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속에서 부유하기

<코스모스> 속에서 부유하기

신인 만화작가가 데뷔하는 방식에는 다양한 경로가 있겠지만, 가장 놀라움을 안겨주는 경우는 어느 순간 짦막한 단편으로 세상에 선보인 후 오랫동안 숨겨져있다가 온전한 작품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실력있는 신인을 새로 발굴한 듯한 만족과, 면식있는 작가의 성장한 모습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들을 ‘중고신인’이라는 말로 폄하하기도 하지만, 작가적 고민으로 인하여 스스로 만족할만한 역량을 쌓을 때까지 자진해서 다시 축적의 길로 돌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결심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성준의 <코스모스>는 이러한 과정의 결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특이한 사례가 될 것이다.

본 작가의 공식적인 데뷔는 97년 봄, <빅점프>에 단편이 입선했던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필자가 김성준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1997년, 제1회 동아/엘지 국제만화전에서 수상작에 올라와있던 <잠자리는 없다>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보통 공모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신인들이 기발하지만 정리되지 않은 아이디어로 특징지어진다면, <잠자리는 없다>의 경우는 오히려 흔한 SF적 발상이지만 잘 정리된 안정적인 연출으로 필자의 시선을 끌었다. 오토모 가츠히로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화풍이었지만, 색채의 연출 활용 등에서 스타일리스트로의 성장가능성이 점쳐지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미 충분히 상업지에서 정식데뷔를 할 수 있는 실력이나 감수성을 갖추었음에 분명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봐도 연재 소식이 들리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잊혀져갔다. 그런데 2001년, 다시 동아엘지 공모전에서 낮익은 이름, 하지만 그림의 질감은 사뭇 다른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본선진출작에 걸려있던 <난...>이라는 단편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잊을 만할 때인 2003년, <배바라기>라는 작품으로 다시한번 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같은 해, 서울애니메이션 센터의 출판제작지원 대상작 명단에서 김성준이라는 이름을 발견했고, 결국 이렇게 정식 출판 데뷔를 하게 된 것이다. 앞의 두 단편을 포함한 본서 <코스모스>의 탄생배경이다.

<코스모스>는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작가가 그린 7편의 단편들이 하나의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연결되어 있는 구성을 지니고 있다. 각각의 작품은 화풍이나 이야기형식, 그리고 분절성에 있어서 독립된 단편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발생한 여러 에피소드들이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다. 덕분에 독자는 시작하는 첫 에피소드에서 난데없이 4명의 주인공들이 한자리에 처음 맞닥뜨리는 상황 속으로 던져지며, 그 주인공들만큼이나 어리둥절하고 난감해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에피소드 속에서 이들의 과거 관계를 조금씩 엿보며, 결국 마지막에 가서야 수렴된다. 이것은 분명히 매우 불친절한 방식이며, 창작자도 수용자도 편하게 뒤로 기대어 쉴 수 있는 여지를 두지 않는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하지만 동시에 쉽게 버릴 수도 없는 인연으로 서로 연결되는 두 쌍의 남녀, 그리고 그 남루한 현대남녀들의 사랑, 꿈, 환상의 담담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본작의 연출방식 역시, 친숙한 무언가를 제시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기대를 저버리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일견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필두로 90년대 후반 유행한, 독백조의 관념적 나레이션이라는 전통을 이어가는 듯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그러한 류의 핵심적인 특징인 ‘쿨’한 성격이라기보다는 단지 상호관계에 미숙한 사람들이라는 인상이 앞선다. 상황과 분위기, 인물들은 하나로 섞여들어가기보다는 마치 각각 다른 레이어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한 거리감을 만들어낸다. 리얼한 묘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단지 환상 속의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만이 아닌 작품 전반에 걸쳐서 느껴지는 정서다. 나아가, 만화에서 무언가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야기 자체의 드라마성과 화풍을 통한 정서전달이라는 측면을 볼 때, 작가가 추구한 것은 오히려 이야기 자체의 정서전달과 화풍의 드라마성으로 생각될 정도다. 다시 말하자면, 대사와 드라마 전개는 인과에 의하기 보다는 정서적 흐름에 따라서 여러 주인공들 사이를 누비고 있고, 오히려 시각적 요소들이 다양한 화풍과 상황들을 넘나들며 어떤 특정한 전개양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각 에피소드별 주인공의 전환이나 소제목을 통해서 드러나는 전체 정서의 방향잡기, 만화화풍이나 이야기서술 방식의 변화에서 나타나는 흐름 역시 시간과 인과를 의도적으로  파괴해 나가며 진행된다. 속칭 실험 만화들이 시각적 파격에 대한 집착으로 흐르기 쉬운 것에 비해서, <코스모스>는 이야기 서술 자체를 파기하지 않고도 다양한 층위에서 파격을 실험하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성공적이고, 때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 때로는 신선하고, 때로는 작위적이다. 하지만 그 도전정신 자체는 집요하리만큼 일관적이다. 

첫 이야기인 <올리브그린>에서 주인공인 시우, 연희, 은정, 지철은 서로 만난다. 네 명 모두의 시각에서 각각 그 만남은 묘사되며, 지난날의 이야기들이 이어질 것을 예고한다. 여기에 이어지는 <난...>에서 시우와 연희의 첫만남이 공상속의 지구파멸과 정체성의 이야기로 유머러스게(?) 묘사된다. 그리고 시간은 더욱 거슬러 올라가서, 연희가 상징물처럼 착용하고 있는 돌고래 목걸이를 처음 줍는 것으로 시작하는 <바다가 오다>의 연희와 은정의 취중환상으로 이어진다. <꿈속의 여인>에서 지철의 성적 환타지가 앞의 이야기와 연결되며, <나의 거리>에서 은정을 향한 지철의 마음이 아예 만화의 형식을 벗어던지고 직접 묘사된다. 이 낯선 변화가 끝난 후 다시 만화로 돌아온 이야기인 <배바라기>는, 4명의 주인공을 벗어나서 한 할아버지와 손녀의 비극적인 이야기로 건너뛰며, 연희의 돌고래가 가지는 ‘바다를 향한 탈출’이라는 자유로운 해방의 이미지와 현실에서의 비극적 결말을 내포한 상징을 완성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난교 그리고 바다>의 소설체를 통해서 결국 예정된 결말을 향해서 달려간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지나간 후의 에필로그 <핑크하우스>로 이후를 열어놓으며 이렇게 작품은 완전히 끝을 맺는다.

작가의 아직 정리되지 않은 실험정신이나 실체를 알기 쉽지 않은 –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전형적인 관념적 흐름은 앞으로 차차 풀어나아가야할 과제다. 화풍에서나 이야기에서나, 자신이 영향받아온 특정 만화나 소설, 영화 작품들의 흔적이 완전히 소화되지 않고 일부분에서 날것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도 좀 더 시간을 가지고 극복해 나아가야할 부분이다. 나아가, 표현이라는 측면과 독자와의 소통이라는 측면 사이에서 가장 합리적인 균형을 만들어나가는 것은 현실과의 타협이라기보다는 작가로서의 성장의 척도에 가깝다. 하지만 이제 막 스타트를 끊은 재능있는 신인으로서, 이번 작품이 부끄럽지 않은 데뷔작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실 권말의 서평에서 추구해야 할 목적은 본작을 조금이나마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도록 정보와 가이드를 제공하는 것이고, 앞에서 그 것을 충족시켜보고자 한두마디 늘어놓은 셈이 되었다. 하지만 필자의 진심은, <코스모스>의 경우 이런저런 설명들을 살펴보면서 논리적인 해답을 찾아내기 보다는 오히려 처음 볼 때의 그 거리감과 불편함을 더욱 즐겨볼 것을 바라고 있다는 쪽에 가깝다. 그것이 이야기성과 실험성 사이에서 새로운 균형을 추구해보려고 하는, 오랜 제작기간을 들여서 만든 신인작가의 연작 작품의 매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즐기는 방식이다. 작품의 마지막 공간이 그림속에 있고, 그 공간의 그림이 다시 그림속에 있는 무한반복의 라스트 장면은 우리로 하여금 작품과 현실의 세계 사이에서 잠시 부유해보며 여운을 느껴볼 것을 권유한다. 그리고 그 여운이, 작가의 다음 작품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

 

김낙호
만화연구가, ‘두고보자’ 편집위원

20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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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출판된 책 속에 들어간 작품평입니다. 당연히 찬란한 주례사… 그러려니 감안하고 읽으시길;;)

어떻게 사랑하게 되는가 – 강풀의 <순정만화> [으뜸과 버금 0403]

사람과 사람은 어떻게 사랑하게 되는가 – 강풀의 <순정만화>

김낙호 (만화연구가 / 웹진 <두고보자> 편집장)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모르겠다. 아마도 피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뜬구름 잡기만이 가능할만한, 엄청나고도 무의미한 질문이다. 하지만 질문을 살짝 바꾸어보면, 모두의 관심사로 탈바꿈한다: “사람과 사람은 어떻게 사랑하게 되는가?”. 강풀이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져있는 강도영의 <순정만화>는 바로 이것에 관한 따뜻한 이야기다. 

  <순정만화>는 잘 알려져있다시피 <미디어 다음>에 연재중인 만화로, 이 가운데 전반부에 해당하는 20여 화가 문학세계사에서 최근 출간되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미디어다음이라는 막강한 인터넷 포탈의 힘이 아니더라도, <순정만화>는 어차피 히트를 기록했을 법하도록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만한 요소들로 가득하다. 작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극장에서 커플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솔로들의 저주를 한몸에 받은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그 ‘어떻게’라는 과정은 다양하게 펼쳐놓는 것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재미를 준다. 그리고 그 다양한 우여곡절, 여러 인연과 사연들이 서로 연결되고 흩어지는 흐름이 결국 큰 맥락에서는 사랑이라는 큰 차원으로 공통점을 지닌다는 것을 독자들이 깨닳을 때, 더 이상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지 않고는 못배긴다. 

  하지만 누구나 알만한 이런 큰 원칙을 좋은 작품으로 소화해내는 것은, 역시 작가 자신의 능력이다. 자신의 사이트 강풀닷컴을 비롯해서 여러 온라인 만화지면을 통해서 수련된 연출호흡은 모니터 친화적이며, 동시에 인터넷 독자들의 독서 및 반응 패턴을 정확하게 맞추어주고 있다. 한 회의 연재분량은 하나의 이야기를 에피소드식으로 끊어나가며, 그 속에서 자기 완결적인 기승전결으로 사람이 만나고 사랑이 깊어지는 과정을 묘사한다. 그 이야기는 결코 지나치게 장황하게 나아가지 않고,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방식 보다는 한 페이지 안에서 마우스를 움직여 ‘스크롤’해도 짜증나지 않을 정도의 길이를 취하고 있다. 나아가 작가는 단지 수평적인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늘어놓는 패턴에 함몰되지 않고 연속극 방식의 내용연결로 이야기의 전개를 축적하여 점점 몰입도를 높여나가는 방식을 도입했는데, 온라인 만화 특유의 짧은 호흡을 보완해나가는 매우 효과적인 방식인 것이다. 말하다 보니 대단히 어려운 개념같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결국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힘을 잘 다루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능숙하고 잘 만든 만화라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과연 온라인 연재시에 <순정만화>를 수작의 반열에 올려주었던 여러 장점들이 하나의 단행본으로 묶여져 나올 때 과연 살아있을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우선, 다음 연재분을 기다리게 만드는 이야기꾼의 힘이 다음 페이지면 다음 이야기가 있는 단행본에서도 통할 것인가. 또한 마치 가려진 부분들을 조금씩 펼쳐보는 듯한 재미를 주던 한 페이지 내에서의 스크롤 방식이, 여러 페이지로 분절된 책 속에서 과연 매력을 발할 것인가. 나아가, 모니터 화면의 저해상도 불빛에 맞추어 놓은 여유로운 컬러 그림과 경계없는 칸의 매력이 종이 위에 빽빽하게 박혀서도 그 투박한 멋을 발휘할까.
  책을 펼쳐본 결과,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재미있었다. 이때, 필자는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하는가’의 기술 그 이상으로,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 자체의 힘이 강력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좋은 만화의 진정한 힘,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덕분에 필자도 이 소박한 사람들의 소박한 사랑 이야기의 다음이, 궁금해 미치겠다.
[으뜸과 버금 200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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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분량도 capcold답지않게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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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 FIVE – 밴드 만화의 미덕 [으뜸과 버금 0402]

TAKE FIVE- 밴드 만화의 미덕

김낙호 (두고보자 편집위원)

이야기만화에는, <드래곤볼>, <슬램덩크>등의 대형 히트작으로 대표되는 소년만화라는 커다란 장르가 있다. 주인공의 성장이라는 중심줄거리를 전개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시련과, 그것을 함께 극복하도록 돕는 동료들을 얽어넣는 공식으로 진행되는 전형적인 주류장르다. 이 장르에서 강력한 적과의 대결은 필수적이며, 동료들을 모으기 위해서는 멋진 명분이 전제되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지구의 평화를 위협하는 외계의 강자들, 그리고 그것에 맞서기 위해서 뭉친 주인공과 친구 용사들… 이 결합하면 <드래곤볼>이 되는 이치인 것이다. 이처럼 지구, 나아가 전 우주를 걸고 맞짱 싸움을 벌이는 환타지물도 있지만, 만약 나름대로 현실적인 환경설정 속에서 그런 재미를 만들어 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스포츠물이 있다. 그 다음은 좀 더 원초적인 학원폭력물도 생각난다. 하지만 이미 그쪽은 너무나 많은 작품에서 써먹었고… 좀 더 특이하면서도 일상적일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곰곰이 생각한 결과, 나온 아이디어중 하나는 분명히, ‘밴드’다.

우정이라는 측면에서 먼저 볼까? 밴드는 기본적으로 팀이다. 팀웍이 밴드의 ‘힘’의 핵심이다. 게다가 각 악기파트별로 뚜렷한 개성도 있어서, 기타도 보컬도 드럼도 각각 다른 성격의 인물을 창조할 수 있다. 그리고 인원 역시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3-5인조 정도로 편성할 수 있다. 대결은 어떨까. 밴드 음악은 서로 겨룰 수 있다. 누가 더 연주실력이 좋은가, 더 작곡을 잘하는가, 관객을 더 감동시킬 수 있나… 경쟁이다. 그리고 심지어 대화합의 발판도 확실하다. 뜨거운 경쟁을 펼치던 실력있는 밴드들이, 결국에는 ‘음악 속에서 하나가 된다’… 얼마나 감동적인 화해의 장인가.

TAKE FIVE(유상진 작 / 학산문화사 / 현재 2권 발매중)는 이러한 지점에서 탄생한, 영화판 용어로 하자면 ‘웰메이드’ 소년 밴드만화다. 베이스를 연주하고 싶어서 부모 몰래 예고로 전학을 가버리고, 그 결과 집에서 쫒겨난 주인공 이주인은 모범적일 정도로 소년만화적인 주인공이다. 넘치는 열정, 하지만 장래에 대한 고민이 있고 아직은 실력도 그리 썩 뛰어나지 않은 캐릭터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런 캐릭터를 성장기도로 올려줄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짠, 하고 수상한 여주인공의 등장이 이어진다. 그리고, 더 큰 성장과 목적을 위한 밴드 결성,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이어지는 밴드간 대결. 그 과정은 너무나 능숙하고 매끄러워서, 보편적인 호소력으로 다가온다.

사실 가 표방하는 ‘재즈 만화’라는 것은 그다지 크게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뭔가 전문적인 ‘개성’으로서 소년만화에서 흔한 락보다는 특이하게도 재즈를 택한 것이고, 그 선택은 어설프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너무 매니악하지 않은 정도의 전문지식 수준 안에서 나름대로 빛을 발하고 있다. 그리고 적절한 유머, 적절한 과장, 적절한 고뇌, 적절한 갈등, 적절한 애정관계. 이 모든 완급이 신인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안정적으로 운용되고 있다. 특이하고 전위적인 개성은 아니지만, 좋은 주제와 좋은 연출의 웰메이드 장르만화의 미덕을 갖춘 즐거운 만화임에 틀림없다. 지금까지의 진행이 마음에 들고, 앞으로의 진행이 기대되는 작품이다.

[으뜸과 버금 200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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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분량도 capcold답지않게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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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살기로 한자 익히기 – 마법천자문 [으뜸과 버금 0401]

필살기로 한자 익히기  – 마법천자문
(스튜디오 시리얼 / 2003, 아울북 / 현재 2권까지 출간중)

김낙호 (만화연구자/두고보자 편집위원)

  아이들의 기억력이란 참으로 신기하다. 방금 삼십분전에 시킨 심부름이나 구구단 같은 것은 어느틈에 깨끗하게 잊어버리지만,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니 벨로시랩터니 하는 그 길고 긴 공룡 이름들은 고고 생물학자들보다도 더 줄줄 외우고 다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모들이 애들은 여하튼 잘 외우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무조건 생물학 도감을 들이밀면 역효과만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이들이 스스로 몰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엄청난 집중력과 학습능력을 발휘한다는 점을 많은 이들이 들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대답은, 그렇다면 어디에 몰입하는지에 대한 것인데, 이 부분은 약간 더 어렵다(만약 확실한 답을 알고있다면, 한국땅에서는 쉽게 떼부자가 될 수 있으리라). 필자는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접근을 좋아하는지라, 그 해답은 “자기들의 생활과 관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애들이 무슨 생활? 모르시는 말씀. 아이들의 생활은, 부모들이 폄하하는 것 이상으로 심오하고 복잡미묘하다. 서로 다른 개성과 능력에 의한 경쟁관계, 성장, 강한 것에 대한 동경, 점차 복잡미묘해지는 인간관계 등이 여과되지 않고 날것 그대로 다가오는 시기인 것이다. 그런 생활경험에 기반한 욕구들을 반영하는 환타지를 하나의 줄거리로 담아내는 작품이라면,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된다. 쉽게 말해서, <포케몬>의 히트는 단지 피카츄가 귀엽게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그 지점을 확실하게 공략할 수만 있다면, 아이들에게 뭐든지 – 심지어 한자공부라도 – 시킬 수 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진짜로 그런 책이 나오고 말았다. <마법천자문>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서유기의 주인공들을 바탕으로 하는 소년만화 스타일의 작품으로, 필살기 중심의 대결구도가 펼쳐지고 있다. 소년취향 만화의 단골소재인 필살기라는 개념은, 사용자의 개성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며 그 상성이 다르기 때문에 무궁무진한 상상력과 승패결과를 조합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필살기로 한자를 사용한다면? 허공에 소(小)를 쓰면 상대가 작아진다든지, 화(火)를 쓰면 불길이 치솟는다든지, 그것을 수(水)자를 써서 물벼락으로 꺼트린다든지 하는 대결의 묘미가 생겨난다. 더 어려운 한자를 상황에 맞게 구사할 줄 아는 자가 바로 강자이며, 그러한 고수가 되는 것이 바로 성장의 척도가 된다. 악의 마왕에게 맞서기 위한 방법은 주인공의 끊임없는 수련 – 즉 한자공부다.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능숙한 장르법칙에 따라서 깔끔하게 연출되는 우정과 대결, 배신과 믿음,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성장해나가는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모험. 그 모험에 동참하는 어린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같이 그 한자를 되뇌이고, 종이에 끄적거리면서 다음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이런 방식이라면 천자문이 아니라 사서삼경이라도 어느틈에 다 익힐 수 있을 것이다!

  학습만화의 미덕은, 단순히 얼마나 좋은 정보가 많이 들어있는지가 아니다. 얼마나 대상독자들의 눈높이와 관심사에 맞는 재미를 주고,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무언가를 배우도록 유도할 수 있는가다. 능숙하고 매끄러운 이야기, 깔끔한 화면연출, 매력적인 캐릭터 구축이라는 전통적인 만화 기반 위에, 한자마법 필살기라는 새로운 요소를 섞어넣은 <마법천자문>은, 홍은영의 <그리스/로마 신화>의 아성을 이어나갈 차세대 기대주로서 손색이 없다.
[으뜸과 버금 200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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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분량도 capcold답지않게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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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이유를 유머로 캐묻다: 십자군 이야기 [으뜸과버금 0312]

전쟁의 이유를 유머로 캐묻다: 십자군 이야기

김낙호(만화연구가, 두고보자 편집위원)

“독으로 독을 치유한다” –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전 대통령이자, 수많은 전쟁범죄을 자행한 자의 초라한 말로가 뉴스를 타고 있는 지금 생각나는 구절이다. 현역 석유재벌인 부시라는 자가 세계 최강대국의 대통령이라는 위치를 이용해서 마음대로 남의 나라를 침략해서 사람들을 학살해도 용납이 되는 이상한 시대지만, 적어도 자기들끼리의 심오한 이해관계 충돌 덕분에 이 세상에서 독재자가 한명 쯤 줄어들었다.

전쟁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고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최근 출간된 <십자군 이야기>(김태권 작, 길찾기 출판사 / 전6권 예정 / 현재 1권 발매중)는, 전쟁의 이유를 직시하고 있는 교양만화다. 이 만화의 시각은 처음 몇 페이지에서 이미 명확해진다: “문명의 충돌? 문명끼리 어떻게 충돌합니까… 문명인들이라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해주죠.” 서로 다르기 때문에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충돌해야 할 어떤 필요성에 의해서 상대방을 완전히 미개한 것으로 탈바꿈시키는 과정. 그것이 바로 로마시대 이래로 내려온 세계의 역사라는 말이다. 무지의 씨앗을 뿌려놓을 때 사람들은 충돌과 오해의 악순환 속으로 빠져들며, 그 와중에서 어떤 세력들은 살며시 미소지으며 자기 잇속을 챙겨나간다.

<십자군 이야기>의 주된 줄거리는, 중세 서양의 십자군 전쟁의 과정의 소개다. 하지만 이 작품의 초점은 전쟁의 스펙터클이 아닌, 다양한 이해관계에 대한 풍자에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속에는 현재 21세기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동방과 서방, 이슬람의 정치권력 관계의 패턴이 재현되어 있으며, 지금 TV를 틀면 화면에 나올 법한 뻔한 정치인들과 그들의 행태가 그대로 이전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뭔가 팍팍하고 계몽적인 느낌 – 다시 말하자면, “재미없는” 만화일 것이라는 걱정은 처음부터 접어놓기를 바란다. 작가가 매 순간마다 언어유희와 상황 개그를 일삼으며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오는 실력은, 마치 지금까지도 이 분야의 고전으로 남아있는 <고우영 삼국지>과 <먼나라 이웃나라>의 장점을 섞어놓은 듯 하다. 무엇보다도 그 이전에, 아마도 부시의 선조인 듯한 호전적인 나귀와, 서방과의 우호관계와 자주적 실리 사이에서 희극적인 고민을 계속하는 동방의 어떤 황제, 각자의 잇속을 위해서 경주하는 여러 기사들이 벌이는 난리판 그 자체가 이미 일류 코미디인 것이다.

의도적으로 중세 서양화 풍으로 구사된, 단순하면서도 미려한 그림은 이 작품의 또다른 미덕이다. 묘하게 왜곡되어 있는 시대를 묘하게 왜곡되어 있는 그림들의 연속으로서 연출해나가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시각적 연출 덕분에 설명 부분과 드라마 부분의 경계선이 한층 희미해지면서, 이야기로서의 재미와 유익한 교양정보의 전달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종시에 훌륭하게 충족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본서 작가서문의 마지막은 한 인용구절로 끝나고 있다: “기억은 약한 자들의 마지막 무기다”. 필자의 생각에는 이것이 바로 <십자군 이야기>가 개인이든 대여점이든 도서관이든, 모든 서가에 꼽혀있여야만 하는 충분한 이유다.

[으뜸과 버금 20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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