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광을 보며 성장하기 – 『하나오』
김낙호(만화연구가)
야구라는 스포츠는 자고로 수많은 대중문화, 특히 만화에서 많이도 소재로 활용되었다. 분명히 야구는 한국에서 인기 있는 스포츠고, 열정과 극적인 드라마가 가득하다. 비록 축구도 공은 둥글다며 격동의 승부를 강조하지만, 시간 제한으로 움직이는 스포츠가 아니기에 소위 ‘9회말 투아웃 끝내기 만루 홈런 1점차 승리’가 가능한 야구만큼은 아니다. 게다가 팀 스포츠이면서도 선수 개개인의 기량이 돋보이는 1대1 승부가 게임의 기본 룰이기 때문에, 통계적 수치화라든지 기타 등등 팬들이 광적으로 좋아해줄만한 요소가 많다. 하지만 반대로,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는 야구만큼 뻘쭘한 스포츠도 영 없다. 규칙에 익숙하지 않으면 도대체 어떤 식으로 경기가 진행되는지 별로 직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세세한 규칙을 몰라도 적들을 피해서 공을 그물에 넣기만 하면 되는 여타 구기 종목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즉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강렬한 열정의 대상이 되지만, 관심이 없는 자들에게는 열정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기 십상인 종목이다. 그렇기에 야구 경기 자체는 열정적인 드라마적 대결의 장이지만, 야구를 ‘바라보는’ 이야기로 간다면 열정과 이해의 충돌을 만들어주는 좋은 소재가 된다. 야구라는 스포츠 자체보다, 야구라는 스포츠를 좋은 소재로 활용하여 결국 꿈을 꾸는 것의 즐거움, 즐길 줄 아는 것의 즐거움을 서로 이해해나가는 이야기를 만들기가 좋다는 것이다.
최근 국내에서 완간된 『하나오』(전3권 / 마츠모토 타이요 / 애니북스)는 야구광 아버지와 야구에 관심 없는 아들 사이에 이해의 고리가 생겨나는 과정을 그린 유쾌한 성장물이다. 일본 최고 프로팀의 4번타자가 되겠다는 꿈 속에 살고 있는 아버지와, 모범생으로 살며 야구에는 관심 가지지 않고 살고 싶은 초등학생 아들이 같이 살게 된다. 그리고 여러 좌충우돌 속에, 역시 꿈을 꿀 줄 아는 것의 미덕에 아들도 점점 마음을 열게 된다. 그리고 황당하고 아름다운 해피엔딩으로 향해 간다. 동네야구에 열 내며 프로 최강을 꿈꾸는 아버지가 오히려 소년스러우며, 현실에 완전히 적응하여 합리적 인생설계만을 목표로 하는 초등학생이 어른스럽다. 그러나 그 애어른은 결국 나름의 오해와 성장통을 거치면서 꿈이 있는 소년으로 자라난다. 배트와 공, 글러브의 힘이다.
『하나오』의 작가 마츠모토 타이요는 한국의 여러 젊은 작가주의 만화 지망생들에게 필수 참조 작가로 등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만화라는 매체가 지니고 있는 특유의 ‘젊음’이라든지 ‘자유분방함’의 이미지를 내용도 연출도 만화 특유의 방식으로 스타일리쉬하게 소화해낼 줄 아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얄궂게도 그간 한국에는 『핑퐁』이라는 탁구만화 한 편만 소개되어 있었는데, 이번에 좀 더 발랄하고 대중적인 또다른 대표작으로 바다를 건너온 것이다. 『핑퐁』이 작가의 성향 가운데 보다 리얼한 묘사법을 추구하는 방향에 있다면, 『하나오』는 유희적 성향이 강하다. 하지만 두 작품, 아니 나아가 작가의 모든 작품을 꿰뚫는 핵심 모티브들이 효과적으로 농축되어 있다.
마츠모토 타이요의 작품세계의 핵심 키워드는 청춘, 유희, 그리고 광각렌즈다. ‘청춘’은 작가의 핵심 주제로, 주로 성장통이라는 모티브로 발현된다. 그런데 그 청춘은 바로 지리한 세상과 강렬하고 자유로운 자극 사이에서 발생하는 마찰의 시기다. 그 청춘의 끝(?)에, 작가는 마지막에 슬며시 자유로움의 손을 들어주곤 한다. 때로는 확실히 희극적인 해피엔딩으로, 때로는 세상에 대한 적응을 하면서도 속에는 자유의 희망을 품고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으로 말이다. 두 번째 키워드인 ‘유희’는 자유의 연장선상이다. 그것은 장난의 재미, 노는 것의 희열, 그것을 묘사하는 낙서의 즐거움이다. 때로는 등장인물들의 도피적 행위에서, 때로는 아예 동화적 상상으로 비틀어지고 기묘하게 여로 요소들이 제멋대로 혼합된 살짝 왜곡된 가상 세계로 나타난다. 낙서를 하고 공상을 하는 소년의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세 번째 키워드는 ‘광각렌즈’다. 광각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특유의 과장된 앵글과 원근법은 앞서 이야기한 주제와 감수성들을 표현해내는 시각연출 방식이다. 이 기법은 주인공이 살고 있는 세계를 극단적으로 주관적인 공간으로 만들며, 무언가를 단번에 뛰어넘고 싶어 하는 역동성의 이미지를 만든다. 중력이나 관성 같은 물리적 속박으로부터 자기 힘으로 벗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핵심 키워드는 『하나오』에 대단히 뚜렷하게 발현되어, 작품을 읽는 내내 독자를 즐겁게 만든다. 물론 아들은 변하지만 아버지는 사실상 변하는 게 없다는 점이라든지, 부자의 뜨거운 유대관계 속에 어머니는 별 역할이 없다는 것이라든지 이야기상의 허점을 찾아나서는 것이 어렵지는 않겠지만, 작품의 재미를 즐기는 즐거움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다.
이번에 한국에서 출판된 『하나오』의 소장 가치 역시 높다. 100% 완벽하지는 않지만 95점 이상은 줄 수 있을 정도로 세심한 번역, 좋은 인쇄품질과 멋진 제본이 그 핵심이다. 게다가 원래 작품 자체도 분량이 3권으로 마무리되어, 중간에 늘어지는 일 없이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만족감을 준다. 반드시 짧은 만화가 우수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훌륭하게 시작했던 만화 작품이 적당히 높은 인기 속에서 연재를 하며 줄거리 무한 엿가락 늘이기라는 함정에 빠져버리는 경우를 얼마나 자주 보았던가. 특히 캐릭터성과 에피소드 방식 전개로 되어있는 경우에는 더욱 더 말이다. 작가의 밥벌이는 보장하나 작품으로서는 무너지는 연재물들의 바다 속에서, 자기 작품을 완전히 관리할 줄 아는 귀중한 참조 사례이기도 하다. 작가에게도 출판업계에도 독자들에게도, 문자 그대로 ‘모범적인’ 만화로 널리 추천할 만 하다.
하기야 이런 세세한 부분에서 장점을 찾고 주변에 추천을 하고 있는 필자의 모습은, 만화라는 문화의 재미에 관심이 없는 분들에게는 마치 야구 관심없는 사람들에게 야구의 재미를 설파하는 야구광의 모습과 진배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다가 이 즐거움의 세계, 꿈을 꾸는 즐거움에 한사람이라도 더 입문시킬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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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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