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와 초월성에 관한 우화 – 충사(우루시바라 유키) [기획회의 051115]

!@#… 애니 시리즈 일본 현지 방영 및 실사영화화 계획 발표 기념으로.

=============================

경이와 초월성에 관한 우화 – 충사(우루시바라 유키)

김낙호(만화연구가)

오만하게도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는 생물인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과제, 즉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지극히 제한된 지능과 인식의 폭을 넘어서는 사건에 마주칠 때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이유를 붙여서 설명을 해내곤 했다. 밤에 숲에서 소리가 나면 누군가의 유령이 돌아다니는 것이고, 착하게 살아가고 있는데도 온갖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은 평가와 보상을 중요시하는 하느님이 내려주신 시련이다. 모든 것은 어떤 인격화된 주체의 행위의 결과다. 그리고 그 주체가 어떻게 해서 그런 대단한 일들을 벌일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그들을 초월적인 존재로 상정함으로써 적당히 넘어가지만, 최소한 그 누구 또는 무엇인가가 어떤 특정한 이유 때문에 어떤 행위를 하고, 그 결과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지극히 쉽게 이해 가능한 명제를 만들어낸다. 굳이 무신론을 설파하며 모든 초월적 존재들을 덮어놓고 부정해야할 필요는 조금도 없지만, 그 초월적 현상들을 인식하는 방식 그 자체는 분명히 인간의 발명품이다. ‘신’은 존재할 수 있지만, 그 신을 인격화시키는 것은 인간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문화권에서는 유일신을, 어떤 문화권에서는 다양한 층위와 관계망으로 엮여진 신적 존재들을, 어떤 문화권에서는 모든 사물에 깃든 영령을 초월적 현상 속에서 인식해 낸다.

<충사>(우루시바라 유키, 대원CI / 6권 발간중)는 초월적 현상들을 다루는 에피소드들로 엮여진, 환상 기담이다. 원래 국내에 4권까지 출간되었다가 출판사가 만화사업을 접는 바람에 후속편을 기다리던 독자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던 작품인데, 몇 달 전부터 출판사를 바꾸어 재출간되기 시작하여 최근 후속편들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키라>로 유명한 애니메이션 감독 오토모 가츠히로가 연출을 맡아서 실사 영화판을 제작하겠다는 발표가 있었고, 또한 얼마전 일본에서 방영을 시작한 애니메이션 TV 시리즈 역시 작품의 세계관을 효과적으로 연출해냄으로 시청자들에게 큰 호평을 받고 있다고 한다. 작품의 성향 자체는 정작 지극히 평온하고 사색적인 기담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참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작품의 구성은 비교적 전형적이다. 기이한 현상이 있고, 그런 현상들을 다루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작품의 진짜 주역은 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기이한 일 그 자체, 그리고 그 속에 녹아들어가 있는 삶의 한 단면이다. 따지고 보면 전설의 고향부터 엑스파일까지 수많은 기담들의 기본 형태인 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유령이나 혼백이나 신적 존재라든지 하는 등 지금껏 동서양 문화권에서 흔히 접해온 설명들과는 살짝 다른 해석을 내리며 세계관을 구축한다. 그것이 바로 ‘벌레’인데, 작품 속 설명을 인용하자면 이런 식이다:

“…이 손가락 네 개가 동물이고, 엄지가 식물을 표시한다고 하면? 사람은 여기, 심장에서 가장 먼 중지의 끝부분 쯤에 있겠죠. 손바닥의 안쪽으로 갈수록 하등한 동물이 되는 거죠. 점점 밑으로 내려가 손목부분에 이르면 혈관이 하나로 되어 있잖아요. 여기에 있는 것이 균이나 미생물이고, 이 근처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동물과 식물을 구분하는 것이 어려워지죠. 하지만 더 나아가, 손목을 거슬러 올라가 어깨를 지나서 심장에 가까운 부분에 있는 것을 바로 ‘벌레’라고 부릅니다.” (1권, ‘녹색의 좌’)

‘벌레’는 생명 그 자체에 한없이 가까운 존재들, 형태와 존재 방식조차 지극히 모호하며 너무나 다양하게 뻗어있는 어떤 것이다. 소리나 빛을 먹고 사는 것도 있고, 인간 형태로 유령처럼 존재하는 것도 있고, 문자라는 지극히 추상적인 형태로 보존되는 것도 있다. 벌레는 거대한 초월적인 의지 즉 신이기 보다는,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나가는 생명 그 자체다. 인간세상을 조종하고 관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신들의 방식으로 살아갈 따름이다. 물론 각 에피소드의 이야기는 벌레의 생활로 인하여 인간 세상에 어떤 문제가 생겨서 그것을 해결해 나아가는 과정이지만, 그것은 혼령의 한을 풀어주는 무당의 푸닥거리도, 분노한 자연의 신령을 달래어주는 제의식도, 신에게 믿음을 회복하는 신성한 과업도 아니다. 약간은 경험의 축적으로 인하여 알고, 더 많은 부분들은 여전히 이해영역을 벗어난 존재들로부터 나름대로 인간의 생활방식을 지켜내는 것에 불과하다. 벌레는 오염된 인간문명에 대한 대자연의 복수가 아닌, 그냥 이 세상의 일부다. 즉 인격화되지 않은 진정한 의미의 초월적 존재인 것이다. 벌레라는 명칭은 이런 속성에 대한 지극히 역설적인 간판이 되어주는 셈이다.

주인공 긴코는 충사, 즉 ‘벌레’전문가다. 작품에서 언급되는 다른 충사들보다도 더욱 더 벌레를 퇴치하기보다는 그냥 살짝 사람 사는 집에서 쫓아 버리는 방식을 취하는 사람으로, 세상에 대한 경이를 잊지 않은 진정한 방랑자다. 강한 자의식으로 독자를 억지로 감정 이입시키지 않고, 한발짝 물러서서 초월성의 경이와 그것을 잊어버리고 만 인간세상의 모습들을 담담하게 구경시켜주는 역할이다. 그 덕분에 눈꺼풀을 감아도 오지 않는 진정한 어둠에 대해서 알게 되며, 무지개를 쫒듯 근원적 생명에 홀린 방랑자를 만나기도 하고, 몸 안에 들어온 벌레와 공존하기 위하여 벌레의 모든 것을 글로써 적어내야 하는 기이한 사연(명백히, ‘작가’라는 직종에 대한 알레고리다)을 접하게 된다.

이러한 관찰자적 자세는 시각적 묘사에서부터 뚜렷해지는데, 아직 근대화가 오지 않은 듯한 전통적 일본 시골 산하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유일하게 긴코만이 기모노가 아닌 티셔츠와 바지 차림이다. 물론 등장인물 중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주인공 캐릭터 자체에 거리감을 부여하는 재미있는 장치로 작용한다. 인간과 자연을 묘하게 섞어 넣는 거친 그림체와 현실과 몽상의 경계가 수시로 무너지는 칸 연출 역시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물론 기담 장르가 원래 그렇듯 반복적 패턴이 계속되다보면 결국 서서히 경이로움이 감소하는 점이라든지, 반대급부로 긴코의 캐릭터성이 점차 부각된다는 점 같은 점은 대표적인 한계다. 출시된 한국어판의 경우 원작의 시적이고 고풍스러운 어감을 효과적으로 번역해내지 못한 점도 만화번역에 대한 빈약한 질적 투자를 증명하는 듯하여 아쉽다(그나마, 이전 출판사의 경우는 아예 말 자체를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오역 투성이였다).

충사를 읽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고 그것과 함께 살아간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 바로 진정한 경이를 회복하는 여정이다. 한번쯤 홀려볼만한 멋진 독서 경험이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시사주간지 TIME의 만화기사 인덱스

!@#… 마냥 부럽다. 시사주간지 TIME의 만화기사 인덱스.

… 1928년 이래로, 시사주간지 TIME 에서 지금껏 만화와 관련되어 나왔던 기사들 총 목록(단신 제외). 분류별 인덱스까지도 다 갖춰줌.

… 체계적인 저널리즘은, 그 자체로 역사가 된다. 한번 본받을 만한 자세.

!@#… 한국에서 이런 것을 할만한 것은… 일간지들은 솔직히 기사 수준이 형편없는 것이 많아서 좀 곤란. 주간지 이상이라면… 얼추 한겨레21, 씨네21 정도일까?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낭만주의 – <위대한 캣츠비> [기획회의051030]

!@#… (이미 다 넘어간 후 반성문) 작가가 인터뷰에서 밝힌 바처럼, 캣츠비는 사실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원작으로 하거나 특별히 구체적인 모티브를 빌려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리뷰 본문에서 언급했듯, 일정 부분 기본설정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굳이 개츠비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만큼 그 ‘낭만’의 공식이 지극히 원형적인 모티브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건데, 다시 읽어보니 그 이야기를 참 애매하게 풀어냈다는 점을 깨닫고는 후회중. -_-;

==========================

낭만주의 – <위대한 캣츠비>

김낙호(만화연구가)

‘위대한 개츠비’라는 미국 소설이 있다. 영미권 문학의 나름대로 걸작으로 칭송받는 작품이지만, 사실 필자에게는 ‘맨 온더 문’이라는 영화에서 짐 캐리가 분한 코미디언 앤디 카우프만이, 자신의 코미디 쇼를 보러온 관객들 앞에서 뜬금없이 하루 종일 걸려서 처음부터 끝까지 낭독을 함으로써 황당한 물의를 일으킨 그 소설로 더욱 기억에 남아있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대충 이렇다: 가난한 농부집안 출신의 개츠비라는 청년이 있다. 그는 데이지라는 상류층 처자와 서로 좋아한다. 그런데 아뿔싸, 이 사람이 군대에 끌려가 있는 동안에 데이지는 부자집 남자와 결혼해버린다. 그래서 수단방법 안 가리고 자기도 부자가 된다. 돈으로 데이지에게 당당해진 개츠비. 하지만 데이지는 부자남편의 정부를 자동차로 치어죽이고 개츠비가 죄를 뒤집어 쓴다. 결말까지 폭로하자면(설마 이 정도로 오래된 이야기에도 누설방지 유통기한이 적용되지는 않으리라 보고), 개츠비는 결국 죽은 여자의 남편 총에 맞아 죽어버린다.

한눈에 봐도 알아볼 수 있겠지만, 이 공식은 한국 환경으로 그대로 옮겨도 사실 전혀 위화감이 없다. 신분의 차이, 오기에 찬 물리적 조건 극복, 그 속에서의 인간성 상실, 하지만 단 하나의 가치를 위하여 결국 비극적 희생. <공포의 외인구단>을 위시한 수많은 비장미 넘치는 80년대 극화체 만화들이 흔히 써먹었던 기본구도다. 그래서 고전인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언제라도 한국으로 번안된 개츠비 이야기가 인기 연재 만화로 등장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생각은 당연하다. 아니나 다를까, 온라인에서 <위대한 캣츠비>라는 만화가 연재를 시작했다고 한다. 아하, 내용은 “안봐도 비디오”겠구나. 결과는? 부자와 결혼해버리는 여자, 별 볼일 없는 주인공, 시대 속에서 꼬이는 사랑이 이야기 전체의 원동력이라는 정도의 기본설정이 공통점. 하지만 화려한 활극의 느낌마저 있었던 개츠비의 이야기와는 달리, 이쪽의 주인공 캣츠비는 훨씬 더 구차하고, 소심하고, 끝까지 별 볼일 없는, 그냥 어떤 참 운명이 꼬인 현대 한국의 궁상 백수 청년의 사랑담이다.

최근 연재종료를 맞이했고, 종이 단행본 2권이 출간된 온라인 만화 <위대한 캣츠비>(강도하/애니북스)의 연재 당시 인기비결은 무엇일까. 에피소드 중심으로 끊어지기 쉬운 온라인 만화에서는 아직 비교적 희귀한 쪽에 속하는, 장편 연재물이라서? 확실히 그런 측면도 있다. <슬픈나라 비통도시>같은 모음집에서 볼 수 있는 강도하, 또는 강성수라는 작가의 거칠고 실험적인 – 즉 독자들과의 소통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 기존 작품성향을 보면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이 작품은 정제되어 있는 드라마적 투르기와 독자의 관심을 고조시키는 연출과 끊어내는 타이밍 등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시각적 표현 역시, 모든 주인공을 의인화된 동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만화적 표현의 재미’를 부여하면서도(하지만 뚜렷한 상징체계를 느끼기는 힘들다), 대단히 세밀하게 감정선을 따라가는 배경 구도와 풍부하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표정묘사로 눈길을 집중시킨다.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주인공들의 감정 상태를 배경 또는 소품의 묘사를 통해서 보여주는 연출을 너무 남발해서 부담스러워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몰입하는 독서를 완전히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심지어 온라인 연재 당시에는 스크롤의 기본문법을 따르는 칸 연출을 하면서도, 종이책으로 출간하면서 그것을 전통적 의미의 종이만화의 칸 배열로 완전히 재편집하는 노력을 투자하는 등 한마디로 세심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분명히 시각 연출이든 이야기 연출이든, 표현적인 측면에서 <위대한 캣츠비>는 우수한, 최소한 독자들에게 지극히 성실한 만화다.

하지만 역시 그런 기술적인 완성도만으로 만화가 공감대를 자아내는 것은 그다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생활 묘사가 리얼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아 그래, 내 생활도 그렇지” 하는 마음을 품게 할 정도로 주인공들의 일상 생활 모습 자체에 통찰력을 집중한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리얼한 환경묘사와 달리, 생활은 솔직히 그다지 리얼하지 않다는 말이다. 오히려 백수생활의 리얼함이라면 고리타의 <룸펜스타>같은 개그만화가 한 수 위다. 아니 사실 그다지 일상적이지 않은, 꼬일대로 꼬인 치정극 이야기가 훨씬 더 작품 줄거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대와 인기를 끌어낸다면 무언가 다른 좀 더 근본적인 덩어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루어지는 사랑과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엇갈리는 우정? 글쎄. 발랄한 여자와 불행한 여자, 발랄한 남자와 궁상맞은 남자의 캐릭터성? 글쎄.

오히려 열쇠는 작가가 스스로 누차 강조하듯이 ‘청춘의 아픔’이라는 엄청나게 구식 느낌을 주는 창작의 변에서 찾아야 할 듯 싶다. 사랑이 존재방식이 되는, 그리고 사랑의 꼬임이 존재의 흔들림으로 이어지는 가히 근대 독일 문학을 연상시키는 이런 고전적인 접근이 다시 복고풍으로 트렌드를 맞추어 냈다는 것인가. 고전적이고 다소 남성 편향적인 청춘의 고뇌에 대한 과잉된 환상이 2000년대 독자들의 취향과도 일치한다고 생각하기는 좀 섣부를 것 같다.  글쎄. 그보다, 애초에 사람들은 그 취향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적합할 것이다. 지난 수년간을 강타했다가 최근 좀 거품이 가라앉은 감성파 에피소드 만화, 속칭 ‘에세이툰’의 히트를 기억해보면 더욱 그렇다. 한국에서 대중문화는 각종 미디어를 통해서 더욱 세련되고 쿨한 것을 소비(!)하도록 종용하고 있지만, 진짜 ‘취향’이라는 것은 소비 트렌드만큼 빠르게 바뀌지 않는다. 아니 소비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오히려 더욱 공고하게 원형적인 것으로 회귀하기도 한다. 그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은? 소재와 표현은 세련되게, 알맹이는 오히려 더 고전적으로. 예를 들자면 결국 비극적 인간관계 사건들이 꼬리를 물지만 여하튼 사랑이 존재의 원동력이다, 뭐 그런 방식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캣츠비>는 80년대적 비장미 성인극화와 2000년대적 에세이툰 부류의 이종교배에 성공한 셈이다. 나머지는 그냥 연출 표현을 위한 양념일 뿐이다. 작품의 장점도 단점도, 개별 독자들의 취향에 맞고 안 맞는 것도, 이 틀 안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듯 싶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만화언론 ‘만’ 창간기념 인터뷰. “그들에게 길을 묻다”

!@#… 만화언론 ‘‘ 창간 기념 인터뷰 시리즈 (물론 capcold의 경우는 서면 인터뷰). ‘만’ 출범에 대해서 말 많은 사람들 위주로 주욱 시리즈로 가고 있는 중인데, 3번째 타자가 capcold. 이 사람들 각각의 사고방식에 대한 나름대로 멋진 비교자료(?) 라고 생각된다. 조화롭게 잘 어울려들어가서 좋은 결과를 내면 더욱 더 좋겠지.

[창간 기념 대담] 그들에게 길을 묻다 (1) – 서찬휘

[창간 기념 대담] 그들에게 길을 묻다 (2) – 주재국

[창간 기념 대담] 그들에게 길을 묻다 (3) – 김낙호

!@#… 클릭 한번 하고 ‘만’으로 가서 읽기 귀찮으신 분들을 위해서 (사실은 자료 백업용으로), 특별히 capcold 파트에 한해서는 여기서도 읽을 수 있도록 해놓겠다. -_-;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끝까지 읽기(클릭)

국제 세미나 <만화독자의 재발견> 행사소감 (아즈마 히로키씨 외)

!@#… 제3차 청강 세미나(공식홈: http://www.comicstudy.co.kr)  행사가 끝나고, 밤에 발제 맡아주신 아즈마 히로키씨가 개인블로그에 남긴 행사 소감, 눈에 들어와서 후딱 허락받고 업어옴. 원문(일어)은 여기에.

!@#… 나중에 다른 패널분들은 물론, 일반 청중의 감상까지 주욱 긁어모아서 자료보존을 할 생각. 자유대담의 토론자로 참석하신 서찬휘님의 행사소감은 여기. 청중분들 글도 벌써 여기, 저기, 그리고 여기.

————————————————

안녕하세요. 아즈마 히로키입니다. 서울 서대문 근처 호텔에서 쓰고 있습니다.

강연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순수한 오타쿠 연구라기보다는, 선행하는 오타쿠론/하위문화론을 고쳐가며 쓴 측면이 강합니다. 따라서  동석한 이현석씨와 선정우씨도 말씀하셨듯 미야다이 신지도 오오츠카 에이지도 본격적으로 소개되지 않고, 미소녀 게임도 발달하지 않았고, 그 이전에 버블경제의 광풍을 경험하지 않은 한국에서는 제 강연이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심포지엄에서는, 한국은 야오이는 강하지만 모에는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하는 발언도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의응답에서는 객석에서 꽤 본질적인 질문들이 나와줘서,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양국의 차이가 이것저것 있으리라 생각하고는 있었습니다만, 가장 놀라웠고 한편 상징적이었던 것은, 만화 연구라는 마이너한 테마의 세미나임에도 불구하고 청중의 대부분, 어쩌면 2/3이상이 젊은 여성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실로 여기에서야말로 양국 상황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번 강연이 제 강연 경력상 가장 여성 비율이 높은 것이었던 것은 확실합니다(웃음).

그렇듯 대체로 재미있는 경험이었지만, 제가 한국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통역을 개입시킨 일방적인 보고가 되어 버렸던 점이 유감입니다. 그리고 저 자신이 한국의 비평적 맥락을 완전히 모르고 있다는 문제도 재차 통감했습니다. 모처럼 동세대의 평론가나 현업 종사자분들과 동석할 수 있었으니 의견교환을 하고 싶었습니다만, 어이없게도 언어장벽에서 방해 받고 말았습니다.

청중들 중에는 일본어를 할 수 있어서 제 사이트를 체크하고 있는 사람들도 몇 분 계셨던 것 같은데, 이것을 읽고 무엇인가 감상이 있으면 부담없이 보내 주십시오. 한국인들이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논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꼭 물어 보고 싶습니다. 빨리 번역판의 출판사를 찾지 않으면… 원고는 있는데…

내일은 선정우씨의 자택에서 실례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한국 오타쿠의 방이란 어떤 것일까요?

————————————————

!@#… PS. 높은 여성비율에 감동이라… 그러고보니 1회때, 스콧 아저씨도 젊은 여성에게 꽃다발 받았다고 무쟈게 감동했었지…(닐 게이먼한테 반격할 꺼리가 생겼다고 좋아했다;;) 한국의 만화판에서 여성들이 차지하는 위치란 정말 심층분석대상이다.   

PS2. 선정우님의 방이라… 그 전설의 방을 보고는, 한국의 오타쿠(에 준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 정도까지 포스가 철철 넘쳐흐를 것이라고 오해하지 않아줬으면 한다. -_-;

페르세폴리스, 그리고 만화번역 잡설(2)

!@#… <페르세폴리스>가 출간될 때 날렸던 만화번역에 대한 단상글에 대해서, 꽤 진지한 반론을 제시하시는 분이 있어서 답변을 좀 해오다가, 여차저차 길어져서 그냥 아예 새로 들고 오기로 한다. 초점이 뚜렷한, 잘 정리된 논의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뭐 충분히 나올법한 이야기. 뭐 여하튼 capcold의 문제설정이나 글쓰기 맥락에 대한 약간의 참조도 될 수 있을지 모르니까 한번 가져왔다.

===================================================

 김태광  번역은 주인장 말씀대로 누가 번역하느냐의 차이가 있겠지요. 그 차이는 어느정도 ‘창작의 영역’에 걸쳐있는 ‘번역의 영역’아닐지요. “내가 했더라면….”은 듣기 민망하군요. 작품의 감상은 ‘독자의 영역’에 걸쳐있는 ‘역자의 입장’이기도 함을 이해하실줄 압니다. 오역이라면 이해하지만, 어투의 문제라…어린 아이의 말투로는 주인장의 말씀대로 쿨~한 것이 자연스럽게 보이는 게 저 뿐만일까요. 작품에 대한 배경지식을 찾다가 들러서 쳐진 댓글 남기고 가서 죄송합니다. 2005/10/30 00:39  
 
 캡콜드  !@#… 김태광님/ 댓글의견이야 항상 대환영이죠. 하지만 정확히 어떤 지점을 지적하시고 싶으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1) 번역이 또다른 창작이라는 말은 물론 동의합니다만, 그 ‘창작’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가 저는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것은 번역자의 자의식으로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원작이 원작의 독자들에게 주었던 원래의 의미와 뉘앙스를 다른 문화권의 독자들에게도 가장 온전하게 느끼게 해주기 위한 재해석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리메이크와 번역의 차이죠. 번역가는 자의식 과잉으로 리메이크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2) 어떤 부분을 그렇게 “민망하게” 보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다시피 제 번역스타일을 예로 든 것은 번역자의 어투가 번역물의 문체에 반영되는 것에 대해서 그만큼 조심해야 한다는 가상 사례에 불과합니다. 등장인물들의 어투는 이야기의 풍부한 감성과 의미를 담아내는 중요한 일부분이기 때문이니까요. 내가 하면 더 잘할 수 있어, 라는 식의 무슨 유치원생 허풍떠는 이야기가 아니죠. 이왕이면 한번 찬찬히 다시 읽고 민망해 하시길 바랍니다.

3) “쿨~한 것이 자연스럽게 보인다”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참고로 말쓴드리자면, 제가 본문에서 언급한 ‘위화감’이라는 것은 독자의 독서에서 느껴질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원작과 번역본의 사이에서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전체 내용을 모두 텔레토비 대사로 바꿔도 나름대로 위화감없는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만들수도 있겠지만, 그 경우 원작과의 위화감은 엄청나겠죠. 다시금, 본문을 찬찬히 다시 읽고 설명 부탁드립니다. 2005/10/30 02:43  
 
 김태광  1) 번역이 일정부분 역자의 상상과 분위기를 닮게 되는 점에서 창작에 걸쳐있다고 말씀드린 것이였습니다. 즉, 번역이 가지는 특별한 영역이라는 뜻입니다. 리메이크는 목적이 재구성, 재해석이므로 번역의 그것과는 다르지요. 페르세폴리스의 번역에서, 주인장의 말씀처럼 “김대중(역자)의 목소리”가 우려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2) 그 표현은 죄송합니다. 기분이 상하셨을 것 같네요. “민망”했던 이유는 그 표현 자체에 있었습니다. 번역자 김대중씨와의 친분이 있으신 것 같은데(김대중식 어투라고 단정하시니….제 추측인데 맞는지요), 그 어투를 이해하기보다 거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민망”했는가봅니다. 그러다보니 주인장을 예로 든 것마저 “의심”을 산 것 같네요. 비평글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애정’이고, 경계할 것이 ‘비난’이라 배웠습니다. 주인장을 예로 든 것이 “민망”했던 이유는 바로 “애정”이 보이지 않아 오해를 산 것이 아닐지요.

3) 제가 이 책(한국어판)을 읽고 굳이 문체에 대해 느낀 점을 말한다면, 호흡이 짧고 쉽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한 “쿨~”은 이런 점입니다. 주인장 말씀이 원작과 번역본의 사이에 느낄수 있는 “위화감”이라면, 제가 말한 쿨~한 것과는 차이가 있군요. 제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김대중(역자)의 목소리”가 “위화감”을 일으키는 목소리라고 이해했었거든요. 이렇게 이해한 것에는 위2)에서 말씀드린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요. 2005/11/01 14:39  
 
 캡콜드  !@#… 우선 본문에서 밝혔듯이, 저는 지리적 사정상 한국어판을 보도자료로 공개되어 있는 한 챕터 이외의 나머지 본문은 (아직도!) 읽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위의 글은 결과에 대한 평가라기보다, 기대와 우려의 글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즉 비평글이 아닌, 말 그대로 단상입니다. 제가 ‘말투’에 대해서 걱정하는 부분은, 번역자분이신 김대중씨의 말투가 과연 제가 영어판(즉, 불어를 못하기 때문에 원본인 불어판로는 즐기지 못했습니다; 이미 상당한 모순이죠. 그래서 저는 엄청난 노력으로 자료와 뉘앙스를 벌충하지 않는 한, 중역은 정말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에서 본 그 소녀의 어투를 잘 살려낼 수 있을까 – 아니 잘 살려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같은 대본을 놓고 연기를 하는 것이라도 배한성의 맥가이버냐, 아니면 신구의 맥가이버냐 하는 차이죠. 혹은 서혜정의 스컬리냐, 아니면 전원주의 스컬리냐 하는 차이이기도 합니다. 1화를 본 결과 한국어판의 문체가 어떤지 감이 잡혔습니다. 그것은 이제 주어진 조건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문자 그대로 그것이 전체 부분에 잘 어울려 주고 있을지 어떨지 걱정/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려의 목소리가 더 크게 난 것으로 보였다면, 그것은 제가 제목 번역에서부터 이미 의미의 손실이 생겼다는 것을 먼저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분들은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제게는 상당히 아까운 손실입니다. 그만큼 섬세하고 의미깊은 작품이니까요. 그것이 제가 이 작품 자체에 대해서 가지는 ‘애정’입니다.

!@#… 비평글에 가장 필요한 것이 ‘애정’이라는 것은, 비평글에서 소재로 삼고 있는 특정 작품이나 특정인에 대한 애정이 아닙니다. 그런 주례사에 얽매이면 그건 비평이 아닌 그냥 바보들의 낙서죠. 비평글이 가져야 할 애정이라는 것은, 바로 글이 다루고 있는 소재들이 속해있는 “그 분야 전체의 부흥과 발전을 위한” 애정입니다. 특정 작가나 작품을 열심히 일방적으로 햝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에 정당한 평가를 부여함으로서 만화라는 분야 자체가 얼마나 멋진 담론으로 활성화된 좋은 문화 예술분야, 혹은/또는 문화산업 영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려되는 부분은 우려하고, 재발견해야할 부분은 재발견하고, 심지어 진짜로 비난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피하지 않고 확실하게 비난해서 큰 흐름에 기여하는 것이 진짜 비평입니다. 제 자신이 얼마나 그 길에 충실한지는 항상 모자름을 느끼지만, 최소한 그것이 길이라고는 믿습니다.

!@#… 만약 이야기가 더 길어지면, 덧글이 아닌 새 관련글로 옮기겠습니다. ^^ 2005/11/01 15:47  
 
 김태광  1) 중역에 대한 생각입니다 – 이 작품이 중역을 했다는 것이 사실임을 인정하더라도, 주인장의 말씀은 중역의 한계를 지적할 뿐, 현 번역에 곤란한 점이나 모순이 있다는 근거로는 적절치 않습니다.
2) 비평글과 단상 – 작품에 대한 애정은 비평을 하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더 나아가 주인장께서 일하시는 분야가 혹 관련된 것이라면 관련분야 전체의 발전까지도 염두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이야기들은 사실, ‘페르세폴리스 한글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서게 되는대요. 주인장께서 남기신 “단상”을 제가 “비평”이라 여겼기 때문에 범주를 넘어선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비평”으로 받아들인 이유는 작품에 대한 소개와 평가가 전문적인데 비해, 출판물에 대해서는 가벼이 여기시는 듯 했기 때문입니다. 주인장의 의도를 비껴나간 것은 전적으로 제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 기왕에 주인장께서 정성껏 댓글을 남겨주셨기에, 고마운 마음으로 저 역시 몇 마디 “비평”에 대한 생각을 적어놓겠습니다.
애정을 전제로 한 비평글에는 모든 사물(언어….)에 빛과 그림자가 존재하듯 대상의 양면을 모두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작에 대한 찬사가 “양”이요, 출판물에 대한 비난이 “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번역을 대상으로 한다면, 이번 번역의 외적 의의와 내적 성취도를 평가하고, 되도록 분명한 지점을 들어 지적하고 비난하는 것이 “진짜 비평”이 아닐지요. 주인장의 글이 적절한 “비평”이 되기 위해서 부족한 부분이 전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상”도 그런 의미에서 이같은 점이 전제가 되길 바랍니다만, 혹 주인장께서 윗 글에 대해 과도하게 요구하는 것 같다면 죄송합니다.
2005/11/01 18:02  
 
 캡콜드  !@#… 저는 심지어 한국어판이 영어본에서 중역을 했다고 주장한 적도 없습니다(판형 자체부터가 영어판 기준이기 깨문에, 중역을 했으리라 쉽게 추측을 해볼수는 있지만). 애초에, 중역을 했기 때.문.에. 이.책.의.이.번.역.이 곤란하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뉘앙스가 제대로 살아나지 못하면 그때 비로소 곤란한거죠. 그런데 중역은 근본적인 한계 때문에 그런 일이 무척 자주 발생한다는 것이고. 그 이전에, 중역의 문제는 애초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저 자신도 과연 진짜 원작(불어)의 뉘앙스를 영어판만 읽어본 주제에 제대로 이해했을까 하는 근본적인 자기 회의의 의미로 쓴 것 아닙니까.

!@#… 하지만 전체 번역에 대한 뉘앙스는 어차피 책 전체를 꼼꼼히 읽어본 후 해야할 작업이지, 한 챕터 달랑 읽고는 기껏해야 기대/우려 정도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번역의 외적 의의와 내적 성취도까지 떠들어대면 거짓말장이죠. 이미 공개된 부분, 즉 제목과 한개 챕터 정도에 대해서라면 이미 본문에서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하지만,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시는 듯 하군요. 비평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전체 분량에 대한 평가를 해야 하지만, 단상이라는 전제하에 한 개 챕터만을 따로 떼어놓고 굳이 평가를 하자면… (1) 주인공 소녀 마르지가 가져야할 ‘조숙하면서, 다소 되바라진 인상을 주기 쉽지만 결국은 꼬마’, (2) 1인칭 나레이터가 가져야할 ‘현재시점의 어른이자, 당시의 어린이로서의 세계관을 같이 겸비하는 느낌에서 오는 유머(‘케빈은 12살’의 배한성과 비슷한 역할)’ 만 우선 놓고 보도록 하죠. 1화의 번역을 놓고 볼 때 나레이터의 유머감각은 ‘쿨한’ 지식인 스타일의 말투 속에서 사실상 거의 사라지다 시피 했습니다. 꼬마 마르지 역시 어른의 어휘를 한두개 주워서 사용하는 꼬마의 언어여야 하는데, 아예 어른의 언어를 구사하는 인상에 가깝습니다.

!@#… 하지만 이런 부분들이 이후 분량에서 이어질 여러 좀 더 복잡한 대화 속에서, 다시금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을 가능성을 닫아놓을 필요는 물론 없겠죠. 그보다 솔직히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계속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참 뻘쭘한 것이, 이미 서가에 나와있는 책을 가지고 ‘제한적 근거의 평가’를 내리고 앉아있는 것 자체가 사실 굉장히 특수한 경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출판에 대한 단상과, 본격적인 비평의 역할을 혼동하지 않았으면 합니다만.

!@#… 여하튼,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 부분들은 댓글이 아닌 엮인글로 새로 올려놓도록 하겠습니다. 분량이 많은 덧글들은, 보기가 불편하니까요… 특히 네이버는. 2005/11/02 0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