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멸망해도 살아가기 [팝툰 47호]

!@#… 은근히 이 연재물, 매번 새로운 ‘역경’을 생각해내느라 머리 아프다.

 

만화로 배우는 생존법:
인류가 멸망해도 살아가기

김낙호(만화연구가)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올드팝송 가운데 하나가 스키터 데이비스의 “The End of the World”다. 기본적으로는 내가 사랑이 깨졌으니 세상은 끝났다, 저 새들도 햇님도 뭣도 이제 세상이 다 끝났는데 그것도 모르냐고 푸념(관점에 따라서는 저주)하는 내용이다. 아니 자기가 사랑이 깨졌는데 왜 다른 모든 이들도 함께 사는 세상이 통째로 끝나야 하는 것인가. 이렇듯 사는 것이 힘들 때, 많은 이들이 가장 흔히 경솔하게 내뱉곤 하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따위 세상 차라리 다 망해버려라”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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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해먹고 사는 생활 – 『어제 뭐먹었어?』[기획회의 240호]

!@#… 요시나가 후미가 남성커플이 요리하는 만화를 그리니, 이거야말로 물을 만난 고기.

 

밥 해먹고 사는 생활 – 『어제 뭐먹었어?』

김낙호(만화연구가)

자고로, 밥을 해먹고 산다는 것은 상당한 일이다. 메뉴를 고르기 위해 쓰는 신경, 준비하는 것에 걸리는 시간, 기술적 숙련을 위한 노력 등 이것저것 갖출 것이 적지 않다. 이런 투자의 폭 또한 넓어서, 하한선이야 굶지 않는 정도지만 상한선은 삶의 유일한 낙이자 거의 집착적 수준까지 가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그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밥을 해먹는 것은 직업적 영리활동이 아닌 가장 일상적인 생활풍경이기에, 약간 과장을 섞자면 밥을 해먹는 것에 대한 자세는 그대로 그 사람이 자신의 삶을 대하는 자세의 일면이 되어준다. 사먹는 밥은 그냥 일터에서의 양분 보급, 혹은 취향이 섞인 소비활동에 머물 수도 있지만, 밥을 해먹는다는 것은 그런 특별한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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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 떨어져도 살아가기 [팝툰 46호]

!@#… 종종 그렇듯, 핵심은 마지막에. 원고를 쓰던 당시보다 왠지 지금 오늘의 상황들이 더 신랄하게 맞아떨어지는 듯.

 

만화로 배우는 생존법:
무인도에 떨어져도 살아가기

김낙호(만화연구가)

급격한 변화는 자고로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 특히 더 나아지기 위한 변화라기보다 그저 기존 삶의 어떤 합리적 틀이 박살나는 파괴적인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소재를 대중문화 속에서 은유로 나타내는 것, 즉 인간을 둘러싼 가장 기초적인 삶의 조건인 ‘사회적 생활’이 급격하게 붕괴된 상황을 그려내는 것이 바로 무인도 조난이다. 홀로 혹은 소수의 인원으로 무인도에 떨어지면, 상식으로 받아들이던 전제들이 죄다 망가지고 문명의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세상이 펼쳐진다. 문명사회 속에서는 여러 층위로 복잡하게 가려져있던 여러 욕망 장치들은 원시적이고 노골적인 모습으로 선명하게 드러나고, 고독 같은 인간적 감성들은 주인공들에게 인격의 밑바닥을 드러내도록 한다. 여러모로 참 거친 상황인데, 뭐 그런 상황이라도 여하튼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파리대왕’ 류의 사회극도 ‘로빈슨 크루소’류의 고독 기행도 좋겠지만, 좀 더 엉뚱하게 우리 현재 생활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뒤돌아보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면 더 좋을 듯 하다. 『천사의 섬』(고리타 지음/미디어다음 연재완결)은 평범한 청년 윤규복이 조난당해서 무인도에 상륙하고, 하필이면 그 섬에 천사가 같이 살게 되는 이야기다. 이 페이소스 넘치는 개그만화를 보며 살짝 살아가는 법의 힌트를 얻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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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 릴레이만화 ‘악!법이라고?’ 연재 개시

!@#… MB악법 종합선물세트를 반대하는 릴레이만화 ‘악! 법이라고?’가 프레시안, 오마이뉴스, 다음아고라, 데일리서프 (그리고 향후 지면 추가 예정) 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시사만화 웹만화 교양만화 장르만화 일러스트형 만화를 폭넓게 아우르는 13인의 만화가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이벤트입니다. 각각 법을 하나씩 붙잡고 간단히 그 악법이 통과되면 왜 문제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방식입니다. 여당의원들조차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워낙 한꺼번에 쏟아져서 묻어가려는 형국이니 만큼, 이런 식으로라도 관심을 뽐뿌질하는 것이 확실히 필요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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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바라보는 혁명, 혁명이 바라보는 만화 [예장 29호]

!@#… 서울예대 교지 ‘예장’ 29호의 특집 ‘예술에 드리워진 혁명의 그림자’에 한 꼭지로 실린 글. 각 분야의 글들을 모아놓고 보면, 만화/영화/음악을 아우르는 대중예술 쪽 꼭지의 필자들이 보여주는 작품소개 위주의 분류와, 개념용어의 바다에 익사하기 직전인 순수예술 성향의 미술/문학 꼭지의 필자들의 접근이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어서 재밌다. (핫핫)

 

만화가 바라보는 혁명, 혁명이 바라보는 만화

김낙호(만화연구가)

혁명이란, 기존의 근간이 크게 뒤집어져서 그 결과 완전히 새로운 방식이 시작되도록 하는 변화를 칭한다. 가장 포괄적으로 내린 이 정도 정의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사실 혁명이란 보기보다 무척 애매한 개념이란 점이다. 얼마나 바뀌어야 개혁이 아니라 ‘혁명’인지 명확한 선을 긋는다는 것은 꽤 임의적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혁명으로 바뀐 세상의 변화가 얼마나 지속되어야 성공한 혁명인지 아니면 혁명을 하려고 했다가 단순히 실패한 것인지 역시 역사적 해석이 정해주기 나름이다. 그리고 둘째(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훨씬 중요하다), 혁명은 본연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는 것이다. 실제로 혁명을 겪든 혁명을 이루고자 꿈꾸는 것에 지나지 않든 말이다. 어떤 이들은 혁명에서 불온함과 파괴라는 인상을 받겠지만, 다른 이들은 그 속에서 기존의 갑갑한 무언가를 타파하고 새로운 방식을 추구하는 진취적인 변화에 대한 강한 낭만을 느낀다. 그런데 예술 양식이나 기술에서의 혁명이라면 좀 더 세부적인 차원이기에 그 인상 역시 한정적이지만, 아예 사회 체제에 관한 혁명이라면 그 사회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있어서 도저히 피할 길 없는 강렬하고 큰 사건이다. 사회 혁명은 그런 의미로 보자면, 무척 대중과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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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의 탈을 쓴 인격존중 -『삼단합체 김창남』[기획회의 239호]

!@#… 전작 ‘삼봉이발소’ 쪽이 비록 페이스는 불안정하고 연출은 가끔 흔들렸으나 더 알찼다. 아쉽.

 

SF의 탈을 쓴 인격존중 -『삼단합체 김창남』

김낙호(만화연구가)

원래 인간이 인간형 피조물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는 최소한 그리스 신화 시절부터 존재했다. 모습은 유사하지만 낯선 이, 그것도 만들어진 존재에 대한 관심이 애정의 수준으로 올라선다는 것은 여러모로 실제 인생 속 어떤 패턴들을 이입해 볼 만한 요소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현대 SF 장르의 경우, 이 소재는 로봇을 사랑하게 되는 인간으로 나타나곤 한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로 동원되는 것은 인간이 지니는 결함이 없는 완벽한 존재로서의 로봇이다. 하지만 좀 더 깊숙하게 이 소재를 파고드는 작품들의 경우, 사실은 정반대의 본질을 담고 있다. 인간들은 고등 두뇌 활동의 복합적인 인지과정에 의하여 사회활동을 하고, 덕분에 권력관계에 대한 수많은 이성적 및 감성적 세부적인 맥락 속에 살고 있다. 반면 로봇들은 그런 복잡한 것을 제거하고 순수하게 사전 프로그래밍된 논리에 의해서 판단한다. 그 결과 예를 들어 인간들은 열등한 상대를 폄하하는 것에 익숙하지만, 로봇은 그저 기본적인 도덕률에 의하여 상대를 인격체로 존중해준다든지 말이다. 덕분에 로봇은 정작 인간들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오히려 고지식하게 계속 가지고 있는 위치에 처하고, 인간이 상실해가는 어떤 ‘인간적’ 본성에 대한 알레고리가 되어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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