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영, 거장의 흔적 – <삼국지>와 <일지매> [기획회의 050502]

!@#… 5월 2일자 기획회의용 원고(따라서 2005.5.2까지는 이동불허. 그 정도 네티켓은 알아서 다들 지켜주리라 믿는다). 아직 개제안된 원고를 사전공개하는 건 평소 신조나 일반 도의에 어긋나지만, 시기가 시기인만큼 편집부도 너그러이 윤허해주겠지.

!@#… 여담이지만, 나는 만화가를 ‘화백’이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한다. 화백은 그림그리는 사람에 대한 극존칭인데, 만화가는 단순히 그림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림이야기꾼이기 때문이다. 화백이라는 용어를 이쪽에 가져다 붙이는 것은 왠지 미술계에 대한 자격지심의 표시 – 즉, 만화가도 그림 제대로 그릴 줄 안다는 식의 소극적 선언같이 들린다. 특히 고우영 선생같은 길이 남을 탁월한 이야기꾼에게, 화백이라는 호칭은 턱없이 부족하다. …여튼,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전까지는, 종목을 초월한 극존칭인 ‘선생’으로 쓰고자 한다.

==========================

고우영, 거장의 남겨진 흔적 – <삼국지>와 <일지매>

2004년 4월 25일, 한국 만화의 큰 별이 떨어졌다. 한 시대를 풍미한, 아니 여러 시대를 관통하면서 계속 풍미해온 명실상부한 거장 고우영 선생이 지병으로 별세한 것이다. 일찍이 70년대에 스포츠신문이라는 공간에 연재만화라는 훌륭한 파트너를 소개한 <임꺽정>을 필두로, 마지막 그날까지 항상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역으로 특유의 해학과 입담을 발휘했다. 갑자기 이 지면에서 고인에 대한 추모 투의 평가를 할 생각은 없지만, 이번 기회에 고우영이라는 이름이 남기고 간 한국만화의 걸작들을 두 편만 다시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에서 발간된 수많은 삼국연의 판본 가운데 지금까지 가장 잘 팔린 것은 이문열 삼국지다. 하지만 가장 재미 있는 것을 꼽으라면 단 0.1초도 주저하지 않고 <고우영 삼국지>(애니북스, 전10권)를 선택하겠다. 단지 오락성이 뛰어나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삼국지가 원래 가지고 있었을 법한 본연의 서민적인 재미가 뛰어난 해학과 동시대적인 풍자정신 속에서 발현되고 있는 역작이다. 인물들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 역시 발군이어서 비단 ‘싸나이 조조’ 대 ‘쪼다 유비’의 대결구도뿐만 아니라, 관우와 제갈량 사이의 신경전이라든지 손씨 가문 여인들의 강인함에 대한 동경이라든지 하는 설정들이 독자들을 즐겁게 한다. <고우영 삼국지>의 등장인물들은 그 어느 다른 판본보다도 더욱 인간적이며, 우리 독자들의 모습에 가깝다. 흔히들 이야기하듯이 삼국지가 인간사에 대한 종합백과사전이고 처세전략의 교과서라면, <고우영 삼국지>는 한국에서 출판된 모든 삼국지들 가운데 으뜸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고우영식 고전 서사연출은 이 작품에서 찬란한 빛을 발한다. 때로는 마치 판소리의 소리꾼마냥 걸죽한 입담으로, 때로는 주인공들의 박진감 넘치는 상호작용으로 이야기를 이끄는 자연스러움이 독자들을 쉽게 몰입시킨다. 작가의 해설은 동시대(현대)의 여러 맥락들을 섬세하게 풍자하고, 내부의 주인공들 역시 그 과정에 천연덕스럽게 동참해버린다. 단순히 극이 전개되는 모습 자체에 의존하기보다는 마치 술자리에서 입담 좋은 선배 하나가 기분 좋게 세상사는 이야기 보따리를 하나 풀어내듯이 – 속칭 “노가리를 까듯이” – 고전은 고전이 아닌, 살아있는 우리네 세상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노가리 만화’의 전통은 스포츠신문 만화의 터주대감 같은 이미지로 굳어있는데, 고우영 만화가 바로 그 시조이자, 선구자이자, 마지막 순간까지 최강의 현역선수였던 것이다. 시각적 측면에서도 <고우영 삼국지>는 탁월하다. 선의 힘을 조율하여 헐렁한 유머와 강렬한 전개를 오고 가는 필치는 이미 달인의 경지를 오래전에 넘어섰고, 등장인물들을 묘사함에 있어서도 누구 하나 서로 혼동되지 않을 정도로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고우영 삼국지>의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제갈량의 죽음과 함께 이야기가 다소 급작스럽게, 실질적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물론 유씨 3형제와 제갈량이라는 주인공들이 극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첫 시작부분에서 황건적을 다룰 때 보였던 평범한 민초들에 대한 애착이 연재 종결의 시점에서는 다소 약해졌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아마 긴 연재기간동안 주인공들에게 생긴 애정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리라.

故고우영의 사극들은, 고전의 재해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순수창작물인 <일지매>(애니북스, 전8권) 역시 원전이 있으리라는 오해를 종종 사고는 한다. <삼국지> 직전에 그려진 이 작품이 그만큼 유명 고전들과 견줄 만큼 이야기의 스타일이나 완성도가 뛰어나다는 칭찬으로 해석해도 큰 무리가 없을 듯 하다. 버려진 서자 일지매가 청국과 일본에서 각종 신기한 기술을 익혀서 의적활동을 하게 되는 이야기인데, 일지매의 기구한 운명 속에서 당대 조선조 양반사회의 부패, 청나라와의 국제 정세 등이 가감 없이 펼쳐진다. 비록 권말해설에서 평론가 박인하가 지적했듯이 그 모순에 대한 분노가 왕조 자체나 시스템 전체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지지는 못해서 아쉬움을 남기지만, 일지매라는 일개 의적(!)에게 너무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당연한 행보일수도 있다.

<일지매>에는, 훗날 <삼국지>에서 완성되는 능청스러운 재담의 원형이 가득하다. 칸과 면을 가지고 하는 만화적 장난은 물론, 현실세계의 맥락을 자꾸 환기시키는 농담이 사이사이에 삽입되는 것 역시 여기서 이미 선보이고 있다. 목표를 위해서 여장을 일삼는 미형 남자주인공이라는 당시로서는 꽤 파격적인 설정도 고우영식 재담 속에서는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다. 그러면서도 진지한 극 전개가 필요할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색을 하고 나서는데, 그 분위기 전환이 너무나도 능숙하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을 떠나보내는 일지매의 비극이 절절하게 느껴지며, 양반의 부패에 속수무책 당하는 사람들이 연민을 자아내는 것이다. 이렇듯 비극과 희극이 끊임없이 교차되는 것이 바로 인생 그 자체 아닌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지매>는 오랜 연재기간동안 독자들을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만큼 본질적인 재미를 지니고 있기에, 연재 후 거의 3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 읽어봐도 그 재미가 고스란히 다시 느껴진다. 사람들은 보통, 이런 효과를 지닌 작품들을 ‘고전’이라고 부른다. 물론 장기 연재작이다보니 이야기의 흐름이 중간에 너무 확연하게 바뀌어버린다거나, 때로는 흐름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너무 많이 흘러가버린다든지, 주요 이야기 단위 간의 균형이 약간 어색해 보인다든지 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능숙하게 모든 것을 감싸안는 그림이야기 솜씨라면, 얼마든지 재미를 느끼고 감동을 받아줄 준비가 되어있다.

아쉽게도, 이제는 더 이상의 고우영 만화가 나올 수 없게 되었다. 명예의 전당감인 여러 작품들이 그의 업적을 기릴 뿐이다. 고우영이라는 높은 산을 넘어서 한국만화의 더욱 높은 경지를 개척할 숙제가 이제 후배 세대에게 남겨졌다. 그가 남긴 만화 유산들이 더 좋은 만화를 일구어내는 씨앗이자 거름이 되어주기를 바라며, 다시금 고인의 삼가 명복을 빈다. 일지매와 관우와 임꺽정이 그를 만화의 천국에서 반갑게 맞이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 Copyleft 2005 by capcold. 하지만 2005.05.02까지는 이동불허 —

그때의 둘리, 다시 만나다 – <아기공룡 둘리 애장판> [기획회의 050418]

!@#… 뭐야, 300번째 게시물이잖아 (경악. 100개를 채우기 전에 나간다고 내심 다짐했건만) !!! 음 뭔가 좀 더 강력한 걸로 채우고 싶었던 이벤트 번호였지만, 뭐 알께뭐람.

!@#… 새삼 느끼는 바지만, 이 지면처럼 한 원고지 15매 정도는 최소한 되어야 ‘신간소개’를 하면서도 뭔가 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

==============================================

그때의 둘리, 다시 만나다 – <아기공룡 둘리 애장판>

‘국민캐릭터’라는 천박한 표현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폭넓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덕택에 어떤 시에서 주민등록증도 부여받을 정도로 활용가치가 높은 가상적인 인기인이라면 나름대로 무언가로 불러줘야 할 법 하기는 하다. 워낙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전력질주하다 보니 여러 세대가 같이 즐길만한 공동의 무언가가 생겨나기 참 힘든 이 땅에서, 그런 국민캐릭터가 존재한다면 얼마나 보람찰까. 하다못해 부모세대가 자신들의 어린 아들딸들한테 문화적 취향을 즐겁게 자랑이라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 상에 가장 가까운 것을 억지로라도 하나 뽑아보라면, 열중 아홉은 분명히 한 만화캐릭터를 지목할 것이다: 아기공룡 둘리라는 녀석을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있다. 부모세대가 봤다는 아기공룡 둘리와, 지금 어린 아이들이 알고 있다는 그 아기공룡 둘리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부모는 아마 82년 보물섬에서 연재된 만화를 보았을 것이고, 87년 TV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된 스페셜을 보고 즐겼을 것이다. 지금의 아이들은? 아기공룡 둘리라는 캐릭터 이미지를 알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둘리의 배낭여행 DVD를 한번쯤 봤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하지만 둘리가 빙하타고 내려와서, 청승파 구박덩어리 더부살이로 시작했다가 점차 눈물겨운(?) 투쟁으로 하나씩 가족으로서의 위상을 얻어나간 과정을 공유하고 있을까. 집안의 가장 고길동이 애완동물 길동이 취급당하며 명랑만화식 환타지 모험길에 끌려다니고 겪는 고초에서 우러져나오는 서민적 페이소스를 같이 공감할 수 있을까.

글쎄, 모르겠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공감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작년 말부터 발간되기 시작한 <아기공룡 둘리 애장판>(김수정, 키딕키딕. 현재 3권 발매중) 덕분에, 이제는 적어도 이런 작품이라고 이야기를 건네볼 수는 있게 되었다. 이전에 나왔던 여타 판본들과는 달리, 이번 애장판에서는 드디어 작품 전체를, 양호한 인쇄품질로 만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작가와의 인터뷰 등은 반가운 보너스이기는 하지만, 작품 자체를 드디어 제대로 모아둘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마음은 풍족하다.

둘리를 동시대의 다른 명랑만화와 차별화시켰던 것들, 둘리를 둘리답게 만들어주었던 것들을 다시 한번 들춰본다. 라면 박스로 만들고, 오징어가 끌고가는 산타클로스 썰매. 은행을 건물채로 뜯어가는 엽기성. 타임코스모스를 움직이며 집주인을 애완동물로 아는 빨간 내복의 변태괴짜, 도우너의 충격적인 데뷔. 아 그래, 이런 것들이었지. 착할 겨를도, 교훈적인척하고 내숭을 떨 넉살도 없는 순수하고 직선적인 명랑함. 구석구석 찌들어 있는 생활의 무게와 그 향기까지. 기억이 돌아온다. 둘리는, 재미있는 만화였다. 귀여운 캐릭터이고 국민 어쩌고 이전에, 불온한 상상력으로 중무장한 도발적 개그였다. 둘리 만화가 완결된 이후의 90년대 이래로, 둘리의 이미지를 이어받아 재생산된 모든 여타 둘리 프랜차이즈에서 깨끗하게 도려내졌던 바로 그 부분이다. 지금은 마치 티본 스테이크 같이 포장되어 칭송받지만, 원래는 비계가 덕지덕지 끼어있는 구수한 삼겹살이었다. 바로 그 비계맛 때문에 둘리는 특별했던 것이다.

<아기공룡 둘리 애장판>은 지나치게 멋부리지 않아서 반가운 책이다. 물론 번들거리는 은색의 하드커버 표지는 확실히 이질감이 들지만, 상품을 고급스러워 보이게 하고싶다는 의도의 그 정도 오버는 그냥 대범하게 받아들여주자. 하지만 요새 아이들의 취향에 맞춘다고 공연히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 채색을 집어넣어서 풍미를 해치지도 않았고, 요즘 감수성에도 통할만하다고 자의적으로 선별한 소위 베스트 에피소드들만 골라 넣는 만행도 저지르지 않았다. 날림으로 대충 넘겨서, 완성도가 떨어지는 일화들일지라도 굳이 잘라내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원래대로 우직하게 내준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물론 작가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부족한 지점, 아쉬운 부분들이 많이 눈에 들어와서 몸둘바를 몰랐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정도는 독자들의 즐거움을 위해서 참아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소원이 이루어져 있다. 정말 별것 아닌것처럼 그대로 내는 것이야말로 ‘별 것’이다. 유능한 작가가 젊은 날의 가장 찬란했던 때의 에너지를 쏟아넣은 작품이 얼마나 멋진 빛을 발할 수 있는지, 감탄해볼 기회이기도 하다. 어설프게 멋진 작품을 보면, 작가가 이후의 이야기를 계속 그려줬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하지만 이 정도로 완성된 재미의 작품을 본다면, 작가가 제발 절대 이 작품에 화사첨족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물론 많은 것을 감수해야 한다. 우선 원래대로 나왔음에 반가워할만한 독자들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둘리는, 추억상품으로 포장하고 향수를 자극해서 어른 매니아들을 노리기에는 너무 지금까지도 이미지가 대중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좀 더 최신 유행을 따라 다니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 취향 속에 캐릭터 이미지로서의 귀여운 둘리는 있지만, 구박받고 청승맞으며, 동시에 기발한 역전의 칼날을 가는 80년대 정서 가득한 서민 둘리는 없다. 아니 그런 둘리는 아예 이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이 책을 사랑해준다는 말인가?

이 책을 사랑해 주어야할 사람들은, 좋은 만화를 보고 즐긴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지를 잊어버리지 않은 – 혹은 않았다고 자부하는 – 모든 이들이다. 좋은 만화는 취향은 탈 수 있지만 원형적인 재미를 간직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현실세계의 시간의 오랜 흐름에 따라서 시대적 맥락의 효과가 사라질 수는 있지만, 좋은 만화를 보다보면 그 맥락들이 다시 하나씩 머릿속에서 되살아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진정한 만화 즐김이들 말이다.  국민캐릭터 둘리가 아닌, 즐거운 만화 둘리로 다시 돌아오는 순간이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감성만화, 삶을 제대로 건드리다 – <휴머니멀> [기획회의 050404]

!@#… 언제나처럼, 이번에 발간된 기획회의의 원고. 박순구 작가의 작품들은 soon9.com 에 가면 연재를 볼 수 있다.

!@#… 여담. 비평 본문에서는 살짝 언급했고 그다지 이 작품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하드하게 엮어낼 필요성은 느끼지 않았지만, 가해자가 입은 피해에 대한 묘사방법이라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 물론 가해자도 궁극적으로는 가해/피해자를 만들어내는 시스템의 ‘피해자’고 어쩌고… 뭐 다 좋단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해자가 입힌 피해와 그 가해자가 입은 피해를 같은 레벨에서 다루어버리면 강력한 부작용 한가지가 생긴다: 가해-피해 관계에서 발생한 해악 자체가 희석된다 (주류 일본인들이 히로시마 원폭 타령할때 맨날 써먹는 비열한 방법 아니던가).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에게 동정을 던지기 보다는, 가해와 피해의 모순 자체를 부각시키는 성찰적인 접근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가해자에게는 가해자로서의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언젠가 다른 자리에서.

==========================================

감성만화, 삶을 제대로 건드리다 – <휴머니멀>

인간은 자신을 여타 동물과 구분 짓기 좋아하는 신기한 동물이다. 그래서 인간적인 속성들에 대한 수많은 규정들을 마련해놓고는, 그것에 집착적으로 매달린다. 역설적으로, 그런 근거 빈약한 자존심의 결과 이야기로서 강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의인화’된 동물들의 이야기다. 동물들에게 인간적인 속성을 부여해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은 동물들과 꽤 근본적으로 다르며, 몇 안되는 공통점을 발견했을 때 그것이 대단히 빛나 보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는 것이다. 게다가 사실, 인간이라는 종족은 워낙 상상력이 빈약해서 자신들의 생활과 사회관계의 틀과 비슷한 모습으로 치환해서 보여주지 않으면 이야기로서의 재미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니까 말이다. 한쪽 측면에서는 의인화된 동물의 이야기가 우리와 의외로 닮았다는 것을 보면서 현실에 대한 풍자나 성찰을 느끼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동물 이야기로 표현되었다는 것에서 안도감을 느끼면서 부담감을 줄어든 채로 받아들인다. 한마디로 의인화된 동물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그것이 뻔히 우리 이야기인 줄 알면서도 기꺼이 남의 이야기인양 속아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미키마우스라는 쥐는 2차 대전 징병에 앞장섰고, 반대로 아트 슈피겔만의 <쥐>에 등장하는 쥐들은 아우슈비츠의 과거와 유산을 담담하게 뒤돌아보게 만들었다.

<휴머니멀>(박순구/황매)은 동물을 등장시켰지만 사실은 인간 이야기를 하겠다는 동물 의인화 계통 작품의 본질을 그대로 건드려 보겠다는 의지가 제목에서부터 물씬 풍겨나오는 작품이다. 휴먼+애니멀, 이 정도면 대단히 노골적인 포부다. 그 다음으로 궁금해지는 것은, 인간들 살아가는 모습의 어떤 부분을 뒤돌아보게 만들 것인가라는 점이다. 보통 의인화 동물 이야기에서는 친구들 간의 실랑이나 성격 다른 사람들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주로 구사하곤 한다. 그쪽이 훨씬 쉽기 때문인데, 거꾸로 이야기하자면 그만큼 얄팍한 수준에 머무를 가능성 역시 높다. 그런데 <휴머니멀>은 그보다 훨씬 우직하다. 그의 흰 생쥐는 이라크로 파병을 나가서 슬픈 최후를 맞이하고, 생쥐 마을에 온 침팬지 아저씨는 불법노동으로 연행된다. 비둘기는 교육현실에 갑갑해하며 탈출의 용기를 이야기하며, 수달들은 철거촌에서 쫒겨난다. 허투루 채우지 않고 진지하게 덤벼들었다는 점에서 우선 합격점을 부여하고 작품을 감상해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작품 자체의 알찬 구성과 치밀한 그림실력을 보며 이내 다시금 평가를 한 단계 더 높인다. 평평한 색감의 2차원에서 토실토실한 털 질감까지 자유자재로 오가며, 각각의 단편 스토리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그때그때 그림의 밀도를 조절하는 실력은 만화라는 매체에서 빛을 발한다. 원래 개인 홈페이지에서 웹 연재했던 칸구성을 책 형식과 잘 조화시켜서 출판물로서 깔끔하게 읽히게 만든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기술적 능력을 믿고 과욕을 부리지 않고 꽤 직선적으로 한 가지 이야기씩 정리해나가는 호흡이 좋다.

개별 작품들은 오랜기간 동안 자유롭게 하나씩 발표된 것들이다 보니, 하나의 주제로 완전히 엮여진다거나 혹은 모두 동일한 수준의 완성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게다가 각각 작품이 만들어졌던 시기적 맥락을 단행본에서는 전혀 밝혀주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런 지점들이 더욱 혼란이나 오독의 여지를 남길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이라크 파병반대라는 시기적 맥락이 상당히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는 첫 번째 이야기 <어느 흰 쥐 이야기>는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 전쟁의 비극을 감성적으로 그려내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 속의 한국군 이라크 파병이 어디까지나 가해자(의 친구를 빙자한 부하) 입장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그런 가해와 피해 사이에 있는 모순을 직시하지 않고 다소 평면적으로 접근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또 한 치와와 견의 마지막 비극적 사랑을 그린 <사랑합니다>라는 단편은 동물을 통해서 인간사를 바라본다는 이 시리즈의 전체 컨셉에서 볼 때 다소 이질적이다. 결국 우리들이 어떤 사랑하는 대상을 오매불망 그리는 것을 비유하는 느낌이라기보다는, 그냥 동물이 주인을 기다리는 ‘집 찾아간 백구’의 감수성에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하필이면 책표지에 인용된 두 작품을 위에서 언급하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이 책은 빛나는 순간들이 더욱 많고 돋보인다. 골목에서 술먹고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을 외쳐보는 팬더의 걸음을 따라가는 <당신의 골목은 어떤가요>는 동물 의인화의 매력을 극대화하고 있다. 느리게 어슬렁거리는 팬더의 움직임이, 이 작품에서는 취기와 실연의 슬픔이라는 감정을 부여받는다. 골목에 울려 퍼지는 미소와 눈물은 요새 유행어로 치자면 ‘백만불’ 짜리다. <나에게 쓰는 편지>에서 치매 걸린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눈작고 얼굴 비슷한 동물인 두더지를 활용한 센스는 절로 감동을 불러온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작품이자 가장 백미인 단편인 <고래가 되고 싶어요>에서는 철거민 이야기를 천연기념물인 수달에 비유해서 풀어나가고 있다. 어린이 그림일기를 통해서 묘사되는 어린이 시각으로 걸러진 현실과 진짜 현실의 비정함의 대비는 오세영의 걸작 <부자의 그림일기>의 적자로 견줄 수 있는 강력함을 발휘한다. 그리고 단지 우린 참 불쌍해요라는 논조가 아니라, 우리 집이  허물어지고 새 집을 짓는데 우리는 거기서 살 수 없다는 것의 부조리함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통찰이 녹아들어가 있기에 더욱 값지다.

수많은 에세이툰이니 감성만화니 하는 것들이 항상 인간성을 이야기하고 따스함을 주장한다. 그러나 진짜 인간성과 따스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말랑말랑한 감성의 달콤한 조미료에 도취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살아가는 세상의 현실이라는 ‘진국’에 대한 직시다. <휴머니멀>이 한참 에세이툰이 붐을 이루었던 2-3년 전에 나왔더라면, 이쪽 장르는 아마도 지금보다 수십배 더 좋은 방향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뭐, 사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휴머니멀>의 파급력이 널리 퍼져서 많은 독자들이 감성만화에 대한 새로운 – 아니 애초부터 근본적이었던 – 즐거움에 눈뜨게 되기를 바란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대등한 만남을 위하여 – <오세영 한국 단편...> [기획회의 050320]

만화와 소설, 대등한 만남을 위하여 – <오세영 한국 단편소설과 만남>

공식기관에서 ‘명작’ 한국 만화를 꼽아야 할 때마다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품이 있다. 대중적인 인기로 세상을 휘어잡은 것도, 희대의 컬트로 숭배받은 것도 아닌데 거의 예외가 없어서, 최근 프랑크푸르트 도서박람회를 위해 선정된 100대 도서에도 한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오세영의 <부자의 그림일기>라는 작품집이다. 80년대 <만화광장> 류의 성인만화잡지에서 발현되기 시작했던 진지한 사회발언과 만화양식의 가능성에 대한 추구가 꽃을 피웠던 모범사례중의 하나가 바로 당시 창작되어 나왔던 오세영의 단편 작품들이었다. 성인만화를 휩쓸던 리얼리즘 풍 이야기와 민중문화 담론 에서 열심히 주장해온 민중적 시각의 사회참여의식 등 다양한 시대정신의 영향을 소화해낸 작품들이었던 것이다. 90년대 초에 묶여져 나온 이 작품집에서 또하나 즐거운 발견은 바로 월북작가 단편소설 작품선이었다. 두고두고 오세영의 최고작 중 하나로 인용되고 있는 안회남 원작의 <투계> 등이 특유의 집요하게 토속적인 화풍으로 펼쳐졌던 것이다.

최근 <오세영 - 한국 단편소설과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이러한 단편소설 원작의 오세영 만화 단편들을 묶어낸 작품집이 출간되었다. 마치 수록 작품들의 문학적 권위를 형상화라도 하는 듯, 한 권의 묵직하고 커다란 800페이지짜리 하드커버 양장본으로 나와서 책장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작품들은 <부자의 그림일기. 작품집에도 실렸던 월북 작가 단편선, 이후에 작업되어 단편문학선이라는 시리즈로 나온 바 있는 여러 작품들이 고루 집대성되어 있다. 그 중에는 <메밀꽃 필 무렵> 같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원작도 있고, 문학 전문서 귀퉁이에서조차 찾기 힘들었던 것도 (예를 들어 월북 작가) 많다. 이 책에서 원작으로 선택된 작품들은 주로 1900년대 전반의 단편소설에 집중되어 있는데, 생각해보자면 그 당시 많은 작품들이 바로 고된 사회적 현실 속에서 살아나가는 민중들의 삶을 비정할 정도로 생생하고도 비극적으로 그려냈던 경향이 있었다. 바로 80년대식 리얼리즘/민중문화와 일맥상통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런 감수성을 확실하게 재현하고 싶은 작가적 욕구에 충실하게, 오세영이 재창조한 만화들은 적극적인 재해석보다는 충실한 재현에 무게를 두고 이루어진다.

원작에 있는 대사는 토씨 하나 생략하지 않고 그대로 재현해내는 것이 기본이며, 각 장면의 풍광이나 캐릭터들의 생김새와 행동거지 또한 대단히 자연스럽다. “쇠똥을 그릴 줄 아는 작가”, “할아버지를 할아버지 처럼 그리는 작가” 등의 찬사 처럼 시각적 장면묘사의 충실함은 특히 한국의 근대나 토속적인 풍광을 보여주는 이야기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원작자가 소설에서 묘사한 것 보다도 더욱 원작같이 느껴질 정도로 그 작품들의 원작 충실도는 대단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들이 사진집이나 영화 스틸컷 모음 같은 느낌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88올림픽 전후를 무대로 하는 단편 ‘부자의 그림일기’에서 선보인 그림일기 + 무성극 만화의 교차편집이라는 형식실험이 보여주었듯, 오세영은 만화형식의 장점을 적극 활용하는 것에 결코 문외한이 아니다. 칸 간 시선흐름을 고려한 화면구도라든지, 극적 긴장감을 높여주는 만화적 전개방식 등은 원작소설 만화화 작품에서도 충분히 사려깊게 활용되고 있다. 다만 원작의 유려한 흐름에 거스르지 않도록 명백하게 파격적인 쾌감을 극도로 자제할 뿐이다.

이 작품들에서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하기로 작정한 접근의 장점은 명확하다. 문학적 평가가 높은 소설들을 애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적당히 마음대로 단순화시켜온 대다수의 ‘명작만화’ 류들이 쌓아온 만화에 대한 편견을 무너트리는 것이다. 문학이 진화의 과정 속에서 쌓아온 섬세미묘한 다층적 의미와 감성의 서술구조들을 과연 만화에서도 해낼 수 있을까라는 폄하는 ‘투계’ 같은 작품을 보면 확실히 날려버릴 수 있다. 영화화 등 다른 매체이식에서 항상 문제시되는 원작의 문제의식이나 감수성의 왜곡이라는 부분 역시 이 정도의 재현 충실성 앞에서는 내밀 자리가 없다. 그렇다면 단점은? 쉽게는 ‘독자적인 해석이 들어가지 않았으니 그 작가의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는 식의 단순한 비난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원작의 선정에서 이미 작가의 자의식이 개입되고 충실한 재현이 바로 창작의 의도라면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다. 단점으로 제기할 만한 보다 중요한 지점은 이 책에 묶인 작품들이 상당수가 90년대 및 그 이후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80년대의 작품 또는 당시의 문제의식에 기반하여 만들어내는 작품들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리얼리즘이나 민중문화 개념이 항상 강조해온 것이 바로 현실참여이라는 측면을 놓고 생각해볼 때, 오늘날의 세상과 문제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80년대식 경향의 프리즘으로 투과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동시대적인 문제의식이라는 척추가 빠지고 ‘순수문학’의 예술지향적 자아도취에 빠질 위험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그것이 바로 작품에 투여된 노력과 재능이 생명력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진짜 고민이다.

앞서 말했듯, 책의 출판상태는 그야말로 성의있는 프로듀싱의 결실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만화책들은 각각의 실제 내용에 어울리는 책 모양새가 아니라 일괄적인 저가 대중오락물의 모양새라는 틀을 강요당했다. 자가 대중오락물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만화의 폭넓은 세계를 그 범주안에 다 우겨넣을 수 있을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오세영 작품집은 고전 문학의 깊이와 만화작품의 진지한 접근의 무게에 걸맞는 무게의 책으로 나왔기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옥의 티는 오히려 과잉 프로듀싱이라는 부분인데, 말미에 순 우리말 용어에 대한 해설집을 첨부한 것은 좋지만  본문내용에 각주표를 달아서 독서의 흐름을 끊기게 했다든지 하는 등의 과유불급성 결과가 여기에 속한다.

이 책은 소설 원작 만화 작품을 모은 만화책이다. 하지만 소설을 읽기 싫어서 쉽게 슬쩍 줄거리만 훑어보려는 게으름증을 해소하기 위한 만화들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오히려 소설을 읽어보고 그것을 만화로도 다시 한번 읽어보거나 또는 반대 순서로 읽어서, 그 감상을 증폭시키기 위한 것에 가깝다. 만화와 소설의 대등한 만남, 그리고 독자에게는 그 화학작용에서 오는 몇갑절로 증폭된 감상을 주기 위한 책이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성인과 어른의 간극에서 하는 재담 – <다르면서 같은> [기획회의0502]

꼭 자서전 차원까지 가지 않더라도, 작가 자신을 모델로 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여러모로 작품의 생동감 확보라는 측면에서 참 편리하다. 특히 성장이라는 모티브를 가진다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반대로, 자칫 잘못하면 자아성찰이라는 무게에 어깨가 짓눌려서 지나친 자기연민의 어두운 나락으로 빠지기 십상이다. 유머감각을 잃지 않으면서도 성장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실 무척 난이도가 높은 작업이다. 하지만 한국계 미국 작가인 데릭 커크 킴(한국명 김지훈)의 작품집 <다르면서 같은>을 읽다보면, 그런 어려움이 전혀 실감이 가지 않는다. 그가 풀어내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쫒아가다 보면, 유머감각과 자기연민은 애초부터 너무나도 친한 파트너처럼 느껴진다.

<다르면서 같은>은 원래 인터넷 개인 홈페이지에서 연재한 같은 제목의 중편과, 기타 짦막한 단편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개인 출판으로 처음 발간되었다가, 대형 출판사에 발탁되어 다시 출간된 후 그 해 북미지역의 대표적인 3대 만화상인 하비, 아이스너, 이그나츠에서 신인상을 모조리 휩쓴 화려한 데뷔를 거두었다. 이 작가가 풀어내는 이야기가 그렇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이유는 표제작인 ‘다르면서 같은’를 살펴보면 금방 드러난다. 이 작품은 20대 후반을 살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인 주인공 사이먼과 그의 친한 친구이자 마찬가지로 한국계 미국인인 낸시가 어느 주말에 한 낯선 남자를 찾기 위해 벌이는 작은 모험(?)담이 줄거리인데, 사람과 사람의 만남, 성장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섬세한 집착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어떤 순간에도 낙천주의에 빠지지도, 유머감각을 잃어버리지도 않는 절묘한 균형감각이 이 모든 것의 척추를 이루어주고 있다.

한국계라고 해서 왠지 뻔한 기대를 가지고 있을 독자들도 있겠지만, 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곳은 옛 TV시리즈물 의 이상한 이국 공간이 아니라 그냥 미국이다. 정체성과 관련된 고민이 인위적으로 제거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민족주의의 차원이 아니라 인종적 출신 성분의 문제다. 이들의 생활은 ‘교포’가 아니라 ‘한국계 미국인’인 것이다. 좋은 예는 사이먼과 낸시가 슈퍼마켓에서 오리엔탈 맛이라고 쓰여진 라면을 놓고 펼치는 짧은 만담대화인데, 미국사회가 아시아계에 대해서 가지는 생활화된 편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무척 자연스럽고 유머러스하게 풀어내고 있다. 여하튼, 결국 이 작품에서 주인공들이 겪는 성장은 추상적인 정체성을 찾기 위한 애매한 과정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사람들과 같이 살아나가기 위한 삶의 지혜를 배워나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에는 20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철없이 방황할 시기는 이미 지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활에 찌들고 굳어버리기에는 다소 이른 나이이기 때문이다. 법적인 성인이지만 아직 완전히 ‘어른’이 되지는 않은 시기. 장래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지는 않지만 직장은 있고, 결혼에 진지하게 목매이기는 아직 싫지만 고등학교 동창 녀석 가운데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시기인 것이다. 사람들과의 인연 속에서 조금씩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조금씩 성장을 이루어내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성장통과 자기연민적 성찰은 결코 과잉된 낭만으로 무겁게 짓누르지 않는다. 도서관에서 일하며 취미로 만화나 그리는(!) 자기연민으로 가득한 주인공일지라도 삶의 무게에 망가지지 않도록 하는 이유는, 바로 수다다. 혼자 독백으로 중얼거리는 일방향 뱉어내기가 아니라,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주고받으며 이루어진다. 고민은 바로 그 속에서 수정되거나 부정되고, 때로는 북돋아진다. 시시한 고민, 깊은 성찰, 실없는 농담 그 모든 것이 박진감 넘치는 수다 속에서 펼쳐진다. 마치 우디 앨런의 코미디 영화를 연상시키는 자아몰입형 주인공과 주변 캐릭터들의 화려한 재담이 촘촘히 수놓아지면서 전체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것이다.

이런 모티브들이 제대로 살아날 수 있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만화의 표현적인 속성들을 120%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대화가 아닌 ‘수다’의 박진감 넘치는 과정을 이토록 명쾌하게 표현하는 것의 일등공신은 칸 안팎을 넘실대며 서로 꼬이고 연결되어 있는 말풍선들이다. 대화하는 주인공들은 서로 말허리를 끊으며, 서로의 말꼬리를 부여잡고 비꼬고, 그 속에서 모든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그 과정이 말풍선이라는 장치 속에서 완전히 시각적으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급격한 시점 전환과 긴 응시를 효과적으로 배분하는 안정감 있는 칸 연출이 결합하여, 더욱 대화의 박진감이 깊이를 더한다. 그림체 역시 인종적 차이나 개별적인 표정을 섬세하게 잡아낼 수 있는 세밀함과, 만화적 여유를 쉽게 구사할 수 있는 약호화된 그림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아내고 있다. 4칸 이상 가는 미국만화를 볼 때 한국의 독자들이 흔히 느끼곤 했던 필체나 문법에 대한 거부감은 적어도 이 작품을 읽을 때는 벗어던져도 좋다.

사실 자신이 직접 발굴해서 번역 소개한 책에 대한 리뷰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겸연쩍은 일이기는 하지만, 다행히도 작품 자체의 우수성이 개인적 쑥스러움을 가볍게 넘어서줄 만한 힘이 있다. 물론 신인 작품 모음집이 첫술부터 완벽할 수는 없다. 실제로 표제작인 ‘다르면서 같은’ 이외의 단편들의 수준은 고르다고 하기 힘들다. 성찰의 무게감에 짓눌린 자전적 초기 작품들도 있고, 너무나 날 것 그대로의 거친 풍자 때문에 김이 빠지는 것도 있다. 그에 비해서 작가가 겪은 한국에서의 일화를 소개한 단편들이 한국 독자들에게 주는 은근한 미소는 아마도 각별할 것이고, ‘올리버 픽’ 같은 짜증날 정도로 자기연민의 극단을 달리는 이야기들에 매니악한 재미를 느끼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인의 첫 단편모음집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볼 때 그 정도의 들쑥날쑥함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르면서 같은>은 사람들 사이의 만남과 자기연민에 관한 재담이다. 그것을 성장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나간 표제작, 또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시도를 하고 있는 여타 단편들이 어울려서 각각 다르면서도 같은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다르고도 같은, 다르기에 같은, 다르다는 점이 바로 같은 사람들의 관계맺음 – 사실 그것이 우리들의 삶 그 자체 아니겠는가.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뻔뻔함의 승리 – <돌격! 크로마티 고교> [기획회의 050205]

!@#… 며칠간 운나쁘게도 내 블로그 업/다운/수정이 모조리 에러로 먹통이 되어있다가 이제서야 다시 정상가동(고객센터에 문의메일 보냈었으나 물론 답변이나 해명은 없음… 역시나 한 불친절 하는 네이버의 위력).

!@#… 지난호 기획회의 원고, 크로마티 고교. 우연히도 <두고보자> 동료이자 만담 라이벌/파트너인 김태권님도 <네트워커>에 연재중이신 칼럼 지난호에서 똑같은 작품을 다루었음. 그것도 하필이면 마찬가지로 개그의 문법에 대한 걸로…;; 음 무서운 일이다. -_-;

=================================================

뻔뻔함의 승리 – <돌격! 크로마티 고교>(노나카 에이지/서울문화사)

세상에서 가장 힘든 행위가 바로 남을 웃기는 것이다. 하물며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웃기는 것이라면 더더욱 압박을 받을 일이다. 특히 상대방들의 기대수준이 높을 수록 더욱 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개그 만화는 최악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유머 기법을 고도로 발달시켜온 만화라는 장르를 통해서 이미 수많은 웃음의 공식과 코드들에 식상하리만치 익숙해져버린 독자들을 만족시키기는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그래서 야심찬 첫단추를 꿰었다가도 아이디어 고갈에 따라서 얄팍한 패러디에 의존하다가 결국 단명해버리는 작품들을 얼마나 많이 목격했던가.

이런 상황에서 자신만의 아우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확실한 반전효과를 연마하거나, 획기적인 소재를 불러내고는 한다. 하지만 어떤 작품들은 오히려 정반대로 허를 찌르기 위해, 극단적일 정도의 무의미함과 뻔한 소재를 뻔뻔하리만치 끝까지 밀어붙이는 수를 쓴다. 상식에서 어긋남을 극단으로 밀고가서, 완벽하게 부조리하고 황당한(매니아층에서는 흔히 ‘아스트랄’이라고 일컫어지는) 요소들이 포진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일상적이고 뻔한 생활세계에 난데없이 그런 부조리한 인물들과 이야기들을 집어넣음으로써 강렬한 대비효과와 함께 당혹스러운 악취미성 웃음을 터트리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황당한 괴리에 질려버려서 그냥 책장을 덮어버리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 ‘벽’을 넘어서는 자에게는 중력의 법칙을 벗어나는 웃음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돌격! 크로마티 고교>(노나카 에이지/서울문화사. 4권 출간중)는 최근 이러한 계열의 개그만화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다. 줄거리만으로 요약한다면, 무척 단순하다. 카미야마라는 모범생이, 실수로 크로마티 고교라는 깡패 학교에 진학해서 그곳의 여러 인간군상들 틈새에서 일상적인 학창생활을 보내는 이야기다. 하지만 여기에는 우정과 성장의 모티브 따위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고, 불량아 집단이라는 설정 역시 양아치와 권력관계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단지 완전히 상식을 벗어난 괴짜 캐릭터들을 도입하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즉 싸움을 하고 세력다툼을 하기 위한 불량아가 아니라, 분위기는 잔뜩 잡지만 사실은 엄청난 바보인 괴짜들이라는 말이다. 그냥 성격이 괴짜라든지 하는 정도의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학생이라고 볼 수 없는 콧수염 아저씨, 진짜 고릴라, 로봇, 복면 레슬러가 태연하게 학생으로서 등교하고 다닌다. 학원 폭력물의 전통을 이어받아 가끔 이쪽 학교의 누군가가 상대 학교에 납치당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는 깡패들이기 때문에 별로 불쌍하지도, 분노할 여지도 없다. 심지어 유일하게 ‘범생이’라고 설정되어 있는 주인공 카미야마마저도 실상 하는 짓을 보면 의도와 상관없이 결과적으로는 그 어떤 깡패보다도 더욱 악랄하다. 정작 그림체는 거친 선의 극화로 전형적인 조직폭력물을 연상시키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상식을 벗어던지지 않고는 도저히 즐길 수 없는 과격한 개그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별다른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냥 수학여행도 가고, 학교도 다니고,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가 악플에 스트레스도 받는, 그렇고 그런 일상밖에 없다. 아니 오히려, 이 만화는 적극적으로 그 시시함을 스스로 강조하기까지 한다. 등장인물들의 실제 대화를 통해서, 사실 원래 현실이라는 것은 별 것 없고 극적인 무언가가 일어나는 것도 아니라고 작중에서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다! 막나가는 허풍을 핵심무기로 하는 개그만화라는 장르에 속해있으면서, 오히려 그 점을 스스로 지적하고 비웃어버릴 정도로 자학적인 정서가 있는 셈이다. 이런 극단적인 뻔뻔함을 처음 접할 때는 당혹감이, 두 세 번 반복해서 접하다 보면 슬슬 어이없는 웃음으로 바뀐다.

연출방식 역시 이런 패턴에 맞추어 짧은 에피소드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결코 복선이나 중층적인 서술을 사용하지 않고, 아무리 당혹스럽고 황당한 전개라고 할지라도 우선 벌여놓고 보는 것이다. 언제라도 갑자기 다음 칸, 다음 페이지에 외계에서 운석이 떨어져서 학교 건물을 덥치더라도 이상하지 않고, 말을 타고 학교에 달려들어와도 태연자약하다. 특별히 결정적인 개그에 앞서서 반전효과를 위해 평온하고 정상적인 정서를 강조하는 연출조차도 왠만하면 그냥 배제한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도 아무리 황당한 일이 벌어져도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냥 납득해버린다; 엄청난 바보들이니까 말이다. 한발 더 나아가, 그림체를 통한 시각표현 역시 조금도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막무가내 부조리 개그 분야의 최고 모범사례 작품인 <멋지다 마사루>(우스타 쿄스케 작)에서조차 결정적인 임팩트가 필요한 순간에 그림체의 밀도를 급격하게 높이거나 낮추는 등 상당히 잘 계산된 시각연출을 보여주고 있는데, <돌격!크로마티 고교>는 그것마저도 무시한다. 마치 무표정하게 사랑의 노래와 저주의 폭언을 동시에 퍼붓는 사람마냥, 이 작품은 너무나 균일하게 진행되기에 더욱 더 그 속에 담긴 부조리한 개그요소들이 더욱 돋보인다.

모든 개그만화의 숙명인 ‘독자의 익숙해짐’이다. 독자라는 존재들의 적응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뛰어나서, 어떤 새롭고 과격한 개그라고 할지라도 어느 틈에 익숙해져서 더 새롭고 강한 자극을 찾기 마련이다. 한마디로, 식상해지는 것이다. <돌격!크로마티 고교>는 오히려 처음부터 반복과 지리멸렬, 황당함과 충격효과를 마구 남발함으로써 뻔뻔하게 그 점을 정면돌파하는 길을 택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 결과 2002년 고단샤 만화상 수상을 통해서 대중과 업계의 높은 평가를 증명 받았고, 애니메이션 시리즈 방영에 이어 심지어 최근 실사영화까지 제작되었다. 남을 웃음으로 인도하는 길은 멀고도 험난하지만, 결국 개성과 뚝심으로 성공에 도달하는 이런 작품들이 나와주고 있기에 여전히 개그만화는 즐거운 법이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The Dilbert Future [기획회의 050120]

!@#… 지난호는 신년특집으로, 그냥 자유롭게 자기가 작년 한해 읽은 책들 중 가장 좋았던 것 하나 골라서 추천하는 것이었음. 원래 한국에 출시도 안된걸로 작품평쓰는 짓거리는 되도록이면 안하는 주의지만… 이번에는 그냥 큰맘먹고 관철. 이 평을 보고 삘받은 사람이 있으면, 아마존에서 주문하시길(사실, 예전에 나왔던 ‘딜버트의 법칙’은 유머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국 번역의 수준이 심히 민망했기 때문에).

================================

– 21세기에도 멍청함은 계속된다

1년동안 읽은 모든 책을 통틀어서 가장 감동 깊게 읽은 것 한 권만을 뽑는다는 것은 무척 당황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굳이 선택을 해야 한다면, 그리고 장르에 상관 없이 선택해도 된다면, (Scott Adams / Harper Perennial)을 꼽고 싶다.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미래학(?) 책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극도로 시니컬한 샐러리맨 만화 <딜버트> 시리즈의 작가인 스콧 애덤스가 제시하는 ‘앞으로 반드시 일어날 65가지 트렌드’가 담겨 있다. 1998년에 첫 출간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게도 아직도 한국에 번역되어 들어오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이 시리즈의 전작 <딜버트의 법칙>(스콧 애덤스 저/ 이은선 역/ 홍익출판사)이 세계적 명성에 비해서 국내에서는 별로 빛을 못 봤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하기야 책으로서의 모양새도 원전의 독서 흐름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고, 번역 역시 성실하기는 했으나 장난과 유머, 그리고 샐러리맨 전문용어가 난무하는 원문의 맛을 제대로 살려내는데에는 역부족이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는 전작보다 훨씬 더 강력한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는 소개조차 제대로 안되어 있다. 책을 펼치자마자 첫 챕터에서 이미 완전히 압도당해버린 필자로서는, 애석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
<애덤스식 예측불능의 법칙>

좋은 트렌드가 발생하면, 예상치 못했던 무언가가 그것을 꼭 망쳐놓고 만다. 몇가지 사례:

좋은 트렌드                                                   예상치 못한 악재
컴퓨터 덕분에 일 처리가 100% 더 빨라졌다        컴퓨터 때문에 일이 300% 늘었다
여성에게 더욱 많은 정치권력이 주어졌다             여성들도 남자만큼이나 멍청하다
대중음악이 날로 발전하고 있다                          내가 너무 늙었나보다
————————— 의 부제는 “21세기에도 계속 사업상의 멍청함을 추구하며”다. 부제에서 느껴지는 재기발랄한 감수성처럼, 저자는 인간의 핵심 원칙을 3가지로 정의한다: 1.멍청함 2.이기성 3.발정. 가벼운 농담 같으면서도, 다시 생각해보면 너무나 절묘하다. 이런 식으로 이 책은 우리 세상의 본성을 논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근미래에 일어날 경향들을 툭툭 내뱉으며 뼈있는 농담을 던진다. 그리고 글로 열심히 이야기하다가 어떤 상황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해야할 부분에 도달하면 <딜버트> 만화 가운데 한 편을 적절하게 뽑아서 삽입한다. 만화와 일반 문자도서의 장점을 각각 고루 수용한, 대단히 자연스러운 독서가 가능한 서적인 셈이다. 

이 책은 분명히 사회과학 서적은 아니다. 아니, 아예 작가가 대놓고 통계는 어차피 사기치려고 가져다 붙이는 것에 불과하니까 피차 귀찮은 짓 하지 말자고 넉살 좋게 넘어가 버린다. 하지만 통찰의 깊이는 농담의 깊이 만큼이나 끝이 보이지 않는다. 98년, 즉 인터넷과 초고속 통신의 대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쓰여진 책이면서도 “누구나 뉴스 기자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필요없는 뉴스를 적극적으로 무시해야 할 것이다” 같은 전형적인 인터넷 시대의 모습들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다. 물론 ADSL의 보급화 이전이라서 ISDN을 최신기술로 소개하고 있다든지 하는 기술 특유의 빠른 시대변화상에 따른 격세지감은 어쩔 수 없지만, 가장 단순한 인간 본성에 대한 비관론 위에서 펼쳐내는 현란한 디스토피아의 향연은 박장대소를 금할 길이 없다.

사실, 이 책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작 <딜버트의 법칙>만큼 일관성 있는 흐름과 핵심적인 결론으로 수렴되는 구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사의 각종 토픽들이 챕터로 잘게 나누어져 있다. ‘애완동물’, ‘사교생활’, ‘건강’ 뭐 이런 식으로 구분하여, 각각에 대해서 이런 트렌드가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중구난방이라는 것이다. 물론 앞에 소개한 인간본성의 3대 법칙이라는 구심점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기는 하지만, 다 읽고 난 뒤에 각각의 것들이 잘 기억이 안 난다거나, 뭔가 끝까지 독파했다는 느낌이 부족한 감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부분을 ‘미래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으로 이름 짓고, 뉴에이지 운동을 연상시키는 극단적인 상대주의의 손을 들어준 것은 전체 책 구성이나 시니컬한 감성에 있어서 상당한 마이너스 요인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는 대충 넘어가도 대세에 지장은 없다. 마지막 챕터라 할지라도, 그냥 챕터 통째로 안 읽어도 되는 구조니까 말이다. 여전히 전체적인 책의 인상은, 이 작가는 천재라는 것이다. “미래에는 아무리 쓸모없고 멍청한 상품이라 할지라도 무조건 사들일, 귀가 무지 얇은 고객을 찾기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쉬울 것이다” 같은 자신만만한 예측을 만날 때 더욱 더. 그것을 매니아 마케팅이라고 부르든, 명품족이라고 부르든, 천민 졸부라고 부르든, 이미 우리에게는 현실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더욱더 이런 경향이 강해질 듯 하지 않던가.

어떤 훌륭한 출판사가 한 훌륭한 번역가를 고용해서 내준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사실 차기작인 (딜버트: 얍삽이의 길)가 한국 독자들에게는 더 쉽게 와 닿을 것이다. 왜냐햐면 <딜버트의 법칙> 때 처럼 다시 회사라는 조직사회의 이야기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개인적으로는, 간단한 비관적 규칙 몇가지를 바탕으로 온 세상의 미래를 종횡무진 예측한 이 책의 가치를 더욱 높이 사고 싶다. 실전 영어를 배우고 싶으신 분들은 기껏 외서부까지 가서 무슨 이상한 3류 추리소설류를 고를 것이 아니라, 이런 생활 감각과 유머, 통찰력이 가득 담긴 이 책 한권을 주문하실 것을 적극 권장해드린다.

—————————-

기타 2004년 추천도서 5권

– 안전지대 고라즈데 (조 사코 / 글논 그림밭)
– 널 좋아한적 없어 (체스터 브라운 / 열린책들)
– 남쪽손님/빗장열기 (오영진 / 길찾기)
– 일지매 1-5 완(고우영 / 애니북스)
– 불의 검 1-12 완 (김혜린 / 대원CI)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성장의 풍경 – <난 널 좋아한 적 없어> [기획회의041228]

!@#… 여담: 내가 참 짜증나는 건, 이런 책들이 나와도 제대로 보도자료 한번 나한테 도달하는 경우가 없다는 거다. 나도 나름대로 만화판에서는 ‘이리저리 떠들고 다니는 사람’ 축에 속할텐데 말이다. 덕분에 나온지 한참 뒤에야 우연히 발간 사실을 알게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거름 출판사에서 낸 <자살토끼>의 경우… 기획단계 당시 담당 편집자분이 나에게 찾아와서 자문까지 받아갔으면서, 정작 책이 나왔을 때 나왔다는 최소한의 연락 한번 안하더란 말이지. 공짜로 책달라고 조르지 않을테니까 (일정량의 보도용 증정본 돌리는 것 마저도 무척 아까워하는 출판사들이 가끔 있다; 거꾸로, 뭔가 써줄 것도 아니면서 온 시리즈를 전질로 한부씩 더 달라고 요구하는 도둑놈 심보의 기자들 역시 있고), 제발 이런 좋은 책을 냈으면 냈다고 좀 사방에 알리고라도 다녀 보란 말이다! 난 좋은 책이 나와주면 소개시켜주려고 안달인데, 어째서인지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그게 아닌가보다. -_-;

=============================

성장의 풍경 – <난 널 좋아한 적 없어>

  사춘기라는 시기가 있다. 그것은 급격한 육체적인 성장이 이루어지고, 정신 역시 그것을 헐레벌떡 뒤따라 가기 위해 휘둘리는 인생단계다. 더욱이 사춘기는 같은 사춘기에 돌입한 친구들과 사춘기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어른들 등과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더욱 더 복잡한 고민거리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누구에게나 사춘기는 필연적으로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그때는 격정과 혼돈, 절망과 희망으로 살았던 때”라고 열심히 기억속에서 미화(?)를 하기에 이른다. 마치 한국의 보통 예비군 남자가 누구나 다 술자리에서는 왕년의 특공대원이듯이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의도적인 허풍 또는 기억의 과장일 뿐이다. 실제로 그렇다기 보다는, 그냥 그렇게 느꼈던 것 뿐이다. 딱 한 발짝만 뒤에 서서 가만히 살펴보면 그 전에는 안보였던 것, 즉 그 당시의 감정 가운데 격정과 불안함의 방패 밑으로 숨기고 싶어했던 것들 – 바로 외로움과 공허함이 드러난다. 

  캐나다 만화가 체스터 브라운의 <난 널 좋아한 적 없어>(열린책들)은 바로 그런 감수성에 관한 이야기다. 이런 류의 작품들 가운데 삶을 바라보는 깊이 있는 시각이 담긴 것들이 의례껏 그렇듯이, 이 작품 역시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 특별히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보통 마을. 엄청나게 불행한 환경은 아니지만 뭔가 살짝 어긋나 있는 부분이 있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나는 한 소년의 이야기다. 이 속에는 극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성숙해지는 초월적인 성장담도, 과거의 충격적인 사건을 제시해서 현재의 내 모습을 정당화시키는 고백 수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담담하게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변화과정을 낮게 읊조릴 뿐이다. 섬세하고 세부적인 작은 사건과 묘사들이 주는 커다란 여운 속에서, 그 사소한 일상이 쌓여나가서 성장이라는 커다란 모자이크가 되는 것이다. 평범한 대화가 이어진다면 그것은 뭇 탐정물 마냥 나중에 엄청난 단서가 되어 사태를 반전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조금씩 쌓여나가며 하나의 감수성을 가진 성장과정의 모태가 될 뿐이다. 이것은 주인공이 나중에 무엇이 될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열린 결말로 끝나는 성장물들이 지니는 핵심적인 정서다. 왜냐하면, 그 이후의 성장은 단지 주인공의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을 읽고 있는 독자 자신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열증세가 있는 어머니, 어릴 때의 강박으로 욕지거리(보통은 사춘기 소년소녀들이 자신의 성장을 증명하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내세우고는 하는 것이다)를 스스로 봉인한 과거. 그러나 특별히 왕따인 것도, 엄청난 괴짜 천재 인기인도 아닌 그렇고 그런 삶이다. 자기를 좋아하는 여자애,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애, 친구, 동생, 동생의 친구… 그냥 일상적인 인간들의 일상적인 이야기다. 유머로 과장하지도 않고, 신파로 치장하지도 않는 평범함이 이 만화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그 무거운 평범함 속에서 점차 삶의 무게가 쌓여나간다. 별로 극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가슴 아파지는 어긋난 애정 관계, 패거리들의 우정과 결별, 그리고 어머니의 병세 악화… 이 속에서 주인공 소년은 미묘하게 조금씩 성장해 나아간다. “난 널 좋아한 적 없어”라는 대사 속에 담긴 자기 감정의 부정. 그 부정을 할 수 있다는 상황이 나타내주는 것은 바로 어느틈에 부쩍 다가 와버린 성장 그 자체다.  원래 우리들의 진짜 인생은 극적으로 확 변하기보다는 미묘하게 쌓여나간 부분이 대부분이니까.

  이런 감성을 잡아낼 수 있는 것은 꽉찬 사건의 연속보다는, 바로 관조와 여백의 정서다. 이런 여백 넘치는 감수성을 전달하기 위해서 만화라는 장르를 선택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이전에 <헤이 웨잇>(제이슨 작)에서 증명되었다시피, 단촐한 선화 위주이며 4등신화한 깡마른 사람들의 모습에서 풍겨나오는 쓸쓸함은 다른 어떤 이야기 장르에서도 이 정도까지 재현하기 힘들 정도로 일품이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처럼 강제로 움직임을 강제하지도 않고, 소설이나 시처럼 머리 만으로 모든 것을 그려내라는 이성적 호소를 하지도 않는다. 그저 비지 않았으나 읽으면 읽을 수록 뭔가 비어보이는 그림판의 연속으로 끌어들인다. 특히 페이지 가득한 역동적인 연출을 완전히 배제하고, 각각 그린 칸을 마치 앨범에 사진을 붙이듯 한 장 한 장 부착한 시도는 더욱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페이지당 6칸씩 같은 크기로 여백을 가지고 나열된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참을 수 없이 지리한 삶의 여백이 외로움의 정서가 되어 독자를 괴롭힌다. 아무도 특별히 외로워하지 않는 그 이야기 속에서, 사춘기와 성장의 외로움이 가득히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이 절대적으로 미덕만 있는 건 아니다. 외로움과 궁상은 때로는 위태로운 외줄타기니까 말이다. 특히 문화적 차이가 있는 것이, 한국의 일반적인 독자들이 살아온 성장과정은 작가의 그것보다 다른 의미에서 훨씬 더 극단적이고 역동적이기 때문이다(군대식 교육제도와 입시전쟁이라는 것만 놓고 보더라도 말이다). 즉 어떻게 보자면 ‘싱거운 명품녹차’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화라면 자고로 명쾌한 극적 전개와 결론을 원하는 사람들과도 확실한 상극이다. 그 반대로 정적인 만화라면 따듯한 메시지가 넘쳐흘러야 한다고 생각하며 최근의 속칭 ‘에세이툰’ 만을 떠올리는 사람들과도 상극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 한국의 대중적인 만화독자들 대다수의 취향에 어긋날 위험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내준 출판사의 용기에 응원과 걱정을 동시에 보내고 싶다. 또한 이런 식의 독서에서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는 새로운 만화독자들이 발견되는 계기가 되어주길 바란다.

  성장물을 보고 즐기는 것은 그 성장기를 이미 다 건너버린 후, 안전한 곳에 서있는 ‘어른’들이다. 성장기 이전이라면 어차피 공감할 수 없고, 성장기 와중이라면 굳이 다른 작품 속에서 무언가를 찾을 이유가 없으니까 말이다. <난 널 좋아한 적 없어> 같은 작품을 보면서 다시금 자신의 성장기를 돌아보며 새로이 발견한다… “나도 그때 외로웠던 것이구나”.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이야기의 이야기 – <천일야화> [기획회의041214]

이야기의 이야기 – <천일야화>(전진석/한승희)

‘이야기’라는 것의 매력은 무엇일까?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주인공들이 행동하는 방식들을 간접적으로 바라보는 행위가 우리에게 왜 즐거움을 주는 것일까. 여러 가지 설명이 나올 수 있겠지만, 크게 바라보자면 한 가지는 공감의 재미, 즉 주인공들의 감정과 활동상에 이입을 해서 같이 난관을 극복해 나아가는 듯한 쾌감을 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의외성의 재미, 즉 자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세상과 “나라면 결코 했을 리 없는 선택”을 내리는 주인공을 보면서 자신의 인식의 지평을 넓혀나가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를 얼마나 잘 배합할 수 있는가에 따라서 이야기의 재미가 좌우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모든 것을 다 풀어나가기는 쉽지 않고 욕심이 나기 마련이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수많은 요소들이 들어가 있는 복잡하고 큰 대하 서사극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이야기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수많은 작은 이야기들로 묶여져 있으면서, 그것 자체가 하나의 큰 이야기가 되는 구조로 끌고 간다는 말이다. 작은 이야기들이 각자 자신만의 매력과 기승전결, 이입과 의외성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모든 이야기들이 특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하나의 커다란 묶음으로 뭉쳐진다. 이런 구조 덕분에 세월의 흐름 속에서 독자들의 반응에 따라 새로운 이야기를 추가하거나 삭제하는 것이 쉽고, 각각의 세부적인 디테일 역시 쉽게 수정할 수 있게 된다. 즉 ‘시대와 함께 진화하는 이야기’가 되어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장르의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베스트셀러라면 역시 기독교의 “구약성서”겠지만, 가장 ‘재미있는’ 것을 고르자면 큰 이견 없이 아마도 “천일야화(아라비안 나이츠)”가 꼽힐 것이다. 연소된 그림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지만 결국은 이야기로 승부하는 장르인 만화에서, 이런 매력적인 이야기를 가만히 놔두었을 리가 없다. 때로는 통째로, 때로는 몇몇 작은 이야기들만 뽑아서 만화로 만들어져왔고, 성공도 실패도 있었지만 그 시도만큼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최근 좋은 반응을 얻은 <아라비안 나이트>(신일숙), 인터넷에서 붐을 일으키고 있는 온라인 연재만화 <1001>(양영순), 그리고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천일야화>(전진석/한승희) 등이 좋은 사례다.

<천일야화>는 <라스트 환타지>, <멀린의 신비한 마술학교>등 소년향 만화의 기반 위에서 익숙한 장르적 규칙을 비틀어 내는 것을 특기로 삼고 있는 스토리 작가 전진석의 글과, <연상연하>, <웰컴 투 리오>등 사건 위주의 드라마성이 강한 순정만화 계열 작가인 한승희씨의 그림이 만난 작품이다. 이질적일 수 있는 두 창작자의 성향이지만, 원래 다양한 이질적인 요소들을 하나의 용광로로 녹여내는 이야기인 천일야화의 세계 속에서 이 만남은 의외로 썩 어울린다.

아라비안 나이츠에서 여러 이야기들을 묶어내는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은 잘 알려져있다시피 바로 왕과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다. 사랑에 대한 깊은 불신을 가진 왕이 온 나라의 처녀들을 섭렵하며 다음날 아침 참수하는 횡포 속에서, 대신의 딸 세헤라자드가 들어가서 매일 밤 왕에게 진기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1000일(혹은 1001일)동안 공략, 결국 왕을 제정신으로 돌려놓고 해피엔딩. 첨삭의 자유를 누리는 이야기인 만큼, <천일야화>에서 작가는 아예 세헤라자드를 남자로 설정해버린다. 연인이자 가족인 여동생을 대신해서 끌려가는 것이다(여성향 만화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야오이 코드, 근친애 코드 등의 도입으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아직 좀 더 두고볼 일이다). 그리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역시 침대 머리맡에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감옥 골방에서 유언처럼 읊조리는 이야기가 되어 비극적 처절함의 분위기가 좀 더 부각되고 있다.

첫 번째 날의 이야기로 푸치니의 오페라로도 유명한 투란도테 공주 이야기를 꺼낸 것 역시 꽤 파격적인 발상이다. 초반에는 짧고 교훈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점차 복잡한 인생사와 애정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될 것을 기대하는 일반적인 패턴에서 벗어나, 첫 주자부터 이미 장엄한 이미지의 비극으로 시작해버리는 것이다. 전체 이야기의 흐름은 푸치니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그 선택 자체로 인하여 이미 <천일야화>가 지니는 독특성을 선전포고한 셈이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구체적인 형상의 선은 사건의 전달에 깔끔한 소화력을 주고 있으며, 남성향 장르와 여성향 장르에 익숙한 독자들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중성적인 칸 연출방식 역시 작품의 독서에 큰 도움이 되어준다.

물론 아직 1권만 발간된 상태이기 때문에 섣부른 칭찬도 비판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서 아라비안 나이츠를 모태로 하는 재해석 작품들이 빠지기 쉬운 “잡다한 이야기들의 일관성 없는 모음”이라는 함정을 어떻게 피해갈지, 아직 판단 내리기 힘들다. 원래 아라비안 나이츠의 다양한 이야기는 확실한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의 미덕, 지혜와 현명한 판단의 중요성 등의 교훈을 남겨주는 것이다. 이런 것을 효과적으로 잘 전달하기 위해서 다양한 사건과 진기한 세상 문물들이 소재로서 동원되고 있을 뿐이다. 설정 자체가 “왕에게 사랑과 지혜를 깨우쳐줘서 정상으로 돌려 놓자”라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당연한 말이다. 그런 목표의식이 좀 더 희미했던 이야기인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이라든지 “알라딘과 마술램프” 등은 사실 나중에 서양인들이 끼워넣은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도 비록 <천일야화>에서 첫 이야기로 사용한 것은 아라비안 나이츠의 설화 ‘칼라프 왕자와 중국공주 이야기’ 보다는 그것을 서양식으로 각색한 오페라 ‘투란도트’의 모습에 가까웠지만, 상당히 모험활극스럽게 시작한 이 작품의 전체적 스타일이나 주제면에서 잘 어울리고 있다. 첫 단추는 잘 들어간 셈인데, 이런 페이스를 놓치지 않고 계속 천일어치 동안 지속시키는 것이 관건인 셈이다.

이런저런 수식어나 분석 이전에, <천일야화>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만화 독서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이 바로 만나기에는 약간 부담스러운 부분도 없지는 않지만, 남성향과 여성향 독자들 모두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재미를 고루 갖추고 있다. 독자들의 많은 호응,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대급부로 작품 자체도 계속 좋은 퀄리티를 유지하면서 이후 이야기들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병기의 오락 – 강철의 대지 [기획회의 041130]

밀리터리(군사) 매니아라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젊은 남성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은 탱크, 전투기, 총기, 제복 등 군대 및 전쟁과 관련된 아이템에 지대한 관심과 지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살상용 병기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상황에 대한 애정이라니, 혹시 잔학하고 반사회적인 인간들의 집단이 아닐까? 다행히도, 대부분의 경우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뚜렷한 대결구도와 그 대결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 발달한 각종 기술과 전략들을, 하나의 취향이자 오락으로서 관심 있게 즐기고 있는 것 뿐이다. 마치 평범한 사람들도 전쟁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전략 놀이인 장기나 바둑이 즐거운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들의 관심사를 잘 반영해주는 장르가 바로 ‘밀리터리물’, 즉 군사대결물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교양필독서라고 항상 칭송받는 ‘삼국지’ 역시 큰 의미에서는 밀리터리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보통 밀리터리물이라고 부르는 작품들은 1차 대전 이후의 현대전을 다룬다. 인데, 이 장르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단지 전쟁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각종 전략 대결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병기 아이템의 먹이사슬 관계를 세밀한 디테일로 풀어나가는 방식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인기요소인 다양한 현대적인 병기가 일거에 발달해버린 시기는 바로 1차 대전 이후다. 전황을 일거에 뒤집어 놓을 수 있는 비밀의 신형탱크 등장, 그것에 맞서기 위한 또다른 특급 돌격 장갑차, 장갑차 위주의 전략에서 전황이 불리해지자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새로운 개념의 전투기의 도입… 이렇듯, 병기 아이템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 종종 밀리터리물은 사람보다 병기가 주인공이 되어버리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더욱 더 매니아 위주로 흘러가고, ‘바깥’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이해가 안가는 경지에 도달하기 쉽다.

최근 출간된 <강철의 대지 - 어나더 월드워2>(문효석/길찾기)는 이런 의미에서 밀리터리물의 기본 뼈대를 간직한 채, 아기자기한 대중적 요소들이 결합된 좋은 사례다. 작품의 제목이 시사해주듯 무대는 2차 세계대전인데(원래 밀리터리물의 최고 인기 배경이 바로 2차 대전이다; 인류의 전쟁 역사상 신병기와 그것을 운용하는 전략이 가장 급격하게 발달해 나아갔던 시기 아닌가), 페이지를 펼쳐보면 뭔가 다르다는 것을 곧바로 느낄 수 있다. 우락부락하고 험악한 군인들 대신, 군복을 입은 북실북실한 동물들이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그림체 자체도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컬러로 되어있어서, 딱딱한 놋쇠의 질감보다는 프라모델로 만든 디오라마를 연상시키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각종 탱크와 장갑차들이 난데없이 로봇으로 변신한다든지 하는 자유로운 시대착오가 이루어지고 있다. 나아가, 이들이 벌이는 소동 역시 처절한 살육과 파괴 보다는, 신형 탱크로 경주를 하는 등 어쩐지 ‘생각보다 건전한’ 경연장이 되어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강철의 대지>가 밀리터리물로서 조금이라도 부실하다는 말은 아니다. 미국군, 독일군 등 기본 진영은 현실 그대로 남아있고, 전략 개념에 대한 접근이라든지 병기에 대한 세심한 설정 등은 결코 녹녹하지 않다. 하지만 반대로, 전쟁에 관한 작품이라면 흔히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중후장대한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 역시 곤란하다. 의인화된 동물 주인공들의 이야기라고 해서 웰즈의 <동물농장> 같은 사회풍자극을 상상할 필요는 없다. 또는 전쟁 이야기라고 해서 헤밍웨이의 소설들 같은 드라마틱한 인생역정과도 그다지 큰 관련이 없다. 단지 다양한 상상력으로 가득한 병기 경연과 대결구도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이 장르의 가장 원초적인 목적 – 전략과 병기에 관한 상상력을 통한 오락 – 을 더욱 근본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것을 단점이라고 지적할 수도 없지는 않겠지만, 장점이라면 이것만큼 확실한 장점이 어디 있겠는가.

이렇듯 부담을 잔뜩 덜어내고 보다보면, 이 작품의 재미에 본격적으로 눈뜰 수 있다. 이 작품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사람(그러니까, 동물)들이라기보다는, 변신 탱크 등 다양한 병기들이다. 이런 덩치 큰 주인공들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책의 판형 역시 큼지막하게 나와 주었으며, 긴 서사 모험담이 아닌 짦막한 에피소드 여러 개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치 각종 캐릭터 소개를 따로 하듯이, 맨 뒤에는 병기들에 대한 설정자료가 빼곡하게 들어가 있다. 어떻게 이 탱크가 로봇으로 변신하고, 목적은 무엇이며, 언제 개발되어 활용되었는지 등등, 무한한 애정으로 뒤덮여있다. 그것은 어린 시절 수많은 소년들이 태권브이와 마징가의 대결을 꿈꾸었듯이, 그 과정에서 “사실은 팔꿈치 뒤에서 미사일이 나간단 말이야”라고 주장을 하고 그 억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팔 속에 미사일이 장착되어 발사되는 과정을 그림으로 친구에게 설명해주는 그런 즐거움과 같다.

<강철의 대지>는 밀리터리물이 뭐가 그리 재미있다는 것인지 호기심이 들었지만, 딱딱한 군대의 이미지가 주는 거부감이라든지 지나치게 매니악한 세부설정을 강요받는다는 느낌 때문에 접근이 힘들었던 사람들이 입문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작품이다. 상상력으로 점철된 병기 대결구도가 주는 신기함과 시각적 쾌감은 그 자체로서 이미 훌륭한 오락이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추신: 여담이지만, “진정한 병기 매니아는 전쟁을 반대한다!”라는 격언이 있다. 왜냐고? 전쟁이 일어나면 그 사랑스러운 병기들이 모두 부서지니까. -_-;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절대적인 힘에 관한 오락 – <데스노트>[기획회의041102]

여러분들에게, 다른 사람을 아무도 모르게 죽여 버릴 수 있는 힘이 생기면 어떻게 할 것인가. 뭐랄까, 하늘을 날아다닌다든지 순간이동을 한다든지 괴력을 발휘한다든지 하는 소박한 초능력과는 비교가 안되는 막강한 권세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과연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최근 KBS에서 인기리에 방영중인 애니메이션의 원작인 <고스트 바둑왕>이라는 작품이 있다. 제목 그대로 바둑을 소재로 하는 만화인데, 이 작품이 연재된 일본에서는 청소년들 사이에 바둑 붐을 일으켰을 정도로 큰 인기와 영향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아무리 뭐든지 한번 히트하면 확실하게 붐이 일어나는 일본이라지만, 젊은이들의 전반적인 무관심 속에 확실하게 쇠퇴하고 있던 일본 바둑을 다시 일으킨다니… 범상치 않은 무엇인가가 있는 내용임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며 책장을 펼쳐본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 경우, 바둑이라는 분야) 스스로도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소년이, 다듬어진 천재인 강력한 라이벌을 만나면서 각성, 뜨거운 우정과 경쟁의 관계 속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어 나간다. 그리고 그 와중에는 주인공 소년의 각성과 성장을 지도해주는 트레이너(이 경우는 과거 바둑의 명인이었던 유령)가 존재한다. …너무 뻔하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이 작품을 돋보이게 만든 것은, 결국 두 주인공 사이의 팽팽한 긴장관계다. 서로 완전히 대조되면서도 사실은 비슷한 구석이 있는, 적대 관계이면서도 서로 우호적이며, 라이벌이자 서로의 성장의 원동력. 바둑이라는 상당히 정적인 활동인데도 불구하고, 두뇌싸움을 넘치는 박진감으로 그려내는 솜씨가 탁월했던 것이다.

바로 그 작가, 오바타 타케시(스토리: 오오바 츠쿠미)의 신작이 최근 발간되었다. <데스노트>라는 작품인데, 무려 고등학생 연쇄살인마가 주인공이다. 저승사자(사신)들은 공책을 하나씩 들고 다니는데, 그 ‘데스노트’에 이름을 적히는 사람은 죽는다. 염라대왕의 명부라는 오래된 테마를 현대적으로 변용한 셈인데, 사신 중 하나가 인간계에 그 노트를 떨어트리고 주인공이 노트를 주우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름대로 끔찍한 도구를 손에 쥐고 고뇌하고 갈등해야할 주인공…을 기대하겠지만, 이 작품은 약간 다르다. 하필이면 그 주인공은 천재 고등학생이었고, 이 노트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세계의 범죄자들의 씨를 말려서 정의로운 세계를 만들고 그 곳의 지배자로 군림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진 것이다! 하지만 그 연쇄살인마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세계 최고의 탐정, 가칭 ‘L’이 달려드는데…

전작과는 다른 스토리 작가 덕택에 소재는 완전히 하드하게 바뀌어버렸지만, 작가는 이번에도 자신의 장기인 두 천재 사이의 두뇌싸움을 들고 왔다. 다만 이전보다 훨씬 더 노골적으로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관계, 즉 범인과 탐정의 구도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초자연적인 트레이너가 등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여전히 긴박감 넘치는 드라마 속에서 대결이 이루어지고, 대부분이 대화와 표정연기로 흘러감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재미를 주면서 히트작으로 등극하고 있다. 덕분에, 아무리 소재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불리우는 일본의 주류 만화판이라 할지라도 유수의 대중적인 소년만화 잡지에서 무려 연쇄살인마가 주인공인 만화를 연재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모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소재 선정의 특이성에 특화되어 있는 일본만화계에서나 나올 수 있는 경우지만, 동시에 적지 않게 특이한 사례로 볼 수 있는 작품인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은 몇몇 천재소년들이 아니라, 바로 ‘데스노트’라는 도구 그 자체다. 절대적인 힘이 주어질 때, 그것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상황이 주는 재미가 바로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이다. 공책을 주운 주인공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면서 범죄자들을 일방적으로 살인한다는 설정이 주는 부도덕한 쾌감도 잠시에 불과하다. 곧 그가 살인 대상을 그의 정체를 추적하는 수사관들까지 확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섬뜩함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그를 추적하기 위해서 여러 명의 희생을 전혀 개의치 않는 추적자 탐정의 행동 역시 즐기기 힘든 자극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불쾌함이 극에 달하는 부분, 서로의 정체를 모르는 두 명이 서로 다른 곳에서 “내가 바로 정의다”를 외치는 장면까지 오면 이 기이한 소년만화의 사악한 재미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특별히 어떤 성찰적이거나 교훈적인 무언가를 표방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일본 주류 만화판의 소재 중심 제작방식의 첨단에서 나온, 기본적으로는 전형적인 주류 오락물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복합적인 심경을 느끼고야 마는 것은 어쩌면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독자로서의 입장에서 지어낸 감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에 전혀 갈등하지 않는 확신에 찬 – 마치 야구에서 우승을 따내고야 말겠다는 식으로 다짐을 하며 좀 더 효율적인 살인에 매진하는 주인공에 점차 익숙해지면서, 무언가 모를 찝찝한 자극을 느끼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이유가 없다. 나도 그런 힘이 주어지면 저렇게 될지 모른다는 공감의 능력이 발동하고 있기 때문이니까. 그리고 ‘공감’이야말로 대중 오락에서 생성되는 재미의 근원이 아니던가.

‘권선징악’이라는 명제는 항상 결과적으로는 참이 될 수 밖에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기는 자가 ‘선’이고, 진 자는 자연스럽게 ‘악’으로 사후 규정되는 세상이니까. 가끔은 그런 냉엄하고 부도덕한 현실을 대놓고 직면시켜주는 주류 오락물이 나와서 히트치더라도 나쁘지 않겠다, 라는 생각이 든다. 혹시 주변에 ‘데스노트’가 떨어져있지나 않은지 살펴봐야겠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허 —

개그만화의 오늘 – <츄리닝> [기획회의041019]

빌딩과 ‘삘띵’의 차이는 뭘까? ‘빌딩’이라고 하면 63빌딩이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떠올리지만, ‘삘띵’이라고 발음하면 동네 골목길 어귀에 서있는 4층짜리 상가 건물을 떠올리게 된다. 미묘한 뉘앙스에서 오는 커다란 이미지의 차이. 그런 비슷한 경우가 바로 ‘츄리닝’이다. 우리가 트레이닝복이 아니라 ‘츄리닝’이라고 할 때, 그 어감이 주는 임팩트는 남다르다. 굳이 운동을 하기 위해서 입는다기보다는 단지 헐렁하게 대충 걸치고 무언가 시시껄렁한 짓거리를 하면서 돌아다니기 위한 복장. 잔뜩 폼 잡고 조깅이라도 할 듯 나왔다가,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나 한모금 빨고 다시 들어가서 TV나 보는 패턴이 어울리는 복장이다.

<츄리닝>(이상신, 국중록 저 / 애니북스)은 스포츠신문 연재만화 가운데 하나를 단행본화한 것이다. 애초에 주 2회 연재의 마이너한 코너에 불과했던 시리즈로 시작했다가, 금새 주 6회씩 연재되는 정규 꼭지로 격상되었다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최근 1년여 동안 가장 좋은 반응을 얻어내고 있는 연재물 중 하나다. 실제로 신문 판매량 증가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수많은 개인 블로그와 게시판으로 ‘펌질’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 인기를 여실히 실감할 수 있다. 제목 그대로, 여러 가지 다양한 상황 속에서 결국 헐렁하게 사는 방식이나 시시한 (하지만 꽤 욕망에 충실한) 결말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짧막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흔히 연재물이라고 할 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를 주욱 연결해서 이야기해주거나, 에피소드 방식을 취할 경우라고 하더라도  하나의 캐릭터가 겪어나가는 하나의 세계의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트라우마>, <애욕전선 이상없다>등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연재물과는 다소 다른 특징을 지닌 작품들이 주류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이 연재물들은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나 캐릭터를 담아내기 보다는, 서로 전혀 연관성이 없는 에피소드들이 매일 새롭게 펼쳐질 뿐이다. 이 시리즈를 하나의 작품으로 묶어주는 것은 캐릭터나 커다란 이야기가 아니라, 작품의 브랜드다. 하지만 단편 모음집과도 다른 것이, 일간이나 최소한 주 1,2회 이상이라는 빠른 연재 페이스 속에서 분명히 이것이 연속된 연재물임을 느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츄리닝>은 바로 이 분야에서 성공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작품이다.

이러한 방식이 개그라는 장르에 효과적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정해진 캐릭터와 상황으로 이야기를 끌고나가면서 개그를 발휘하는 것은 물론 장점도 많지만, 한계가 명확하다. 우스운 이야기를 나눌 때, “…너네들, *** 알지? 아 그 사람이 말이야 지난번에…” 라고 하는 것과, “…참새 두 마리가 전신주 위에 앉았는데 말이야…” 라고 시작하는 이야기는 자유도의 폭이 다르다. 웃겨야 한다는 지상목표를 위해서는 어떤 자유롭고 황당한 설정이라도 새로 만들고, 또한 생명력이 다하면 그대로 버리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 중 많이 웃겼던 설정은 나중에 한번쯤 더 써먹으면 그만이다. 독자 입장에서도, 세계관이 이 에피소드 다음에도 계속 지속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그 한 회를 보고 가볍게 웃고 나면 끝이다.

<츄리닝>은 이러한 전략에 무척 충실한 만화다. 모든 개그는 그 한 회 한 회로 자기 설정을 만들어내며, 네 페이지 안에 확실한 결말을 본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이어나간다기보다는, 매번 새로운 코너에 도전하는 개그맨들과도 같다. 같은 얼굴, 같은 성격의 소유자들이지만 사실 전혀 다른 이야기, 다른 캐릭터를 소화하고 있다는 약속을 독자들과 이미 공유하고 있다. 물론 연재물 안에서도 연속성을 지니고 반복해서 등장하는 ‘탱구네 가족’ 등의 캐릭터들이 있지만, 그것은 마치 고전적인 우스개인 ‘참새 시리즈’에서 전신주의 참새들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덕분에, 어느 한 화를 떼어놓고 따로 읽어도 아무런 부담이 되지 않는 자기완결적인 호흡이 만들어진다. 쉽게 입문하고, 크게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어, 장편연재의 호흡을 지니는 작품인 <식객>의 하루 연재분량(6페이지)을 자기 블로그에 올려놓고 사람들보고 즐기라고 해봤자 무슨 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 하지만 <츄리닝>은 된다.

그 결과, <츄리닝>의 핵심은 개별적인 에피소드를 만들어내는 작가들의 능력이다. 비록 통일된 큰 이야기의 흐름이 없더라도 그림이나 개그 센스가(효과적인 분업의 힘이다) 시리즈로서의 구심력이 되어준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그만큼 위태로운 측면도 있다. 순간적인 임팩트의 강도를 위해서, 장기적인 이미지 구축을 상대적으로 게을리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분야의 선배격인 <누들누드>의 사례처럼, 나중에도 길이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식 연재 만화는 단지 순간순간의 빛나는 아이디어만으로 차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일관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 만약 <츄리닝>이라는 작품을 순간의 즐거움 이상의 의미로 만들고 싶다면, 우수한 개그 이상으로 좀 더 명확한 자기 색깔을 만들 필요가 있다. 만약 작가들이 지금의 빛나는 개그 재능이 소진되고 나면, 사람들은 <츄리닝>을 무엇으로 기억하게 될 것인가, 라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츄리닝>의 개그보따리는 도저히 마를 줄을 모르고 있다. 더군다나 이번에 출시된 단행본은 순서대로 작품들을 모은 것이 아닌, 베스트 에피소드 선집이다. 큰 흐름보다는 각각의 화에서 보이는 순간의 기지가 핵심적인 이 작품에 어울리는 방식이다. 한마디로, 누가 보더라도 충분히 유쾌할 것이다. 그 성과를 조금이라도 폄하할 이유는 없다. 현재 <트라우마>, <애욕전선 이상없다> 등 이 계열의 인기작들 역시 같은 출판사에서 계속 출간 진행중인데, 이들 역시 성공을 거두기를 기원한다. 누구나 자신의 서가에, 언제라도 한번씩 중간에 펼쳐들고 피식 웃을 수 있는 생활 속의 웃음창고를 보관해두는 습관이야말로 진정한 웰빙일테니까.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허 —

물을 만난 만화-<워터보이> [기획회의041005]

  ‘물’이란 우리에게 무엇일까. 무슨 자연보호 캠페인 내지 수돗물 절약 구호 같이 들릴지도 모르지만 원래 물은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 마땅한, 기이한 매력으로 가득한 물질이다. 특히 아주 약간의 예술적 상상력만 동원해보면 더욱 그렇다. 자, 그럼 상상해보자. 물은 기존의 공간을 채우면서 동시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물로 인하여 생겨난 그 곳은 공기의 공간과는 다른, 아니 숫제 상반되는 듯한 장소가 된다. 물과 물이 아닌 공간은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생명이라는 현상을 위해서는 서로 섞여들어가야하는 곳이다. 공간, 분리, 혼합, 흐름의 일체형,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매개체. 어떤가, 깊숙이 묻어두었던 예술혼이 마구 불타오르지 않는가? (…아니면 어쩔 수 없지만)

최근 출시된 <워터보이>(아이완 作 / 아트북스)는, 물의 공간적 속성이 지니는 매력을 마음껏 발산하는 만화다. 아닌게 아니라, 이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물로 가득하다. 우선 주인공인 ‘워터보이’를 살펴보자. 항상 발이 물에 잠겨있고 그 물이 몸의 절반쯤까지 올라와있는, 살아있는 물주머니 같은 존재다. 모든 이야기는 주인공의 방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곳은 항상 물로 반쯤 차있다. 그리고 어느날 물고기 아저씨가 와서 어항을 주고 가는데, 그 속은 물로 차있으며 물고기가 살고 있다. 그리고 물고기들은 어항, 주인공의 방, 나아가 워터보이의 몸까지도 물을 통해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헤엄치며 논다. 그런 방식으로 물은 공간과 공간, 나아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 이 작품 속에서 물은 더 이상 하나의 소재나 소품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다.

하지만 말로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은, 다소 난해한 작업이다. 그 점을 잘 인지하고 있는 듯, <워터보이>는 시각적 표현력에 신중을 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물이 만들어내는 열린 공간이 주는 매력을 잘 살려내는 커다란 가로판형, 일관되게 한 페이지에 한 칸씩만 담겨진 담담한 이미지의 흐름 등이 이러한 노력의 일부다. 또한 연필화 질감의 푸른 화면 속에 흑백 또는 단색톤의 캐릭터들이 펼치는 작가 특유의 연필화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환상적인 느낌을 한층 배가시켜준다. 특히 이 작품에서 묘사되는 물은 험난한 파도라기보다는 공간을 채우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러한 시각묘사 전략은 더욱 더 효과적이다.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물은 마치 작품의 주인공 그 자체라고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으로 묘사된다.

<워터보이>는 줄거리의 재미를 즐기는 만화가 아니다. 확실히 이 작품은 전통적인 기승전결, 주인공이 난관을 극복해나가면서 결국 성장하고 강해져서 세계를 구하는 이야기와는 무척이나 멀리 떨어져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단순한 그림 구경에 머무르지 않고 나름대로 독자들을 몰입시키며 다음 페이지를 넘기도록 만들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묘사로서의 이야기’라는 힘 덕분이다. 워터보이의 세계는 하나의 그림 속 이미지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공간을 옮겨가며 헤엄치는 물고기, 의자 밑으로 기어들어갔다가 사막으로 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서 비로소 완성되어 간다. 마치 수백년전에 단테의 <신곡>이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그러하였듯이, 나름대로 장구한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묘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워터보이의 시각에서 보자면) 나름대로 평범하고 소소한 행동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스며나오기 때문에 독자들로 하여금 묘한 일상성을 공감하도록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만화라는 장르를 선택한 것은 탁월했다. 즉 묘사로서의 이야기의 매력과, 실제로 매력적인 시각적 묘사를 결합시켜서 워터보이가 사는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상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만화라… 여담이지만, <워터보이>는 ‘어른을 위한 그림책’이라는 레이블로 출간되었다(아마도 마케팅 상의 이유에서 내려진 명칭 선택이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곁들인 그림의 연속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하는 예술양식이라는 속성에서 조금도 위배될 것이 없기에, 좋은 ‘만화’ 작품으로 칭함에 거부감이 없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용감한 동시에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미지의 흐름이나 경계선 없는 환상세계를 즐기는 것은 좋지만, 동시에 독자들로 하여금 낯선 독법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화 작품 감상인양 개별적인 그림의 묘사에 완전히 빠져서도,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오락만화인양 줄거리 진행에 집착한 나머지 답답해 해서도 안된다. 즉 <워터보이>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즐기기 위해서는 기존의 독법이나 줄거리의 재미를 버리고 새로운 균형점을 찾으라고 독자들을 종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둘 사이의 간극은 결코 좁지 않다. 보통은 작가가 그런 새로운 비젼을 고집스럽게 내세울 때, 독자와의 균형관계를 생각해서 접점을 마련해주고 타협책을 찾아 나서는 것이 편집자/기획자의 몫이다. 즉 첫 번째 독자로서 ‘좀 더 편한’ 독법이나 구성으로 다듬어달라고 조르는 – 혹은 직접 다듬는 역할이다. 가장 구차한 차원에서라면, “이 책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즐길수 있다”는 식의 홍보 카피나 해설 칼럼 따위를 첨부하는 식으로라도 말이다. <워터보이>의 경우, 그러한 노력이 부족해보인다는 아쉬움을 떨칠 수가 없다.

불평은 이 정도다. 만약 충분히 오래 서가에서 밀려나지 않고, 넓은 층의 사람들에게 제대로 소개가 된다면 결국은 안정된 독자층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매력과 완성도를 갖춘 작품임에는 틀림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필자는 여전히, 이 작가의 홈페이지(http://www.iwanroom.com)에서 봤던 예전의 온라인 작품 <점핑4>를 더 선호한다. 이야기라는 표현법에서 줄거리의 재미는 쉽게 포기하거나 가볍게 여길만한 지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입장인데다가, 작가가 그 것에 결코 무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해준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독자로서, 작가의 다음 책에 대해서 바라는 한가지 소망이다.
2004. 10. 5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