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광을 보며 성장하기 – 『하나오』[기획회의 060401]

야구광을 보며 성장하기 – 『하나오』

김낙호(만화연구가)

야구라는 스포츠는 자고로 수많은 대중문화, 특히 만화에서 많이도 소재로 활용되었다. 분명히 야구는 한국에서 인기 있는 스포츠고, 열정과 극적인 드라마가 가득하다. 비록 축구도 공은 둥글다며 격동의 승부를 강조하지만, 시간 제한으로 움직이는 스포츠가 아니기에 소위 ‘9회말 투아웃 끝내기 만루 홈런 1점차 승리’가 가능한 야구만큼은 아니다. 게다가 팀 스포츠이면서도 선수 개개인의 기량이 돋보이는 1대1 승부가 게임의 기본 룰이기 때문에, 통계적 수치화라든지 기타 등등 팬들이 광적으로 좋아해줄만한 요소가 많다. 하지만 반대로,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는 야구만큼 뻘쭘한 스포츠도 영 없다. 규칙에 익숙하지 않으면 도대체 어떤 식으로 경기가 진행되는지 별로 직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세세한 규칙을 몰라도 적들을 피해서 공을 그물에 넣기만 하면 되는 여타 구기 종목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즉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강렬한 열정의 대상이 되지만, 관심이 없는 자들에게는 열정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기 십상인 종목이다. 그렇기에 야구 경기 자체는 열정적인 드라마적 대결의 장이지만, 야구를 ‘바라보는’ 이야기로 간다면 열정과 이해의 충돌을 만들어주는 좋은 소재가 된다. 야구라는 스포츠 자체보다, 야구라는 스포츠를 좋은 소재로 활용하여 결국 꿈을 꾸는 것의 즐거움, 즐길 줄 아는 것의 즐거움을 서로 이해해나가는 이야기를 만들기가 좋다는 것이다.

최근 국내에서 완간된 『하나오』(전3권 / 마츠모토 타이요 / 애니북스)는 야구광 아버지와 야구에 관심 없는 아들 사이에 이해의 고리가 생겨나는 과정을 그린 유쾌한 성장물이다. 일본 최고 프로팀의 4번타자가 되겠다는 꿈 속에 살고 있는 아버지와, 모범생으로 살며 야구에는 관심 가지지 않고 살고 싶은 초등학생 아들이 같이 살게 된다. 그리고 여러 좌충우돌 속에, 역시 꿈을 꿀 줄 아는 것의 미덕에 아들도 점점 마음을 열게 된다. 그리고 황당하고 아름다운 해피엔딩으로 향해 간다. 동네야구에 열 내며 프로 최강을 꿈꾸는 아버지가 오히려 소년스러우며, 현실에 완전히 적응하여 합리적 인생설계만을 목표로 하는 초등학생이 어른스럽다. 그러나 그 애어른은 결국 나름의 오해와 성장통을 거치면서 꿈이 있는 소년으로 자라난다. 배트와 공, 글러브의 힘이다.

『하나오』의 작가 마츠모토 타이요는 한국의 여러 젊은 작가주의 만화 지망생들에게 필수 참조 작가로 등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만화라는 매체가 지니고 있는 특유의 ‘젊음’이라든지 ‘자유분방함’의 이미지를 내용도 연출도 만화 특유의 방식으로 스타일리쉬하게 소화해낼 줄 아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얄궂게도 그간 한국에는 『핑퐁』이라는 탁구만화 한 편만 소개되어 있었는데, 이번에 좀 더 발랄하고 대중적인 또다른 대표작으로 바다를 건너온 것이다. 『핑퐁』이 작가의 성향 가운데 보다 리얼한 묘사법을 추구하는 방향에 있다면, 『하나오』는 유희적 성향이 강하다. 하지만 두 작품, 아니 나아가 작가의 모든 작품을 꿰뚫는 핵심 모티브들이 효과적으로 농축되어 있다.

마츠모토 타이요의 작품세계의 핵심 키워드는 청춘, 유희, 그리고 광각렌즈다. ‘청춘’은 작가의 핵심 주제로, 주로 성장통이라는 모티브로 발현된다. 그런데 그 청춘은 바로 지리한 세상과 강렬하고 자유로운 자극 사이에서 발생하는 마찰의 시기다. 그 청춘의 끝(?)에, 작가는 마지막에 슬며시 자유로움의 손을 들어주곤 한다. 때로는 확실히 희극적인 해피엔딩으로, 때로는 세상에 대한 적응을 하면서도 속에는 자유의 희망을 품고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으로 말이다. 두 번째 키워드인 ‘유희’는 자유의 연장선상이다. 그것은 장난의 재미, 노는 것의 희열, 그것을 묘사하는 낙서의 즐거움이다. 때로는 등장인물들의 도피적 행위에서, 때로는 아예 동화적 상상으로 비틀어지고 기묘하게 여로 요소들이 제멋대로 혼합된 살짝 왜곡된 가상 세계로 나타난다. 낙서를 하고 공상을 하는 소년의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세 번째 키워드는 ‘광각렌즈’다. 광각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특유의 과장된 앵글과 원근법은 앞서 이야기한 주제와 감수성들을 표현해내는 시각연출 방식이다. 이 기법은 주인공이 살고 있는 세계를 극단적으로 주관적인 공간으로 만들며, 무언가를 단번에 뛰어넘고 싶어 하는 역동성의 이미지를 만든다. 중력이나 관성 같은 물리적 속박으로부터 자기 힘으로 벗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핵심 키워드는 『하나오』에 대단히 뚜렷하게 발현되어, 작품을 읽는 내내 독자를 즐겁게 만든다. 물론 아들은 변하지만 아버지는 사실상 변하는 게 없다는 점이라든지, 부자의 뜨거운 유대관계 속에 어머니는 별 역할이 없다는 것이라든지 이야기상의 허점을 찾아나서는 것이 어렵지는 않겠지만, 작품의 재미를 즐기는 즐거움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다.

이번에 한국에서 출판된 『하나오』의 소장 가치 역시 높다. 100% 완벽하지는 않지만 95점 이상은 줄 수 있을 정도로 세심한 번역, 좋은 인쇄품질과 멋진 제본이 그 핵심이다. 게다가 원래 작품 자체도 분량이 3권으로 마무리되어, 중간에 늘어지는 일 없이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만족감을 준다. 반드시 짧은 만화가 우수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훌륭하게 시작했던 만화 작품이 적당히 높은 인기 속에서 연재를 하며 줄거리 무한 엿가락 늘이기라는 함정에 빠져버리는 경우를 얼마나 자주 보았던가. 특히 캐릭터성과 에피소드 방식 전개로 되어있는 경우에는 더욱 더 말이다. 작가의 밥벌이는 보장하나 작품으로서는 무너지는 연재물들의 바다 속에서, 자기 작품을 완전히 관리할 줄 아는 귀중한 참조 사례이기도 하다. 작가에게도 출판업계에도 독자들에게도, 문자 그대로 ‘모범적인’ 만화로 널리 추천할 만 하다.

하기야 이런 세세한 부분에서 장점을 찾고 주변에 추천을 하고 있는 필자의 모습은, 만화라는 문화의 재미에 관심이 없는 분들에게는 마치 야구 관심없는 사람들에게 야구의 재미를 설파하는 야구광의 모습과 진배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다가 이 즐거움의 세계, 꿈을 꾸는 즐거움에 한사람이라도 더 입문시킬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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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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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 있는 세상 이야기 – 『사이시옷』[기획회의 060315]

!@#… 인권위의 인권만화 2탄. 원래 이 프로젝트는 초창기에 기획 참여 기회가 주어진 적이 있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냥 지나간 경우. 뭐 계속 10탄이고 20탄이고 진행되다보면 또 다시 연이 닿을 일이 생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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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 있는 세상 이야기 – 『사이시옷』

김낙호(만화연구가)

인권 보호를 위한 공식 기구로서 설립된 국가인권위원회는 그 광범위한 임무 범위 만큼이나, 정부 기관 가운데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대중 홍보 활동을 할 줄 아는 곳으로 정평이 나있다. 여기에는 정부기관지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세련된 기획 컨셉과 완성도를 자랑하는 <월간 인권>, 의식 있는 영화감독의 인권에 대한 단편영화를 묶어내는 인권 영화와 애니메이션 제작, 그리고 만화 단편과 에피소드들을 묶어서 책으로 발간하는 작업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단지 허울만 좋은 것이라면 또다른 의례적인 공무원 행사에 불과하겠으나, 다행히도 작품 자체로서 어느 수준 이상의 재미를 담보하고 있기에 진정한 의미에서 홍보와 소통의 기능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특기할만한 점이다. 특히 공공기관이 의례 빠지기 쉬운 단발성 이벤트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지속적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더욱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런 기조 속에서 최근 발간된 『사이시옷』(손문상 외 7인 / 창비)은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한 두 번째 만화 작품집이다. 첫 번째였던 『십시일반』이 불러온 기대 이상의 대중적 호응 덕분에 큰 문제없이 2집의 기획이 수월하게 착수될 수 있었고, 그 결과 새로운 작품집으로 다시 우리 앞에 나오게 된 것이다.

사실 『사이시옷』은 “만화가들이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이라는 부제와는 달리 사실 차별 있는 세상에 대한 고발이 주종을 이루어, 사실상 『십시일반』의 컨셉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장차현실의 『여배우 은혜』와 이애림의 『그는…』이 차별을 극복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이다. 한 권 만으로 차별의 모습을 다 보여준 후 다음 권에서 벌써 극복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에는 우리 사회 속 차별의 양상이 너무 다양하고 뿌리 깊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의 어두운 측면에 대한 비극적 정서가 지배적이다. 여덟 개의 작품들은 각각 비정규직 차별 문제부터 비혼모 출산에 대한 차별까지 넓은 차별의 스펙트럼 속에서 소재를 취하고 있다. 각 작품들이 해당 소재에 접근하는 방식은 진중하며, 주제에 대한 전달력 역시 그다지 오해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확보되어 있다. 각각 차별의 이슈들을 소개한다는 목표에는 충분히 합격점을 얻고도 남는다는 말이다. 이런 컨셉으로 이런 기획으로 계속 출간이 되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생기는 만화책 시리즈이기에 이런 점들은 더욱 소중하다.

하지만 소위 소포모어 징크스의 조짐이 보이는 구석도 여럿 있다. 앞서 말했듯 이전 『십시일반』의 컨셉에서 크게 발전적으로 벗어나지 못하다 보니 여전히 특정한 이슈 소재를 소개하는 것에 전체적으로 머물러 있고, 그것은 홍보활동 그 이상의 것으로 나아가기 힘들게 만드는 장벽이 된다. 즉 인권 홍보물으로서의 의의가 아닌 “작품”집으로서 가치를 부여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어떤 요소들이 제한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바로 가시적이고 뚜렷한 차별이라는 외관 속에 담겨 있는 훨씬 복잡하고 상호 모순되는 단면들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작품적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핵심이고, 교과서적 설명이 아니라 현실적 감동과 깨달음의 힘을 부여해주는 요소다. 무엇보다, 우리네 사회와 인생 자체가 원래부터 복잡 미묘하고 모순된 순간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현실속의 차별의 가해자 또는 피해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항상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다. 또한 그 속에는 우리 자신들의 습관과 의지, 그리고 사회의 시스템적 문제가 동시에 작용하는데 때로는 서로 같은 방향으로, 때로는 모순된 방향으로 일어난다. 인권 매뉴얼로서 차별에 대해서 학습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감동을 통해서 차별에 대해서 스스로 성찰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런 점들에 더욱 집중해야한다고 본다. 나아가, 만화라는 미디어를 택한 이상 그것이 만화 특유의 표현력 및  대중 친화력과 어떻게 효과적으로 결합하여 독자들에게 “읽는 즐거움”을 줄 것인가에 대한 것 역시 더 고민해야할 숙제다. 반드시 과장과 희화화를 해야 한다는 식의 일차원적 이야기가 아니라, 만화 양식이기에 더욱 강렬한 느낌을 주도록 만드는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차용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 ‘작품’으로서의 기준에서 볼 때, 개별 단편들 사이에는 분명히 편차가 존재한다. 마치 십시일반에서 마지막에 실린 작품인 최호철의 『코리아 판타지』가 그랬듯, 이번에도 마지막에 실린 최규석/연상호의 『창』이 가장 발군의 수준을 자랑한다. 사실 젊은 남자 작가들이 가장 진중하고 섬세하게 삶과 사회의 단면들을 붙잡아내곤 하는 소재가 한국 성인 남성 공통의 트라우마인 군대 생활이라는 것은 참 아이러니컬한 이야기다. 그도 그럴 것이, 군대의 씨줄 낱줄로 얽힌 엄격한 차별구조는 누구도 완전한 피해자도 완전한 가해자도 될 수 없게 만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흑백의 현실적 모습의 거친 연필화로 그려내는 한 ‘모범군인’과 한 ‘고문관’의 관계 속에서, 복합적인 피해 – 가해 관계가 솜씨 좋게 독자들의 성찰을 자극한다. 군대라는 소재 자체보다 이러한 미묘한 모순들이 바로 이 작품의 핵심이기에, 단연 이번 작품집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유승하의 『축복』도 누구에게는 축복이고 누구에게는 사회적 따돌림의 원천인 생명 잉태에 대한 모순된 시각들을 대치시키며, 이를 위해서 비혼모 임신을 강간이 아닌 합의 방식의 성에 의한 것으로 그렸다는 측면에서 분명히 눈여겨볼 작품이다. 그에 비해서 손문상의 단편들은 정규직/비정규직 문제라는 지극히 모순된 피해-가해 관계를 지닌 중요한 소재를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비정규직은 차별받는다는 단일한 명제를 주장하는 선에서만 소화해내서 아쉬움을 주고 있다. 다른 작품들 역시 크고 작게 장점과 단점들을 지니지만, 전체적으로는 차별이 있다는 것을 교과서적으로 알려주겠다는 의지가 아무래도 앞서서 오히려 더 큰 이야기를 못하고 있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사이시옷』은 무사히 두 번째가 나온 것만으로도 이미 높은 평가가 불가피한 시리즈의 일원이다. 그리고 아쉬움은 토로했지만 여전히 재미있게 읽을 만한 만화책이다. 다만 앞으로 나올 3탄, 그리고 그 이후에는 일정한 선택이 필요하다. 교과서적인 학습의 효과에 집중할 것인가, 아니면 직접적 교육효과는 줄이더라도 차별 양상의 현실적으로 모순된 미묘함에 매진하여 자발적 성찰을 유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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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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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잡지를 읽게 만든다는 것 – <격월간 새만화책> [기획회의 060301]

 !@#… 참고로, 블랙잭님이  “사람들이 대안만화 잡지를 사는 것은 독창성을 즐기고 싶어하는 욕구때문이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말아 주었으면 합니다” 라고 하셨는데 120%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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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를 읽게 만든다는 것 – <격월간 새만화책>

김낙호 (만화연구가)

사람들이 잡지를 읽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잡지라는 읽을거리는 최신 사항을 빠른 기간 안에 널리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신문과, 진득하게 한 가지를 파고들게 만드는 단행본 서적의 중간에 있다. 즉 하나의 긴 것 보다는 다양한 짧은 내용물들을 조합하여 일정한 기간 안에 발간하며, 다소의 현재성을 가지고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예, 뉴스가 아닌 창작 문화예술을 다루는 잡지의 경우는 어떨까. 시의적으로 출간되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대략, 그 장르를 일상적으로, 항상 정기적으로 즐기는 생활을 하도록 함이라면 좋을 성 싶다. 10년 동안 작업한 방대한 작품을 10년 동안 기다리게 한 후 읽히는 방식도 있고 1년마다 단행본 1권씩 쪼개서 출시해서 1년 주기로 10번 즐기게 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아예 잡지에 ‘연재’를 해서 10년 내내 일상적으로 즐기게 하는 방법도 있는 것이다. 즉 잡지는 작품을 생활의 일상성에 보다 가깝게 만들어준다. 또한 여러 작품들을 같이 묶어서 제시한다는 점 역시 대단히 중요한데, 하나의 작품에 심취하도록 하기보다는 일련의 작품들이 만들어내는 문화적 취향으로 감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것은 거꾸로 말하자면 창작 문화예술 잡지가 그런 기능이 가능하기 위해서 필요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바로 잡지의 작품들이 일상적으로 즐기고 싶어할 만큼의 지속적 매력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하나의 문화적 취향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색깔이 뚜렷해야 한다는 것이다. 1920년대의 문예동인지들 이래로 항상 그것이 좋은 창작 잡지와 쉽게 잊혀지는 잡지들의 가늠쇠가 되어왔다.

최근, 창작 만화지 <격월간 새만화책>(새만화책 발간)의 창간호가 출시되었다. 주류 장르공식을 따르는 만화보다는 작가의 개성적인 작품 성향을 중시하는 단행본을 위주로 작업했으며 지난 2003년 <계간만화> 1,2호를 제작한 바 있는 출판사답게, 이 잡지는 명시적으로 작가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실제로 창간호에 실린 작품들은 장르만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실상 표준화되어 있다시피 한 미형 그림체를 벗어나 있으며, 그 안에 담긴 이야기 역시 삶의 거친 측면들을 소설의 문예사조로 치자면 ‘리얼리즘’내지 ‘자연주의’에 해당될 방식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총 12편의 작품과 하나의 글이 실려 있는데, 작품들은 대체로 한 호흡으로 끝난다. 절반 이상이 단편이며, 연재물 역시 다음호에는 과연 어떻게 될까 하는 방식보다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내적 완결성을 지닌 것이 보통이다. 한국 작가가 주가 되지만, 해외 작가 가운데 잡지의 성향과 비슷하다고 판단되는 작가의 작품들도 네 편 포함시켰다.

작품들은 자전적 느낌을 구체적으로 강조한 작품들 (열아홉, 내 어머니 이야기, 푸른 끝에 서다 외), 또는 작가 자신의 페르소나를 캐릭터로서 직접 활용한 ‘정신적인 자전 에세이’ (미스터 워터멜론의 오류, 나 그리고 얌전한 고양이의 동거 외) 가 대부분이다. 극적 상상력으로 새로운 서사를 꾸며낸 작품(불행한 뱃사공, 도쿄 고려장 외)들이 오히려 전체적 분위기에서 뜨는 느낌이 강할 정도로, 그 분위기는 일관적이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통일된 컨셉을 통한 뚜렷한 취향 구축이라는 측면에서는 충분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자전적 느낌의 이야기는 작가의 세계관을 효과적으로 보여 주는 것에 용이한 장르다. 새로운 극적 창작물의 경우 뚜렷하고 일관성 있는 ‘작중 현실성’을 구축하기가 훨씬 어렵지만, 자전적인 느낌의 이야기의 경우 자기 삶의 경험이라는 뚜렷한 참조모델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상적 향유를 하고 싶게 되는 지속적 매력, 즉 넓은 의미의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어떨까. 사실 잡지란 결국 여러 작품들의 모음집이기 때문에, 각 작품들의 격차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 <격월간 새만화책> 역시 보다 뚜렷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 작품, 확실히 한 장르를 개척했다 싶을 정도로 이미 검증 받은 고전 명작 등이 한쪽에 분류될 수 있는가 하면, 재능은 보이지만 아직 덜 다듬어진 티가 나는 작품들이 다른 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전체적 수준에서 볼때, 시각적 만족이라는 명제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계간만화> 1,2호의 경우와는 달리 이야기로서의 재미가 상당히 준비되어 있다. 즉 잡지의 작품으로서 읽을 만한 매력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다만 아직 몇몇 작가들이 자신이 받아온 다른 해외 유사 장르 – 즉 ‘작가주의’ – 작품들의 영향을 스스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점은 명백하게 지적받아야 옳다. 작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들의 영향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을 자신의 이야기와 감수성을 전달하기 위해서 효과적으로 변용하고 수용해내는가 아니면 아직은 단지 모습을 쫒아가는 것에 불과한가, 라는 문제인 것이다. 예를 들어 『내 어머니 이야기』는 같은 출판사에서 작년에 출시한 바 있는 『페르세폴리스』(사트라피 저)의 시각 스타일과 연출방식을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다, 하지만 『페르세폴리스』는 아이의 맹랑한 천진함과 난해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역설적으로 충돌시키기 위해서 흑백 아이콘화된 그림체를 활용한 것인데, 이 작품의 경우는 차용해온 시각스타일과 자신의 이야기가 서로 녹아들어가지 않고 있다. 이외의 몇몇 작품들에서도 보두앵의 붓터치, 체스터 브라운의 방백 연출 등이 채 소화되지 못하고 거칠게 원용되고 있다. 이런 지점들은 반드시 편집자의 역량으로 적절한 조율을 해 나아감이 바람직하다.

무엇보다, 잡지의 진짜 매력과 위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발간의 지속성이다. 부디 <격월간 새만화책>이 창간호의 포부를 잘 이어가서, 뚜렷한 취향과 상당한 완성도를 지닌 만화지로서 확고하게 자리잡기를 기원한다.  ***

약간의 사족: 하지만 <격월간 새만화책>이 ‘대안만화를 다룬 최초의 잡지’라느니 ‘본격적으로 작가주의를 표방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느니 하는 식의 언론 보도들 앞에서 필자는 곤혹스러움을 거두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화끈>이나 <히스테리> 등 걸출한 사례들을 90년대 한국 인디만화의 성과들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자는 것인지. 하나의 대상에 대한 의미부여와 칭찬은 그 자체의 절대적인 우수함과 매력에 기반해야 하는 것이지, 결코 여기까지 오도록 기반을 닦아준 기존의 모든 성과들을 부정하는 방식을 통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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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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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 만담 활극 – 『은혼』[기획회의 060215]

!@#… 개인적으로, 은혼의 한국어판 번역자에게는 대략 200% 보너스를 지급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봉과 의욕부족과 실력부족의 3중고에 시달려서 엉망이 되기 십상인 (일본 주류 장르) 만화번역 관행에서, 참 보기드문 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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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 만담 활극 – 『은혼』

김낙호(만화연구가)

일본 주류 장르만화에서 가장 사랑받아온 역사적 소재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오다 노부나가로 대표되는, 전국시대의 화끈한 대결과 치밀한 정치적 암투가 있는데, 중국 고전 삼국지에 비견될 정도로 대하 서사를 위한 좋은 소재거리다. 혹은 거대한 힘에 의한 다양한 문명파괴 및 그 이후의 묵시록적 세계관으로 변용되고는 하는 원자폭탄 피폭 역시 원형적인 테마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분명히 수위를 다툰다. 하지만 드라마틱한 대형 서사보다는 개별 등장인물의 캐릭터성을 강조함으로써, 작품의 상품성을 극대화하는 전략이 90년대 이래로 완전히 주류가 되어버린 주류 장르만화라면, 약간 다른 방향의 소재를 찾을 필요가 있다. 그것이 바로 메이지 유신 전후, 개화기 일본이다.

개화기 일본은 여러모로 캐릭터적인 매력이 넘쳐난다. 우선 개화 결정 직전의 경우, 서양이라는 외부세력의 등장으로 인하여 일본이 개화파와 수구파라는 상이한 ‘우국충정’ 들이 충돌하는 시기. 그 속에서 용기 있는 개개인들은 각자 ‘지사’가 되었다. 신센구미 같은 사설 경비대(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정치깡패)가 나름의 우국충정을 이야기하고, 무명 시골 사무라이들이 검 한 자루와 대망을 품고 거리와 전장에서 결투를 벌였다. 즉 역사적으로 이미 증명된 풍운의 시절이기에, 가상 캐릭터들을 새로 발명하거나 역사적 인물을 캐릭터화 시키기 대단히 용이한 셈이다. 개화 직후도 매력적이기는 매한가지다. 역사적 결과 개화는 성공했다. 그 결과 새로운 역사적 시련을 맞이하지 않고 지난 혈투를 하나의 후일담으로서 되돌아보는 ‘지금은 평온하게 사는 왕년의 강자’ 라는 매력적인 캐릭터 부류를 도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배경 역시 일본의 전통적 가치와 서구적 신식 가치가 섞인 혼성적인 모습을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다. 전자의 부류에서 신센구미 같은 소대 단위의 조직적 인간 군상 또는 사카모토 료마 같은 걸출한 풍운아들의 굵고 짧은 인생을 모델로 하는 매력적인 현재진행형 이야기들이 즐비하다면, 후자의 경우는 『바람의 검심』의 90년대 후반 히트에서 볼 수 있듯 ‘과거 사연’이라는 멋을 더할 수 있다.

하지만 『은혼』(소라치 히데아키, 학산문화사. 10권 발매중)이라는 작품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아에 위의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사용한다면 어떨까. 개화직전의 매력적 풍운아들을 전부 캐릭터화 시켜서 들고 와서, 개화기 직후 혼성 세계의 ‘사연 있는’ 마을로 들고 오는 것이다. 물론 실제 역사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의 각색은 필요하다. 하지만 뭐 만화 특유의 표현 자유도를 이럴 때 마음껏 활용해야하지 않겠나. 아니 그렇다면 아예 확 나아가보자. 서방세계가 침범해온 것이 아니라, 아예 외계인들이 들어왔다면 어떨까. 그리고 비극적인 최후는 대략 삭제하고 신선조가 개화 후 수도의 경찰대가 되어 있다. 그리고 아무래도 이 정도로 막나가는 설정인데 꿀꿀한 대하드라마로 하기는 이미 글렀으니, 화끈한 개그로 노선을 정해보자. 물론 과거의 사연들과 캐릭터들이 모델로 삼고 있는 역사적 인물들이 부여해주는 사연의 무게가 무게중심으로 충분히 작용해주기 때문에 언제라도 폼을 잡고 싶을 때에는 잡을 수 있다. 이 정도면 거의 이상적인 구도 아닌가. 『은혼』은 바로 이런 발상을 가득 담고 있는 작품이다. 즐겁도록 황당한 배경, 역사적 모델들을 살짝 비틀어 놓은 매력적인 등장인물들, 과거의 사연이 주는 무게와 작가 특유의 강력한 개그센스가 멋진 조화를 이루며 일종의 퓨전 만담 활극을 펼쳐나간다.

사실 앞서 배경과 캐릭터의 매력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이 작품을 단지 특이한 소재로 접근하는 작품 정도가 아니라 최근 장르만화 가운데 손꼽을 만한 매력덩어리로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그 유머감각이다. 아무리 진지하고 급박한 상황이라도 금방 인물들은 말다툼 모드로 들어가며, 어느 누구 하나도 말재간이 만만한 사람이 없다. 재치 있는 발언이 하나 나오고 나서 황당한 상황 속에서 여운을 느끼도록 하는 방식의 표준적인 상황개그가 아닌, 재치 있고 공격적인 유머성 발언에 대한 마찬가지로 재치 있는 맞받아치기가 꼭 수반되는 엄격한(?) 스탠딩 만담 개그를 구사하는 것이다. 그런 만담적인 요소는 단어 의미를 통한 말장난 역시 훌륭하게 활용한다. 사실 작품의 제목부터가 말장난인데, 주인공 긴토키의 성인 ‘은(銀)’자와 ‘혼(魂)’자를 합친 것이기는 하지만, 일본어 발음으로 읽은 ‘긴타마’는 남자의 고환을 나타내는 속어다. 또한 만담 특유의 뻔뻔함을 위하여 이 작품은 자신의 연재지면인 일본 최대급 주류 만화 잡지인 <소년점프>마저도 한화가 멀다하고 냉장고 밑에 괴어놓는 물건이라든지 불타는 쓰레기에 분리수거할 대상이라든지 하는 등 개그의 도구로 등장한다. 이러한 만담 분위기가 계속 되다가, 과거 사연의 무게를 바탕으로 하는 ‘멋진 대사’가 한번 씩 구사될 때의 느낌 역시 그냥 허구한 날 폼 재는 대사를 남발하는 여타 소년만화들과 임팩트가 다르다 (작품 속 맥락 효과 특유의 매력이 사라질 수 있어서, 사례는 아쉽지만 생략하도록 한다).

언어적 매력에 의존하는 해외 작품의 맛을 제대로 살려내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한국어판 『은혼』은 대형 출판사의 일본 수입만화에 흔히 만연해 있는 오역 투성이 저급 번역과 다행히도 궤를 달리한다. 90년대 이후 주류 소년지의 인기작으로서는 거의 이례적으로 보일 정도로 이야기가 늘어지지 않고 확실하게 달려 나가는 빠른 전개와 철저한 에피소드 방식이기에 더욱 대사 하나하나의 힘이 중요한데, 무리하지 않고 일관성있게 잘 소화하는 장점을 지닌다. 게다가 유머의 핵심적인 의도를 살리는 적절한 번역, 말장난의 어감을 번안하여 자연스러운 독서를 가능하게 해주는 성실함은 근래 일본 만화 번역 수준 가운데 최고를 달리고 있다.

물론 각 에피소드의 마무리 임팩트가 아무래도 매끄럽지 못하다거나, 대형 사건 없이 전개하는 경우 필연적으로 다가올 소재고갈을 돌파할 방법이 아직 보이지 않아 향후 전개가 순탄치 못해 보이는 등 가시적인 단점들을 무시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장르 소년만화 가운데 이 정도로 ‘일관적인 막나감’의 유머와, 뜨거운 활극의 매력을 적절히 섞어서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활극과 유머의 만남으로 널리 칭송받았던 애니메이션 『카우보이 비밥』이 지녔던 장점들의 상당 부분을, 만화에서는 『은혼』이 계승하고 있는 셈이다. 단, 만담 정신을 가미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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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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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한 낙천주의자의 도시 잡상: 『올드독』[기획회의060201]

!@#… 이번 호 원고는 책내 서평용으로 쓴 글을 약간만 개조했음. 같은 원고의 부분적 재활용은 별로 좋아하는 방식은 아니라서 나름대로 양심선언. -_-; 올드독의 네이버 블로그는 http://blog.naver.com/hhoro 에 가면 있음.

 (나중에 추가) 에에에엣! 이런 실수를. 단행본에는 경향신문의 ‘고충상담실’ 부분 미포함. 이게, 책이 완성되기 전에 미리 읽고 쓰는 글이 빠질 수 있는 함정. 영화로 치자면 러프편집본으로 시사회보고 평했다가 최종본이 결론이 바뀌는 격이라고나…-_-; 여튼 참 송구스러운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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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한 낙천주의자의 도시 잡상: 『올드독』

김낙호(만화연구가)

눈에 확 들어오는 개성적이면서도 간명한 그림체, 작가의 자화상격인 동물 캐릭터, 일상에서 발굴하는 소재들, 대중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 순간의 잡상들로 가득한 에피소드. 아,  『스노우캣』. 이쪽 분야의 선구자 중 하나. 그럼 개인 블로그와 미니홈피를 휩쓰는 팬시적 인기까지 누린다면? 이런, 그러고 보니 『마린블루스』가 있다. 아예 작가가 이 만화를 그리다가 팬시 전문업체에 취직해서, 회사생활까지도 다시금 만화 소재로 사용하기까지 했다. 음, 하지만 여기에 지리멸렬한 인간사를 가로지르는 묘한 통찰력이 출동한다면 어떨까. 아마 자칭 ‘늙은 개’ 한 마리가 소심한 표정으로 살짝 걸어나올 듯 하다. 

사실 이름만 늙은 도시형 청년 견공(이라고 해도, 설정상 작가의 14살이나 먹은 실제 개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인 올드독은 시사만화계를 거친 정우열 작가의 페르소나로, 현대 도시 생활에서 겪는 일상적 경험들과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생각들을 풀어놓는 것이 특기다. 『올드독』(정우열/거북이북스)는 일상만화 컨셉으로 작가의 개인블로그에서 연재중인 『일일꼼지락』과 경향신문 만화섹션 <펀>에서 연재되었던 바 있는 『올드독의 고충상담실』을 위주로 묶인 첫 단행본이다. 올드독식 세상읽기의 극치를 보여주며 온라인 <씨네21>에 연재중인  『TV감상실』 시리즈가 빠진 것은 못내 아쉽지만, 그만큼 일상만화로서의 특징이 강조되어 있는 셈이다. 책으로서의 만듦새 역시, 페이지 귀퉁이에 플립북 애니메이션 효과를 부록처럼 삽입하는 등 소소한 숨겨진 재미를 강조한 점이 작품의 컨셉과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원래 일상만화, 또는 생활만화라는 장르는 극적인 드라마 구조보다는 생활 속의 일상적 에피소드와 단상을 독자들과 공감해 나아가면서 생명력을 얻는다. 그래서 일상생활 속 유머러스한 사건들을 꽁트로 꾸미거나, 친숙한 평범한 생활을 새로운 눈으로 재발견해주곤 한다. 올드독의 이야기들은 명백하게 후자의 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각종 일러스트에서 보이는 화려한 필치에서 추론할 수 있을 법한 ‘감상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각종 잡생각으로 상황을 풀어나간다. 그런데 올드독식 잡생각의 주제는 흔히들 그렇듯 자기 취향에 대한 함몰이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어디 커피가 맛있었다, 어떤 장난감이 멋있었다는 것보다, 이사 온 새 이웃에게 어떻게 자연스럽게 접근해서 엉뚱한 질문을 나눌 수 있을지가 더 중요한 잡상의 대상인 것이다. 편협한 감상주의와 자기감정 토로의 울타리에 갇혀버리기 쉬운 이 장르에서, 이러한 인간사에 대한 통찰은 올드독의 중요한 미덕이다.

그런데 잡생각이 많으면 기본적으로 소심하기 마련이다. 소심하기에 자꾸 상황을 다시 끄집어내고, 잡생각을 한다. 게다가 인간사에 대한 것들이기 때문에 다분히 성찰적이며 냉정한 측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드독이 냉소주의자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특유의 삶에 대한 자세에 있다. 이 장르의 선배격인 스노우캣이 게으름의 외피와 신경질적 까다로움으로 도회적 감수성의 공감대를 자아냈다면, 올드독은 소심함의 외피를 쓰면서도 특유의 낙천성으로 정반대 지점에서 같은 목표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올드독은 좋아하는 가수인 노라 존스 콘서트장 맨 끝에 줄에 앉아 곤혹스러운 땀을 흘리며 목을 주욱 빼며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하면서도, 그 와중에서도 같이 음악을 흥얼거리는 모습의 낙천성을 지니고 있다. 소심하기에 곤혹스럽지만, 낙천적이기에 비굴하지 않다. 위대한 광대로 치자면 우디앨런보다 찰리채플린에 가깝다고나 할까. 올드독의 또 다른 미덕은, 그 구김살 ‘있는’ 낙천성인 셈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올드독 최고의 매력은 바로 앞의 모든 미덕들을 효과적으로 감싸 안는 확실한 재미다. 이제는 부담스럽기까지 한 무리하게 둥글고 깔끔한 팬시 캐릭터들과는 궤도를 달리하는 독특한 화풍이 재미있고, 완전히 낙서체라고 하기도 힘들지만 마치 솜씨 좋은 친구의 연습장 마냥 자유롭게 흘러가는 배치와 연출도 재미있다. 극적이고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누군가의 머리 속 망상을 살짝 끄집어내서 훔쳐보는 듯한 느낌을 강조하기에는 이쪽이 훨씬 적합하다. 다만 아무래도 생각의 분량이나 시각연출의 밀도가 은근히 높다 보니 한꺼번에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독파하기에는 아무래도 다소 부담이 있고, 하루에 한두편씩 들춰본다는 느낌으로 읽어나가는 것이 가장 적합한 독서 방식일 듯 싶다.

소소한 상황에 대처하는 소심함, 이내 이어지는 통찰력 있는 잡생각, 그리고 의기양양한 낙천성으로 이야기를 맺어내는 연쇄작용이 재미있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수다이면서도, 정작 수다스럽지 않아야 할 때를 잘 아는 이야기 솜씨가 재미있다. 덕분에 무엇보다 올드독은 재미있는 만화로 우리 앞에 선보이게 되었고, 지금 여기 여러분의 손에 안착한 것이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미덕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일기체 만화들이 대개 그렇듯이 에피소드별 질적 편차도 있고, 개별 에피소드의 시기적 맥락이 중요한 경우도 있다. 때로는 확실한 통찰이 통렬한 웃음을 주기도 하지만, 피상적 개그에 안주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미 올드독의 매력에 빠져본 결과, 소심하게 일일이 단점을 지적할 때는 하더라도 작품의 총체적 재미와 통찰을 낙천적으로 즐기는 쪽을 택하고 싶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도시에는 인간사에 관심 있는 소심한 낙천주의자들이 더욱 더 많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만약 이 책을 즐겼다면, 독자 여러분들도 어느 틈에 그 대열에 합류해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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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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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 인간사의 수취 관계 -『왕비님 이야기』[기획회의 060115]

일상적 인간사의 수취 관계 -『왕비님 이야기』

김낙호(만화연구가)

여느 다른 매체보다도 특히 만화라는 분야에서, 독자들은 강하다. 독자라는 수용자와 작가라는 창작자 사이의 경계선은 영화나 대중음악 등의 분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으며, 오랜 저평가의 역사 속에서 만화 독자들은 강한 취향 결속력을 다져왔다. 하지만 단순히 만화광들이 결국 만화가가 된다든지 하는 정도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독자로서의 정체성을 그대로 지니면서, 출판이나 제작 등에 직접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재작년 『먹통X』(고병규 / 코믹팝)라는 작품의 복간의 경우, 어떤 독자가 한 출판사와 일종의 조건을 걸고 진행했던 재미있는 사건이었다. 그 독자가 캠페인을 벌여서 복간되었을 때 책을 구매하고자 하는 특정 인원수의 사람들을 모아오면, 복간본을 출간하겠다는 조건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진짜로 독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퍼트리고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긁어모은 결과, 결국 조건을 충족시키고 책은 출간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어떤 ‘회사’도 정식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그만큼 독자 자신들의 결속력과 파워가 실제적인 제작 프로세스에 작용할 힘이 크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왕비님 이야기』(권교정 / 절대교감) 역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탄생했다. 작품은 만화 전문지 <계간만화>에 게재되었던 24페이지짜리 단편인데, 잡지의 휴간과 다른 단편들이 축적되어 단행본을 만들기가 애매하다는 난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해답은 엉뚱한 방향에서 도출되었다. 그냥 24페이지짜리로 책을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비상식적인 일을 할 출판사가 어디 있냐고 물어볼 수 있다. 하지만 해답은 또 금방 나와 버렸다. 독자들이 출판사를 하나 만들어서 내버리자, 라는 것이다. 기존의 독자 세력화가 독자들이 모여서 출판사에 압력을 가하는 형식이었다면, 이번에는 아예 그냥 직접 출판을 했다. 그것도 ‘동인지’ 또는 ‘자가출판’의 형식이 아니라, 정식 유통망의 정식 출판물로서 말이다. 이러한 발상 속에서 탄생한 출판사 ‘절대교감’은, 어디까지나 여성향 만화에 대한 독자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곳이다. 잡지의 폐간으로 갈 곳을 잃어버린 연재 작품들이 다른 식으로라도 계속 지속되었으면 하는 시도였던 ‘드림서명운동’, 잡지 <오후> 휴간 당시 작가 팬클럽에서 제기되었던 만화출판 아이디어 등이 결국 현실화된 것이다. 회사라는 형식으로 보자면 다른 ‘정식 밥벌이’가 있는 소수 인력과 지원자들로 이루어진 가내수공업적 구성이지만, 제대로 된 책을 만드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물론『왕비님 이야기』라는 작품 자체의 매력이, 단지 출판의 과정이 특이하다고 해서 생겨난 것은 아니다. 24페이지 하드커버라는 형식도 만화책이라는 범주에서는 이질적이지만, 그림책 분야에서는 그리 낮선 것도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실제로 이 작품을 좋아하고, 책을 사줄 것인가가 관건일 뿐. 사실 원래부터 권교정이라는 작가가 상당히 강한 결속력을 지닌 팬층을 지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짧은 단편 하나로 책을 만들어 독자를 설득시킨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비님 이야기』는 충분히 그런 조건을 충족시켜줄만한 작품이다.

작품의 내용은 동화적인 설정에, 인간관계의 깊은 질문에 대한 알레고리를 넣어주는 작가 특유의 접근법을 능숙하게 담아내고 있다. 주인공인 왕비는 원래 마을의 인기 처녀였는데, 말을 하면 주위에 소박한 꽃들과 보석이 생겨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왕의 눈에 들어와서 왕비가 되고, 왕비를 독점하고 싶은 왕의 독점욕 때문에 궁 안에만 머물게 된다. 그 결과 마을은 꽃과 보석이 없는 곳으로 변모하고, 사람들은 왕에게 항의한다. 그런데 왕을 사랑하는 왕비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주변에 도움을 주는 능력을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독점시켜주는 것은 과연 잘못된 행동인가? 좋아하는 대상을 독점하고자 하고, 상대도 동의한다면 그것은 문제일까? 그런 능력의 혜택을 받아온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히 계속 요구할 권리가 보장되어야만 하는 걸까? 사실 꽤 복잡한 인간사의 문제다.

이 작품 속에서는 어떤 결론을 내리는지, 그것은 책을 읽어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서 여기서는 언급을 피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하지만 이런 구도가 지니는 다층적인 감성 자극은 그 자체만으로도 꽤 흥미롭다. 왕비의 능력을 작가라는 존재의 창작 능력으로 바꿔도 되고, 아니면 그다지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냥 우리가 주변에 행사하는 일상적인 사회관계 속 매력으로 대입해 봐도 좋다. 사회적 삶이라는 것은 어차피 그런 관계가 오고가는 것이고, 사실 우리는 이야기 속의 왕비, 왕, 마을 주민의 입장에 동시에 처해있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발산하고, 무언가를 독점하고 싶어 하고, 무언가를 얻고 싶어 한다. 모순될 것 없는 자연스러운 일상의 복합성이다. 물론 우리는 작가가 이야기 속에서 내리는 각 등장인물들의 선택, 즉 결론에 동의할 필요는 전혀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세상사에 대한 통찰을 지적당하고는 스스로 자극받는 감상행위 그 자체다.

시각 연출은, 『매지션』등 당시 작가의 작품 경향을 반영하는 듯 다소 황폐한 느낌이 강하다. 화사한 풍경을 묘사한 장면에서도 건조한 분위기를 풍기며, 인물들의 표정은 무심하다 못해 공허한 느낌까지 주고 있다. 마치 왕비가 떠나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량한 마을의 들판이 이 작품의 핵심 정서라는 지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듯, 일관성 있게 그 분위기가 유지된다. 사고를 자극하기에는 좋은 조건이자, 평소 권교정을 풍부한 유머감각으로 기억하는 일부 독자들에게는 이질감을 줄 수도 있을 듯 하다. 하지만 24페이지짜리 짧은 작품이니, 독서는 짧게 감상의 여운은 길게 가져가고자 하는 본래 목적에는 충실한 선택이다.

작가라는 마을처녀는 마을 사람들이라는 대중 독자들에게 창작능력이라는 보석과 꽃을 뿌린다. 받는 것만 익숙하던 마을 사람들은 왕이 그녀를 독점하자 화를 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마을사람들은, 왕비가 재능을 다시 그들에게 베풀어 주도록 출판사까지 차리고 책을 만들어낸다. 작품 속 사람들의 구도와는 다소 다르지만, 인간사의 수취관계라면 나는 이러한 현실 쪽의 사례를 훨씬 더 선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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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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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과 함께 사는 일상 – <그와의 짧은 동거> [기획회의051230]

!@#… 지난 호 <기획회의>에 들어간 원고. 장모씨 이야기 연작 가운데 가장 이야기로서 완성도가 뛰어났던 파트가 책으로 나오니, 대략 흡족. 하지만 성찰적이고 비유력 깊은 작품이 대형히트를 치기에는 출시 타이밍이 다소 애매. 미디어 노출도 그리 많이 되지 않은 듯 하고… 음. 아쉽다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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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과 함께 사는 일상 – <그와의 짧은 동거>

김낙호(만화연구가)

바퀴벌레라는 존재는, 인간들의 사회에 있어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들은 자신들만의 룰에 의해서 자연계를 멋대로 바꾸어버렸고, 대다수의 동물들은 내쫒기거나 또는 인간에게 식료품이나 노예로 이용당하는 입장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바퀴벌레는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생태 규칙을 그대로 고수하면서 지금 이곳에서 인간 세계와 공존한다. 물론 인간들로서는 그런 낯선 존재들을 반길 이유가 없기 때문에 갖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바퀴벌레가 병균을 옮긴다고는 하지만, 사실 인간들이 옮기고 다니는 병균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을 ‘소탕’하려고 하지만, 지금껏 빈번히 실패해왔다. 굳이 말하자면 바퀴벌레라는 종은 인간세계의 일부가 되어버린지 오래인 셈이다. 인간세상의 일부지만 조금은 다른 존재. 다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은 내면에 귀중함을 감추고 있는, “언젠가는 백조가 되어 날아오를”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니다. 벌레는 다르면서도 그냥 범속한 존재다. 혐오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냥 일상적인 무관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벌레는 심지어 어떻게 되든 동정조차 가지 않는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문학에서는 바퀴벌레, 또는 실제로 바퀴벌레를 지칭하지만 그냥 ‘벌레’라고 표현되는 존재들은 아주 흥미로운 비유로 활용되고는 한다. 벌레로서의 인간은 범속하면서도 범속 이하인 처지, 또는 세상 속에서 가치가 없음에 대한 자기 환멸의 표현으로 활용하기 좋은 것이다. 세상 속의 부조화, 부조화의 결과인 외로움에 대한 자학적인 변명의 수단으로서 이보다 더 강력한 비유를 찾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관료주의 체코 사회 속에서 카프카가 “어느 날 일어나보니 커다란 벌레가 되어” 있지 않았던가.  

최근 출간된 <그와의 짧은 동거>(장경섭 / 길찾기)는 바퀴벌레와 동거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이 작품은 작가의 페르소나를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자아의 충돌, 일상화된 소외에 대한 성찰 등을 핵심주제로 삼으며 독립적인 이야기들을 풀어나가는 <장모씨 이야기> 연작 가운데 하나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바퀴벌레와 동거하게 된다. 단칸방에서 자취하는 젊은 남자의 집에 바퀴벌레가 공존하는 것은 그다지 신기한 일이 아니지만, 어느 날 진짜로 본격적인 룸메이트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같이 라면도 끓여먹고, 술도 먹으러 가고, 청소도 분담하는 사이 말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장모씨와 바퀴벌레의 짧은 동거생활을 따라가며, 사람이 만나고 우정을 발휘하다가 다른 인간관계 속에서 소원해지기도 하며 결국 갈라서고는 여운이 남게 되는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어떤 마법의 계기가 있거나 갑작스러운 놀라움이 있기 보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인간 사이즈의 바퀴벌레와 함께 해도, 주인공은 특별히 놀라지 않는다. 아니 사실 특별히 놀라는 것은 전 작품을 통틀어 주인공의 여자친구 한 명 밖에 없는데, 그녀마저 사람 사이즈의 바퀴벌레라서 놀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장모 씨가 진짜 바퀴벌레와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놀랄 따름이다. 다르고 비속해도, 어차피 이 세상의 일부다.

바퀴벌레는 이 사회에서 비루한 처지에 있는 어떤 계층에 속해 있는 자다. 실제로 <장모씨 이야기> 연작 가운데 인권만화 모둠 <십시일반>에 실린, 동남아 노동자와 동성애 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작품에서 보여준 작가의 세계관을 고려할 때, 이 부분에 대한 섬세한 비유력과 묘사는 경탄할만 하다. 하지만 동시에, 바퀴벌레는 일상화된 외로움을 살아 나가고 있는 주인공의 또 다른 자아이기도 하다. 이미 무덤덤해진 자기 자신의 좀 더 비속하지만 나름의 생활 패턴이 있는 또 다른 파트너, 가상의 생활 상대 말이다. 뜨거운 우정이나 불타는 애정이 아니라, 그냥 같이 사는 룸메이트. 적당히 배려해주고, 적당히 무관심해지는 그런 사이. 필요 이상으로 개입해서 내 생활을 바꾸어 놓지도 않지만, 영향을 미친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남을 대할 때보다, 우리 자신의 어떤 일면을 대할 때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던가. 그리고 그것을 ‘일상’이라고 불러 왔다. 기묘하게 현실적인 판타지이자, 단절된 자아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매력 말이다. 스스로 무너질 정도는 아니지만 일상화된 외로움이 있는 어떤 자아가, 이 사회 속에서 어떤 일상화된 비속함과 소외를 지니는 어떤 자아와 만나서 서로를 보충해준다. 하지만 그것은 외로움의 해소가 아니라, 외로움과 함께 사는 법을 좀 더 부드럽게 터득해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모씨와 바퀴벌레의 생활은 무언가 버디무비와도 같은 티격태격거림과 달리 은근슬쩍 시작하고 은근슬쩍 끝난다. 그 이별은 슬프기 보다, 자연스러운 성장의 일부분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상징의 무게에 짓눌린 무겁고 우울한 작품이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부드럽고 열린 선의 흑백 그림이 전해주는 풍부한 감성은 이 작품의 균형감각을 대변해준다. 이러한 필체 속에서 공간의 묘사는 현실의 남루함이 과장되지도 은폐되지도 않는 정도의 수위로 조절된다. 장모씨와 바퀴벌레가 동거하는 자취방 공간에 베어 있는 생활의 냄새는 어떤 자세한 사진으로도 따라할 수 없는 자연스러움으로 가득하다. 이야기의 연출 역시 적당한 반전과 효과적인 시간 이동이 돋보이는 극적 구조를 활용하면서도 특유의 담담함을 잃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섞여 들어가며, 오랜 시간 공들여 구상해낸 작품이라는 흔적이 역력하다. 책에 같이 실려 있는 다른 짤막한 단편들과 비교할 때 이러한 요소들은 더욱 돋보인다.  

만약 <그와의 짧은 동거>가, 한국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히트를 기록하던 수년 전에 나왔더라면 아마 대형 히트를 쳤을지도 모르겠다. 유감스럽게도 연재지면이 없어지는 바람에 거의 5년여를 너무 늦게 출간한 템포 늦게 출간되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환상적 비유를 생활의 남루함 속에서 활용하여 일상 속의 성찰을 이야기했던 감수성이 지니는 힘은 여전히 강력하다. 외로움에 대해서 청승을 떨기에는 너무 그 상태에 오랫동안 처해있던 이야기. 모든 이로부터 버림받았다느니 하는 과장이 아니라, 그냥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어딘가가 비어있는 것 말이다. 바퀴벌레와의 동거 속에서, 약간은 그 생활에 더 능숙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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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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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식탐 전문 만화 –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기획회의 051215]

!@#… 이번 소개하는 것은 남자들의 항문섹*를 그린 만화로 먹고 사는 Y나가 씨를 한국에 초청해서 미식기행 시켜보고 싶은 충동이 들게 만드는 만화. 만화가 자신의 사사로운 잡담(?)을 하는 만화 중 이래로 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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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탐 전문 만화 –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김낙호(만화연구가)

속칭 요리만화라는 장르가 있다. 보통 요리에 대한 대단한 전문가가 나오고, 신기에 가까운 대단한 요리들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요리는 단순히 그냥 먹을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정신’의 표현이다. 궁극의 꽁치초밥이 사실은 끊임없이 노력하는 장인의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라든지, 소고기가 자연과 함께하는 생활자세의 형상화라든지, 라면의 따듯함이 사실은 두 연인의 서로에 대한 마음을 이어주는 고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든지 하는 식 말이다. 보통 요리는 요리로 끝나지 않고, 인간사를 매개하기 위한 상징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계가 그 요리를 둘러싸고 결국 모두의 감동으로 해결되는 패턴이다. 일본의 <맛의 달인> 류든, 한국의 <식객>류든 공유하는 지점, 즉 요리 자체가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주제의 구현화라는 점 말이다. 맛있는 음식으로 결국 화해를 하고 하나가 된다니, 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재미도 상당하다.

그런데, 가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이거 너무 오버하는 것 아냐? 요리가 맛있다고 사람들이 다 행복해지고, 요리가 모든 인간사의 상징이라니. 요리라는 소재의 특성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너무 과도하게 끼워 맞추기 식으로 의미를 부여한다는 느낌 말이다. 그리고 돌아서서 생각해본다. 요리에 우리네 생활이 어떻게 맞춰지는가가 아니라, 과연 우리들이 요리를 맛있게 먹고 다닌다는 것이 어떤 의미고 느낌이었는지 말이다. 인생사에 대한 훌륭한 상징체로서의 요리라는 개념따위는 그냥 낭비해버리고, 그냥 맛있게 요리를 먹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시원스러운 작품을 보고 싶을 때가 오는 것이다.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요시나가 후미, 서울문화사)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속칭 ‘야오이’ 계열 남성 동성애물에서 지명도를 키우던 이 작가가 메이저에서 큰 주목을 받도록 한 작품 <서양골동양과자점>에서부터 그런 조짐이 뚜렷하게 보였지만, 소품인 <사랑이 없어도...>에서 드디어 아주 본격적으로 진가를 드러낸다. 요리가 인생사의 상징이고 장인정신이고 그런 가치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완전히 ‘먹는 자’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접근한다. 인생이고 상징이고, 맛있는 것을 찾아 먹기에도 바쁘지 않은가. 과중한 의미 부여 그런 것 필요 없다. 맛있는 음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하다. 물론 무척 맛있는 것을 따지기 때문에 그냥 맛있다는 표현으로는 안되고 “척 보면 시고 짤 것 같은데 은근히 달콤하다구! 그리고 거기에 해산물의 감칠맛까지 더해지면! 맛있지? 맛있지?” 정도는 기본이다. 하지만 요리인의 장인정신이니 사연이니 그런 것은 솔직히 관심 없다. 이 식당이 이 요리는 기차게 맛있다, 정도면 충분하다. 식도락, 혹은 좀 더 친근하게 말해서 식탐이야 말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끼고 사는 진짜 즐거운 요리의 모습이다.

자, 그렇다면 식탐이란 무엇인가. 누군가가 “어떻게 하면 맛있는 가게를 많이 찾을 수 있어?” 라고 물어본다. 그 질문에 대해서, 작가는 극구 ‘픽션’이라고 주장하지만 누가 봐도 작가 자신을 자서전적으로 형상화한 주인공 “Y나가 F미”가 설명해준다. “이 보셔, 나는 일할 때랑 잘 때 빼고는 거의 하루 종일 먹는 것만 생각하면서 살아왔거든. 그리고 종류에 따라선 일할 때조차 먹는 걸 생각하고 있다고. 그만큼 먹는 데 일생을 바쳐왔으면 먹을 것도 나에게 얼마쯤은 보상을 해줘도 된다고 생각한다만”. 도대체,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인생의 의미부여도, 장인정신도 아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순수한 욕심이다.

<사랑이 없어도...>는 식탐으로 가득한 만화다. 인생사를 말하기 위해서 요리를 동원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실상은 요리 소개가 주가 되는 여타 요리만화와는 다르다. 인생사는 인생사고, 그 인생사를 사는 사람들이 식탐을 부리면서 생활하는 이야기를 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사에 대한 이야기가 부실한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주인공 Y나가를 비롯, 주변의 어딘가 모자라면서도 서로 아귀가 잘 맞는 인물들이 펼치는 일상적인 이야기들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는 행위를 매개로 하고 있지만 요리 자체보다는 요리를 맛있게 즐길 줄 안다는 식탐의 존재 또는 취향이 바로 이들 인간들의 사연들을 묶어주는 진짜 고리다. 요리를 먹으며 엉뚱한 사랑을 꿈꾸고, 게이로 커밍아웃한 옛 친구와 감정을 나눈다. 이러한 인간관계에 대한 묘사는 이미 이 작가의 전매특허인 직접적이면서도 함축적인 대사와 섬세한 표정 연출로 만만치 않은 깊이를 자랑한다.

만화의 형식은, 8페이지짜리 에피소드들의 모음으로 되어있다. 8페이지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의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이야기가 기본적으로 들어가고, 그것을 중심으로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사연과 상호 관계가 살짝 드러나고 진전된다. 식당은 실제로 일본 도쿄에 있는 식당이라서 하나의 에피소드가 끝나고 나면 가게 소개가 한 페이지 붙는다. 덕분에 이 이야기는 픽션이지만 식당은 실재한다는 권두 안내문이 한층 재밌는 울림을 준다. 이외에도 그림체는 평소 동일 작가의 다른 작품들보다 훨씬 설렁설렁 가벼운 선으로 그렸으나, 요리를 묘사할 때만큼은 대단한 집중력을 발휘해서 정말 침이 꿀꺽 넘어갈 정도로 독자들을 유혹하는 능란함을 보인다.

물론, <사랑이 없어도...>는 워낙 소품이다 보니 농밀한 기승전결 또는 확고한 엔딩 등의 드라마틱한 요소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극적 요소를 살짝 첨가한 생활일기에 가까운 셈이라서 다른 요리만화들에서 익숙해진 화려한 대결구도와 뜨거운 감동을 원하는 독자들에게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니는 것의 즐거움을 아는 독자, 또는 하다못해 단지 한밤 중 출출할 때 자신의 빈 속을 한번 학대하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추천할 수 있는 멋진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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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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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사회를 통찰하는 유머 – <페르세폴리스> [기획회의 051129]

!@#… 이전에도 다른 글로 지적한 바 있고 이번 본문에서도 약간 언급했지만, 한국어판의 번역 품질은 좀 개선의 여지가 많다. 이 작품 특유의 일상성과 유머러스함이 상당히 많이 뭉개지니까. “Russians are not like us” 라는 대사를 “러시아인은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단다”(불어판이 아닌, 영어판에서 중역을 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라고 쓴 것은 그나마 아예 명백한 오역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여튼 전문 번역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주는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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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통찰하는 유머 – <페르세폴리스>

김낙호(만화연구가)

사회라는 생물은 복잡하고 거대하다. 그렇기 때문에 단번에 사회의 전모를 객관적으로 읽어내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 특히 사회를 읽어내고자 하는 사람이 그 사회 속에 들어있다면 더욱 더 시야와 세계관이 한정되기 마련이다. 사회학자들이든 작가든 혹은 단순히 일상을 영위하는 일반인이든 누구나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거꾸로, 시각이 제한적이고 주관적이라는 것을 애초부터 당당하게 내세우고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소설 등으로 대표되는 서사극에서 그것은 ‘1인칭 작가 시점’이라는 것으로 구현된다. 지금 펼쳐지고 있는 이야기는 그 상황 속에 처해있는 어떤 사람의 주관적인 경험담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사회를 읽어냄에 있어서 전모는 커녕 일반인 수준의 파악도 되지 않는 사람의 주관적 시각이라면 어떨까. 우매한 자의 눈, 즉 일반적인 남성 성인 주도의 사회 속에서는 사회적 역할이나 지식이 한정되어 있는 주부, 아이, 바보 등의 시점 말이다. 비록 이야기 속 상황을 읽어냄에 있어서 대단히 답답한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우매한 자의 눈’은 매력적이다. 우매한 자의 눈으로 보면 사회 속 우리가 일상적으로 영위하면서 살아나가는 과정이란 참 말도 안 되는 이상한 것들로 수놓아져 있다. 그리고 ‘일반인’인 독자들은 처음에는 그 괴리를 보면서 유머와 아이러니의 재미를 느낀다.  그런데 사실 약간만 생각해보면, 우매한 자의 눈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이 사회는 말도 안되는 것들 투성이인 것이다! 약자의 입장에서 사회적 통찰로 이르는 이 과정 속에 독자들은 거부감 없이 쉽게 녹아들어간다. <포레스트 검프>, <케빈은 열두살>, <양철북>,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등 많은 이야기 작품들이 우매한 자의 눈을 성공적으로 활용해왔다.

일상과 커다란 사회적 흐름이 맞닿아 있는 이야기에서, 이 기법은 더욱 빛을 발한다. <페르세폴리스>(마르잔 사트라피 / 새만화책 / 1권 발매중)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 놓여있는 수작이다. 현대 이란이라는 사회가 있다. 물론, 서울에서 가장 땅값 비싼 곳 가운데 하나가 무려 테헤란로라고 이름 붙인 것과는 달리, 이란에 대해서 한국에 알려진 바는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작품을 보면서 파악할 수 있듯 독재정권과 민주화 운동, 짧은 해방감과 근본주의 진영의 반동에 의한 독재 재개, 이웃나라와의 전쟁, 미국의 개입… 순서와 패턴이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유사한 현대사의 재료들을 가지고 만들어진 곳이다. <페르세폴리스> 1권은 이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꼬마 마르지, 즉 작가 자신의 자전적 체험담이다. 여자 아이의 우매한 눈을 통해서 바라보는 현대사의 격변과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여러 모순과 함의, 그리고 희망들이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게, 그냥 일상적으로 펼쳐진다.

주인공 마르지는 비록 진보적 성향의 집안의 딸이지만 여하튼 꼬마인 덕분에 사회주의, 종교근본주의, 민주주의 같은 담론 덩어리들도 고뇌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일상 속의 피상적 표어들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삶은 직접적으로 영향 받는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그러했듯, 정작 감동적인 것은 실제로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인 것이다. 그 삶 속에는 사회운동가 아누쉬 삼촌의 이야기, 폭격으로 사라진 친구 이야기 같은 무거운 순간들이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서방의 인기 여성 락커 킴 와일드의 포스터를 밀수해 들여오고 이웃끼리 술파티를 벌이는 즐거움의 순간들도 있다. 조숙하고 활달한 꼬마 마르지의 행동들, 그리고 그 순간을 지금 자신의 눈보다는 어린 시절의 우매한 눈으로 회상하는 작가 사트라피의 유머감각이 함께 녹아들어가면서 작품은 유머와 진지함, 품격과 발랄함을 얻어낸다. 그 속에서 자유와 억압, 생활과 이념, 격변기 이슬람 세계 속 여성의 위치, 중동과 서방세계의 문화적 관계 등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틀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만화로서의 연출 효과 역시 큰 매력이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 그리고 프랑스 만화가 다비드 베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간결한 흑백 그림체는 아이의 눈과 사회의 복잡함이라는 추상적 느낌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가끔 칸 내에서 화려한 미장센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칸 간 연출의 기본은 쉬운 독서가 가능한 명료한 스타일을 따른다. 많은 부분에서 아이의 언어를 바탕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서구만화 특유의 장황한 대사와 나레이션의 압박 역시 상대적으로 덜하다. 사회적 텍스트로서, 재미있는 이야기로서, 효과적인 만화 표현으로서 모두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인 셈이다.

확실히 이런 우수한 만화가 소개되어 들어오는 것은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 출간된 한국어판에는 번역 문제에서 다소 만족스럽지 못하다. 물론 1권의 부제인 ‘어떤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내 어린 시절 이야기’로 번역되어서 한 사회를 바라보는 이야기인 이 작품의 의미를 한 개인의 특이한 경험담으로 축소하는 등의 미묘한 차원의 실수는 그냥 아쉬움으로 남길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작품의 핵심적인 매력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모스크바’ 에피소드의 첫 대목이 대표적이다. 원래는 마르지가 데모하다가 잡혀가서 고문을 당한 경험이 없는 아빠를 둔 자격지심 때문에, 학교 친구들에게 자기 아빠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허풍을 떨고 아이들은 그 허풍이 너무 심해서 기가 질리는 내용이다. 이것은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에, 진짜로 운동하다가 투옥되고 고문당한 삼촌 야누쉬를 알게 된 후 그것을 자랑해도 친구들이 여전히 허풍이라고 생각하는 부분과 댓구를 이루며 훌륭한 유머감각을 발휘한다. 하지만 번역판에서는 오역으로 인하여 이런 내용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야기의 전체 흐름에 지장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우매한 자의 눈으로 만들어지는 역설과 유머를 통해서 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이 작품의 매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사례다. 만화라는 장르가 꼭 유머라는 고정관념에 매몰될 필요는 없지만, 반대로 작품성 있는 만화라는 이유만으로 유머라는 큰 매력이 억지로 거부당해야 할 이유도 없을 터인데 말이다. 2판부터는 이러한 지점들이 잘 수정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긴다. 또한 이란 사회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무지를 고려할 때, 역사 문화적 맥락을 설명해주는 해설이 첨부되었더라면 하는 바람 역시 간절하다.

<페르세폴리스> 1권의 결말에서 사춘기의 나이로 프랑스로 유학을 간 마르지는, 2권에서 서구 생활의 풍파를 겪은 후 다시 이란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사춘기에 들어선 그녀는 이미 더 이상 아이의 우매한 눈이 아니라 성숙한 성인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이번 출간된 1권의 매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세폴리스>는 ‘사회성과 작품성이 있는 서구만화’의 왕좌를 오랫동안 지켜온 <쥐>의 아성에 도전할 수 있는 멋진 작품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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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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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와 초월성에 관한 우화 – 충사(우루시바라 유키) [기획회의 051115]

!@#… 애니 시리즈 일본 현지 방영 및 실사영화화 계획 발표 기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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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와 초월성에 관한 우화 – 충사(우루시바라 유키)

김낙호(만화연구가)

오만하게도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는 생물인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과제, 즉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지극히 제한된 지능과 인식의 폭을 넘어서는 사건에 마주칠 때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이유를 붙여서 설명을 해내곤 했다. 밤에 숲에서 소리가 나면 누군가의 유령이 돌아다니는 것이고, 착하게 살아가고 있는데도 온갖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은 평가와 보상을 중요시하는 하느님이 내려주신 시련이다. 모든 것은 어떤 인격화된 주체의 행위의 결과다. 그리고 그 주체가 어떻게 해서 그런 대단한 일들을 벌일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그들을 초월적인 존재로 상정함으로써 적당히 넘어가지만, 최소한 그 누구 또는 무엇인가가 어떤 특정한 이유 때문에 어떤 행위를 하고, 그 결과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지극히 쉽게 이해 가능한 명제를 만들어낸다. 굳이 무신론을 설파하며 모든 초월적 존재들을 덮어놓고 부정해야할 필요는 조금도 없지만, 그 초월적 현상들을 인식하는 방식 그 자체는 분명히 인간의 발명품이다. ‘신’은 존재할 수 있지만, 그 신을 인격화시키는 것은 인간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문화권에서는 유일신을, 어떤 문화권에서는 다양한 층위와 관계망으로 엮여진 신적 존재들을, 어떤 문화권에서는 모든 사물에 깃든 영령을 초월적 현상 속에서 인식해 낸다.

<충사>(우루시바라 유키, 대원CI / 6권 발간중)는 초월적 현상들을 다루는 에피소드들로 엮여진, 환상 기담이다. 원래 국내에 4권까지 출간되었다가 출판사가 만화사업을 접는 바람에 후속편을 기다리던 독자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던 작품인데, 몇 달 전부터 출판사를 바꾸어 재출간되기 시작하여 최근 후속편들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키라>로 유명한 애니메이션 감독 오토모 가츠히로가 연출을 맡아서 실사 영화판을 제작하겠다는 발표가 있었고, 또한 얼마전 일본에서 방영을 시작한 애니메이션 TV 시리즈 역시 작품의 세계관을 효과적으로 연출해냄으로 시청자들에게 큰 호평을 받고 있다고 한다. 작품의 성향 자체는 정작 지극히 평온하고 사색적인 기담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참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작품의 구성은 비교적 전형적이다. 기이한 현상이 있고, 그런 현상들을 다루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작품의 진짜 주역은 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기이한 일 그 자체, 그리고 그 속에 녹아들어가 있는 삶의 한 단면이다. 따지고 보면 전설의 고향부터 엑스파일까지 수많은 기담들의 기본 형태인 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유령이나 혼백이나 신적 존재라든지 하는 등 지금껏 동서양 문화권에서 흔히 접해온 설명들과는 살짝 다른 해석을 내리며 세계관을 구축한다. 그것이 바로 ‘벌레’인데, 작품 속 설명을 인용하자면 이런 식이다:

“…이 손가락 네 개가 동물이고, 엄지가 식물을 표시한다고 하면? 사람은 여기, 심장에서 가장 먼 중지의 끝부분 쯤에 있겠죠. 손바닥의 안쪽으로 갈수록 하등한 동물이 되는 거죠. 점점 밑으로 내려가 손목부분에 이르면 혈관이 하나로 되어 있잖아요. 여기에 있는 것이 균이나 미생물이고, 이 근처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동물과 식물을 구분하는 것이 어려워지죠. 하지만 더 나아가, 손목을 거슬러 올라가 어깨를 지나서 심장에 가까운 부분에 있는 것을 바로 ‘벌레’라고 부릅니다.” (1권, ‘녹색의 좌’)

‘벌레’는 생명 그 자체에 한없이 가까운 존재들, 형태와 존재 방식조차 지극히 모호하며 너무나 다양하게 뻗어있는 어떤 것이다. 소리나 빛을 먹고 사는 것도 있고, 인간 형태로 유령처럼 존재하는 것도 있고, 문자라는 지극히 추상적인 형태로 보존되는 것도 있다. 벌레는 거대한 초월적인 의지 즉 신이기 보다는,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나가는 생명 그 자체다. 인간세상을 조종하고 관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신들의 방식으로 살아갈 따름이다. 물론 각 에피소드의 이야기는 벌레의 생활로 인하여 인간 세상에 어떤 문제가 생겨서 그것을 해결해 나아가는 과정이지만, 그것은 혼령의 한을 풀어주는 무당의 푸닥거리도, 분노한 자연의 신령을 달래어주는 제의식도, 신에게 믿음을 회복하는 신성한 과업도 아니다. 약간은 경험의 축적으로 인하여 알고, 더 많은 부분들은 여전히 이해영역을 벗어난 존재들로부터 나름대로 인간의 생활방식을 지켜내는 것에 불과하다. 벌레는 오염된 인간문명에 대한 대자연의 복수가 아닌, 그냥 이 세상의 일부다. 즉 인격화되지 않은 진정한 의미의 초월적 존재인 것이다. 벌레라는 명칭은 이런 속성에 대한 지극히 역설적인 간판이 되어주는 셈이다.

주인공 긴코는 충사, 즉 ‘벌레’전문가다. 작품에서 언급되는 다른 충사들보다도 더욱 더 벌레를 퇴치하기보다는 그냥 살짝 사람 사는 집에서 쫓아 버리는 방식을 취하는 사람으로, 세상에 대한 경이를 잊지 않은 진정한 방랑자다. 강한 자의식으로 독자를 억지로 감정 이입시키지 않고, 한발짝 물러서서 초월성의 경이와 그것을 잊어버리고 만 인간세상의 모습들을 담담하게 구경시켜주는 역할이다. 그 덕분에 눈꺼풀을 감아도 오지 않는 진정한 어둠에 대해서 알게 되며, 무지개를 쫒듯 근원적 생명에 홀린 방랑자를 만나기도 하고, 몸 안에 들어온 벌레와 공존하기 위하여 벌레의 모든 것을 글로써 적어내야 하는 기이한 사연(명백히, ‘작가’라는 직종에 대한 알레고리다)을 접하게 된다.

이러한 관찰자적 자세는 시각적 묘사에서부터 뚜렷해지는데, 아직 근대화가 오지 않은 듯한 전통적 일본 시골 산하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유일하게 긴코만이 기모노가 아닌 티셔츠와 바지 차림이다. 물론 등장인물 중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주인공 캐릭터 자체에 거리감을 부여하는 재미있는 장치로 작용한다. 인간과 자연을 묘하게 섞어 넣는 거친 그림체와 현실과 몽상의 경계가 수시로 무너지는 칸 연출 역시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물론 기담 장르가 원래 그렇듯 반복적 패턴이 계속되다보면 결국 서서히 경이로움이 감소하는 점이라든지, 반대급부로 긴코의 캐릭터성이 점차 부각된다는 점 같은 점은 대표적인 한계다. 출시된 한국어판의 경우 원작의 시적이고 고풍스러운 어감을 효과적으로 번역해내지 못한 점도 만화번역에 대한 빈약한 질적 투자를 증명하는 듯하여 아쉽다(그나마, 이전 출판사의 경우는 아예 말 자체를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오역 투성이였다).

충사를 읽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고 그것과 함께 살아간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 바로 진정한 경이를 회복하는 여정이다. 한번쯤 홀려볼만한 멋진 독서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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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낭만주의 – <위대한 캣츠비> [기획회의051030]

!@#… (이미 다 넘어간 후 반성문) 작가가 인터뷰에서 밝힌 바처럼, 캣츠비는 사실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원작으로 하거나 특별히 구체적인 모티브를 빌려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리뷰 본문에서 언급했듯, 일정 부분 기본설정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굳이 개츠비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만큼 그 ‘낭만’의 공식이 지극히 원형적인 모티브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건데, 다시 읽어보니 그 이야기를 참 애매하게 풀어냈다는 점을 깨닫고는 후회중.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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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 – <위대한 캣츠비>

김낙호(만화연구가)

‘위대한 개츠비’라는 미국 소설이 있다. 영미권 문학의 나름대로 걸작으로 칭송받는 작품이지만, 사실 필자에게는 ‘맨 온더 문’이라는 영화에서 짐 캐리가 분한 코미디언 앤디 카우프만이, 자신의 코미디 쇼를 보러온 관객들 앞에서 뜬금없이 하루 종일 걸려서 처음부터 끝까지 낭독을 함으로써 황당한 물의를 일으킨 그 소설로 더욱 기억에 남아있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대충 이렇다: 가난한 농부집안 출신의 개츠비라는 청년이 있다. 그는 데이지라는 상류층 처자와 서로 좋아한다. 그런데 아뿔싸, 이 사람이 군대에 끌려가 있는 동안에 데이지는 부자집 남자와 결혼해버린다. 그래서 수단방법 안 가리고 자기도 부자가 된다. 돈으로 데이지에게 당당해진 개츠비. 하지만 데이지는 부자남편의 정부를 자동차로 치어죽이고 개츠비가 죄를 뒤집어 쓴다. 결말까지 폭로하자면(설마 이 정도로 오래된 이야기에도 누설방지 유통기한이 적용되지는 않으리라 보고), 개츠비는 결국 죽은 여자의 남편 총에 맞아 죽어버린다.

한눈에 봐도 알아볼 수 있겠지만, 이 공식은 한국 환경으로 그대로 옮겨도 사실 전혀 위화감이 없다. 신분의 차이, 오기에 찬 물리적 조건 극복, 그 속에서의 인간성 상실, 하지만 단 하나의 가치를 위하여 결국 비극적 희생. <공포의 외인구단>을 위시한 수많은 비장미 넘치는 80년대 극화체 만화들이 흔히 써먹었던 기본구도다. 그래서 고전인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언제라도 한국으로 번안된 개츠비 이야기가 인기 연재 만화로 등장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생각은 당연하다. 아니나 다를까, 온라인에서 <위대한 캣츠비>라는 만화가 연재를 시작했다고 한다. 아하, 내용은 “안봐도 비디오”겠구나. 결과는? 부자와 결혼해버리는 여자, 별 볼일 없는 주인공, 시대 속에서 꼬이는 사랑이 이야기 전체의 원동력이라는 정도의 기본설정이 공통점. 하지만 화려한 활극의 느낌마저 있었던 개츠비의 이야기와는 달리, 이쪽의 주인공 캣츠비는 훨씬 더 구차하고, 소심하고, 끝까지 별 볼일 없는, 그냥 어떤 참 운명이 꼬인 현대 한국의 궁상 백수 청년의 사랑담이다.

최근 연재종료를 맞이했고, 종이 단행본 2권이 출간된 온라인 만화 <위대한 캣츠비>(강도하/애니북스)의 연재 당시 인기비결은 무엇일까. 에피소드 중심으로 끊어지기 쉬운 온라인 만화에서는 아직 비교적 희귀한 쪽에 속하는, 장편 연재물이라서? 확실히 그런 측면도 있다. <슬픈나라 비통도시>같은 모음집에서 볼 수 있는 강도하, 또는 강성수라는 작가의 거칠고 실험적인 – 즉 독자들과의 소통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 기존 작품성향을 보면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이 작품은 정제되어 있는 드라마적 투르기와 독자의 관심을 고조시키는 연출과 끊어내는 타이밍 등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시각적 표현 역시, 모든 주인공을 의인화된 동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만화적 표현의 재미’를 부여하면서도(하지만 뚜렷한 상징체계를 느끼기는 힘들다), 대단히 세밀하게 감정선을 따라가는 배경 구도와 풍부하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표정묘사로 눈길을 집중시킨다.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주인공들의 감정 상태를 배경 또는 소품의 묘사를 통해서 보여주는 연출을 너무 남발해서 부담스러워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몰입하는 독서를 완전히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심지어 온라인 연재 당시에는 스크롤의 기본문법을 따르는 칸 연출을 하면서도, 종이책으로 출간하면서 그것을 전통적 의미의 종이만화의 칸 배열로 완전히 재편집하는 노력을 투자하는 등 한마디로 세심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분명히 시각 연출이든 이야기 연출이든, 표현적인 측면에서 <위대한 캣츠비>는 우수한, 최소한 독자들에게 지극히 성실한 만화다.

하지만 역시 그런 기술적인 완성도만으로 만화가 공감대를 자아내는 것은 그다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생활 묘사가 리얼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아 그래, 내 생활도 그렇지” 하는 마음을 품게 할 정도로 주인공들의 일상 생활 모습 자체에 통찰력을 집중한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리얼한 환경묘사와 달리, 생활은 솔직히 그다지 리얼하지 않다는 말이다. 오히려 백수생활의 리얼함이라면 고리타의 <룸펜스타>같은 개그만화가 한 수 위다. 아니 사실 그다지 일상적이지 않은, 꼬일대로 꼬인 치정극 이야기가 훨씬 더 작품 줄거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대와 인기를 끌어낸다면 무언가 다른 좀 더 근본적인 덩어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루어지는 사랑과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엇갈리는 우정? 글쎄. 발랄한 여자와 불행한 여자, 발랄한 남자와 궁상맞은 남자의 캐릭터성? 글쎄.

오히려 열쇠는 작가가 스스로 누차 강조하듯이 ‘청춘의 아픔’이라는 엄청나게 구식 느낌을 주는 창작의 변에서 찾아야 할 듯 싶다. 사랑이 존재방식이 되는, 그리고 사랑의 꼬임이 존재의 흔들림으로 이어지는 가히 근대 독일 문학을 연상시키는 이런 고전적인 접근이 다시 복고풍으로 트렌드를 맞추어 냈다는 것인가. 고전적이고 다소 남성 편향적인 청춘의 고뇌에 대한 과잉된 환상이 2000년대 독자들의 취향과도 일치한다고 생각하기는 좀 섣부를 것 같다.  글쎄. 그보다, 애초에 사람들은 그 취향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적합할 것이다. 지난 수년간을 강타했다가 최근 좀 거품이 가라앉은 감성파 에피소드 만화, 속칭 ‘에세이툰’의 히트를 기억해보면 더욱 그렇다. 한국에서 대중문화는 각종 미디어를 통해서 더욱 세련되고 쿨한 것을 소비(!)하도록 종용하고 있지만, 진짜 ‘취향’이라는 것은 소비 트렌드만큼 빠르게 바뀌지 않는다. 아니 소비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오히려 더욱 공고하게 원형적인 것으로 회귀하기도 한다. 그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은? 소재와 표현은 세련되게, 알맹이는 오히려 더 고전적으로. 예를 들자면 결국 비극적 인간관계 사건들이 꼬리를 물지만 여하튼 사랑이 존재의 원동력이다, 뭐 그런 방식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캣츠비>는 80년대적 비장미 성인극화와 2000년대적 에세이툰 부류의 이종교배에 성공한 셈이다. 나머지는 그냥 연출 표현을 위한 양념일 뿐이다. 작품의 장점도 단점도, 개별 독자들의 취향에 맞고 안 맞는 것도, 이 틀 안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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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여하튼 먹고 사는 생활 – <습지생태보고서> [기획회의051016]

!@#… 앞으로는 여기에 글을 올릴때 기본적으로 본문중의 작품에 링크를 걸어서 구매 사이트와 연결되도록 할까 한다. 어디가 가장 좋을까? 리브로? 예스24? 이왕이면 나한테 적립금도 쌓이는 곳이면 더 좋고. (과연 몇백원쯤 쌓이기는 할것인가? -_-; )

!@#… 하지만 마지막회의 희망찬 메시지는 좀 닭살이다. -_-; 전체 분위기에서도 튀고. 하지만 책소개 비평글에서 엔딩에 대한 스포일러를 넣는 건 역시 범죄겠지(식스센스는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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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먹고 사는 생활 – <습지생태보고서>

김낙호(만화연구가)

판도라의 상자라는 그리스 신화가 있다. 신들이 인간 세상의 여러 근심걱정들을 상자에 봉인해놨는데, 어떤 호기심 많은 처자가 그것을 칠칠치 못하게 열어버린 덕분에 그것들이 인간세상으로 모두 뻗어져 나왔더라, 라는 이야기다. 그 후 수 천년 동안, 갖가지 인간들이 그것을 가지고 여러 가지 교훈들을 나름대로 주장하곤 한다. 어떤 이들은 그래 역시 호기심이 문제의 근원이야, 라고 이야기하며 무지의 행복을 설파하곤 한다. 또 다른 이들은 왜 자꾸 그리스 신화고 기독교 창세기고 간에 여자들이 호기심으로 말썽을 일으키는 것으로 묘사하고 난리인가, 라고 XY염색체 소유자들의 역사 깊은 남존여비의 반증으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 가장 보편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교훈은 이 이야기의 마지막과 관련되어 있다: 걱정이니 질투니 노환이니 하는 오만가지 인간사의 부정적 문제들이 우루루 다 쏟아져 나온 뒤, 상자 맨 아래에 몰래 있던 마지막 하나. 바로 ‘희망’이라는 녀석이 남아있었기에 결국 아무리 험난한 세상이라도 희망을 가지면 대략 살만하다는 나름대로 낙천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모 영화에서 열심히 설파한 “카르페 디엠!(오늘을 불잡아라)” 하는 교훈을 훨씬 더 좋아하는 필자로서는 좀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지만, 오랜 인류역사 속에서 여러 사람들을 감동시킨 듯 하니 나름대로 인정해 주기는 해야 하겠다. 

최근 출간된 <습지생태보고서>(최규석 / 거북이북스)에는 이런 희망에 대한 약간 다른 접근, 좀 더 현실적인 접근이 담겨있다. 따지고 보면 굳이 희망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고난을 이겨내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낙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보람찬 것이다. 현실의 무게는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공상으로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무게 그대로를 여하튼 짊어지고 가야할 대상이다. 익숙해지면 좌절 같은 것은 굳이 할 이유가 없다. 갑자기 해탈의 경지를 논하고 있는 것이냐고? 해탈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당장 우리들의 일상이고 생활이다. 그것을 만화적 재미라는 양념을 쳐서 살짝 직면시켜주는 작품인 것이다. 이미 전작인 단편집 <공룡둘리>를 통해서 남루한 현실의 무게와 만화적 표현력의 재미를 효과적으로 실험해온 작가다운 행보다.

<습지생태보고서>는 <경향신문>의 만화 전문 주간 섹션에서 연재되었으며, 디씨갤러리를 통해서 인기를 모으는 등 이미 연재 당시부터 팬층을 결집시켰던 작품이다. 내용은 한 방에서 자취생활을 하는 네 명의 그다지 풍요롭게 생활하지 못하는 대학생들과, 이런 방 일수록 하나쯤 생겨나기 마련인 빈대 식구 한명(한 마리?)의 생활 속 에피소드들이다. 아하, 대학생들의 청춘의 고뇌와 우정이 다루어지겠구나, 어쩌면 연애 문제, 취직 걱정 등이 소재로 들어가겠구나, 라고 대충 머리 속에 그려질지도 모르겠다. 사실, 실제로 이 모든 것들이 이 작품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이 모든 것들 위에 서있는 중요한 대 전제가 이 작품에서는 무척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그것은 바로 “먹고 사는 것”이다. 방세도, 학비도, 식비도 모두 먹고사는 문제로서 해결을 해야 할 대상이다. 자취생활의 여러 습관들은 여타 작품에서처럼 단순히 하나의 ‘취향문화’ 처럼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겨울 난방을 하면 등은 타고 코는 얼어 붙는 옥탑방을 무슨 ‘펜트하우스’ 처럼 묘사한 <옥탑방 고양이> 같은 드라마가 좋은 예다), 진짜로 먹고 살기 쓸 돈 빼면 따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만들어진, 생활의 때가 묻어있는 패턴들이다. 단순한 포장이 아니라 살아가는 필연적인 방식인 ‘생태’이며, 그 곳은 폼나는 양지도, 위악적인 어둠과 비참함의 음지도 아닌, 적당히 구질구질한 ‘습지’다.

시각적 묘사에 있어서도 이 작품은 탁월하다. 남루함이 과장되지 않게 묻어나는 ‘습지스러운’ 생활 공간과 사람들을 제대로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극화체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지나친 기교나 딱딱함을 배제한 화풍, 그리고 원색의 화려함이나 파스텔톤의 감상주의를 모두 비껴난 탁한 질감의 컬러링 등에서 드러나는 필력 역시 이야기의 내용과 좋은 조화를 이루어주고 있다. 페이지 연출에 있어서 아직 4페이지 단위라는 짧은 호흡에 익숙하지 않은 듯 마무리 임팩트 타이밍이 슬쩍 어긋나는 에피소드도 초반에 더러 있지만, 작가의 첫 고정 연재작이라고 도저히 보기 힘들 정도로 이내 능숙한 페이스를 찾아나간다.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생활만화다. 하지만 생활 속 감상을 적당히 감상주의적으로 포장한 소위 ‘에세이툰’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이 작품은 4페이지짜리 짧은 호흡으로 에피소드를 구성하며 (나름대로) 개그 만화다. 그런데 <츄리닝>이나 <트라우마> 같은 다른 히트 ‘넌센스반전패러디개그만화’들과는 뭔가 방향이 많이 다르다. 남루한 현실이 들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얼리즘과 비극으로 점철된 작품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래도 생활 속 위트와 히트급 개그와 현실적 공감대로 가득하다. 그 이상한 원동력은 바로 솔직함이다. 풍족하지 못한 자취생활이지만, 솔직하게 그렇게 궁하게 그냥 산다. 하지만 폼나는 것들을 한번 걸쳐볼 기회가 생긴다면, 비굴해질 필요도, 마다할 이유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낙관적으로 실실거리는 따듯한 낭만이 살아 숨쉬어야할 대목이 올 듯 하다가도, 당장 이번달 생활비를 계산해봐야 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처음에는 주인공 최군의 복잡한 머리 속과 다른 3명의 괴짜 룸메이트들의 티격태격 거림 속에서 주로 표현되다가, 나중에는 숫제 현실의 비열함과 욕망을 응축시킨 전용 캐릭터의 등장으로 더욱 고조된다. 자취방의 제 5의 주민, 작품 자체의 흥망과는 별개라도 대형 히트를 기록함이 마땅한 걸작 의인화 사슴 캐릭터 ‘녹용’이 바로 그 존재다. 가장 비현실적이고 나름대로 희망찬(?) 외모를 지닌 녹용이, 나름대로 낭만과 감성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현실의 무게를 줄이며 희망을 이야기해보려는 주인공들에게 차가운 현실을 깨우쳐주곤 한다. 최소한의 비굴함도 미안함도 없이, 생활의 사사로운 욕망 그 자체에만 집중하고 또 룸메이트들에게 그 교리를 설파하는 명언 제조기인 셈이다. 단지 현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뜬금없을 만큼 솔직하게 던져준다는 것, 그것이 유머의 원천이고 공감대의 핵심이다.

판도라의 상자가 주는 진짜 교훈은, 불확실한 미래형인 ‘희망’이라는 것 정도만으로도 그 많은 삶의 고난들을 마음 속에서 억지로 상쇄시켜버릴 정도로 인간의 사고회로가 멍청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삶이 아름다운 것은 찬란한 희망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주저앉지만 않는다면, 여하튼 살아갈 만 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습지’는 반지하 단칸 자취방이 아닌,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바로 이곳 이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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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성인들의 이야기 – <느티나무의 선물> [기획회의051003]

!@#… 사실을 고백하건데, 나는 지로 다니구치의 만화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싫어한다는 건 아니고, 그의 만화들이 만화로서 우수하다는 것 역시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전통적” 가족관계에 대한 거의 맹목적인 향수, 따듯한 인간애로 세상의 모순마저도 통째로 덮어버리는 박애정신은 capcold의 코드에 적잖이 거슬린다. 연출 측면에서도 만화적 공간구성의 장점들을 살리기보다는 ‘영화적’ 미장센에 지나치게 집착하는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너무 틀이 꽉 짜여져있다. 하지만… 중년 (남성) 독자들이 만화책 한권 추천해달라면, 그들의 취향에 맞을 만한 우수한 만화로서 별 망설임없이 추천해주곤 한다. 뭐 그런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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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들의 이야기 – <느티나무의 선물>

비단 만화뿐만 아니라, 영화든 게임이든 음악이든 대중문화 전반의 특징이 바로 대중적 성공을 노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대중 – 즉 나름의 주관에 따라서 대중문화를 향유하고 상품을 소비해줄 수 있는 일반인들의 폭은 갈수록 넓어진다. 특히 연령적인 측면에서, 점차 더욱 일찍 대중문화에 발을 들이게 된다. 이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대중문화의 코드들 역시 점차 저연령화 되는데, 대략 중학교 1학년의 교양 수준에 맞추는 것이 관례가 된지 오래인(물론 점점 더 낮아지고 있다고 한다) 텔레비전 교양/오락 프로그램의 예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신들만이 즐길 수 있는 코드에 대한 욕구 역시 커지고 있다. 특히 오랜 역사동안 저연령에 대한 포섭능력이 최대장점인 것처럼 포장되어왔던 만화라는 대중문화 양식에 있어서, 성인들이 ‘자신들만의 코드’에 맞는 작품을 원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성인들을 위한 만화란 무엇일까? 섹스나 폭력 같은 것으로는 턱도 없다. 그것은 성인이기 때문에 비로소 즐길 수 있는 취향인 것이 아니라, 성인이 아닌 자들에게 사회적으로 그 쾌락을 금지시켰을 뿐이기 때문이다. 진짜로 성인을 위한 만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 단서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작품이 바로 <느티나무의 선물>(다니구치 지로 / 샘터)이다. 읽어보는 사람마다 “아, 이것이 바로 성인의 이야기다”라는 반응이 나오는 이 작품의 무엇이 과연 그렇게 성인스럽다는 것인가. 느티나무가 모든 것을 주는 것이 꼭 부모님들의 무한한 사랑 같아서? 글쎄. 그런 식으로 보자면 아동이나 청소년들이 보고 감동을 받기를 요구하는 동화류들과 기본 메시지가 크게 다르지는 않다. 감정이입할 주인공들이 다 중장년이라서? 그렇게 단순할 리가 없다. 어른들만 나오는 아동물도 얼마든지 많으니까. ‘성인스러움’은 좀 더 간단하고 쉬운 곳에 있다.

청소년/아동에게는 아직 없고, 성인에게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바로, “과거”다. 지금을 신경 쓰고, 앞으로의 성장을 힘쓰느라고 고군분투하는 것이 바로 청소년의 고민과 갈등이라면, 성인에게는 뒤돌아볼 과거가 있다. <느티나무의 선물>은 바로 그 과거 돌아보기가 만들어주는 성인적 감수성을 잔뜩 적셔주는 단편들의 모음이다. 우쓰미 류이치로의 원작 단편 소설들을 바탕으로 재창조한 이 작품에서, 다니구치 지로의 중장년 주인공들은 모두 지금의 현재를 살아가는 평범한 어른이다. 하지만 어떤 계기로 인하여, 그것이 새로 이사온 집의 느티나무든, 오랫동안 못본 동생의 전화든, 그림 전시회든 간에, 과거를 돌아본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현재를 다시 돌아보게 되고, 한층 인간적이고 따듯한 생활로 다시 방향을 잡아간다는 이야기 구도의 반복이다.

하지만 단순히 과거가 있는가 없는가 정도로 단순하지는 않다. 청소년 취향 작품에도 나름대로 과거 사연을 지닌 멋진 주인공들은 수도 없이 많으니까 말이다. 즉 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과거가 어떤 의미와 역할을 해주는 것인가, 라는 차원이다. 청소년은 과거의 반성을 바탕으로 해서 앞으로 무언가를 더 이루고 싶어 아등바등 노력하는 성장을 하는 미래 지향이다. 과거는 극복의 대상이고, 다음 성장의 ‘이전 단계’에 불과하다. 하지만 성인은 과거의 경험을 다시 떠올리고 자신의 현재 위치가 과연 무엇인가 반추해보며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다. 과거는 좋았든 나빴든 간에 지금의 나를 만든 재료다. 이것이 바로 성장 중인지 성장이 이미 끝났는지에 대한 차이다. 성인은 성장에 대한 욕심이 이미 한풀 꺾인 존재들이다. 아 물론 세속적인 출세를 여전히 꿈꾸기는 하지만, 그것조차 나름대로의 현실론 앞에서 스스로 한계를 지을 수 있는 것이 성인이다.

미래를 위한 과거가 아닌, 현재를 반추하는 과거의 정서는 때로는 복고 정서와 묶이기도 한다. 과거 “좋았던” 어떤 순간을 되돌아보며, 그다지 좋지 않은 현재와의 낯선 격차에 즐거워하는 감수성의 경향 말이다. 복고정서의 가장 큰 결점은 바로, 과거를 그리워 한다는 것이다. 현재를 위한 과거가 아닌, 현재를 잊고 과거에 잠시 칩거하기 위한 과거.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인정서가 아니라 그냥  현실도피일 뿐이다. <느티나무의 선물>은 현명하게도 복고 정서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우직하게 사람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사람이 아닌 느티나무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표제작 단편마저도, 정확히는 느티나무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과거다. 그리고 그 과거의 결과, 계속 느티나무와 함께 살아갈 것을 결심하는 새 집주인의 모습이 바로 성인이다.

이러한 정서를 묘사하기 위한 다니구치의 화풍은 그야말로 탁월하다. 특별히 역동적인 화면이나 재기발랄한 연출이 넘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세밀한 배경 덕분인 것도 아니다. 다니구치는 성인의 표정을 그린다. 말은 안해도 사연이 가득 담긴 표정, 의지보다는 관조가 넘치는 눈빛, 원만하게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성인들의 세계에서 연마된 듯한 적당히 경직된 딱딱한 표정. 특히 말없이 눈빛을 아래로 내리는 묘사에 있어서 성인의 정서를 연기력으로 보여주는 강력한 필력을 자랑한다. 하지만 거꾸로 그런 화풍이 완전히 고착되어,  중간중간 드라마틱한 설정의 줄거리가 선보이는 부분에서도 그다지 강렬한 사건의 느낌으로 와닿지 않는 단점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과거 회상 속 아이들마저 어른의 눈빛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성인만화가 다 이래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느티나무의 선물>은 담백한 시골 나물반찬 같은 책이다. 물론 성인의 건강에 좋고 성인만이 즐길 수 있는 그립고 반가운 풍미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생 심심한 것만 먹어서야 식사가 즐거워질 리가 없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가끔 이런 풍미를 즐기는 것, 성인의 특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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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모범적 일상은 아니지만… <생활의 참견>[기획회의050919]

!@#… 그간 밀린 포스팅 떨이.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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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적 일상은 아니지만, 모범적 일상만화 – <생활의 참견>

잘 알려져 있다시피 라디오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코너들 가운데 상당수는, 청취자들이 보낸 사연을 소개해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경험담을 털어놓는다는 것의 재미는 과연 무엇일까. 충격적인 소재와 극적인 전개, 놀라운 특수효과가 들어가지 않더라도 이야기 자체의 힘만으로 사람들을 휘어잡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일상성의 매력, 공감의 힘이라고 불리우는 그 이상한 흡입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일상성의 재미 가운데 하나는 바로 ‘공감’이다. 원래 인간이라는 동물은 그다지 상상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라서, 모든 것을 자신의 직접적인 생활 경험과 가까운 것으로 적극적으로 변환시켜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촉진하는 가장 강력한 두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는 바로 디테일이다. 타인의 이야기 속에 담긴 소소한 디테일이 내가 경험적으로 기억하는 어떤 것과 일치하면 마음 놓고 전체 맥락에 공감해버린다. 거꾸로, 전체 맥락이 공감 갈 만한 내용이라도 디테일이 미묘하게 다르면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다른 하나는 실존하는 화자다. 이야기가 가상적인 캐릭터들의 모험담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가의 생활이다, 라고 현존하는 주체가 부여되면 공감의 수준은 더욱 올라간다. 이 두 가지가 갖추어질때, 남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우리네들 사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 측면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아예 소재로서 일상적 살아가는 이야기나 생활을 다루는 것을 ‘일상물’이라고 한다.

상상력 풍부한 모험담, 자유분방한 표현법을 주로 발달시킨 만화에 있어서 이 분야는 사실 비교적 늦게 개척된 것 가운데 하나다. 논픽션(다소의 각색과 과장은 너그럽게 허용한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에세이, 일기, 사연소개라는 컨셉이 한국에서 만화와 만나서 대중적 성공을 거두기 시작한 것은 사실상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어 “그런 시시한 이야기들을 가지고도 만화를 발표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이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성장은 대단히 빠르게 이루어져서, 지금은 당당한 주류 장르 가운데 하나가 되어있다. 물론 항상 그렇듯이 함량미달의 물건들도 많지만, 정말 무릎을 치게 만드는 작품들의 맥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최근 단행본으로 출간된 <생활의 참견>(김양수 / 애니북스)을 이러한 장르적 유행에 편승한 작품이라고 평한다면 무척 당혹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오히려 이 작품은 이 장르의 사실상 선구자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작가가 월간 의 기자로 근무하면서, 지난 98년부터 꾸준히 연재해오던 것들의 묶음이다. 월 1회 한 페이지 남짓 연재되던 것이기에 7년만에야 단행본 분량이 축적되었고(사실 그나마 글이 절반이다), 웹사이트에서 연재한 것이 아니라 종이잡지에서 한 것이기에 여타 일상만화보다 전파가 덜 되었을 뿐이다. 

<생활의 참견>은 좋은 일상만화의 장점을 고루 지니고 있다. 자신과 자신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부여되는 현실감, 세부적 디테일을 맛깔스럽게 포장해내는 솜씨,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마치 10년만의 동창회 술자리에서 입담 풀어놓듯이 재미있게 전개시키는 이야기꾼 기질. 또한 각 이야기를 짧게 끊어주면서 일상 속 ‘에피소드’를 각인시키는 솜씨 역시 출중하다. 독자들은 작가의 삶 자체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공감하고 즐길만한 편린들을 원하니까 말이다. 특히 책의 전반부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것은 80년대 초의 청소년기인데, 그 때가 한국에서 대중문화의 격변기였기에 참 기억을 같이 나눌 일들이 많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대단히 유리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아 그때는 이런 게 다 생겨났었지. 우리 동네에도 그게 있었는데, 그 때 그런 친구 녀석이 하나 있었는데 말이야, 엉뚱하게도 **한 짓을 해버렸어!” 물론 좋은 마무리를 하려면, 결코 “그때가 그리워요” 식의 이상한 감상주의로 끝나면 안된다. 단편적인 재미있는 기억이 샘솟는 것과 정말로 그때를 그리워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니까. 예를 들어 군대 개그를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좋은 일상만화의 또 다른 조건은 바로 일상의 공감 이상의 대단한 무언가로 독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인데, <생활의 참견>은 이 것 역시 잘 충족하고 있다. 억지로 감상주의를 강요하지 않고, 억지로 웃기려고 오버하지도 않고, 심지어 그림체마저도 부담없고 푸근하기 이를 데 없다. 세밀하거나 박진감 넘치는 데생과는 애초부터 방향이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더그라운드 만화에서 종종 활용하는 위악적인 낙서체의 느낌도 아니다. 그림과 글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만화라는 매체의 매력을 확실하게 활용하면서도 절제할 줄도 아는 균형감각 역시 좋은 이야기꾼의 증거다.

하지만 모든 일상물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인 소재의 고갈로부터 자유롭기는 힘들 듯 하다. 사실 사람의 일생이란 워낙 재미있는 일들이 한정되어 있는데, 남의 이야기를 잘 포장하는 것은 자기 이야기를 포장하는 것과 전혀 들어가는 힘이 달라진다. 당장 이 책 한권 안에서도 직접 겪은 일과 ‘사연을 소개받았다’는 일들은 특히 디테일의 활용에 있어서 워낙 재미의 격차가 상당히 크다. 그렇다고 해서 작품 컨셉을 이제부터 사연보다 잡상으로 바꾸기 시작한다면? 책 말미의 섹션을 차지하고 있는 잡상류 작품들의 면면을 볼 때, 작가의 특기분야가 어느 쪽인지는 너무나 명확하다. 아니 사실 책으로서 컨셉 통일성과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아예 말미 섹션 자체를 넣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결국, 방법은 끊임없이 폭넓은 재미있는 생활을 만들어나가서 자꾸 현재진행형으로 소재를 만들어 나갈 수 밖에 없다. 잘 해나가면 7년 뒤에 또다시 단행본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고, 아마 독자들 역시 기쁜 마음으로 그 순간을 기다리게 되지 않을까. 여하튼 지금은, 일상에 즐겁게 참견당해서, 또는 참견하는 일상의 즐거움을 같이 공감하며 느낄 수 있는 책이 나와줘서 즐거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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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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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파의 미덕 – <바보> [기획회의050904]

신파의 미덕  – <바보>

통상적인 의미와 실제 대상의 괴리를 느끼도록 하는 호칭들이 가끔 있다. 예를 들어서 ‘미친년’은 어떨까. 통상적으로는 어떤 여자가 뭔가 황당한 짓을 했을 경우 그냥 피식 웃으며 내뱉는 호칭이다. 하지만 원래 이 단어가 진짜로 대상으로 하고 있던 것은, 무언가 엄청난 비극적인 사건을 겪고 그 충격으로 인하여 실성, 진짜로 정신병리학적으로 큰 문제가 생겨서 동네를 배회하던 그 사람들이다. ‘지랄한다’, ‘병신 삽질한다’ 등 일련의 비속어들이, 다들 훨씬 더 비극적이고 끔찍한 상태인 무언가를 일상의 친근한 이미지로 자연스럽게 바꾸어 놓는다.

<바보>(강풀(강도영) / 문학세계사)의 첫 머리는 바로 이 지점을 한번 긁어주면서 시작한다. “어린 시절 어느 동네에나 하나쯤 있었던 바보.” 어라, 생각해보니 필자가 어렸을 때도 동네에 바보가 하나 있었다. ‘이런 바보 같은 놈’이라고 할 때의 바보가 아니라, 진짜 바보 말이다. 아니 더 자세히 생각해보니 이사 다니던 어느 동네에나 하나씩은 있었던 것 같다. 놀림 받고, 애들이랑 어울리는 어른. 지저분하게 하고 다니면서, 어떤 애들보다도 더 애들 같았던 사람들.

<바보>는 ‘<순정만화 씨즌2>’라는 다소 안전한 선택의 부제를 달고 미디어 다음에 연재되었던 작품이다. 이야기는 동네 바보 승룡이, 미국에 유학가서 피아노를 치다가 좌절해서 돌아온 지호, 승룡이의 친구이자 동네 양아치인 진수 등 여러 주인공들의 과거 사연과 현재의 응어리가 점차 풀려나가는 식이다. 그 방식은 무척이나 고전적이고 드라마틱하다. 엇나간 애정, 끈끈한 우정, 조건없는 희생 같은 구식의 감성은, 선천적 유전병, 어린 시절의 사고, 어린 시절의 약속 등 구식의 소재들과 만나면서 하나의 전형을 이룬다. 그런데 그것이 ‘지겹다’기 보다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재미로 녹아들어가는 자연스러움을 보이고 있다.

<바보>는 만화가 강풀(강도영)을 대중적 스타로 만들어준 <순정만화>,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연재했던 <미스테리 심리 썰렁물>(출간시에는 ‘아파트’로 제목 변경)과 마찬가지로 2권짜리로 묶여 나왔다. 항상 사전에 스토리를 완성하여 4개월 동안 집중 연재를 하고 수개월 휴식을 취하는 이 작가의 방식은, 무한 연재 속에서 스스로 망가지는 많은 연재만화들의 함정에서 의연하게 벗어나 잘 구성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좋은 작품 발표 방식이기도 하다. 전작의 인기에 버금가는 호응을 불러일으켰다느니, 곧바로 영화화 판권이 팔려나갔다느니 하는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들은 대충 넘어가더라도, 여하튼 이 작품의 특징과 미덕은 무척 분명하다. 형식적 특성인 칸 경계선을 흐리게 처리하고 그 대신 독백 대사로 연결하는 주관적 서술, 간혹 등장하는 스크롤 넘김 효과의 표현력을 활용하는 한 화면 이상 길이의 세로로 긴 칸(이것은 마치 책 만화의 경우 한 칸으로 두 페이지를 가득 채워서 시선을 제압하는 것과 비슷한, 아니 그 이상의 효과를 지닌다)은 이제는 굳이 다시 이야기하기도 뭣할 정도로 완전한 스타일로 완성되고 있다. 여러 주인공의 심리적 엇갈림에 의한 다중 시점 전개 역시 인간사의 감성적 면을 강조하는 이 작품에서 강한 효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어떤 형식적인 실험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결국 그 형식을 통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전달하여 독자를 휘어잡는가 하는 측면인데, 능란한 이야기 페이스 조절과 무엇보다 여전한 – 아니 한층 더 강력해진 신파 정서가 <바보>의 가장 큰 미덕이다. 이 작품에서는 누구하나 내심 순수함을 간직하지 않은 사람 없고, 다양한 인간관계의 엇갈림 속에서 모든 문제는 정서적인 방식으로 해결된다. 항상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개연성 없이 몰려오는 여러 비극 속에서 주인공들은 사랑과 우정 말고는 기댈 곳이 없다.

이런 각박한 현실 세상에서 그런 것이 가능하겠냐고? 그렇기 때문에 현실세계 속에 있으면서도 현실과 떨어져 있는 순수와 서정의 전도사가 필요하다. 바로, 바보 말이다. 바보 승룡이는 기본적으로 과거의 존재다. 정확히는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 성장을 그만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성장하면서 잊어버린 여러 가치들, 어릴 적의 어떤 빛나는 순간을 계속 현재진행형으로 기억한다. 작은별 행진곡이든, 동생을 돌봐줘야 한다는 단 하나의 약속이든 뭐든 말이다. 승룡이라는 바보라는 존재는 현실에서 잊어버린 소중한 무엇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나 다름없고, 그를 낙오자로 보지 않고 자신들의 거울로 받아들이는 순간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그것은 과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소중히 끌어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일종의 우화처럼 포장된다. 누구나 순수한 삶에 대한 애정을 되찾는 이 따뜻한 작품에서 (나름대로 사연은 있지만) 유일한 악역이자 삶의 회복에 실패하는 ‘사’장이라는 자가 이 작품의 매개체인 바보 승룡이와 유일하게 교류하지 않은 캐릭터라는 점이 가정을 뒷받침해준다. 그렇게 해서 이야기는 완성된다.

이 말은 반대로 하면 고스란히 작품의 약점이 된다. 기본적으로 과거와 순수를 매개로 해야 현실에서 깨달음을 얻도록 한다는 것, 무조건적인 – 따라서 비현실적인 – 감상주의를 통해서 인간사가 진행된다는 것은 지나치게 달콤한 환상이다. 심지어 비극이라 할지라도, 달콤한 비극적 환상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전작 <순정만화>가 다양한 남녀 간 사랑을 통해서 나름대로 사람 사이 현재에 충실한 솔직한 소통의 중요함을 자연스럽게 강조한 것에 비해서, <바보>는 작품의 줄거리에서 진행되는 감동 이상의 지속적인 무언가가 부족한 측면이 있다. 애초에 사회파 만화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온 작가의 이력으로 볼 때 아쉬운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재미와 감동을 부인하거나, 심지어 약간이라도 덜 즐겨야할 필요는 없다. 능란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따뜻한 감성의 완성된 이야기의 매력을 폄하하는 것은 절대 부당하다. <바보>는 재미있는 작품이고, 따뜻한 이야기가 그리운 모든 이들을 위한 멋진 선물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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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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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지리멸렬한 파멸 – <십자군 이야기2> [기획회의050804]

!@#… 2년이 걸리고, 200페이지를 새로 그리고 나서야 나왔다는 2권. 3권에서는 그 콤비네이션을 따르지 말아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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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지리멸렬한 파멸 – <십자군 이야기2>

성격 안좋고 힘센 나라가, 자신의 잇속을 위해서 마음대로 다른 나라를 침공하고는 그것을 ‘전쟁’이라고 불렀다. 그 다른 나라의 지도자도 하필 상당히 문제많은 인간이었기에, 그 명분은 무려 민주화였다. 여하튼 침략은 전쟁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썼고, 잠시의 화려한 쑈를 거치더니 이내 전쟁은 끝났다. 아니 단지 이번에도 일방적으로 끝났다고 선포를 당했다. 실제로는 전혀 끝나지 않아서, 그 뒤 2년여가 다 지나도록 아직도 세계 도처로 무대를 확장하고,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추악한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민주화 해방’ 되었다는 이라크는 국가 분열과 내전의 위기에 몰렸고, 런던에서 많은 안타까운 죽음을 낸 지하철 폭탄 테러가 일어나고… 모든 것은 이 지리한 과정의 일부에 불과하다. 전쟁을 처음 시작하는 책동가들은 모든 것이 자신들의 승리로 마무리되어 깔끔하게 털고 일어설 것을 항상 계산하지만, 실제로는 길고 긴 늪으로 빠져들어 버린다. 미국의 또다른 현대사에 길이 남을 전쟁 책동 공작이었던 베트남전으로부터 인류가 얻은 교훈 따위는 전혀 없는 듯 하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전쟁이라는 충돌형태의 원인에 대하여 날카롭게 분석해서 독자들을 전율시켰던 한 만화가 있었다. <십자군 이야기>라는 제목의 이 만화는, 중세 십자군의 ‘성전’을 통해서 누군가에 의해서 전쟁이 책동되고,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동원되고, 그 와중에서 누군가가 희생당하고 누군가는 잇속을 챙기는 메커니즘을 해학적으로 풀어놓았다. 그리고 2년여가 흐른 후, 여전히 전쟁이 진짜로 종식될 가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오랫동안 고대했던 속편이 나왔다. <십자군 이야기2>(김태권 / 길찾기)는 전작이 끝난 부분에서 새로운 시작을 한다. 1권이 군중십자군의 우매하고도 비극적인 개전을 통해서 십자군 전쟁의 전체 패턴을 압축적으로 묘사해냈다면, 이제 2권에서는 본격적으로 정규군에 의한 전쟁이 시작된다. 귀족 제후들, 종교지도자들이 정식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동쪽으로 간다. 군중 십자군이라는 무지한 욕심꾼들을 슬기롭게(?) 극복한 동방 로마제국은 이번에는 아예 자신들을 통째로 먹어 삼키려는 진짜 침략자들을 맞이하게 된다. 이슬람은 오합지졸 군중십자군을 퇴치하고는 방심하다가, 예루살렘까지 일시적으로 빼앗기는 패배를 겪는다. 그리고 물론 그 와중에는 정복에 눈이 먼 십자군이 자행하는 비인간적인 학살과 (문자 그대로) 포식에 희생 당하는 불특정 다수의 주민들이 있다.

2권의 핵심 정서를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주인공은 바로 기사 보에몽이다. 그는 강력한 무력과 높은 지도력으로, 전형적인 전쟁 서사극 주인공의 됨됨이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것은, 멋진 영웅담과는 무척 거리가 멀다. 승리의 순간에 이야기를 끝내거나, 비장한 죽음으로 여운을 남기며 나머지 이야기를 바람속에 흐트려놓을 수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전쟁에 쉬운 결말 따위는 없다. 당초 십자군의 명분이었던 예루살렘 탈환을 이루고 난 후에도, 십자군은 끝나지 않는다. 1차 십자군의 강력한 군사적 리더 보에몽이 완전히 몰락해버리고 나서도, 끝나지 않는다. 끝끝내 질리지도 않고 계속 지리멸렬하게 계속 꿈틀대는 전쟁의지 속에서, 당초의 책동가들도 이미 스스로 예상한 이득의 궤적에서 벗어난지 오래다. 앞으로 훨씬 더 많은 횟수의 “제*차 십자군 원정”이 이어질 것을 역사적 지식으로 알고 있는 현대 독자들은 정말이지 질려버릴 노릇이다. 전쟁은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예상치 못한 요소들이 점차 붙어나가면서 결국 헤어나오기 힘든 커다란 수렁이 되어버린다.

전작의 프롤로그가 서방세계의 중세 이전 전쟁사를 다루었다면, <십자군 이야기2>는 우리가 ‘이슬람 세계’라고 부르는 그 중동 공간에 존재했던 이슬람 종교 이전의 문명사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현재까지도 사람들은 종교가 어쩌니 하고 명분을 세워서 싸움을 찾고 있지만, 사도 마호멧 이전의 문명사도 사실 별다를 바가 없다! 원래부터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는 야욕을 엔진으로 하는 전쟁들이 넘실댔으며, 그 속에서 균형과 부조화가 번갈아가며 세상을 지배했다. 1권에서만큼 프롤로그와 본 내용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느낌은 적지만, 십자군에 맞서는 이슬람 진영의 처지를 좀 더 본격적으로 집중할 3,4권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연결다리를 시사하고 있다.

전작 이후로 흘러간 2년여의 시간은, 작가의 표현능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고전적 드라마와 현대적 풍자, 극중 이야기와 작가의 직접 개입을 넘나드는 서술 솜씨는 한층 능란해졌고, 그림 역시 더욱 통일성 있게 다듬어졌다. 각종 해학적 농담은, 더욱 농밀하면서도 전작에서 가끔 보였던 지나친 집착에서 벗어나 양념의 역할로 좀 더 확실히 자기 자리를 찾고 있다. 200여 페이지를 다시 그려야 했다는 작가의 후기가 그간의 과정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줄 뿐이다. 지적인 성향 역시 여전해서, 작품 뒤 빼곡이 차있는 참조도서에까지 해설을 한마디씩 더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물론 아직 좀 더 다듬어졌으면 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예를 들어 정사와 야사, 가설을 만화 자체의 서술 속에서 뚜렷이 구분되게 묘사해 내는 방법론이 더욱 연마되어야 한다.  분명히 극중 십자군이 벌이는 이야기는 것을 전제로 하는 작가의 여러 현실풍자적 해설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군중십자군의 은자 피에르가 1차십자군에서 롱기누스의 창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그 피에르와 동일인물이라는 가설을 실제 극 속에 풀어 넣음으로서, 픽션의 요소들이 녹아들어가버린다. 그리고 모든 것을 직접 현재진행형의 사건이자 사실로서 보여주는 관행에 익숙한 만화라는 매채에서, 그것은 자칫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는 인상, 나아가 전체 내용의 신뢰성을 흐리는 폐단을 낳아서 작품의 큰 주제와 맥락에 누가 된다.

분명히 <십자군 이야기2>는 이 시리즈의 전작을 뛰어넘는 명작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또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십자군 이야기3>이 더욱 뛰어난 모습으로 돌아와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역시, 인류가 조금만 더 현명해져서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과 메시지들이 하나도 신선하고 충격적이지 않은 조화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이상주의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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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시대극, 장르 오락 상상력 – <풍장의 시대> [기획회의 050705]

!@#… 현업 완전 복귀는 아직 반나절쯤 남았지만, 여행가기 전에 써놓고 간 것들은 창고방출. 우선, 지난 호 기획회의 원고.

!@#… 개인적으로는 이 만화 읽어라/읽지마라고 품평을 해주는 것 보다는, 경향 <펀>의 <만화풍속사>에서 격주로 연재했던 것 같은 컨셉 – 즉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 통찰을 하기 위해서 다양한 만화작품을 자연스럽게 소재로 끌어들이는 방식을 더 좋아한다. 그런데 그런 글을 쓰고 있는 지면은 현재 <인물과 사상> 정도 밖에 안 남았는데, 여기는 또 항상 너무 헤비하게 힘들어가서 탈이다. 뭔가 좀 더 가볍게 통통튀는 (고료 나오는) 연재코너가 필요하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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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극의 장르 오락적 상상력의 해답 – <풍장의 시대>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 황동규 詩 <풍장> 중

예술적 상상력의 특효약이자 대중오락문화의 보고는 바로, 오래된 가치와 새로 들어온 다른  가치들이 어지럽게 충돌하는 시대에 대한 기억이다. 오래된 가치를 지키려는 자와,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가치가 필요하다며 변혁을 부르짖는 자.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문화가 충돌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부딪히며, 오해와 화해의 다양한 드라마들이 저절로 탄생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속에서 정반합 작용에 의하여 잉태되는 무언가 또다시 완전히 새로운 가치를 통하여 시대의 희망을 볼 수 있는 단서까지. 이야기 예술을 만들어냄에 있어서 이것보다 더 확실한 공식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면에서 보자면 한국이라는 곳의 역사, 특히 근현대사는 완전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민주화 시민세력과 독재세력, 인권을 부르짖는 노동자와 개발 자본가의 충돌, 이념을 빙자한 무의미한 동족상잔인 한국전쟁, 일제의 압제와 한국의 독립의지 등, 숱하게 사용되고 또 사용되어온 배경 소재들이다.

그런데 항상 의외로 별로 많이 활용되지 못한, 또는 그다지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시대가 바로 그 직전에 있었다. 그 시대가 바로 ‘개화기’인데, 전통문화와 서구적인 가치, 신분제도의 극복을 위시한 내부적 근대화를 꾀하는 내부와, 외부로부터의 근대화를 통해서 식민지배의 야욕을 품는 외세의 가치충돌이 부글거리던 역사의 단편이다. 본격적인 전쟁 또는 식민지화 등으로 파국을 맞이하기 이전, 복합적인 긴장관계가 팽팽하던 시절 말이다. 실제로 이웃나라 일본만 하더라도, 이러한 개화기 시절의 긴장이 가장 인기 있는 소재 가운데 하나다. 메이지 유신 직전을 무대로 하여 신센구미(신선조)니, 유신지사니, 사카모토 료마니 하는 키워드들이 무척이나 친숙하다. 그에 비해서 사실 한국에서는 이 시기가 아쉽게도 그렇게 활발하게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아마 실제 역사상의 개화기가, 일제에 의한 식민 지배라는 최악의 비극으로 끝났기 때문에 생기는 엄숙한 조심성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재의 매력이 떨어지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결말을 알기에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간 사람들의 모험을 더욱 강렬하게 그려낼 수도 있지 않는가. 그것을 증명해주는 최근 작품이 바로 <풍장의 시대(가리 글/이성규 그림, 대원CI>다. 이 작품은 시골의 양반 소년 목이가 십이지 수호신의 보호를 받으며 상경,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로 이어지는 개화기의 여러 사건들을 겪게 되는 내용이다. 현재 격주간 <영챔프>에서 연재중이며 아직 단행본으로 2권까지 밖에 진도가 나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녹록치 않은 구도들이 여럿 드러나고 있다. 동양과 서양, 기계와 자연, 그리고 일본의 영적 가치와 한국의 영적 가치를 주요 축으로 하여 이미 독자들을 완전히 끌어들이고 있다.

소재의 힘이라는 것은 강력하다. 시골 양반 자제인 주인공이, 시천의 하늘을 기억하는 선택받은 영혼이며 십이지신의 수호를 받는다는 설정은 그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쓸만한 소년 모험만화의 기본 구도를 품고 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혼과 백의 균형이 깨져가는 개화기를 살아나가며 이상한 일들을 극복해내야 한다면, 흔한 모험물과는 다른 차원의 재미가 저절로 더해지는 것이다. 십이지신이라는 존재들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다양한 미소년 미소녀 캐릭터들이 초능력을 부리며 주인공을 수호해주는 것으로 설정하기만 해도 소년만화 장르의 기본공식을 충족시켜준다. 하지만 그들이 영적 격변기를 살아나가야 하는 입장이고, 돼지머리와 술과 담배에 욕심을 내는 지극히 한국 무속적인 속성을 지닌 정감어린 신들이라면 이야기는 새로운 독창성을 부여받는다. 품격과 재미를 겸비한 대중오락물을 위한 모범적인 접근인 셈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그렇게 선택한 소재들을 제대로 작품으로서 요리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훌륭한 설정과 재앙스러운 전개로 독자들을 경악시킨 작품이 어디 한 두 가지겠는가. 다행히도, <풍장의 시대>의 작가 콤비는 무리하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요령을 터득하고 있는 듯 하다. 수호신들은 정체불명의 무협기술을 외우며 하늘을 날라다니는 과장법보다는 투박한 돌격을 구사하고, 주인공은 실눈에다가 땅딸막한 꼬마다. 격투질에 집착하기보다는 시대의 충돌을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는 사건 전개, 어설픈 무게잡기 보다는 세심한 내면묘사와 캐릭터구축에 힘쓰는 접근이 바로 이 작품의 우수성을 지탱해주는 생명줄이다.

분명히 <풍장의 시대>는 비교적 신인급인 작가들의 경력에 비하자면 놀랄 정도로 원숙하다. 하지만 원숙함은 때로는 독이 될 수도 있기에, 조심해야할 필요가 있다. 원수간 장르적 상상력이 쉽게 빠져들어갈 수 있는 길들, 즉 일본이 한국을 영적으로 지배하려고 한다는 식의 음모론, 대등한 능력의 영능력자간의 일대일 대결, 맥락 없는 로맨스 등으로 대표되는 인스턴트식 흥미유발 요소에 빠져드는 ‘해탈’이 바로 그 위험요소들이다. 그 유혹을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덜 원숙한’ 자세를 꿋꿋이 유지해주기를 작가들에게 미리 당부하고 싶은 심정이다.

“서양 역사를 모태로 한 서양 판타지를 업어온 일본 서양 판타지를 다시금 주술 등 동양적 소재로 뒤범벅한 일식 퓨전 판타지를 다시 한국에서 적당히 긁어모아온 판타지 세계” 에 매달리는 수많은 만화작품들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이 작품에 박수를 보낸다. 그 길이 훨씬 더 재미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더. 걱정인 것은, 이 작품이 연재중인 <영챔프>가 <그의 나라>(박흥용), <맘보 파라다이스>(윤승기)의 연재중단이라는 과거 경험에서도 볼 수 있듯이 좋은 만화가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지면과는 거리가 꽤 있다는 점이다. 업계 최고 경사 중 하나인 2005년 상반기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탔음에도 불구하고, 시상식에 출판사 사람이 작가들 기념사진 찍을 때 꽃다발 하나 안겨주지 않았다는 점을 볼 때 이 불안은 언제 사실로 바뀔지 모른다. <풍장의 시대>가 출판사의 방만함으로 이나여 억지로 풍장을 당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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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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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의 조건 – 이와아키 히토시의 <히스토리에> [기획회의 050605]

!@#…지난호 기획회의. 우연찮게 비슷한 시기에 씨네21(507호)에서도 리뷰가 올라왔던데… 비교하며 읽어봐도 재밌을지도.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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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의 조건 – 이와아키 히토시의 <히스토리에>

꽤 옛날, 한 왕이 있었다. 그 때 왕들이 의례 그렇듯이, 어디론가 남의 땅에 들어가서 말달리고 싸우고 이김으로서 ‘정벌’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뭐가 그리 속에 불길이 타올랐는지, 정벌을 하고 나서 그 다음 그곳을 지배하고 가꾸는 것에 큰 신경을 쓰지 않고, 곧바로 다음 목적지를 향해서 나아갔다. 정벌하고 정벌하고 또 정벌한 결과, 어느틈에 지중해 연안에서 아시아 전역을 다 휩쓸고 다녔다. 뭐 그러다가 결국 죽었지만, 그의 정벌 자체에 대한 그 무한한 집착과 성과는 어째서인지 후세에서 높이 평가받아,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불렀다. 여하튼 그저 끊임없이 정벌을 반복하는 모습은 단순한 권력이나 지배욕과도 뭔가 다르며, 오히려 마치 병정개미와도 같은 순수한 본능에 가까워 보일 정도다. 그 과정을 바로 옆에서 냉정하게 지켜보는 입장이라면 어떨까? 사회적 명분을 뒤로 하고, 사실상 생물학적 특성인 듯한 그 행위들을 주욱 따라간다면 무슨 느낌이 들까.

알렉산더의 파란만장한 시대를 다루는 만화 <히스토리에>(이와아키 히토시 / 서울문화사 / 2권 발행중)의 주인공은 특이하게도 알렉산더 본인이 아니라 그의 개인 서기관이었던 에우메네스다. 에우메네스는 서기관이라는 입장에서 알렉산더의 기행(奇行)을 지켜보았으며, 총명한 두뇌와 리더십을 바탕으로 알렉산더 사후에 군대의 전권까지도 얻게 되는 인물이다. 물론 완전히 돋보이기 전에 결국 배신당해서 사망하지만, 확실히 특이한 경우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이와아키 히토시라는 작가가 과연 누구였던가. 인류가 사실은 생태학적으로 문제가 많은 종족이며, 그래서 먹이사슬을 복원하러 정체불명의 포식자들이 나타나서 인간의 몸에 기생, 인간으로 둔갑하여 들어간다는 충격적인 세계관으로 90년대 고품격 일본만화의 정점을 이루었던 <기생수>의 작가다. 그 작품에서 중요하게 사용되었던 모티브는 인간 바깥의 시선으로 인간을 냉철하게 바라보건데, 사실 인간이란 것이 별 것 없을 수도 있다는 섬뜩한 관찰담이다, 말도 안되지만 너무나도 순수할 정도로 직선적이고 본능적인 기행을 냉정하게 목격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에우메네스에게 그 접근법과 문제의식이 그대로 계승된다.

그 문제의식이란 바로 인간됨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히스토리에> 초반의 배경이 되는 고대 그리스권 도시국가들을 아크로폴리스니 민주주의의 시발점이니 하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모든 시민은 평등하지만, 시민이라는 계급은 전혀 평등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민의 성숙함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은 그들과 다른 종족들을 바바로이(야만인)라고 부르며 폄하하며 노예로 삼아버렸다. 여성과 아이는 물론 정치적 참여권을 가진 일반 시민이 아니며, 게다가 혈통이 중시되었다. 그런데 그렇다면 바바로이와 문명인의 경계, 즉 시민과 노예의 경계는 도대체 얼마나 명확한 것인가. 사실 전혀 명확하지 않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일 뿐, 그리 선천적이고 절대적인 기준 따위는 없다. 그것은 바로 인간적이라고 부르는 성숙함의 경계선 역시 사실 별 것 아니라는 이야기와도 같다. 그럼에도 자꾸 자신들을 ‘인간’으로 자처하게 만드는 이성과 감성의 기준을 만들어 내며 자족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하지만 이성과 감성에 우선하는 것은 바로 생물로서의 본능 그 자체다. 그 중 하나는 개체의 생존본능, 또 다른 하나는 그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정복이나 복수 등 외적 공격성향이다. 고리타분한 고대 모험담이나 신화 섞인 전쟁이야기나 나오기 쉬운 이 시대와 역사를 배경으로, <히스토리에>는 인간에 대해서 논한다. <기생수> 당시보다도 더욱 진하고 집요하게.

인간(들)의 본질을 캐내기 위하여, 바깥의 자가 인간 활동 패턴을 관찰한다는 감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캐릭터들의 무심한 표정 덕분이다. 사실 이 작가는 그다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만한 팬시 느낌 강한 미소년 미소녀를 묘사하지도 않을 뿐더러, 표정묘사 역시 지극히 부족하다. 아니 사실 데생이나 그림체 자체가 뭔가 ‘끌리는 맛’이 부족하다. 하지만 지금 기준에서 지극히 야만적이고 잔인한 제도들을, 당연한 문명의 꽃으로 인정하고 있는 이쪽 세계의 괴리감에는 그런 멍하고 무표정한 모습들이 오히려 확실한 효과를 준다. 그에 비해서 일반적인 연출방식은 대단히 완성도가 높아서 긴장 넘치는 복선은 물론, 난데없는 상황 반전 내지 급진전이라는 강력한 작품 통제력을 자랑한다. 특히 트라쿠스가 오랜 노예생활에서 풀려나서 햇살을 움켜쥘 듯 하늘에 손을 대는 희망의 모습과, 바로 그 다음 두 페이지를 장식하는 강렬한 죽음의 이미지의 대비는 이 만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시각 연출의 백미다.

항상 그렇듯이, 티 없는 옥은 없다. 예를 들어 작품에서 필요 이상으로 자주 등장하는 잔학성은 작품의 내적 리얼리티와 ‘인간이란 게 다 그런거지’ 식의 시니컬한 메시지를 잘 살려주지만 독자층을 좁게 만드는 요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히스토리에>의 경우 가장 큰 잠재적 문제는 연재 작업 그 자체다. 일본 현지에서도 월간지 연재작인터라 단행본 발간주기에 특별히 연연할 것은 아니지만, 우선 내용 전개가 확실히 느리다. 현재 발간된 2권까지의 분량에서는, 에우메네스의 현재 모습과 유년기 경험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아직 알렉산더의 부하로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게다가 장편시리즈이기 때문에 엿가락 늘리기식 지속을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요소까지 겹치면, 정말 난감해진다.

사실 말이 옥의 티지, 사실은 투정이다. 더 빨리 더 많이 에우메네스의 모험담을 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라서 그런 셈이다. 그 멍한 청년과 함께,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 논하고 싶다. 에우메네스는 모르겠지만, 사실 작가는 이미 자신의 견해를 꽤 명확하게 표출을 해버리고 있다. 2권 마지막 페이지, 어린 에우메네스가 감정과 생존본능의 무게중심을 비견하여 결론에 도달하는 대목을 보며 작가에게 마음 속으로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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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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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우리나라 – <조선왕조실록>[기획회의 050605]

!@#… 이번 월간 인물과 사상에 쓴 <만화 박정희> 글(발간 후 올릴 예정)과 다소간 이어지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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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우리나라 – <조선왕조실록>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나라의 정권을 잡는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크게 신기할 것도 없는 노릇이다. 권력의 가장 물질적인 형태는 바로 무력이고, 그 무력을 손에 쥐고 있는 자가 서서히 나머지 권력 형태들을 갈구하여 어느날 갑자기 실력행사에 나선다는 시나리오는 동서고금 막론하고 항상 있어왔던 이야기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 사람들이 너무 쉽게 생각하는 말이 하나 있다: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하리라”. 이 말은 어디까지나 무력의 폭풍 앞에 억압당한 불쌍한 우리네 중생들을 위한 위로의 한마디일 뿐이다. 칼로 일어선 자가 칼로 망하리라는 보장 따위는 어디에도 없으며, 행여나 망한다 할지라도 이미 충분한 권세를 누린 다음에 망하는 경우가 사실은 더 많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칼로 일어난 자를 사후에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도 한다. 별로 정당화할 구석이 없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구국의 결단’이니, ‘그래도 덕분에 경제는 살아서 밥은 굶지 않게 되었다’, ‘각하는 청렴하신 분이었다’는 등의 사실검증과는 상관없는 어거지 신화들을 마구 동원한다. 물론 권력을 잡은 자가 스스로 그런 프로파간다를 실시하는 경우도 많지만, 사실 더 중요한 점은 그들의 아래에서 권력의 대상이 되었던 백성들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어느 틈엔가 그것을 인정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권력에 복종을 하며 살아왔던 자신들의 정체성에 혼란이 오니까(심리학에서 ‘인지부조화이론’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그것이 약간 오버를 하면, 하나의 종교와도 같은 신념이 된다. 아주 단순한, 권력의 생리다.

박정희 이야기를 시작하자는 것이 아니다. 약간 더 – 한 500년 정도는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한 군인이 있었다. 그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기존의 나라를 뒤엎고 새 왕이 되었다. 그리고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뿌리도 뭣도 없이 왕 노릇을 하면 분위기가 좀 거시기해지기 때문에, 고려 후기에 원나라의 관리 노릇을 한 그의 고조를 시작으로 해서 ‘조선왕조’를 상정했다. 그리고 그의 자손대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왕조의 역사를 주욱 묶어내서 만든 기록이 바로 그 유명한 ‘조선왕조실록’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5권 발매중, 휴머니스트)은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만화로 된 현대적인 화답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갖가지 일화들과 큰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현대의 독자들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적절한 현대적 비유와 그것을 만화적 연출로 버무리는 솜씨를 발휘한다. 진지한 내용과 독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대화 건네기, 그것을 딱딱하지 않게 감싸는 유머감각. 그리고 그 속에 명확하게 묻어나오는 작가 자신의 역사와 사회에 에 대한 시각.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를 베스트셀러로 만들어주었던 장점들을 이 작품 역시 고스란히 갖추고 있다. 해외문물에 대한 소개라는 화제성과 보수/수구적인 가치관과는 달리, 자세히 알든 말든 우선 사람들이 지겨워하고 보는 한국사 이야기라는 약점과 진보적인 가치관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조선왕조의 역사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그 속에서 벌어진 일들 이상으로 무척 흥미롭다. 작가는 그 역사가 권력의 암투를 통해서 진행되는 정치사라는 뚜렷한 줄거리를 읽어낸다. 그 정치과정 속에서는 구악을 멸하지 못하여 뒤통수를 맞는 이야기, 힘의 흐름에 따라서 철새짓을 반복하는 군상들, 무력과 모략의 미묘한 결합, 다툼의 속에서 가장 먼저 증발해버리는 신뢰와 사상, 민생 따위의 가치들 등, 무척 친숙한 테마들이 잔뜩 버무려져 있다. 역사가 의미 있는 것은 그것이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라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조선왕조의 역사는 바로 권력의 거울이다. 한국사를 다뤄온 다른 어떤 만화보다도 권력의 생리를 입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것은 바로 현재의 모습과 닮아있다. 멀게만 느껴졌던 ‘조선’이라는 사회가,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곳이 된다. 먼나라, 우리나라인 셈이다.

특정 인물이나 정파에 대한 일방적인 편들기도, 양비론적 패배주의에도 빠지지 않는 절묘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은 작가의 오랜 신문시사만화 경력 덕분인 듯 하다. 혹은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원작 자체가 가지고 있는 풍부함 역시 작용했을 것이다. 권력의 작용 뿐만 아니라, 시대적인 사회상과 민중의 동향 등 총체적인 해석을 통해서 조선 역사를 단순한 탐욕스러운 개개인들이 벌이는 궁중드라마로 격하시키지 않은 점이 바로 이러한 두 가지 배경이 합쳐졌을 때 나올 수 있는 미덕이다. 그림체 및 시각연출 방식 역시 지나치게 설명조도, 지나치게 설명이 없어서 불친절할 정도도 아닌 균형을 맞추고 있다. 선은 명확하며 단순하고, 극적인 과장이나 섬세한 세부묘사에 빠지는 일 없이 가장 필요한 만큼의 정확한 장면묘사를 일삼고 있다. 물론 등장인물이 워낙 많다보니 캐릭터들이 간혹 서로 헷갈린다거나 하는 문제도 있지만, 이만하면 ‘양반’이다.

이 시리즈는 워낙 장편으로 기획되어 있고, 이제 한 고비를 넘겼을 뿐이다. 비록 간혹 스케쥴이 삐걱거리고 있지만, 용케 마지막 권까지 무사히 나와 줬으면 하고 바란다. 벌써 이 정도 수준의 1부라면, 마무리되는 것만으로도 이미 박수를 받아 마땅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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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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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의 본연으로 – <버추얼 그림동화> [기획회의 050516]

동화의 본연으로 – <버추얼 그림동화>

한국에서 동화(童話)라고 불리우는 일련의 이야기들은, 사실 원래는 그다지 아이들이라는 특정한 대상을 위해서 만든 이야기라고 보기 힘들다. 민담과 신화들이란 것은 애초부터 인간사의 여러 모습들에 대한 비유로 가득차 있고, 당연히 성적이든 폭력적이든 미성년자 관람불가일 법한 내용이 많을 수 밖에. 사실 한발 더 나아가서, ‘어린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의 발명품이라는 것도 지금쯤은 이미 정설로 굳어져있다. 일정한 나이를 정해놓고는 그 이하의 사람들을 일종의 사회적 온실 속에서 보호받아야 할 종자로 취급하는 행태가 고래부터 항상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간혹 사람들은 ‘동화’라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세상살이의 회한을 깊이 담고 있는 잔혹한 이야기들인지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고는 한다. 그 때 흔히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현대적인 ‘어린이’ 개념을 애써 도입해서 모든 사회적 요소들, 잔혹한 표현, 성적 뉘앙스 등을 억지로 거세시켜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 결과 동화는 무척 재미없어질 뿐만 아니라 핵심 메시지까지도 퇴화해버리지만, 그 빈 자리에는 꿈과 낭만, 보수적인 가족 이데올로기, 귀여운 동물 캐릭터들을 적당히 끼워넣는다. 다른 방법은, ‘알고 보면 잔혹한 동화’ 투로 선정적인 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다소 변태성 악취미에 가까운데, 원래의 동화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쇼킹한지를 가지고 오히려 상업화를 시켜서 성인독자를 노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동화의 본연의 목적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우리가 사는 지금의 현실에 대한 교훈을 얻는 것이다. 먼 동화속 유럽 나라의 신데렐라가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 속에서 벼락출세를 꿈꾸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동화는 멍청하지 않다. 권선징악에는 댓가가 따르고, 어떤 억울함도 100% 해소되는 일 따위는 없다. 이해관계의 충돌과 약육강식이 선악의 모습으로 치환될 뿐이다. 교훈은 제3자들의 낭만적인 이야기 속에서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대한 이입을 통해서 삶을 대처해나가는 힌트를 얻음으로서 얻어낸다. 이런 요소들이 빠진다면, 동화는 그 잘못 붙여진 이름 그대로, 온실속 아이들을 위한 싸구려 엔터테인먼트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강경옥의 <버추얼 그림동화>(콘텐츠와이드/2권 발매중)는, 이러한 동화 본연의 목적의식이 잘 살아있는 작품이다. 이미 여러 단편들을 통해서 상상 속 세계와 가상의 설정을 통해서 현실의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져온 작가이기에, 이런 류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사실 당연한 행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80년대 이래로 작가가 계속 관심을 보여온 ‘무덤덤한 주인공이 감정을 획득해나가는, 또는 무의식적으로 외면/봉인하고 있던 감정을 재발견해내는 과정’의 이야기라는 소재가 결합하면서 이 작품이 완성된 것이다.

내용은 에피소드 방식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주인공들이 어떤 수상한 가게에 들러서 가상현실 기계로 특정한 동화 내용을 직접 등장인물이 되어 체험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현실세상에서 일어났던 문제점들을 직시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매번 주인공은 달라지고 그들의 사연과 경험하게 되는 동화 역시 바뀌지만, 변함없는 것은 가게주인 뿐이다. 이들이 겪게 되는 동화는 우리에게 친숙한 작품들이면서도 왠지 현실적인 설정들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정도의 이야기다. 아예 과격하게 인물들을 통째로 재해석을 해버리는 것 없이, 그냥 은근하게 친밀하다. ‘라푼첼’이야기라든지, ‘푸른수염’이라든지 말이다.

매번, 동화 속 인물들의 관계와 행동거지는 주인공이 현실에서 고민하고 있는 그 사람들의 관계와 유사하다. 그것을 반영해주면서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진짜 감정을 끄집어내서 직면하게 만든다. 주인공은 자신이 실제 그 등장인물이 아니고 단지 가상의 체험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처지를 그대로 경험하면서도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그리고 물론 동화속 해피엔딩이 항상 현실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확실한 선을 그어주고 있지만, 작품 속 주인공들에게 나름의 교훈을 주기에는 충분하다. 주인공들은 동화를 통해서 현실도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히 자신의 처지를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현실 속에서 그 교훈을 실천하기 위해서 충만한 마음으로 가게를 나선다. <버추얼 그림동화>의 동화체험은, 사실상 전형적인 심리치료 과정에 가까운 것이다. 특히 트라우마와 불안, 우울 증세 등에 대한 치료적 접근에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다. 잔혹동화의 탈을 쓴 심리치료 만화인 셈이다.

2000년대 들어서 주로 과거 작품의 복간에 머물 뿐 확실한 신작 장편이 나오고 있지 않아서 독자들을 아쉽게 했던 한국 순정만화계의 중견인 강경옥의 복귀작으로 이 작품은 썩 만족스러운 편이다. 엄청난 혁신을 가지고 왔다기 보다는, 강경옥 만화가 너무 낡지 않은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물론 단점 역시 원래 성향 그대로다. SF의 외피를 쓰고 있으면서도 실제 우주선이나 물리학적인 개념에서는 팬들을 안타깝게 만들고 말았던 <별빛속에>의 악명(?) 그대로, <버추얼 그림동화> 역시 디테일에 대해서는 무척 무신경한 편이다. 동시대적인 감수성보다는, 근본적인 감정과 관계맺음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쪽을 선택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림체나 시각연출 역시 현대적 감각의 스타일리쉬함보다는, 감정선의 변화에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기에 한눈에 보기에 ‘80년대틱하다’는 느낌을 받기 십상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강경옥 만화의 올드팬들에게는 나름의 친숙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듯하지만, 새로운 젊은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에는 상당한 악재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이 작품이 연재되던 엠파스 연재만화란이 사업을 접어서 현재 연재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비록 어디서 끝맺어도 크게 이상할 것 없는 에피소드 방식이기는 하지만, 역시 오랜만에 다시 상승세를 타고 있는 작가의 작품이 두 권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단행본이 많이 팔리면 창작 지속에 도움이 되려나? 모르겠다. 이런 상황과 관련된 동화는 없으려나, 괜히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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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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