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를 교육이라고 미화하는 버릇에 대하여 [팝툰 만화프리즘/10호]

!@#… 한 사회의 ‘개념’ 함양은 공공 교육에서부터. 교육이 지난 수십년간 이 모양인데, 오늘날 담론 수준이 이 꼬라지인 것은 사실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호 팝툰 칼럼.

입시를 교육이라고 미화하는 버릇에 대하여

김낙호(만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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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아니 21세기소년 완결.

!@#… 결국 완결되었구나, 20세기… 아니 21세기소년. 수습불가로 치닫던 20세기소년을 대충 땜방한 후 한 호흡 고르고 완결편이라는 명목으로 단행본 2권짜리 ’21세기소년’을 연재했는데 결국 일본에서 연재잡지의 이번 호에 끝. 즉 진짜 완결이 났다. 운좋게도 한 지인을 통해서 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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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와 교양의 균형 – 『고전만화해제』[기획회의 070701]

!@#… 좋은 출발. 아마 이번 소설편보다, 시편 정도에 들어가면 더욱 진가가 드러날 듯.

이야기와 교양의 균형 – 『곰선생의 고전만화해제』

김낙호(만화연구가)

‘고전’이라는 수식어는 작품에게 있어서 영광이자 커다란 짐이다. 영광인 것이야 뭐 당연한 이야기지만, 짐이라니 무슨 말인가. 고전이라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대표적인 우수작이기에 부여되는 타이틀인데, 거꾸로 보자면 그만큼 일관된 좋은 평가를 받을만한 ‘범생이’라는 것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고전이라는 딱지는 재미없는 옛날 작품이라는 의미를 자동적으로 부여받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운 나쁘게도 의무교육 과정 속에서 교과서로 처음 접하는 불행한 사태라도 생긴다면, 그 작품의 재미는 영영 복권될 기회를 놓치고 만다. 그런데 의문이 드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 작품들이 좋은 평가를 받기 이전에 당장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었다는 것은, 그 만큼 재미있는 구석이 있었기에, 끌렸기에 그랬다는 것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실제로 고전으로 인정받을 만큼 세월의 무게를 견뎌낸 우수작들은 실제로는 재미있다. 인간사의 사연이 서정이나 이야기로 담겨있고, 당대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통렬하게 반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재미를 제거하는 엄숙주의 교육문화의 폐단일 뿐, 고전 작품들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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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안티, 순진민폐, 선관위 [팝툰 만화프리즘/9호]

!@#… 사실은 이전의 선관위 관련 세부적 포스트보다 먼저 탈고했던 원고인데다가 한정된 지면의 칼럼인 관계로, 지나친 압축이라는 함정을 피하지 못한 글. 하지만 선관위의 ‘의도’를 의심하며 분노하기 보다 현행법의 미진함이라는 전제와 발표가 가져온 ‘결과’를 평가하고 고쳐가며 현실을 바꿔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핵심은 대충 여기서부터 이미 언급 (다이제스트판 프리퀄…인건가). 하기야 몇 주 지난 지금에 와서는 신경쓰는 사람들도 상당히 줄어들어버렸지만. 여튼, 지난 주 발행된 팝툰의 칼럼.

지능안티, 순진민폐, 선관위

김낙호(만화연구가)

언젠가부터 일상용어가 되어버린 ‘지능안티’라는 말이 있다. 간단히 말해서 팬인 척 하지만 사실은 안티라는 것. 즉 우리 편에 서서 도와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방해하는 이들의 행태를 일컫는 것. 행위자는 팬이라는 표면상의 신분 덕에 나무라기 힘든데, 피해의 결과는 그대로 남기 때문에 더욱 효과적이다. 그런데 이것보다도 훨씬 더 곤란한 경우가 있다. 반대활동을 하려고 한다기보다, 나름대로 선의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데도 오히려 그것 때문에 의도하지 않게 피해를 낳는 경우 말이다. 이런 ‘순진민폐’의 입장에서는 지능 안티로 간주되는 것이 억울하겠지만, 의도만 다르지 지능안티와 겉으로 드러나는 패턴도 결과도 거의 같다는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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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 별곡 – 『다카하시 루미코 걸작단편집』[기획회의 070615]

!@#… 하지만 거꾸로 소시민 정서 위주의 작품들만 남발되면, 짜증이 난다는 단점도 있다. 어디까지나 중요한 건 다양한 선택권.

소시민 별곡 – 『다카하시 루미코 걸작단편집』

김낙호(만화연구가)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떤 답변을 할 수 있을까. 한 때는 너도나도 세계정복이니 세계평화니 하다못해 남북통일이라고 이야기했을지도 모른다. 뭔가 멀리 있는 커다란 것에 대한 동경, 자신에게 아직 남아있는 성장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다. 하지만 나름대로 정상적인(?) 경로로 나이를 먹고 세상에 적응하며 사회인이 된 사람이라면 목표의 거리 범위가 더 짧아지고 자신의 성장 속도가 어느 선을 넘지 못다는 것을 안다. 언젠가 품었던 것과 지금 품고 있는 것 사이의 괴리감에 괴로워한다면 몰라도, 만약 스스로 잘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것 자체로는 특별히 아깝거나 불행한 것도 아니다. 그저 세계평화에서 아파트 이웃 간의 평화로 목표가 옮겨가고, 세계정복은 직장의 철밥통 자리 정복으로 이동했을 뿐. 호연지기니 야망이니 어쩌니 교육받으며 자라난 교육환경과는 달리, 세상은 대부분 소시민적 가치로 가득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도, 바로 그 속에 훨씬 더 많은 삶의 희로애락이 담겨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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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 게이먼의 만화들에 관하여 [판타스틱 0706]

!@#… 2회로 끝난 초단명 칼럼(!)의 마지막회. 평론적 해석을 줄이고 거의 약력 위주로 설명해도 지면이 부족했다는;;; 하기야 바로 그런 것이 이 칼럼란을 정리하는 이유 중 하나겠지만. 칼럼 속성상, 최근 각광받는 소설가로서의 게이먼보다는 본업인 만화스토리 쪽의 게이먼을 다뤘다. 본래의 탈고버전 + Dreamlord님이 잡아주신 정보 오류수정 반영.

현대 신화에 심취한 셰익스피어 – 닐 게이먼의 만화들

김낙호(만화연구가)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집안의 반대로 어긋난 연인들이나 미쳐버린 왕, 복수에 목숨걸다가 결국 주연 인물들 몰살 같은 장중한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의 가장 멋진 본질이 드러나는 것은 상상력 넘치는 환타지 작품 『한여름밤의 꿈』이다. 신화속의 요정들이 인간 세상과 위화감 없이 상호작용하며, 평범한 일상은 기이한 현상으로 가득해진다. 당대 현실의 인간사와 신화적 상상력의 연결, 그것을 통해서 꿈과 현실, 욕망과 허망함을 넘나드는 한바탕 소란을 벌이는 이야기.

그런데 만약 그런 이야기 만들기와 정서를 현대의 작가가 이에 맞먹는 완성도로 구사한다면 어떨까. 최근에는 환타지 소설가로도 명망을 떨치는 영국 출신 만화스토리 작가 닐 게이먼Neil Gaiman의 작품들이 바로 그렇다. 그의 작품들에는 셰익스피어적인 화려하고 섬세한 대사가 넘치며, 신화적 원형들이 현대 인간사에 대한 거울 역할을 하며 촘촘히 배치된다. 덕분에 그가 주도한 작품들은 문학적 완성도와 대중적 인기를 동시에 거머쥐곤 해서, 그는 만화 『샌드맨 Sandman』연작의 성공과 최근작 베스트셀러 소설 『아난시 보이즈 Anansi Boys』까지 축적된 명성을 기반으로 현재 영미권 문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환타지 작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CS루이스나 톨킨, 르귄 등 정통파 환타지 작가들의 진한 영향을 보이며, 그 위에 DC코믹스 류의 현대 슈퍼히어로의 장르법칙들을 녹여넣고 또 비틀어 나가며 심오한 고민까지 풀어나가는 솜씨는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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