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비 계간지 <창비어린이> 04년 겨울호. 10월 초에 썼으나 계간인 관계로 얼마전에 출간. 개인적인 착오에 의해서 원고마감보다 무려 한달(!)여를 일찍 넘겨주었던 희대의 사건의 주인공.
!@#… 도판은 생략. 편집하기 귀찮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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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이웃나라, 미국을 동경하다
『먼나라 이웃나라-미국편』 이원복 김영사 2004
김낙호 capcold @ capcold.net
한국이라는 곳에서 세계를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단일민족 같은 황당한 신화를 정말로 진지하게 숭배하고 있는 자기완결적인 사회이면서도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천연자원이 없고 석유 한방울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역설하면서 그래서 우리는 세계를 상대해야 한다는 논지를 굳건히 강조한다. 우리는 하나고 남들은 우리와 전혀 다르지만, 여하튼 우리는 그들을 잘 알아야한다는 논리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세계를 나와 내가 아닌 무엇으로 나눈 후, 후자에게 엉뚱하게도 일방적인 잣대를 들이댄다. 나보다 잘 산다(미국이나 서유럽이라든지), 그리고 나보다 못 산다(동남아, 아프리카 등)라는 잣대 말이다. 이렇듯 한국사회의 큰 약점으로 널리 지적받고 있는 ‘세계를 바라보는 천박한 시선’은 어떤 이웃나라라도 먼나라로 만들고야 만다.
『먼나라 이웃나라』라는 히트 만화 씨리즈가 있다. 이 분야의 절대적인 베스트+스테디쎌러로 자리잡은 이 씨리즈는, 벌써 20여년 동안 한국인들에게 여러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교육시켜왔다. 부담스럽지 않은 그림체와 편리한 화법, 적절한 유머와 풍부한 정보를 섞어가면서 이끌어나가는 작가의 만화 솜씨는 확실히 탁월하다. 게다가 한참 ‘세계를 알자’ 붐이 불고 본격화되었던 80, 90년대의 시대적 배경까지 겹치면서, 집집마다 당연히 갖추어놓은 교양도서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한국 만화에서 ‘이원복’이라는 이름과 ‘먼나라 이웃나라’라는 브랜드가 가지는 파워의 한계는 끝이 없는 듯하다. 아무리 완성도도 정보성도 턱없이 떨어지는 『미국을 알면 영어가 보인다』(이원복, 주니어김영사 2002) 같은 급조된 자매품이라 할지라도 이원복 브랜드가 입혀지자 히트한다. 『먼나라 이웃나라』의 경우 원래의 6부작 외에 90년대에 ‘일본편’과 ‘한국편’이 추가되어서 새로운 패키지로 다시금 높은 판매고를 기록하더니만, 결국 올해 이 씨리즈의 진정한 완결점을 표방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미국편’으로 말이다.
사실 『먼나라 이웃나라』 씨리즈에서 미국편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한국의 입장에서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가장 중요한 외국은 미국이니까. 작가는 그 중요성을 높게 평가하는지, 심지어 영광스러운 대단원의 막을 미국에게 할애했다. 그리고 자세히 다루어주기 위해서 무려 세 권으로 나누기까지 했다. 1권 ‘미국, 미국인’, 2권 ‘미국의 역사’, 3권 ‘미국의 대통령들’(근간)이 바로 그것이다. 필자가 받은 인상은 딱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다. ‘여전하다, 아니 좀더 본격적이다.’ 이 씨리즈의 장점도 단점도, 미국이라는 지극히 가깝고도 민감한 소재와 만나면서 더더욱 뚜렷해졌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좋은 말만 쓰기가 힘들어져버렸다.
미국사회의 모습, 생활 속의 상식을 알기 쉽게 풀어주는 것에 있어서는 ‘미국편’은 충분히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사회복지에 대한 유럽인과 미국인의 차이를 ‘공공’과 ‘나’에 대한 인식 차이로 설명하는 대목은, 단지 두 칸만으로도 사회과학 논문 한 편 이상의 명료함을 발휘하고 있다. 나아가 미국 생활에서 신용 기록 누적 문제, 교포들의 세대간 갈등, 유대인들이 미국에서 차지하는 위치 등, 미국에 대해서 어렴풋이는 알고는 있었지만 자세한 내막은 몰랐던 여러 상식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단편적인 소재가 아닌 전체적 주제를 살펴보자면 ‘미국편’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먼나라 이웃나라』는 스토리를 주욱 따라가는 극만화가 아니라, 소위 ‘학습만화’의 범주에 들어가는 작품이다. 따라서 결국 어떤 정보를 어떤 목적으로 제시하는지가 바로 이 작품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경우 그것은 ‘우리가 이 외국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점이다. 만약 이 작품이 단순히 외국문물을 소개하는 선에서 그쳤다면 솔직히 흔한 관광 가이드 중 하나로 그쳤겠지만, 작가는 적극적으로 이야기에 개입해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얻어야 할 함의를 끄집어내는 것에 결코 게으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을 새로 만들어보자. 이 작품이 주장하는,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가?
실마리는 구성방식 속에 있다. 사실 ‘미국편’ 역시 이전의 씨리즈와 마찬가지의 구성방식을 취하고 있다. 먼저 미국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나 편견을 제시하면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후, 미국이라는 나라가 구성되어 있는 원칙, 사회적 제도 등 굵직한 부분들을 다루어준다. 그리고는 미국 문화의 특징이나 미국 생활의 신기한 점들을 가볍게 일화 중심으로 소개하면서 긴장을 풀어준다. 그러고는 그 모든 문화와 사회가 만들어진 배경으로서 미국의 역사를 주욱 훑어준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처음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사실상 전체 결론이며, 작품을 통틀어서 결국 말하고 싶은 바 – 즉 한국이 이 나라로부터 배워야 할 점 – 를 웅변해주는 서술방식인 것이다. ‘미국편’의 경우, 그 메씨지는 목차 페이지에서부터 더할 나위 없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군중에게 권력을 주지 마라!”
이 작품 초반에서 인용되는 프랑스 역사학자의 발언, “미국은 무한한 자유를 가진 드센 주민, 국민들로부터 나라의 질서를 되찾았다”는 말은 작가의 희망을 그대로 대변해주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1권의 전반부에서 작가는 반복적으로 국민이 권력을 얻는 것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강조하기 바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부정적인 모습이라는 것은, 아주 노골적으로 현재의 한국 – 더 정확히는, 노무현 정부 이후 한국사회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과잉해석이라고? ‘일반대중이 숫자로 밀어붙이는’ 설명과 함께 들어간 그림 속의 폭도들이 몽둥이나 돌멩이를 들고 있지 않고 하필이면 촛불을 들고 있는 것이 과연 우연이란 말인가. 잭슨(Andrew Jackson) 대통령의 일화를 들면서 코드 인사니, 운동권이니, ‘잭사모’니 하는 용어를 동원하는 것이라든지, 애덤스(John Adams) 대통령이 친불 언론에 내린 탄압에 조중동이라는 말장난을 삽입한 것 등은 차라리 애교스럽다. 그 결과, 미국은 포퓰리즘과 민중선동으로 흔들리지 않는, 혁명이 없는 간접선거의 나라라서 참으로 바람직하다는 주장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물론 미국의 대통령 간접투표제를 이야기하면서 ‘더 많은 득표수를 얻고도 떨어진’ 후보의 일화를 넣으면서 약점 역시 대등하게 다루어주는 듯한 인상을 풍기려고 노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제도적·기술적인 차원에서의 허점으로 간주될 뿐이지 근본적인 씨스템의 우월성, 즉 국민이 직접 주인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예찬은 조금도 굽히지 않는다. 한국이라는 현실과 연결지어서 보자면, 가진 것 하나 없이 국민의 지지 하나만 가지고 결국 대통령이 되어버린 노무현 정부,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한국사회의 기류가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이다. 이 작품의 나머지 부분들은 단지 이 메씨지를 강조하거나, 아니면 너무 팍팍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양념이고 잡학 상식들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을 바라보는 전체적인 시선은 어떠한가. “200만이 넘는 한국동포가 살고 있는 미국은, 미워할 수도 없고 미워할 이유도 없는 우리의 일부분이다”라는 1권 마지막 멘트가 지닌 기이한 논지는 의도가 어떠했든지간에 충분히 사대주의적인 발상으로 읽힐 수 있다. 사실 애초에 『먼나라 이웃나라』라는 씨리즈가 다루는 나라의 선정에서 볼 수 있듯이, 세계의 전체적인 모습을 바로 알자는 것보다는 소위 잘 사는 선진국의 문물을 소개한다는 식의 취지에 가깝다. 하지만 이러한 지점은 이 씨리즈에 대한 대부분의 평가에서 지적당해온 바이기 때문에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다.
즉 ‘미국편’을 요약하자면, 미국의 문물을 간단히 소개하면서 (노무현 정부로 상징되는) 직접민주주의적인 행태를 비판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이원복이라는 작가의 우파적인 정치적 성향이나 어설픈 사해동포주의를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비록 논지나 근거도 약하고, 실제의 민주적인 사회발전에 있어서는 득보다 실이 많은 발상이지만 적어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생각이기는 하니까. 마치 필자가 오랜 민주노동당원으로서, 노무현 정부를 지지하지는 않지만 인정은 하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과연 일부의 평가마냥 ‘극우’인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의 모든 것에 딴지를 걸며 반대하는 자칭 기득권 세력의 일부로 보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려고 노력하는 모습 정도는 보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가 극우라면, 이 사회의 진짜 오른쪽에 있는 수많은 수구 꼴통들은 도대체 언어로 묘사조차 불가능할 터이니 말이다. 게다가 미국에 대한 여전히 막연한 동경 역시, 용미파를 자처하다가 미국 한번 순방 갔다 오고는 갑자기 미국 열성팬이 되어버린 모 정치인에 비하면 양반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주로 보는 책인데 책임감 없게 정치적 메시지를 넣다니”라는 순진무구한 비난을 할 생각도 없다. 상대가 어른이든 어린이든,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주장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야 할 이유 따위는 없다. 그 방법이 강압적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아가, 애초에 자신의 작품, 즉 자신의 발언을 하면서 과연 정치적 입장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말은 굳이 꺼낼 필요도 없지 않은가. 즉 무슨 국정교과서도 아닌 일반 학습만화에서 엄청난 윤리적 결백성이나 불편부당성을 요구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아니, 국정교과서조차도 당대 정부의 입김으로 가득 찬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뭐 할말 다 한 셈이다.
아니, 그러니까 책의 내용은 문제가 있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궤변을 늘어놓자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 책의 문제적인 부분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비판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정보로서 가치있는 부분은 유용하게 받아들이되, 그 기저에 깔린 논지나 메씨지에 대해서는 독자 자신, 그리고 그들에게 책을 권해준 사람들도 같이 제대로 생각하면서 읽을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여하튼 ‘미국편’은 반민중적인 가치를 중시하며 미국식 자본주의를 이 세상의 현실적인 모델로서 추종할 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것도 만화라는 아주 효과적인 화법을 능숙하게 구사하면서 해내고 있다. 그것을 옳다고 생각하면서 맞장구치든, 틀리다고 생각하면서 반발하든(개인적으로는 이쪽이 더 건전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것은 최종적으로는 독자 자신의 선택이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모르고 읽는 것, 또는 읽도록 권장해주는 것은 위험하다. 그만큼 민감, 혹은 잠재적으로 위험한 전제들이 작품 곳곳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사실 아예 작가에게 좀 더 정치적으로 올바른 시선을 보여달라고 주장하는 것도 좋겠지만,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득하더라도 지난 20여년간의 성향이 순식간에 근본적으로 바뀌기를 기대하기란 힘들다. 만약 다른 작가가 유사한 길을 걷겠다고 한다면 이원복 작가의 장점인 대중을 흡수하는 능력을 배우되, 정치적인 공정성이나 사회적 메시지의 합리성 등에 대해서 더욱 진지하게 고민하라고 조언을 해줄 것이다. 아니, 실제로 <십자군 이야기> 라든지, <만화로 보는 다시 읽는 한국현대사>, <전쟁중독> 등 재미와 유익함을 겸비한 대안적 학습정보만화의 물결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원복이라는 브랜드에만 집착하지 않고 찬찬히 찾아보면 그 물결은 어느 틈에 여러분의 발밑에 이미 도착해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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