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기의 오락 – 강철의 대지 [기획회의 041130]

밀리터리(군사) 매니아라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젊은 남성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은 탱크, 전투기, 총기, 제복 등 군대 및 전쟁과 관련된 아이템에 지대한 관심과 지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살상용 병기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상황에 대한 애정이라니, 혹시 잔학하고 반사회적인 인간들의 집단이 아닐까? 다행히도, 대부분의 경우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뚜렷한 대결구도와 그 대결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 발달한 각종 기술과 전략들을, 하나의 취향이자 오락으로서 관심 있게 즐기고 있는 것 뿐이다. 마치 평범한 사람들도 전쟁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전략 놀이인 장기나 바둑이 즐거운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들의 관심사를 잘 반영해주는 장르가 바로 ‘밀리터리물’, 즉 군사대결물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교양필독서라고 항상 칭송받는 ‘삼국지’ 역시 큰 의미에서는 밀리터리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보통 밀리터리물이라고 부르는 작품들은 1차 대전 이후의 현대전을 다룬다. 인데, 이 장르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단지 전쟁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각종 전략 대결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병기 아이템의 먹이사슬 관계를 세밀한 디테일로 풀어나가는 방식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인기요소인 다양한 현대적인 병기가 일거에 발달해버린 시기는 바로 1차 대전 이후다. 전황을 일거에 뒤집어 놓을 수 있는 비밀의 신형탱크 등장, 그것에 맞서기 위한 또다른 특급 돌격 장갑차, 장갑차 위주의 전략에서 전황이 불리해지자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새로운 개념의 전투기의 도입… 이렇듯, 병기 아이템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 종종 밀리터리물은 사람보다 병기가 주인공이 되어버리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더욱 더 매니아 위주로 흘러가고, ‘바깥’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이해가 안가는 경지에 도달하기 쉽다.

최근 출간된 <강철의 대지 - 어나더 월드워2>(문효석/길찾기)는 이런 의미에서 밀리터리물의 기본 뼈대를 간직한 채, 아기자기한 대중적 요소들이 결합된 좋은 사례다. 작품의 제목이 시사해주듯 무대는 2차 세계대전인데(원래 밀리터리물의 최고 인기 배경이 바로 2차 대전이다; 인류의 전쟁 역사상 신병기와 그것을 운용하는 전략이 가장 급격하게 발달해 나아갔던 시기 아닌가), 페이지를 펼쳐보면 뭔가 다르다는 것을 곧바로 느낄 수 있다. 우락부락하고 험악한 군인들 대신, 군복을 입은 북실북실한 동물들이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그림체 자체도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컬러로 되어있어서, 딱딱한 놋쇠의 질감보다는 프라모델로 만든 디오라마를 연상시키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각종 탱크와 장갑차들이 난데없이 로봇으로 변신한다든지 하는 자유로운 시대착오가 이루어지고 있다. 나아가, 이들이 벌이는 소동 역시 처절한 살육과 파괴 보다는, 신형 탱크로 경주를 하는 등 어쩐지 ‘생각보다 건전한’ 경연장이 되어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강철의 대지>가 밀리터리물로서 조금이라도 부실하다는 말은 아니다. 미국군, 독일군 등 기본 진영은 현실 그대로 남아있고, 전략 개념에 대한 접근이라든지 병기에 대한 세심한 설정 등은 결코 녹녹하지 않다. 하지만 반대로, 전쟁에 관한 작품이라면 흔히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중후장대한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 역시 곤란하다. 의인화된 동물 주인공들의 이야기라고 해서 웰즈의 <동물농장> 같은 사회풍자극을 상상할 필요는 없다. 또는 전쟁 이야기라고 해서 헤밍웨이의 소설들 같은 드라마틱한 인생역정과도 그다지 큰 관련이 없다. 단지 다양한 상상력으로 가득한 병기 경연과 대결구도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이 장르의 가장 원초적인 목적 – 전략과 병기에 관한 상상력을 통한 오락 – 을 더욱 근본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것을 단점이라고 지적할 수도 없지는 않겠지만, 장점이라면 이것만큼 확실한 장점이 어디 있겠는가.

이렇듯 부담을 잔뜩 덜어내고 보다보면, 이 작품의 재미에 본격적으로 눈뜰 수 있다. 이 작품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사람(그러니까, 동물)들이라기보다는, 변신 탱크 등 다양한 병기들이다. 이런 덩치 큰 주인공들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책의 판형 역시 큼지막하게 나와 주었으며, 긴 서사 모험담이 아닌 짦막한 에피소드 여러 개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치 각종 캐릭터 소개를 따로 하듯이, 맨 뒤에는 병기들에 대한 설정자료가 빼곡하게 들어가 있다. 어떻게 이 탱크가 로봇으로 변신하고, 목적은 무엇이며, 언제 개발되어 활용되었는지 등등, 무한한 애정으로 뒤덮여있다. 그것은 어린 시절 수많은 소년들이 태권브이와 마징가의 대결을 꿈꾸었듯이, 그 과정에서 “사실은 팔꿈치 뒤에서 미사일이 나간단 말이야”라고 주장을 하고 그 억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팔 속에 미사일이 장착되어 발사되는 과정을 그림으로 친구에게 설명해주는 그런 즐거움과 같다.

<강철의 대지>는 밀리터리물이 뭐가 그리 재미있다는 것인지 호기심이 들었지만, 딱딱한 군대의 이미지가 주는 거부감이라든지 지나치게 매니악한 세부설정을 강요받는다는 느낌 때문에 접근이 힘들었던 사람들이 입문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작품이다. 상상력으로 점철된 병기 대결구도가 주는 신기함과 시각적 쾌감은 그 자체로서 이미 훌륭한 오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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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추신: 여담이지만, “진정한 병기 매니아는 전쟁을 반대한다!”라는 격언이 있다. 왜냐고? 전쟁이 일어나면 그 사랑스러운 병기들이 모두 부서지니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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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본질 – <루쿠루쿠> [경향신문 만화풍속사]

악의 본질 – <루쿠루쿠>

정의의 주인공이 사악한 악당을 물리친다는 설정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사람들은 선과 악이 명백하게 잘 나누어져 있고 그 중 결국 선이 승리하기를 바라며, 그 ‘선’이 하필이면 자신들을 위해주는 자들이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런 선악 구도를 가장 확실하게 상징화시킨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바로 기독교 신앙이다. 천사와 악마, 각각의 군단의 대격돌, 그리고 예언되어 있는 천사군의 승리. 이야기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동안 사랑받아온 권선징악이라는 주제의 궁극적인 구현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풍속도는 이런 명쾌한 이야기와는 꽤 거리가 멀다. 선악의 경계선은 어디며, 선은 과연 어떤 경우라도 선인가? 뭐, 꼭 머리를 쥐어뜯으며 엄청나게 철학적으로 접근해야할 필요는 없다. 위트와 풍자, 뼈있는 농담으로 이런 지점들을 꼬집어내는 것이 더 핵심을 짚어낼 가능성이 크니까 말이다. 일본 작가 아사리 요시토의 <루쿠루쿠>(3권 발행중 / 북박스)가 좋은 사례인데, 여기서는 ‘지옥의 공주’로 불리우는 강력한 악마가 귀여운 소녀의 모습을 하고 남자주인공의 집안일을 해주는 역할로 등장한다. 지옥이 너무나 과밀인구가 되어버려서, 악마들이 나서서 인간들이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선도해주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저의를 수상하게 여기는 천사들 역시 인간계로 내려와서 이들과 맞서려고 하는데, 스님의 몸에  빙의되어 인간계로 내려온다든지 하는 등 좌충우돌 투성이다. 악마들이 쓰레기를 줍고 할머니가 길 건너는 것을 도와주는데 천사들이 악마의 ‘계략’을 막으려면? “쓰레기를 버리고 할머니를 넘어트려야지! 에에…자, 잠깐만!” 이런 식으로 말문이 막히는 천사의 모습이 주는 촌철살인의 블랙유머가 일품이다. 학원 코미디물에나 어울린다고 생각할 법한 둥글둥글하고 귀여운 그림체와 연출 속에 담겨져 있기에 그 울림은 더욱 크다.

어이없이 웃다보면, 뜨끔해진다. “우리는 정의를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아! 폭력을 막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하지!”라는 천사의 대사가 이상하게도 낯익기 때문이다. 전쟁을 입에 물고 다니는 어떤 미국 침팬지를 떠올리든, 아직도 좌파공세 따위가 잘만 통하는 어떤 후진 사회를 떠올리든, 인터넷 게시판에서 뛰노는 악플러들을 떠올리든 말이다. 선과 악을 나누고, 하필이면 자신이 서있는 쪽이 선이라고  굳게 믿는 자들. 사실관계 확인과 토론이나 근거제시에는 인색하면서, 타인비방과 자기미화에는 놀라운 정열을 보여주는 자들. 이 복잡한 세상에서 단 하나 확실한 ‘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 이외의 모든 것들을 악으로 몰아붙이는 행위 그 자체다. 바로 그런 악이 뿌리 뽑히는 권선징악 정도는 꿈꿔 보아도 좋지 않을까.
[경향신문 04.12.03]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금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여기 올라오는 것은 신문편집과정을 거치지 않은 ‘원본’입니다… 별 차이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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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온라인, 커뮤니티 – <러브콘서툰> [경향신문 만화풍속사]

!@#… 그간 쌓인 원고 창고대방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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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온라인, 커뮤니티 – <러브콘서툰>

200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뉴미디어’라는 단어만큼 진부한 것이 또 있을까. ‘뉴’미디어의 대표주자로 꼽히며 한껏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인터넷 (및 그 이전부터 있었던 컴퓨터 통신 일반)과 그것이 만들어낸 의사소통 시스템의 세계인 온라인은 이미 단순한 기술적 용어가 아닌, 하나의 삶의 방식이다. 쌍방향성에 기반한 참여니 원본과 카피의 경계 상실이니 하는 이야기들은 이미 매체 이론가의 영역이 아니라 역사학자의 담당구역으로 넘어와 버렸다. 특히 그 중에서도 일반 사용자들과 가깝게 살을 맞대고 있는 대중문화라는 분야에서, 온라인이라는 환경은 적극적으로 새로운 향유 양식들을 진화시키고 있다.

온라인 대중문화의 성격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바로 커뮤니티성이다. 온라인 세상의 향유자들은, 온라인을 돌아다니다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면 자신들이 소속감을 느끼는 공동체에 열심히 퍼나른다. 메일로 보내고, 동호회 게시판에 올리고, 블로그에 올린다. 그리고 올라온 것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사람들이 각자의 감상을 올리거나, 아니면 올린 사람에 대한 창찬/비난을 하면서 더욱 커뮤니티의 내적 소통이 강화된다. 창작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작가들의 온라인 동호회 결성을 통한 정보 및 노하우 교환, 공동 프로젝트 진행 등이 프로와 아마투어의 경계선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온라인이라는 공간과 여러모로 상성이 상당히 좋은 매체인 만화에 있어서 이러한 경향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2003년에 시작된 ‘러브콘서툰’(http://www.lovetoon.co.kr)라는 자선 콘서트 프로젝트가 좋은 사례인데, 온라인에서 만화연재를 하거나, 그리고 비록 스포츠 신문 등 종이지면에서 연재를 하고 있지만 (언론사 홈페이지를 거치면서) 사실상 온라인에서 더욱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작가들이 주축을 이루며 시작했다. 러브콘서툰은 사실 원래는  젊은 작가 몇 명이 한바탕 유쾌한 음악 공연을 펼치면서 불우이웃 돕기 같은 좋은 일을 해보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그런데, 온라인 입소문 등에 힘입어 독자와 작가 양쪽으로 모두 높은 호응을 얻어, 행사 직전에는 참여 멤버가 배 이상으로 불어났다. 그리고 행사가 성황리에 끝난 후에도 커뮤니티의 결속력은 계속 유지되어, 어느 틈에 젊은 만화가들의 대표적인 커뮤니티 가운데 하나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올해 11월 21일, 이 커뮤니티가 준비한 두 번째 행사인 <2004 러브콘서툰>이 펼쳐질 예정인데, 이 행사를 홍보하기 위한 릴레이 만화와 홍보 플래시 애니메이션이 열심히 온라인에서 ‘펌’ 당하고 있다. 이미 사전홍보 단계부터, “만화라는 것의 매력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던 작년 행사보다 한층 발전한 모습이다.

대중문화는 창작이든 향유든, 결국 취향으로 의기투합하여 같이 즐기는 자의 몫이다. 온라인이라는 환경을 만나면서, 그것이 좀 더 명확해진 셈이다.

 

[경향신문 04.11.19]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금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여기 올라오는 것은 신문편집과정을 거치지 않은 ‘원본’입니다… 별 차이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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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이웃나라, 미국을 동경하다 [창비어린이/04겨울]

!@#… 창비 계간지 <창비어린이> 04년 겨울호. 10월 초에 썼으나 계간인 관계로 얼마전에 출간. 개인적인 착오에 의해서 원고마감보다 무려 한달(!)여를 일찍 넘겨주었던 희대의 사건의 주인공.

!@#… 도판은 생략. 편집하기 귀찮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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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이웃나라, 미국을 동경하다

『먼나라 이웃나라-미국편』 이원복 김영사 2004
김낙호 capcold @ capcold.net

  한국이라는 곳에서 세계를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단일민족 같은 황당한 신화를 정말로 진지하게 숭배하고 있는 자기완결적인 사회이면서도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천연자원이 없고 석유 한방울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역설하면서 그래서 우리는 세계를 상대해야 한다는 논지를 굳건히 강조한다. 우리는 하나고 남들은 우리와 전혀 다르지만, 여하튼 우리는 그들을 잘 알아야한다는 논리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세계를 나와 내가 아닌 무엇으로 나눈 후, 후자에게 엉뚱하게도 일방적인 잣대를 들이댄다. 나보다 잘 산다(미국이나 서유럽이라든지), 그리고 나보다 못 산다(동남아, 아프리카 등)라는 잣대 말이다. 이렇듯 한국사회의 큰 약점으로 널리 지적받고 있는 ‘세계를 바라보는 천박한 시선’은 어떤 이웃나라라도 먼나라로 만들고야 만다.

  『먼나라 이웃나라』라는 히트 만화 씨리즈가 있다. 이 분야의 절대적인 베스트+스테디쎌러로 자리잡은 이 씨리즈는, 벌써 20여년 동안 한국인들에게 여러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교육시켜왔다. 부담스럽지 않은 그림체와 편리한 화법, 적절한 유머와 풍부한 정보를 섞어가면서 이끌어나가는 작가의 만화 솜씨는 확실히 탁월하다. 게다가 한참 ‘세계를 알자’ 붐이 불고 본격화되었던 80, 90년대의 시대적 배경까지 겹치면서, 집집마다 당연히 갖추어놓은 교양도서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한국 만화에서 ‘이원복’이라는 이름과 ‘먼나라 이웃나라’라는 브랜드가 가지는 파워의 한계는 끝이 없는 듯하다. 아무리 완성도도 정보성도 턱없이 떨어지는 『미국을 알면 영어가 보인다』(이원복, 주니어김영사 2002) 같은 급조된 자매품이라 할지라도 이원복 브랜드가 입혀지자 히트한다. 『먼나라 이웃나라』의 경우 원래의 6부작 외에 90년대에 ‘일본편’과 ‘한국편’이 추가되어서 새로운 패키지로 다시금 높은 판매고를 기록하더니만, 결국 올해 이 씨리즈의 진정한 완결점을 표방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미국편’으로 말이다.

  사실 『먼나라 이웃나라』 씨리즈에서 미국편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한국의 입장에서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가장 중요한 외국은 미국이니까. 작가는 그 중요성을 높게 평가하는지, 심지어 영광스러운 대단원의 막을 미국에게 할애했다. 그리고 자세히 다루어주기 위해서 무려 세 권으로 나누기까지 했다. 1권 ‘미국, 미국인’, 2권 ‘미국의 역사’, 3권 ‘미국의 대통령들’(근간)이 바로 그것이다. 필자가 받은 인상은 딱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다. ‘여전하다, 아니 좀더 본격적이다.’ 이 씨리즈의 장점도 단점도, 미국이라는 지극히 가깝고도 민감한 소재와 만나면서 더더욱 뚜렷해졌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좋은 말만 쓰기가 힘들어져버렸다.

  미국사회의 모습, 생활 속의 상식을 알기 쉽게 풀어주는 것에 있어서는 ‘미국편’은 충분히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사회복지에 대한 유럽인과 미국인의 차이를 ‘공공’과 ‘나’에 대한 인식 차이로 설명하는 대목은, 단지 두 칸만으로도 사회과학 논문 한 편 이상의 명료함을 발휘하고 있다. 나아가 미국 생활에서 신용 기록 누적 문제, 교포들의 세대간 갈등, 유대인들이 미국에서 차지하는 위치 등, 미국에 대해서 어렴풋이는 알고는 있었지만 자세한 내막은 몰랐던 여러 상식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단편적인 소재가 아닌 전체적 주제를 살펴보자면 ‘미국편’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먼나라 이웃나라』는 스토리를 주욱 따라가는 극만화가 아니라, 소위 ‘학습만화’의 범주에 들어가는 작품이다. 따라서 결국 어떤 정보를 어떤 목적으로 제시하는지가 바로 이 작품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경우 그것은 ‘우리가 이 외국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점이다. 만약 이 작품이 단순히 외국문물을 소개하는 선에서 그쳤다면 솔직히 흔한 관광 가이드 중 하나로 그쳤겠지만, 작가는 적극적으로 이야기에 개입해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얻어야 할 함의를 끄집어내는 것에 결코 게으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을 새로 만들어보자. 이 작품이 주장하는,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가?

  실마리는 구성방식 속에 있다. 사실 ‘미국편’ 역시 이전의 씨리즈와 마찬가지의 구성방식을 취하고 있다. 먼저 미국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나 편견을 제시하면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후, 미국이라는 나라가 구성되어 있는 원칙, 사회적 제도 등 굵직한 부분들을 다루어준다. 그리고는 미국 문화의 특징이나 미국 생활의 신기한 점들을 가볍게 일화 중심으로 소개하면서 긴장을 풀어준다. 그러고는 그 모든 문화와 사회가 만들어진 배경으로서 미국의 역사를 주욱 훑어준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처음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사실상 전체 결론이며, 작품을 통틀어서 결국 말하고 싶은 바 – 즉 한국이 이 나라로부터 배워야 할 점 – 를 웅변해주는 서술방식인 것이다. ‘미국편’의 경우, 그 메씨지는 목차 페이지에서부터 더할 나위 없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군중에게 권력을 주지 마라!”

  이 작품 초반에서 인용되는 프랑스 역사학자의 발언, “미국은 무한한 자유를 가진 드센 주민, 국민들로부터 나라의 질서를 되찾았다”는 말은 작가의 희망을 그대로 대변해주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1권의 전반부에서 작가는 반복적으로 국민이 권력을 얻는 것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강조하기 바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부정적인 모습이라는 것은, 아주 노골적으로 현재의 한국 – 더 정확히는, 노무현 정부 이후 한국사회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과잉해석이라고? ‘일반대중이 숫자로 밀어붙이는’ 설명과 함께 들어간 그림 속의 폭도들이 몽둥이나 돌멩이를 들고 있지 않고 하필이면 촛불을 들고 있는 것이 과연 우연이란 말인가. 잭슨(Andrew Jackson) 대통령의 일화를 들면서 코드 인사니, 운동권이니, ‘잭사모’니 하는 용어를 동원하는 것이라든지, 애덤스(John Adams) 대통령이 친불 언론에 내린 탄압에 조중동이라는 말장난을 삽입한 것 등은 차라리 애교스럽다. 그 결과, 미국은 포퓰리즘과 민중선동으로 흔들리지 않는, 혁명이 없는 간접선거의 나라라서 참으로 바람직하다는 주장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물론 미국의 대통령 간접투표제를 이야기하면서 ‘더 많은 득표수를 얻고도 떨어진’ 후보의 일화를 넣으면서 약점 역시 대등하게 다루어주는 듯한 인상을 풍기려고 노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제도적·기술적인 차원에서의 허점으로 간주될 뿐이지 근본적인 씨스템의 우월성, 즉 국민이 직접 주인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예찬은 조금도 굽히지 않는다. 한국이라는 현실과 연결지어서 보자면, 가진 것 하나 없이 국민의 지지 하나만 가지고 결국 대통령이 되어버린 노무현 정부,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한국사회의 기류가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이다. 이 작품의 나머지 부분들은 단지 이 메씨지를 강조하거나, 아니면 너무 팍팍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양념이고 잡학 상식들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을 바라보는 전체적인 시선은 어떠한가. “200만이 넘는 한국동포가 살고 있는 미국은, 미워할 수도 없고 미워할 이유도 없는 우리의 일부분이다”라는 1권 마지막 멘트가 지닌 기이한 논지는 의도가 어떠했든지간에 충분히 사대주의적인 발상으로 읽힐 수 있다. 사실 애초에 『먼나라 이웃나라』라는 씨리즈가 다루는 나라의 선정에서 볼 수 있듯이, 세계의 전체적인 모습을 바로 알자는 것보다는 소위 잘 사는 선진국의 문물을 소개한다는 식의 취지에 가깝다. 하지만 이러한 지점은 이 씨리즈에 대한 대부분의 평가에서 지적당해온 바이기 때문에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다.

  즉 ‘미국편’을 요약하자면, 미국의 문물을 간단히 소개하면서 (노무현 정부로 상징되는) 직접민주주의적인 행태를 비판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이원복이라는 작가의 우파적인 정치적 성향이나 어설픈 사해동포주의를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비록 논지나 근거도 약하고, 실제의 민주적인 사회발전에 있어서는 득보다 실이 많은 발상이지만 적어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생각이기는 하니까. 마치 필자가 오랜 민주노동당원으로서, 노무현 정부를 지지하지는 않지만 인정은 하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과연 일부의 평가마냥 ‘극우’인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의 모든 것에 딴지를 걸며 반대하는 자칭 기득권 세력의 일부로 보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려고 노력하는 모습 정도는 보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가 극우라면, 이 사회의 진짜 오른쪽에 있는 수많은 수구 꼴통들은 도대체 언어로 묘사조차 불가능할 터이니 말이다. 게다가 미국에 대한 여전히 막연한 동경 역시, 용미파를 자처하다가 미국 한번 순방 갔다 오고는 갑자기 미국 열성팬이 되어버린 모 정치인에 비하면 양반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주로 보는 책인데 책임감 없게 정치적 메시지를 넣다니”라는 순진무구한 비난을 할 생각도 없다. 상대가 어른이든 어린이든,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주장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야 할 이유 따위는 없다. 그 방법이 강압적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아가, 애초에 자신의 작품, 즉 자신의 발언을 하면서 과연 정치적 입장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말은 굳이 꺼낼 필요도 없지 않은가. 즉 무슨 국정교과서도 아닌 일반 학습만화에서 엄청난 윤리적 결백성이나 불편부당성을 요구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아니, 국정교과서조차도 당대 정부의 입김으로 가득 찬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뭐 할말 다 한 셈이다.

  아니, 그러니까 책의 내용은 문제가 있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궤변을 늘어놓자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 책의 문제적인 부분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비판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정보로서 가치있는 부분은 유용하게 받아들이되, 그 기저에 깔린 논지나 메씨지에 대해서는 독자 자신, 그리고 그들에게 책을 권해준 사람들도 같이 제대로 생각하면서 읽을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여하튼 ‘미국편’은 반민중적인 가치를 중시하며 미국식 자본주의를 이 세상의 현실적인 모델로서 추종할 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것도 만화라는 아주 효과적인 화법을 능숙하게 구사하면서 해내고 있다. 그것을 옳다고 생각하면서 맞장구치든, 틀리다고 생각하면서 반발하든(개인적으로는 이쪽이 더 건전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것은 최종적으로는 독자 자신의 선택이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모르고 읽는 것, 또는 읽도록 권장해주는 것은 위험하다. 그만큼 민감, 혹은 잠재적으로 위험한 전제들이 작품 곳곳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사실 아예 작가에게 좀 더 정치적으로 올바른 시선을 보여달라고 주장하는 것도 좋겠지만,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득하더라도 지난 20여년간의 성향이 순식간에 근본적으로 바뀌기를 기대하기란 힘들다. 만약 다른 작가가 유사한 길을 걷겠다고 한다면 이원복 작가의 장점인 대중을 흡수하는 능력을 배우되, 정치적인 공정성이나 사회적 메시지의 합리성 등에 대해서 더욱 진지하게 고민하라고 조언을 해줄 것이다. 아니, 실제로 <십자군 이야기> 라든지, <만화로 보는 다시 읽는 한국현대사>, <전쟁중독> 등 재미와 유익함을 겸비한 대안적 학습정보만화의 물결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원복이라는 브랜드에만 집착하지 않고 찬찬히 찾아보면 그 물결은 어느 틈에 여러분의 발밑에 이미 도착해있을 것이다.

 

—- 2004. Copyleft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유리가면 재개

!@#… ‘일본만화 최강의 마약’이라는 별명이 붙은 만화, <유리가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유리가면을 안 본 사람(또는 1권 정도만 보다가 재미를 못붙이고 떠난 사람), 아니면 다음권을 보고 싶어서 미치도록 헤매이는 사람. 그런데 정작 스즈에 미우치 작가가 가업인 마야교 교주 노릇을 하느라고 무한 연기 중이었다는… 그런데 무려 6년만에 재시동, 단행본 제42권 발매(국내의 애장판/문고판 들과는 좀 진도가 다름). 자세한 소식은 http://femirage.egloos.com/820317/ 으로…;;

조선일보 만화들의 마력 [인물과 사상 0412]

!@#… <인물과 사상> 12월호에 실린 원고. 제목, 소제목 등은 실제 게재된 버젼에 준함… 중앙, 조선을 다루었으니 아마 다음번에는 동아…도 다루어야 균형이 맞을 듯(사실 이미 ‘나대로 선생’으로 쓰려고 벼르고 있는 중이다). 그 뒤에는 그 반대쪽 선수들도 공략하고. 여기에 쓰는 글들은 언론과 만화의 접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싶은데, 지면의 성향이 ‘인물’ 중심 접근을 강조하고 있다 보니 아무래도 신문시사만화 이야기로 흐르고 있다;;;

!@#… 계속 그래왔듯이, 이 내용은 <미디어 오늘> 온라인판에도 공유. 그런데 글 중간에 숏트랙 만평 건에서, 첫번째와 두번째 만평이 바뀐 순서가 논란의 여지가(capcold가 본문에서 근거로 삼았던 오마이뉴스 고태진 시민기자의 증언으로는 지방판에서 먼저 온 것이 ‘부시 방한’ 내용으로 왔다고 하는데, 미디어오늘에서 서울에서 초판을 받았던 것에는 ‘신규칙’ 내용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순서를 실제 조선일보측에 문의해보니, 노코멘트로 일관) 있다고 하여 그 문단을 일부 수정. 별로 중심적이지도 않은 부분에서 논란을 남겨서 글 전체의 요지가 흐려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아서…;; 뭐, 신문에서 판본 바뀌면서 내용 업데이트 되는 것 같은 이치라고 생각해주시면 고맙고…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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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편안하게 길들이기: 신경무와 조선일보 만화들의 마력

김낙호(만화연구가)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끝까지 읽기(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