최소한 ‘보편적 인권’ 이나 ‘세계 평화’ 정도는 되어야지…;;; 만약 중앙일보와 PD수첩 가운데 어느쪽이 언론의 역할에 충실한가를 물어보신다면, 0.5초 망설임도 없이 PD수첩의 손을 들어주겠습니다.

(나중에 한참 밑에 또 추가한 부분)

!@#… 그보다, PD수첩에서 검증한다니까 많은 사람들은, 어디 방송국 창고에서 피디들이 플라스크 들고 실험하는 줄 아는 듯 합니다(진짜로). 황랩에서 논문제출 전에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검증받아서 자료제출하듯, MBC도 전문기관에 의뢰해서 평가자료를 받아보는 것 뿐입니다.

저는 학부생때, 기말과제를 마감시간 내에 내야하는데 실험 데이터는 엉망이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론적 또는 절차상의 큰 문제라기보다는, 학부생들이 가용한 장비라는 게 워낙 열악해서 에러가 많이 들어가고 샘플사이즈도 작고 실험자의 숙련도도 낮고 뭐 여튼 여러가지 운용상의 결점들이 있어서 그랬으리라고 지금은 회상합니다. 여튼 그래도 깨끗한 보고서를 내기 위해서 한 일은 간단했습니다: 실제로 데이터에 일괄적으로 약간씩만 수치를 더하기. 그 결과 아주 해피한 결과보고서가 되어주었죠. 물론 학문적 측면에서 볼 때, 아주 심각한 사기를 친 셈이지만 말입니다. 다행히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학부생 숙제 정도여서, 스스로 양심 한번 찔리고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혼자 다짐하고 끝난 일이었습니다. 만에 하나, 이런 패턴이 황랩에서 일어났다면, 정말 수습불가능입니다. PD수첩에서 검증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물론 황랩이 스스로 연구활동에 방해받으면서까지 검증에 꼭 전면 협조해줘야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이미 협조하겠다고 계약서까지 썼다고 합니다). 검증 결과 문제 없음으로 드러나면 방송하고 자시고 할 건덕지가 없어지는 것이죠. 한마디로, 아무 일 없이 끝나는 겁니다.

이런 비교적 정상적인 언론 취재 과정 속에서, 난데 없이 너도나도 중간중간 새어나오는 오만 짜투리 소문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섣부른 분노를 터트리고 있는 것 자체가 “광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요새 PD수첩이 어쨌더라 하는 보도들의 태반은, 저에게는 “오노가 새끼발가락이 못생겼다더라” 하는 뉴스 이상의 가치를 주지 않습니다. PD수첩이 사실은 잘나고 우수한 프로그램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PD수첩이 시도하고 있는 기능이 언론의 존재 의미 그 자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추가… 그쪽 토론도 계속 현재 진행형이라서;;;;)

!@#… **님/ (1) 사람들이 실제로 기자가 진실 오타쿠라는 설정을 믿고 안믿고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바로 그들이 지향해야 하는 지점이라는 말입니다만. (2) 아직 방송을 안했습니다! 그게 지금 가장 황당한 것 아닙니까. 취재과정에서 정보가 새어나간것 뿐이고, 그것으로 별별 보도를 하고 있는 것은 정작 PD수첩이 아니라 조중동과 오만 네티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PD수첩을 거꾸로 매달아버리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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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 음모론은 그다지 논의에 반영하고 싶지 않습니다. 미끼론은 물론이고, MBC가 시청률 확보를 했는지 역시 근거가 없습니다. PD수첩을 방영해야 시청률이고 뭐고 나옵니다. PD수첩으로 물의 일으킨다고 드라마 시청률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니 말이죠. 게다가 시청률 확보의 이유는 애초부터 광고 확보, 광고 단가 상향조정 때문입니다. 아무리 멍청해도 그런 좌판 접는 짓을 하지는 않습니다. 뭐랄까, 많은 분들이 언론 전반에 대한 평소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이번 사건 전개과정에 대한 냉정한 – 아니, 사실에 입각한 시각을 잃어버리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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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 (1) 피디수첩에서 이 주제를 다루는 것 자체가 좌판 접을 만한 짓은 아닙니다. 까놓고 이야기해서, 난자매매 관련 보도를 한 첫번째 PD수첩 프로만 하더라도 “영웅만세”를 드높였던 다른 황교수 관련 뉴스들과 비교하자면 악의 넘치는 보도처럼 보이지만, PD수첩의 평소 모습이나 2580 같은 시사 고발 프로라는 기준에서 보면 그다지 특별히 더 심할 것도 덜할 것도 없었습니다. 만약 후속편, 즉 본체가 방영된다 할지라도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날 것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즉, PD수첩은 그냥 원래 해오던 대로의 사회 고발 프로를 또하나 만드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우석 오빠 사랑으로 광분해서, 우리가 당신들 좌판을 접어버리겠다고 협박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이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이해 가능한 논리적인 상황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음모론도 아직 들어갈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2) 취재가 안끝났으니까 방영을 미루는 겁니다. 취재는 언제 끝나냐고 물으신다면, 결론이라고 할만한 검증결과가 나와주면 그 때 끝납니다. 그런데 검증결과는 아직도 진행중입니다. 그렇다면 방영을 못합니다. 또는 검증결과가 나와도, 문제가 없다면 방영을 못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당당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 물론 피디수첩이 이 안건을 다룰만한 성격의 프로였는가, 라는 것은 분명히 문제입니다. 제보를 했다는 사람도 만약 진짜로 진실을 밝히고 싶었다면 애초에 사이언스지에 제보를 했어야 했죠(왜 일부러 PD수첩을 택했을까 같은 또다른 음모론은 사양합니다). 하지만 피디수첩이, 들어온 의혹을 단지 황우석 교수가 세기의 영웅으로 잔뜩 칭송받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살포시 은폐하고 뭉개버렸다면 그게 더 큰일이었을 것입니다. 방송도 안나온 상태에서 피디수첩을 두둔하자는 것이 아니라, 근거 없는 분노에 휩쌓인 나머지 정상적인 민주주의 사회의 정상적인 언론 기능까지도 싸그리 부정하는 최근의 여론 경향이 심히 걱정되서 꺼내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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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시류와 타협해서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아니면 충분한 근거도 확보하지 못하고 어설픈 의혹과 적당한 음모론으로 포장된 프로가 무려 방영까지 된다면 그때 비로소 저는 PD수첩에 분노할겁니다. 그 전까지는 제가 PD수첩에 분노해야할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갖가지 뒷소문들 흘러나오는 것들만 가지고 수십 수백건 기사를 뽑아내서 뿌리고 다니는 여러 잡배 언론매체들과, 언론의 마땅한 역할마저도 부정하고 일방적인 국익만능주의 타령을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지금 이미 분노하고 있습니다.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 수정 영리 당신들 맘대로. —

보도 공정성에 대한 페티쉬

!@#…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언론학회에서 발표한 <대통령 탄핵 관련 TV방송 내용분석>. 내용은 보시면 알 듯. 귀찮으신 분들은 결론만 읽고. 첨부파일 참조.

!@#… 결국, 방송이 불공정한 보도를 했다는 거다. 그걸로 논쟁이 붙었는데… 나는 그게 왜 논쟁거리가 되는지를 솔직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방송이 한민자의 탄핵처리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것은 체감적으로 다들 느낀 바 아닌가. ‘편들지 않기’라는 기준에서 볼 때, 불공정한 보도를 했다는 건 완전 납득.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즉, 연구보고서 자체에는 그다지 이의도, 논란거리도 붙일 만한 필요가 없다고 생각.

…다만 문제는 그 이전에 조중동을 위시한 신문들이 그 반대방향으로 불공정한 짓거리들을 많이 했고 그것에 대한 대안적 담론이 필요한 상황에서, 방송의 그러한 불공정한 보도행태가 과연 잘못되었던 것인가…라는 것이다. 음. 이렇게 물어보고 나니까, 그래도 사실 잘못된 건 맞다. 다시 물어보자. 불공정한 보도를 하기로 한 것이 과연 잘못된 선택이었는가? 이것도 이렇게 말하고 나니까, 마치 ‘선의의 거짓말은 해도 되는가’ 라는 식의 도덕적 딜레마 같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뭐, 이 정도에서부터 생각을 시작해보자.

…(생각의 흐름… 중간 과정 생략…)…

…그러니까, 나는 저널리즘 규범론의 핵심 축은 ‘공정함’보다 ‘의도의 선명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도라는 것은 크거나 작거나 결국 불공정할 수 밖에 없다. 도덕적으로 공정함을 표방하거나 지향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중요하게 강조하고 요구해야 할 것은, 성향과 목표를 확실히 해달라는 것. 즉 나는 이러이러한 입장에서 저러저러한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보도를 하는 것이다, 라는 전제를 명확히 해주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그냥, 정정당당하게. 그러면 알아서 잘 감안해서 불공정한 뉴스라도 나름대로 공정하게 머리 속에서 저울질해서 받아들여줄테니까.

어차피 정보가 마구잡이 과잉으로 넘쳐나는 2000년대의 한국이라면 더더욱. 비유하자면, 가위 같은 것이다. 오른손잡이용 가위를 던져놓고 이건 그냥 가위입니다, 라고 해놓고 왼손잡이들을 괴롭히는 건 물론 곤란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기술적으로 현실성 없는 양손잡이용 가위를 만들어 줄것을 무리해서 부탁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이것은 오른손잡이용 가위입니다’라고 명확하게 꼬리표를 붙여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왼손잡이는 왼손잡이용 가위를 구하거나, 없으면 그것이 필요하다고 강하게 주장을 해서 만들어 낼 수도 있다. 필요하면 둘 다 구비할 수도 있고, 자신이 운영하는 옷가게 점원들의 특격상 왼손잡이용 가위가 더 많이 필요하다면 그쪽으로 비중을 높여도 된다. 즉, 기계적인 원칙에 따라서 소스 자체를 억지로 중간급으로 거세시키기보다는, 사람들이 선택에 따라서 자신의 정보를 정리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조선일보가 좆같은 이유는 자신의 의도를 숨기면서 공명정대함을 부르짖으며 나아가 정보 자체가 아예 날조된 것이 많기 때문이지, 논조가 편향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편향되어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편향되어 있지 않다고 우기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언젠간 이 논지로 연구논문을 쓰겠지… 좀 더 부지런하게 움직이다보면 언젠간…)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옛날에 썼던 게시판 의사소통 관련 이야기…

!@#… 97-98년동안(그러니까, 무려 학부시절…그것도 군인 신분도 못벗어난 상태에서), PC통신 나우누리에 있던 심리학과 사이버 과방에 주말 연재(?) 칼럼을 끄적였던 적이 있다. 꽤 다방면의 주제를 종횡무진한 만담반 진담반의 물건. 비록 그 통신 공간은 이제는 사라졌지만, 게시판 및 자료실 내용은 모두 백업해놓았던 덕택에 오랜만에 한번 다시 캡춰했던 것을 들춰보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어이쿠… 정말로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아이디어들이 마구 날라다니는구나… 라는 인상. 하지만 여러모로, 지금까지도 가지고 있는 여러 세계관의 원형적인 모티브를 엿볼 수 있는 대목들이 있어서 내심 푸훗하고 미소를 짓게 만든다. 그런 것이 일기장의 효용일까?

…여튼 전에 언급했던 전자게시판의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부분이 보이길래 살짝 퍼왔다. 당시 심리학과 온라인 커뮤니티의 게시판 상에서 익명 게시판을 중심으로 많은 트러블이 있었던 맥락에서 나온 질책성 글이었는데… 당시에는 이렇게 순박하게 문제에 접근했구나, 라는 느낌. 머리가 마구 굵고 복잡해진 지금으로서는 꿈도 못꿀 명쾌한 도덕주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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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낙호] 까투리의 헛소리….(47)

올린이:서울심리(서울심리) 98/12/07 11:19 읽음: 0 관련자료 없음

(전략)

!@# … ‘게시판 의사소통’

현실세계의 심리과 과방에는 두 대의 컴퓨터, 랜 단말기가 있다. 그것도 나란히. 그 두 대를 잡고 서로 채팅을 하면 어떨까… “대화의 단절의 시작”이라 명명하기로 그냥 결정해버렸다.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대화를 단절하는 행위라. 생각해보니까 참 재미있군.

(아직까지의) 컴퓨터 통신이라는 매체, 그 중에서도 ‘게시판’ 이라는 물건은 참 신기하다. ‘글로 말을 하는 것이다’. 물론 대가리가 커다란 인간들, 그 중에서도 ‘지식인’ 흉내를 자주 내는 대학생이라는 계급은 ‘논쟁’을 벌일 때 글이라는 매체로 해서 그 권위를 높이려는 ‘자기 위안 행위’를 자주 해왔다(게다가 하고 싶은 말은 많아도, 여러 사람들에게 듣도록 하는 자본력이 없으니 말이다). 그런 전례로서 대자보 문화, 집단 잡기장 문화라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 압도적인 보존성이라는 측면에서 – 따라서 대중성이라는 측면에서 게시판에 비길 바가 못된다. 물론 대중성이라는 말은 아이디라는 (유료!) 출입증의 필요성을 우선 논외로 할 때 말이다. 오랜 시간의 보존성과 접근장소의 자유로움으로 인하여 한 번 재기된 화두는 오래오래 남는다. 한 인간이 어떤 안건에 대하여 대자보를 잔뜩 써서 벽에 붙였다. 좀 있다가 그 자리에 그에 반박하는 대자보가 붙는다. 좀 더 있으면 또 그에 대한 반론이 나와 붙는다. 몇번 후면 처음부터 관심깊게 쳐다본 소수의 인간들을 제외하고는 청테이프 쪼가리가 엉겨있는 벽면이 짜증날 뿐이다. 대자보 논쟁의 단점, ‘중간에 끼어들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럼 집단 잡기장 문화는 어떤가. 가장 가까운 예로 ‘심동일기장’을 들 수 있겠지. 하지만 문제는 이건 과방에 눌러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동일기장을 가지고 나가서 집에서, 독서실에서, 까페에서 떠오르는 자유로운 생각을 적을 수 있을까. 또한 그 수많은 악필들 속에서 필체가 아닌 순수한 내용만을 보기도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힘들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프린터로 뽑아서 일기장에 풀로 붙여놓는 것도 별로 보기가 안좋지…).

하지만 컴퓨터 통신이라는 새로운 매체는 또다른 대안이 되어주었다. 게시판. 대자보를 차곡차곡 쌓아 놓은 듯한 정돈성. 심동일기장과 다를 바가 없는, 자유로운 ‘말’ 같은 ‘글’을 용납해줄 수 있는 공간. 아, 정녕 게시판은 꿈의 ‘논쟁’ 매체란 말인가.

그럴 리가 없잖아. 말이 되나. 매체의 특성을 한순간이라도 잊어버리면 그것은 바로 우리를 덮쳐온다.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모든 장점은 곧 그 단점이 된다. 보존성, 그에 따른 대중성이라는 것은 논쟁의 당사자들 이외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 논쟁을 노출시킨다는 것이고, 그것은 특히 ‘오해’라는 것과 결합될 때 꽤 일을 꼬이게 만든다. 글과 말의 결합. 말을 하듯이 글을 쓴다. 아니, 말이 곧 글로 남는다. 그 속에서 맥락의 부재, 맥락의 변화는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말’로 하면 대화 당사자와 주변 관찰인물들의 직접적인 관계속에서 그 맥락을 새로이 조절해 나갈 수가 있지만, 그것이 ‘글’로 이루어질 경우 이는 훨씬 힘들고 느려진다. ‘듣다가 중간에 끊어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간에, 얼마나 애초의 맥락에서 비껴나가든 간에 끝까지 들어주고 반박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상대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글실력으로 반박하는 것에 실패하면 논점은 상대방의 것으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논쟁의 약육강식 논리는 ‘말’보다 ‘글’에서 그 위력이 더욱 배가되는 것이다.

또한, 게시판에서는 말을 하다가 글이라는 측면을 잊어버리며, 글을 쓰다가 말이라는 측면을 잊어버린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이 (다른 개입이 없는 한) 영.구.적.으로 남아서 (전혀 이 문제에 직접적으로 접근한적이 없는 이도 포함한) 모두에게 공개된다는 것, 말 그대로 그 문제가 당사자들간의 문제가 아닌, 모두의 문제가 된다는 것. 그 문제의 초점에 ‘개인’이 있다면? 간단히 ‘이지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원했든 말았든 간에. 거기에 말을 한다는 생각을 넘어서 ‘글을 쓴다’는 생각만이 지배한다면 어떤 헛소리라도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강제로 주입하는 행태까지 (…찔리는군) 생겨난다. 간단히 말해서, 인간 한둘쯤 바보 만들고 전체가 콩가루가 되는 것은 식은 죽먹기라는 것이다.

그런 위험을 애초에 알아차린 초창기 통신인들은 엄격한 네티켓을 만들어냈다. ‘님’자 호칭과 극존칭의 사용, 다수의 권고에 의한 자진삭제, 네트상에서 생긴 문제들을 네트상에서 풀어서, 문제가 커짐을 공유한 모두에게 문제의 해결까지도 같이 공유하게 만들어주는 문화 등등. 하지만 90년대 중반 이후 통신인구가 폭발하면서 이는 거의 Recycle Bin으로 쳐넣어졌다 (그 대신 오히려 초창기에는 ‘장난’으로 했던 언어해체 – 어솨요, 안냐세요 같은 – 들에 장난이 아니게 집착한다… 마치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로 쓰면 바보라도 된다는 듯이). 그와 함께 통신은 점차 ‘잡스러워 졌다’. 통신은 애초에 의도한 ‘대화의 장’이 아닌, ‘자기 푸념의 장’으로 변질되어가는 것이다.

개인적 대화로서 맥락부터 파악을 하고, 아마도 개인적 대화로서 끝날 수 있었을 논점을 다짜고짜 공개적인 ‘게시판의 장’으로 끌고 나오는 것은, 특히 사고의 깊이, 글솜씨, 게다가 덤으로 해당 사회집단에서의 위치마저 손위인 인간이 손아래를 대하는 것일 경우는 그 자체로 이지메다. 그것을 온갖 인간들이 다 달려들어서 거들어주면 그건 바로 ‘왕따’다. 행동에, 발언에 문제가 있으면 그것이 논점이 되는 것이지, 그래서 그 인간이 더 좋고 싫고가 공개적인 발언이 되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 ‘격함’을 위장한 ‘무례함’은 그에 걸맞는 정중함으로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다. 당.사.자.들.이. 하지만 걸어온 시비에 대해서 정말로 시비를 가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굴한 짓이다. 자신을 해명하고 변호하며,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논쟁의 기본자세다. 상대가 나보다 좀 강하면 어떠한가. ‘학습된 무기력’ 탓이나 할 것인가. 그리고 토라져 있다가 ‘떠나버릴’ 텐가.

음… 너무 질책성으로 흘러가는군. 사실 이미 어쩌다가 이런 화두에 관해서 생각하고 말을 꺼내게 되었는지 너무나 뻔한데 말이다. 단지 문제가 나오고 그것이 풀어져나가는 방식이 개인적으로는 감히 보기가 안좋았기에 한마디 뱉어보았다. 이런 노골적인 질책성 문건도 그냥 ‘헛소리’로 포장해서 내보내는 이 까투리도 매우 보기가 안좋지만 말이다… 어쩌겠어. 무책임한데 (정.말. 무책임하군…). 여하튼 아름다운 게시판을 보고싶다는 소망만은 ‘참소리’겠지.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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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공론 형성의 공간: 전자게시판의 명암 [대학원 정보사회론 0206]

!@#… 대학원에서, ‘정보사회론’ 수업의 텀페이퍼로 전자게시판의 토론이 “어떻게 하면 개판이 되는지”에 대해서 쓴 적이 있다. 나중에 나 자신도 스스로 더 파볼 주제이기는 하지만, 혹시 또 누구 다른 사람이 이걸 보고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지도 모르니까 한번 올려본다. 떠오르면, capcold에게도 알려주시길 바람. 본문은 첨부파일.

(요약) 제목: 사이버 공론 형성의 공간: 전자게시판의 명암

“…즉, 인터넷이 하나의 ‘가능성’에서 ‘일상적인 현실’로 다가옴에 따라서, 전자게시판 상에서 ‘제대로 된’ 토론이 가능한가에 대한 당초의 기대나 예상과는 다른 방향의 부정적인 기능들과 회의적인 발견들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전자게시판이 합리적이고 열린 토론의 장으로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부정하기 쉽지 않은 – 아니, ‘부정하고 싶어지지 않는’ 부분이다. 전자게시판 커뮤니케이션의 여러 가지 속성 가운데 어떠한 것들이 공공영역의 형성에 있어서 꼭 필요하며,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것은 어떠한 요소들인지에 대한 개념화가 필요하다.”

1. 문제제기

2. 연구문제 및 연구방법

3. 전자 게시판에 관한 이론적 논의
 가. 전자민주주의에 대한 논의
 나. 게시판 커뮤니케이션의 문어적/구어적 속성에 대한 논의
 다. 게시판 커뮤니케이션의 Telelogic/dialogic 속성에 대한 논의
 라. 새로운 범주구분 제안: ‘턴-바이-턴’ 대 ‘실시간’

4. 게시판 토론의 양상 
 가. 참여자 측면: 참여자의 문제
 나. 참여자 측면: 정체성의 문제
 다. 언어속성의 측면: 구두 언어와 문자 언어 사이
 라. 토론진행의 측면: catch-up의 문제
  1) ‘양’의 문제
  2) 게시판의 기술적인 장점으로 인한 문제
 마. 토론진행의 측면: 진행 일반의 문제

5. 대안들 
 가. 양의 문제
 나. 토론관리자의 도입
 다. 토론 커뮤니케이션의 속성에 대한 인식 확장

6.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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