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적 일상은 아니지만… <생활의 참견>[기획회의050919]

!@#… 그간 밀린 포스팅 떨이. -_-;

===========================

모범적 일상은 아니지만, 모범적 일상만화 – <생활의 참견>

잘 알려져 있다시피 라디오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코너들 가운데 상당수는, 청취자들이 보낸 사연을 소개해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경험담을 털어놓는다는 것의 재미는 과연 무엇일까. 충격적인 소재와 극적인 전개, 놀라운 특수효과가 들어가지 않더라도 이야기 자체의 힘만으로 사람들을 휘어잡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일상성의 매력, 공감의 힘이라고 불리우는 그 이상한 흡입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일상성의 재미 가운데 하나는 바로 ‘공감’이다. 원래 인간이라는 동물은 그다지 상상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라서, 모든 것을 자신의 직접적인 생활 경험과 가까운 것으로 적극적으로 변환시켜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촉진하는 가장 강력한 두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는 바로 디테일이다. 타인의 이야기 속에 담긴 소소한 디테일이 내가 경험적으로 기억하는 어떤 것과 일치하면 마음 놓고 전체 맥락에 공감해버린다. 거꾸로, 전체 맥락이 공감 갈 만한 내용이라도 디테일이 미묘하게 다르면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다른 하나는 실존하는 화자다. 이야기가 가상적인 캐릭터들의 모험담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가의 생활이다, 라고 현존하는 주체가 부여되면 공감의 수준은 더욱 올라간다. 이 두 가지가 갖추어질때, 남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우리네들 사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 측면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아예 소재로서 일상적 살아가는 이야기나 생활을 다루는 것을 ‘일상물’이라고 한다.

상상력 풍부한 모험담, 자유분방한 표현법을 주로 발달시킨 만화에 있어서 이 분야는 사실 비교적 늦게 개척된 것 가운데 하나다. 논픽션(다소의 각색과 과장은 너그럽게 허용한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에세이, 일기, 사연소개라는 컨셉이 한국에서 만화와 만나서 대중적 성공을 거두기 시작한 것은 사실상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어 “그런 시시한 이야기들을 가지고도 만화를 발표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이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성장은 대단히 빠르게 이루어져서, 지금은 당당한 주류 장르 가운데 하나가 되어있다. 물론 항상 그렇듯이 함량미달의 물건들도 많지만, 정말 무릎을 치게 만드는 작품들의 맥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최근 단행본으로 출간된 <생활의 참견>(김양수 / 애니북스)을 이러한 장르적 유행에 편승한 작품이라고 평한다면 무척 당혹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오히려 이 작품은 이 장르의 사실상 선구자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작가가 월간 의 기자로 근무하면서, 지난 98년부터 꾸준히 연재해오던 것들의 묶음이다. 월 1회 한 페이지 남짓 연재되던 것이기에 7년만에야 단행본 분량이 축적되었고(사실 그나마 글이 절반이다), 웹사이트에서 연재한 것이 아니라 종이잡지에서 한 것이기에 여타 일상만화보다 전파가 덜 되었을 뿐이다. 

<생활의 참견>은 좋은 일상만화의 장점을 고루 지니고 있다. 자신과 자신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부여되는 현실감, 세부적 디테일을 맛깔스럽게 포장해내는 솜씨,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마치 10년만의 동창회 술자리에서 입담 풀어놓듯이 재미있게 전개시키는 이야기꾼 기질. 또한 각 이야기를 짧게 끊어주면서 일상 속 ‘에피소드’를 각인시키는 솜씨 역시 출중하다. 독자들은 작가의 삶 자체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공감하고 즐길만한 편린들을 원하니까 말이다. 특히 책의 전반부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것은 80년대 초의 청소년기인데, 그 때가 한국에서 대중문화의 격변기였기에 참 기억을 같이 나눌 일들이 많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대단히 유리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아 그때는 이런 게 다 생겨났었지. 우리 동네에도 그게 있었는데, 그 때 그런 친구 녀석이 하나 있었는데 말이야, 엉뚱하게도 **한 짓을 해버렸어!” 물론 좋은 마무리를 하려면, 결코 “그때가 그리워요” 식의 이상한 감상주의로 끝나면 안된다. 단편적인 재미있는 기억이 샘솟는 것과 정말로 그때를 그리워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니까. 예를 들어 군대 개그를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좋은 일상만화의 또 다른 조건은 바로 일상의 공감 이상의 대단한 무언가로 독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인데, <생활의 참견>은 이 것 역시 잘 충족하고 있다. 억지로 감상주의를 강요하지 않고, 억지로 웃기려고 오버하지도 않고, 심지어 그림체마저도 부담없고 푸근하기 이를 데 없다. 세밀하거나 박진감 넘치는 데생과는 애초부터 방향이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더그라운드 만화에서 종종 활용하는 위악적인 낙서체의 느낌도 아니다. 그림과 글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만화라는 매체의 매력을 확실하게 활용하면서도 절제할 줄도 아는 균형감각 역시 좋은 이야기꾼의 증거다.

하지만 모든 일상물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인 소재의 고갈로부터 자유롭기는 힘들 듯 하다. 사실 사람의 일생이란 워낙 재미있는 일들이 한정되어 있는데, 남의 이야기를 잘 포장하는 것은 자기 이야기를 포장하는 것과 전혀 들어가는 힘이 달라진다. 당장 이 책 한권 안에서도 직접 겪은 일과 ‘사연을 소개받았다’는 일들은 특히 디테일의 활용에 있어서 워낙 재미의 격차가 상당히 크다. 그렇다고 해서 작품 컨셉을 이제부터 사연보다 잡상으로 바꾸기 시작한다면? 책 말미의 섹션을 차지하고 있는 잡상류 작품들의 면면을 볼 때, 작가의 특기분야가 어느 쪽인지는 너무나 명확하다. 아니 사실 책으로서 컨셉 통일성과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아예 말미 섹션 자체를 넣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결국, 방법은 끊임없이 폭넓은 재미있는 생활을 만들어나가서 자꾸 현재진행형으로 소재를 만들어 나갈 수 밖에 없다. 잘 해나가면 7년 뒤에 또다시 단행본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고, 아마 독자들 역시 기쁜 마음으로 그 순간을 기다리게 되지 않을까. 여하튼 지금은, 일상에 즐겁게 참견당해서, 또는 참견하는 일상의 즐거움을 같이 공감하며 느낄 수 있는 책이 나와줘서 즐거울 따름이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토론방 개설: “해외만화 출판쿼터제, 다시 불타오르는 만화정책”

!@#… 지난번 만화언론 등대등 토론과 같은 방식의, 메타-토론방 열었습니다. 당연히 이번 주제는:

“해외만화 출판쿼터제, 다시 불타오르는 만화정책” (클릭)

!@#… 주변에 널리 홍보하고, 중요한 내용이다 싶은 건 그쪽에 주소를 등록 시킵시다… 참고로 그곳은 글 등록 게시판이 아니라, 사람들이 쓴 글을 링크 시켜놓는 메타-토론방입니다. 각자 자기가 말하고 싶은 공간에서 이야기하고, 메타토론방에서는 그 논의의 흐름과 요점을 살펴보도록 도와주는 기능. TGP 같은 겁니다(이 용어 아시는 분들은 나쁜 분들;;)

!@#… 위 토론방은 궁극의 카레 탐구 사이트 만화인(manhwa.in)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만화저널 <만> 창간 준비의 사전작업 일환이기도 합니다.

불 붙은 쿼터제 논의에 찬물 끼얹기.

!@#… 해외 만화 쿼터제 도입 제안에 대한 뉴스가 나간 뒤로 여기저기서 반발 반응이 나오고 있는데, 어차피 대부분은 그냥 그 기사만 달랑 읽고 0.5초만에 분노, 0.94초만에 욕설이나 대충 갈겨버린 것들이니 무시. 아주 소수는 그나마 좀 더 현실적으로, ‘그러다가 공멸한다’라는 이야기를 함. 다만 이해가 전혀 안가는 부류들은, “그러다가 공멸한다고! 그러지 말고 대여점이나 없애!”라고 주장하는 부류. 대여점을 인위적으로 없애는 것이 차라리 더 공멸의 지름길이라는 정도는 생각을 좀 했으면 좋겠지만 뭐 그건 몇년째 이야기하고 나니 피곤해서 패스.

!@#… 이전에도 이야기했듯 capcold는 쿼터 반대론자는 아니지만 회의론자. 쿼터제 도입만이 살길이다!가 아니라 쿼터 배분의 효과를 지닌 우회로를 만들자, 라는 지극히 현실주의적 입장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https://capcold.net/blog/?p=593 에서 했으니 생략. 한문장으로 요약하면, 수입배급업자와 창작출판사를 따로 분류한 후 문화산업 지원을 후자에게 몰아주는 것).

…한마디로, 찬쿼터/반쿼터로 단순하게 나누어버릴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아니 그렇게 나눠버리는 순간, 건설적인 발전방향과 실천은 20억 파섹 너머로 날라가버린다. 반쿼터를 부르짖고자 하는 사람들은 하다못해 왜 이런 정책제안을 하는지 자료를 좀 찾아보기나 할 것이며(찾기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쿼터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좀 열정과 의지를 잠시 가라앉히고 현실적으로 머리를 식혀가며 현실적 방안들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법을 제안하는 것은 원론 수준에서의 문제제기가 아니니까. 너도나도 잘못했다는 양비론이 아니라, 현실적인 방안을 다듬어내고 밀어붙이자는 말이다. 민병두 의원측에서 제시한 안은 분명히 그 구체적인 듯한 이미지에 비해서 아직 너무 거칠다. 문제의식만 있지, 도입방법에 대한 현실적인 조율이 전혀 없다. 한마디로, 아직 발표할만한 단계의 물건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 그래서 정말 아쉬운 건, 미숙한 이슈메이킹이다. 원래 쿼터제의 도입취지가 무엇이든 간에, 뉴스보도는 어디로보나 한국만화 확보가 아닌 수입규제로 다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50%니 1%당 벌금 100만원이니 하는 비현실적 수치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보도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문제다. 이렇게 해서야 결코 도입의 본래 취지가 전달되는 일이 없이, 다만 “정부가 엄청난 뻘타를 날린다!”(보통, 사람들은 국회의원이든 뭐든 다 정부라고 생각한다) 고 생각하게 될 뿐. 대형 출판사로 하여금 종수를 줄이도록 유도한다는 것 역시 이면의 기획이어야지, 드러내놓고 수입규제로 비추도록 하면 역효과를 일으킬 뿐. 그보다 애초에 이해가 안가는 것이, 만화판의 현재 상황 – 특히 대형 출판사들의 무분별한 종수경쟁과 그에 따른 과다물량 – 에 대한 개요와 여러 종합적 대안 등이 담겨있는 종합보고서, 내지 하다못해 공식 보도자료의 형식으로 먼저 기사화를 하면서 그 후에 공식 제안을 하는 것이 정상적인 이슈메이킹 과정이어야 할 텐데… 어째서 먼저 쇼크!부터 터트린 후 그저 아무도 서로 말을 안듣고 시끄러워진 판에서 이야기를 이어가려는 것인가. 건설적인 담론형성과 정책입안에 해가 되면 해가 되었지, 결코 득될 것이 없는 미숙한 언론전략이다. 또한 다양한 종합 발전 정책을 아우르는 마스터플랜을 발표하면서 그 취지 속에서 이런 것을 추진한다는 비전을 보여주지 않고 막무가내로 쿼터 이야기만 툭 꺼내면 누구라도 반발심이 생길 수 밖에. 규제책이란 그런 것이다. 아, 정책제안서에 여러 개념들이 언급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왜 대여권이 추진되다가 고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현실적 재검토 없이 곧바로 ‘역시 대여권은 필요하다’라는 원론을 반복하는 식으로는 그다지 현실감이 없다. 정확한 통계, 공공 출판 시스템… 이미 몇년 전에 다 제시되었는데 여러 사정으로 제대로 진행이 안된 것들 투성이(자세히 소개하자면 길다). 그런데 쿼터제 이야기만 새롭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부분만 부각될 수 밖에. 또한 쿼터제가 대여권이나 다른 정책들과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될지에 대한 제시보다, 이것도 저것도 필요하다는 수평적 요소 나열으로는 더욱 설득력이 부족하다. 각각의 요소들은 멋진 말이지만, 합쳐놓고 볼 때 인과성이 떨어진다. 한마디로, 아직 베타버젼, 아니 알파버젼의 제안서다.

… 민 의원 진영에 냉철한 담론 전략가가 개입되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앞으로 갈 길이 천리만리길인데, 첫 걸음부터 벌써 똥을 밟아버리면 곤란하다. 다만 절대 잊어서는 안될 것이… 갈 길의 종착지는 한국만화판에서 한국만화가 안정적인 양적/질적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며, 쿼터제는 그곳으로 가는 작은 길목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만약 곤란하겠다 싶으면 당연히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우회로를 택하는 것이 맞지, 그 앞에서 주저 앉아있어서는 안된다는 것. 이미 대여권 도입 시도와 올해 입안 실패에서 겪은 일 아닌가.

!@#…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쿼터제는 좋든 싫든 규제책이다. 쿼터제라는 규제책이 아닌, 의도한  긍정적 효과와 비슷한 결과를 낼 수 있는 지원책에서 우회로를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 수입사에는 배급업자로서의 세금을, 창작사에는 창작지원의 혜택을.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 수정 영리 자유 —

상상의 자유와 발언의 무게 사이: 만평의 책임 [인물과 사상 0510]

!@#… 인물과 사상 2005년 10월호 수록(원래는 9월호용이었으나, 마감 시간의 문제로 – 편집부 잘못 1%, capcold 잘못 99% – 10월호에 들어감). 인물과 사상에서 하고 있는 ‘시사만화’ 이야기는  아무래도 통일된 주제를 상정하다보니 각론과 총론을 배합해가면서 쓰는 중. 그런데 개별 시리즈/작가를 해부하는 각론과는 달리, 종합적 이야기를 하는 경우에는 별로 인기가 없다. 이번에는 후자쪽 부류인데다가, 왠지 단행본으로 치면 결론 챕터에 들어가야할 듯한 내용… -_-; 하기야, 조선일보 곤란하다!라고 하면 다들 맞아맞아 하면서도, 신문의 책임은 이런 것이야!라고 하면 어려워하는 것이 사람심리.

!@#… 앞으로도 각론 분야에서는 뉴스툰이라든지, 시사뒷북 등으로 대표되는 서사형 시사만화, 박순찬의 장도리를 위시한 90년대 이후 동향… 등등, 그리고 총론 분야에서는 포털과 시사만화, 프로파간다로서의 만화, 만화와 사회참여, 한국 시사만화의 흐름(단순히 자료로서의 ‘역사’가 아닌, 진짜 변화과정) 등등 여러가지를 건드릴 생각. 확실한 틀을 좀 더하면 언젠가 단행본화할수 있을지도(누가 사본다고…;;).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끝까지 읽기(클릭)

당신도 만화언론을 하지 않겠는가? [한겨레21_050823]

!@#… 저저번호 한겨레21(574호)에 올라간 기사. 까먹고 여기 백업을 안했다. 하기야 원고는 일찌감치 보냈는데, 서찬휘님 인터뷰와 같이 나가느라고 예정보다 늦게 나왔던 탓이지만;;; 여튼 인터뷰와 같이 묶은 기사는 여기.

!@#… 그리고 만화언론 논의는, ‘만’이라는 구체적인 이름을 가지고 제작 순항중이다. 훌륭한 일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화인(http://manhwa.in) 에서 보시길. 참고로 인도 사이트다. 카레다.

!@#… 항상 그렇듯, 여기는 원래버젼. 기사는 소제목 등 다양한 편집을 거친 버젼.

============================

만화언론을 하지 않겠는가?  – 만화 독자들, 즐거운 실험에 나서다

김낙호(만화연구가)

만화에 관한 진지한 이야기들을 하는 온라인 블로그들을 중심으로, 최근 “만화언론을 하지 않겠는가” 라는 도발적 카피가 출몰하고 있다. 만화 산업도, 잡지 출판도 불황과 침체를 호소하는 이런 시기에 상당히 뜬금없이 들릴 수도 있다. 게다가 그냥 만화 잡지를 만들자는 것도 아니라 만화에 관한 지면을 만들자니 말이다. 하지만 이내 묘한 울림에 눈에 들어온다. 이것은 특정 출판사에서 “만화 저널을 만들었으니 열심히 구독해주십시오”라는 광고가 아니라, 이제부터 토론을 하고 아이디어를 모아보자는 제안인 것이다. 불특정 다수의 평범한 독자들이 다른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에게, 같이 머리를 모아 지면을 창간해보자고 초대하고 있다. 거창한 운동도 대형 사업도 아닌, 즐거운 풀뿌리 실험에 시동이 걸렸다.

만화 언론 토론, 따로 또 같이

시작은 만화/애니 이야기 사이트 ‘만화인’(http://manhwa.in)의 운영자 서찬휘 씨가 <한국에서 '만화 언론'은 가능한가> 라고 화두를 던진 것이었다. “…’담론’의 형성을 넘어 정보의 지속적인 공급, 홍보 창구로서의 역할, 영향력을 펼칠 수 있는 공간으로서 ‘언론’은 분명 필요합니다. 또한 ‘언론’은 사회적 반향을 이끌 수 있는 운동이나 행사의 기반이 되기도 하죠…”라는 문제제기에서 읽어낼 수 있듯이 현존하는 만화단체 소식지나 무거운 정론지와는 다른, 대중적 지면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여기에 여러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대감, 우려, 현실 인식 등을 내놓기 시작했고, 빠른 시간 내에 수많은 장문의 토론 글이 축적되어갔다.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은 평범한 일반 독자와 만화가 지망생도 있지만, 만화잡지 편집자, 평론가, 프리랜서 기획자 등 실제 종사자들도 여럿 포함되었다. 이들은 모두 특정 회사나 단체의 입장이 아니라 대등한 만화 독자의 입장에서 토론에 가세했고, 자신의 경험에 의거해서 만화언론이 왜 필요한지, 어떤 부분이 가능하고 또는 어려운지 하나씩 아이디어를 더했다. 그 와중에서 한국 만화산업의 여러 난점들도 자연스럽게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만화 점유율 문제와 쿼터제 제안이라든지, 효과적인 창작 지원책 문제 등이 구체적인 업계 자료를 가지고 논의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토론의 와중에서 왜 만화언론이 없는가 분통을 터트리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실제로 그런 잡지를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들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논의과정을 바탕으로,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서 실질적인 기획회의마저도 실시되고 있다.

토론과정의 또다른 재미있는 점은, 토론이 하나의 공간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개인 블로그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트랙백으로 엮여진 블로그 댓글은 순서가 명확하지 않아서 논의의 맥락을 놓치기 쉬운 반면, 만화언론 토론은 관련 게시물의 리스트를 시간순으로 기록하고 ‘만화인’ 사이트에서 유지함으로써 마치 하나의 게시판처럼 명쾌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덕분에 토론에 기여한 각 글들은 분량과 논조의 자율성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토론의 전체 맥락은 유지되는 장점이 있다. 이것 역시, 사람들이 자기 공간에서 긴 감상을 늘어놓기 좋아하면서도 그것을 서로 공유하기 갈구하는 대중 서사문화, 특히 만화의 특성과 맞물려 있다.

만화 독자의 힘

사실, 대중문화의 건설적 발전가능성에 대한 긍정적 전망이 돌았던 90년대 초중반에 소비자와 생산자라는 두 개념을 합성한 프로슈머(pro-sumer)라는 용어가 유행한 적이 있다. 하지만 장르 상품화가 일반화되어버린 가요 분야에서 볼 수 있듯, 대부분의 경우 소비의 방식이 훨씬 정교화되었을 뿐이었다. 프로슈머 개념은 생산자와 감상자 사이의 진입장벽이 한없이 낮으며, 보편적 접근성과 매니악한 세부취향이 동시에 충족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대다수 대중문화 분야는 산업적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그 반대방향으로 질주했다.

하지만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바로 만화다. 만화는 90년대 중반 이후 이루어낸 산업적 체계화와 급성장의 물결 속에서도, 오히려 더욱 더 독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능동적으로 향유하는 매체로 발전해왔다. 가요의 청취자들이 팬클럽을 만들고 음반을 소비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만화의 독자들은 한단계 더욱 적극적으로 ‘판’에 개입해왔다. 우선 이미 청소년층에서는 주류 문화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각종 만화 동인 축제 행사를 들 수 있다. 독자들이 만화를 적극적으로 향유하기 위해서 직접 아마추어 회지를 만들어서 유통시키고, 아예 만화분장을 통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직접 되어본다. 그 에너지는 괄목할 만한 것이어서, 프로 작가들도 종종 이런 활동에 참여하곤 한다. 이는 프로와 아마, 독자와 창작의 경계선이 낮기 때문인데, 온라인 상에서 자기 홈페이지나 블로그에서 연재를 하다가 스타가 되는 사례들이 이를 더욱 뒷받침해준다.

3년전 출범한 독자만화대상(http://www.comicreader.org)은 만화에서 독자가 차지하는 위상의 상징적인 사건이다. 기존 만화상들의 구태의연함을 독자들이 직접 타개하고자, 순수하게 독자 투표에 의한 새로운 상을 만들어서 안정적으로 장기 운영하는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자면, 독자들이 다시 직접 나서서 대중적인 만화 정보 저널을 만들어서 유통시키겠다는 포부가 결코 뜬구름 잡기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독자들이 독자들을 위한 만화저널을 고민하다

물론 난점도 적지 않다. 중심 주체가 없는 상태의 기획이기에, 실제 제작에 들어가기 위한 자금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 온라인/오프라인의 선택, 광고주 설득 방식 등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이루어지는 중이다. 또한 기존의 만화 관련 잡지들이 지녔던 ‘그들만의 잔치’ 식의 대중성 부족을 극복하고 만화 ‘언론’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열혈 만화 매니아들이 아닌 일반 대중들에게 집중적인 매력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불특정 다수의 집단적 의견교환 과정에서 대안들이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십수년전 모든 부정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주간 영화 언론이라는 형식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씨네21>도 하나의 모델로 거론되고 있다. <씨네21>이 영화를 핵심 소재로 삼되 영상문화 전반을 아우르며 대중성을 확보했듯이, 논의중인 만화저널 역시 만화를 매개로 하여 독자들에게 만화/애니메이션/게임 등을 포괄하는 하나의 취향 문화 전반을 접하게 하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문제지적도 대안 도출도 모두 그 집단 토론의 과정에서 하나씩 해결하고 있는 셈이다.

여러모로, ‘만화언론을 하지 않겠는가’ 토론은 재미있는 실험이다. 만약 현재 논의 방향이 계속 진전되어 결국 창간이라는 성공적인 결실을 맺을 경우, 아마도 유례없이 크고 아름다운 잡지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듯 하다.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 수정 자유 / 영리불허 —

신파의 미덕 – <바보> [기획회의050904]

신파의 미덕  – <바보>

통상적인 의미와 실제 대상의 괴리를 느끼도록 하는 호칭들이 가끔 있다. 예를 들어서 ‘미친년’은 어떨까. 통상적으로는 어떤 여자가 뭔가 황당한 짓을 했을 경우 그냥 피식 웃으며 내뱉는 호칭이다. 하지만 원래 이 단어가 진짜로 대상으로 하고 있던 것은, 무언가 엄청난 비극적인 사건을 겪고 그 충격으로 인하여 실성, 진짜로 정신병리학적으로 큰 문제가 생겨서 동네를 배회하던 그 사람들이다. ‘지랄한다’, ‘병신 삽질한다’ 등 일련의 비속어들이, 다들 훨씬 더 비극적이고 끔찍한 상태인 무언가를 일상의 친근한 이미지로 자연스럽게 바꾸어 놓는다.

<바보>(강풀(강도영) / 문학세계사)의 첫 머리는 바로 이 지점을 한번 긁어주면서 시작한다. “어린 시절 어느 동네에나 하나쯤 있었던 바보.” 어라, 생각해보니 필자가 어렸을 때도 동네에 바보가 하나 있었다. ‘이런 바보 같은 놈’이라고 할 때의 바보가 아니라, 진짜 바보 말이다. 아니 더 자세히 생각해보니 이사 다니던 어느 동네에나 하나씩은 있었던 것 같다. 놀림 받고, 애들이랑 어울리는 어른. 지저분하게 하고 다니면서, 어떤 애들보다도 더 애들 같았던 사람들.

<바보>는 ‘<순정만화 씨즌2>’라는 다소 안전한 선택의 부제를 달고 미디어 다음에 연재되었던 작품이다. 이야기는 동네 바보 승룡이, 미국에 유학가서 피아노를 치다가 좌절해서 돌아온 지호, 승룡이의 친구이자 동네 양아치인 진수 등 여러 주인공들의 과거 사연과 현재의 응어리가 점차 풀려나가는 식이다. 그 방식은 무척이나 고전적이고 드라마틱하다. 엇나간 애정, 끈끈한 우정, 조건없는 희생 같은 구식의 감성은, 선천적 유전병, 어린 시절의 사고, 어린 시절의 약속 등 구식의 소재들과 만나면서 하나의 전형을 이룬다. 그런데 그것이 ‘지겹다’기 보다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재미로 녹아들어가는 자연스러움을 보이고 있다.

<바보>는 만화가 강풀(강도영)을 대중적 스타로 만들어준 <순정만화>,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연재했던 <미스테리 심리 썰렁물>(출간시에는 ‘아파트’로 제목 변경)과 마찬가지로 2권짜리로 묶여 나왔다. 항상 사전에 스토리를 완성하여 4개월 동안 집중 연재를 하고 수개월 휴식을 취하는 이 작가의 방식은, 무한 연재 속에서 스스로 망가지는 많은 연재만화들의 함정에서 의연하게 벗어나 잘 구성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좋은 작품 발표 방식이기도 하다. 전작의 인기에 버금가는 호응을 불러일으켰다느니, 곧바로 영화화 판권이 팔려나갔다느니 하는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들은 대충 넘어가더라도, 여하튼 이 작품의 특징과 미덕은 무척 분명하다. 형식적 특성인 칸 경계선을 흐리게 처리하고 그 대신 독백 대사로 연결하는 주관적 서술, 간혹 등장하는 스크롤 넘김 효과의 표현력을 활용하는 한 화면 이상 길이의 세로로 긴 칸(이것은 마치 책 만화의 경우 한 칸으로 두 페이지를 가득 채워서 시선을 제압하는 것과 비슷한, 아니 그 이상의 효과를 지닌다)은 이제는 굳이 다시 이야기하기도 뭣할 정도로 완전한 스타일로 완성되고 있다. 여러 주인공의 심리적 엇갈림에 의한 다중 시점 전개 역시 인간사의 감성적 면을 강조하는 이 작품에서 강한 효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어떤 형식적인 실험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결국 그 형식을 통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전달하여 독자를 휘어잡는가 하는 측면인데, 능란한 이야기 페이스 조절과 무엇보다 여전한 – 아니 한층 더 강력해진 신파 정서가 <바보>의 가장 큰 미덕이다. 이 작품에서는 누구하나 내심 순수함을 간직하지 않은 사람 없고, 다양한 인간관계의 엇갈림 속에서 모든 문제는 정서적인 방식으로 해결된다. 항상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개연성 없이 몰려오는 여러 비극 속에서 주인공들은 사랑과 우정 말고는 기댈 곳이 없다.

이런 각박한 현실 세상에서 그런 것이 가능하겠냐고? 그렇기 때문에 현실세계 속에 있으면서도 현실과 떨어져 있는 순수와 서정의 전도사가 필요하다. 바로, 바보 말이다. 바보 승룡이는 기본적으로 과거의 존재다. 정확히는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 성장을 그만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성장하면서 잊어버린 여러 가치들, 어릴 적의 어떤 빛나는 순간을 계속 현재진행형으로 기억한다. 작은별 행진곡이든, 동생을 돌봐줘야 한다는 단 하나의 약속이든 뭐든 말이다. 승룡이라는 바보라는 존재는 현실에서 잊어버린 소중한 무엇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나 다름없고, 그를 낙오자로 보지 않고 자신들의 거울로 받아들이는 순간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그것은 과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소중히 끌어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일종의 우화처럼 포장된다. 누구나 순수한 삶에 대한 애정을 되찾는 이 따뜻한 작품에서 (나름대로 사연은 있지만) 유일한 악역이자 삶의 회복에 실패하는 ‘사’장이라는 자가 이 작품의 매개체인 바보 승룡이와 유일하게 교류하지 않은 캐릭터라는 점이 가정을 뒷받침해준다. 그렇게 해서 이야기는 완성된다.

이 말은 반대로 하면 고스란히 작품의 약점이 된다. 기본적으로 과거와 순수를 매개로 해야 현실에서 깨달음을 얻도록 한다는 것, 무조건적인 – 따라서 비현실적인 – 감상주의를 통해서 인간사가 진행된다는 것은 지나치게 달콤한 환상이다. 심지어 비극이라 할지라도, 달콤한 비극적 환상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전작 <순정만화>가 다양한 남녀 간 사랑을 통해서 나름대로 사람 사이 현재에 충실한 솔직한 소통의 중요함을 자연스럽게 강조한 것에 비해서, <바보>는 작품의 줄거리에서 진행되는 감동 이상의 지속적인 무언가가 부족한 측면이 있다. 애초에 사회파 만화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온 작가의 이력으로 볼 때 아쉬운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재미와 감동을 부인하거나, 심지어 약간이라도 덜 즐겨야할 필요는 없다. 능란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따뜻한 감성의 완성된 이야기의 매력을 폄하하는 것은 절대 부당하다. <바보>는 재미있는 작품이고, 따뜻한 이야기가 그리운 모든 이들을 위한 멋진 선물이 되어줄 것이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