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에’를 통해서 기자의 전문성을 생각하다

!@#… 뭐! ‘모에’가 이렇게 건전무쌍한 개념인 줄,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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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모에를 소재로 기사를 쓴다면, 아무리 마감이 바쁘더라도 최소한 모에가 뭔지 한번 제대로 알아보는 정도는 했으면 좋겠는데. ( 단지 신문기사라는 이유만으로 이 설명이 ‘모에가 뭐에요? 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표준 대답으로 스크랩되고 돌아다닐 것을 생각하면, 참 세상 별 볼일 없다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 기자에게 있어서, 속보와 흥행이라는 공명심의 불길 속에서 가장 먼저 증발하는 것은 바로 전문성. 하기야 기자 뿐만이 아니겠지만.

—(3번째 리플까지 보고 보충설명 추가)—

!@#… 그럼 모에가 뭐냐고? 쉽게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히로스에 료코가 귀여워서 좋아하고 있다면, 그건 그냥 좋아하는 것일 뿐. 하지만 히로스에 료코라는 인물보다, 영화 <철도원>에서 커다란 오렌지색 조끼를 입고 있는 미소녀의 이미지가 눈앞에  집착한다면 뭔가 좀 다른 경지다. 아니 한발 나아가서 철도원이고 료코고 뭐고 간에, 아예 “단발머리의 귀여운 소녀가 커다란 오렌지색 조끼를 입고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집착적으로 불타오른다면 어떨까? 그것이 바로 모에. 모에는 특정 요소들에 대한 , 그리고 그 요소들의 조합에 대한 애정적 집착. 그 과정에서 개개 인격체나 캐릭터 자체는 오히려 뒷전으로 밀려날수도 있고. 그리고 그건 세부 요소로 환원될수록 확실해진다. 예를 들어서 미소년모에라고 한다면, 그다지 모에라고 명함 내밀기도 뭣하다. 안경모에, 고양이귀모에, 방울모에… 이 정도는 되야 좀 체면(?)이 산다. 위에서 어설픈 기자양반이 대충 쓴 것 마냥 귀여운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모에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귀여운 것이라는 개념을 구성하는 어떤 특정한 요소(세라복이라든지, 안테나 머리라든지, 뾰족한 덧니라든지)에 집착을 하는 것이 모에다.  

에반게리온의 ‘레이’라는 캐릭터를 좋아한다면, 그냥 팬일 뿐. 하지만 붕대를 맨 미소녀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이고, 하필이면 레이가 그 결정체이기 때문에 좋아한다면 그건 어엿한 ‘붕대소녀모에’. 이 사람은 아마도 수많은 만화, 애니, 게임 등 장르 대중오락문화를 샅샅이 뒤져가면서, 그 중 붕대를 맨 소녀 캐릭터를 찾아내며 애착을 보낼 것이다. 아마 그리고 붕대소녀는 자고로 이래야해(3분에 한번씩 아픔으로 얼굴을 찌푸려야 하며, 부상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서 활약을 벌이려다가 아픔으로 한번 넘어져 줘야 하며, 머리에 붕대를 맬 경우 머리카락 전체를 뒤덮어서는 안되고 이마와 한쪽 눈 정도까지만 덮어야 한다는 등…), 하는 나름의 공식을 만들어내기 시작할 것이다. 당연히 붕대소녀를 묘사한 각종 피겨와 게임, 만화책들을 긁어모으고 (문화평론가 아즈마 히로키의 용어를 빌자면, ‘데이타베이스적 소비’). 만화/애니/게임이라는 서브컬쳐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양적으로 비대해진, 기호와 상징의 홍수인 일본이기에 나올 수 있었던 현상. 페티시즘적 쾌락과 집착적 대중문화 소비의 화려한 만남.

설명이 어렵다면, 이렇게 쉽게 요약할수도: 80년대의 애니광들은 <오렌지로드> 마도카의 ‘팬’이었지만, 2000년대의 오타쿠들은 <오네가이 티쳐> 미즈호를 보며 ‘누님 모에’를 한다

나중에 또 덤으로 추가:

1) ‘모에’라는 단어를 감탄사로 쓰면, “나는 지금 맹렬히 모에하고 있는 중이다”라는 뜻의 약칭이 된다. 왠 오타쿠 캐릭터가 아이돌 콘서트장에 가서, “모에~!!!”하고 외치는 장면이 있다면 바로 그런 것이다. 만약 모에의 대상이 되는 캐릭터가 “모에~?”라고 귀엽게 한마디 불러준다면? 그건 “나에게 모에해주시지 않을래요?” 라는 말의 약칭이 된다. -_-;

2) 리플에서 pseudorandom님이 지적하셨다시피, ‘모에’ 행태는 실체를 획득할 수 없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실제로 획득할 수 있는 대상이면 가서 얻어내면 되는 것이지, 관련 굿즈를 사모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냥 팬으로서 상대의 전체를 동경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특정 요소 단위로 집착할 필요도 없고. 만화, 애니의 2차원 캐릭터(의 특정 요소들)에 모에하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 하지만 인기 없는 오타쿠들에게 있어서는, 3차원 물질계의 여성들도 이미 실체를 획득할 수 없는 먼 세상 신비의 대상이다.

3) 참고로, ‘모에’라는 단어는 “싹트다, 움트다” 라는 용어와 “불타오르다”라는 용어의 동음이의어 말장난이다. 오타에서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의미상으로는 불타오른다 쪽이 훨씬 적합.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연재중단의 논리.

!@#… 김은희의 <더칸> 연재중단 건과 관련해서.

http://jumosee.egloos.com/504110

http://www.manhwain.com/main.html?no=120

http://blog.naver.com/johnsilver9/20015555098

!@#… <더칸>이라는 작품을 특별히 좋아한 적은 없지만, <윙크>를 현재 구독하고 있지는 않지만, 연재중단이라는 것은 언제라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작가의지든 편집부 의지든.

!@#… 하지만 솔직히 <해와달>이 아이큐점프에서 연재중단 밀려났을 때보다 더 가슴아프다든지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안타깝지만, 그 결정에 이성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반대했지만, 그래도 납득은 갔습니다. 잡지니까요. 연재니까요. 고료가 들어가는 작업이니까요. 그나마 예고라도 있고 반항할 여지라도 있지, 영챔프에서 <맘보 파라다이스>, <그의 나라>가 사라졌을 때에는 참… 당혹스러웠죠. 하지만 납득은 합니다. 작품의 수준이 어떻든, 편집부와 ‘주독자층’의 수준이 모든 것을 결정할 따름입니다. 극단적인 비유로, 신일섭씨의 <코믹스> 웹진에서 연재하는 마고딕 작가의 그로테스크한 작품이 난데없이 <팡팡>에 연재된다고 칩시다. 당연히 밀려날 겁니다. 물론 애초에 장기적 포석을 못하고 근시안적이었던 편집부의 실수가 큽니다. 하지만 결국 밀려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작품이 좋든 나쁘든, 잡지는 자신의 성향을 가지고 다른 것을 밀어내는 것이 정상입니다. 문화적 종 다양성, 저는 200% 지지합니다. 하지만 일개 잡지가 그것을 맡아서 해줘야할 의무나 책임감을 바라는 것은 애초에 무리입니다. 그런 희생이 어디있습니까. 만화사랑의 이름으로 희생해야 하는겁니까?

!@#… 만화 팬 여러분, 만화 좀 그만 사랑하십시오. 사랑의 열기는 좀 덜 해도 되니까, 대신 차갑게 지갑을 여십시오. 10대 팬클럽들이 지갑을 열고 보이밴드들의 음반을 사재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의 모든 꽃미남들은 가수로 데뷔하기 시작했습니다. 초등생들이 부모를 시켜서 학습만화를 빙자한 아동 오락만화에 지갑을 열었습니다. 수많은 출판사들이 그쪽으로 달려들었고, 너도나도 제2의 그리스로마신화를 꿈꾸고 있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더칸>을 살리고 싶다면 <더칸>에 지갑을 여십시오. 그 중에서도, 시장성을 과시하는 쪽으로 여십시오. 예를 들어, 빌려보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빌려보는 것으로 증명되는 종류의 시장성은 용도가 제한되어 있어서, 적어도 잡지연재를 지속시켜주지 쪽에는 써먹지 못합니다. 돈은 없지만 사랑은 한다구요? 그렇다면 작가분도 돈은 없지만 사랑을 하시기를 – 즉 연재비를 포기하고 단지 만화사랑만으로 작품을 완간시켜주기를 간절히 기도해보시기 바랍니다.

!@#… 많은 팬들의 당혹스러운 점이, ‘만화사랑’이 모든 것을 정당화해주고, 또 ‘만화사랑’에 대한 보답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바란다는 겁니다. ‘사랑과 분노’가 아닌, ‘시장성’을 보여줘야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전설처럼 인용되곤 하는 말인 “일본의 어떤 출판사에서 500부 팔릴 내용이라도 만든다더라”라는 건, 그 500부로도 돈을 뽑을 만큼 운영을 짜게 하고 책을 비싸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는 곳은 한국에도 넘쳐납니다. 만화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시장성이 열악한, 시집들을 보세요! 비록 마이너하지만 나의 취향을 즐기고 싶다, 라면 그 취향이 산업적으로 버틸 수 있을 만큼의 돈을 소비해줘야 합니다. 완전히 오타쿠화되어버린 일본의 만화/애니 시장이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오타쿠들이 목숨 걸고 돈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취향을 지킬 – 즉 물질적 투자를 할 – 각오도 없으면서 나무에서 모든 것이 떨어지길 바라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겁니다. <더칸>이 나이대 때문에 윙크에서 밀려난다면, 나이대에 맞는 지면으로 옮기면 됩니다. <허브>라는 성인 순정지의 존재조차 모르는 자칭 만화팬들이 태반이지만. 나이대는 맞지만 장르 성향이 안맞는다면, 또 다른 방법들을 모색해야 되겠죠. 단행본 단위로 가든, 웹 연재로 돌리든, 사전 주문 동인지나 이슈 형태로 가든… 쉬운 길은 아니죠. 하지만 특정 지면에서 밀려났다고 해서 사라져버릴 만한 작품이라면, 사라질 만한 정도 밖에 안된다는 것 뿐입니다. 독자층이 확고하고 그 독자층이 바로 시장층이 되어준다면, 어떤 형태로 가더라도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 서명운동으로 10만명을 모으는 것보다, 단행본 판매부수 1만권을 해주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됩니다만. 아니, <윙크> 구독 부수를 단 5000부만이라도 더 늘려주고, “<더칸>때문에 윙크를 사봅니다! 화이팅!”이라고 한마디라도 게시판에 남겨주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되지요. 별로 어렵지도 않고 귀찮을 것도 없습니다. 윙크 항의 서명운동을 할 것이 아니라, 연재를 못하게 될 5-10권까지가 담긴 박스세트를 사전예약 판매를 하십시오. 애장판 가격으로 해서, 1000세트만 사전판매 달성한다면 연재지면이 생길 겁니다. 이런 것이 ‘무언가를 이루어낼 수 있는 운동’ 입니다. 서명운동보다 불매운동, 불매운동보다는 구매운동, 구매운동보다는 자연스러운 구매활동이 필요하다는 무지하게 간략명쾌한 논리를 좀 효과적으로 설파하고 싶습니다.

 

— 2005 copyleft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한국만화는 볼 것이 없다고 하는 바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 주모씨님의 글에서 트랙백. “한국만화 볼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이상한 일이다. 나는 별 문제없이 제가 즐길만한 ‘우수한’ 한국만화들을 잘만 읽고 있는데. 현재 출간중인 것들이든, 과거의 명작들이든. 한국만화가 일본망가에 비해서 우수하다 또는 열등하다? 그런 대단한 전체 차원 같은 건 알 길이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엄마가 더 좋아, 아빠가 더 좋아 만큼이나 철학적인 질문.

그냥, 만화라는 커다란 풀 속에서 볼만한 것을 뽑을 때, 한국 만화가 상당 비율 들어간다는 것이 내게는 너무 당연하다. 한국 독자이다 보니, 한국 특유의 요소들에 대한 코드 공감도가 높으니까. 예를 들어 <츄리닝>이나 <트라우마>의 군대개그들은 어느 다른 나라 만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소중한 문화적 종 다양성이다. 아 물론 한국이라는 현실사회 – 아니 현실 자체를 별로 안 느끼고 사는 사람들은 경우가 다르겠지만.

물론 장르에 따라서 일본망가가 압도적으로 더 강세인 경우도 있고, 미국만화가 강세인 경우도 있다. <드래곤볼>의 유구한 전통위에 서있는 ‘점프식 스펙타클 격투 성장물’이나, 요리만화류 같은 소위 ‘전문소재 만화’가 일본의 주류 잡지연재 시스템에서 가장 효과적/효율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이제는 상식이다. 적어도, 만화가 어쩌느니 떠들 수 있으려면 그 정도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어야겠지. 미국이 수십년간 고안한 이슈 단위 분업화 제작시스템보다 더 슈퍼히어로물을 효과적으로 뽑아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예외적인 개별 작품들은 나올 수 있지만, 하나의 ‘경향’은 그렇지 않다. 비록 만화가 상대적으로 덜 자본 소모적인 대중문화장르라고 할지라도, 시스템의 힘이란건 그런거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장르적 장점은?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기회에 따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그런데 “생각없이 때려부수면서 괜히 지적인 풍미도 살짝 넣어주는 SF액션 영화” 라는 장르에서 헐리웃 블록버스터가 우위를 지닌다고 해서, 미국영화 이외의 것들은 모두 ‘볼 것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생각없이 때려부수면서 괜히 지적인 풍미도 살짝 넣어주는 SF액션 영화”만 보는 것은 뭐 취향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그것이 영화의 전부라고 주장하면 그건 그냥 미친놈일 뿐. 심지어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아아…한국영화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라면서 짐짓 걱정해주는 제스쳐까지 나오면 그건 정말 구제불능일 뿐. 뭐랄까,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대단히 좁고 특정적인 취향을 성급하게 판 전체로 일반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그 범주에서 벗어나면 인정해주지 않아버리고. 이런 부류를 일반 용어로는 ‘초딩’이라고 하기도 하고, ‘찌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마 현재 한국 – 아니 세계 인구의 95.3204%를 차지하고 있지 않을까 가설을 세워본다. 통계적으로 검증할 생각은 당연히 없다.

식당에 비유를 하자면… 오로지 햄버거만을 세상 음식의 전부로 생각하면서, “이 동네에는 먹을 것이 없어”라고 투정하는 회사동료가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 동네는 사실 바지락 칼국수 전문이다! 그렇다면 보통은 이렇게 말해주기 마련이다: “야 그런 것도 좋지만, 맨날 편식만 하지 말고… 이 동네는 바지락 칼국수가 죽여주거든? 한 번 먹으러 가자!”. 그 결과 그 친구는 어쩌면 새로운 맛의 세계에 눈을 뜰지도 모른다.

!@#… 칼럼이나 리뷰 등의 저널리즘으로서 만화 글쟁이들이 해줘야 하는 역할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에서 <배가본드>가 일본에서만큼 안팔린다고 해서 한국만화판이 존내 망해간다고 확신하는 바보들에게 제발 만화 선택의 폭을 좀 넓혀주는 것. “한국만화 사랑하자!” 뭐 이런 것이 아니다. 제발 만화 좀 제대로 즐겨봐라, 사실 너 같은 생활이면 이런 만화가 훨씬 더 재밌을 것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도록 좀 도와주고 한번 시도해보라고 용기를 북돋아주마, 뭐 그런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스스로 참 여러 장르와 취향의 만화들에 익숙하고 또 즐겨야만 한다. 편협한 미식가가 소개하는 편협한 맛집소개가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 그래도 결국 열쇠를 쥔건 독자들 자신이다. 한국만화가 볼 것이 없다는 엄청난 주장을 남발하기 전에, 만화라는 거대한 카테고리가 아닌 내가 좋아하는 어떤 취향 장르라는 작은 카테고리로 줄여서 생각하는 법을 좀 익히기를. 햄버거가 지겨우면 밥먹는 걸 포기하는 게 아니라, 하다못해 떡라면으로라도 바꿔볼 수 있도록 말이다. 어쩌면 그 떡라면이 바로 신이 내린 궁극의 떡라면일수도 있다. 그정도까지는 아니라도, 적어도 지금의 나 자신에게 가장 맞는 맛있는 물건일 수 있다. 사랑의 실의에 대해서 느껴보고 싶다면  30대 1 구도의 주류 하렘물을 찾을 것이 아니라 애정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은 단편집을 골라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한국이라는 이 현실공간의 정치적 현실에 분개하고 싶다면 <쿠니미츠의 정치> 같은 경파물보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지 않는다> 같은 스릴러가 더 효과적이다. 전문만화를 통해서 전문 지식을 쌓는다고? 그럼 아예 교양 정보만화를 보면 될 것 아닌가. <십자군 이야기>가 <마스터키튼>보다 덜 재미있는 것도 아닌데(적어도 나라는 독자에게는). 한국만화가 볼 것이 없는 게 아니라, 일본 주류 장르만화가 아니면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아예 만화가 아니다 라고 먼저 굳건하게 가정을 세우고 들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안얹어도 된다) 생각해보기를.

별로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다. 재미있는 것이 없다고 단언하고 스스로 재미를 포기해버리지 말고, 재미를 좀 적극적으로 추구해보라는 말이다. 그 과정에, capcold가 글쟁이로서 도와줄테니.

 

— 2005 copyleft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전쟁이라는 지리멸렬한 파멸 – <십자군 이야기2> [기획회의050804]

!@#… 2년이 걸리고, 200페이지를 새로 그리고 나서야 나왔다는 2권. 3권에서는 그 콤비네이션을 따르지 말아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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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지리멸렬한 파멸 – <십자군 이야기2>

성격 안좋고 힘센 나라가, 자신의 잇속을 위해서 마음대로 다른 나라를 침공하고는 그것을 ‘전쟁’이라고 불렀다. 그 다른 나라의 지도자도 하필 상당히 문제많은 인간이었기에, 그 명분은 무려 민주화였다. 여하튼 침략은 전쟁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썼고, 잠시의 화려한 쑈를 거치더니 이내 전쟁은 끝났다. 아니 단지 이번에도 일방적으로 끝났다고 선포를 당했다. 실제로는 전혀 끝나지 않아서, 그 뒤 2년여가 다 지나도록 아직도 세계 도처로 무대를 확장하고,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추악한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민주화 해방’ 되었다는 이라크는 국가 분열과 내전의 위기에 몰렸고, 런던에서 많은 안타까운 죽음을 낸 지하철 폭탄 테러가 일어나고… 모든 것은 이 지리한 과정의 일부에 불과하다. 전쟁을 처음 시작하는 책동가들은 모든 것이 자신들의 승리로 마무리되어 깔끔하게 털고 일어설 것을 항상 계산하지만, 실제로는 길고 긴 늪으로 빠져들어 버린다. 미국의 또다른 현대사에 길이 남을 전쟁 책동 공작이었던 베트남전으로부터 인류가 얻은 교훈 따위는 전혀 없는 듯 하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전쟁이라는 충돌형태의 원인에 대하여 날카롭게 분석해서 독자들을 전율시켰던 한 만화가 있었다. <십자군 이야기>라는 제목의 이 만화는, 중세 십자군의 ‘성전’을 통해서 누군가에 의해서 전쟁이 책동되고,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동원되고, 그 와중에서 누군가가 희생당하고 누군가는 잇속을 챙기는 메커니즘을 해학적으로 풀어놓았다. 그리고 2년여가 흐른 후, 여전히 전쟁이 진짜로 종식될 가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오랫동안 고대했던 속편이 나왔다. <십자군 이야기2>(김태권 / 길찾기)는 전작이 끝난 부분에서 새로운 시작을 한다. 1권이 군중십자군의 우매하고도 비극적인 개전을 통해서 십자군 전쟁의 전체 패턴을 압축적으로 묘사해냈다면, 이제 2권에서는 본격적으로 정규군에 의한 전쟁이 시작된다. 귀족 제후들, 종교지도자들이 정식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동쪽으로 간다. 군중 십자군이라는 무지한 욕심꾼들을 슬기롭게(?) 극복한 동방 로마제국은 이번에는 아예 자신들을 통째로 먹어 삼키려는 진짜 침략자들을 맞이하게 된다. 이슬람은 오합지졸 군중십자군을 퇴치하고는 방심하다가, 예루살렘까지 일시적으로 빼앗기는 패배를 겪는다. 그리고 물론 그 와중에는 정복에 눈이 먼 십자군이 자행하는 비인간적인 학살과 (문자 그대로) 포식에 희생 당하는 불특정 다수의 주민들이 있다.

2권의 핵심 정서를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주인공은 바로 기사 보에몽이다. 그는 강력한 무력과 높은 지도력으로, 전형적인 전쟁 서사극 주인공의 됨됨이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것은, 멋진 영웅담과는 무척 거리가 멀다. 승리의 순간에 이야기를 끝내거나, 비장한 죽음으로 여운을 남기며 나머지 이야기를 바람속에 흐트려놓을 수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전쟁에 쉬운 결말 따위는 없다. 당초 십자군의 명분이었던 예루살렘 탈환을 이루고 난 후에도, 십자군은 끝나지 않는다. 1차 십자군의 강력한 군사적 리더 보에몽이 완전히 몰락해버리고 나서도, 끝나지 않는다. 끝끝내 질리지도 않고 계속 지리멸렬하게 계속 꿈틀대는 전쟁의지 속에서, 당초의 책동가들도 이미 스스로 예상한 이득의 궤적에서 벗어난지 오래다. 앞으로 훨씬 더 많은 횟수의 “제*차 십자군 원정”이 이어질 것을 역사적 지식으로 알고 있는 현대 독자들은 정말이지 질려버릴 노릇이다. 전쟁은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예상치 못한 요소들이 점차 붙어나가면서 결국 헤어나오기 힘든 커다란 수렁이 되어버린다.

전작의 프롤로그가 서방세계의 중세 이전 전쟁사를 다루었다면, <십자군 이야기2>는 우리가 ‘이슬람 세계’라고 부르는 그 중동 공간에 존재했던 이슬람 종교 이전의 문명사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현재까지도 사람들은 종교가 어쩌니 하고 명분을 세워서 싸움을 찾고 있지만, 사도 마호멧 이전의 문명사도 사실 별다를 바가 없다! 원래부터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는 야욕을 엔진으로 하는 전쟁들이 넘실댔으며, 그 속에서 균형과 부조화가 번갈아가며 세상을 지배했다. 1권에서만큼 프롤로그와 본 내용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느낌은 적지만, 십자군에 맞서는 이슬람 진영의 처지를 좀 더 본격적으로 집중할 3,4권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연결다리를 시사하고 있다.

전작 이후로 흘러간 2년여의 시간은, 작가의 표현능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고전적 드라마와 현대적 풍자, 극중 이야기와 작가의 직접 개입을 넘나드는 서술 솜씨는 한층 능란해졌고, 그림 역시 더욱 통일성 있게 다듬어졌다. 각종 해학적 농담은, 더욱 농밀하면서도 전작에서 가끔 보였던 지나친 집착에서 벗어나 양념의 역할로 좀 더 확실히 자기 자리를 찾고 있다. 200여 페이지를 다시 그려야 했다는 작가의 후기가 그간의 과정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줄 뿐이다. 지적인 성향 역시 여전해서, 작품 뒤 빼곡이 차있는 참조도서에까지 해설을 한마디씩 더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물론 아직 좀 더 다듬어졌으면 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예를 들어 정사와 야사, 가설을 만화 자체의 서술 속에서 뚜렷이 구분되게 묘사해 내는 방법론이 더욱 연마되어야 한다.  분명히 극중 십자군이 벌이는 이야기는 것을 전제로 하는 작가의 여러 현실풍자적 해설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군중십자군의 은자 피에르가 1차십자군에서 롱기누스의 창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그 피에르와 동일인물이라는 가설을 실제 극 속에 풀어 넣음으로서, 픽션의 요소들이 녹아들어가버린다. 그리고 모든 것을 직접 현재진행형의 사건이자 사실로서 보여주는 관행에 익숙한 만화라는 매채에서, 그것은 자칫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는 인상, 나아가 전체 내용의 신뢰성을 흐리는 폐단을 낳아서 작품의 큰 주제와 맥락에 누가 된다.

분명히 <십자군 이야기2>는 이 시리즈의 전작을 뛰어넘는 명작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또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십자군 이야기3>이 더욱 뛰어난 모습으로 돌아와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역시, 인류가 조금만 더 현명해져서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과 메시지들이 하나도 신선하고 충격적이지 않은 조화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이상주의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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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야채와 과일 사이의 토마토 – <한국 일본 이야기>[으뜸과 버금]

!@#… 여러가지 이유로, 업데이트가 뜸한 상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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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채와 과일 사이의 토마토 같은 – <한국 일본 이야기>

<한국/일본 이야기>는 한 ‘2.5세대’ 재일교포 유학생의 한국 유학 생활과, 이전의 경험 및 유학 과정을 통해서 정리하게 된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삶의 공간에 대한 생각들을 담아낸 만화다. 원래는 인터넷 개인 홈페이지 ‘구미의 유학만화’(http://www.koomi.net)에서 연재되었던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단행본이다. 물론 연재작의 단행본이라고는 하지만,, 캐릭터의 독창성에 대한 지적을 받은 후 거의 모든 원고를 다시 그려냈으며, 책을 위해서 완전히 새로 만든 에피소드도 다수 있기 때문에 단행본으로 보는 것이 충분히 의미있다. 또한 유학생활의 경험담을 중심으로 하여 작년 히트작 <요코짱의 한국일기>와 비슷한 느낌을 줄 수도 있는 원래 연재와는 달리, 단행본은 유학생활 이야기의 비중을 줄이고 중간자, 또는 경계인으로서 바라보는 한일 차이와 관계에 대한 생각에 크게 집중하고 있다.

2.5세대, 즉 2세대 교포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3세대도 아닌 2.5세대인 작가가 경험하면서 살아온 에피소드들인 셈이다. 그리고 이야기하는 방법은 결코 무겁거나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고, 그림일기를 연상시키는 가벼운 듯한 그림체와 무릎을 치게 만드는 일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전반부를 차지하는 유학 이야기와 생활경험에서는 주로 코믹한 에피소드, 오해와 호기심을 위주로 진행되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한국의 긍정적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고 이해와 화합을 강조하는 교훈적인 내용이 되어가는 흐름으로 가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 수년 전 이 땅의 대다수 편협한 국수주의자들에게 자위행위를 시켜줌으로써 히트를 치고 그 저자를 출세가도로 올려놓았던 출판쓰레기 <일본은 없다> 식의 ‘우리는 잘났다 그 놈들은 변태다’ 식 서술과는 완전히 차원을 달리한다. 일본도 한국도 둘다 애정의 대상이고, 무조건적인 서로 모든 것을 용서해라가 아닌 서로를 이해하는 것의 즐거움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설파하고 있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뚜렷한 메시지를 위해서 진행되어 가는 단행본으로서의 완성도를 위하여 버리고 간 잔재미가 적기 않기 때문이다. 연재 당시 돋보였던 몇몇 에피소드들이 단행본의 일관성을 위해서 빠졌고, 대화형 글과 만화/에세이의 혼합, 각종 소식들이 자유롭게 섞여서 유희적 분위기를 잔뜩 자아냈던 홈페이지의 매력은 만화만 선별하여 빼곡이 담아놓은 단행본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책 말미의 교훈성이 왠지 닭살스럽게 느껴지는 독자들도 상당할 정도로 전반부 ‘유학생활’ 이야기와 그 이후의 교포 이야기 사이의 연결고리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출판 기획에 있어서 아쉬움으로 남는 대목이다.

“교포는 토마토야. 과일 나라에서 자라온 토마토. 오늘날 나는 과일이 아니라고 느꼈다. 과일나라에서 토마토를 먹을때는 소금을 뿌리는데, 생긴 그대로를 인정받고 싶었던 토마토는 야채 나라에 갔어. 조국에 간거지. 하지만 야체 나라는 토마토를 과일 같이 취급할 때가 있었다. 게다가… 설탕을 뿌리는 습관이 있었다.”

작가의 아버지가 해주었다는 이 대사가 바로 작품 전체의 세계관을 명확하게 대변해준다. 이런 즐거운 작품을 통해서 토마토가 과일이자 야채로서, 과일과 야채를 이어주는 다리로서 좋은 역할을 해줄 수 있도록 격려를 보낸다.

[으뜸과 버금 2005.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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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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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불법스캔에 관한 잡설.

!@#… 만화 불법스캔에 관한 capcold식 잡설. 주모씨님의 블로그에서 트랙백합니다.

!@#… 뭐가 왜 불법이다, 하는 식의 이야기는 굳이 꺼내기도 피곤하니까 넘어가겠습니다. 지금의 대처방식이 엉터리다, 라는 이야기는 주모씨님이 이미 했으니 그것도 넘어갑니다. 다만 제 생각에는 불법스캔도 사실 그 속에서 여러 범주로 나누어지고, 각각 효과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보기에 약간 실용적 잡설.

1) 출판물 스캔본: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불법스캔 층과 실제 만화 독자층이 크게 겹친다고 믿는 겁니다. 하지만 그건 대표적인 근거없는 두려움일 뿐입니다. 연령대나 장르 취향 정도는 겹칠지 모르지만 말이죠. 첫째, 스캔 하는 사람들은 제가 관찰한 바로는, 자기 책 사다가 스캔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스캔하면 어차피 책이 거의  망가지니까요. 결국 어딘가 대여점에서 빌려온 책을 쓰죠. 즉 어차피 불법 스캔하는 사람들을 고소해도 책 사는 사람이 위축된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둘째, 그렇다면 불법스캔을 보는 사람들은 불법 스캔본이 없어지면 책을 사볼 독자들인가? 그건 반반, 모르는 일입니다. 한가지 확실한건, 불법스캔본을 못본다고 화를 내며 길길이 뛸 사람들은 어차피 ‘굳이’ 서점에 나가고 인터넷 주문을 해 가면서 그 만화책을 사볼 수고를 하는 사람들과는 무척 거리가 멀다는 겁니다.

즉, 두려움을 버리고 열심히 법대로 밀어붙이면 됩니다. 유통은 단속하고, ‘제작’한 사람은 고소하는 겁니다. 다만 고소의 경우, 고소함으로써 뭔가 물질적인 수익이 있어야 파파라치든 법무사든 뭐든 움직입니다. 적발시 상금, 고소를 할 때 요구할 합의금에 대한 기준, ‘누구를’ 고소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 등을 명확히 세우는 것이 중요하죠. 아 또한 합의금을 받아낸 것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것도 필요합니다. 그 대상이 중고생들이 대부분이라서 애매하다는 것은 변명일 뿐입니다. 중고생도 충분히 위법할 수 있고, 따라서 합의금을 낼 수 있습니다. 형사처벌이 아니면 사회적 물의랄 것도 없죠.

2) 연재 번역: 국내에 아직 안들어온 외국 연재본을 받아서 번역하는 사람들도 불법적이기는 마찬가지. 매니아들이 자국에 금지된 문물을 어떻게든 접하기 위해서 자행하는 불법이야 낭만적 동정표라도 얻을 수 있지만 4-5주만 있으면 어차피 국내 잡지에서, 두어달만 있으면 단행본으로도 볼 것이 확실한 내용들을 공개적으로 뿌리는 것은 확실히 좀 이상하죠. 보통은 그 작품에 대한 애정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조급증을 키울 뿐. 이쪽은 단순 스캔과는 달리 상당한 고급 두뇌노동(?)과 포샵질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니만큼, 정중한 단속안내를 날려주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제재효과가 있습니다.

3) 원서: 번역하지 않고 유통되는 연재분의 경우는 어차피 외국에서 만든 불법자료들이기 때문에 제작을 금할 방법따위는 애초에 없고, 국내 저작권 홀더의 권한 역시 한국어판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단속권 없음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어차피 그 해당 외국어(주로 일어)를 할 줄 알아야 즐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제한적이죠.

!@#… 그런데 이런 아이디어들은, 원래 그쪽(모 단체)에서 월급받고 내야하는 겁니다. 또는 월급 받는 사람들이 내주거나. -_-; 왜 ‘쥐뿔도 아닌’ 제가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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