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년들은 지금 – 『소년탐구생활』[기획회의 070201]

그 소년들은 지금 – 『소년탐구생활』

김낙호(만화연구가)

자신이 몸담았던 과거 시절을 회상하는 것은 과거 아름다웠던 자기 생활을 기억하며 재충전을 하는 쪽이든, 우울했던 시절을 기억하며 그래도 지금은 더 나아졌다고 자기위안을 하는 쪽이든 마찬가지로 바로 ‘현재의 나’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보통은 그 때의 나, 그 때 내가 살았던 시절은 지금보다 덜 애매했다. 실제로 더 어린 나이, 특히 소년소녀 시절 정도에는 삶의 폭이 더 좁고 단순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지나온 경험이기에 전지적 시점에서 반추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당시에는 보이지 않았던 의미들을 지금은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이 지금의 나로 이어진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다. 그렇다면 소년 시절의 경험담을 담아내는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 작품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그 시대의 감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유사한 경험을 같이 투사해가며 과거의 자기 모습을 탐구하고, 현재의 나를 돌아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도를 걸어가는 회상체의 작품이라면 무릇 ‘생활’에 대한 ‘탐구’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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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개그의 처절함 -『입시명문사립정글고등학교』[기획회의 070115]

학교개그의 처절함 -『입시명문사립정글고등학교』

김낙호(만화연구가)

고등학교라는 공간은 만화, 특히 주류 장르만화와 무척 궁합이 좋다. 청소년 독자들에게는 현재 진형형으로 그 이상 연령대에게는 과거 경험으로 친숙한 공간이라는 장점 위에, 다양한 인간군상이 폐쇄된 공간에서 지내야 하는 소우주적 특성이라든지 성장의 모티브라든지 경직된 학교 문화에서 오는 다양한 패러디 가능성이라든지 여러 가지 요소들을 맞물리기 좋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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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 이별, 남겨진 이들 – 『아버지 돌아오다』[기획회의 070101]

장례, 이별, 남겨진 이들 – 『아버지 돌아오다』

김낙호(만화연구가)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의식인 장례란 세계 어느 문화에서나 많은 의미가 부여되곤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은 제의적인 의식이 거의 없이 오로지 잘 태어나느냐 마느냐의 의학적 관심사로만 가득한 반면,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은 오히려 정작 본인은 이미 죽어서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을 터인데도 온갖 상징적 행위로 가득한 행사들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 행사의 주인은 바로 고인이 떠난 후 남겨진 이들이다. 그 중 가장 가까웠던 이들이 상주가 되고, 각종 지인들이 와서 명복을 빌어주고 간다. 그 와중에서 고인이 인연을 맺었던 여러 사람들이 서로를 확인하며 좁은 세상을 실감하곤 한다. 그렇듯 자고로 장례는 남아있는 사람들의 행사인 셈이다. 고인에 대해서 명복을 빌고 저 세상에서 못 다한 무언가를 이루라고 이야기를 하곤 하지만, 실제로 장례식에서 마음을 추스리는 것은 남아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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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밥이 쌓여가는 일상 -『짬』[기획회의 061215]

짬밥이 쌓여가는 일상 -『짬』

김낙호(만화연구가)

한국에서, 세대를 초월해서 애용되어온 궁극의 격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군대 가면 사람 된다”라는 말이다. 사람도 아니었다가 사람이 되어 나온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분명히 아닐 것이고, 군인으로서 배웠다고 표방하는 각종 살인기술이 인간 본연의 조건이거니 하는 말도 물론 아닐 터이다. 물론 말이야 조국의 소중함을 알게 되며 책임감을 지니고 사회성을 기른다느니 하고 적당히 멋진 말들을 붙여놓고는 하지만, 굳이 맥락으로 보자면 군대 생활을 경험하고 나면 한국의 주류 아저씨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 나갈 만큼 닳고 닳은 생활 요령이 쌓인다는 정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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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성숙해지기 – 『무슈 장』[기획회의 061201]

30대, 성숙해지기 – 『무슈 장』
김낙호(만화연구가)

원래 남자라는 존재는, 성숙이 좀 늦어서 손해를 보곤 한다. 여자들보다 사춘기가 몇 년씩 늦게 오는 탓에 또래 여자들에게 업신여김 당하기 일쑤인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남성에게 부여된 사회적 역할로 인하여 허세를 부리며 애써 어른인 척까지 하기란 정말 힘들다. 그러다가 서른 즈음이 되면, 도대체 인생의 목표가 뭐였는지,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 제대로 정리해본 적도 없이 세상 틈바구니에서 수년 정도 끌려 다니다가 이제 그것마저 익숙해져서 다시 스스로의 일상을 돌아보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일상이 사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여전히 약간의 소중한 물건들, 속 썩이는 친구, 일 관련으로 맺어졌으나 좀 더 개인적이 되어버린 다소 귀찮은 인간관계, 헤어진 여자 친구와의 우연하고도 어색한 대면, 시끄러운 이웃 같은 귀찮은 일들… 게다가 아직 미혼이라면, 결혼하라는 부모님의 압박도 슬슬 들어온다. 누군가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자신에게만큼은 인생 그 자체인 요소들로 가득하다.

『무슈 장』시리즈 (뒤피 & 베베리안 / 세미콜론 / 3권 발매중)는 파리에 사는 서른 살 생일을 맞이한 독신 남자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그 남자, 소설도 쓰고, 번역일도 좀 하는 그리 잘나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명도 아닌 작가다. 즉 화려한 프로도, 궁상을 떠는 가난한 예술가도 아닌 셈이다. 그다지 쿨한 독신주의자는 아니고 사랑을 갈구하며 스스로를 자학하는 낭만가도 아닌 적당한 수준의 사고방식으로 산다. 다소 구식취향이라서 빌리 할리데이의 음반을 모으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문적인 음악 수집가도 아니다. 구차하거나 비루하지 않으면서도 어딘가 어중간한 인생인 것이다. 그런데 직업 자체가 조직생활이 아니기 때문에 만약 그 어중간함을 극복해볼까 하는 마음 역시 주변의 외압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과 의지에서 나와 주어야 한다. 하기야 ‘장’이라는 이름 자체가 한국으로 따지자면 철수 정도에 해당하는 평범무쌍한 이름일 만큼, 평범한 어중간함이야말로 이 작품의 근간이다. 벌어지는 사건들 역시 그냥 평범한 것들로, 성질 고약한 아파트 관리인 아주머니와 싸운다든지, 만성적인 불면증에 걸린다든지, 빈대 기질 다분한 친구가 애를 맡겨놓는다든지, 헤어진 여자친구와 다시 만난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물론 작가들의 실력은 무척 뛰어난 편이라서 그 평범한 사건 들 속에 담기는 다양한 인생의 아이러니들이 세심하게 배치되고, 덕분에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운 에피소드들이 되어주곤 한다. 장을 보러 갔다가 지갑을 잊어버리고 상품 계산이 잘못되어 음식이 너무 많아져서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연다는 소소하면서도 낙천적인 진행은 정말 작가들 스스로가 자신의 일상을 사랑해본 경험이 없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경지의 짜임새다.

그런데 단순히 평범하다고 해서 독자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떤 작품 속 공감의 코드라는 것은 스스로가 놓치고 있던 무언가를 돌아보게 만드는 기능이 있어야만 호소력이 생기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출판사가 아마도 마케팅 포인트로 잡고 있는 듯 한 (즉 보도자료에서 대단히 강조를 하고 있는)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가 전문직 여성들의 독립적 생활에 대한 동경 속에서 젊은 성인 여성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에 성공한 것과는 달리, 『무슈 장』이 지니는 공감의 코드는 바로 ‘성숙의 속도’다. 작품의 주인공 ‘장’은 특별히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피터팬 같은 존재가 아니라, 주변의 설레발이 없을 때 평범한 남자가 성숙해질 수 있는 보통의 속도로 성숙해져가는 존재일 뿐이다. 너무 서두르지도, 그렇다고 마냥 느긋하지도 않게 말이다. 느리지만 자신의 페이스로 성숙해지고 있는 ‘장’씨의 생활을 보며, 독자들은 사회적 압박과 자신의 성숙 사이의 괴리 사이에서 자신의 내면이 지니는 진짜 성장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셈이다.

열린 선 위주의 둥근 그림체, 부담스럽지 않은 색상, 남용되지 않는 대사는 작품 내용의 매력과 만화적 표현의 우수함 사이에 좋은 조화를 이루게 한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예술적 자의식 가득한 표현으로 가득해서 한국 독자들에게 부담을 주었던 여느 유럽 예술 지향 만화들이나 장르에 대한 거부감을 주기 십상인 딱딱한 유럽식 극화체와 달리, 보편적 호소력을 지니는 편한 그림체를 구사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미 장 자크 쌍페의 작품들에서 검증되었다시피, 도시 공간을 차가운 메트로폴리스가 아니라 도회적이면서도 어딘가 여유로운 매력이 있는 사람 사는 공간으로 묘사하는 접근 역시 이러한 필치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나곤 한다. 형식이 주가 되는 작품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무리겠지만, 형식과 내용의 이러한 조화가 있기에 지금의 매력을 지니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매력을 잘 살려주기 위해서 국내판의 출판 품질 역시 선도 색상도 뭉개지지 않은 성의가 돋보이는 편이다. 나아가 번역도 다소의 번역체가 눈에 들어오기는 해도, 크게 독서에 방해되지 않게 필요한 정보를 주는 주석들이 돋보이는 성의 있는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한국에서는 한 번에 책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현재까지 한국에 출판된 분량이 프랑스에서 나온 것은 약 10여년에 걸쳐서 천천히 진행되었다. 한마디로, 독자들 역시 장과 같은 속도로 성숙해간 셈이다. 한꺼번에 봐도 성숙의 속도가 아주 느긋한 정도인데, 오랜 시간에 걸쳐서 진행되었다면 오죽할까. 사랑을 고민하고, 옛 애인과 재결합하기도 하고, 애도 낳고. 그 모든 과정이 천천히, 실시간으로 독자의 성숙 속도와 발맞추어 진행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난데없이 커다란 깨달음이 생기고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젊은 방황과 지금의 무력함이 대비되는 것도 아니다. 즉 이 작품은 현재 자신으로 이어져오는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식의 성장물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현재진행형으로 조금씩 성숙해지는 식이다. 커다란 스케일의 세상사들을 밀린 숙제 풀듯이 압축해서 한꺼번에 읽을 수 있는 것이 즐거운 작품들도 물론 많지만, 가끔은 이렇게 딱 같은 속도의 걸음걸이를 걸어주는 작품을 읽는 것이 무척 즐겁다. 저 위 어딘가에 놓여있을 위대한 걸작이 반열이 아닌, 날마다 한 번씩 쳐다보면서 미소를 한번 지어볼 수 있는 수작, 바로 욕실에 걸어놓은 거울 같은 존재로 말이다. 일상 속, 천천히 진행되는 성숙의 과정은 소중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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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무슈 장 1
필립 뒤피 외 지음, 황혜영 옮김/세미콜론

영웅을 바라보며 성장하기 -『핑퐁』[기획회의 061102]

영웅을 바라보며 성장하기 -『핑퐁』

김낙호(만화연구가)

소년은 히어로를 동경한다. 미디어문화의 세례를 받고 자라난 현대 세계의 소년들은 확실히 그렇고, 아마 모르긴 몰라도 오래전의 소년들도 나름대로의 히어로를 동경하며 자라났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히어로의 양상은 고대의 영웅과 아버지에서 현대의 슈퍼영웅과 멋진 또래 친구로 바뀌었을지 모르지만, 기본 속성은 여전히 하나다. 바로 감정 이입 가능하면서도 압도적으로 강하고, 자기 세계의 기준에서 최상의 ‘멋’을 구현해주고 있는 커다란 존재. 히어로는 자신이 동경하고 추종하는 대상이자, 자신이 언젠가 되어보고 싶고 뛰어넘고 싶은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강함을 추구하는 성장을 사회적으로 저지당하곤 하는 ‘소녀들’은 히어로에 대한 동경이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다).

그런데 그렇듯 히어로를 바라보면서 열심히 성장을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겪는 통과의례가 있다. 스스로도 성장하고 더 강해지다 보니 자신이 쫒아 다니던 히어로가 사실 생각만큼 압도적이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성장통이 시작된다. 나의 지금까지의 동경, 즉 목표로 삼아온 길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과연 내 히어로를 뛰어넘어도 되는 것일까. 따라잡힌 히어로 입장도 복잡하기는 매한가지다. 나는 이제 히어로가 아닌 그냥 아무나인 것일까. 나는 그에게 따라잡혀도 괜찮은 것일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패턴이며, 친한 친구들끼리도 나타날 법한 패턴이다. 구식으로 표현하자면, 한마디로 청춘의 고민이다. 연애 말고, 성장의 청춘.

『핑퐁』(마츠모토 타이요 / 전5권 중 제2권 발행중 / 애니북스)은 탁구를 매개로 한 멋진 성장만화다. 사실 스포츠물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거의 모두 성장물일 수 밖에 없지만, 스포츠 경기 자체와 운동능력에 집중하는 작품들이 있고 스포츠를 주요 소재로 하되 그 속에서 각각 주인공들이 겪는 인간사의 갈등에 집중하는 작품들이 있다. 전자의 경우 경기의 승부에서 나오는 재미가 강점이고 인간사의 상대적 등한시가 약점이라면, 후자는 풍부한 인간이야기가 강점이고 박진감의 저하가 약점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명작 스포츠물로 기억이 되는 것은 항상 인간사를 중심에 놓으면서 그 위에 박진감 넘치는 승부를 얹어놓은 형식의 작품이지, 경기 자체에만 집중하느라고 물리법칙을 한참 벗어나는 온갖 초월적인 기술들이 무한 상승 난무하는 설익은 사이비 무협물이 아니다. 이렇게 놓고 보았을 때, 『핑퐁』은 명작 스포츠물이자 소년 성장물의 교과서적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동네 친구 페코와 스마일이 있다. 페코는 재능과 함께 쾌활한 성격, 그리고 탁구에 노력과 목숨을 걸지 않고 그저 즐기는 쪽을 선택하는 쿨한 자세를 지녔다. 그렇기에 스마일에게 있어서 페코는 히어로이며, 페코는 자만하지 않으면서 히어로의 지위를 즐기는 관계다. 그러나 성장의 시련은 다가오기 마련. 페코는 더 강한 천재와 노력으로 실력을 얻은 다른 친구에게 지고 만다. 히어로는 몰락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무뚝뚝한 스마일도 재능을 발굴당해서, 실력이 성장한다. 페코에게는 히어로로서의 모습을 회복하면서도 난데없이 모든 것을 탁구에 걸고 구차하게 매달리지 않는다는 과제가 주어지고, 스마일에게는 스스로 실력이 자꾸 늘어나면서도 굳이 승부욕에 휩쌓이지 않으며 그 낙천적인 히어로를 여전히 동경하고 싶다는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 이 문제를 각자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 둘에게 한 단계 성장한 우정은 커녕 자신들의 삶의 자세에 마저 금이 갈 것이다. 여기서는 탁구의 실력이 국가 대표급으로 우주 대표급으로 마구 치솟는 것이 성장이 아니라, 바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의 깊이를 키우는 것이 성장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것은 그 문제에 대해서 작품이 제시하고 있는 해답이다. 비록 맨 마지막에 완전히 밝혀지기는 하지만, 내내 복선으로 깔고 있는 메시지가 있다. 바로 지금 순간을 즐겨가면서 스스로의 성장을 하나씩 받아들이며 살아라, 라는 것. 사실 국내에 아직 소개가 되지 않았지만 만화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상당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동 작가의 여러 청춘 관련 작품들에서 비슷하게 강조되고 있는 메시지이기도 한데, 청춘의 성장통을 외면하지도, 그것에 매몰되지도 않으며 여하튼 계속 성장하는 두 친구의 모습을 담담하게 던져주는 방식이다. 두 주인공은 서로 대비되는 속성을 지니면서 동시에 상호의존적이고, 사이가 좋으면서도 서로 각자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고고몬스터』같이 직접적인 방식으로 주거나 『철콘 근크리트』같이 추상적인 방식으로 주는 경우도 있지만, 『핑퐁』은 이 메시지를 장르 스포츠물의 줄거리 형식 속에서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구사해내는 중용을 발휘하고 있다. 뚜렷한 해결보다는 무언가 모자라지만 계속 다음 단계를 살아나가는 모습이 갑갑하게 느껴질 독자들도 있겠지만, 바로 그것이 이 작가의 작품세계의 매력이다.

스포츠물로서의 재미를 한층 돋보이게 하는 것은 마츠모토 타이요 특유의 시각연출의 공이 크다. 광각과 다양한 시점변화로 점철된 칸연출은 탁구라는 좁은 공간의 스포츠가 지니는 격렬함을 역동적으로 강조해준다. 그리고 공이 공중에 멈출 수 밖에 없는 만화의 속성을 역이용, 빠른 속도와 한없이 시간이 정지한 듯한 틈새 속에서 주인공들의 사색이 끊임없이 교차한다. 또한 작가 특유의 대담하게 거칠면서도 세밀한 데생은 성장하는 소년들의 장난끼와 무정형성, 뻗어나가는 성장과 동시에 현실적인 세상의 다중성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마츠모토 타이요풍 그림에 담겨 있는 ‘쿨함’은 멋진 패션 모델들의 ‘쿨함’이 아니라, 불안과 낙관, 여하튼 질러보자는 도발성에서 나오는 그것이다. 타이요의 그림체가 주는 정서는 『GO』로 유명한 소설가 가네시로 카츠키의 문장이 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다행히도 출판사는 작가의 매력을 제대로 살려주기 위한 좋은 품질의 도서를 만들어냈다. ‘애장판’이라는 이름표에 안주한 것이 아니라, 성의 있는 번역과 인쇄, 멋진 표지디자인, 컬러 페이지 복원 등 이전 출판사의 판본이 지난 세기에 절판되었던 이래로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독자들의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켜주고도 남는다. DVD로 출시되는 영화판과 공동 판촉이벤트를 하는 등의 마케팅 노력이 결실을 맺어서, 좋은 작품을 좋은 품질로 만들어내면 좋은 결과가 뒤따른다는 또다른 사례를 남겨주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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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본문에서는 좀 교과서적으로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황당한 초월적 기술의 경연장인 아스트랄 스포츠물도 만약 정말 안면몰수하고 끝까지 가주기만 한다면 충분히 나름대로 명작(괴작?)의 반열까지 오를 수 있다. 게다가 얼마나 재밌는데… 아, 그리고 하나오에 이어서, 열심히 마츠모토 타이요 작품들을 좋은 품질로 내주고 있는 애니북스 출판사 만세.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핑퐁 1
마츠모토 타이요 지음, 김완 옮김/애니북스

매력의 원천 – 『석정현 소품집 Expression』[기획회의 061101]

매력의 원천 – 『석정현 소품집 Expression』

김낙호(만화연구가)

지난 몇 년 사이, 젊은 전도유망한 재능의 만화작가들이 단편집으로 단행본 데뷔를 하는 일이 연달아 있었다. 장편 연재지면에 곧바로 뛰어들어서 굵직한 작품을 만들어냄으로서 주목을 모으며 데뷔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아무런 기반도 없이 믿을 것이라고는 실력과 패기밖에 없는 젊은 만화작가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적은 지면 안에서 최대한 자신만의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무언가를 이야기하고자 활동을 해온 결과다. 그런 짧은 이야기들을 통해서 작가는 자신의 존재를 업계는 물론이고, 특히 웹을 통하여 독자들에게까지도 직접 증명해보이곤 하여 장편 데뷔작 없이 먼저 ‘스타’로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물론 안정적 고료나 단행본 인세를 받는 완성된 스타라기보다는 우선 지명도를 올리고 가능성을 인정받는 불완전한 예비 스타인 셈이지만, 적어도 자신의 실력으로 첫발을 내딛는 중요한 과정임에는 틀림없다. 그렇기에 이러한 작가들의 첫 단편집이란, 단지 그 작가의 짧은 이야기들의 모음이라기보다 사람들이 이 작가에게 주목한 이유의 재발견이다. 중후장대한 장편의 틈새에서 틈틈이 숨돌리며 만드는 의미의 단편집이 아니라, 작가의 가장 거칠고 원형적인 매력이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 그대로 주어지는 셈이다.

『Expression』(석정현/ 거북이 북스)은 이런 점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실사풍의 화려한 이미지로 만화 지망생층은 물론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는 석정현이라는 작가가 왜 지지를 받았는지 복기해주는 모음집인 셈이다. 이 책은 단편집이라는 분류상의 명칭보다, 작품 개개의 역할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의 ‘소품집’이라는 이름을 고집한다. 실제로 이 책에는 일관성 있게 모인 단편들이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길이와 형식의 작품들이 섞여있다. 다양한 방식의 작품 활동으로 다양하게 두각을 나타낸 작가의 행보다운 결과다. 작품들은 가장 최근작부터 역순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중간 중간의 풍부한 작가 해설과 함께 작가의 매력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으로 인도한다. 작가의 장편 데뷔작 『귀신』이 화려한 필치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문제의식의 수습이나 이야기 서술의 측면에서 한계를 드러냈던 것에 비해, 이 소품집은 훨씬 소탈하고 솔직한 모습, 즉 작가 본연의 매력이 지녔던 호소력을 발휘한다.

수록된 작품들은 시사만평, 일러스트형 카툰, ‘하이라이트 엿보기’ 방식의 작품, 기승전결이 담긴 정식 단편 등 여러가지다. 어느 시기에는 하나만 하고 다른 시기에는 다른 것만 한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작업을 계속 오갔다는 점도 특기할 만 하다. 모든 작업 방식을 총괄하는 것은 특유의 섬세한 실사풍 이미지로, 칸간 연결의 역동성보다는 칸 안의 순간의 힘에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다. 필체에서도 연출방식에서도 고압축 고밀도를 전개하는데, 장편과 달리 짧은 소품에 있어서는 이런 것이 내용과도 썩 좋은 조화를 이루곤 한다. 다만 칸 자체에 주목하게 만드는 연출에서 작품의 역동성을 보충하기 위하여 보통 취하는 과장된 기하학적 구도와 포즈가 적은 편이다. 그 결과 실사풍에 가깝게 그릴수록 작품이 정적으로 느껴지는 효과가 발생, 액션 위주의 작품일수록 표현력이 부족해지는 약점이 있기는 하다.

카툰의 전통 위에 서있는 시사만평이나 일러스트형 카툰의 경우 작가의 이런 재능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순간의 이미지를 가공하되, 실사풍의 필치는 그것을 만화체로 약호화한 감성과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주는 사람 세상의 실제 모습 사이에 있는 영역에서 보여준다. 여타 카툰들이 극도의 희화화와 추상성을 통해서 날 것 그대로의 감수성에 노크를 한다면, 석정현식 카툰은 카툰 특유의 감성을 지니면서도 무언가를 바깥에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에 사람 세상에 대한 거울 역할을 좀 더 강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만화와 실사의 경계, 만화 작품 속 세계와 현실 세계의 경계, 단칸 카툰과 연속 칸 만화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려버리는 ‘Expression’이라는 수록작품의 시도 역시 재미있다.

보다 본격적인 극만화풍 단편의 경우는 효과가 덜 명확하다. 기승전결을 지닌 완결성 있는 단편이나 에피소드식 연재물의 경우 석정현이라는 작가가 그림장이 이전에 본디 이야기꾼의 기질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평범한 인간사에 대한 애정은 『순정만화』의 강풀이나 『비빔툰』의 홍승우에 다다를 정도의 따뜻함을 지니고 있어서 이야기의 좋은 뼈대가 되어준다. 아직은 무거운 사회적 또는 철학적 주제를 다룰 때보다 사람들의 온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더 재능이 빛을 발한다.

다만 아직 긴 이야기를 가지고 계속 상대방을 쥐었다 놓는 식의 이야기꾼은 아직 아닌, 순간 반짝이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끌어와서 단번에 매료시키는 식의 재담에 가깝다. 즉 소재의 힘, 이미지의 압도에 많은 에너지가 할애되어 있고, 그에 비해서 밀고 당기는 연출에는 아직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의 경우 다행히도 짧막한 소품들이기에 앞의 강점은 부각되고, 단점이 드러나기 전에 작품이 끝나서 곧바로 여운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작가의 프로 데뷔작이자 처음 주목을 모으게 한 『노르웨이의 숲』이라든지, 작가 자신의 해병대 전력과 만화가 생활을 바탕으로 그려낸 연재물 『코미커즈』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이런 경향이 한 단계 더 나아가 『귀신 외전』같은 작품에서는 아예 자체적 완결성보다는 전체 장편을 상정하고 그 중 한 대목을 뽑아낸 듯한 방식까지 구사하기에 이른다. 이 경우 작품 자체로서 읽기에는 지나치게 거두절미지만, 보다 큰 작품을 연상시키는 기대효과에서는 효과적인 것이다.

다양한 형식의 작품을 하나의 책으로 일관성 있게 엮어낸 것은 책 만듦새의 뛰어남 덕분이다. 작가의 작품 설명과 세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작품과 동떨어지지 않도록 적절하게 삽입한 것 등 한마디로 ‘잘 프로듀싱된’ 책이다. 다만 소품집이라는 컨셉 자체의 한계 때문에, 이미 작가에게 어떤 식으로든 주목하고 있거나 만화가 지망생으로서 다양한 창작시도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들 외에 새로운 독자를 개척하기에 적합한 책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장편작품들이 더 출간되면서, 작가의 매력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들이 항상 돌아오게 될 원천으로서 자리매김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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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석정현 소품집 Expression
석정현 지음/거북이북스

현재로 이어오는 향수 – 달빛구두 [기획회의 061015]

현재로 이어오는 향수 – 달빛구두

김낙호 (만화연구가)

인간의 기억력이란 오늘을 살아가기에 가장 편리하게 만들어져있기 마련이다. 좋은 기억은 좋게, 그리고 아프고 힘든 기억들도 나름대로 긍정적인 의미를 덧붙여서 끄집어낸다. 그런 자연스러운 과정이 작동하지 못하면 기억은 트라우마로 남아서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악귀로 남지만, 대체로는 이런 식으로 과거의 경험들이 현재 삶의 토양이 되어주곤 한다. 그 기억은 때로는 개인의 좁은 삶의 범위가 아닌 그 사람이 살았던 ‘세상’의 방식에 대한 기억이고, 그 사람의 세상을 만들어냈던 그 이전의 다른 사람들의 방식에 대한 나름의 기억이다. 과거에 대한 ‘향수’는 그런 세상에 한번쯤 돌아가 보고 싶은 마음이다. 다만 정말로 단순히 옛날로 퇴행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생각과 정신을 가진 상태에서 과거의 모습들을 보고 그 당시에는 충분히 느끼지 못하고 지나갔는데 나중에서야 아쉬움이 남았던 것들을 제대로 경험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렇기에 과거에 대한 향수는 복고이면서도 지극히 ‘현재’ 중심적이다.

『달빛구두』 (정연식 / 전3권 / 휴머니스트)는 이런 의미에서 과거 향수의 모범과도 같은 작품이다. 향수 정서를 내세운 많은 크고 작은 작품들이 그냥 과거의 모습을 제시하고 공감을 강요하며 끝나는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처음부터 여러 시대의 모습 사이에 흐르는 다르면서도 같은 느낌에 집중한다. 작품은 광고회사 기획자 이봄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갑작스런 모친상으로 고향에 내려가서 그간 소원했던 어릴 적 아저씨에게 과거 부모 세대의 사연을 듣는 식으로 전개된다. 크게 3개의 시대가 펼쳐지는데, 현재의 이봄이 살고 있는 세계, 6살 당시의 이봄이 살던 부모들의 80년대 세계, 그리고 그 부모들이 젊어 서로의 사랑과 사연을 만들어나가던 70년대 세계가 그것이다. 어머니가 돈을 벌기 위해 집에서 키우던 개를 잡아 팔아서 어린 가슴에 상처를 받았던 딸내미는 다시 자라나 같은 일로 또 그녀의 딸에 상처를 주고, 그때 어머니가 그 어머니를 이해 못했듯 지금 자라난 현대의 이봄도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가 좋아하지만 딱히 고백하지 못하는,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너무나 애잔해서 열병이 되는 그런 것도 아닌 애매하지만 현실적인 짝사랑과 자신에게 구애를 해온 또 다른 좋은 남자 사이에서의 선택이라는 모습 역시 지극히 현대적인 세상의 이봄의 모습이자, 한 세대 거슬러 올라가 어머니의 모습이기도 했다. 속절없이 속 좋지만 과거 운동권 경력 때문에 항상 일이 안 풀리시던 아버지, 억척스런 어머니, 동네에서 가장 친한 아저씨와의 80년대 골목길 생활의 기억은 70년대 그 부모 세대들이 젊었을 때 겪었던 70년대의 허름하지만 서로를 아껴주던 친구 생활과 비슷한 대구를 이루고 있다. 그렇기에, 어떤 시대이든지 간에 결국 사람 사는 세상의 냄새가 나며 현재 세상을 살고 있는 독자들에게까지 이어지는 힘을 지니는 것이다.

물론, 효과적인 과거 향수를 위해서 필요한 가장 중요한 재료는 바로 디테일이다. 어떤 좋은 의도도, 구체적인 기억들을 속속들이 새로 불러낼 수 있는 구체성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달빛구두』의 이야기적 매력은 새로움이 아니다. 모범생과 깡패의 우정이든, 그 사이에 삼각관계가 발생하는 것이든, 기본 인물구도나 큰 이야기의 뼈대는 지극히 고전적이고 익숙하다. 하지만 향수에 있어서는 새로운 요소보다는 익숙함을 얼마나 근본적으로 깊숙하게 자극해서 결국 그 속에서 독자들이 새로운 의미와 정서를 읽어내도록 만드는지가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대, 그 세상의 가장 핵심적인 무언가를 연상시켜주는 세부적 에피소드와 소재들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것, 바로 디테일이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수년간 스포츠신문에서 생활 개그만화 『또디』(이상하게도 많은 이들이 ‘또띠’라고 잘못 알고 있다)에서 잡다한 세속성을 묘사해 온 작가의 재능은 큰 장점이 된다. 세 가지 세상 모두, 각각의 현실감과 디테일로 대단히 효과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위 ‘전문소재 만화’들 마냥 전문 지식 자체를 오락거리로 삼는 식이 아니라, 서정적 감수성을 펼치기 위한 인간 세상의 모습이 제대로 압축되어 있다는 말이다.

현재의 세상은 바쁘고 도시적인 경쟁 관계, 하지만 그 속에서 나름대로 구식으로 또는 쿨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간으로, 주인공 이봄이 근무하는 광고 기획사의 구체적인 업무과정 속에서 트렌디하게 담겨있다. 80년대의 세상, 즉 6살 소녀가 바라본 부모님의 생활고와 친구같은 옆집 아저씨의 공간은 골목길이다. 가계가 기울면서 골목길의 끝 쪽까지 이사 가는 모습, 에나멜 구두에 꿈을 담고 아이들끼리 나름의 사회관계를 만들어가는 모습은 80년대의 삶을 효과적으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작품 초반의 명장면이자 현실보다는 낭만적 꿈에 가깝게 그려진 어머니의 바이올린 연주 일화 역시도, 아줌마스러운 억척 엄마가 사실 멋지고 세련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세밀한 울림을 준다. 봄이의 아버지 어머니와 동네 아저씨, 즉 작품의 진짜 주인공들이 젊은 시절을 보내온 70년대의 세상은 계급과 권력의 세상이고 억압에 짓눌린 저항의 시대다. 고등학교나 동네의 일상의 세밀함도 대단하지만, 특히 주인공들의 평범함이야말로 최고의 디테일을 자랑한다. 운동권에 뛰어든 주인공은 투철한 의지로 불타는 민주 투사가 아니며, 조폭에 뛰어든 다른 주인공은 출세를 위하여 아득바득 기회만 엿보는 대물이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극적인 이야기일수록 오히려 세밀한 디테일에 신경을 써야 등장인물들이 대단한 상징물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온라인 연재 당시 칸 간 연출에 다양한 실험을 넣지 않아서 다소 심심했던 부분은, 책 형태로 재편집하는 것에는 오히려 편리함으로 다가온 듯하다. 물론 시각적 세부묘사보다는 둥그런 그림체로 감성적인 형상들을 구사하는 것에 더 장점을 지니고 있는 작가의 스타일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칸 들이 큼지막하게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은 들지만, 거꾸로 보면 그런 느슨한 여백의 느낌이 좀 더 편한 독법이 가능했던 7-80년대의 만화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향수의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지난날에 대한 회고가 아니라, 지나간 것을 기억하며 그 속에서 자신의 현재를 반추하고 과거와 화해하는 것에 있다. 각자 삶의 경험 속 어딘가에 있는 그 달빛구두를 발견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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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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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구두 – 전3권 세트
정연식 지음/휴머니스트

그림을 읽는다는 것의 주관성 –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기획회의061001]

그림을 읽는다는 것의 주관성 –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

김낙호 (만화연구가)

예술을 감상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선 그 의미가 ‘아닌’ 것부터 하나씩 살펴보면서 시작해보도록 하자. 우선, 예술을 감상하는 행위와 가장 거리가 먼 것은 바로 감상에 대한 하나의 모범답안, 절대적인 해답을 요구하는 것이다. 대단히 부실하게 꾸며진 공공교육 미술 교과서에 대한 참고서의 요점 정리마냥 달달 외우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없다. 예술의 감상이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메시지와 감성과, 감상자가 이해하고 싶어 하는 메시지와 감성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이다.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던 사회적 맥락과 개인적 경험 속에서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어 한다. 그것을 그대로 탐정마냥 추리해내는 것은 미술사적 연구의 의미는 있지만, 감상이 아니다. 감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감상자 자신 역시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적 맥락과 개인적 경험 속을 작품 속에 투영하는 행위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간단한 사실은 작가의 작품이 권위의 무게를 뒤집어쓰면 쓸수록 점점 잊혀지곤 한다. 특히 모든 사회적 맥락을 잃어버리고 이제는 거의 권위만으로 사회적 입지를 겨우 유지하고 있는 고전 미술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지나치게 권위로 포장한 나머지 오히려 패러디의 대상이 된다면 모를까, 진정한 ‘감상’이 이루어지기 힘든 상황인 것이다.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김치샐러드 / 학고재)은 바로 감상이라는 행위에 관한 만화다. 원래 블로그의 인기 연재물로 큰 인기를 누렸는데, 미술 전문 출판사에서 책으로 엮여져 나온 것이다. 이 작품은 두 개의 손가락을 캐릭터화한 주인공들이 명화 한편을 놓고, 그 속에 담긴 여러 의미구조들에 대해서 분석해가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그 분석은 결코 교과서적이거나 작품의 무게에 눌린 일방성에 빠지지 않는다. 바로 감상자가 처해 있는 사회적 현실, 바로 인터넷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깊은 집단적 우울함을 지니고도 여하튼 희망도 찾아보는 평범한 현대인들의 세계에 비추어 그림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필리어』그림들은 경직된 현대인들이 ‘미친년’의 내적 평온과 자연성을 갈구하는 매력적인 회귀본능이며, 밀레이의 『눈먼 소녀』속에서 현재의 절망과 미래의 무지개에 대한 희망을 읽어낼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은 어떤 미술 교양 해설서보다 더 현대를 살고 있는 일반 독자들에게 와닿을 수 있으며, 설명에 의한 이해가 아니라 예술의 가장 일차적인 향유 방식인 ‘감상’의 기능을 복귀시킨다.

이 만화의 형식과 서술 방식 역시 이러한 목표를 위한 좋은 도구가 되어준다. 우선, 감상의 각 요소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명화를 조각내고 변형하며 말풍선을 달아가며 상황을 희화화하는 것에 전혀 거리낄 것이 없다. 그림과 사진, 각종 아이콘들을 간단히 포토샵으로 합성한 것에서 오는 아마추어적인 취향 역시 지극히 실용적이다. 하지만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에 걸맞게 쉽게 복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든다는 기법 자체보다는, 그것이 바로 오늘날 인터넷 상의 여러 문화 현상들을 작품 감상의 과정에 깊숙이 개입시키는 것에 일조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바로 이런 표현기법들이, 오늘날 인터넷 게시판과 커뮤니티들의 가볍고도 실용적인 시각문화와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특히 감상자가 처한 사회적 맥락을 설명하기 위해서 실제로 인터넷 게시판이나 소위 ‘짤방’ 이미지를 직접 인용하여 엮어 넣는 자유로움 역시 이런 연장선상에 있다. 그리고 고정된 시각 이미지의 연속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만화 특유의 속성 역시 바로 이런 보여주며 말하는 목표에 가장 적합하게 작용한다. 마치 명화를 자신의 방식으로 감상해내는 내용처럼, 이 작품 역시 독자들에게 자신의 사회적 맥락, 문화 속에서 읽혀지기 쉽도록 친근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소통으로서의 미술, 미술 감상하기의 자세가 과연 작가가 완전히 의도한 것인가 아니면 기술적 한계의 결과인가 의심을 가질만할 법도 하지만, 작가가 자신의 블로그에서 가끔 발표하는 미술작업들(특히 재기발랄함이 살아있는 ‘녹차소년’은 압권이다)은 그런 의심을 말끔하게 제거해주고도 남는다.

하지만 인터넷 상의 만화와 책으로 나온 만화 사이에는 다소의 격차가 있기 마련이다. 비단 길다란 횡스크롤을 책의 형태로 잘라 붙임으로서 나오는 연출 상의 변화 뿐만 아니라, 인터넷의 세계에서 인터넷을 이용하는 평범한 누리꾼들에게 공감을 자아내는 발표형식과 두꺼운 미술서적을 사서 읽고 싶은 사람들 사이의 격차라는 것이 있다. 특히 출판사가 원래 ‘무거운’ 미술 교재 전문 출판사라는 점은 책의 품질에는 플러스, 책의 수용 방식에 있어서는 마이너스로 작용하는 양날의 칼이다.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은 미술 전문 서적이 아니라, 현대 문화 비평 에세이에 가깝다. 인터넷 상에서는 그런 감상을 자아낼 수 있는 작품이었으나, 미술 서적의 형식으로 나온 책 버전은 자동적으로 다른 맥락을 요구하게 되는 셈이다. 작가가 재구성한 듯 한 책의 흐름 역시 그런 점을 어느 정도 의식하여, 우울함의 바다에 빠지는 일화부터 시작하여 후반에는 보다 내밀한 고백과 결국 불안한 독백과 암전으로 끝나는 ‘닫힌 구조’를 취한다. 책으로서는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이지만, 작품의 가장 큰 매력 가운데 하나이자 이 작품이 공감을 자아낼 수 있었던 기반인 열린 감상이라는 측면을 쇠퇴시킨 셈이다. 이 작품의 원래 인터넷 팬들은 한 명의 작가에 의해서 창조된 명화에 대한 한명의 미술전문가에 의한 구조적 해석을 바란 것이 아니라, 감상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즐거움을 원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명화 해설이 아니라 현대 인터넷 문화에 대한 직접적인 통찰이 돋보이는 ‘외전’격 작품이었던 ‘의기양양 조선 고양이’ 라든지, ‘21세기 풍속화첩’이 이번 책에서 제외된 것이 적잖이 섭섭하다. 책의 구성적 일관성 측면에서는 분명히 제외되는 것이 타당하지만, 작품의 진정한 매력에 있어서는 가장 노른자위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도시문명과 인터넷 속에서 소통하며 살아가는 현대 문화에 대한 감성적이고 날카로운 통찰이, 단순히 약간 대중적인 그림 해설서처럼 보이기 쉽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즉 이 작품의 출판과 홍보의 컨셉 조절에 있어서 근본적인 발상의 재정비가 필요한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대적 감수성에 대한 탁월한 통찰, 자신의 감성에 대한 솔직함,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만화적 의지, 이 모든 것에 인터넷 세대의 연결 지향성이 더해지자 명화의 감상이라는 행위는 이 작품 속에서 새로운 차원 – 어쩌면 가장 본질적인 원래의 차원 – 으로 이동했다. 뭉크도 쿠르베도 브뤼겔도, 결국 우리 자신을 읽어내기 위한 도구다. 우울해(海)를 떠도는 이상한 손가락들의 그림 읽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예술의 감상이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약간 다시 생각할 자극을 주는 작품이라는 것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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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보여주는 손가락
김치샐러드 지음/학고재

하드보일드 고농축 원액 – 『씬시티』[기획회의060915]

하드보일드 고농축 원액 – 『씬시티』

김낙호 (만화연구가)

하드보일드라는 대중문화 장르가 있다. 비록 장르 중 일부가 ‘느와르’라는 수식어로 미학적 가치까지 부여받을 정도로 나름의 굳건한 지위를 보장받고 있지만, 여전히 이 장르의 핵심은 바로 폭력, 섹스에 대한 탐닉으로 무장된 범죄물이다. 그런데 그 범죄라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인 것 정도로 그려지고 권선징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밑바닥 인생들의 최대한 “폼 나게” 사는 인생살이에 대한 도취로 가득하다. 나쁜 놈들도 폭력적이고 막나가지만, 좋은 놈들도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로 폭력적이고 막나간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탐욕과 욕망이 뒤섞인 속에서도, 주인공 쪽은 한 가닥 지고지순함만은 간직하고 있기에 구분이 되는 정도에 불과하다. 선으로 악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 악을 누르는 이야기. 험난한 세상 찌든 도시 속, 서로 범죄적 음모로 물고 물리는 밑바닥 활극의 카타르시스가 바로 이 장르의 재미이자 인기의 비결이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는 어떨까. 극단적으로 슬럼화된 어두운 도시가 있고, 그 거리에는 온갖 조직 범죄와 일반 범죄가 들끓는다. 도시는 부패한 공무원과 종교인들의 지배하에 있으며, 이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자기 터전을 지켜야 한다. 악당들만큼 비정하고 거칠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이 도시에서, 여러 인간군상들이 서로 음모에 얽히고 먹고 먹힌다. 이것이 바로 『씬시티』(프랭크 밀러 / 세미콜론 / 전7권 중 3권 발행중), 문자 그대로 ‘죄악의 도시’의 세계다.

원작자의 광팬과 원작자 본인이 공동 감독한 동명의 영화로 한국에는 먼저 소개된 바 있는 이 작품『씬시티』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드보일드 농축액이다. 실제로 책을 펼쳐보면 매 페이지, 매 장면마다 하드보일드의 극치를 표현해 보겠다는 의지가 넘친다. 어둡고 모노톤인 하드보일드물의 공간은 이 작품에서는 아예 중간톤 없는 강렬한 흑백의 세계다. 여성들은 더할 나위 없이 뇌쇄적이면서 동시에 강하고 위험한 팜므 파탈들 이며, 남성들은 근육질이든 왜소하든 하나같이 “순수한 폭력의 덩어리” 그 자체다. 도시의 뒷골목은 극단적으로 어둡고 더러우며 범죄의 때가 찌들어있고, 멋진 자동차 추격과 술집의 주먹다짐이 넘친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이 놈의 망할 세상에 대한 폼나는 시적 독백을 읊조린다. 물론 이런 묘사 속에서 인간의 고독이니 사회의 어두운 그늘과 혼란에 대한 실존적 은유니 하는 수사를 뽑아내고 싶은 뭇 문학청년 후보생들도 있겠지만, 역시 이런 하드보일드의 핵심은 바로 성과 폭력이 멋들어지게 포장되는 것 자체에서 나오는 원초적 쾌감이다. 그리고 바로 『씬시티』는 하드보일드 장르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요소들을 모두 하나씩 분해해서 극단까지 끌고 가면 어떻게 될지 시험해보는 장렬한 실험실 같은 느낌이다.

이야기 구조 역시 하드보일드 펄프픽션들이 원래 그래왔듯 여러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에피소드로 펼쳐진다. 그리고 하나의 세계관 속에 공존하기 때문에 가끔 서로의 이야기에 찬조출연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한 스토리에서는 죽어버리고 나중에 나오는 다른 스토리에서는 다른 시간대를 다룬다는 명목 하에 살아 돌아다니기도 한다. 이러한 구조는 만화라는 형식에 한층 더 잘 어울리는데,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가끔 섞여 들어가는 장편이야기와 단편 에피소드들을 어색함 없이 쉽게 이어놓을 수 있는 출판물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러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보니 이 작품 역시 완성도가 높은 이야기도 있고, 다소 미흡한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전체 세계관과 표현력의 매력은 시리즈 전반에 걸쳐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작품을 살펴보면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역시 중간색을 생략한 흑백의 대비로 그려진 장면들이다. 그것도 바탕이 검은 색이고, 흰 부분은 가끔 빛이 들어와서 사물과 사람들의 윤곽선을 식별하게 해주는 정도에 가깝다. 나아가 거칠고 직선적인 필체, 역동적 화면구도와 시점처리는 강력한 마초 에너지를 발산한다. 현실감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극단적인 스타일 과잉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이런 과장은 영화로 치자면 오우삼 영화에서 주윤발의 트렌치코트가 휘날릴 때 슬로우 모션이 되는 것과 맞먹는 강렬한 효과를 남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어판에서 만화의 식자 처리를 김수박 작가를 통해서 전문적으로 작업한 것 역시 좋은 선택이다. 그림과 문자가 잘 녹아들어가지 않으면 그 스타일리쉬한 시각세계가 망가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전체 대사에 하지 않고 효과음에만 그런 전문적 처리를 한 것은 다소 아쉽지만 말이다.

전체적으로 이번 한국어판은 출판 품질이 잘 나온 느낌이지만, 아쉬운 부분은 있다. 바로 번역의 부분이다. 매끈하고 별다른 오역 없는 ‘좋은 번역’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원작 특유의 거친 하드보일드 문체를 살린 ‘훌륭한 번역’에는 못 미친다. 예를 들어 1권의 첫 부분에 주인공 마브가 “천국의 향기가 코를 찌르는군”이라고 독백하는 부분이 있다. 원작의 대사를 직역하자면 “그녀는 천사가 풍겨야할만한 냄새가 났다”에 가깝다. 즉, 마브 같은 거친 마초의 상상력으로는 천사라도 어떤 냄새(향기가 아니라!)가 날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하고 이런 말을 하는 셈이다. 그냥 멋진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거친 밑바닥 상상력으로부터 시적 감수성을 끌어올리기 때문에 멋진 대사인데, 그런 맛깔스러움을 잘 살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좋은 작품을 좋은 출판 품질로 볼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대단히 멋진 일이다. 인생에 대한 교훈적 성찰로 좋은 작품이라는 것이 아니라 폼 나는 쾌감 에너지로 충만하다는 의미의 좋은 작품이고, 그 분야에 있어서 『씬시티』는 추종불허의 경지를 이루고 있다.

사족: 작품 외적인 문제지만, 출판사의 보도자료 역시 성의가 아쉽다. 예를 들어 마치 밀러가 ‘데어데블’ 캐릭터의 창작자인 듯 이야기한다든지, 87년작 『배트맨:원년』을 『씬시티』 이후에 창작했다고 하는 등 사실 관계의 오류가 적지 않다. 아무래도 출판사 담당자들이 아직은 만화 문화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하기에 일어난 현상인 듯 한데, 차차 나아지기를 바랄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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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씬시티 1
Frank Miller 지음, 김지선 옮김/세미콜론

설정과 표현과 이야기 -『귀신』[기획회의060901]

설정과 표현과 이야기 -『귀신』

김낙호 (만화연구가)

99년부터 한 3-4년간, 한국에는 유럽만화 출간 붐이 일어났던 적이 있다. 홍대 앞 미술전문서점이나 미술평론가들의 소개글에서나 볼 수 있었던 『니코폴』이나 『잉칼』, 『쌍브르』같은 예술적 성취도가 높이 평가받는 작품들이 썩 괜찮은 번역과 출판 품질로 한국 독자들 앞에 선보인 것이다. 비록 그쪽 작품들의 이야기 표현 방식이나 상상력의 방향 등이 아시아 만화권의 화법에 익숙한 국내 독자들에게 큰 호소력을 지니지 못했기에 붐은 저조한 판매 속에서 이내 사라졌지만, 적어도 그 작품들이 주었던 시각적 임팩트만큼은 강렬하게 자리매김했다. 흑백이 아닌 컬러, 그것도 익숙한 셀 애니메이션풍이 아닌 다양한 기법들의 향연은 만화 속 그림 자체의 쾌감을 일깨워주는 힘이 있었다. 주류 흑백 장르만화라는 출판형태에 얽매이지 않는 출판형태가 곳곳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내, 한국 작품 중에도 그런 식의 강력한 그림실력과 표현력을 온전히 발휘하도록 허용 받는 형태의 책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때맞춰 컴퓨터 모니터와 컬러링에 익숙한 젊은 작가 세대가 데뷔를 해주었다. 한국에서 만화라는 분야는 한층 더 자신의 운신의 폭을 넓힌 것이다.

그 중에는, 만화 특유의 과장을 절제하고 사진에 가까운 수채화풍 그림체로 높은 인지도를 쌓아올린 작가 석정현이 있다. 그가 작업해온 일러스트들은 대중적 인기에서 부족함이 없었고, 가끔 선보이는 단편들은 감동 에세이 스타일이든 짧은 개그물이든 감각적인 위트를 갖추고 있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작가의 본격적인 극만화가 완성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폐간된 ‘영점프’ 등 여러 지면에서 작가 자신이 오래 동안 구상하고 있던 근미래 군대경찰 이야기의 설정은 그런 기대를 더욱 부풀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작품, 『귀신』(석정현 / 길찾기)이 출간되었다.

『귀신』은 평화가 너무 오래 지속되어서 군대가 할 일이 없어진 한반도 서울시의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의문의 테러 사건이 일어나고, 사태를 해결하려는 군인들의 활약과 그 이면에 있는 군대와 미디어 등이 뒤얽힌 커다란 음모가 복잡하게 진행된다는 것이 자세한 내용 누설을 방지한 상태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주요 줄거리다. 사회와 미디어, 생체병기로 비유되는 비인간성, 평화의 의미 등에 대한 여러 화두들이 그 속에서 던져진다.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미 예상 가능했듯 시각적 쾌감의 즐거움이다. 섬세한 필치의 고밀도 그림들은 지나친 부담감 없이 페이지 속에서 멋진 사건 시퀀스들을 연출해낸다. 화려하면서도 현실적인 액션 연출, 역동적인 포즈, 많은 구상을 투여한 흔적이 엿보이는 각종 기계와 소품 디자인 등은 이 작가에게서 기대했던 바를 어김없이 충족시켜준다. 세계관에 대한 설정 역시 치밀하여 작품 속에 그려지는 제도와 사회가 정말 “그런 상황이라면 분명히 있을 법한” 곳으로 느껴지도록 만드는데, 근미래 SF로서 중요한 미덕을 충족시킨 것이다. 또한 이 장르 특유의 현실적인 문제제기와 매력은 이 작품을 만화로서 읽고 소장할 정도의 명분은 충분히 채워주고도 남는다.

하지만 아직, 그 이상의 점수를 주기는 망설여지기도 하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좋은 문제의식과 섬세한 세계관의 반대편에는, 그것을 풀어내는 주제와 이야기 전개의 미숙한 부분들이 그림자를 드리우기 때문이다. 우선 가장 큰 차원에서는, 좋은 문제의식 방향 설정을 피상적 고민으로 승화시키는 선에서 머물렀다는 것이다. 미디어의 대중 여론 조작이라든지 평화의 진정한 의미란, 현실 속에서는 다양하고 미묘한 모순들로 가득하다. 평화를 바라는데 그것이 오히려 평화를 옭아맨다든지, 더한 미디어 자극을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자극에 둔감하게 만든다든지, 사회속의 누구나 결국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이며, 보호자이자 동시에 감시대상이라는 점 등 복잡하기에 더욱 중요한 지점들이 많다. 하지만 『귀신』은 아쉽게도 너무나 쉽고 빠르게 주연들과 조연들, 하나의 시스템과 다른 시스템 사이에 선악의 선을 그어버리고 후반으로 갈수록 헐리우드식 주류 액션 활극의 방향으로 달려 나간다. 실제 현실의 중층적 모순을 다루기 좋은 주제와 세계관을 가지고, 어째서 이 정도까지로 타협했는지 아쉬움이 남을 따름이다.

주제라는 큰 차원을 떠나서, 사람들이 펼치는 이야기로서의 재미 역시 아직 미완성이다. 여러 매력적인 설정을 지닌 주요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그 중 누구에게도 공감할 여지가 충분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독자는 등장인물의 행동 동기와 패턴에 어떤 식으로든 공감해야 작품을 행위자들의 이야기로서 즐길 수 있다. 그렇기에 작가는 인물들의 감정과 행동에 필연성을 부여하고 극의 완급을 끌고 나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귀신』에 등장하는 여러 매력적인 인물들은 그런 부분이 피상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오히려 처음 시퀀스의 이름 없는 희생자로 잠깐 출연한 젊은 연인들이 훨씬 효과적으로 이야기 속에서 인물구축이 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주인공이 소위 ‘귀신’이 된 이유에 대해서 궁금증이 일어나지 않으며, 부대원들이 재등장할 때 통쾌한 반전의 기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다시금 인물들의 행위를 통해서 표현되어야 할 주제의식의 효과적인 발현에도 방해가 된다. 예를 들어 미디어를 통해서 주인공들에게 닥쳤던 비극은 공감 가능한 절망이 아닌 ‘설정’으로서만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명실상부한 2005년도 최고의 활극 모험 영화 가운데 하나인 『킹콩』에서 피터잭슨이 3시간 영화 중 무려 초반의 1시간여를 감정이입 가능한 캐릭터의 구축에 할애했던 전례를 참조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전체적으로 『귀신』은 탄탄한 시각표현과 상상력으로 제작되었으나 결정적인 주제 표현과 캐릭터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에 실패한 몇몇 대형 블록버스터 장르 영화들과 비슷한 장단점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은 단위 시퀀스 내에서 감수성 있는 전개를 보여주는 것 까지는 당초 작가에게 기대한 만큼의 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주제와 설정의 무게가 부담을 주었는지, 정작 필연성 있는 캐릭터들의 일관된 이야기로 성립시키는 것에 있어서는 아직 다듬을 여지가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단편과 일러스트에서 뛰어난 감수성을 인정받은 신인이, 중/장편 극만화 작품 첫 데뷔작에서 나름의 희망을 던져주며 동시에 일종의 통과세를 지불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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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저물어 가는 것에 대한 관조 – 『카페 알파』[기획회의060815]

저물어 가는 것에 대한 관조 – 『카페 알파』

김낙호 (만화연구가)

멸망이란 항상 강력한 임팩트를 지니기 마련이다. 어떤 강력한 힘이 하나의 세계를 소멸시키는 모습이란 소멸되는 대상들에게 있어서 크나큰 비극이며, 그 힘이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변변한 저항조차 허용되지 않을 때 오는 비극성이란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이전의 세계가 사라진 곳에는 새로운 방식의 세계가 들어선다. 이렇듯 멸망은 극적인 요소가 강렬하지만, 사실 현실 속에서 감내하기에는 너무나 크다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그 자리에 가상의 이야기가 들어서게 되는데, 그렇기에 고대 이래로 수많은 신화와 예언서에서 멸망이 거의 항상 언급되는 것이다. 기독교 성서의 아마게돈이든, 북구 신화의 라그나로크든, 힌두신화에서 이야기하는 파괴신 칼리의 폭주든 마찬가지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서면서 생활 속 불안과 스트레스를 날려주는 신화와 예언의 기능은 종교기관보다는 대중문화의 손으로 넘어간지 오래다. 즉, 멸망이라는 테마는 만화나 영화, 소설 등 서사형 대중문화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단골소재다.

그런데, 멸망이 항상 모든 것이 부수어지고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운명을 한탄하는 것이어야만 할까. 스피노자가 이야기한 “내일이 세계의 종말이라면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 식의 뻔뻔할 정도의 관조는 과연 쓸모없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아주 약간이라도 품어본 적 있는 독자들이라면, 최근 완간된 만화 『카페알파』(아시나노 히토시, 학산문화사, 전14권)가 하나의 좋은 독서 경험이 될 수 있다. 이 작품은 인적이 드문 언덕에 있는 카페를 혼자 지키는 여종업원 ‘알파’의 하루하루 일상이 내용의 전부다. 주인은 여행을 떠났다며 자리를 비운 상태이며, 사람들이 사는 도시는 스쿠터를 타고 한참 내려가야 나온다. 그런 평온한 곳에서 자연과 가끔 한 번씩 오는 단골 방문객들을 보며 나른하고 평온한 나날을 보낸다. 비록 여종업원이 안드로이드이며, 대도시들이 대부분 파괴되고 물에 잠겼으며, 지금도 해수면이 계속 올라가는 중이라서 인간문명이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멸망하고 있다는 사실이 배경에 깔려 있지만 말이다. 사실 써놓고 보면 엄청난 설정이지만, 그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온한’ 매일을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의 핵심 정서다.

『카페알파』의 세계는 하루의 흐름에 비유하자면 저녁뜸에 가까우며, 작품에 등장하는 누구하나 앞으로 기나긴 밤이 올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다. 하지만 모두 관조적으로, 그저 그 세상을 살아갈 뿐이다. 더 많은 것을 얻고자 아등바등하지 않고, 주어진 세상에서 평온하게 일상을 영위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삶을 주인공 알파는 그저 미소 지으며 지켜본다. 과도한 극적 감상주의나 직접적인 설교에 빠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따듯한 메시지를 전달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편안하게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스타일의 이런 작품들을 장르 팬들은 소위 ‘치유계’라고 부르곤 하는데, 『카페알파』는 바로 이런 치유계 작품의 가장 모범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극적인 사건보다는 한 템포 쉬어가며 무언가를 돌아보도록 하는 것, 엄청난 반전에 의하여 세상이 구원받기를 기대하도록 하거나 엄청난 행복의 교훈을 주기보다는 그저 나른하게 지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여유를 잃지 않도록 하는 자세가 이 작품이 느리면서도 12년이라는 긴 작품 연재기간동안 고정 팬을 거느렸던 비결이다.

작품 어디에도 자세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는 부분 따위가 없다. 핵전쟁이 있었는지, 기상재해로 엉망이 된 것인지, 유전공학이 폭주한 것인지 속 시원한 설명 따위는 없다. 그냥 머리만한 밤이나 과일이 있어서 가끔 따먹을 수 있고, 알파가 커피 원두를 사러 나가는 인근 도시 요코하마(그래서 작품의 원래 제목이 『요코하마 쇼핑 기행』인데, 한국어 번안 제목이 원제보다 한층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가 서서히 물에 잠기며 사람이 줄어들고, 가끔씩 높은 상공에 거대한 로봇 비행체가 날아다니며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며, 호수에는 인간형 야생 생물 ‘미사고’가 살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요소들은 멸망의 비극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바로 이 세상 속 느긋하게 자연과 사람들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자세를 보여주기 위한 자연스러운 세상의 일부로서 그저 그곳에 있다.

주인공 알파는 이 모든 것을 오랜 기억으로 남기는 자다. 어쩌면 앨범이나 사진기 같은 존재다. 늙지 않고 오랜 시간을 살아나가는 그녀의 주변에서, 다른 사람들은 성장하고 늙어가고 2세를 낳고 어느 틈엔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게 되기도 한다. 사실 시간의 영속적 흐름과 그 속에서 불변의 존재로 변화를 바라보는 자의 이야기는 고전 SF 단편 소설들에서 원래부터 종종 사용되는 구도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이 항상 인간의 의식수준을 초월한 세상의 커다란 변화를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느라 사람들은 정작 그 변화를 보여주기 위한 부수적 도구에 불과하게 다루어지는 반면, 이 작품은 그 반대의 길을 택한다. 어디까지나 사람에 대한 긍정적 관조가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영원을 사는 주인공의 운명보다는,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또 천천히 다가오는 멸망의 길에 흥분하거나 피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의 미소가 핵심이다.

이러한 이야기와 정서를 뒷받침하는 것은 부드러우면서도 둥그런 선, 가끔 나오는 파스텔 톤의 컬러 페이지들, 풍부하고 온화한 표정변화로 가득한 시각연출이다. 극적 긴장감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려는 광활한 파노라마를 남발하지도 않는 절제된 칸 연출 역시 이 작품의 정서에 가장 적합하게 활용되고 있다. 과도한 감상주의적 성찰보다는 그냥 작은 것에 즐거워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자기 할 말을 다 해버리는 관조적 연출의 승리다.

“시대의 황혼기가 이렇게 느긋하고 평화스럽게 오는 것이라니.
이 느릿한 시대에 나는 이 황혼의 세상을 천천히 바라보며 간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는 시간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1권 중, 알파의 대사)

빠르게 흐르는 현실의 스트레스를 더욱 격렬하고 강렬한 자극적 이야기에 몰입하여 상쇄시키는 것도 하나의 즐김의 방식이겠지만, 가끔은 이렇게 하염없이 느긋한 관조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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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작품의 팬층 성격상 당연히 세트용 수납 박스라든지 박스 세트라든지 OST 특전이라든지 하는 완결 기념 이벤트가 있을법 했지만 뭐 그냥 조용히 완결. 뭐 출판사가 출판사이니만큼 당연한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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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만화의 선택지 – 『삼인삼색 미학 오디세이』 [기획회의060801]

교양만화가 나아갈 세 갈래 선택지 – 『삼인삼색 미학 오디세이』

김낙호 (만화연구가)

한국에서 만화는 ‘공부를 방해하는 저질 오락거리’로 취급받아온 억울한 과거가 뼈에 사무쳐서 그런지, 교육과 학습에 사실은 도움이 많이 된다는 사실을 상당히 강조하기 위해서 아예 별도의 장르를 발달시켰다. 그것이 바로 학습만화다. 만화를 학습적 목표를 위해서 활용하는 사례라면 세계 어디에나 적지 않게 있지만, 아예 하나의 개별 장르 취급을 하고 유통 측면에서나 독서 문화 측면에서나 독립적 위치를 부여해주는 것은 아직 한국과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들다. 그 와중에서 (필자를 포함) 종종 평론가들이 강변하는 논리가 바로 학습만화가 얼마나 쉽고 재미있게 지식을 전수하는지 알아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만화라는 매체가 지니는 장점과, 장르로서의 학습 교양만화는 반드시 연동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시각적으로 보여주면서 말로 설명하는 것은 강력한 표현력을 지니고, 약호화된 도상이 주는 이입의 폭은 넓다. 하지만 이렇게 접근성이 올라간다고 해서, 어려운 내용이 저절로 쉬워지지는 않는다. 애초에 이쪽 계열 만화의 가장 두드러지는 표현적 장점은 키워드와 핵심 개념들의 효과적인 압축인데, 그 결과 이미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절묘한 요점정리지만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한층 난해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그것이 바로 ‘어려운’ 학습 교양 만화의 딜레마다. 이런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서 많은 학습교양만화들은 애초부터 어려운 지식보다는 ‘쉬운’ 부분들만 골라서 다루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런 우회로가 없다면 어떻게 할까. 『아이콘 총서』시리즈 같이 난해한 지식을 더욱 난해하게 요약한 책이 탄생한다.

그렇다면, 미학이라는 괘 굵직한 인문학적 토양을 주제로 다루고자 한다면 어떨까. 게다가 아예 이미 널리 대학생 이상의 교양서로 자리 잡고 있는 그 분야의 명실상부한 ‘교과서’를 원작으로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한다.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출판 기획자들이 내놓은 하나의 대답이 바로 『삼인삼색 미학 오디세이』(진중권 원작 / 현태준, 이우일, 김태권 만화 / 휴머니스트 / 전3권)에 들어있다. 이 작품의 원작이 되는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는 미학의 고대부터 탈근대까지 인간이 문화예술을 바라보는 인식틀의 발전과정을 친근한, 하지만 결코 만만하지 않는 방식으로 서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어려운 개념을 사람들이 읽고 이해할만하게 설명하려 노력한 책을, 다시금 한 단계 더욱 이해할만하게 하려고 만화의 힘을 빌리고자 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역시 삼인삼색이라는 작가 시스템의 특이함이다. 원시와 근대, 모더니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을 각각 그 해당분야에 가장 잘 어울릴만한 작가들에게 나눠준 후, 비교적 자유롭게 개성을 발휘하도록 해준 것이다. 그 결과 원시와 근대를 다루는 1권은 키치적 감수성으로 장난감과 잡다한 취향에 확고한 위치를 다진 바 있는 현태준이 맡았다. 평소 하던 방식 그대로, 초지일관의 유치함으로 오히려 하나의 경지에 도달하는 말장난, 그리고 가식에 대한 정면도전이 돋보인다. 원시와 근대 미학에 대해서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한다기보다는, 그냥 그 시대의 ‘디오니소스적’인 정서를 스스로 펼쳐 보인 느낌에 가깝다. 이성적 세계관에 기반한 모더니즘의 시대를 다룬 2권의 경우, 체계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전달하는 것이 많아질 수 밖에 없는 영역이다. 그렇기에 다양한 ‘설명적인’ 학습만화나 일러스트 분야에서 효과적으로 활약한 바 있는 이우일이 임무를 맡았다. 한쪽에서는 엽기적 낙서체 개그만화로 유명해졌으나, 『노빈손』 시리즈의 삽화 작업 등 오히려 스트레이트한 분야에서 안정적 작업을 해온 경력 그대로 2권은 착실히 원작의 명제들을 그대로 읊어낸다. 전개 형식 역시 설명하는 박사와 그것을 듣는 두 꼬마라는 전통적 형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을 논하는 3권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의 탈경계성과 복잡성을 효과적으로 만화화해 줄 작가를 필요로 하며, 게다가 가장 어려운 개념들이 난무하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아예 미학 전공자인데다가, ‘어려운’ 학습교양만화 경력이 있는 김태권에게 주어졌다. 3권은 아예 설명보다는 극의 형식을 지니는데, 만화가가 각종 미학개념들의 바다에 뛰어들어 모험을 겪는 과정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틀 위에서 펼쳐진다.

작가가 서로 다른 실질적으로 3개의 작품을 하나의 세트로 묶어낸 것이니 만큼, 당연히 각각의 권은 따로 장단점을 지니고 있다. 1권의 경우 친근하다 못해 그 비속함에 공감하고 킬킬거릴 수 있는 점이 장점이라면, 단점은 몰입해가며 읽기 어려운 산만함이다. 생활 속의 일상적 미감에 대한 사진 정리 등 원작 이상의 재해석이 독서에 도움을 주지만, 기본적으로 매니악한 느낌이 강해서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 남아있다. 표준적인 학습만화의 틀을 따라가고 있는 2권의 경우, 장점이라면 그 표준성 덕분에 학습적 읽기가 가장 수월하며 원작의 내용을 직접 전달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이왕 만화로 읽는 맛이 특별히 더한 것도 뺀 것도 없이 심심하다는 것이 단점이다. 그저 무난하게 읽기에는 작가의 재능이 아깝기도 하다. 가장 만화가의 재해석이 강력하게 개입된 3권의 경우는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소설『소피의 세계』가 철학과 성장소설을 결합했듯, 미학의 세계를 환상문학의 양식에 넣어 만화로 소화해내는 재기가 돋보인다. 하지만 단점이라면, 읽고 나면 오히려 더욱 개념들에 대해서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하기야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그런 성향이 있지만 말이다). 즉 개념들을 간명하게 요약 설명해준다기보다는 다양한 복잡한 현상과 모순들을 독자들에게 접하게 해주는 쪽으로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지적 자극으로 인한 교양에는 도움이 되지만 학습에는 그다지 도움이 안 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의 세 권은 모두 다른 접근, 따라서 다른 종류의 독서경험을 준다. 단적으로, 1권을 읽고 마음에 들어서 전3권 세트를 사는 구매 방식은 그다지 권장하고 싶지 않다. 다양한 접근을 경험하고 싶은 독자에게는 득이 되지만, 한 가지 방식의 일관된 설명을 원하는 독자들은 그냥 원작을 다시 한 번 읽는 쪽이 나을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어떤 권이든 나름의 지적 재미를 보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니 만큼 책장 한 켠을 차지하는 것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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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각각의 권이 모두 컨셉이 다르다는 점은 마케팅 면에서 득보다 실이 크다고 본다. 하나의 통일된 작품으로서 만족을 주기 힘들다면 누가 세트로 사겠는가. 그리고 본문에서는 비교적 점잖게 말했지만, 학습만화 분야를 공략하면서 정작 학습성이 좋지 않다는 것 역시 큰 마이너스. 시장의 반응은 과연 어느 정도까지 나와줄지, 자못 궁금할(걱정될)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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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술적 독서경험 – 『음양사』 [기획회의060715]

주술적 독서경험 – 『음양사』

김낙호(만화연구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초월적 현상으로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질서를 읽어내고 또 그것에 개입하고자 하는 시도는 어찌 보면 인류문명의 발달사와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한쪽에서는 종교와 신앙으로 그것을 이루고자 하였고, 다른 쪽에서는 물리적 법칙과 수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과학’을 실현하고자 했다. 아니, 사실 생각해보면 이런 이분법적 사고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 과학자들은 신들의 세계를 부정하지 않고도 과학적 방법론들을 확립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았으며, 주역은 대자연의 이치를 하나의 철학적 틀로서 파악해 나갔다. 종교가 믿음을 바탕으로 한 도덕률로만 특화되고, 과학이 방법론적 엄격성에 매진하느라 상상력을 버리게 된 후부터 둘은 서로 갈라서게 되었다.

여러번 해적판으로 선보였다가, 최근에서야 정식 판본으로 완간된 만화 『음양사』(전13권/ 유메마쿠라 바쿠 글, 오카노 레이코 그림/ 서울문화사)는 일본 헤이안 시대를 무대로, ‘음양도’의 전설적 대가인 아베노 세이메이의 활약상을 그려낸 작품이다. 줄거리를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일종의 궁중 주술사인 아베노 세이메이가 악기에 능하고 영적인 친화력이 뛰어나지만 주술에는 문외한인 귀족 친구 히로마사와 함께 각종 기이한 영적 현상들을 해결해 나간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구도는 셜록 홈즈라든지 엑스파일이라든지 대중문화에서 은근히 친숙한 구도다). 만화『음양사』에서 가장 먼저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마치 전통 일본화를 잘라낸 듯 한 어지러우면서도 여백이 있는 그림체다. 기막힐 정도로 고풍스러운 요괴의 모습들은 물론, 정복을 입고 거니는 여러 캐릭터들 역시 현대의 만화라는 느낌보다는 옛 문헌을 들춰보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다. 각종 독백과 싯구들이 그림과 혼연일체되어 옛 서화를 바라보는 느낌을 주며, 때로는 한칸 한칸의 매력에 빠지느라 줄거리 진행을 제대로 따라가기 힘들다는 단점까지도 나을 정도로 화려하다. 이번에 완간된 정식 판본의 인쇄와 식자는 이러한 특유의 수려하고 가는 선을 뭉개지 않을 정도로 나와 주었으니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 하다. 나아가 최대한 성실한 번역(물론 세부적인 하이쿠 한 구절 한 구절의 뉘앙스를 전부 완전히 다른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은 물론, 친절한 주석으로 높은 품질을 자랑한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음양도라는 사상을 다루는 진지한 자세다. 일본의 음양도는 중국에서 들여온 음양오행 사상을 바탕으로,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음을 인정하는 신토 사상을과 일부 밀교(대승불교의 일파) 관행들이 섞여 들어간 종교학문이다. 주로 천문학과 풍수 등을 통해서 요괴퇴치나 각종 제의식 등 여러 주술 활동을 실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덕분에 요괴 기담의 전통이 강한 일본의 각종 대중문화에서 널리 사랑받고 있는 소재 가운데 하나다. 그 가운데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음양사가 아베노 세이메이였는데, 유명 환타지 기담 소설 작가 유메마쿠라 바쿠의 작품을 원작으로 오카노 레이코의 수려한 일본화풍 그림체로 그의 모험담이 새로운 시각으로 현대 독자들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음양사』가 음양도를 얼마나 ‘잘’ 다루었는지는 필자 역시 그 분야에 밝지 않기에 잘 알 수 없지만, 음양도를 하나의 무협식 필살기가 아닌 철학이자 세계관으로 다루고자 하는 접근 방식 만큼은 부러울 정도로 집요하다.

같은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동명의 영화가 주인공의 매력을 바탕으로 한 요괴퇴치 활극에 불과했던 반면, 이 만화작품은 뒤로 가면 갈수록 근원에 근원을 추구한다. 이 작품의 전반부는 두 파트너가 수수께끼의 문제에 봉착하고 그것을 주인공의 재주로 풀어나간다는 전형적인 탐정 및 미스테리물, 또는 기담의 전형적인 장르규칙을 다양한 에피소드로 풀어나간다. 그 중에는 족제비 요괴도 있고, 백귀야행으로 들어갔다가 도망쳐 나오는 이야기, 사악한 마음의 주술사 또는 심지어 신적 존재와 싸우는 모험담도 있다. 그 와중에 두 주인공 캐릭터 및 다양한 조연들의 물고 물리는 관계 역시 그 재미를 배가시켜 준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단순한 시대 모험활극으로 끝나지 않을 조짐은 일찍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한 에피소드에서 세이메이가 히로마사에게 음양오행의 이치를 동그라미 하나에서부터 시작해서 기하학적 도형을 더해가며 오망성과 결국 소용돌이까지 전개시키는 설명해주는 (물론 상대는 경탄할 뿐, 전혀 못 알아듣는다) 대목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주역과 수학적 이치를 응용하여 음양도의 세계관을 압축시켜 보여주는 소름끼치는 명강의다. 그 이후로도 점차 작품의 성격은 단지 요괴를 퇴치한다거나 주술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의 이치를 해석해내고 그것을 주술적으로 조합해내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나가기 시작한다. 수도에 지어져있는 궁전이 지니는 주술적 의미는 정반형의 수학적 행렬으로 재해석되며, 바둑판의 수학적 조합이 하늘의 별들의 천문학적 질서에 대응되어 번개신과의 바둑 시합이 곧 주술의 경연장이 된다. 그리고 심지어 마지막 권에서는 종교적 제의와 수학적 이해, 물리적 과학의 얼개가 섞여 들어가는 이러한 흐름이 극단까지 흘러가서, 이집트 신앙의 투탄카멘 왕 이야기와 접목되기까지 하는 의외성을 선사한다. 숙적 도만 법사와 주술대결을 펼쳐서 이겼다는 역사 속 일화는 이 즈음에서는 완전히 장르적 활극 특유의 드라마틱한 경쟁이 아니라, 주술적 노력의 난해하면서도 경이로운 해제편으로 바뀐다. 그 과정은 대단히 난해하면서도 매혹적이어서, 마치 독자들마저도 그 경이를 그저 바라만 볼 뿐인 당대 현실 속의 사람들 마냥 얼이 빠지게 만든다.

만약 수려한 미스테리 장르물로서 즐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면, 7권 정도까지만 읽을 것을 권한다. 하지만 만약 종교와 과학이 경계를 녹이고 주술적 경이로 빠져드는 흥미로운 독서체험을 하고 싶다면, 그냥 계속 마지막 권까지 가시기를 권장한다. 음양오행과 수학적 자세가 초월성마저도 지배하는 『음양사』의 세계관을 꼭 전부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할 필요까지는 없다 하더라도, 한번쯤 확실하게 ‘홀려’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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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확실히, 히로마사와 세이메이의 유사 야오이 관계(?)보다는 음양도의 사상 그 자체로 파고드는 후반부에 대해서는 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꺼버리더라는;;; 한국에서는 워낙 그게 해적판이 그만 나오게 된 타이밍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캐릭터 드라마 방식의 만화전개에 익숙한 주류 독자들에게 아주 쥐약스러운 스토리 변모였다는 것 정도는 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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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의 정도를 걷다 – 『카페타』[기획회의 060701]

열혈의 정도를 걷다 – 『카페타』
김낙호(만화연구가)

한국은 세계적인 자동차 강국을 자처하면서도 자동차 문화는 그다지 번성하고 있지 않은 특이한 나라다. 자동차 생산이나 판매량에서는 미국이나 일본, 유럽의 강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만 정작 자동차가 생활 문화의 독특한 단면이 되어있는 자연스러운 이미지가 부족하다. 아, 물론 한국 대도시 특유의 난폭운전이니 비슷비슷한 색상과 모델로 가득한 거리니 하는 정도의 것은 있지만 말이다. 특히 그런 단면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은 자동차를 대중 스포츠 오락으로서 활용하는 것, 바로 모터스포츠 분야다. 포뮬러 급의 레이스는 F1800 정도 밖에 없으며, 선수층도 좁고 대중적 기반마저 적다. 하기야 모터스포츠는 자동차 회사들이 자신들의 우수한 기술력을 자랑하기 위한 경연장이니 만큼, 기술력보다는 서비스나 가격경쟁력 등을 강점으로 마케팅하고자 하는 업체들이 주종을 이룬다면 그다지 효용이 없기는 하다. 하지만 기계와 인간이 하나가 되어 극단적으로 격렬한 상황 속에서 경쟁하는 스포츠가 지니는 현대적인 매력과 쾌감이란 결코 만만치 않기에, 은근히 아쉬울 따름이다.

카레이싱이 보편화되어있는 자동차 강국 가운데, 미국은 그것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일본은 만화를 만든다. 특히 장편 연재만화에 있어서 카레이싱은 지지기반과 전문지식만 갖출 수 있다면 썩 좋은 소재다. 머신의 세세한 튜닝에 의한 성능 향상, 정비사와 운전사와 매니저 사이의 팀워크, 기계의 부족함을 극복하는 정신력, 0.1초의 승부에 목숨을 거는 장인정신에 가까운 승부욕, 스포츠맨십과 상업성 사이의 갈등까지, 드라마틱한 요소가 넘쳐난다. 게다가 그 것이 한판승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쌓여가면서 성장을 하는 방식의 흐름이 가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상황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서 트랙과 머신들을 빌려오지 않아도 된다. 그저 자료 참조를 열심히해가면서 멋지게 그려서 연출해내면 된다. 다만 여느 전문 소재 만화와 마찬가지로, 잘못하면 지나치게 세세한 매니아의영역으로 들어가게 되어 대중적 호소력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으니 균형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지만 말이다.

『카페타』(소다 마사히토/학산/2권 발매중)는 카레이싱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공식을 엮어내는 장르 오락만화다. 이야기는 편부 슬하에서 살며 자동차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한 어른스러운 소년 캇페이타의 성장담으로 시작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 직장에서 폐품과 중고부품들을 긁어모아서 카트를 만들어주고, 소년은 카트를 타면서 자신의 레이서로서의 재능을 발견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표지에서 볼 수 있듯 이야기는 소년이 성장해서 정식 레이서가 되어 활약할 때까지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작품이 주목할만한 점은 어떤 대단히 특이한 새로운 발상을 담고 있거나 독특한 스타일로 독자를 놀래키기 때문이 아니다. 정반대로, 너무나 우직할 정도로 고전적이기까지 한 열혈 성장물의 정도를 가고 있기 때문이다. ‘열혈’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 강렬한 열망과 물러서지 않는 고집을 통해서 어떤 불가능한 난관이라도 결국 뛰어넘어버리는 방식의 전개를 지칭하곤 하는데, 원래는 일본 대중문화에서 완성한 공식이지만 오히려 한국인의 정서와 부합하는 부분이 많다 (마치 한국에서 국민스포츠가 되어버린 고스톱처럼 말이다). 이미 전작 『스바루』나 『출동 119』 같은 작품을 통해서 열혈 정서에 대한 놀라운 솜씨를 보여준 작가의 근작인 만큼, 『카페타』의 정서는 책장을 넘기다가 손이 데일까 걱정될 정도로 뜨겁다. 바보스러울 정도로 한곳으로만 몰두하는 주인공은 정도를 걸어가며 자신의 재능을 하나씩 발견하고 성장시킨다. 아버지와 친구들 등 각종 조력자들은 그의 열정 하나에 반하여 그가 더욱 자신을 불사르도록 도와준다. 소년은 레이서가 돼서 유명해지겠다거나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목표 따위 없다. 다만 자동차로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달리는 것 자체가 모든 것을 쏟아 붇고 싶을 정도로 좋을 뿐이다. 폐품으로 만든 싸구려 카트라고 할지라도, 주인공의 그런 열혈이 투여되면 최고의 머신들과 어깨를 견주며 달릴 수 있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 이 작품은 ‘공식’에 충실하다. 공식을 깨버림으로서 즐거움을 주는 길과 좋은 공식의 정도를 우직하게 추구함으로써 즐거움을 주는 길 가운데 명백한 후자인 셈이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캐릭터 구도는 전형적인 완성된 천재와 대비되는 미완성 천연 천재의 성장기다. 완성된 천재는 좋은 환경과 스스로의 노력이 겸비되어 그 자리에 올랐으나 마땅한 라이벌이 없기에 오히려 고독한 존재다. 그에 비해서 미완성 천재는 천부적 재능을 이제야 하나씩 발견해 나아가는데, 그 성장의 속도가 대단히 빨라서 어느 틈에 완성된 천재의 관심을 끌게 되며 라이벌로 올라선다. 천재적 주인공과 천재적 경쟁자가 서로 더욱 큰 완성의 경지를 향해서 달려갈 수 있기에『유리가면』같은 고전 만화든, 『대장금』같은 비교적 최근의 드라마든 즐겨 쓰는 구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장기연재를 위해서 각 성장의 과정은 피라미드형으로 단계가 나누어져 있어서, 하나를 해결하고 다음 목표를 향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F1에 나가기 위해서 어릴 적에 카트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라는 것이 이 지점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 모든 과정을 질주하게 만드는 추진력은 바로 앞서 이야기한 ‘열혈’이다. 완성된 천재 역시 미완성 천재 주인공의 추격에 감화되어 잊고 있었던 열혈의 불길을 지펴나가는 방식으로 결국 강력한 실력경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열혈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역시 작가의 물오른 연출력이다. 둥글둥글한 모양이지만 거친 선으로 이루어진 인물들은 일견 부드러워 보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 거칠게 불타오를 준비가 되어있다. 풍부한 표정과 땀방울이 만화적 과장을 이루어내며, 리얼하게 묘사된 배경이나 머신과 대비를 이루며 더욱 독자들을 이입하게 만든다. 순간의 클로즈업과 강렬한 순간의 큰 장면묘사를 효과적인 리듬감으로 배치하는 칸 연출 역시 일품이다. 부드러운 독서의 흐름을 막을 정도로 스타일리쉬한 실험을 하지 않으면서도 강렬한 현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자동차의 세세한 부품이나 운전설명에 낯설다 할지라도, 감정적으로 격양된 뜨거운 연출에 공감하며 볼 수 있도록 이끌어내는 것은 훌륭한 작가적 재능이다.

물론 아직 연재 초입에 있는 작품에 대해서 완성된 평가를 내리는 것은 힘든 일이다. 실제로 이 작가는 전작에서, 열혈과 천재성의 성장 속도가 폭주하여 이야기를 도저히 수습 못하고 중도에 하차해버린 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의 이야기이고, 지금 당장은 이 꼬마 카 레이서의 성장담이 궁금해서 계속 몰입하여 지켜 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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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PS. 그런데 열혈우주격투발레만화 스바루는 언제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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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에 그치지 않는 사색 – 『사랑해』[기획회의 060615]

공감에 그치지 않는 사색 – 『사랑해』

김낙호(만화연구가)

2000년대 초, 짧은 감상주의적 에피소드로 구성되며, 둥글둥글한 그림체에 파스텔톤 색채를 입힌 만화 모음집이 크게 유행한 바 있다. 소위 ‘에세이툰’이라는 이름 하에 특히 인터넷을 중심으로 연재하고 출판물로 출간하여 선물용으로 판매되었는데, 그 중에는 큰 히트를 기록한 것도 더러 있다. 『파페포포 메모리즈』 같은 출판 시장의 밀리언셀러, 『광수생각』같이 일간지 지면이라는 매체력을 바탕으로 문화적 영향력을 떨친 것, 등등 여러 가지가 이에 포함된다. 하지만 유행을 타는 사조가 더러 그렇듯, 이 경우 역시 인기나 대중적 판매량과는 별개로 어설픈 함량 미달의 작품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차피 주관적인 감상주의를 기치로 내거는 에세이툰에 있어서 함량미달이라는 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바로, 그럴듯한 감상적 어휘로 적당히 조합한 멘트 한마디를 말미에 던져놓고는 정서적 공감을 구할 뿐이라는 점이다. 그런 경우는 예쁜 구경거리로서는 의미 있을지 몰라도, 정작 ‘나’라는 존재에게 어떤 실제 영향도 주지 못한다. 그것은 대화와 생각을 전제하지 않는, 공감만으로 이루어진 폐쇄성의 단점이다.

그런데 그 무렵, 특이한 일이 한 가지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포츠조선에서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며 전문 도박 사기꾼들의 인생역정을 선 굵은 드라마로 펼쳐내던 중견 작가 콤비가, 그것도 바로 그 연재 지면에서 젊은 인터넷 만화 신인들의 아성이 높은 분야인 에세이툰의 말랑말랑한 감수성에 도전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런데, 막상 작품이 연재를 시작하자 녹록치 않은 것이다. 독자에게 성찰을 불러일으키며 품격 있게 돋보이는 만화 작품이 탄생해버린 것이다. 이거 대박이다, 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했으나… 어째서인지 단행본은 에세이툰 장르 특유의 예쁜 제책과 거리가 먼, 전형적인 대본소/대여점 공급 위주인 성인만화 단행본의 모습으로 출시되어서 그저 그런 정도의 반향 밖에 일으키지 못했다.

바로 그 작품, 『사랑해』(허영만 그림, 김세영 글 / 김영사 / 2권 출시중) 가 본격적으로 벼르고 재출간되었다. 재출간 버전은 이전 출시본이 지녔던 여러 약점들을 보완해가면서, 12권 세트 완결을 목표로 출시를 시작했다. 이 작품은 에세이툰의 거품 유행이 다소나마 진정된 지금 다시 볼 수록, 더욱 진가가 드러난다. 원래 김세영 글 허영만 그림의 만화 콤비는 『오!한강』, 『카멜레온의 시』,『타짜』등 워낙 굵직하고 진지한 이야기들을 탄생시킨 것으로 유명한데, 그 작품들의 바탕에 깔려있던 것은 단지 남성적 에너지로 가득한 출세 지향 활극 모험이 아닌 인간사에 대한 통찰이었다. 사람 산다는 것이란 뭐 다 그렇듯이, 적당히 비열하고 적당히 남 속이고, 또 속으면서 하나씩 자신의 길로 가는 것. 그 와중에서 어떤 주인공은 허탈하게 파멸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길을 발견하여 득도하다시피 하기도 한다. 만약 어깨에 힘을 빼고, 굵고 격정적인 드라마의 옷도 좀 벗고, 그냥 편안하게 사람 사는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어떨까. 뭐 너무 이것저것 이야기하기보다, 아예 사람들 간 관계 가운데 가장 강력한 연계고리인 ‘사랑’에 대해서 논해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렇기에 풋풋한 젊은이들의 호기심어린 감상주의로 절여지기 일쑤였던 여타 에세이툰과는 달리, 『사랑해』는 시작부터 결혼과 아이 낳는 것부터 들어간다. 내용으로 치자면, 이 작품은 글 읽기 좋아하는 30대중반 만화스토리 작가(김세영 작가가 자신을 모델로 삼았음직하다)와 20세 여자의 가족 꾸리기가 전부다. 그 중에서도 사랑이라는 하나의 현상에 대한 다양한 감성적 느낌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계속 풀어나간다. 굉장히 리얼리즘적으로 생활의 찌든 때를 묘사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해』는 구체적인 주인공들의 구체적인 생활이 있다. 그렇기에 실제로 살아가는 상황 속에서, 잠시 사랑에 대한 생각을 해볼 수 있도록 하는 묘미가 있다. 작가의 폭넓은 인문학적 소양에서 건져내는 다양한 격언들의 향연조차도, 결코 작품의 주역으로 기능하기 보다는 이들의 그러한 구체적인 삶의 장면을 해석해내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될 뿐이다. 즉 이 작품에서 감상적인 문구들은 감성에 대한 동조를 강요하기 보다는, 독자 역시 자신들의 구체적인 생활을 살아나가는 속에서 그러한 성찰을 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사색의 과정을 만들어낸다.

이 작품이 사색을 자극하는 또 다른 요소는 바로 대화다. 사랑을 다룬다고 해서, 그냥 눈빛만 보고 감성을 공유하고는 세상을 찬양하는 공식을 밟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감상적인 독백보다도, 문답과 설명의 방식으로 자신들이 처한 지금 그 상황 속에서 사랑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기를 즐긴다. 자신들의 현재 사랑의 모습에 자아도취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라는 소통을 통해서 서로의 사고과정에 개입하여 사랑을 만들어나가는 매력을 지니는 것이다. 두 주인공 및 가족의 관계가 보수적 가정 구도의 틀에 들어있기에 지니는 약점도, 대화라는 소통기제가 중요하게 부각되는 덕분에 대체적으로 무해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시각 연출 역시 간략한 그림체를 바탕으로 여유로운 호흡을 부여한다. 능숙한 칸 흐름이 주는 편안한 독서경험은, 다른 만화들에 비해서 다소 글이 많은 편인 이 작품을 읽어나감에 있어서 큰 득이 된다. 주인공들이 이끌어나가는 일반적인 극만화의 형식을 기틀로 삼으면서도 종종 다큐멘터리적 느낌으로 명언의 주인공이나 사색적 도해를 자연스럽게 엮어넣는 점 역시 대단히 매력적이다. 다만 이번 재출간 버전에서 아쉬운 점이라면, 원래 흑백으로 연재된 작품 위에 파스텔톤의 컴퓨터 컬러를 입혔다는 것이다. 주류 셀애니메이션풍의 인터넷만화라면 모를까, 열린 선이 많은 허영만 특유의 그림체와는 그다지 조화를 이루지 않는 화사첨족이다. 더욱이 내용의 여유로움을 시각적 여백에서도 뒷받침해주는 그 조화의 효과가 파괴된다. 물론 “선물하고 싶은 책 1위” 등의 이야기가 보도 자료에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 선물 아이템 시장을 노리고자 트렌드를 따라가려는 시도를 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만화 작품의 매력 자체를 감소시키는 처사는 좋은 선택이라고 보기 힘들다. 사실 그 것 말고도, 애인 선물용으로 하기에는 전 12권 완결 예정이라는 방대한 볼륨 자체가 지나치게 푸짐하다는 단점을 어떻게 극복할지도 추후 과제지만 말이다.

『사랑해』는 단절적이고 마취적인 편안함과 감상주의를 강요하는 것이 아닌, 실제 생활 속의 사색이 주는 즐거움을 대화로 같이 나누자고 제안하는 작품이다. 생각에 싹을 틔워주는 이 작품이 다시 독자들과 만나게 되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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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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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성인 대상의 보편적 오락성 – 『불친절한 헤교씨』[기획회의 060530]

!@#… 굿모닝서울에서 시작해서 엠파스를 거쳐서 결국 파란에서 완결짓고 만, 근성의 연재작. 매체의 독자층으로 볼 때는 사실 맨 처음의 지하철 무가지 쪽이 더 적합했을터인데, 여하튼 포털에서 둥지를 틀 수 밖에 없었던 경우. 좀 더 본격적으로 들어가줬으면 하는 부분들이 참 많았는데, 그래도 완결을 해줬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연재만화에서 작품의 최종분량에 대한 사전합의 등 쌍방 합의 연재 조건 도입의 필요성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더 자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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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성인 대상의 보편적 오락성 – 『불친절한 헤교씨』

김낙호(만화연구가)

오늘날 한국에서 일반 성인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트렌디물이 가장 선호하는 장치들은 무엇일까. 즉 장르 영화나 드라마, 장르 소설, 만화의 인기작들에 응당 들어있기 마련인 어떤 소재들의 경향 말이다. 우선 간단히 떠오르는 것은 세 가지 정도다. 첫째는 ‘조직폭력’. 조폭 장르가 인기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연애가 핵심인 드라마에서마저도 조폭 또는 사실상 조폭을 연상시키는 구도가 꽤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조폭은 상처받은 거친 남성, 비합리적인 위계로 꽉 짜인 사회구도, 비열한 현실감이 넘치는 등장인물들을 등장시키기 좋은 소재로, 어두운 면모를 간직한 매력적인 남자캐릭터를 만들어내 주는 역할을 한다. 둘째는 전문성. 특정한 분야에 대한 전문적 내용이 들어 있어 줘야 이 복잡하고 전문적으로 분업화된 세상 속에서 일종의 극적 현실감을 확보한다. 카지노 딜러의 세계든, 과자 제빵 장인의 세계든, 조선시대 여형사든, 한쪽 세계의 전문성이 가져오는 낯설음이 오히려 몰입을 하기 위한 징검다리로 쓰이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뭐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듯, 멜로 코드. 사람과 사람이 서로 끌려서, 사귀든지 헤어지든지 여하튼 인간적 애정으로 움직여주며 극의 뼈대를 생성해 주는 것이다. 조폭 코드도 전문성 코드도, 결국 이 멜로라는 핵심 뼈대 위에 발라지는 살과도 같다. 여하튼 이러한 장치들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잘 구사하는가에 따라서 대중 오락물로서의 호소력이 결정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하지만 이러한 코드들을 능란하게 균형 잡아가면서 구사함으로써 결국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주로 저녁시간대 TV 드라마였다. TV라는 형식 덕분에 넓은 향유층을 거느릴 수 있으며 연속극이라는 형식 덕분에 충분한 방영시간과 연재가 주는 지연효과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연재만화는 어떨까. 매니아 지향 만화잡지가 아니라, 신문이나 대형 포털 사이트에서 연재되고 있는 만화라면 성인 대중 일반이라는 향유층 확보가 수월하다. 그리고 연재를 통한 관심끌기라면 만화 또한 결코 빠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아주 조폭 장르물로 가거나, 아주 전문분야 정보전달에 쏠리거나, 아주 멜로물로만 가버린 경우들이 대부분이라서 강력한 성공사례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불친절한 헤교씨』(박기홍 글, 김선희 그림 / 작은책방/ 2권 발행중)는 연재만화에서도 그러한 균형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지면이 사라지면 작품도 중단되는 연재 만화의 일반적 사례와는 달리, 이 작품은 처음에는 지하철 무가지 <굿모닝서울>에서 연재를 시작했다가, 포털 사이트 <엠파스>로 자리를 옮겼다가, 그 곳 지면이 사라진 후에는 또 다른 포털 사이트인 <파란>으로 다시 둥지를 옮겨서 연재를 지속해온 특이한 경우다. 그 작품이 이번에는 종이 단행본으로 출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작품의 내용은 대단히 유능하지만 오히려 그 유능함 때문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30세 여자주인공 소헤교가 게임회사에 취직하여 커리어를 추구하는 이야기다. 이 와중에서 사채업자인 그녀의 아버지가 조폭과 금융사기 등으로 또 하나의 이야기축을 이루고, 회사를 둘러싼 사람들의 관계가 여러 층으로 겹겹이 쌓여간다. 반은 조폭물, 반은 게임회사 커리어물로 이루어진 기묘한 균형의 이야기인 셈이다. 그런데 그 속에서 코믹한 티격태격과 진지한 가족사 문제를 오가는 여러 트렌디 멜로의 구도와 에피소드들을 섞어 넣으며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 나간다.

이 세 가지 요소들을 섞으면서, 작품은 꽤 정면돌파를 시도한다. 조폭과 사기가 난무하는 이야기축에서는 비열한 정치적 관계들을 거침없이 묘사하여 극적 재미를 부여하고, 동시에 게임회사 이야기로 나타나는 전문 영역의 분야는 게임업계의 실제 모습들과 여러 현실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확실한 리얼리티를 확보한다. 그러면서도 콩가루 가족의 한 쌓인 관계, 남녀간 애정 구도가 들어있는 (비록 특이하게도 정작 여자주인공은 특별히 연애를 추구하지는 않지만) 멜로의 뼈대로 구심점을 부여한다. 이렇듯 열심히 섞이지만, 이야기는 복잡하지 않게 독자들을 뛰어난 오락성의 바다로 몰입시킨다. 여기에 남성 위주의 가족과 사회현실 속 유능한 여성의 수난이라는 주제 의식이 지니는 동시대성 역시 작품을 더욱 호소력있게 만들어주는 요소다. 특별히 교훈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일정 부분 진취적인 주제의식을 넣어줌으로써 향유자들로 하여금 죄책감 없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해준다는 말이다.

남성 글 작가와 여성 그림 작가라는 조합 역시 작품의 보편적 호소력에 상당 부분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둘이 부부지간이라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강력한 정치적 드라마 부분과, 여성들에게 호소력 강한 섬세한 인간관계와 심경변화라는 부분을 잘 녹여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순정만화 특유의 그림체와 연출방식이 일반 성인 남성 독자들에게 주곤 하는 거리감 또는 거부감을 최소화하는 남성극화에 가까운 직선적 사건 중심의 연출 역시 이러한 조합이 영향을 주었으리라 본다. 물론 거꾸로 보자면 각각 장르의 코어 팬들에게는 외면 받을 이유가 되지만, 적당한 정도의 취향을 지니는 일반 성인들에게는 그 정도가 좋은 균형이다.

어디로 보나,『불친절한 헤교씨』는 잘 만들어진 연재 오락물이며 일반 성인 독자층에게 보편적 호소력을 가지는 좋은 사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작품은 연재 지면이 여러 번 바뀌어 온 것이 독자의 꾸준한 확보에는 감점요소가 되었으며, 흑백 극화의 형식이기에 종이가 아닌 웹 연재로서는 그 호소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바 있다. 이번에 출시된 단행본이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까? 사실 이 작품은 단행본보다는 연재로 한편씩 보며 그 다음을 기다리는 형식에 더 어울린다. 게다가 소장하고 두고두고 곱씹어보는 장르라기보다는, 실시간으로 웃고 울며 즐겨야 재미있는 쪽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행본에는 연재에서 공개한 바 없던 내용들을 더 넣는다고 하니 한번 두고 보며 즐겨볼 일이다. 단행본으로 완결이 나면 연재 당시보다도 더욱 재미있는 작품으로 완성되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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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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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모험담의 학습만화 – 『지구대진화』 [기획회의 060515]

!@#… 오랜만에 만나는, ‘학습’에 정말로 신경을 쓰고 있는 어린이 대상 학습만화. 교육교육 말로는 떠들고 천문학적 돈을 쑤셔넣지만 정작 공부라는 것이 도대체 뭐고 뭘 어떻게 배우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놀랄만큼 무관심한 한국사회에서, 이런 책이 얼마나 부모들의 호응을 얻어낼지는 미지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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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모험담의 학습만화 – 『지구대진화』

김낙호(만화연구가)

개인적으로, 소위 “책을 읽자” 류의 캠페인을 싫어하는 편이다. 다양한 종류의 지식을 습득하고 간접경험을 쌓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자는 것이어야 하는데, 종종 단순히 월 평균 독서량이 어쩌니 하면서 단지 얇게 썰린 죽은 나무토막에 대한 페티시즘적 열정을 발휘하는 선에서 그치곤 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중 특히 지식의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잘 정리된 풍부한 지식이 들어있고 그것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편리한 방식으로 전달된다면 그것이 책이든 인터넷 홈페이지든 비디오든 동네 아저씨의 연설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책이라는 매체 안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만약 제대로 된 풍부한 지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면 그것이 교과서든 소설이든 만화책이든 모양새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실 교양/학습만화라는 장르는 이러한 발상에서 시작한다. 분명히 만화는 표현력과 전달력에 있어서 큰 장점을 지니고 있고, 그러한 능력을 그냥 썩혀둔다면 정말 아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정작, 최근 몇 년 사이 여러 베스트셀러의 등장에 힘입어 큰 호황을 누리고 있는 교양학습만화의 경우 이러한 근본적 취지를 사정없이 배반하는 경우들이 다수였다. 말은 교양학습만화를 표방했지만, 실상은 연성화된 가벼운 지식들을 양념으로 살짝 뿌린 아동 취향 모험 오락만화인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장르 오락 만화라는 사실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왕 교양과 학습을 위해서 교양학습만화를 선택했다면 완성도 높은 지식을 축적하도록 도움이 될 만한 작품을 골라잡는 것이 원래의 취지에 맞을 것이라는 의미다. 만약 어떤 분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싶다면 처음부터 교양지식 입문서를 읽는 것이 효과적이지, 그 분야를 소재로 삼았을 뿐인 오락 작품으로 만족하는 것은 좀 곤란하지 않은가. 아무리 시대의 대세가 속칭 ‘에듀테인먼트’라고 해도, 오락과 교육의 경계가 완전히 없어져버렸다거나 하는 과장은 금물이다.

『지구대진화』(NHK 기획, 고바야시 타츠요시 그림 / 삼성출판사, 전6권)은 정통파 ‘학습’만화다. 내용은 NHK의 유명한 동명 다큐멘터리 시리즈의 내용을 만화로 이식한 것으로, 문자 그대로 지구의 탄생부터 현재까지의 여정을 그려내고 있다. 내용 전개방식은 실제 NHK 제작자들이, 방송국에 견학 나온 두 중학생에게 다큐의 내용을 순서대로 소개해주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년소녀 주인공들을 모험길로 보내고 억지로 상황을 체험하게 만들어서 지식을 끼워 맞추는 식이 아닌, 순수하게 ‘강의식’ 학습만화인 셈이다. 등장인물들 사이의 막간 에피소드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평온하게 연속적으로 흘러가며, 부차적으로 취급되고 있을 뿐이다. 한 개 에피소드에서 배운 지식을 써먹으며 소동을 벌이는 전형적인 학습만화 구도를 보기 좋게 배반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그냥 설명문 같은 딱딱한 내용이라서, 이야기로서의 재미가 없다는 말인가? 놀랍게도,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은 분명히 재미있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성장 스토리다. 단지 하필이면 그것이 등장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구’가 주인공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갖은 역경을 이겨내고 결국 성장과 성장을 하여 오늘날의 이곳까지 도달한 지구라는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모험담 말이다. 실로 장쾌한 스케일의 영웅전설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지구와 그 지구에 달라붙어있는 생명이 펼치는 생명의 서사시는 몇몇 미미한 인간들의 성장담과는 전혀 다른 규모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중고등학교의 지구과학이나 생물학 시간에 배우는 파편적인 자연 이야기가 아니라, 46억년의 역사를 하나의 이야기로서 순차적으로, 상당히 드라마틱하게 서술해 나아간다. ‘지식’이 바로 모험담이 되며, 그 결과 방대한 양의 귀중한 자연과학 지식을 문자 그대로 재미있게 학습시켜준다.

이러한 스케일 큰 이야기를 표현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연출방식은 과연 이름난 다큐멘터리를 바탕으로 하는 작품답게, 다큐와 동일한 순서로 다큐의 핵심 내용들을 별다른 각색 없이 그대로 전달해준다. 지구의 46억년 역사를 전집도 아닌 6권짜리 시리즈에 압축한다는 것은 일견 빡빡하게 들릴 수 있지만, 핵심을 짚는 절묘한 비유로 표현한다(지구의 역사를 하루의 시간에 비유하는 등). 또한 시각적으로도 명쾌한 도해와 구체적인 CG를 사용하는데, 휘황찬란한 원색 컬러로 포장하기보다 오히려 만화로서 부담 없이 읽기 편한 흑백으로 표현하는 배려를 보여주고 있다. 분명히 『지구대진화』은 훌륭한 교양 지식을 잘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필독서까지는 아니라도, 추천 교양서로서 오르내릴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하지만 이러한 식의 시도가 독자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결정적인 조건이 필요하다. 바로, 독자층을 제대로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주류 교양학습만화의 주요 소비층은 하필이면 초등학생인데, 초등학생 대상으로는 지식수준이 너무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래의 독자층이 되어주어야 할 중학생 이상의 경우는 입시과정에서 벗어난 지식에 대해서 스스로 재미를 느끼고 달려들기가 결코 쉽지 않다 (전적으로 입시 제도에 맞춰져 있는 정규 교육과정 속에서, 지구과학은 학생들에게 유감스럽게도 찬밥신세 아니던가). 깨달음을 위한 지식이 아닌 입시 성적을 위한 지식으로 움직이는 패러다임 속에서, 대자연이 움직여온 이치 같은 큼지막한 이야기는 관심의 대상에 들어오기 어렵다는 말이다. 나아가 성인들은 학습만화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동용으로 치부하며 거리를 두기 십상이다.

설명 방식에 있어서 정공법 그 자체인 이 작품은, 유감스럽게도 독자 소구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단점을 지니고 있다. 이 간극을 채울 수 있는 것은 결국 작품을 포장하는 마케팅이다. 진지한 교양지식을 얻게 해주는 본격 학습만화라는 점을 강조하는 작업에 실패하면, 그냥 ‘미소녀도 안 나오고 화려한 원색의 모험 액션도 없는 심심한 아동만화’ 정도로 취급받으며 서가 한쪽에서 먼지만 쌓이는 운명에 처할 수도 있다. 부디 여러 노력들이 지속되어, 이런 고품격 지식이 가득 담긴 만화가 정당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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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정체성의 인위적 구축에 관하여 -『유리의 도시』[기획회의 060501]

!@#… 정작 출판을 하는 사람들이 만화의 표현양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아무리 훌륭한 작품을 들고 오더라도 상당부분 망가질 수 밖에. 그리고 한국에서 단지 멋있게 보이려고 그래픽노블이라는 명칭 쓰는 것, 무척 짜증난다. 뭐 그것을 무려 그래픽 소설이니, 그림소설이니 직역해서 쓰면서 정작 그게 만화를 지칭한다는 것 자체도 제대로 모르는 글쟁이들을 보면 더 짜증나지만 (만화의 지위니 뭐니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도대체 무엇에 대해서 글을 쓰고 있는지조차 모르면서 글을 뱉어낸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라고나). 하지만 여전히, 작품 자체는 강추하니까 리뷰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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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의 인위적 구축에 관하여 -『유리의 도시』

김낙호(만화연구가)

소설 원작 『유리의 도시』는 폴 오스터의 대표작 『뉴욕3부작』의 첫 작품이고, 잘 알려져 있듯 이 작가는 현대문학의 대표적 문인 가운데 하나다. 사실 줄거리는 간단하게 시작한다. 가명으로 탐정소설을 쓰는 퀸이라는 주인공이,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고는 한 여성 고객에게 탐정일을 의뢰받아서 수상한 노인 박사를 미행하다가 점점 더 큰 음모의 소용돌이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형적인 느와르풍 펄프 탐정소설의 외관 속에서 중첩된 정체성, 언어적 기표와 기의의 혼란, 그리고 결국 분열증적 도피에 대한 중층적인 이야기들이 장르적이면서도 동시에 해체적으로 펼쳐진다.

최근 한국에서 만화판 『유리의 도시』(오스터 글/ 마주첼리, 카라식 그림/ 황보석 역/ 열린책들)가 출시되었다. 한국에 폴 오스터의 책들을 소개해온 출판사가, 원래 오스터의 책들을 번역해온 번역가를 거쳐서 일종의 소품으로 들여온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이 94년에 만화로 만들어진 것은 작가의 친구이자,『쥐』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골수 뉴요커 아트 슈피겔만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슈피겔만은 부드러움과 비정한 도시가 공존하는 탁월한 느와르 그림체를 선보인바 있는 마주첼리를 끌어들였으며, 원작이 지니는 관념적 세계관과 기이한 연출방식을 만화 특유의 방식으로 소화해낼 인재로 자신이 창간한 대안만화잡지 <로>의 편집인 출신인 카라식을 한 팀으로 엮었다. 결과는? 마치 『유리의 도시』는 애초부터 당연히 만화로 그려졌어야 했을 작품이라는 인상을 풍긴다. 만화판 『유리의 도시』는 만화적 표현력의 극단에서 폴 오스터가 펼쳐낸 복합적 세계관을 완전하면서도 독자적으로 소화해내고 있다.

가장 돋보이는 것 가운데 하나는 도시적 경직성을 나타내는 연출의 형식미다. 세로 페이지를 세로의 9개 칸으로 균등하게 분할하는 칸 연출은 뉴욕의 바둑판식 도로의 이미지이자 고층빌딩의 창문, 그리고 나아가 감옥문을 연상시키는 경직성을 자연스럽게 전달한다. 하지만 그 속에 사는 인간군상은 도시 자체와는 달리 둥그런 필체로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생을 영위한다. 하지만 그 정상성 가운데 때로는 선이 거칠게 갈라지면서 속에 담아둔 광기와 혼란의 내면이 슬쩍 엿보이는 순간이 다가오기도 한다. 또한 언어적 기호와 도상 기호의 자유로운 혼합 역시 만화적 연출의 힘을 과시한다. 이 작품에서 궁극의 인위적 구조이며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기제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도시’, 다른 하나는 바로 문화적/사회적 코드로서의 ‘언어’다. 언어는 세계의 자연스러운 모습들을 인위적 기호로 치환하며, 그 속에서 때로는 갑갑한 현기증을 일으키도록 하는 주범인 셈이다. 그런데 도상 기호의 자유로운 흐름, 언어(문자)와 그림의 혼합을 가장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매체가 만화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자연언어를 발견하려는 실험을 당한 후유증으로 보통의 언어구조와 다른 사고방식을 지니게 된 극중 인물 피터 스틸맨 (아들)이 주인공 퀸에게 말을 거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하나의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로 자유롭게 치환되며, 그 전체를 아우르는 것은 스틸맨의 입에 완전히 붙어서 나오고 있는 말풍선 속의 메마르고 모호한 말들이다.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기표와 기의의 분리관계를 이야기하듯, 말과 그림은 서로와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하는 명 시퀀스다. 혹은 존 밀턴의 실낙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읽어나가는 장면 역시 탁월한 사례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아담의 행위는 그대로 만화의 칸 속에서 문자가 되어 바닥에 그림자로 달라붙고, 세상 사물의 자연스러운 모습과 문자라는 언어기호의 인위성이 그로테스크한 대비를 이룬다. 작품의 세계관을 그대로 옮겨놓은 이러한 탁월한 연출효과를 그 어떤 다른 매체에서 흉내낼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이러한 요소들은 반대로 생각하면 만화 특유의 자연스러운 독서를 방해하는 단점을 초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줄거리 요약만 하는 명작문학 학습만화가 아니라 또 다른 버전의 ‘폴 오스터 소설’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독자들이기를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게다가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형식적 미학을 추구하기 위해서 줄거리 진행의 재미를 놓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원래 원작 자체는 팜므파탈, 수상한 과거를 가진 용의자, 미궁으로 빠져드는 사건, 그 속에서 모호해지는 정체성 등 장르 탐정소설의 얼개는 줄거리적 재미를 충분히 보장한다. 혹은 줄거리가 해체적으로 변모하는 말미까지 전부 포괄하더라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도시 버전, 혹은 정신분열증 증상 전개의 비유적 표현이라는 틀에서도 새롭게 읽어낼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해석의 방식을 가로막지 않는 포괄적 그림체의 열린 연출은 이 작품에 작가팀이 들였을 세심한 고민을 엿보게 한다. 이렇듯 미학과 재미 두 요소들을 종합해서 판단을 내리자면, 만화판 『유리의 도시』는 명작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걸작의 경지를 기웃거리는 매우 우수한 작품으로 별 무리 없이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우수성과는 별개로, 이번에 출시된 한국어판은 편집 제작상의 몇가지 큰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만화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인하여 작가들의 세심한 연출이 상당부분 뭉개지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 표지의 일러스트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미국에서 원래 출시된 판본은 주인공 퀸의 정상적 외관부터 시작하여 완전히 갈라진 선으로 그려진 내면의 혼란의 묘사까지의 중간과정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한국어판은 마지막 혼란의 그림을 생략하고 중간과정까지만 잘라버리는 실수를 범했다. 더욱 큰 문제는 바로 글꼴의 사용이다. 이 작품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 그렇기 때문에 원어 판본은 경직된 분위기의 곧은 글꼴, 제3자적 시선의 타자기 글꼴,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담아내는 부드러운 글꼴 등을 포함, 다양한 글꼴들이 효과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세심한 연출의도는 한국어판에서 일괄적으로 가벼운 글꼴 하나로 통일해버리는 통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보도 자료에서 만화라는 용어의 사용을 의도적으로 꺼리며 ‘그래픽 노블’이라는 어휘로 한껏 멋을 부려보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렇다면 그에 합당한 세심한 미학적 관심을 먼저 발휘해 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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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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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적 생활 – 『크래커』[기획회의 060415]

!@#… 전작 ‘남자친9’ 보다 표현은 세련되어지고, 신선함 측면에서는 좀 심심해졌다. 안정기에 들어선 작가가 되어버리는 건가? 그게 좋은 건지 나쁜건지는 뭐라 하기 힘들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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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적 생활 – 『크래커』

김낙호(만화연구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성공적인 이야기꾼이 되는 것이란 쉽지 않다. 그런데 그 중 가장 커다란 난점 중 하나는 바로 독자들이 이야기를 기억하는 방식이 이중적 구조로 되어있다는 점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니, 우리가 이야기를 ‘경험’하는 방식은 큼지막하고 연속된 서사의 흐름을 따르지만 ‘기억’은 분절적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이야기가 서사적 흐름으로 경험된다는 말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기억이 에피소드라는 말은 무엇일까? 전체적이고 커다란 줄거리의 흐름을 기억하기보다, 강렬한 순간들, 뚜렷한 인상이 남는 어떤 상황과 그 속에 처해진 인간들의 당장의 대처 패턴 위주로 기억이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에피소드들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교량 역할로서 비로소 하나의 줄거리와 서사적 흐름이 떠오른다. 특히 우리들의 진짜 삶 자체부터가 특별한 세계 속 특별한 사건의 경험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무언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더욱 더 그렇다. 따라서 만약 일상적인 상황을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한다면, 당연히 굵은 서사적 흐름보다는 일관된 분위기 속에서 반복적 구도의 에피소드 위주로 제시해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굵은 서사적 사건을 만들만한 소재가 없어서라기보다, 그쪽이 훨씬 더 말 그대로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크래커』(토마 / 애니북스)는 문자 그대로 그냥 같이 살고 있을 뿐인 두 동거 남녀의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다. 서로 연인도 아니면서 단지 방세를 줄이고자 같이 사는 남녀라는 설정이 일상적이라기보다, 여하튼 그렇게 살고 있는 두 사람이 겪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공감시키기 위해서 극단적일 정도의 에피소드 중심 이야기를 구사하고 있다. 짧은 몇 페이지 속에 벌어지는 각자의 성격을 드러내는 사소한 다툼, 작은 오해, 또는 단순한 잡상이 파스텔톤의 간결한 낙서체 그림으로 펼쳐진다. 하지만 이 작품은 소위 에세이툰이라고 불리우는 감상에 그림을 삽입하는 것에 가까운 장르의 만화류들과는 다르게, 실제로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교훈이나 단상을 전달해주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 짤막한 에피소드들의 연속 속에서 꾸준히 인간사가 진행된다. 남자는 연애를 하게 되고, 여자는 그것을 옆에서 바라보며 여러 상황들을 벌이고, 누군가는 누군가에게 차이기도 한다. 밴드 매니저가 직업인 남자는 잘 못나가지만 자기가 지지하는 음악가들을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프리랜서 디자이너인 여자는 조직 없이 스스로를 관리해야하는 압박과 자유를 동시에 느끼며 직업생활을 꾸려나가야 한다. 특별히 처절하다거나 극사실적으로 먹고 사는 이야기를 해서 현실을 환기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일상’으로 독자들에게 경험시켜준다는 것이다.

『크래커』에서 다루는 남녀간의 관계 역시 이런 맥락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이 둘은 알고 보니 서로를 갈망하지만 겉으로는 쿨하게 서로를 외면하는 주말 드라마 같은 방식과 상당한 거리가 있고, 문자 그대로 그냥 살다가 이런 저런 서로에 대한 모습을 관찰하고 또 관망하는 사이다. 대변을 보고 깜빡 잊고 물을 안내린 적이 있는 여자와 연애를 하지는 않으리라 다짐하는 남자의 결심이 이런 사이를 잘 나타내준다. 작가는 이전 작품인 『남자친9이야기』에서도 이미 이런 적당한 거리감을 지닌 쿨한 인간관계 설정을 선보인 바 있지만, 헤어진 남자친구라는 나름대로 끈적한 설정이 깔려있던 바 있다. 하지만 『크래커』에서는 그 정도의 설정마저도 부여하지 않고, 정말 문자 그대로 서로를 관망하는 인간관계 자체에 전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훨씬 더 높은 완성도의 트렌디함, 쿨함,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드라마틱함으로 다가온다. 확실하게 작가는 한층 더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성에 한층 능숙하게 다가선 셈이다.

일상의 에피소드로 서사적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바로 세밀함이다. 기이한 사건으로 시선을 휘어잡는 방식이 아닌 이상, 독자들의 관심을 붙들어 맨다는 것은 바로 하나의 주어진 상황을 세밀하게 파고 들어가서 복잡 미묘한 관계들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끄집어내어 공감으로 무릎을 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하나의 에피소드가 ‘리얼함’을 획득하여 수많은 생각의 가지들이 뻗어져 나오고, 전체 이야기를 구성하는 틀이 완성된다. 『크래커』의 경우 연인은 아니지만 연인이 될 수도 있는 현실적 조건에 처해있는 두 남녀가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에 있어서 그런 세밀함이 상당한 수준이다. 예를 들어 한 에피소드에서, 여자는 남자가 돈 안되는 밴드 매니저 일을 하고 있기에 그저 그렇게 수주를 받고 있는 프리랜서인 자신과 비슷하게 곤궁한 처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보고 있자니까 원하는 CD들을 대량으로 잘만 사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내리는 결론은 하나다: “있는 집 자식들이란…”. 이런 종류의 것들이 바로 실제로 우리들이 현실 속에서 종종 구사하는 우리 주위 세상에 대한 세밀한 관찰 아니던가.

물론 에피소드 단위의 감수성에 기반한 접근 방식이 모든 면에서 효과적인 것은 아니다. 약간만 독자들과의 공감대 형성에 실패해도 등장 인물간 관계에 대한 피상적 묘사에 머무르기 쉬우며, 쿨함을 추구하던 의도가 경박함으로 오도될 수 있다. 즉 독자들의 상황적 트렌드를 강하게 탄다는 것이다. 물론 그 트렌디함 마저도 넘어설 수 있는 강력한 근본적인 매력을 겸비할 수 있으면 가장 좋다. 하지만 『크래커』의 경우 에피소드들이 축적되어 만들어내는 전체 이야기의 짜임새가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서 긴밀하게 묶여지고 있기보다는, 한회씩 순간순간 펼쳐보게 만드는 연재물로서의 재미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크래커』는 재미있다. 공감을 보내는 독자층을 충분히 끌어들일 힘도 있다. 에피소드 묘사의 능숙함도 즐겁다. 온라인에서 한 회씩 연재로 보는 것의 즐거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책도 좋은 품질로 제작되어 출판되었다. 작품 분위기와 어울리는 팝 성향 독립밴드들의 노래들을 모아 놓은 음반도 같이 출시되어 분위기를 돋아준다 (다만, ‘최초’의 카툰 사운드트랙이니 하는 명백한 거짓말을 홍보자료에 늘어놓는 과유불급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이 정도면 마음 편하게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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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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