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시작하는 풍경에 관하여 [경향신문 만화풍속사 041231]

!@#… 이번회부터는 좀 더 형식을 자유롭게 가려고 시도. 특정 작품 하나 찍고 가는 게 아니라 폭넓게 잡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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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시작하는 풍경에 관하여

  일본 만화, 그 중에도 현대 일본을 배경을 하고 장기연재 중이며 에피소드 방식의 전개를 지니는 작품들을 보면, 이맘때면 소위 ‘연말/정월 이벤트’라는 것이 종종 있다. 주인공들이 모여서 기모노를 입고 신사에 새해소원을 빈다든지, 깃털치기 놀이를 하며 정월 도시락을 먹는다든지 하는 기초설정을 우선 놓고 그 위에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 것은 일종의 장르적 규칙인데, 발렌타인 데이 즈음에 괜히 쵸콜렛 선물을 놓고 남녀주인공들이 고민스러운 연애모드로 돌입하는 것과 함께 명절 이벤트의 양대산맥이다. <유리가면> 같은 고전이든, <아즈망가 대왕> 같은 최근의 4칸 개그 드라마물이든 말이다.

  민족감정이라는 애매모호한 가치를 내걸면서 일본 만화를 애써 마치 한국만화인양 억지로 번안(?)해서 들여오는 것이 당연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 작품들의 경우, 이 신년 이벤트는 항상 애물단지 신세였다. 주요 캐릭터들이 난데없이 기모노를 입고 일본 전통 풍습을 따르기 때문이다.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아예 에피소드를 통째로 빼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내용전개상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엄청난 수정신공, 즉 장면 위에 덧칠을 해서 다른 내용으로 바꾸어버리는 편집기술으로 기모노를 한복으로 개조하는 일도 허다했다. 그 경우 무려 한복을 입고 깃털치기 놀이를 하고, 일본의 끈적 쫄깃한 스타일의 떡을 먹는 엽기적인 문화 퓨전 현상이 발생하기 일쑤였다.

  그렇다면 한번 물어봄직한 질문은, 과연 현재의 한국만화에서는 한국의 설 풍경을 어떻게 소재로 활용하고 있을까 하는 점이다. 유감스럽게도 거의 써먹지 못하고 있다. 이런 것에 대해서 패배주의적인 시각의 소유자는 “일본과 달리 한국은 설 전통이 미미해졌기 때문이다”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일본이라 할지라도 만화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다들 기모노 입고 돌아다니는 일은 그다지 없다. 다만 하나의 장르적 규칙으로 승화를 시킨 것 뿐이다. 한국만화에서 그 소재를 제대로 못다루고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현실, 스스로의 생활을 효과적으로 작품 속에 반영해내는 것에 게을렀기 때문이다.

  가족친지들이 모여서 차례 지내는 풍경, 설 귀향으로 쓸쓸해진 도심에서 호호 불어가며 떡국을 먹는 궁상 같은 훌륭한 이벤트 소재를, 개발도 안해보고 그냥 날려버리면 너무도 아깝다. <우주인>(이향우 작) [주: http://www.uzuin.com 의 ‘우주인’ 연재 또는 단행본으로 1권 14화를 찾아보시길] 의 신년 에피소드 같은 멋진 이벤트로 한국적인 장르 컨벤션들이 무럭무럭 자라나서 새로운 재미를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희망을 품어본다.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경향신문 04.12.31]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금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여기 올라오는 것은 신문편집과정을 거치지 않은 ‘원본’입니다… 별 차이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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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 아이스너 타계. (1917-2005)

!@#… 미국만화…아니, 만화라는 양식 자체의 거장, 윌 아이스너 타계. 2005년 1월 3일, 심장수술 중 운명. 장수를 누리면서 단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은 노 작가의 명복을 빈다. 그러고보니 얼마전에 소설가(이자 운동가…아니 운동가이자 소설가?) 수전 손탁도 타계. 음음음…

!@#… 윌 아이스너는 한국에서는 스콧 맥클루드의 만화이론서 <만화의 이해>를 통해서 주로 알려졌다. 사실 <만화의 이해>는 핵심논리의 상당 부분을 아이스너의 <만화와 연속예술>(국내 출간명은 생뚱맞게도 “그림을 잘 엮으면 만화가 된다”)에 빚지고 있고, 스콧을 포함한 대부분의 의식있는 미국작가들은 아이스너라는 영웅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표현하고 싶어서 항상 안달이다.

!@#… 하기야 그럴만하기도 한 것이, 이 사람은 한 평생 미국 만화 발전의 최전방에서 뛰어왔기 때문이다. 지난 70년간 수많은 주류/비주류 작가와 작품들이 아이스너의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에서 자라났다. 그럼에도 과거의 명예에 집착하기보다는 지금 더 좋은 작품을 만들고, 후배들이 활동하도록 판을 짜주고, 만화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인식 개발을 위한 캠페인과 교육을 벌였다. 정말, 만화 그 자체를 사랑한 작가.

!@#… 간단히 약력을 요약하자면:

1936 잡지에 정식 데뷔.  해적 모험만화 Hawk of the Seas 연재.

1936-39 Eisner & Iger Studio 를 통해서 미국만화의 중추를 이룰 수많은 인재 양성. 미국식 히어로물의 비주얼을 완성시킨 잭 커비, 배트맨의 밥 케인, 작가주의 쥴 파이퍼…

1940  연재 시작. 사상최초로, 일요일자 신문에 16페이지 별책부록으로 수록. 이 작품은 가면을 쓴 탐정이 등장하는 수사물인데, 나중에는 인간사 전반을 다루고 만화의 형식적 연출실험의 장도 되는, 아이스너의 라이프워크이자 최대 베스트셀러.

1942-45 펜타곤에서 준사관으로 복무. 교육/홍보 만화의 문법과 활용을 새로운 경지로 발전시킴.

1945-52  연재 재개. 이 후기 시리즈의 원숙미는 지금봐도 가히 발군.

1978 이런저런 작은 시리즈물과 홍보에 전념하는 듯 하다가, 이 때 큰 건을 하나 터트림. 바로, Graphic Novel 이라는 개념의 발명. . 연재 시리즈물이 아닌 완성된 단행본으로 발행하고, 시각 연출과 문학적 깊이에 초점. 이후 1년에 한 권 꼴로 이런 류의 작품 발표. 부지런하기도 하지. 이후 New York School of Visual Arts 에서 만화 강의. 후에, 이를 기반으로 이 분야의 고전격인 교과서 출시.

1988 샌디에고 코미콘에서 수여하는 대상에 Eisner Award 라는 명칭 부여. 그런데 이 사람, 여전히 유능한 현역이어서 자기 이름으로 된 상을 여러번 수상. -_-;

…이후에도 계속 작품 발표하고, 상타고, 공로상 부여받고, 교육하고… 그런 것들의 연속. 5월에 출간 예정인 유작 THE PLOT: The Secret Story of The Protocols of the Elders of Zion 의 설명을 읽어보니, 이 사람은 정말 젊은 작가의 패기와 노 작가의 원숙미를 겸비한 괴인이었다는 느낌이 마구 든다. 100년전 러시아의 유태계 지오니즘과 관련된 음모론의 발생과정을 통해서 시대와 사회를 꿰뚫는 통찰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하니… 서문은 움베르토 에코.

!@#… 꼭 한번 한국으로 초빙해서 세미나/강좌 테이블로 끌고 나오고 싶었던 인물이었는데… 타이밍을 영원히 놓쳐버리고 말았다. 만화인생 70년, 평생 현역. 작가로서도 활동가로서도 교육자로서도 솔선수범 진두지휘. 이제는 평안하게 휴식을 취하시기를. 

– 작가 소개 (영어의 압박): http://deniskitchen.com/docs/bios/bio_will_eisner.html

– 윌 아이스너 공식 홈페이지: http://www.willeisn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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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울의 움직이는 재앙>을 보고 오다

(애니품평이지만… 그냥 카테고리는 만화품평으로 넣었다. 서찬휘님 블로그에서 트랙백.)

!@#…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고 오다. 이후는 당연히 스포일러 주의. 아니 사실 스포일러라도 많이 보고 가는게 사실 관람에 도움이 될지도. 여하튼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런 폭탄맞은 시나리오라도, 미야자키 브랜드가 붙으면 히트치는구나!” -_-; 뭐랄까, 미야자키 할아버지가 늙으막에 린타로나 제리 브룩하이머 같은 화끈하고 골빈 선남선녀 대파괴 폭죽쑈에 손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흔히 capcold식 표현으로, “재앙영화”. 영화 자체가 재앙이라는 말이다.

!@#… 노장에게 새로운 것을 바라기보다 그 원숙미를 즐기라면서 호평을 하고 있는 분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원숙은 커녕 자기가 쌓아올렸던 좋은 실력을 몽창 날려먹은 희대의 괴작으로 보였다. 무슨 과시욕에 사로잡힌 얼치기 신인 초짜 감독 마냥, 세계관도 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스펙타클 이벤트에 끌려다니기 바쁘다. 이건 유치한게 아니라, 그냥 골빈 거다. 작품 속에서, 마법의 힘을 제거당하고 치매 할멈의 모습으로 폭삭 찌그러져버린 황야의 마녀 – 그것이야말로 이번 작품에서 미야자키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 재미있게 보았다는 분들을 비난할 생각은 아니다. 뭐 나름대로 다들 이유가 있겠지. 그 중에는 합리적인 이유도 있을테고, 그냥 미야자키니까 하면서 부화뇌동하는 자기사고 제로의 바보들도 여럿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왜 이걸 재앙이라고 생각하는지 정리를 좀 해놓고 싶다. 시나리오의 뭐가 그리 노골적으로 불만이라는 것인가? 딱 3가지만 정리해보자.

1) 주인공의 갈등과 성장은 밥말아 먹었는가: <마녀의 택급편>에서 보여준 소녀의 섬세한 성장과정. 그 마법은 이 영화에서는 완전소멸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에게 걸린 ‘늙는 저주’는 결국 마음의 활력을 반영한다. 마음이 소녀적인 활력과 사랑에 눈뜰 때, 그리고 무덤덤한 자기비하를 잊어버리고 잠을 잘 때는 자기도 모르게 다시 소녀로 돌아오는 소피. 이건 꽤 중요한 모티브이며, 작품을 끌어가는 갈등이자 원동력이 되어주었어야 할 물건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선택과 희생을 치루며 결국 새로운 성장을 이루면서 끝나는 기승전결을 완전히 무시. 그냥 하울만 기다리고 쫒아다니다 보니 어느틈에 저주는 해결. 뜬금없음의 극치인 것이, 거의 원더풀데이즈 급이다. 동기 없이 돌아다니기는 하울 역시 대동소이하지만 말이다. 전쟁 중재? 양쪽의 정치인들을 만나가면서 설전을 벌이거나, 혹은 그걸 두려워서 피하거나. 그냥 흐린 하늘을 날라다니면서 곡예쑈한다고 뭘 해결한다는 건가. 주인공들의 성장은 설정상 주어진 것일 뿐, 시나리오 상에서의 설득 과정이 뭉텅 빠져있다.

2) 세계관도 설명 못하면서 뭘 그리 벌려놓는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는 전쟁으로 치닫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의 욕망, 그리고 박애 넘치는 해결과정을 방대한 세계관과 함께 자연스럽게 전달해낸다. <하울...>은 도저히 같은 감독이라고 상상도 할 수 없다. 하울에서 전쟁을 한다는 그 양쪽 나라의 논리는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일반인/정치가/마법사/정령/악마 등 여러 종족과 계층들의 관계 역시 얼렁뚱땅 설명 없이 넘어간다. 설명 없어도 이해할 만한 거라면 좋겠지만, 스토리상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건너뛰는 것이다. 그래서 칼시퍼가 하울에게 들어가게 된 과거 회상에서 애초에 왜 칼시퍼가 지상으로 소환당했는지, 어째서 그 합체의 과정 속에서 하울은 저주를 받게 되었는지, 하다못해 그 저주의 구체적인 내용이 뭔지(그냥 힘쓰다보면 괴물로 변한다는 거 말고, 제대로 된 ‘규칙’말이다) 모두 생략. 그렇기 때문에 후반에 들어가서는 모든 스토리 전개의 논리가 급격하게 붕괴된다. 전반에 세계관 구축을 하고 후반에 그 속에서 사건들이 벌어지고 수습되는 구조여야 할 것이, 세계관 구축도 안된 상태에서 사건만 뜬금없이 계속 연속되다보니 망가지는 것이다. 덕분에 소피는 ‘쓸데없이’ 성을 무너트렸다가 다시 세우고,  하울은 왜 싸우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뭘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여튼 고생하고 다닌다. <하울...>에서는 스토리 전개 자체에 매우 중요한 세계관 설명이 뭉텅이로 빠졌다. 불친절한 시나리오와 멍청한 시나리오는 한끝 차이다; 유감스럽게도 <하울...>은 후자다. 원작 소설을 찾아읽어보라고? 제대로 된 시나리오 각색에 실패했다는 시인이겠지. 여튼, <하울...>의 시나리오는 작품 속 세계의 구동 원리를 관객에게 납득시키는 것에 처절하게 실패하고 있고, 그 덕분에 결국 남는 건 미야자키 하야오표 ‘코드’들 뿐이다. 날라다니다가 추락할 때 손을 잡아준다든지, 자연 평원과 기계 무기의 대립된 이미지라든지, 고풍스러운 환타지 비행선들의 공중전이라든지 말이다. 각각 그 자체로만 보면 매력적일 지라도, 통합된 추동력 없이는 키치처럼 보일 뿐이다. <온 유어 마크>에서 무려 6분 만에 모든 세계관을 다 표현하고도 여유가 남아서 복합 선택형 스토리구조까지 도입한 천재감독은 도대체 어디로 간건가?

3) 매력적인 캐릭터 구축은 디자인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이웃의 토토로>에서 보여준 환타지 캐릭터들의 활기찬 생명력도 모두 소멸. 그냥 처진 눈에 분주하게 제자리를 돌기만 할 뿐인 개는 아무 매력이 없다. 그냥 쫒아다니면서 가끔 도움을 주기만 하는 허수아비도 마찬가지다. 갈등도 뭣도 없는 꼬마 마법사 역시 마찬가지. 뭐랄까, 마치 <포카혼타스> 이후로 점점 망가져 가던 디즈니 클래식의 동물조연들을 보고 있는 느낌. 그 난잡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조차 이렇게 망가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임무와 역할과 상징이 있는 캐릭터가 아니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천공의 성 라퓨타>의 거신병 같은 초절정 사연만땅 조연 캐릭터는 다시 만나기 힘든 것인가. 개연성 없는 주연 캐릭터들은 앞에서 이미 언급했으니 패스.

!@#… 지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전 세계의 관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세상에, 이래도 나를 추종할래?” 라는 도발이다. 출중한 이야기꾼으로 자기 입지를 확보해온 지브리, 그중에서도 미야자키 감독이 이렇게 망가질 줄이야. “너따위가 뭔데 대 감독님의 시나리오를 씹는거냐?”라고 항의하는 분들에게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그런 대 감독이, 나 따위한테도 씹힐만한 시나리오를 들고왔는데 어쩌란 말이냐!”

!@#… 만약 쓸데없는 전쟁 이야기가 빠지고 마법사들끼리의 세력/파벌 다툼이 중요한 축으로 다루어졌다면 어땠을까. 그럼 황야의 마녀도 선생님도 그렇게 낭비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울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소피가 자신의 저주를 푸는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면? 소피의 자기희생과 진정한 성장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주인공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모습 정도는 구경할 수 있었을테지. 하울과 캘시퍼의 운명공동체적 애증관계가 좀더 잘 묘사되었더라면? 서로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아니 어쩔 수 없이 정들어버렸으면서도 힘으로 균형관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는 묘한 긴장감이 돋보였을 것이다. 만약, 만약, 만약… 좀 더 낳은 시나리오가 될 수 있던 수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프로젝트에서, 그 모든 것을 버리고는 이런 물건이 탄생했으니 참으로 개탄할 노릇이다.

!@#… 뭐, 적어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이래서는 “이번 것이 진짜 은퇴작이었습니다”라는 선언은 못할 것이다. 어서 설욕작을 새로 만들지 않으면, 막판에 치매성 졸작으로 자기 얼굴에 먹칠을 한 감독으로 대대로 기억당할테니까. 이것이 바로 나름대로 <하울...>의 의의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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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담론의 역사를 리셋시키지 말란 말이다.

!@#… 신문을 읽다가 푸념 한가지. 사람들이 멋대로 한국에서 만화 담론의 역사를 리셋시키지 말아줬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 만화 자체를 깔보니까 만화에 관한 담론도 그렇게 우습게 보는 거라고.

…뭐냐, 이 찌라시스러운 기사는. 최초, 1호, 오오!박사!! 뭐 그런 느낌을 위해서 적당히 사실을 날조하고 혼자 좋아하고 싶은건가. 만화학박사? 저기… 신방과에서 만화를 소재로 한 논문이 통과되면 그건 여전히 신방과 박사라는 기본 상식을 기대하는 건 좀 무리일까(실제로, 박사과정이 있는 만화학과는 공주대에 있다…올해 생겼지). 신방과든 교육 관련이든, 지금까지 만화를 소재로 한 논문을 쓰면 다 만화학 전공자가 된다는 건가. 1호 박사? 공주대 임청산 교수는 그럼 0호구나. 1호 평론가? 아니 그럼  7말8초에 활동한 오규원이나 김현 등은 선사시대로 치는 건가 (그 이전 세대들은 더더욱 말할 필요도 없다). 아니면 신문 공모전으로 등단해야만 ‘공식’ 평론가 직함을 부여할 수 있다는 황당한 오만인가? ‘스타’를 만들어내서 야한 기사를 쓰고 싶은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최소한의 사실관계 확인도 없이 이쪽 분야를 그렇게 맘대로 폄하해 버리면 섭하지 않은가.

!@#… 여담이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기자들은 그 분야의 전문가다”라는 말도 안되는 뻥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 아 물론 직업 특성상 정보를 많이 접할 기회가 있고, 노력여하에 따라서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전문가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차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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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사랑에 보답하다 – <슬램덩크> 후일담 [경향신문 만화풍속사 041217]

지난주, 일본 카나가와 현에 있는 한 폐교가 갑자기 다시 학생들로 붐볐다. 이 동네를 배경으로 하는, 스포츠 속에서 우정과 성장을 나누던 멋진 학생들의 이야기가 펼쳐졌던 만화 작품 한편을 기리기 위한 이벤트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 작품은 한국에서도 엄청난 붐을 몰고 온 바 있는 농구만화 <슬램덩크>(이노우에 타케히코)고, 이번 이벤트는 1억권 판매 돌파를 자축하기 위한 팬서비스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자들과 함께 호흡하고 성장하는 작품, 자기 작품과 그 속의 주인공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꾸어낸 작가. 여하튼 30여권의 시리즈로 단행본 1억권을 돌파한 것은 만화시장이 거대한 일본이라 할지라도 그 사랑의 크기가 얼마나 컸는지를 증명해주는 하나의 척도인 셈이다.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서 작가가 시작한 작전의 첫번째는 바로 일간지 전면광고였다. 어느날, 일본의 주요 종합일간지에 주요 캐릭터들이 각각 한 명씩 신문 한면을 통째로 채우며 멋진 모습의 스케치로 등장해서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통 큰 팬사랑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시작이었을 뿐. 두번째 이벤트는 온라인에서 벌어졌다. 주인공들의 농구경기 장면이 펼쳐지고, 관중석에는 관중이 가득하다. 그리고 팬들은 사이트에 등록해서, 자신만이 아바타를 관중석에 앉히고 응원 메시지를 띄울 수 있도록 했다. 즉 북산(쇼호쿠) 고교 농구부 경기의 하이라이트에 직접 가서 응원을 하는 기분을 만끽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이벤트의 하이라이트가 바로 지난주의 폐교 이벤트였다. 폐교에 들어가서, 23개 학급의 칠판에 만화를 그린 것이다! 작품에 등장한 매력적인 주인공들의 후일담을 23개의 짦은 에피소드로 칠판위에 분필로 그려냈다. 그것도 작품의 배경이 되었던 그 동네에서 말이다. ‘마지막’이라는 이미지, 학교라는 공간, 그리고 나아가 칠판위의 분필 낙서가 가지고 있는 그 자유분방한 에너지까지. 뭐랄까, <슬램덩크>라는 작품에서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이벤트를 펼친 것이다(공식 사이트에서 제작 동영상을 볼 수 있으며, 만화 내용은 칠판색 그대로 편집한 특별 한정판 엽서세트로 소량 상품화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며칠간의 ‘꿈 같은’ 시간이 흐른 뒤, 칠판을 지우는 마무리까지. 작품 자체의 분위기와 주제의식과도 자연스럽게 일맥상통한다.

만화라는 장르가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필살기라면 바로 독자와의 긴밀한 호흡이다. 이번 슬램덩크 이벤트는 그 점을 명확하게 짚어준 최고의 사례다. “1억권 팔렸으니 이런 이벤트도 하지” 라고 푸념할 것이 아니라, 이런 이벤트를 할 정도의 마인드를 가졌기 때문에 1억권 팔린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독자들과 작품에 대한 사랑으로 따지자면 10억권이라도 부족할 한 만화 작가의 성의에 박수를 보낸다.
[경향신문 04.12.17]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금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여기 올라오는 것은 신문편집과정을 거치지 않은 ‘원본’입니다… 별 차이 없지만;;)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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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이야기 – <천일야화> [기획회의041214]

이야기의 이야기 – <천일야화>(전진석/한승희)

‘이야기’라는 것의 매력은 무엇일까?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주인공들이 행동하는 방식들을 간접적으로 바라보는 행위가 우리에게 왜 즐거움을 주는 것일까. 여러 가지 설명이 나올 수 있겠지만, 크게 바라보자면 한 가지는 공감의 재미, 즉 주인공들의 감정과 활동상에 이입을 해서 같이 난관을 극복해 나아가는 듯한 쾌감을 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의외성의 재미, 즉 자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세상과 “나라면 결코 했을 리 없는 선택”을 내리는 주인공을 보면서 자신의 인식의 지평을 넓혀나가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를 얼마나 잘 배합할 수 있는가에 따라서 이야기의 재미가 좌우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모든 것을 다 풀어나가기는 쉽지 않고 욕심이 나기 마련이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수많은 요소들이 들어가 있는 복잡하고 큰 대하 서사극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이야기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수많은 작은 이야기들로 묶여져 있으면서, 그것 자체가 하나의 큰 이야기가 되는 구조로 끌고 간다는 말이다. 작은 이야기들이 각자 자신만의 매력과 기승전결, 이입과 의외성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모든 이야기들이 특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하나의 커다란 묶음으로 뭉쳐진다. 이런 구조 덕분에 세월의 흐름 속에서 독자들의 반응에 따라 새로운 이야기를 추가하거나 삭제하는 것이 쉽고, 각각의 세부적인 디테일 역시 쉽게 수정할 수 있게 된다. 즉 ‘시대와 함께 진화하는 이야기’가 되어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장르의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베스트셀러라면 역시 기독교의 “구약성서”겠지만, 가장 ‘재미있는’ 것을 고르자면 큰 이견 없이 아마도 “천일야화(아라비안 나이츠)”가 꼽힐 것이다. 연소된 그림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지만 결국은 이야기로 승부하는 장르인 만화에서, 이런 매력적인 이야기를 가만히 놔두었을 리가 없다. 때로는 통째로, 때로는 몇몇 작은 이야기들만 뽑아서 만화로 만들어져왔고, 성공도 실패도 있었지만 그 시도만큼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최근 좋은 반응을 얻은 <아라비안 나이트>(신일숙), 인터넷에서 붐을 일으키고 있는 온라인 연재만화 <1001>(양영순), 그리고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천일야화>(전진석/한승희) 등이 좋은 사례다.

<천일야화>는 <라스트 환타지>, <멀린의 신비한 마술학교>등 소년향 만화의 기반 위에서 익숙한 장르적 규칙을 비틀어 내는 것을 특기로 삼고 있는 스토리 작가 전진석의 글과, <연상연하>, <웰컴 투 리오>등 사건 위주의 드라마성이 강한 순정만화 계열 작가인 한승희씨의 그림이 만난 작품이다. 이질적일 수 있는 두 창작자의 성향이지만, 원래 다양한 이질적인 요소들을 하나의 용광로로 녹여내는 이야기인 천일야화의 세계 속에서 이 만남은 의외로 썩 어울린다.

아라비안 나이츠에서 여러 이야기들을 묶어내는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은 잘 알려져있다시피 바로 왕과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다. 사랑에 대한 깊은 불신을 가진 왕이 온 나라의 처녀들을 섭렵하며 다음날 아침 참수하는 횡포 속에서, 대신의 딸 세헤라자드가 들어가서 매일 밤 왕에게 진기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1000일(혹은 1001일)동안 공략, 결국 왕을 제정신으로 돌려놓고 해피엔딩. 첨삭의 자유를 누리는 이야기인 만큼, <천일야화>에서 작가는 아예 세헤라자드를 남자로 설정해버린다. 연인이자 가족인 여동생을 대신해서 끌려가는 것이다(여성향 만화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야오이 코드, 근친애 코드 등의 도입으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아직 좀 더 두고볼 일이다). 그리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역시 침대 머리맡에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감옥 골방에서 유언처럼 읊조리는 이야기가 되어 비극적 처절함의 분위기가 좀 더 부각되고 있다.

첫 번째 날의 이야기로 푸치니의 오페라로도 유명한 투란도테 공주 이야기를 꺼낸 것 역시 꽤 파격적인 발상이다. 초반에는 짧고 교훈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점차 복잡한 인생사와 애정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될 것을 기대하는 일반적인 패턴에서 벗어나, 첫 주자부터 이미 장엄한 이미지의 비극으로 시작해버리는 것이다. 전체 이야기의 흐름은 푸치니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그 선택 자체로 인하여 이미 <천일야화>가 지니는 독특성을 선전포고한 셈이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구체적인 형상의 선은 사건의 전달에 깔끔한 소화력을 주고 있으며, 남성향 장르와 여성향 장르에 익숙한 독자들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중성적인 칸 연출방식 역시 작품의 독서에 큰 도움이 되어준다.

물론 아직 1권만 발간된 상태이기 때문에 섣부른 칭찬도 비판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서 아라비안 나이츠를 모태로 하는 재해석 작품들이 빠지기 쉬운 “잡다한 이야기들의 일관성 없는 모음”이라는 함정을 어떻게 피해갈지, 아직 판단 내리기 힘들다. 원래 아라비안 나이츠의 다양한 이야기는 확실한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의 미덕, 지혜와 현명한 판단의 중요성 등의 교훈을 남겨주는 것이다. 이런 것을 효과적으로 잘 전달하기 위해서 다양한 사건과 진기한 세상 문물들이 소재로서 동원되고 있을 뿐이다. 설정 자체가 “왕에게 사랑과 지혜를 깨우쳐줘서 정상으로 돌려 놓자”라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당연한 말이다. 그런 목표의식이 좀 더 희미했던 이야기인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이라든지 “알라딘과 마술램프” 등은 사실 나중에 서양인들이 끼워넣은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도 비록 <천일야화>에서 첫 이야기로 사용한 것은 아라비안 나이츠의 설화 ‘칼라프 왕자와 중국공주 이야기’ 보다는 그것을 서양식으로 각색한 오페라 ‘투란도트’의 모습에 가까웠지만, 상당히 모험활극스럽게 시작한 이 작품의 전체적 스타일이나 주제면에서 잘 어울리고 있다. 첫 단추는 잘 들어간 셈인데, 이런 페이스를 놓치지 않고 계속 천일어치 동안 지속시키는 것이 관건인 셈이다.

이런저런 수식어나 분석 이전에, <천일야화>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만화 독서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이 바로 만나기에는 약간 부담스러운 부분도 없지는 않지만, 남성향과 여성향 독자들 모두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재미를 고루 갖추고 있다. 독자들의 많은 호응,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대급부로 작품 자체도 계속 좋은 퀄리티를 유지하면서 이후 이야기들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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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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