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세계 두고보자대상 결과 발표

!@#… 만화 웹진 두고보자(http://www.dugoboza.net)에서 선정한 “2005 세계 두고보자대상” 결과 발표. 2005년, 기억해둘 만한 여러 만화에 대한 촌평들. 관심 있는 분들은 클릭. 그 동네 성향이 원래 좀 그래서, 다소 길다. -_-; 원문은 두고보자에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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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 인간사의 수취 관계 -『왕비님 이야기』[기획회의 060115]

일상적 인간사의 수취 관계 -『왕비님 이야기』

김낙호(만화연구가)

여느 다른 매체보다도 특히 만화라는 분야에서, 독자들은 강하다. 독자라는 수용자와 작가라는 창작자 사이의 경계선은 영화나 대중음악 등의 분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으며, 오랜 저평가의 역사 속에서 만화 독자들은 강한 취향 결속력을 다져왔다. 하지만 단순히 만화광들이 결국 만화가가 된다든지 하는 정도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독자로서의 정체성을 그대로 지니면서, 출판이나 제작 등에 직접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재작년 『먹통X』(고병규 / 코믹팝)라는 작품의 복간의 경우, 어떤 독자가 한 출판사와 일종의 조건을 걸고 진행했던 재미있는 사건이었다. 그 독자가 캠페인을 벌여서 복간되었을 때 책을 구매하고자 하는 특정 인원수의 사람들을 모아오면, 복간본을 출간하겠다는 조건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진짜로 독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퍼트리고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긁어모은 결과, 결국 조건을 충족시키고 책은 출간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어떤 ‘회사’도 정식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그만큼 독자 자신들의 결속력과 파워가 실제적인 제작 프로세스에 작용할 힘이 크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왕비님 이야기』(권교정 / 절대교감) 역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탄생했다. 작품은 만화 전문지 <계간만화>에 게재되었던 24페이지짜리 단편인데, 잡지의 휴간과 다른 단편들이 축적되어 단행본을 만들기가 애매하다는 난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해답은 엉뚱한 방향에서 도출되었다. 그냥 24페이지짜리로 책을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비상식적인 일을 할 출판사가 어디 있냐고 물어볼 수 있다. 하지만 해답은 또 금방 나와 버렸다. 독자들이 출판사를 하나 만들어서 내버리자, 라는 것이다. 기존의 독자 세력화가 독자들이 모여서 출판사에 압력을 가하는 형식이었다면, 이번에는 아예 그냥 직접 출판을 했다. 그것도 ‘동인지’ 또는 ‘자가출판’의 형식이 아니라, 정식 유통망의 정식 출판물로서 말이다. 이러한 발상 속에서 탄생한 출판사 ‘절대교감’은, 어디까지나 여성향 만화에 대한 독자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곳이다. 잡지의 폐간으로 갈 곳을 잃어버린 연재 작품들이 다른 식으로라도 계속 지속되었으면 하는 시도였던 ‘드림서명운동’, 잡지 <오후> 휴간 당시 작가 팬클럽에서 제기되었던 만화출판 아이디어 등이 결국 현실화된 것이다. 회사라는 형식으로 보자면 다른 ‘정식 밥벌이’가 있는 소수 인력과 지원자들로 이루어진 가내수공업적 구성이지만, 제대로 된 책을 만드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물론『왕비님 이야기』라는 작품 자체의 매력이, 단지 출판의 과정이 특이하다고 해서 생겨난 것은 아니다. 24페이지 하드커버라는 형식도 만화책이라는 범주에서는 이질적이지만, 그림책 분야에서는 그리 낮선 것도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실제로 이 작품을 좋아하고, 책을 사줄 것인가가 관건일 뿐. 사실 원래부터 권교정이라는 작가가 상당히 강한 결속력을 지닌 팬층을 지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짧은 단편 하나로 책을 만들어 독자를 설득시킨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비님 이야기』는 충분히 그런 조건을 충족시켜줄만한 작품이다.

작품의 내용은 동화적인 설정에, 인간관계의 깊은 질문에 대한 알레고리를 넣어주는 작가 특유의 접근법을 능숙하게 담아내고 있다. 주인공인 왕비는 원래 마을의 인기 처녀였는데, 말을 하면 주위에 소박한 꽃들과 보석이 생겨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왕의 눈에 들어와서 왕비가 되고, 왕비를 독점하고 싶은 왕의 독점욕 때문에 궁 안에만 머물게 된다. 그 결과 마을은 꽃과 보석이 없는 곳으로 변모하고, 사람들은 왕에게 항의한다. 그런데 왕을 사랑하는 왕비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주변에 도움을 주는 능력을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독점시켜주는 것은 과연 잘못된 행동인가? 좋아하는 대상을 독점하고자 하고, 상대도 동의한다면 그것은 문제일까? 그런 능력의 혜택을 받아온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히 계속 요구할 권리가 보장되어야만 하는 걸까? 사실 꽤 복잡한 인간사의 문제다.

이 작품 속에서는 어떤 결론을 내리는지, 그것은 책을 읽어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서 여기서는 언급을 피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하지만 이런 구도가 지니는 다층적인 감성 자극은 그 자체만으로도 꽤 흥미롭다. 왕비의 능력을 작가라는 존재의 창작 능력으로 바꿔도 되고, 아니면 그다지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냥 우리가 주변에 행사하는 일상적인 사회관계 속 매력으로 대입해 봐도 좋다. 사회적 삶이라는 것은 어차피 그런 관계가 오고가는 것이고, 사실 우리는 이야기 속의 왕비, 왕, 마을 주민의 입장에 동시에 처해있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발산하고, 무언가를 독점하고 싶어 하고, 무언가를 얻고 싶어 한다. 모순될 것 없는 자연스러운 일상의 복합성이다. 물론 우리는 작가가 이야기 속에서 내리는 각 등장인물들의 선택, 즉 결론에 동의할 필요는 전혀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세상사에 대한 통찰을 지적당하고는 스스로 자극받는 감상행위 그 자체다.

시각 연출은, 『매지션』등 당시 작가의 작품 경향을 반영하는 듯 다소 황폐한 느낌이 강하다. 화사한 풍경을 묘사한 장면에서도 건조한 분위기를 풍기며, 인물들의 표정은 무심하다 못해 공허한 느낌까지 주고 있다. 마치 왕비가 떠나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량한 마을의 들판이 이 작품의 핵심 정서라는 지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듯, 일관성 있게 그 분위기가 유지된다. 사고를 자극하기에는 좋은 조건이자, 평소 권교정을 풍부한 유머감각으로 기억하는 일부 독자들에게는 이질감을 줄 수도 있을 듯 하다. 하지만 24페이지짜리 짧은 작품이니, 독서는 짧게 감상의 여운은 길게 가져가고자 하는 본래 목적에는 충실한 선택이다.

작가라는 마을처녀는 마을 사람들이라는 대중 독자들에게 창작능력이라는 보석과 꽃을 뿌린다. 받는 것만 익숙하던 마을 사람들은 왕이 그녀를 독점하자 화를 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마을사람들은, 왕비가 재능을 다시 그들에게 베풀어 주도록 출판사까지 차리고 책을 만들어낸다. 작품 속 사람들의 구도와는 다소 다르지만, 인간사의 수취관계라면 나는 이러한 현실 쪽의 사례를 훨씬 더 선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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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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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외로움과 함께 사는 일상 – <그와의 짧은 동거> [기획회의051230]

!@#… 지난 호 <기획회의>에 들어간 원고. 장모씨 이야기 연작 가운데 가장 이야기로서 완성도가 뛰어났던 파트가 책으로 나오니, 대략 흡족. 하지만 성찰적이고 비유력 깊은 작품이 대형히트를 치기에는 출시 타이밍이 다소 애매. 미디어 노출도 그리 많이 되지 않은 듯 하고… 음. 아쉽다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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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과 함께 사는 일상 – <그와의 짧은 동거>

김낙호(만화연구가)

바퀴벌레라는 존재는, 인간들의 사회에 있어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들은 자신들만의 룰에 의해서 자연계를 멋대로 바꾸어버렸고, 대다수의 동물들은 내쫒기거나 또는 인간에게 식료품이나 노예로 이용당하는 입장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바퀴벌레는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생태 규칙을 그대로 고수하면서 지금 이곳에서 인간 세계와 공존한다. 물론 인간들로서는 그런 낯선 존재들을 반길 이유가 없기 때문에 갖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바퀴벌레가 병균을 옮긴다고는 하지만, 사실 인간들이 옮기고 다니는 병균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을 ‘소탕’하려고 하지만, 지금껏 빈번히 실패해왔다. 굳이 말하자면 바퀴벌레라는 종은 인간세계의 일부가 되어버린지 오래인 셈이다. 인간세상의 일부지만 조금은 다른 존재. 다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은 내면에 귀중함을 감추고 있는, “언젠가는 백조가 되어 날아오를”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니다. 벌레는 다르면서도 그냥 범속한 존재다. 혐오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냥 일상적인 무관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벌레는 심지어 어떻게 되든 동정조차 가지 않는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문학에서는 바퀴벌레, 또는 실제로 바퀴벌레를 지칭하지만 그냥 ‘벌레’라고 표현되는 존재들은 아주 흥미로운 비유로 활용되고는 한다. 벌레로서의 인간은 범속하면서도 범속 이하인 처지, 또는 세상 속에서 가치가 없음에 대한 자기 환멸의 표현으로 활용하기 좋은 것이다. 세상 속의 부조화, 부조화의 결과인 외로움에 대한 자학적인 변명의 수단으로서 이보다 더 강력한 비유를 찾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관료주의 체코 사회 속에서 카프카가 “어느 날 일어나보니 커다란 벌레가 되어” 있지 않았던가.  

최근 출간된 <그와의 짧은 동거>(장경섭 / 길찾기)는 바퀴벌레와 동거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이 작품은 작가의 페르소나를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자아의 충돌, 일상화된 소외에 대한 성찰 등을 핵심주제로 삼으며 독립적인 이야기들을 풀어나가는 <장모씨 이야기> 연작 가운데 하나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바퀴벌레와 동거하게 된다. 단칸방에서 자취하는 젊은 남자의 집에 바퀴벌레가 공존하는 것은 그다지 신기한 일이 아니지만, 어느 날 진짜로 본격적인 룸메이트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같이 라면도 끓여먹고, 술도 먹으러 가고, 청소도 분담하는 사이 말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장모씨와 바퀴벌레의 짧은 동거생활을 따라가며, 사람이 만나고 우정을 발휘하다가 다른 인간관계 속에서 소원해지기도 하며 결국 갈라서고는 여운이 남게 되는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어떤 마법의 계기가 있거나 갑작스러운 놀라움이 있기 보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인간 사이즈의 바퀴벌레와 함께 해도, 주인공은 특별히 놀라지 않는다. 아니 사실 특별히 놀라는 것은 전 작품을 통틀어 주인공의 여자친구 한 명 밖에 없는데, 그녀마저 사람 사이즈의 바퀴벌레라서 놀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장모 씨가 진짜 바퀴벌레와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놀랄 따름이다. 다르고 비속해도, 어차피 이 세상의 일부다.

바퀴벌레는 이 사회에서 비루한 처지에 있는 어떤 계층에 속해 있는 자다. 실제로 <장모씨 이야기> 연작 가운데 인권만화 모둠 <십시일반>에 실린, 동남아 노동자와 동성애 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작품에서 보여준 작가의 세계관을 고려할 때, 이 부분에 대한 섬세한 비유력과 묘사는 경탄할만 하다. 하지만 동시에, 바퀴벌레는 일상화된 외로움을 살아 나가고 있는 주인공의 또 다른 자아이기도 하다. 이미 무덤덤해진 자기 자신의 좀 더 비속하지만 나름의 생활 패턴이 있는 또 다른 파트너, 가상의 생활 상대 말이다. 뜨거운 우정이나 불타는 애정이 아니라, 그냥 같이 사는 룸메이트. 적당히 배려해주고, 적당히 무관심해지는 그런 사이. 필요 이상으로 개입해서 내 생활을 바꾸어 놓지도 않지만, 영향을 미친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남을 대할 때보다, 우리 자신의 어떤 일면을 대할 때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던가. 그리고 그것을 ‘일상’이라고 불러 왔다. 기묘하게 현실적인 판타지이자, 단절된 자아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매력 말이다. 스스로 무너질 정도는 아니지만 일상화된 외로움이 있는 어떤 자아가, 이 사회 속에서 어떤 일상화된 비속함과 소외를 지니는 어떤 자아와 만나서 서로를 보충해준다. 하지만 그것은 외로움의 해소가 아니라, 외로움과 함께 사는 법을 좀 더 부드럽게 터득해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모씨와 바퀴벌레의 생활은 무언가 버디무비와도 같은 티격태격거림과 달리 은근슬쩍 시작하고 은근슬쩍 끝난다. 그 이별은 슬프기 보다, 자연스러운 성장의 일부분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상징의 무게에 짓눌린 무겁고 우울한 작품이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부드럽고 열린 선의 흑백 그림이 전해주는 풍부한 감성은 이 작품의 균형감각을 대변해준다. 이러한 필체 속에서 공간의 묘사는 현실의 남루함이 과장되지도 은폐되지도 않는 정도의 수위로 조절된다. 장모씨와 바퀴벌레가 동거하는 자취방 공간에 베어 있는 생활의 냄새는 어떤 자세한 사진으로도 따라할 수 없는 자연스러움으로 가득하다. 이야기의 연출 역시 적당한 반전과 효과적인 시간 이동이 돋보이는 극적 구조를 활용하면서도 특유의 담담함을 잃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섞여 들어가며, 오랜 시간 공들여 구상해낸 작품이라는 흔적이 역력하다. 책에 같이 실려 있는 다른 짤막한 단편들과 비교할 때 이러한 요소들은 더욱 돋보인다.  

만약 <그와의 짧은 동거>가, 한국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히트를 기록하던 수년 전에 나왔더라면 아마 대형 히트를 쳤을지도 모르겠다. 유감스럽게도 연재지면이 없어지는 바람에 거의 5년여를 너무 늦게 출간한 템포 늦게 출간되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환상적 비유를 생활의 남루함 속에서 활용하여 일상 속의 성찰을 이야기했던 감수성이 지니는 힘은 여전히 강력하다. 외로움에 대해서 청승을 떨기에는 너무 그 상태에 오랫동안 처해있던 이야기. 모든 이로부터 버림받았다느니 하는 과장이 아니라, 그냥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어딘가가 비어있는 것 말이다. 바퀴벌레와의 동거 속에서, 약간은 그 생활에 더 능숙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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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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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식탐 전문 만화 –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기획회의 051215]

!@#… 이번 소개하는 것은 남자들의 항문섹*를 그린 만화로 먹고 사는 Y나가 씨를 한국에 초청해서 미식기행 시켜보고 싶은 충동이 들게 만드는 만화. 만화가 자신의 사사로운 잡담(?)을 하는 만화 중 이래로 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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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탐 전문 만화 –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김낙호(만화연구가)

속칭 요리만화라는 장르가 있다. 보통 요리에 대한 대단한 전문가가 나오고, 신기에 가까운 대단한 요리들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요리는 단순히 그냥 먹을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정신’의 표현이다. 궁극의 꽁치초밥이 사실은 끊임없이 노력하는 장인의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라든지, 소고기가 자연과 함께하는 생활자세의 형상화라든지, 라면의 따듯함이 사실은 두 연인의 서로에 대한 마음을 이어주는 고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든지 하는 식 말이다. 보통 요리는 요리로 끝나지 않고, 인간사를 매개하기 위한 상징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계가 그 요리를 둘러싸고 결국 모두의 감동으로 해결되는 패턴이다. 일본의 <맛의 달인> 류든, 한국의 <식객>류든 공유하는 지점, 즉 요리 자체가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주제의 구현화라는 점 말이다. 맛있는 음식으로 결국 화해를 하고 하나가 된다니, 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재미도 상당하다.

그런데, 가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이거 너무 오버하는 것 아냐? 요리가 맛있다고 사람들이 다 행복해지고, 요리가 모든 인간사의 상징이라니. 요리라는 소재의 특성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너무 과도하게 끼워 맞추기 식으로 의미를 부여한다는 느낌 말이다. 그리고 돌아서서 생각해본다. 요리에 우리네 생활이 어떻게 맞춰지는가가 아니라, 과연 우리들이 요리를 맛있게 먹고 다닌다는 것이 어떤 의미고 느낌이었는지 말이다. 인생사에 대한 훌륭한 상징체로서의 요리라는 개념따위는 그냥 낭비해버리고, 그냥 맛있게 요리를 먹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시원스러운 작품을 보고 싶을 때가 오는 것이다.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요시나가 후미, 서울문화사)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속칭 ‘야오이’ 계열 남성 동성애물에서 지명도를 키우던 이 작가가 메이저에서 큰 주목을 받도록 한 작품 <서양골동양과자점>에서부터 그런 조짐이 뚜렷하게 보였지만, 소품인 <사랑이 없어도...>에서 드디어 아주 본격적으로 진가를 드러낸다. 요리가 인생사의 상징이고 장인정신이고 그런 가치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완전히 ‘먹는 자’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접근한다. 인생이고 상징이고, 맛있는 것을 찾아 먹기에도 바쁘지 않은가. 과중한 의미 부여 그런 것 필요 없다. 맛있는 음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하다. 물론 무척 맛있는 것을 따지기 때문에 그냥 맛있다는 표현으로는 안되고 “척 보면 시고 짤 것 같은데 은근히 달콤하다구! 그리고 거기에 해산물의 감칠맛까지 더해지면! 맛있지? 맛있지?” 정도는 기본이다. 하지만 요리인의 장인정신이니 사연이니 그런 것은 솔직히 관심 없다. 이 식당이 이 요리는 기차게 맛있다, 정도면 충분하다. 식도락, 혹은 좀 더 친근하게 말해서 식탐이야 말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끼고 사는 진짜 즐거운 요리의 모습이다.

자, 그렇다면 식탐이란 무엇인가. 누군가가 “어떻게 하면 맛있는 가게를 많이 찾을 수 있어?” 라고 물어본다. 그 질문에 대해서, 작가는 극구 ‘픽션’이라고 주장하지만 누가 봐도 작가 자신을 자서전적으로 형상화한 주인공 “Y나가 F미”가 설명해준다. “이 보셔, 나는 일할 때랑 잘 때 빼고는 거의 하루 종일 먹는 것만 생각하면서 살아왔거든. 그리고 종류에 따라선 일할 때조차 먹는 걸 생각하고 있다고. 그만큼 먹는 데 일생을 바쳐왔으면 먹을 것도 나에게 얼마쯤은 보상을 해줘도 된다고 생각한다만”. 도대체,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인생의 의미부여도, 장인정신도 아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순수한 욕심이다.

<사랑이 없어도...>는 식탐으로 가득한 만화다. 인생사를 말하기 위해서 요리를 동원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실상은 요리 소개가 주가 되는 여타 요리만화와는 다르다. 인생사는 인생사고, 그 인생사를 사는 사람들이 식탐을 부리면서 생활하는 이야기를 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사에 대한 이야기가 부실한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주인공 Y나가를 비롯, 주변의 어딘가 모자라면서도 서로 아귀가 잘 맞는 인물들이 펼치는 일상적인 이야기들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는 행위를 매개로 하고 있지만 요리 자체보다는 요리를 맛있게 즐길 줄 안다는 식탐의 존재 또는 취향이 바로 이들 인간들의 사연들을 묶어주는 진짜 고리다. 요리를 먹으며 엉뚱한 사랑을 꿈꾸고, 게이로 커밍아웃한 옛 친구와 감정을 나눈다. 이러한 인간관계에 대한 묘사는 이미 이 작가의 전매특허인 직접적이면서도 함축적인 대사와 섬세한 표정 연출로 만만치 않은 깊이를 자랑한다.

만화의 형식은, 8페이지짜리 에피소드들의 모음으로 되어있다. 8페이지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의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이야기가 기본적으로 들어가고, 그것을 중심으로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사연과 상호 관계가 살짝 드러나고 진전된다. 식당은 실제로 일본 도쿄에 있는 식당이라서 하나의 에피소드가 끝나고 나면 가게 소개가 한 페이지 붙는다. 덕분에 이 이야기는 픽션이지만 식당은 실재한다는 권두 안내문이 한층 재밌는 울림을 준다. 이외에도 그림체는 평소 동일 작가의 다른 작품들보다 훨씬 설렁설렁 가벼운 선으로 그렸으나, 요리를 묘사할 때만큼은 대단한 집중력을 발휘해서 정말 침이 꿀꺽 넘어갈 정도로 독자들을 유혹하는 능란함을 보인다.

물론, <사랑이 없어도...>는 워낙 소품이다 보니 농밀한 기승전결 또는 확고한 엔딩 등의 드라마틱한 요소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극적 요소를 살짝 첨가한 생활일기에 가까운 셈이라서 다른 요리만화들에서 익숙해진 화려한 대결구도와 뜨거운 감동을 원하는 독자들에게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니는 것의 즐거움을 아는 독자, 또는 하다못해 단지 한밤 중 출출할 때 자신의 빈 속을 한번 학대하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추천할 수 있는 멋진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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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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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읽지 않는 세상의 시사만화 읽기 [인물과 사상/0512]

!@#… 만화와 저널리즘이라는 일관된 주제에 천착하는 연재물, 월간 <인물과 사상> 2005년 12월호 수록 원고. 아시다시피 격월간으로 기고중. 이 페이스면 내년 말 정도면 단행본 분량이 쌓일지도 (분량만 쌓이면 뭐하나, 아무도 책내자는 욕심이 없는데).

!@#… 1월 중순에 발간 예정인 2월호에는 당연히, 황랩 사건을 바라보았던 여러 만화들의 모습들에 대해서 쓸 예정(시사뒷북에 정신이 멍해지고 멜랑꼴리에 구토를 할뻔했던 경험들을 살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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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통찰하는 유머 – <페르세폴리스> [기획회의 051129]

!@#… 이전에도 다른 글로 지적한 바 있고 이번 본문에서도 약간 언급했지만, 한국어판의 번역 품질은 좀 개선의 여지가 많다. 이 작품 특유의 일상성과 유머러스함이 상당히 많이 뭉개지니까. “Russians are not like us” 라는 대사를 “러시아인은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단다”(불어판이 아닌, 영어판에서 중역을 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라고 쓴 것은 그나마 아예 명백한 오역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여튼 전문 번역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주는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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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통찰하는 유머 – <페르세폴리스>

김낙호(만화연구가)

사회라는 생물은 복잡하고 거대하다. 그렇기 때문에 단번에 사회의 전모를 객관적으로 읽어내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 특히 사회를 읽어내고자 하는 사람이 그 사회 속에 들어있다면 더욱 더 시야와 세계관이 한정되기 마련이다. 사회학자들이든 작가든 혹은 단순히 일상을 영위하는 일반인이든 누구나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거꾸로, 시각이 제한적이고 주관적이라는 것을 애초부터 당당하게 내세우고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소설 등으로 대표되는 서사극에서 그것은 ‘1인칭 작가 시점’이라는 것으로 구현된다. 지금 펼쳐지고 있는 이야기는 그 상황 속에 처해있는 어떤 사람의 주관적인 경험담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사회를 읽어냄에 있어서 전모는 커녕 일반인 수준의 파악도 되지 않는 사람의 주관적 시각이라면 어떨까. 우매한 자의 눈, 즉 일반적인 남성 성인 주도의 사회 속에서는 사회적 역할이나 지식이 한정되어 있는 주부, 아이, 바보 등의 시점 말이다. 비록 이야기 속 상황을 읽어냄에 있어서 대단히 답답한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우매한 자의 눈’은 매력적이다. 우매한 자의 눈으로 보면 사회 속 우리가 일상적으로 영위하면서 살아나가는 과정이란 참 말도 안 되는 이상한 것들로 수놓아져 있다. 그리고 ‘일반인’인 독자들은 처음에는 그 괴리를 보면서 유머와 아이러니의 재미를 느낀다.  그런데 사실 약간만 생각해보면, 우매한 자의 눈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이 사회는 말도 안되는 것들 투성이인 것이다! 약자의 입장에서 사회적 통찰로 이르는 이 과정 속에 독자들은 거부감 없이 쉽게 녹아들어간다. <포레스트 검프>, <케빈은 열두살>, <양철북>,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등 많은 이야기 작품들이 우매한 자의 눈을 성공적으로 활용해왔다.

일상과 커다란 사회적 흐름이 맞닿아 있는 이야기에서, 이 기법은 더욱 빛을 발한다. <페르세폴리스>(마르잔 사트라피 / 새만화책 / 1권 발매중)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 놓여있는 수작이다. 현대 이란이라는 사회가 있다. 물론, 서울에서 가장 땅값 비싼 곳 가운데 하나가 무려 테헤란로라고 이름 붙인 것과는 달리, 이란에 대해서 한국에 알려진 바는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작품을 보면서 파악할 수 있듯 독재정권과 민주화 운동, 짧은 해방감과 근본주의 진영의 반동에 의한 독재 재개, 이웃나라와의 전쟁, 미국의 개입… 순서와 패턴이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유사한 현대사의 재료들을 가지고 만들어진 곳이다. <페르세폴리스> 1권은 이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꼬마 마르지, 즉 작가 자신의 자전적 체험담이다. 여자 아이의 우매한 눈을 통해서 바라보는 현대사의 격변과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여러 모순과 함의, 그리고 희망들이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게, 그냥 일상적으로 펼쳐진다.

주인공 마르지는 비록 진보적 성향의 집안의 딸이지만 여하튼 꼬마인 덕분에 사회주의, 종교근본주의, 민주주의 같은 담론 덩어리들도 고뇌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일상 속의 피상적 표어들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삶은 직접적으로 영향 받는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그러했듯, 정작 감동적인 것은 실제로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인 것이다. 그 삶 속에는 사회운동가 아누쉬 삼촌의 이야기, 폭격으로 사라진 친구 이야기 같은 무거운 순간들이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서방의 인기 여성 락커 킴 와일드의 포스터를 밀수해 들여오고 이웃끼리 술파티를 벌이는 즐거움의 순간들도 있다. 조숙하고 활달한 꼬마 마르지의 행동들, 그리고 그 순간을 지금 자신의 눈보다는 어린 시절의 우매한 눈으로 회상하는 작가 사트라피의 유머감각이 함께 녹아들어가면서 작품은 유머와 진지함, 품격과 발랄함을 얻어낸다. 그 속에서 자유와 억압, 생활과 이념, 격변기 이슬람 세계 속 여성의 위치, 중동과 서방세계의 문화적 관계 등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틀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만화로서의 연출 효과 역시 큰 매력이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 그리고 프랑스 만화가 다비드 베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간결한 흑백 그림체는 아이의 눈과 사회의 복잡함이라는 추상적 느낌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가끔 칸 내에서 화려한 미장센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칸 간 연출의 기본은 쉬운 독서가 가능한 명료한 스타일을 따른다. 많은 부분에서 아이의 언어를 바탕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서구만화 특유의 장황한 대사와 나레이션의 압박 역시 상대적으로 덜하다. 사회적 텍스트로서, 재미있는 이야기로서, 효과적인 만화 표현으로서 모두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인 셈이다.

확실히 이런 우수한 만화가 소개되어 들어오는 것은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 출간된 한국어판에는 번역 문제에서 다소 만족스럽지 못하다. 물론 1권의 부제인 ‘어떤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내 어린 시절 이야기’로 번역되어서 한 사회를 바라보는 이야기인 이 작품의 의미를 한 개인의 특이한 경험담으로 축소하는 등의 미묘한 차원의 실수는 그냥 아쉬움으로 남길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작품의 핵심적인 매력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모스크바’ 에피소드의 첫 대목이 대표적이다. 원래는 마르지가 데모하다가 잡혀가서 고문을 당한 경험이 없는 아빠를 둔 자격지심 때문에, 학교 친구들에게 자기 아빠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허풍을 떨고 아이들은 그 허풍이 너무 심해서 기가 질리는 내용이다. 이것은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에, 진짜로 운동하다가 투옥되고 고문당한 삼촌 야누쉬를 알게 된 후 그것을 자랑해도 친구들이 여전히 허풍이라고 생각하는 부분과 댓구를 이루며 훌륭한 유머감각을 발휘한다. 하지만 번역판에서는 오역으로 인하여 이런 내용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야기의 전체 흐름에 지장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우매한 자의 눈으로 만들어지는 역설과 유머를 통해서 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이 작품의 매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사례다. 만화라는 장르가 꼭 유머라는 고정관념에 매몰될 필요는 없지만, 반대로 작품성 있는 만화라는 이유만으로 유머라는 큰 매력이 억지로 거부당해야 할 이유도 없을 터인데 말이다. 2판부터는 이러한 지점들이 잘 수정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긴다. 또한 이란 사회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무지를 고려할 때, 역사 문화적 맥락을 설명해주는 해설이 첨부되었더라면 하는 바람 역시 간절하다.

<페르세폴리스> 1권의 결말에서 사춘기의 나이로 프랑스로 유학을 간 마르지는, 2권에서 서구 생활의 풍파를 겪은 후 다시 이란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사춘기에 들어선 그녀는 이미 더 이상 아이의 우매한 눈이 아니라 성숙한 성인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이번 출간된 1권의 매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세폴리스>는 ‘사회성과 작품성이 있는 서구만화’의 왕좌를 오랫동안 지켜온 <쥐>의 아성에 도전할 수 있는 멋진 작품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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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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