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강도영, 강풀만화를 그리다 [시사저널 050130]

!@#… 시사저널 올해 설특집호에 기고한 또 하나 글 기고. 항상 그렇듯이 여기 올리는 것은 원래 보낸 오리지널 버젼, 잡지에 실리는 것은 그쪽 편집부를 거친 버젼. 예를 들어 잡지기사에는 ‘칸을 없앴다’라는 그림설명이 나오지만, 사실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건 ‘경계선을 없앴다’지, 칸 구분 자체를 소멸시킨 건 아니니까. 뭐 원래 전문지가 아닌 일반 저널리즘의 차원에서는 그런 식의 미묘한 문제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누가 행여나 이 글을 퍼나른다면, 개인적으로는 역시 이쪽 버젼이 퍼날라지는 것을 선호.

!@#… 본문에도 언급한, ‘온라인 만화 1세대‘라는 호칭의 작위성에 대한 생각. ‘세대’라는 건, 그 이후나 이전 세대와 확실한 성격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경향성을 파악하기 위한 범주구분이다. 무슨 등수놀이니 원조 경쟁이니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한마디로, 2세대 없이 1세대를 이야기하는 건 완전한 엉터리라고. 특히 1세대, 최초 어쩌고 하는 것은 훨씬 더 많은 주의를 필요로 하는데, 자칫하면 그 이전의 역사를 리셋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순정만화는 80년대에 생겨났다”고 하면, 필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이전 순정만화의 모든 역사 – 민애니, 엄희자 등등 커다란 이름들과 그들의 독자, 문화들 – 이 그 존재 자체를 깡그리 소멸당하게 되는 것이다. 초보자나 문외한들이 그런 부주의한 소리를 하고 다니는 건 일정 정도 어쩔 수 없지만, 이쪽 판의 ‘선수'(또는 선수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그러고 다니는 건 무척 당혹스러운 일이다. 뭐… 그냥 푸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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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강도영, 강풀만화를 그리다

김낙호 / 만화연구가

  작년, 한국의 수많은 온라인 사용자들은 <순정만화>라는 당혹스러운 제목의 만화를 우연히 발견했다. 아니, 작품 제목이 그냥 순정만화라니, 마치 주말 연속극 제목을 ‘멜로드라마’라고 붙이는 격 아닌가. 하지만 작품은 무척 재미있었고, 특히 온라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 결과 조회수가 하루 200만까지 올라 가고, 단행본이 출판 불황 속에서도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며, 일본과 1억원짜리 출판계약을 맺는 등의 성공을 보여줬다. 강도영이라는 본명보다 강풀이라는 필명이 더 잘 알려져 있고 그 이름을 딴 ‘강풀만화’라는 총칭이 어느 틈에 마치 하나의 장르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된 지금, 그 작품들이 폭발적 인기를 끌게 된 매력이 과연 무엇인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온라인에 적응하는 법

  강도영의 그림체는 기존의 만화 장르관념에서 보자면 애매한 위치에 놓여있다. 왠지 4등신스러운 인체비례를 지닌 깔끔하고 귀여운 모습이라고 보기는 힘든 캐릭터들, 그렇다고 해서 강한 개성의 스타일리쉬한 매력을 발휘하지도 않는다. 그 때문인지, 실제로도 데뷔를 위해서 여러 출판사를 전전했지만 거듭 실패했던 과거를 스스로 고백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몇몇 잡지, 그리고 한창 젊은 작가들의 짦막한 개그물을 새로 수용하려고 움직이고 있는 스포츠신문에서 가끔 작품발표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에 그쳤다.

  하지만 강도영이 ‘강풀’로서 대중적 사랑을 받는 스타로 발돋움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인터넷이라는 둥지를 통해서라고 할 수 있다. 강풀만화의 첫 대중적 히트작은 고료를 받고 잡지에 연재했던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홈페이지인 강풀닷컴(http://www.kangfull.com)에 그냥 그리고 싶어서 그렸다는 만화들이었다. ‘지치지 않을 물음표’라는 범주로 묶어서 2002년부터 그려온  이런 일련의 만화들은, 크게 세 가지 이야기 거리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엽기 개그, 생활 속에서 겪은 황당한 상황을 담은 재담, 80년대 대중문화에 대한 향수인데, N세대니 P세대니 하면서 한참 폭발적인 성장세를 타고 있던 온라인 사용자들의 문화적 취향과 시의적절하게 맞아 떨어졌다. 심지어 다소 부족해보이던 그림체마저도 그런 구수한 내용에 오히려 적합하다고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입소문에 힘입어 메일과 각종 개인게시판으로 활발하게 ‘펌질’ 당하고, 온라인의 강풀이 오프라인의 강도영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명성 덕분에 대형 포털 사이트의 만화코너에 영화 해설 만화를 연재하기에 이르렀고, 후속작으로 같은 공간에서 온라인 장편 연재작품인 <순정만화>를 연재하도록 해주었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온라인 만화가 1세대’라는 이유 없이 작위적인 호칭은 곤란하지만, 확실히 강풀만화는 온라인 문화의 특성을 긍정적으로 활용한 좋은 사례다. 특히 온라인에서 자신의 만화를 퍼나름에 대한 공식적인 허락과 몇가지 규칙까지 공지하는 등 온라인 문화의 핵심적인 특성인 ‘커뮤니티성’을 적극 지지함을 독자들에게 증명하기까지 했다. 나아가 천성적인 붙임성을 무기로 하여 동료 작가들끼리의 커뮤니티를 적극 주도했는데, 그 결과 몇몇 온라인 만화 작가들의 친목에서 시작했다가 점점 규모가 커지고 있는 자선 이벤트 “러브콘서툰”이 탄생하기도 했다.

칸 경계선을 버리고 독자에게 말을 건네다

  모니터를 통한 상호대화로 특징지을 수 있는 온라인 공간에 적극적으로 적응해 나가면서, 만화의 표현 형식 측면에서도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중에서도 칸 경계선을 버린 것과 스크롤 효과의 적극적인 채용이다. 즉 만화의 페이지 공간을 개방함으로써, 책으로 만들어진 만화를 억지로 저해상도 모니터 화면에 맞추어 넣었다는 느낌을 없애고 읽기 수월하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원래 만화의 칸 경계선은 각 칸 속에 그려진 장면을 하나의 정해진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로 인지되도록 만든다. 영화의 한 장면이나 취재사진처럼, 그 순간을 목격한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칸 경계선을 지우면 그것은 세상의 모습을 잡아낸 하나의 구체적인 장면이라기보다는, 누군가가 그 상황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해주는 듯한 감각으로 바뀐다. 칸과 칸 사이의 연결이 훨씬 덜 명확해지고, 그 연계성을 서술하는 대사와 이야기의 흐름 자체가 부각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의 주관적 해석으로 받아들여지도록 하기 좋다는 것이다. 사연을 소개하는 재담이나(‘일쌍다반사’), 편안한 설명이나(‘영화야 놀자’), 혹은 주인공들의 주관적인 시점전개에 의한 줄거리 진행(‘순정만화’)에 적합한 양식이다. 이와는 반대로 사건을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보게 만들어서 서스펜스의 집중력을 높이는 데에는 효과적이지 못한데, 납량물 <아파트>(연재 당시는 ‘미스테리 심리 썰렁물’)에 대한 평가가 상대적으로 좋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세상에서 사람 사는 이야기

  강풀만화가 온라인 만화의 범람 속에서도 확고한 인기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결국 한 가지 철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 세상에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만큼 재미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강풀만화의 개그는 대부분 대중문화의 장르패러디 같은 고난이도의 배경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의 황당한 사건들이다. 감동적인 부분 역시 대단히 드라마틱한 만남과 헤어짐보다는, “맞아, 내 주변에도 저런 사람이 있었지”라고 해도 좋을 만한 일상성의 영역이다. 그리고 세상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냉소로 충격을 주기보다는, 희망적인 시선을 던져주는 방향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 대신에, 이야기가 확실히 말이 되고 흡입력이 있도록 구성하는 데에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치밀하고 놀라운 가상세계를 구축하는 부분을 포기하고, 대신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달하는 방법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을 촌스럽다고 치부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가장 우직하게, 확실히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방법인 셈이다.

  최근 연재중인 온라인 작품은 <바보(순정만화 시즌2)>로, 무르익은 연출실력과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 그리고 우리와 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 소외층에 대한 애정이 이전보다도 더욱  농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우직한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는 한, 강풀만화의 인기와 성장은 앞으로도 계속 현재진행형일 것이다.

 

— Copyleft 2005 by capcold. 영리불허/동의없는 개작불허/이동자유 —

데릭 커크 킴의 <다르면서 같은> 출간.

!@#… 데릭 커크 킴의 <다르면서 같은>(원제: Same Difference) 출간(길찾기, 6800원). http://http://www.lowbright.com 에서 활동하는 코리안-아메리칸 작가의 작품집. 성장에 대한 사색,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사는 것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물건. 우디앨런 영화들 같은 대화형 코미디 + 깔끔한 시각연출의 조화.  미국만화 특유의 진입장벽도 덜 한, 쉽게 입문해서 재미를 느끼기에도 적합. 만화로서, 이야기로서 높은 완성도.

구매(예스24)

!@#… 2004년초 작품 선정부터 작가 및 양국 출판사 컨택, 계약진행, 번역 등 중개 역할 일체를 진행한 책. 이전에 <만화의 미래> 등 번역해서 들여올 당시에는 작가와 이야기한 후 시공사로 들고가서 프로젝트 성사된 다음에는 출판사에서 세부 진행을 해줬으나 이번에는 여차저차 풀코스. 하지만 정식으로 에이전시 차려서 대량 라이센스 거래하며 돈벌고 다닐 요량이 아닌 capcold 같은 사람들에게는, 역시 풀코스는 생기는 것도 없이 지나치게 소모적이라는 교훈도 같이 얻음. 그냥 이 작품을 소개하고 싶어서 한 것 뿐.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여튼 무사 출간.

* 한국어판 출간 소식

* 미국NPR에 심층기사 실린 후, 연합뉴스 거쳐서 들어온 국내 언론 보도들

이거, 저거, 그거

(…그런데, 도대체 언제쯤이면 문화부 기자들에게 ‘Graphic Novel’이 ‘소설’이 아니라 ‘만화’라는 정도의 교양을 기대할 수 있는걸까? –;)

커다란 산을 넘어가기 – <태백산맥>(박산하) [으뜸과 버금 0501]

!@#…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재미있게 잘 만든 경우. 아직 1권이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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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산을 넘어가기 – <태백산맥>(박산하)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원작으로 만화로 만든다, 라는 기사를 처음 보았을 때는 기대감보다 걱정이 앞섰다. 태백산맥이 어떤 작품인가. 사람과 시대를 관통하면서 재미와 깊이를 두루 갖춘, 자타공인의 최강급 현대사 대하소설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것을 학원폭력물 <진짜사나이>이래로는 중급 히트는 있지만 확실한 대표작이라고 할만한 것은 못만들어낸 박산하 작가가 만화로 만든다니… 그렇고 그런 보통의 아동 학습만화가 나와버렸다가 금방 잊혀지겠군, 이라고 속단했다. 사실 그 작가의 그쪽 계열 전작인 <칼의 노래>도 무난하기는 했지만 별로 특별히 볼만한 구석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태백산맥이라는 작품은 무려 임권택 감독이 영화화에 달려들었으나 미적지근한 결과물만을 내버린 전력도 있고.

그런데, 1권을 펼쳐들고 보니… 이것 의외로 재미있다. 아니, 사실 꽤 잘 만들었다. 처음 등장하는 수많은 주연급 캐릭터들부터가 벌써 엇비슷하고 밋밋한 미소년미소녀가 아니라 강단이 있고 표정 풍부한 ‘한국 아이들’이다. 이들이 살아가는 공간 역시 적당히 무국적화한 가상공간이 아니라, 한국식 시골 풍경이다. 페이지 연출 역시 무난한 클로즈업으로 점철하지 않고, 역동적이지만 현란하지 않도록 적절하게 칸 배분을 조율해 나아가고 있다. 한눈에 봐도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다고나 할까, 말이 되는 ‘작품’으로서 완성 짓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쓸데없는 해설자도, 귀여움 떠는 억지 조연도, 남녀관계를 맞추기 위한 무의미한 미소녀도 아직 투입된 바 없다. 줄거리의 압축 역시 이전에 임권택 감독의 극장 영화보다 훨씬 페이스의 배분이 좋다. 염씨 형제, 하대치, 김씨 형제, 명자… 주요 등장인물들의 어린시절이 모자람 없이 촘촘히 배치되어 이후 극의 긴장감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해방후 성장한 염상구의 귀환에서 1권을 마무리 짓는 노련함까지. 뭐랄까, 만약 아이에게 단순히 ‘좋은 만화책’ 정도가 아니라, ‘좋은 책인 것은 기본이고, 만화로서 좋은 책’을 골라줘야 한다면 별 망설임 없이 골라줄만한 책으로 나와 주었다. 

물론 문제는 과연 필자가 재미있어한 만큼, 이 책이 원래 목표로 하고 있는 독자층인 아이들도 좋아할 것인지다. 1권은 그나마 주인공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입할 구석이라도 있었겠지만, 이들이 모조리 성인이 되어 정치적 싸움에 휘말리는 이후 이야기들에 어떤 재미를 느낄지, 모르겠다. 온몸에서 빔이 나가는 마법 필살기로 상대를 쓰러트리거나, 화려한 주먹다짐을 하거나, 아니면 스펙타클한 폭발으로 수놓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전체적 색조를 포함한 시각연출 역시, 아이들이 흔히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셀 방식의 감각과는 거리가 있다. 나아가 줄거리 전개 면에서도, 염상구 정도를 제외하자면 명쾌하게 승부를 가릴 수 있는 대결+성장구도가 아니기 때문에 아이들의 취향에 맞추기 쉽지 않다. 사실 이 작품을 보면서 가장 의외였던 점이기도 한데, 작품을 망치는 한이 있더라도 억지로 그런 요소들을 넣어서 적극적인 자기 타겟 공략에 나설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원작의 품격을 존중해주는 쪽으로 기운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은 다시 말하자면 정작 쓸만한 작품을 만들어 놓고서도, 원래의 독자층에게 외면 받아서 묻혀버리는 아쉬운 일이 발생할 위험이 있다는 말이다.

만화 <태백산맥>은, 문학작품을 적당히 만화로 옮기기만 한 것에서 의미를 찾는 여러 “명작만화”류 들과는 다행히도 스스로 차별화를 꽤하면서 1권을 시작했다. 부디 보다 본격적으로 펼쳐질 이후 전개에서 원작의 무게에 눌리거나 나태하게 기대어 버리지 않고 본격적으로 만화 <태백산맥>으로서의 매력을 발산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기를 희망한다.

[으뜸과 버금 2005. 01.]

(*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The Dilbert Future [기획회의 050120]

!@#… 지난호는 신년특집으로, 그냥 자유롭게 자기가 작년 한해 읽은 책들 중 가장 좋았던 것 하나 골라서 추천하는 것이었음. 원래 한국에 출시도 안된걸로 작품평쓰는 짓거리는 되도록이면 안하는 주의지만… 이번에는 그냥 큰맘먹고 관철. 이 평을 보고 삘받은 사람이 있으면, 아마존에서 주문하시길(사실, 예전에 나왔던 ‘딜버트의 법칙’은 유머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국 번역의 수준이 심히 민망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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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에도 멍청함은 계속된다

1년동안 읽은 모든 책을 통틀어서 가장 감동 깊게 읽은 것 한 권만을 뽑는다는 것은 무척 당황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굳이 선택을 해야 한다면, 그리고 장르에 상관 없이 선택해도 된다면, (Scott Adams / Harper Perennial)을 꼽고 싶다.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미래학(?) 책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극도로 시니컬한 샐러리맨 만화 <딜버트> 시리즈의 작가인 스콧 애덤스가 제시하는 ‘앞으로 반드시 일어날 65가지 트렌드’가 담겨 있다. 1998년에 첫 출간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게도 아직도 한국에 번역되어 들어오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이 시리즈의 전작 <딜버트의 법칙>(스콧 애덤스 저/ 이은선 역/ 홍익출판사)이 세계적 명성에 비해서 국내에서는 별로 빛을 못 봤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하기야 책으로서의 모양새도 원전의 독서 흐름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고, 번역 역시 성실하기는 했으나 장난과 유머, 그리고 샐러리맨 전문용어가 난무하는 원문의 맛을 제대로 살려내는데에는 역부족이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는 전작보다 훨씬 더 강력한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는 소개조차 제대로 안되어 있다. 책을 펼치자마자 첫 챕터에서 이미 완전히 압도당해버린 필자로서는, 애석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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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스식 예측불능의 법칙>

좋은 트렌드가 발생하면, 예상치 못했던 무언가가 그것을 꼭 망쳐놓고 만다. 몇가지 사례:

좋은 트렌드                                                   예상치 못한 악재
컴퓨터 덕분에 일 처리가 100% 더 빨라졌다        컴퓨터 때문에 일이 300% 늘었다
여성에게 더욱 많은 정치권력이 주어졌다             여성들도 남자만큼이나 멍청하다
대중음악이 날로 발전하고 있다                          내가 너무 늙었나보다
————————— 의 부제는 “21세기에도 계속 사업상의 멍청함을 추구하며”다. 부제에서 느껴지는 재기발랄한 감수성처럼, 저자는 인간의 핵심 원칙을 3가지로 정의한다: 1.멍청함 2.이기성 3.발정. 가벼운 농담 같으면서도, 다시 생각해보면 너무나 절묘하다. 이런 식으로 이 책은 우리 세상의 본성을 논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근미래에 일어날 경향들을 툭툭 내뱉으며 뼈있는 농담을 던진다. 그리고 글로 열심히 이야기하다가 어떤 상황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해야할 부분에 도달하면 <딜버트> 만화 가운데 한 편을 적절하게 뽑아서 삽입한다. 만화와 일반 문자도서의 장점을 각각 고루 수용한, 대단히 자연스러운 독서가 가능한 서적인 셈이다. 

이 책은 분명히 사회과학 서적은 아니다. 아니, 아예 작가가 대놓고 통계는 어차피 사기치려고 가져다 붙이는 것에 불과하니까 피차 귀찮은 짓 하지 말자고 넉살 좋게 넘어가 버린다. 하지만 통찰의 깊이는 농담의 깊이 만큼이나 끝이 보이지 않는다. 98년, 즉 인터넷과 초고속 통신의 대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쓰여진 책이면서도 “누구나 뉴스 기자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필요없는 뉴스를 적극적으로 무시해야 할 것이다” 같은 전형적인 인터넷 시대의 모습들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다. 물론 ADSL의 보급화 이전이라서 ISDN을 최신기술로 소개하고 있다든지 하는 기술 특유의 빠른 시대변화상에 따른 격세지감은 어쩔 수 없지만, 가장 단순한 인간 본성에 대한 비관론 위에서 펼쳐내는 현란한 디스토피아의 향연은 박장대소를 금할 길이 없다.

사실, 이 책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작 <딜버트의 법칙>만큼 일관성 있는 흐름과 핵심적인 결론으로 수렴되는 구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사의 각종 토픽들이 챕터로 잘게 나누어져 있다. ‘애완동물’, ‘사교생활’, ‘건강’ 뭐 이런 식으로 구분하여, 각각에 대해서 이런 트렌드가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중구난방이라는 것이다. 물론 앞에 소개한 인간본성의 3대 법칙이라는 구심점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기는 하지만, 다 읽고 난 뒤에 각각의 것들이 잘 기억이 안 난다거나, 뭔가 끝까지 독파했다는 느낌이 부족한 감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부분을 ‘미래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으로 이름 짓고, 뉴에이지 운동을 연상시키는 극단적인 상대주의의 손을 들어준 것은 전체 책 구성이나 시니컬한 감성에 있어서 상당한 마이너스 요인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는 대충 넘어가도 대세에 지장은 없다. 마지막 챕터라 할지라도, 그냥 챕터 통째로 안 읽어도 되는 구조니까 말이다. 여전히 전체적인 책의 인상은, 이 작가는 천재라는 것이다. “미래에는 아무리 쓸모없고 멍청한 상품이라 할지라도 무조건 사들일, 귀가 무지 얇은 고객을 찾기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쉬울 것이다” 같은 자신만만한 예측을 만날 때 더욱 더. 그것을 매니아 마케팅이라고 부르든, 명품족이라고 부르든, 천민 졸부라고 부르든, 이미 우리에게는 현실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더욱더 이런 경향이 강해질 듯 하지 않던가.

어떤 훌륭한 출판사가 한 훌륭한 번역가를 고용해서 내준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사실 차기작인 (딜버트: 얍삽이의 길)가 한국 독자들에게는 더 쉽게 와 닿을 것이다. 왜냐햐면 <딜버트의 법칙> 때 처럼 다시 회사라는 조직사회의 이야기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개인적으로는, 간단한 비관적 규칙 몇가지를 바탕으로 온 세상의 미래를 종횡무진 예측한 이 책의 가치를 더욱 높이 사고 싶다. 실전 영어를 배우고 싶으신 분들은 기껏 외서부까지 가서 무슨 이상한 3류 추리소설류를 고를 것이 아니라, 이런 생활 감각과 유머, 통찰력이 가득 담긴 이 책 한권을 주문하실 것을 적극 권장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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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2004년 추천도서 5권

– 안전지대 고라즈데 (조 사코 / 글논 그림밭)
– 널 좋아한적 없어 (체스터 브라운 / 열린책들)
– 남쪽손님/빗장열기 (오영진 / 길찾기)
– 일지매 1-5 완(고우영 / 애니북스)
– 불의 검 1-12 완 (김혜린 / 대원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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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나대로 선생이 꿈꾸는 가부장 유토피아[인물과 사상 2005/02]

!@#… <인물과 사상> 올해 2월호에 실린 원고. 조선중앙에 이어서, 당연히 동아. 이후에는 반대쪽 선수들도 다루겠지만. 보통 월간 인물과 사상 -> 미디어오늘 온라인 -> 개인 블로그에도 백업조로 올려놓기 순으로 가고 있음.

!@#… 글 독서의 연출상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접어서’ 올리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지만… 앞으로는 원고지 30매를 넘는 나름대로 장문의 경우는 접어서 보여주기로 결심. 현대인의 문자해독력 퇴행(즉 한두화면 이상 넘어가는 글은 못읽는다는 말. 일부 사람들은 벌써, 3줄로 요약해줘야만 겨우 무슨 뜻인지 알아먹는다)을 넓은 마음으로 포용해주기로 했다는 말이다. -_-; 자, 그럼 밑에 클릭을 하면서 시작. (주: 그림 이름은 모두 해당 개제일. 예: 041218 -> 2004년 12월 18일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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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대로 선생>이 꿈꾸는 갈등 없는 가부장 유토피아

김낙호(만화연구가)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끝까지 읽기(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