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덜트: 유아회귀? 새로운 성장! [연합르페르 0509]

!@#… 연합뉴스 사내잡지(사내들의 뜨거운 땀과 불끈대는 근육과 열정!!! …이 아니라, 社內. 같은 계열 개그로는, ‘사내 동호회’ 등이 있다)  <연합르페르> 9월호 특집에 들어가는 글. 오랜만에, 나름대로 심리학적인 기반으로 접근. 심리학, 문화, 미디어 등을 엮어내는 건 역시 capcold의 적성에 잘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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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덜트: 유아회귀? 새로운 성장!

키덜트라는 용어가 있다. 아이(Kid)와 어른(Adult)를 기계적으로 합성한 말인데, 흔히 대중문화의 취향에서 “어른들이 어린이가 되고 싶어하는 환상을 담은 문화 형식들”을 지칭한다고 한다. 약간만 주변을 둘러보아도, 분명히 ‘아직도’ 프라모델을 만들고 사진을 찍어서 블로그에 올려놓는 이상한 철딱서니 없는 어른들을 쉽게 발견할 것이다. 남사스럽게도 커다란 아톰이나 둘리 얼굴이 그려진 티를, 다 큰 처자가 스스럼없이 입고 다니는 모습도 흔하다. 이 세상이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인가? 이런 걱정을 하는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심리학적 설명들이 동원되기도 한다. 한 가지는 키덜트 문화가 소비문화 마케팅이라는 점에 착안하는 것인데, 워싱턴대 심리학교수 엘리자베스 로프터스 말을 인용하자면 “생산자들이 성인 소비자들에게 어린 시절이 얼마나 좋았는가 하는 허위 기억들을 창조하도록 만들게 함으로써 어린 시절의 향수 이미지를 상품 형식으로 사용한다”. 좀 더 키덜트 족 자신의 심리를 듣고 싶다면, 고려대 심리학과 성영신 교수의 발언도 있다: “청소년기의 취향을 서른이 넘어서까지 유지하는 것은 성인이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출이며, 현대인들이 피폐해져가는 일상생활 속에서 순수했던 시절을 기억함으로써 활력소를 얻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하, 그렇군요. 즉 키덜트는 어린 시절의 향수에 절어 사는 사람들이며, 유년으로 회귀하고 싶은 심리의 일환, 그리고 그것을 공략하는 자본의 마케팅에 휘둘려버린 것이군요.

심히 곤란하다. 이런 인식들은, 만화를 좋아한다, 오락성 모험물을 좋아한다, 모형을 만든다, 귀여운 것을 즐긴다… 이런 취향들을 어린이의 전유물이라고 규정하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고, 그것은 다시금 어린이/성인 사이에는 패러다임적 경계선이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이것은 사람의 심리적 성장과정 모델을 분절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오는 오류다. 한 마디로 아이와 어른이 당연히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편의주의적 세계관, 마치 만 18세 이상은 에로영화를 봐도 좋다는 사회적 규정 같은 것이다. 사실은 18번째 생일이 지나는 그 순간 갑자기 사람들의 심리발달 상태가 ‘사춘기’에서 ‘성인’으로 대변신을 할 리가 없는데 말이다. 성장을 마치 땅강아지에서 번데기를 거쳐서 매미로 변신하는 ‘변태 모델’로 보는 셈이다. 이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성인’이라는 막연한 기준에 의해서 미련 없이 버려버린 취향을 계속 추구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고, 자신들은 그것을 이미 버려버린 이유를 심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미성숙한 종족으로 폄하할 것이다. 심리학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인지부조화’라는 현상이다. 이해불가능한 현상을 보면서 느끼는 심리적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인지구조를 살짝 틀어버리는 것이다.

성장단계의 모델은 편의적 구분일 뿐, 사실 심리적 성장은 연속적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어른이 된다고 해서 갑자기 “오늘부터 나는 만화를 싫어할래!” 라기보다, 그 나이와 성장단계에 맞는 만화를 골라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은가. 만약 그 나이대의 소비수준과 사회적 인식능력에 적합한 작품을 찾지 못한다면, 자연스럽게 그 분야로부터 취향이 멀어지는 것 뿐이다. 적합한 작품을 찾는다면? 어차피 좋아하던 취향이니, 계속 추구한다.

키덜트 현상은, 취향이라는 심리적 인지구조가 만18세니 20세니 하는 ‘사회적 규범’에 의해서 정해지고 일탈이 허용되지 않았던 이상한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에 대해서, 스스로 느끼기 시작했다.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불가/영리불가 —

‘모에’를 통해서 기자의 전문성을 생각하다

!@#… 뭐! ‘모에’가 이렇게 건전무쌍한 개념인 줄,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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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모에를 소재로 기사를 쓴다면, 아무리 마감이 바쁘더라도 최소한 모에가 뭔지 한번 제대로 알아보는 정도는 했으면 좋겠는데. ( 단지 신문기사라는 이유만으로 이 설명이 ‘모에가 뭐에요? 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표준 대답으로 스크랩되고 돌아다닐 것을 생각하면, 참 세상 별 볼일 없다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 기자에게 있어서, 속보와 흥행이라는 공명심의 불길 속에서 가장 먼저 증발하는 것은 바로 전문성. 하기야 기자 뿐만이 아니겠지만.

—(3번째 리플까지 보고 보충설명 추가)—

!@#… 그럼 모에가 뭐냐고? 쉽게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히로스에 료코가 귀여워서 좋아하고 있다면, 그건 그냥 좋아하는 것일 뿐. 하지만 히로스에 료코라는 인물보다, 영화 <철도원>에서 커다란 오렌지색 조끼를 입고 있는 미소녀의 이미지가 눈앞에  집착한다면 뭔가 좀 다른 경지다. 아니 한발 나아가서 철도원이고 료코고 뭐고 간에, 아예 “단발머리의 귀여운 소녀가 커다란 오렌지색 조끼를 입고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집착적으로 불타오른다면 어떨까? 그것이 바로 모에. 모에는 특정 요소들에 대한 , 그리고 그 요소들의 조합에 대한 애정적 집착. 그 과정에서 개개 인격체나 캐릭터 자체는 오히려 뒷전으로 밀려날수도 있고. 그리고 그건 세부 요소로 환원될수록 확실해진다. 예를 들어서 미소년모에라고 한다면, 그다지 모에라고 명함 내밀기도 뭣하다. 안경모에, 고양이귀모에, 방울모에… 이 정도는 되야 좀 체면(?)이 산다. 위에서 어설픈 기자양반이 대충 쓴 것 마냥 귀여운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모에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귀여운 것이라는 개념을 구성하는 어떤 특정한 요소(세라복이라든지, 안테나 머리라든지, 뾰족한 덧니라든지)에 집착을 하는 것이 모에다.  

에반게리온의 ‘레이’라는 캐릭터를 좋아한다면, 그냥 팬일 뿐. 하지만 붕대를 맨 미소녀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이고, 하필이면 레이가 그 결정체이기 때문에 좋아한다면 그건 어엿한 ‘붕대소녀모에’. 이 사람은 아마도 수많은 만화, 애니, 게임 등 장르 대중오락문화를 샅샅이 뒤져가면서, 그 중 붕대를 맨 소녀 캐릭터를 찾아내며 애착을 보낼 것이다. 아마 그리고 붕대소녀는 자고로 이래야해(3분에 한번씩 아픔으로 얼굴을 찌푸려야 하며, 부상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서 활약을 벌이려다가 아픔으로 한번 넘어져 줘야 하며, 머리에 붕대를 맬 경우 머리카락 전체를 뒤덮어서는 안되고 이마와 한쪽 눈 정도까지만 덮어야 한다는 등…), 하는 나름의 공식을 만들어내기 시작할 것이다. 당연히 붕대소녀를 묘사한 각종 피겨와 게임, 만화책들을 긁어모으고 (문화평론가 아즈마 히로키의 용어를 빌자면, ‘데이타베이스적 소비’). 만화/애니/게임이라는 서브컬쳐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양적으로 비대해진, 기호와 상징의 홍수인 일본이기에 나올 수 있었던 현상. 페티시즘적 쾌락과 집착적 대중문화 소비의 화려한 만남.

설명이 어렵다면, 이렇게 쉽게 요약할수도: 80년대의 애니광들은 <오렌지로드> 마도카의 ‘팬’이었지만, 2000년대의 오타쿠들은 <오네가이 티쳐> 미즈호를 보며 ‘누님 모에’를 한다

나중에 또 덤으로 추가:

1) ‘모에’라는 단어를 감탄사로 쓰면, “나는 지금 맹렬히 모에하고 있는 중이다”라는 뜻의 약칭이 된다. 왠 오타쿠 캐릭터가 아이돌 콘서트장에 가서, “모에~!!!”하고 외치는 장면이 있다면 바로 그런 것이다. 만약 모에의 대상이 되는 캐릭터가 “모에~?”라고 귀엽게 한마디 불러준다면? 그건 “나에게 모에해주시지 않을래요?” 라는 말의 약칭이 된다. -_-;

2) 리플에서 pseudorandom님이 지적하셨다시피, ‘모에’ 행태는 실체를 획득할 수 없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실제로 획득할 수 있는 대상이면 가서 얻어내면 되는 것이지, 관련 굿즈를 사모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냥 팬으로서 상대의 전체를 동경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특정 요소 단위로 집착할 필요도 없고. 만화, 애니의 2차원 캐릭터(의 특정 요소들)에 모에하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 하지만 인기 없는 오타쿠들에게 있어서는, 3차원 물질계의 여성들도 이미 실체를 획득할 수 없는 먼 세상 신비의 대상이다.

3) 참고로, ‘모에’라는 단어는 “싹트다, 움트다” 라는 용어와 “불타오르다”라는 용어의 동음이의어 말장난이다. 오타에서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의미상으로는 불타오른다 쪽이 훨씬 적합.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군대 총기난사, 미디어, 그리고 ‘보이는 적’ 만들기

!@#… 한 일병이, 자기 분대를 몰살시켰다. 뭔가 이유가 있었겠지.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이었던 간에, 결국 그 짓을 함으로써 자신의 모든 일말의 정당성을 스스로 소멸시켜버리고 만,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더 큰 비극을 불러다준 멍청한 악행. 아마도 군법에 의거, 총살형 예정. 편의적인 근무수칙 위반, 수많은 상병들 사이에 둘러쌓인 일병, 인격모독, 내성적 어리버리 성격, 쌓이는 스트레스… 군대 다녀오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얼추 머리 속에서 시나리오가 그려질 법한 이야기. 그리고 항상 지겹도록 반복되는 이야기는 한국 군대의 비민주적/시대착오적 질서유지 방식에 대한 피상적인 질타. 순진한 인권론자들도 군기 강화를 부르짖는 이들도, 그 근본적 이유인 거대 조직 군대의 비효율성에 구조조정의 칼날을 들이댈 구체적인 경영 마인드는 드물다. 너무 거대해서 제대로 쳐다보기가 너무 힘드니까. 구조조정을 하자, 라고 한다면 많은 고민과 드넓은 시각, 보이지 않는 다양한 방해요소들과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 그래서, 많은 이들은 그것보다 훨씬 안전한 길을 선택한다. 바로, ‘보이는 적‘을 만드는 것이다. 그 것이 진짜 적인지, 문제의 근본 원인인지는 이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통해서 문제가 해소될 수 있을지 없을지 조차 이들에게는 사치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눈 앞에 보이고, 지금 당장 때려줄 수 있다는 사실 하나 뿐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이것, 저것

!@#… 아, 그래. 컴퓨터 게임이 문제고, 만화가 문제라고 하는구나. 뉴스라는 미디어가, 게임이고 만화고 하는 다른 미디어를 악의 근원으로 몰고 간다니 참 웃기지도 않은 일이다. 이러한 것들이 선택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구체적으로 보이니까. 컴퓨터 게임에서 총쏘는 장면 많지? 만화에 환상적, 비현실적 싸움 장면 많지? 자 한번 봐라. 이번의 사건과 비슷해 보이지? 그래, 그러니까 이걸 보고 배운거다. 에잇, 게임 만화 나쁜놈들. 때려주자…. 뭐 그런거다. 존내 유치하고 치졸하고 말도 안되지만, 그게 세상 사람들에게 아직도 잘만 받아들여지는 논리다. 만화계가 어려우니까 대여점을 불태우자고 하고, 관동에서 대지진이 일어나니까 조센징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고 하고, 민심이 불안정하니까 후세인이 핵무기를 숨겼다고 하는 거다.

!@#… 어쩌면,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복합적이고 거시적인 이유, 바로 대자연의 규칙) 왕을 잡아죽였던(보이는 ‘적’을 퇴치) 수천년 전 그 당시의 정신수준에서 한 발짝도 진화하지 못한 건지도 모르겠다. ‘판을 넓게 보는’ 사회적 지성의 방향을 포기한 대가를 두고두고 치루는 셈이다. 앞으로도 더욱 많이 치루겠지. 자의식은 커가고 사회적 지능은 떨어져가는 어떤 시대의 단상이다.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 수정 영리 자유 —

이 땅에서 시사만화가로 살아가기 위해 [인물과 사상 0504]

!@#… 지난달 ‘인물과 사상’에 들어간 글. 조중동 한바퀴 돌았고, 새로운 진영으로 메스(?)를 들이대기 전에 한번 쉬어가는 의미에서 시사만화라는 분야 자체에 대한 개론격인 이야기를 했음. 뭐랄까, 저널리즘 학도들에게는 도움이 될만한 글이 되었지만…  덕분에 평소보다 재미가 좀 없어요 없어… 그러다보니 이번에는 ‘미디어오늘’에서 콘텐츠 퍼가겠다고 연락도 안오고, 우연히도 월간지마저 배달사고인지 나에게 도착안함. -_-;;;

!@#… 다음회부터는 다시 한개 매체씩 돌아가며 다루는 방식으로 복귀할 예정. 우선 이번은 이걸로 참으시길. 여기 실린 버젼은 오리지날 버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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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대로 선생이 꿈꾸는 가부장 유토피아[인물과 사상 2005/02]

!@#… <인물과 사상> 올해 2월호에 실린 원고. 조선중앙에 이어서, 당연히 동아. 이후에는 반대쪽 선수들도 다루겠지만. 보통 월간 인물과 사상 -> 미디어오늘 온라인 -> 개인 블로그에도 백업조로 올려놓기 순으로 가고 있음.

!@#… 글 독서의 연출상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접어서’ 올리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지만… 앞으로는 원고지 30매를 넘는 나름대로 장문의 경우는 접어서 보여주기로 결심. 현대인의 문자해독력 퇴행(즉 한두화면 이상 넘어가는 글은 못읽는다는 말. 일부 사람들은 벌써, 3줄로 요약해줘야만 겨우 무슨 뜻인지 알아먹는다)을 넓은 마음으로 포용해주기로 했다는 말이다. -_-; 자, 그럼 밑에 클릭을 하면서 시작. (주: 그림 이름은 모두 해당 개제일. 예: 041218 -> 2004년 12월 18일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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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대로 선생>이 꿈꾸는 갈등 없는 가부장 유토피아

김낙호(만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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