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극, 장르 오락 상상력 – <풍장의 시대> [기획회의 050705]

!@#… 현업 완전 복귀는 아직 반나절쯤 남았지만, 여행가기 전에 써놓고 간 것들은 창고방출. 우선, 지난 호 기획회의 원고.

!@#… 개인적으로는 이 만화 읽어라/읽지마라고 품평을 해주는 것 보다는, 경향 <펀>의 <만화풍속사>에서 격주로 연재했던 것 같은 컨셉 – 즉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 통찰을 하기 위해서 다양한 만화작품을 자연스럽게 소재로 끌어들이는 방식을 더 좋아한다. 그런데 그런 글을 쓰고 있는 지면은 현재 <인물과 사상> 정도 밖에 안 남았는데, 여기는 또 항상 너무 헤비하게 힘들어가서 탈이다. 뭔가 좀 더 가볍게 통통튀는 (고료 나오는) 연재코너가 필요하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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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극의 장르 오락적 상상력의 해답 – <풍장의 시대>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 황동규 詩 <풍장> 중

예술적 상상력의 특효약이자 대중오락문화의 보고는 바로, 오래된 가치와 새로 들어온 다른  가치들이 어지럽게 충돌하는 시대에 대한 기억이다. 오래된 가치를 지키려는 자와,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가치가 필요하다며 변혁을 부르짖는 자.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문화가 충돌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부딪히며, 오해와 화해의 다양한 드라마들이 저절로 탄생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속에서 정반합 작용에 의하여 잉태되는 무언가 또다시 완전히 새로운 가치를 통하여 시대의 희망을 볼 수 있는 단서까지. 이야기 예술을 만들어냄에 있어서 이것보다 더 확실한 공식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면에서 보자면 한국이라는 곳의 역사, 특히 근현대사는 완전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민주화 시민세력과 독재세력, 인권을 부르짖는 노동자와 개발 자본가의 충돌, 이념을 빙자한 무의미한 동족상잔인 한국전쟁, 일제의 압제와 한국의 독립의지 등, 숱하게 사용되고 또 사용되어온 배경 소재들이다.

그런데 항상 의외로 별로 많이 활용되지 못한, 또는 그다지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시대가 바로 그 직전에 있었다. 그 시대가 바로 ‘개화기’인데, 전통문화와 서구적인 가치, 신분제도의 극복을 위시한 내부적 근대화를 꾀하는 내부와, 외부로부터의 근대화를 통해서 식민지배의 야욕을 품는 외세의 가치충돌이 부글거리던 역사의 단편이다. 본격적인 전쟁 또는 식민지화 등으로 파국을 맞이하기 이전, 복합적인 긴장관계가 팽팽하던 시절 말이다. 실제로 이웃나라 일본만 하더라도, 이러한 개화기 시절의 긴장이 가장 인기 있는 소재 가운데 하나다. 메이지 유신 직전을 무대로 하여 신센구미(신선조)니, 유신지사니, 사카모토 료마니 하는 키워드들이 무척이나 친숙하다. 그에 비해서 사실 한국에서는 이 시기가 아쉽게도 그렇게 활발하게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아마 실제 역사상의 개화기가, 일제에 의한 식민 지배라는 최악의 비극으로 끝났기 때문에 생기는 엄숙한 조심성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재의 매력이 떨어지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결말을 알기에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간 사람들의 모험을 더욱 강렬하게 그려낼 수도 있지 않는가. 그것을 증명해주는 최근 작품이 바로 <풍장의 시대(가리 글/이성규 그림, 대원CI>다. 이 작품은 시골의 양반 소년 목이가 십이지 수호신의 보호를 받으며 상경,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로 이어지는 개화기의 여러 사건들을 겪게 되는 내용이다. 현재 격주간 <영챔프>에서 연재중이며 아직 단행본으로 2권까지 밖에 진도가 나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녹록치 않은 구도들이 여럿 드러나고 있다. 동양과 서양, 기계와 자연, 그리고 일본의 영적 가치와 한국의 영적 가치를 주요 축으로 하여 이미 독자들을 완전히 끌어들이고 있다.

소재의 힘이라는 것은 강력하다. 시골 양반 자제인 주인공이, 시천의 하늘을 기억하는 선택받은 영혼이며 십이지신의 수호를 받는다는 설정은 그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쓸만한 소년 모험만화의 기본 구도를 품고 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혼과 백의 균형이 깨져가는 개화기를 살아나가며 이상한 일들을 극복해내야 한다면, 흔한 모험물과는 다른 차원의 재미가 저절로 더해지는 것이다. 십이지신이라는 존재들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다양한 미소년 미소녀 캐릭터들이 초능력을 부리며 주인공을 수호해주는 것으로 설정하기만 해도 소년만화 장르의 기본공식을 충족시켜준다. 하지만 그들이 영적 격변기를 살아나가야 하는 입장이고, 돼지머리와 술과 담배에 욕심을 내는 지극히 한국 무속적인 속성을 지닌 정감어린 신들이라면 이야기는 새로운 독창성을 부여받는다. 품격과 재미를 겸비한 대중오락물을 위한 모범적인 접근인 셈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그렇게 선택한 소재들을 제대로 작품으로서 요리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훌륭한 설정과 재앙스러운 전개로 독자들을 경악시킨 작품이 어디 한 두 가지겠는가. 다행히도, <풍장의 시대>의 작가 콤비는 무리하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요령을 터득하고 있는 듯 하다. 수호신들은 정체불명의 무협기술을 외우며 하늘을 날라다니는 과장법보다는 투박한 돌격을 구사하고, 주인공은 실눈에다가 땅딸막한 꼬마다. 격투질에 집착하기보다는 시대의 충돌을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는 사건 전개, 어설픈 무게잡기 보다는 세심한 내면묘사와 캐릭터구축에 힘쓰는 접근이 바로 이 작품의 우수성을 지탱해주는 생명줄이다.

분명히 <풍장의 시대>는 비교적 신인급인 작가들의 경력에 비하자면 놀랄 정도로 원숙하다. 하지만 원숙함은 때로는 독이 될 수도 있기에, 조심해야할 필요가 있다. 원수간 장르적 상상력이 쉽게 빠져들어갈 수 있는 길들, 즉 일본이 한국을 영적으로 지배하려고 한다는 식의 음모론, 대등한 능력의 영능력자간의 일대일 대결, 맥락 없는 로맨스 등으로 대표되는 인스턴트식 흥미유발 요소에 빠져드는 ‘해탈’이 바로 그 위험요소들이다. 그 유혹을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덜 원숙한’ 자세를 꿋꿋이 유지해주기를 작가들에게 미리 당부하고 싶은 심정이다.

“서양 역사를 모태로 한 서양 판타지를 업어온 일본 서양 판타지를 다시금 주술 등 동양적 소재로 뒤범벅한 일식 퓨전 판타지를 다시 한국에서 적당히 긁어모아온 판타지 세계” 에 매달리는 수많은 만화작품들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이 작품에 박수를 보낸다. 그 길이 훨씬 더 재미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더. 걱정인 것은, 이 작품이 연재중인 <영챔프>가 <그의 나라>(박흥용), <맘보 파라다이스>(윤승기)의 연재중단이라는 과거 경험에서도 볼 수 있듯이 좋은 만화가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지면과는 거리가 꽤 있다는 점이다. 업계 최고 경사 중 하나인 2005년 상반기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탔음에도 불구하고, 시상식에 출판사 사람이 작가들 기념사진 찍을 때 꽃다발 하나 안겨주지 않았다는 점을 볼 때 이 불안은 언제 사실로 바뀔지 모른다. <풍장의 시대>가 출판사의 방만함으로 이나여 억지로 풍장을 당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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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성인만화, 버린 것인가 버림받은 것인가 [계간만화 2005 여름]

!@#… 계간만화 2005 여름호 원고. (항상 그렇듯이) 커버스토리의 일부. 원래는 본격적으로 에로만화에 대해서 쓰고 싶었으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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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만화, 버린 것인가 버림받은 것인가

김낙호 (만화연구가 / 본지 편집위원)

90년대 초 한국만화가 소년만화와 순정만화 전문지의 도입으로 급격한 체질변환을 겪을 때 가장 먼저 도태된 ‘기성 잡지’들은 성인만화잡지였다. 그리고 90년대 말 한국 만화잡지의 불황이 닥쳐왔을 때, 다시금 가장 먼저 판을 접은 것은 성인만화잡지였다. 한국만화판은 도대체 왜 이렇게 성인만화잡지와 궁합이 안 맞는 것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성인만화잡지에 대한 시도는 항상 새롭게 계속되고 있는가. ‘버려진’ 성인만화잡지지만 버림받게 내버려둘 수 없는 매력을 살펴볼 때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끝까지 읽기(클릭)

2005 상반기 오늘의 우리만화 심사평과 잡담

!@#… 공식 발표되었고 시상식도 끝났으니 올려도 무방하겠지. 2005 상반기 오늘의 우리만화 심사평. 이런 자리들이 보통 그렇듯, 결국 심사평 쓰는 작업은 결국 ‘위원장’보다는 ‘글쟁이’에게 돌아간다;; ‘공모전’이 아니라 기성 작품들을 가지고 하는 평가라면, 총평과 각각 작품별 평을 분리해서 써줘야 한다는 소신으로 이렇게 썼다. 다음번에 이어받으실 필자도 이런 식으로 해줬으면 좋겠다. (보통, 실제 만화 자체는 읽지도 않는) 기자들이 기사쓰기도 이게 훨씬 편하거든. 파란 글씨는 추가 잡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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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 총평]

특정한 컨셉을 가지고 접근하는 다른 상 또는 공모전과 달리, ‘오늘의 우리만화’는 다양한 모호한 요구를 동시에 충족시켜줘야 한다. 대중성, 작품적 완성도, 그리고 만화계 안팎에 대한 영향으로 보는 현재성 등 여러 보편적 가치를 복합적으로 고려할 수 밖에 없다. 점점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동시에 심사대상으로 오르고 있는 요즈음의 추세에서 선택은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뒤집어보자면 여전히 만화는 역동적으로 다양한 길로 발전해나아가고 있다는 말이며, 오늘날의 만화작품들에 대한 능동적인 평가를 게을리 하면 안된다는 의미다. 이번에 선정된 3개 작품은 주류 소년만화, 극화체 단편집, 아동 지향 순정 모험물 등 각각의 영역에서 빠르게 두각을 나타내며 향후의 발전 가능성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들이다. 마지막까지 수상후보작으로 고려되었으나 최종 선정되지 못한 작품들 역시 적지 않았던 만큼, 수상자들 역시 이 상을 작품에 대한 최종 결과가 아니라 앞으로의 성장을 위한 밑거름 정도로 인식하였으면 한다. 수상자들에게 축하를 보내며, 비록 우수하였으나 탈락한 여러 작가들에게도 더욱 좋은 작품 활동을 희망한다.

(* 앞부분은 오늘의 우리만화라는 상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품고 있는 의문 그 자체 – 마치 올림픽에서 모든 종목을 없애버리고, 그냥 ‘세계 최고의 운동가’를 뽑는 것과도 비슷한 발상이다 – 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 사실은 말미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다.)

<풍장의 시대>
대원CI의 <영챔프>에서 연재중인 작품. 십이지 수호신과 함께하는 시골 양반 소년 ‘목이’가 겪는 개화기 시절의 사회적, 영적 격변를 소재로 한다. 동양과 서양, 한국적인 영과 일본의 영, 기계문명과 자연이 혼란스럽게 대립하는 모습들을 흥미롭게 그려낸다. 신인들답지 않은 철저한 세계관 구축과 내용 전개가 돋보이며, 소년만화의 장르적 재미를 잘 살리고 있다.

(* 개인적으로, 꼭 한 작품만 꼽으라면 이걸 꼽았을 것이다(기현씨 미안;;). 뭐랄까, 순정만화에서 ‘도깨비신부’가 주었던 장르적 재미 + 토속성에서 오는 이질적(?) 즐거움 + 만만치 않은 시선 을 소년만화 장르에서 느끼게 해준 물건. 한가지 불안한 점은, ‘바로 그’ 영챔프에서 연재중이라는 것. 잡지의 낮은 지명도 문제도 있지만, <그의 나라>, <맘보 파라다이스> 등 석연치 않은 연재중단 당한 수작 소년만화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라는 법이 없으니 말이다.)

<로또 블루스>
특유의 스타일리쉬한 화풍과 이야기 전개로 각종 전시회와 단편 프로젝트를 통해서 주목받고 있는 신인 변기현의 단편들을 모은 작품집. 다양한 시각기법으로 만화의 표현적 자유를 한껏 활용하며, 단편 극화 특유의 극적 스토리 전개를 구사하는 능숙함이 돋보인다. 팬시한 측면은 부족하지만, 서사의 대중적 재미가 잘 갖추어져 있다.

(* 권말 추천평까지 써준 작품이라서, 적극적으로 심사에서 밀어주기가 입장 애매했던 물건. 하지만 애초부터, 당연히 뽑힐만 하다고 생각한 작품이 뽑힌 것이라고 봄.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거기서 했으니 생략;;)

<월요일 소년>
달나라 토끼라는 모티브를 학원 판타지물의 형식으로 들고 온 작품. 대상 독자층에게 강한 호소력을 발휘하는 매력적인 캐릭터 및 세계관 설정, 매끈한 전개 등 장르적 완성도가 최근의 작품들 가운데 특히 두드러진다. 저연령층 대상 순정 모험물의 양적/질적 강세를 잘 반영하는 작품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향후 전개가 더욱 기대되는 작품이다.

(*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 작품은 심사장에서 읽어보기 이전에는 아예 접해본 적이 없었다. -_-; 개인적으로는 사실 이런 상을 심사하면서 가장 쪽팔리는 작태가, “심사위원으로 불려온 나름대로 전문가라는 작자가 그 작품을 원래의 발표 맥락에서 먼저 접해보지 않고 고작 당일 ‘심사테이블’에서 처음 접한 주제에 이러네 저러네 평가하는 것” 이라고 생각하기에 더욱 부끄럽다 (즉 다시 말하자면, 평소에 그만큼 열심히 현재 출간중인 만화들을 봐오지 않은 사람은 애초부터 심사위원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런 경우가 사실은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개탄중이다). 한국만화를 실시간으로 꽤 읽고 있는 편이라고 자부하고는 있지만, 이런 일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그래서 나는 사실 크게 지지하지도, 크게 반대하지도 못한 작품. 하지만 다른 여러 심사위원분들의 지지에 힘입어 결국 당선. 아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딘가 특별히 부족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는 건 아니다.)

2005 상반기 ‘오늘의 우리만화’ 심사위원 일동

 

— Copyleft 2005 by capcold. 검은 글씨는 어차피 공식보도자료. 파란 글씨는 이동/영리 자유, 수정불가. —

만화계 몇가지 사소한(?) 소식들.

!@#… 개인 홈피를 빙자한 대형 커뮤니티, 대형 커뮤니티를 빙자한 개인 홈피(…). 뚝심의 개인 만화애니 정보 종합 포털(?). 여하튼 만화독자, 애니 감상자에게 귀중한 곳. 만화인(http://manhwa.in)에서 700백만 방문객 돌파 축하 이벤트. 여러가지 공모 이벤트와 축전 모음 등이 있으니 관심있는 모든 이들은 가보길. http://www.manhwain.com/main.html?no=102

!@#… <풍장의 시대>, 2005년 상반기 오늘의 우리만화상 수상. 만협 홈피에서 공식 공지했으니 이제는 이야기하고 다녀도 되겠지(다른 두편은 <로또블루스>, 그리고 <월요일 소년>). 심사평은 그쪽 사이트에 올라갔으니 여기서는 생략. 그보다, 풍장의 시대의 스토리 작가 ‘가리’가 스탠바이 청춘의 ‘김영빈’님과 동일인물이라는 이야기를 접하고 약간 충격. -_-;

!@#… 계간만화 2005 여름호 발간.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 제작비 지원으로는 마지막 호(야속할 따름이다). 앞날이 잘되기를. 아니, 편집위원 주제에 남의 일처럼 이야기할 처지가 아니지. -_-; 뭐 여튼 2004년 봄호부터 이어진 커버스토리 집필 개근은 앞으로도 이어지리라 봄.

!@#… 아이큐점프 격주간 전환. 야심찬 신연재 예정. 사실 엄밀하게 말해서, 현실적이고 좋은 쪽으로의 개혁이다. 적자를 줄이고 품질 좋은 잡지를 만드는 길로 한발짝 다가간 셈. 하지만 9년만에 처음으로 질적인 피크를 이루자 마자 일방적으로 폐간 당해버린 <영점프>의 전례가 떠오르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_-;

도망가는 자들에 관하여: <로또 블루스>[책속해설]

!@#… 최근 출간된 변기현 단편집 <로또 블루스> 책내 서평. ‘이쪽 계열 작가들’에 대해서는 이래저래 선호가 좀 있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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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가는 자들에 관하여: <로또 블루스>

김낙호(만화연구가)

대중 오락문화로서의 만화는 종종 “현실도피”라고 폄하되고는 한다. 하지만 이 분야가 누려온 폭넓은 인기를 상기해볼 때, 아마도 사람들은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무척 꿈꾸고 있음이 틀림없다. 때로 그 도피행은 장미빛 희망으로 가득한 가상세계로 향하거나, 소심한 현실에서는 엄두도 못낼 멋진 모험 이야기로 귀결된다. 하지만 만약 압박을 주는 현실과, 그것으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하는 도망자의 모습 그 자체에 집중한다면 어떨까. 도피는 현실에 대한 외면이 아니라, 어떤 가상적 비유를 통한다고 할지라도 결국 독자들로 하여금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변기현의 만화에서 반복적으로 채용되는 모티브는, 도망치는 주인공이다. 커다란 시스템의 아래에서 오랫동안 충실하게 ‘적응’하며 살아왔던 듯한 주인공이 있다. 요쿠르트로 감정을 통제하는 도시든(요쿠르트 도시의 사랑), 식용인간을 길러내는 가상세계든(FOOD), 위선적 착실함을 강요받는 교회든(로또 블루스), 과장된 남녀 연예관계든(레이디 앤 젠틀맨) 말이다. 그런데 그는 어떤 작은 계기를 통해서 자기 생활세계의 이상함을 느낀다. 결코 근본적이고 대단한 깨달음은 아니지만, 마치 선악과를 탐하고 낙원에서 추방된 인류의 조상들 마냥 이제는 더 이상 그 시스템 속에 속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도망친다. 하지만 그것은 시스템에 대한 반항이라든지 개혁을 위한 내딛음 보다는,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에 가깝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기현의 단편들을 단순히 염세적이라고 치부하기는 적합하지 않다. 여하튼 살아남고자 달려가는 사람들의 생명력 덕분이다. 주인공들의 도피 자체가 적어도 독자들에게 만큼은 삶의 의지이며 희망이 되어 주는 것이다. 아니 그런 거창한 결과까지 굳이 가지 않더라도, 적어도 자기 자신의 “도망치고 싶어질 정도의 현실”에 대해서 한번 더 성찰할 수 있는 기회 정도로는 충분하다.

이 책은 변기현의 여러 단편들을 모아놓은 작품집이다. 발표맥락의 편차가 있기 때문에 서로 이질적인 느낌도 있고, 가끔 표현이나 이야기솜씨가 덜 다듬어진 구석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최근 발표작으로 올수록 빠른 속도로 자기 작품색과 세계관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 모습을 명확하게 각인시키고 있으며, 이미 ‘유망주에 대한 기대’라는 수준을 가볍게 넘어선다는 점이다. 변기현의 작품들은 찰나적이고 인공적인 에피소드들 또는 진부한 대중문화 코드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환타지 세계가 지배하는 젊은 만화 창작 풍토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그렇고 그런 세상에 대한 세밀한 관찰을 극화풍의 이야기로 풀어나간다.

극화풍 이야기를 이끌어나가기 위한 중요한 도구는 역시 극화풍 그림체다. 변기현의 그림은 동글동글한 미형 캐릭터들이 얄팍한 감성을 설파하며 돌아다니는 근래의 유행과는 궤를 달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80년대 극화마냥 경직되어 있는 모습이 아니라, 거칠게 과장된 듯한 모습 속에 숨어있는 탄탄한 기본기와 확고한 세련됨을 갖추고 있다. 그가 묘사하는 인간군상은 표정이 살아있으며(특히 좌절과 난감한 상황에서 일그러지는 모습이 일품이다), 그렇기에 담담한 무표정의 순간 속에서마저 확실한 감정상태, 즉 내면의 이야기가 전달된다. 다양한 시선 각도라든지 역동적인 칸 진행 역시 이러한 바탕 위에서 비로소 자유롭게 춤을 춘다. 작품마다 조금씩 다른 필체와 채색방식을 시도해서 극의 흐름에 가장 적합한 시각연출을 찾아나서는 모습 역시 이 젊은 작가의 만화에 대한 집념을 가늠하도록 해준다.

비록 작품집으로서는 첫 출간이지만, 변기현은 이미 최규석, 석정현 등 일련의 젊은 작가군과 함께 극화의 새로운 물결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스타일리쉬한 화풍을 구사하면서도 단순한 시각적 실험에 빠지지 않고 이야기의 서사성을 고집하며, 만화 특유의 시각적 비유를 애용하면서도 리얼리즘적 흐름을 놓치지 않으며, 신랄한 현실을 이야기하면서도 블랙코미디의 유희성을 버리지 않는다. 이 만화들은 이전 세대 리얼리즘 극화의 모습들을 단순반복하지 않고, 일본 장르만화들과 인터넷 만화들과 시각실험들이 난무했던 90년대 이후의 만화유산들을 고스란히 흡수 및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리얼리즘 사조를 강하게 연상시키는 감수성을 중심축으로 하되 그 방법에 있어서는 문자 그대로 혼합적인, “하이브리드 리얼리즘” 만화라고 감히 부를 수 있을 듯 하다(아마 후세의 사람들이 좀 더 적합하고 매끄러운 명칭을 새로 발명해주리라고 믿는다). 만화가 지니는 본연적인 혼합성과 자유로움을 정면으로 소화해내고자 하는 이들의 시도에 좋은 결과가 오기를 바란다. 사실, 이미 좋은 조짐이 넘실대고 있는 셈이다.

말이 길어졌지만 어차피 이미 작품들을 모두 감상한 후, 말미에 한번 곱씹어보기 위한 글에 불과하다. 이런 글은 닫아버리고, 다시 한번 변기현의 ‘야쿠르트’와 ‘로또’와 ‘닭다리’의 세계로 돌아갈 시간이다.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불허/영리자유 —

먼나라 우리나라 – <조선왕조실록>[기획회의 050605]

!@#… 이번 월간 인물과 사상에 쓴 <만화 박정희> 글(발간 후 올릴 예정)과 다소간 이어지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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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우리나라 – <조선왕조실록>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나라의 정권을 잡는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크게 신기할 것도 없는 노릇이다. 권력의 가장 물질적인 형태는 바로 무력이고, 그 무력을 손에 쥐고 있는 자가 서서히 나머지 권력 형태들을 갈구하여 어느날 갑자기 실력행사에 나선다는 시나리오는 동서고금 막론하고 항상 있어왔던 이야기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 사람들이 너무 쉽게 생각하는 말이 하나 있다: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하리라”. 이 말은 어디까지나 무력의 폭풍 앞에 억압당한 불쌍한 우리네 중생들을 위한 위로의 한마디일 뿐이다. 칼로 일어선 자가 칼로 망하리라는 보장 따위는 어디에도 없으며, 행여나 망한다 할지라도 이미 충분한 권세를 누린 다음에 망하는 경우가 사실은 더 많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칼로 일어난 자를 사후에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도 한다. 별로 정당화할 구석이 없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구국의 결단’이니, ‘그래도 덕분에 경제는 살아서 밥은 굶지 않게 되었다’, ‘각하는 청렴하신 분이었다’는 등의 사실검증과는 상관없는 어거지 신화들을 마구 동원한다. 물론 권력을 잡은 자가 스스로 그런 프로파간다를 실시하는 경우도 많지만, 사실 더 중요한 점은 그들의 아래에서 권력의 대상이 되었던 백성들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어느 틈엔가 그것을 인정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권력에 복종을 하며 살아왔던 자신들의 정체성에 혼란이 오니까(심리학에서 ‘인지부조화이론’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그것이 약간 오버를 하면, 하나의 종교와도 같은 신념이 된다. 아주 단순한, 권력의 생리다.

박정희 이야기를 시작하자는 것이 아니다. 약간 더 – 한 500년 정도는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한 군인이 있었다. 그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기존의 나라를 뒤엎고 새 왕이 되었다. 그리고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뿌리도 뭣도 없이 왕 노릇을 하면 분위기가 좀 거시기해지기 때문에, 고려 후기에 원나라의 관리 노릇을 한 그의 고조를 시작으로 해서 ‘조선왕조’를 상정했다. 그리고 그의 자손대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왕조의 역사를 주욱 묶어내서 만든 기록이 바로 그 유명한 ‘조선왕조실록’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5권 발매중, 휴머니스트)은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만화로 된 현대적인 화답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갖가지 일화들과 큰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현대의 독자들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적절한 현대적 비유와 그것을 만화적 연출로 버무리는 솜씨를 발휘한다. 진지한 내용과 독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대화 건네기, 그것을 딱딱하지 않게 감싸는 유머감각. 그리고 그 속에 명확하게 묻어나오는 작가 자신의 역사와 사회에 에 대한 시각.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를 베스트셀러로 만들어주었던 장점들을 이 작품 역시 고스란히 갖추고 있다. 해외문물에 대한 소개라는 화제성과 보수/수구적인 가치관과는 달리, 자세히 알든 말든 우선 사람들이 지겨워하고 보는 한국사 이야기라는 약점과 진보적인 가치관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조선왕조의 역사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그 속에서 벌어진 일들 이상으로 무척 흥미롭다. 작가는 그 역사가 권력의 암투를 통해서 진행되는 정치사라는 뚜렷한 줄거리를 읽어낸다. 그 정치과정 속에서는 구악을 멸하지 못하여 뒤통수를 맞는 이야기, 힘의 흐름에 따라서 철새짓을 반복하는 군상들, 무력과 모략의 미묘한 결합, 다툼의 속에서 가장 먼저 증발해버리는 신뢰와 사상, 민생 따위의 가치들 등, 무척 친숙한 테마들이 잔뜩 버무려져 있다. 역사가 의미 있는 것은 그것이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라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조선왕조의 역사는 바로 권력의 거울이다. 한국사를 다뤄온 다른 어떤 만화보다도 권력의 생리를 입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것은 바로 현재의 모습과 닮아있다. 멀게만 느껴졌던 ‘조선’이라는 사회가,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곳이 된다. 먼나라, 우리나라인 셈이다.

특정 인물이나 정파에 대한 일방적인 편들기도, 양비론적 패배주의에도 빠지지 않는 절묘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은 작가의 오랜 신문시사만화 경력 덕분인 듯 하다. 혹은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원작 자체가 가지고 있는 풍부함 역시 작용했을 것이다. 권력의 작용 뿐만 아니라, 시대적인 사회상과 민중의 동향 등 총체적인 해석을 통해서 조선 역사를 단순한 탐욕스러운 개개인들이 벌이는 궁중드라마로 격하시키지 않은 점이 바로 이러한 두 가지 배경이 합쳐졌을 때 나올 수 있는 미덕이다. 그림체 및 시각연출 방식 역시 지나치게 설명조도, 지나치게 설명이 없어서 불친절할 정도도 아닌 균형을 맞추고 있다. 선은 명확하며 단순하고, 극적인 과장이나 섬세한 세부묘사에 빠지는 일 없이 가장 필요한 만큼의 정확한 장면묘사를 일삼고 있다. 물론 등장인물이 워낙 많다보니 캐릭터들이 간혹 서로 헷갈린다거나 하는 문제도 있지만, 이만하면 ‘양반’이다.

이 시리즈는 워낙 장편으로 기획되어 있고, 이제 한 고비를 넘겼을 뿐이다. 비록 간혹 스케쥴이 삐걱거리고 있지만, 용케 마지막 권까지 무사히 나와 줬으면 하고 바란다. 벌써 이 정도 수준의 1부라면, 마무리되는 것만으로도 이미 박수를 받아 마땅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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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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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딱뚝딱, 인권을 짓다 – <뚝딱뚝딱 인권짓기> [으뜸과 버금 0505]

!@#… 이런 주말은, 밀린 투고문들 올려놓는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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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딱뚝딱, 인권을 짓다 – <뚝딱뚝딱 인권짓기>

이미 널리 알려져 있듯이, 만화는 정보전달에 있어서 효과적이다. 그렇기에 한국전쟁 당시 남북이 서로 뿌려댔던 삐라에 만화가 난무한 것이고, <먼나라 이웃나라>가 일종의 세계화 시대 교과서로 장기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신문만평들이 정치 칼럼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힘은 종종 잘못 평가되고는 하는데, 단지 만화로 하기만 하면 그런 좋은 효과들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착각이다. 다른 어떤 분야라도 마찬가지이듯 결국 어느 정도 이상으로 잘 만든 만화가 효과적인 것이지, 그냥 아무렇게나 만들어도 단지 만화이기 때문에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관심의 손길을 당기지만 결국 허접한 품질 때문에 오히려 쓴웃음만 짓게 만드는 수많은 국정 또는 기업 홍보 만화들을 생각해보라.

인권이라는 분야가 있다. 소위 ‘개발 독재’라는 명목하에 자신들에게 부여되었던 말도 안되는 억압을 오히려 그리워하는 이상한 변태피학성 체질을 지닌 사람들이 많은 어떤 이상한 나라에서도, 특히 90년대말 이후로 이 화두가 꽤 주류적인 담론으로 떠올라 있는 상태다. 인권운동가들의 오랜 끈기 있는 노력을 바탕으로, 정치 사형수 출신 대통령이 주도한 인권위원회 설립으로 본격화된 이 움직임은 무척 긍정적이다. 하지만 항상 부딪힐 수 밖에 없는 문제가 하나 있으니, 바로 인권 개념 자체의 난해함이다. 인권이 하나의 궁극선으로 추구되어야 한다는 이념은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지만, 그 인권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가, 무엇이 인권을 침해하는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도 어렵다. 범위도 넓을뿐더러, 우리 일상생활 속에 뿌리 깊게 침투해 있는 – 특히 인권을 사치로 여기는 기이한 사회가 수십년간 유지되어 오는 통에 완전히 세뇌 당해버린 내면적 파시즘을 직면시키는 작업은 엄청난 대장정을 요구하고 있다. 어렵다. 설명과 교육으로 계도해야 하는 부분이 많다. 쉽게 이해시키기 어렵다. 자, 그럼 이제 해결사가 나타날 차례다. 바로, 만화다. 그렇게 해서 이미 인권위원회에서 기획한 인권 관련 만화 단편모음집 <십시일반>(창작과 비평, 2004)이 탄생해서 다소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이제, 좀 더 본격적으로 인권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차례다.

<뚝딱뚝딱 인권짓기>(인권운동사랑방 글, 윤정주 그림/야간비행)가 바로 그런 책이다. 부제인 ‘만화 인권 교과서’가 표방하는 포부 그대로, 인종주의, 장애우 차별 문제, 빈부격차, 성차별, 평화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가장 날것 그대로의 문제의식을 풀어낸다. 월간 <고래가 그랬어>에 연재된 분량 가운데 13개 주제를 묶어낸 것인데, 각 주제는 얼핏 거창해질 수 있는 인권 이슈들을, 우리가 지극히 일상적으로 보고 듣는 생활 현실 속에 잠복해있는 모습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이끌어낸다. “장애인 인권을 보장하라!”라는 거친 구호가 아니라, ‘작게 낮게 느리게 함께 걸어요’라는 권유를 하는 모습이 바로 이 만화의 절대적인 미덕이다. 독자대상층은 초등학생 정도에 맞추어 문체와 그림체 등을 조절했는데, 어른들도 전혀 무리없이 독자층으로 포섭할 수 있을 정도의 깊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작품이 가능한 것은 역시 인권운동 사랑방이라는 이 분야 최강의 베테랑 집단이 작품에 들어갈 내용을 조율했기 때문이다. 인권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나 감상적인 공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왜, 어떻게, 앞으로 무엇을’이라는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방향을 제시해온 이들의 내공이 담겨있다.

물론 좀 더 만화로서 재미있는 서사를 추구했으면, 좀 더 세련된 표현기술들을 구사했으면 하는 자잘한 아쉬움은 여럿 있다. 하지만 그것은 100점에서 99점으로 감소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은 초등학생 자녀에게 줄 수 있는, 혹은 자녀를 핑계 삼아 부모들이 사서 직접 읽는 선물로서 최상의 아이템이다. 부디 이 ‘만화 인권교과서’가 진짜 교과서가 되어서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해주었으면 한다.
[으뜸과 버금 2005.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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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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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의 본연으로 – <버추얼 그림동화> [기획회의 050516]

동화의 본연으로 – <버추얼 그림동화>

한국에서 동화(童話)라고 불리우는 일련의 이야기들은, 사실 원래는 그다지 아이들이라는 특정한 대상을 위해서 만든 이야기라고 보기 힘들다. 민담과 신화들이란 것은 애초부터 인간사의 여러 모습들에 대한 비유로 가득차 있고, 당연히 성적이든 폭력적이든 미성년자 관람불가일 법한 내용이 많을 수 밖에. 사실 한발 더 나아가서, ‘어린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의 발명품이라는 것도 지금쯤은 이미 정설로 굳어져있다. 일정한 나이를 정해놓고는 그 이하의 사람들을 일종의 사회적 온실 속에서 보호받아야 할 종자로 취급하는 행태가 고래부터 항상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간혹 사람들은 ‘동화’라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세상살이의 회한을 깊이 담고 있는 잔혹한 이야기들인지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고는 한다. 그 때 흔히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현대적인 ‘어린이’ 개념을 애써 도입해서 모든 사회적 요소들, 잔혹한 표현, 성적 뉘앙스 등을 억지로 거세시켜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 결과 동화는 무척 재미없어질 뿐만 아니라 핵심 메시지까지도 퇴화해버리지만, 그 빈 자리에는 꿈과 낭만, 보수적인 가족 이데올로기, 귀여운 동물 캐릭터들을 적당히 끼워넣는다. 다른 방법은, ‘알고 보면 잔혹한 동화’ 투로 선정적인 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다소 변태성 악취미에 가까운데, 원래의 동화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쇼킹한지를 가지고 오히려 상업화를 시켜서 성인독자를 노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동화의 본연의 목적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우리가 사는 지금의 현실에 대한 교훈을 얻는 것이다. 먼 동화속 유럽 나라의 신데렐라가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 속에서 벼락출세를 꿈꾸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동화는 멍청하지 않다. 권선징악에는 댓가가 따르고, 어떤 억울함도 100% 해소되는 일 따위는 없다. 이해관계의 충돌과 약육강식이 선악의 모습으로 치환될 뿐이다. 교훈은 제3자들의 낭만적인 이야기 속에서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대한 이입을 통해서 삶을 대처해나가는 힌트를 얻음으로서 얻어낸다. 이런 요소들이 빠진다면, 동화는 그 잘못 붙여진 이름 그대로, 온실속 아이들을 위한 싸구려 엔터테인먼트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강경옥의 <버추얼 그림동화>(콘텐츠와이드/2권 발매중)는, 이러한 동화 본연의 목적의식이 잘 살아있는 작품이다. 이미 여러 단편들을 통해서 상상 속 세계와 가상의 설정을 통해서 현실의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져온 작가이기에, 이런 류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사실 당연한 행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80년대 이래로 작가가 계속 관심을 보여온 ‘무덤덤한 주인공이 감정을 획득해나가는, 또는 무의식적으로 외면/봉인하고 있던 감정을 재발견해내는 과정’의 이야기라는 소재가 결합하면서 이 작품이 완성된 것이다.

내용은 에피소드 방식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주인공들이 어떤 수상한 가게에 들러서 가상현실 기계로 특정한 동화 내용을 직접 등장인물이 되어 체험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현실세상에서 일어났던 문제점들을 직시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매번 주인공은 달라지고 그들의 사연과 경험하게 되는 동화 역시 바뀌지만, 변함없는 것은 가게주인 뿐이다. 이들이 겪게 되는 동화는 우리에게 친숙한 작품들이면서도 왠지 현실적인 설정들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정도의 이야기다. 아예 과격하게 인물들을 통째로 재해석을 해버리는 것 없이, 그냥 은근하게 친밀하다. ‘라푼첼’이야기라든지, ‘푸른수염’이라든지 말이다.

매번, 동화 속 인물들의 관계와 행동거지는 주인공이 현실에서 고민하고 있는 그 사람들의 관계와 유사하다. 그것을 반영해주면서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진짜 감정을 끄집어내서 직면하게 만든다. 주인공은 자신이 실제 그 등장인물이 아니고 단지 가상의 체험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처지를 그대로 경험하면서도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그리고 물론 동화속 해피엔딩이 항상 현실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확실한 선을 그어주고 있지만, 작품 속 주인공들에게 나름의 교훈을 주기에는 충분하다. 주인공들은 동화를 통해서 현실도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히 자신의 처지를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현실 속에서 그 교훈을 실천하기 위해서 충만한 마음으로 가게를 나선다. <버추얼 그림동화>의 동화체험은, 사실상 전형적인 심리치료 과정에 가까운 것이다. 특히 트라우마와 불안, 우울 증세 등에 대한 치료적 접근에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다. 잔혹동화의 탈을 쓴 심리치료 만화인 셈이다.

2000년대 들어서 주로 과거 작품의 복간에 머물 뿐 확실한 신작 장편이 나오고 있지 않아서 독자들을 아쉽게 했던 한국 순정만화계의 중견인 강경옥의 복귀작으로 이 작품은 썩 만족스러운 편이다. 엄청난 혁신을 가지고 왔다기 보다는, 강경옥 만화가 너무 낡지 않은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물론 단점 역시 원래 성향 그대로다. SF의 외피를 쓰고 있으면서도 실제 우주선이나 물리학적인 개념에서는 팬들을 안타깝게 만들고 말았던 <별빛속에>의 악명(?) 그대로, <버추얼 그림동화> 역시 디테일에 대해서는 무척 무신경한 편이다. 동시대적인 감수성보다는, 근본적인 감정과 관계맺음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쪽을 선택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림체나 시각연출 역시 현대적 감각의 스타일리쉬함보다는, 감정선의 변화에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기에 한눈에 보기에 ‘80년대틱하다’는 느낌을 받기 십상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강경옥 만화의 올드팬들에게는 나름의 친숙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듯하지만, 새로운 젊은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에는 상당한 악재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이 작품이 연재되던 엠파스 연재만화란이 사업을 접어서 현재 연재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비록 어디서 끝맺어도 크게 이상할 것 없는 에피소드 방식이기는 하지만, 역시 오랜만에 다시 상승세를 타고 있는 작가의 작품이 두 권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단행본이 많이 팔리면 창작 지속에 도움이 되려나? 모르겠다. 이런 상황과 관련된 동화는 없으려나, 괜히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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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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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만화의 거장, 故고우영을 돌아보다 [한겨레21/050504]

!@#… 이번 주 한겨레21에 들어간 글. 이번주, 각 시사주간지들마다 문화면은 이 이야기였을터. 故고우영 선생 돌아보기. 그런데, 어차피 ‘고우영 만화와 함께 한 추억’은 60년대생들이 나보다 훨씬 더 듬뿍 애정어린 눈으로 써내고 있고, ‘작품 연보’는 자료만 열심히 뒤지면 신문기자들이 더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capcold는 좀 다른 부분에 집중하기로 한 거다. 바로, “고우영 만화가 어떻게 대단하다는 말인가“. 추억담보다는 훨씬 메마르고 연보보다는 덜 정보적이겠지만, 그래도 이런 부분이야말로 누군가가 확실하게 짚어줘야한다고 생각하니까.

!@#… 여담: 한겨레21 기사에서는, “…75년 소년지에서 연재된 무술가 최배달의 일대기인 <대야망>…” 이라는 대목이, “75년 <소년>지에서 연재된 무술가 최배달의 일대기인 <대야망>” 라고 편집되어 나왔다. 헛, 소년만화잡지라는 말이었는데, 편집기자님이 잡지 이름으로 아셨나보다. 하필이면 작품이 연재된 잡지의 실제 이름은 <새소년>.

결과적으로 절묘하게 중간에 걸친 오타가 되어버렸다. OTL

(어디선가 누군가는 “저 인간, 잡지 이름도 제대로 모르면서 무슨 전문가 행세야! ㅋㅋㅋ” 하면서 비웃음을 던질지도)

!@#… 여튼 대체로 그렇게 해왔듯이, 여기에 올리는 것은 원본. 잡지에 실제 실린 데스크 거친 버젼과는 대소제목, 문단구분 등이 약간씩 다를 수도 있음. 아니, 다름. -_-; 

!@#… 본문에 언급한 ‘노가리 만화’라는 명칭을 이번 기회에 완전히 공식 용어로 정착시켜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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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만화의 거장, 故고우영을 돌아보다

김낙호(만화연구가)

취향변화가 극심하고 상호모방과 가치절하가 만연되어 있는 현대 대중문화에서, ‘거장’이라는 호칭이 부여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우선 여러 시대와 세대를 넘나들며 고르게 명작을 탄생시켜야 한다. 예술적 성취와 대중적 호응을 동시에 거머쥐어야 한다. 나아가 하나의 흐름을 만들고, 해당 문화장르 자체의 사회적 입지까지 향상시켜 줄 수 있어야 한다.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를 충족시킨다면 논란의 여지가 없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2005년 4월 25일 타계한 故고우영 선생은 대중문화 가운데에서도 가장 대중문화적인 분야인 만화가 배출한 진정한 거장이라고 할 수 있다. 향년 67세, 그 중 50여년을 고스란히 만화에 바친 거장의 빈자리는 크다.

고우영 만화의 발자취

고우영이라는 이름 석자가 지난 반세기동안 한국만화계에서 차지해온 위치는 각별하다. 그의 작품 경향은 몇가지 갈래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초창기의 명랑만화들이다. 이 시기에는 추동성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비교적 당대 명랑만화 문법에 충실했는데, 익살스러운 모습의 박사와 아들의 좌충우돌 모험을 그린 <짱구박사>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에 머물지 않고, 작가는 72년 <임꺽정> 연재를 필두로 성인취향 연재만화의 영역을 개척했다. 이러한 작품들의 확고부동한 히트는 현재까지도 하나의 공식으로 남아있는 스포츠신문과 만화 사이의 파트너십을 새로이 발명해냈다. <삼국지>, <수호지> 등 중국고전의 재해석 및 <일지매>등 창작사극을 통해서 고우영식 만화의 개성이 확립되었고, 이후 그의 대표적인 작품색으로 남게 되었다.

성인 연재만화를 대표 장르로 하면서도, 청소년 만화 작업 역시 지속되었다. 75년 소년지에서 연재된 무술가 최배달의 일대기인 <대야망>이 대표적인데, 한껏 성인만화에서 실험하고 있던 해학이나 농담보다는 우직한 극화 스타일의 전개가 특징이다. 또한 창작 만화 작업 이외에도 평소 작가가 여행한 명소들을 중심으로 엮여진 기행문 서적, 도서 삽화 작업 등 다방면에 작가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러한 작업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유려한 솜씨는, “만화가가 글도 잘 쓴다”는 식의 세간의 편견과 달리 “글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기 때문에 만화가를 할 수 있다”는 단순한 진실을 증명하는 좋은 사례가 되어주고 있다. 94년부터 단행본으로 출시된 <십팔사략>은 이전의 신문연재 사극만화와도 다시금 궤를 달리한다. 이 작품은 단행본 총서류에 적합한 호흡으로 만들어졌으면서도 특유의 해학은 그대로 살아있다. 그리고 뚜렷한 주인공들보다는 커다란 흐름을 묘사하는 것에 집중하여, 드라마와 사서 사이에 있는 영역을 개척하는 일에 성공하며 고우영 만화의 또 다른 도약을 예고했다. 항상 동시대적 호흡을 놓지 않고 현역으로서 진화를 거듭해온 행보를 보였기 때문에, 이제는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게 된 <한국만화야사> 등이 더욱 아쉽다.

고우영식 서술방식과 ‘노가리 만화’

흔히 고우영 만화라고 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그런 문법을 확고하게 해준 것은 그의 신문 연재만화들인데, <임꺽정>에서 시작하고 <일지매>에서 가다듬어져서 <삼국지>에서 전성기를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스포츠신문은 당대의 떠오르는 오락 언론매체였고, 작가는 지면특성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방식의 만화문법을 지속적으로 개발해냈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이야기 서술 방식의 유연함이다. 고우영 만화에서는 기본적으로 작품 속 주인공들이 극을 전개시켜나가면서도, 필요에 따라서 작가가 직접 개입하여 해설과 해석을 달아주고 있다. 때로는 마치 판소리의 소리꾼마냥 걸죽한 입담, 때로는 주인공들의 박진감 넘치는 상호작용으로 이야기를 이끄는 자연스러움이 독자들을 쉽게 몰입시킨다. 이것은 마치 고전소설 또는 판소리를 연상시키는 방식인데, 특히 작중 상황들을 현실 세태에 빗대어 풍자한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단순히 줄거리가 전개되는 모습 자체에 의존하기보다는, 마치 술자리에서 입담 좋은 선배 하나가 웃음과 울분으로 세상 사는 이야기보따리를 하나 풀어내듯이 – 속칭 “노가리를 까듯이” – 작품 속 이야기는 살아있는 우리네 세상 이야기가 된다. 만약 작가가 개입하는 지점이 지나치게 설교조로 가거나 주인공들이 극중 흐름에 너무 경직되어 있을 경우는 독자들의 외면을 살 수 밖에 없겠지만, 故고우영 선생은 특유의 거리두기와 화려한 입담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풍자의 칼날은 표현으로서는 우회적이었으나, 독해 과정 속에서는 통쾌한 날카로움을 잉태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노가리 만화’는 필연적으로 서민적 정서, 인간적 내음을 진하게 담고 있었으며, 통기타와 생맥주의 70년대 청년정서와 잘 맞아 떨어졌다. 이후 그 전통은 강철수, 배금택, 한희작 등의 작품을 통해서 현재까지도 스포츠신문 만화의 유구한 흐름으로 이어져 왔다. 나아가 일기체로 서술되는 여러 온라인 만화 작품들에서도 그 영향력을 간간히 찾아볼 수 있다. 고우영 만화는 바로 그 시조이자, 마지막 순간까지 최고 수준의 현역선수였다.

캐릭터성의 선구자

시각적 측면에서도 고우영 만화는 탁월함을 발휘한다. 유려한 선의 힘을 이용하여 고전 동양화를 강하게 연상시키는 풍경묘사는 물론, 해학적 필치와 진지한 선의 힘을 조율하여 헐렁한 유머와 강렬한 전개를 오고 가는 솜씨 역시 달인의 경지다. 이러한 시각적 탁월함의 가장 큰 이점은 바로 캐릭터성의 창조다. 효과적인 시각화 덕분에 등장인물들의 감정 상태와 내적 변화과정은 선명하게 줄거리 속에 각인되어 각 캐릭터의 개성을 만들어낸다. 또한 고우영 만화에서 등장인물들은 아무리 많은 이들이 등장해도 누구 하나 서로 혼동되지 않을 정도로 뚜렷하게 차별되는 모습을 지니고 있다. 나아가 성격과 모습의 일치에서 오는 강력한 효과가 발군이다. 이전 어느 누가 삼국지의 저돌적인 맹장 여포를 멧돼지 같은 얼굴로 묘사했으며, 눈치 많이 보는 유비를 아예 사시로 그려냈던가. 신출귀몰한 일지매를 변장에 능한 중성적 미소년으로 만들어낸 것 역시 무릎을 치게 만든다.

이렇듯 캐릭터성이 강하게 작용하다 보니, 고우영 만화의 등장인물들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우스움과 진지함, 강함과 나약함을 오가며 상황에 따른 내적 감정변화가 선명하다는 것은 곧 독자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특히 고전을 다루면서 기존의 박제화된 인물묘사를 벗어나 인간적인 일화들을 대폭 심어 넣은 것 역시 크게 일조하고 있다. 일지매든 임꺽정이든 장비든 삼황오제든, 어떤 근엄한 역사적 등장인물이라도 고우영 만화에서는 시시한 농짓거리 또는 소소한 질투 한번 안 해보는 사람이 없다. 언젠가부터 캐릭터성이 장르문화의 파급력을 이야기하기 위한 중요한 잣대로 동원되곤 하는데, 그렇다면 고우영 만화야말로 캐릭터의 힘을 극대화시켜서 성공을 거둔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한국만화, 포스트 고우영의 시대

이러한 것들을 차치하고서라도, 결국 독자들에게 그가 남긴 최대의 업적은 바로 만화의 즐거움이다. 만화로 이야기하면 얼마나 재미있는지, 그리고 그 즐거움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얼마나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그 즐거움은 이미 시대를 초월하여, 군홧발에 짓이겨졌던 <삼국지>를 원형대로 복원해낸 새 삼국지가 2000년대에 다시한번 큰 히트를 기록했다. 나아가 <일지매>, <수호전> 등도 재발간되어 단지 옛날만화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동시대 젊은이들에게 호소력 있는 작품으로서 자리매김했다. <수레바퀴>, <십팔사략> 등 90년대 이후의 근작들도 당연히 자기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다만, 평생현역을 고수했던 작가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이제는 더 이상의 고우영 만화가 나올 수 없게 되었다. 이미 나온 여러 명예의 전당급 작품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제 그가 세운 커다란 산을 넘어서 더 큰 봉우리를 만드는 과제가 후배 작가 세대에게 떨어졌을 따름이다.

여담이지만, 만화가에 대한 존칭으로 ‘화백’이라고 부르는 것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화백은 그림 그리는 사람에 대한 극존칭인데, 만화가는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동시대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는 그림이야기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故고우영 선생 같은 탁월한 이야기꾼에게, 화백이라는 호칭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간 만화들이 주었던 즐거움에 감사하며, 다시금 고인의 삼가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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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 만화 대표작 5선]

굳이 이런 것을 소개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미 잘 알려진 작품들이지만, 이번 기회에 세트로 하나씩 소장해서 두고두고 읽어보면 좋을 만한 작품들을 엄선해서 몇 가지 뽑아보고자 한다.

일지매 (애니북스/전8권)

양반계층의 사정으로 버려지게 된 서자 일지매가 기구한 운명을 겪으며, 청나라와 일본에서 수련한 무술을 바탕으로 의적이 되어 부패한 조선사회에서 활약을 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은 창작사극. 고우영식 해학과 풍자, 자유로운 서술방식이 거의 완전히 제 모습을 갖춘 명작. 특히 일지매라는 주인공 캐릭터의 복합적인 심경묘사와 변천과정은 섬세함의 극치를 이룬다. 하지만 사회 모순에 대한 분노가 개별 악당들을 넘어 제도 전체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지지는 못하는 것은 아쉬운 지점이다.

삼국지 (애니북스 / 전10권)

<고우영 삼국지>는 삼국지가 원래 가지고 있었을 법한 본연의 서민적인 재미를 극대화하여, 해학과 동시대적인 풍자정신으로 완전무장한 걸작이다. 인물들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 역시 발군인데, ‘싸나이 조조’ 대 ‘쪼다 유비’의 대결구도라든지, 관우와 제갈량의 신경전 등이 그 어느 다른 판본보다도 더욱 인간적이다. 흔히들 이야기하듯이 삼국지가 인간사에 대한 종합백과사전이고 처세전략의 교과서라면, <고우영 삼국지>는 한국에서 출판된 모든 삼국지들 가운데 으뜸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가루지기 (자음과 모음 / 전2권)

성인만화를 표방하지만, 대체로 고우영 만화는 질펀한 농담이 가끔 나오는 정도일 뿐 그다지 성적인 방향으로 심취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성애를 소재로 한 이야기에 도전한 것이 바로 <가루지기>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계통의 영원한 주인공 변강쇠와 옹녀의 이야기다. 물론 여기서도 지극히 해학적으로 접근해서, 끈적거림보다는 유머러스함이 돋보이는 작품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것이 바로 청소년의 성장기 성적 환상이 아닌 진짜 성인들의 에로문화가 추구해야할 경지가 아니던가.

십팔사략 (애니북스 / 전10권)

증선지가 편저한 고전 <십팔사략>은 창세부터 송나라까지 이어지는 중국의 고대사를 다룬 역사서다. 전설과 역사가 뒤섞였으며, 수많은 난세의 영웅들이 피고 졌던 이 광대한 줄거리를 만화로 제대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어느 한 명을 떠올릴 것이다. 십팔사략은 신문연재가 아닌 기획총서의 형식에 맞게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으며, 대중문화의 예술품이나 오락물로서뿐만 아니라 학습서로서도 탁월하다. 두산동아 출판사에서 원고를 전량 분실했던 안타까운 전력도 있다.

대야망 (학산문화사 / 전6권)

극진가라데의 창시자 최배달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 발표 시기 및 지면상 가라데가 아니라 태권도로 번안하였으며 일본에서의 여러 초기 일화들이 빠지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작품 자체로서는 탁월한 재미를 지닌 청소년 극화. 고우영 만화 특유의 풍자정신과 해학, 다양한 밀도를 오고가는 그림체의 변화무쌍함은 그다지 들어있지 않아서 아쉬움을 남긴다. 하지만 굵은 선과 역동적인 질감은 이후에 당시 문하생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방학기의 <바람의 파이터>에서 고스란히 계승되었다.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 수정불가/영리불가 —

고우영, 거장의 흔적 – <삼국지>와 <일지매> [기획회의 050502]

!@#… 5월 2일자 기획회의용 원고(따라서 2005.5.2까지는 이동불허. 그 정도 네티켓은 알아서 다들 지켜주리라 믿는다). 아직 개제안된 원고를 사전공개하는 건 평소 신조나 일반 도의에 어긋나지만, 시기가 시기인만큼 편집부도 너그러이 윤허해주겠지.

!@#… 여담이지만, 나는 만화가를 ‘화백’이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한다. 화백은 그림그리는 사람에 대한 극존칭인데, 만화가는 단순히 그림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림이야기꾼이기 때문이다. 화백이라는 용어를 이쪽에 가져다 붙이는 것은 왠지 미술계에 대한 자격지심의 표시 – 즉, 만화가도 그림 제대로 그릴 줄 안다는 식의 소극적 선언같이 들린다. 특히 고우영 선생같은 길이 남을 탁월한 이야기꾼에게, 화백이라는 호칭은 턱없이 부족하다. …여튼,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전까지는, 종목을 초월한 극존칭인 ‘선생’으로 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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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 거장의 남겨진 흔적 – <삼국지>와 <일지매>

2004년 4월 25일, 한국 만화의 큰 별이 떨어졌다. 한 시대를 풍미한, 아니 여러 시대를 관통하면서 계속 풍미해온 명실상부한 거장 고우영 선생이 지병으로 별세한 것이다. 일찍이 70년대에 스포츠신문이라는 공간에 연재만화라는 훌륭한 파트너를 소개한 <임꺽정>을 필두로, 마지막 그날까지 항상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역으로 특유의 해학과 입담을 발휘했다. 갑자기 이 지면에서 고인에 대한 추모 투의 평가를 할 생각은 없지만, 이번 기회에 고우영이라는 이름이 남기고 간 한국만화의 걸작들을 두 편만 다시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에서 발간된 수많은 삼국연의 판본 가운데 지금까지 가장 잘 팔린 것은 이문열 삼국지다. 하지만 가장 재미 있는 것을 꼽으라면 단 0.1초도 주저하지 않고 <고우영 삼국지>(애니북스, 전10권)를 선택하겠다. 단지 오락성이 뛰어나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삼국지가 원래 가지고 있었을 법한 본연의 서민적인 재미가 뛰어난 해학과 동시대적인 풍자정신 속에서 발현되고 있는 역작이다. 인물들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 역시 발군이어서 비단 ‘싸나이 조조’ 대 ‘쪼다 유비’의 대결구도뿐만 아니라, 관우와 제갈량 사이의 신경전이라든지 손씨 가문 여인들의 강인함에 대한 동경이라든지 하는 설정들이 독자들을 즐겁게 한다. <고우영 삼국지>의 등장인물들은 그 어느 다른 판본보다도 더욱 인간적이며, 우리 독자들의 모습에 가깝다. 흔히들 이야기하듯이 삼국지가 인간사에 대한 종합백과사전이고 처세전략의 교과서라면, <고우영 삼국지>는 한국에서 출판된 모든 삼국지들 가운데 으뜸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고우영식 고전 서사연출은 이 작품에서 찬란한 빛을 발한다. 때로는 마치 판소리의 소리꾼마냥 걸죽한 입담으로, 때로는 주인공들의 박진감 넘치는 상호작용으로 이야기를 이끄는 자연스러움이 독자들을 쉽게 몰입시킨다. 작가의 해설은 동시대(현대)의 여러 맥락들을 섬세하게 풍자하고, 내부의 주인공들 역시 그 과정에 천연덕스럽게 동참해버린다. 단순히 극이 전개되는 모습 자체에 의존하기보다는 마치 술자리에서 입담 좋은 선배 하나가 기분 좋게 세상사는 이야기 보따리를 하나 풀어내듯이 – 속칭 “노가리를 까듯이” – 고전은 고전이 아닌, 살아있는 우리네 세상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노가리 만화’의 전통은 스포츠신문 만화의 터주대감 같은 이미지로 굳어있는데, 고우영 만화가 바로 그 시조이자, 선구자이자, 마지막 순간까지 최강의 현역선수였던 것이다. 시각적 측면에서도 <고우영 삼국지>는 탁월하다. 선의 힘을 조율하여 헐렁한 유머와 강렬한 전개를 오고 가는 필치는 이미 달인의 경지를 오래전에 넘어섰고, 등장인물들을 묘사함에 있어서도 누구 하나 서로 혼동되지 않을 정도로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고우영 삼국지>의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제갈량의 죽음과 함께 이야기가 다소 급작스럽게, 실질적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물론 유씨 3형제와 제갈량이라는 주인공들이 극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첫 시작부분에서 황건적을 다룰 때 보였던 평범한 민초들에 대한 애착이 연재 종결의 시점에서는 다소 약해졌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아마 긴 연재기간동안 주인공들에게 생긴 애정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리라.

故고우영의 사극들은, 고전의 재해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순수창작물인 <일지매>(애니북스, 전8권) 역시 원전이 있으리라는 오해를 종종 사고는 한다. <삼국지> 직전에 그려진 이 작품이 그만큼 유명 고전들과 견줄 만큼 이야기의 스타일이나 완성도가 뛰어나다는 칭찬으로 해석해도 큰 무리가 없을 듯 하다. 버려진 서자 일지매가 청국과 일본에서 각종 신기한 기술을 익혀서 의적활동을 하게 되는 이야기인데, 일지매의 기구한 운명 속에서 당대 조선조 양반사회의 부패, 청나라와의 국제 정세 등이 가감 없이 펼쳐진다. 비록 권말해설에서 평론가 박인하가 지적했듯이 그 모순에 대한 분노가 왕조 자체나 시스템 전체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지지는 못해서 아쉬움을 남기지만, 일지매라는 일개 의적(!)에게 너무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당연한 행보일수도 있다.

<일지매>에는, 훗날 <삼국지>에서 완성되는 능청스러운 재담의 원형이 가득하다. 칸과 면을 가지고 하는 만화적 장난은 물론, 현실세계의 맥락을 자꾸 환기시키는 농담이 사이사이에 삽입되는 것 역시 여기서 이미 선보이고 있다. 목표를 위해서 여장을 일삼는 미형 남자주인공이라는 당시로서는 꽤 파격적인 설정도 고우영식 재담 속에서는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다. 그러면서도 진지한 극 전개가 필요할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색을 하고 나서는데, 그 분위기 전환이 너무나도 능숙하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을 떠나보내는 일지매의 비극이 절절하게 느껴지며, 양반의 부패에 속수무책 당하는 사람들이 연민을 자아내는 것이다. 이렇듯 비극과 희극이 끊임없이 교차되는 것이 바로 인생 그 자체 아닌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지매>는 오랜 연재기간동안 독자들을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만큼 본질적인 재미를 지니고 있기에, 연재 후 거의 3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 읽어봐도 그 재미가 고스란히 다시 느껴진다. 사람들은 보통, 이런 효과를 지닌 작품들을 ‘고전’이라고 부른다. 물론 장기 연재작이다보니 이야기의 흐름이 중간에 너무 확연하게 바뀌어버린다거나, 때로는 흐름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너무 많이 흘러가버린다든지, 주요 이야기 단위 간의 균형이 약간 어색해 보인다든지 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능숙하게 모든 것을 감싸안는 그림이야기 솜씨라면, 얼마든지 재미를 느끼고 감동을 받아줄 준비가 되어있다.

아쉽게도, 이제는 더 이상의 고우영 만화가 나올 수 없게 되었다. 명예의 전당감인 여러 작품들이 그의 업적을 기릴 뿐이다. 고우영이라는 높은 산을 넘어서 한국만화의 더욱 높은 경지를 개척할 숙제가 이제 후배 세대에게 남겨졌다. 그가 남긴 만화 유산들이 더 좋은 만화를 일구어내는 씨앗이자 거름이 되어주기를 바라며, 다시금 고인의 삼가 명복을 빈다. 일지매와 관우와 임꺽정이 그를 만화의 천국에서 반갑게 맞이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 Copyleft 2005 by capcold. 하지만 2005.05.02까지는 이동불허 —

[부고] 고우영 선생 별세

!@#… 고우영 선생 별세. 탁월한 해학으로 한 시대 – 아니 여러 시대를 풍미한 한국만화계의 거장 가운데 한명을 떠나보내다. 그가 남긴 만화 유산들이 더 좋은 만화를 일구어내는 씨앗이자 거름이 되어주기를 바라며, 삼가 명복을 빈다. 일지매와 임꺽정과 삼국지 수호전의 영웅들이 그를 어디선가 반갑게 맞이해주겠지.

그때의 둘리, 다시 만나다 – <아기공룡 둘리 애장판> [기획회의 050418]

!@#… 뭐야, 300번째 게시물이잖아 (경악. 100개를 채우기 전에 나간다고 내심 다짐했건만) !!! 음 뭔가 좀 더 강력한 걸로 채우고 싶었던 이벤트 번호였지만, 뭐 알께뭐람.

!@#… 새삼 느끼는 바지만, 이 지면처럼 한 원고지 15매 정도는 최소한 되어야 ‘신간소개’를 하면서도 뭔가 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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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둘리, 다시 만나다 – <아기공룡 둘리 애장판>

‘국민캐릭터’라는 천박한 표현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폭넓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덕택에 어떤 시에서 주민등록증도 부여받을 정도로 활용가치가 높은 가상적인 인기인이라면 나름대로 무언가로 불러줘야 할 법 하기는 하다. 워낙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전력질주하다 보니 여러 세대가 같이 즐길만한 공동의 무언가가 생겨나기 참 힘든 이 땅에서, 그런 국민캐릭터가 존재한다면 얼마나 보람찰까. 하다못해 부모세대가 자신들의 어린 아들딸들한테 문화적 취향을 즐겁게 자랑이라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 상에 가장 가까운 것을 억지로라도 하나 뽑아보라면, 열중 아홉은 분명히 한 만화캐릭터를 지목할 것이다: 아기공룡 둘리라는 녀석을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있다. 부모세대가 봤다는 아기공룡 둘리와, 지금 어린 아이들이 알고 있다는 그 아기공룡 둘리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부모는 아마 82년 보물섬에서 연재된 만화를 보았을 것이고, 87년 TV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된 스페셜을 보고 즐겼을 것이다. 지금의 아이들은? 아기공룡 둘리라는 캐릭터 이미지를 알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둘리의 배낭여행 DVD를 한번쯤 봤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하지만 둘리가 빙하타고 내려와서, 청승파 구박덩어리 더부살이로 시작했다가 점차 눈물겨운(?) 투쟁으로 하나씩 가족으로서의 위상을 얻어나간 과정을 공유하고 있을까. 집안의 가장 고길동이 애완동물 길동이 취급당하며 명랑만화식 환타지 모험길에 끌려다니고 겪는 고초에서 우러져나오는 서민적 페이소스를 같이 공감할 수 있을까.

글쎄, 모르겠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공감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작년 말부터 발간되기 시작한 <아기공룡 둘리 애장판>(김수정, 키딕키딕. 현재 3권 발매중) 덕분에, 이제는 적어도 이런 작품이라고 이야기를 건네볼 수는 있게 되었다. 이전에 나왔던 여타 판본들과는 달리, 이번 애장판에서는 드디어 작품 전체를, 양호한 인쇄품질로 만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작가와의 인터뷰 등은 반가운 보너스이기는 하지만, 작품 자체를 드디어 제대로 모아둘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마음은 풍족하다.

둘리를 동시대의 다른 명랑만화와 차별화시켰던 것들, 둘리를 둘리답게 만들어주었던 것들을 다시 한번 들춰본다. 라면 박스로 만들고, 오징어가 끌고가는 산타클로스 썰매. 은행을 건물채로 뜯어가는 엽기성. 타임코스모스를 움직이며 집주인을 애완동물로 아는 빨간 내복의 변태괴짜, 도우너의 충격적인 데뷔. 아 그래, 이런 것들이었지. 착할 겨를도, 교훈적인척하고 내숭을 떨 넉살도 없는 순수하고 직선적인 명랑함. 구석구석 찌들어 있는 생활의 무게와 그 향기까지. 기억이 돌아온다. 둘리는, 재미있는 만화였다. 귀여운 캐릭터이고 국민 어쩌고 이전에, 불온한 상상력으로 중무장한 도발적 개그였다. 둘리 만화가 완결된 이후의 90년대 이래로, 둘리의 이미지를 이어받아 재생산된 모든 여타 둘리 프랜차이즈에서 깨끗하게 도려내졌던 바로 그 부분이다. 지금은 마치 티본 스테이크 같이 포장되어 칭송받지만, 원래는 비계가 덕지덕지 끼어있는 구수한 삼겹살이었다. 바로 그 비계맛 때문에 둘리는 특별했던 것이다.

<아기공룡 둘리 애장판>은 지나치게 멋부리지 않아서 반가운 책이다. 물론 번들거리는 은색의 하드커버 표지는 확실히 이질감이 들지만, 상품을 고급스러워 보이게 하고싶다는 의도의 그 정도 오버는 그냥 대범하게 받아들여주자. 하지만 요새 아이들의 취향에 맞춘다고 공연히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 채색을 집어넣어서 풍미를 해치지도 않았고, 요즘 감수성에도 통할만하다고 자의적으로 선별한 소위 베스트 에피소드들만 골라 넣는 만행도 저지르지 않았다. 날림으로 대충 넘겨서, 완성도가 떨어지는 일화들일지라도 굳이 잘라내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원래대로 우직하게 내준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물론 작가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부족한 지점, 아쉬운 부분들이 많이 눈에 들어와서 몸둘바를 몰랐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정도는 독자들의 즐거움을 위해서 참아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소원이 이루어져 있다. 정말 별것 아닌것처럼 그대로 내는 것이야말로 ‘별 것’이다. 유능한 작가가 젊은 날의 가장 찬란했던 때의 에너지를 쏟아넣은 작품이 얼마나 멋진 빛을 발할 수 있는지, 감탄해볼 기회이기도 하다. 어설프게 멋진 작품을 보면, 작가가 이후의 이야기를 계속 그려줬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하지만 이 정도로 완성된 재미의 작품을 본다면, 작가가 제발 절대 이 작품에 화사첨족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물론 많은 것을 감수해야 한다. 우선 원래대로 나왔음에 반가워할만한 독자들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둘리는, 추억상품으로 포장하고 향수를 자극해서 어른 매니아들을 노리기에는 너무 지금까지도 이미지가 대중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좀 더 최신 유행을 따라 다니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 취향 속에 캐릭터 이미지로서의 귀여운 둘리는 있지만, 구박받고 청승맞으며, 동시에 기발한 역전의 칼날을 가는 80년대 정서 가득한 서민 둘리는 없다. 아니 그런 둘리는 아예 이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이 책을 사랑해준다는 말인가?

이 책을 사랑해 주어야할 사람들은, 좋은 만화를 보고 즐긴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지를 잊어버리지 않은 – 혹은 않았다고 자부하는 – 모든 이들이다. 좋은 만화는 취향은 탈 수 있지만 원형적인 재미를 간직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현실세계의 시간의 오랜 흐름에 따라서 시대적 맥락의 효과가 사라질 수는 있지만, 좋은 만화를 보다보면 그 맥락들이 다시 하나씩 머릿속에서 되살아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진정한 만화 즐김이들 말이다.  국민캐릭터 둘리가 아닌, 즐거운 만화 둘리로 다시 돌아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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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감성만화, 삶을 제대로 건드리다 – <휴머니멀> [기획회의 050404]

!@#… 언제나처럼, 이번에 발간된 기획회의의 원고. 박순구 작가의 작품들은 soon9.com 에 가면 연재를 볼 수 있다.

!@#… 여담. 비평 본문에서는 살짝 언급했고 그다지 이 작품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하드하게 엮어낼 필요성은 느끼지 않았지만, 가해자가 입은 피해에 대한 묘사방법이라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 물론 가해자도 궁극적으로는 가해/피해자를 만들어내는 시스템의 ‘피해자’고 어쩌고… 뭐 다 좋단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해자가 입힌 피해와 그 가해자가 입은 피해를 같은 레벨에서 다루어버리면 강력한 부작용 한가지가 생긴다: 가해-피해 관계에서 발생한 해악 자체가 희석된다 (주류 일본인들이 히로시마 원폭 타령할때 맨날 써먹는 비열한 방법 아니던가).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에게 동정을 던지기 보다는, 가해와 피해의 모순 자체를 부각시키는 성찰적인 접근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가해자에게는 가해자로서의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언젠가 다른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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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만화, 삶을 제대로 건드리다 – <휴머니멀>

인간은 자신을 여타 동물과 구분 짓기 좋아하는 신기한 동물이다. 그래서 인간적인 속성들에 대한 수많은 규정들을 마련해놓고는, 그것에 집착적으로 매달린다. 역설적으로, 그런 근거 빈약한 자존심의 결과 이야기로서 강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의인화’된 동물들의 이야기다. 동물들에게 인간적인 속성을 부여해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은 동물들과 꽤 근본적으로 다르며, 몇 안되는 공통점을 발견했을 때 그것이 대단히 빛나 보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는 것이다. 게다가 사실, 인간이라는 종족은 워낙 상상력이 빈약해서 자신들의 생활과 사회관계의 틀과 비슷한 모습으로 치환해서 보여주지 않으면 이야기로서의 재미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니까 말이다. 한쪽 측면에서는 의인화된 동물의 이야기가 우리와 의외로 닮았다는 것을 보면서 현실에 대한 풍자나 성찰을 느끼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동물 이야기로 표현되었다는 것에서 안도감을 느끼면서 부담감을 줄어든 채로 받아들인다. 한마디로 의인화된 동물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그것이 뻔히 우리 이야기인 줄 알면서도 기꺼이 남의 이야기인양 속아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미키마우스라는 쥐는 2차 대전 징병에 앞장섰고, 반대로 아트 슈피겔만의 <쥐>에 등장하는 쥐들은 아우슈비츠의 과거와 유산을 담담하게 뒤돌아보게 만들었다.

<휴머니멀>(박순구/황매)은 동물을 등장시켰지만 사실은 인간 이야기를 하겠다는 동물 의인화 계통 작품의 본질을 그대로 건드려 보겠다는 의지가 제목에서부터 물씬 풍겨나오는 작품이다. 휴먼+애니멀, 이 정도면 대단히 노골적인 포부다. 그 다음으로 궁금해지는 것은, 인간들 살아가는 모습의 어떤 부분을 뒤돌아보게 만들 것인가라는 점이다. 보통 의인화 동물 이야기에서는 친구들 간의 실랑이나 성격 다른 사람들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주로 구사하곤 한다. 그쪽이 훨씬 쉽기 때문인데, 거꾸로 이야기하자면 그만큼 얄팍한 수준에 머무를 가능성 역시 높다. 그런데 <휴머니멀>은 그보다 훨씬 우직하다. 그의 흰 생쥐는 이라크로 파병을 나가서 슬픈 최후를 맞이하고, 생쥐 마을에 온 침팬지 아저씨는 불법노동으로 연행된다. 비둘기는 교육현실에 갑갑해하며 탈출의 용기를 이야기하며, 수달들은 철거촌에서 쫒겨난다. 허투루 채우지 않고 진지하게 덤벼들었다는 점에서 우선 합격점을 부여하고 작품을 감상해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작품 자체의 알찬 구성과 치밀한 그림실력을 보며 이내 다시금 평가를 한 단계 더 높인다. 평평한 색감의 2차원에서 토실토실한 털 질감까지 자유자재로 오가며, 각각의 단편 스토리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그때그때 그림의 밀도를 조절하는 실력은 만화라는 매체에서 빛을 발한다. 원래 개인 홈페이지에서 웹 연재했던 칸구성을 책 형식과 잘 조화시켜서 출판물로서 깔끔하게 읽히게 만든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기술적 능력을 믿고 과욕을 부리지 않고 꽤 직선적으로 한 가지 이야기씩 정리해나가는 호흡이 좋다.

개별 작품들은 오랜기간 동안 자유롭게 하나씩 발표된 것들이다 보니, 하나의 주제로 완전히 엮여진다거나 혹은 모두 동일한 수준의 완성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게다가 각각 작품이 만들어졌던 시기적 맥락을 단행본에서는 전혀 밝혀주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런 지점들이 더욱 혼란이나 오독의 여지를 남길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이라크 파병반대라는 시기적 맥락이 상당히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는 첫 번째 이야기 <어느 흰 쥐 이야기>는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 전쟁의 비극을 감성적으로 그려내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 속의 한국군 이라크 파병이 어디까지나 가해자(의 친구를 빙자한 부하) 입장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그런 가해와 피해 사이에 있는 모순을 직시하지 않고 다소 평면적으로 접근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또 한 치와와 견의 마지막 비극적 사랑을 그린 <사랑합니다>라는 단편은 동물을 통해서 인간사를 바라본다는 이 시리즈의 전체 컨셉에서 볼 때 다소 이질적이다. 결국 우리들이 어떤 사랑하는 대상을 오매불망 그리는 것을 비유하는 느낌이라기보다는, 그냥 동물이 주인을 기다리는 ‘집 찾아간 백구’의 감수성에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하필이면 책표지에 인용된 두 작품을 위에서 언급하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이 책은 빛나는 순간들이 더욱 많고 돋보인다. 골목에서 술먹고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을 외쳐보는 팬더의 걸음을 따라가는 <당신의 골목은 어떤가요>는 동물 의인화의 매력을 극대화하고 있다. 느리게 어슬렁거리는 팬더의 움직임이, 이 작품에서는 취기와 실연의 슬픔이라는 감정을 부여받는다. 골목에 울려 퍼지는 미소와 눈물은 요새 유행어로 치자면 ‘백만불’ 짜리다. <나에게 쓰는 편지>에서 치매 걸린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눈작고 얼굴 비슷한 동물인 두더지를 활용한 센스는 절로 감동을 불러온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작품이자 가장 백미인 단편인 <고래가 되고 싶어요>에서는 철거민 이야기를 천연기념물인 수달에 비유해서 풀어나가고 있다. 어린이 그림일기를 통해서 묘사되는 어린이 시각으로 걸러진 현실과 진짜 현실의 비정함의 대비는 오세영의 걸작 <부자의 그림일기>의 적자로 견줄 수 있는 강력함을 발휘한다. 그리고 단지 우린 참 불쌍해요라는 논조가 아니라, 우리 집이  허물어지고 새 집을 짓는데 우리는 거기서 살 수 없다는 것의 부조리함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통찰이 녹아들어가 있기에 더욱 값지다.

수많은 에세이툰이니 감성만화니 하는 것들이 항상 인간성을 이야기하고 따스함을 주장한다. 그러나 진짜 인간성과 따스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말랑말랑한 감성의 달콤한 조미료에 도취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살아가는 세상의 현실이라는 ‘진국’에 대한 직시다. <휴머니멀>이 한참 에세이툰이 붐을 이루었던 2-3년 전에 나왔더라면, 이쪽 장르는 아마도 지금보다 수십배 더 좋은 방향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뭐, 사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휴머니멀>의 파급력이 널리 퍼져서 많은 독자들이 감성만화에 대한 새로운 – 아니 애초부터 근본적이었던 – 즐거움에 눈뜨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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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대등한 만남을 위하여 – <오세영 한국 단편...> [기획회의 050320]

만화와 소설, 대등한 만남을 위하여 – <오세영 한국 단편소설과 만남>

공식기관에서 ‘명작’ 한국 만화를 꼽아야 할 때마다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품이 있다. 대중적인 인기로 세상을 휘어잡은 것도, 희대의 컬트로 숭배받은 것도 아닌데 거의 예외가 없어서, 최근 프랑크푸르트 도서박람회를 위해 선정된 100대 도서에도 한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오세영의 <부자의 그림일기>라는 작품집이다. 80년대 <만화광장> 류의 성인만화잡지에서 발현되기 시작했던 진지한 사회발언과 만화양식의 가능성에 대한 추구가 꽃을 피웠던 모범사례중의 하나가 바로 당시 창작되어 나왔던 오세영의 단편 작품들이었다. 성인만화를 휩쓸던 리얼리즘 풍 이야기와 민중문화 담론 에서 열심히 주장해온 민중적 시각의 사회참여의식 등 다양한 시대정신의 영향을 소화해낸 작품들이었던 것이다. 90년대 초에 묶여져 나온 이 작품집에서 또하나 즐거운 발견은 바로 월북작가 단편소설 작품선이었다. 두고두고 오세영의 최고작 중 하나로 인용되고 있는 안회남 원작의 <투계> 등이 특유의 집요하게 토속적인 화풍으로 펼쳐졌던 것이다.

최근 <오세영 - 한국 단편소설과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이러한 단편소설 원작의 오세영 만화 단편들을 묶어낸 작품집이 출간되었다. 마치 수록 작품들의 문학적 권위를 형상화라도 하는 듯, 한 권의 묵직하고 커다란 800페이지짜리 하드커버 양장본으로 나와서 책장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작품들은 <부자의 그림일기. 작품집에도 실렸던 월북 작가 단편선, 이후에 작업되어 단편문학선이라는 시리즈로 나온 바 있는 여러 작품들이 고루 집대성되어 있다. 그 중에는 <메밀꽃 필 무렵> 같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원작도 있고, 문학 전문서 귀퉁이에서조차 찾기 힘들었던 것도 (예를 들어 월북 작가) 많다. 이 책에서 원작으로 선택된 작품들은 주로 1900년대 전반의 단편소설에 집중되어 있는데, 생각해보자면 그 당시 많은 작품들이 바로 고된 사회적 현실 속에서 살아나가는 민중들의 삶을 비정할 정도로 생생하고도 비극적으로 그려냈던 경향이 있었다. 바로 80년대식 리얼리즘/민중문화와 일맥상통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런 감수성을 확실하게 재현하고 싶은 작가적 욕구에 충실하게, 오세영이 재창조한 만화들은 적극적인 재해석보다는 충실한 재현에 무게를 두고 이루어진다.

원작에 있는 대사는 토씨 하나 생략하지 않고 그대로 재현해내는 것이 기본이며, 각 장면의 풍광이나 캐릭터들의 생김새와 행동거지 또한 대단히 자연스럽다. “쇠똥을 그릴 줄 아는 작가”, “할아버지를 할아버지 처럼 그리는 작가” 등의 찬사 처럼 시각적 장면묘사의 충실함은 특히 한국의 근대나 토속적인 풍광을 보여주는 이야기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원작자가 소설에서 묘사한 것 보다도 더욱 원작같이 느껴질 정도로 그 작품들의 원작 충실도는 대단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들이 사진집이나 영화 스틸컷 모음 같은 느낌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88올림픽 전후를 무대로 하는 단편 ‘부자의 그림일기’에서 선보인 그림일기 + 무성극 만화의 교차편집이라는 형식실험이 보여주었듯, 오세영은 만화형식의 장점을 적극 활용하는 것에 결코 문외한이 아니다. 칸 간 시선흐름을 고려한 화면구도라든지, 극적 긴장감을 높여주는 만화적 전개방식 등은 원작소설 만화화 작품에서도 충분히 사려깊게 활용되고 있다. 다만 원작의 유려한 흐름에 거스르지 않도록 명백하게 파격적인 쾌감을 극도로 자제할 뿐이다.

이 작품들에서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하기로 작정한 접근의 장점은 명확하다. 문학적 평가가 높은 소설들을 애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적당히 마음대로 단순화시켜온 대다수의 ‘명작만화’ 류들이 쌓아온 만화에 대한 편견을 무너트리는 것이다. 문학이 진화의 과정 속에서 쌓아온 섬세미묘한 다층적 의미와 감성의 서술구조들을 과연 만화에서도 해낼 수 있을까라는 폄하는 ‘투계’ 같은 작품을 보면 확실히 날려버릴 수 있다. 영화화 등 다른 매체이식에서 항상 문제시되는 원작의 문제의식이나 감수성의 왜곡이라는 부분 역시 이 정도의 재현 충실성 앞에서는 내밀 자리가 없다. 그렇다면 단점은? 쉽게는 ‘독자적인 해석이 들어가지 않았으니 그 작가의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는 식의 단순한 비난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원작의 선정에서 이미 작가의 자의식이 개입되고 충실한 재현이 바로 창작의 의도라면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다. 단점으로 제기할 만한 보다 중요한 지점은 이 책에 묶인 작품들이 상당수가 90년대 및 그 이후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80년대의 작품 또는 당시의 문제의식에 기반하여 만들어내는 작품들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리얼리즘이나 민중문화 개념이 항상 강조해온 것이 바로 현실참여이라는 측면을 놓고 생각해볼 때, 오늘날의 세상과 문제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80년대식 경향의 프리즘으로 투과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동시대적인 문제의식이라는 척추가 빠지고 ‘순수문학’의 예술지향적 자아도취에 빠질 위험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그것이 바로 작품에 투여된 노력과 재능이 생명력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진짜 고민이다.

앞서 말했듯, 책의 출판상태는 그야말로 성의있는 프로듀싱의 결실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만화책들은 각각의 실제 내용에 어울리는 책 모양새가 아니라 일괄적인 저가 대중오락물의 모양새라는 틀을 강요당했다. 자가 대중오락물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만화의 폭넓은 세계를 그 범주안에 다 우겨넣을 수 있을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오세영 작품집은 고전 문학의 깊이와 만화작품의 진지한 접근의 무게에 걸맞는 무게의 책으로 나왔기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옥의 티는 오히려 과잉 프로듀싱이라는 부분인데, 말미에 순 우리말 용어에 대한 해설집을 첨부한 것은 좋지만  본문내용에 각주표를 달아서 독서의 흐름을 끊기게 했다든지 하는 등의 과유불급성 결과가 여기에 속한다.

이 책은 소설 원작 만화 작품을 모은 만화책이다. 하지만 소설을 읽기 싫어서 쉽게 슬쩍 줄거리만 훑어보려는 게으름증을 해소하기 위한 만화들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오히려 소설을 읽어보고 그것을 만화로도 다시 한번 읽어보거나 또는 반대 순서로 읽어서, 그 감상을 증폭시키기 위한 것에 가깝다. 만화와 소설의 대등한 만남, 그리고 독자에게는 그 화학작용에서 오는 몇갑절로 증폭된 감상을 주기 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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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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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은 살아나고 또 살아난다

!@#… 주류 프로적 감수성이 담긴 아마투어식 창작 작품들이 있다. 예를 들어 1인 독립 애니메이션이라면 다들 프레데릭 백 같은 성향을 생각할 때 신카이 마코토가 블럭버스터형 SF <별의 목소리>를 들고 온 것 같은 그런 것. 개인적으로는 꽤 긍정적으로 보는 경향인데, 예술적 전위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류의 호소력을 즐기지 못하는 건 바보라고 생각하니까. 만화의 경우, 원래부터 두터운 동인창작문화 덕분에 더욱 간단하다. 이런 류의 작품들이 최근 더욱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역시 인터넷 등을 통해서 실제 프로 데뷔의 길이 넓어졌기 때문. 그리고 만화가 독자 대중들과 만나는 공간 역시 더욱 쉽게 다양해지고 있다.  만화 지면이 더 융통성 있어진 셈이다. 예를 들어 최근 주목하고 있는 <사룡의 무녀> 같은 경우만 해도, 비디오 게임 전문 커뮤니티 룰리웹에서 연재되고 있으니까. 물론 아마투어 창작란.

(제1화)

클릭, 클릭, 클릭, 클릭

!@#… 경향신문 만화섹션 <펀>이 소멸당한지 한달 남짓. 하지만 매거진x가 매일제로 바뀌면서, 조남준의 <메모리즈>, 최규석의 <습지생태보고서>, 최호철 외의 <위클리 스케치>, 마정원의 신작 등이 다시 지면을 획득했다. 엠파스가 만화 사업을 접으면서 붕 떳던 강도하의 <위대한 캐츠비>는 최근 미디어다음으로 이적, 활동 재개했다. 지면은 사라져도 또 만들어진다. 폐허같아보여도 그 밑에는 또 새로운 싹이 트는 것이다(나우시카냐?-_-;). 그 와중, 지면의 권력과 작품 자체의 힘 사이의 균형에서 미묘하게 후자가 힘을 더 얻어나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지면이 작품의 존폐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지면이 작품을, 작품이 지면을 서로 선택해가면서 융통성있게 생명력을 이어나가는 이상적인 관계를 향해서, 지금도 한발짝씩 더 가까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걸 앞당기기 위한, 다양한 지면을 만들어 내려는 노력들인 것이다. 공모전이든 종이잡지든 웹진이든 홍보물이든 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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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그리며 세상에 자리잡기 – <그림자 소묘>[으뜸과 버금 0502]

만화는 자유로운 표현방식이다. 그림과 글을 거리낌 없이 섞어 쓰며, 그것도 그런 그림들을 여러 개를 마음대로 공간 속에 분할하고 흩뿌리고 붙여넣는다. 세밀한 그림과 대충 그린 여백 넘치는 작대기 형상들이 공존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조화를 이루도록 지휘감독이 행해질 때 비로소 진가를 드러낸다 – 바로, 이야기의 효과적인 전달이다. 만화의 생명은 이야기로서의 재미(말하자면 길어지겠지만, 여기서는 우선 ‘독자를 끌어들여서 작품을 끝까지 만족스럽게 읽도록 만드는 힘’ 정도로 적당히 규정하고 넘어가자)이고, 그것이 확보되었을 때 비로소 그 속에 담긴 정서와 메시지가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유대감을 만들어 깊은 울림을 준다. 이야기를 든든한 핵심축으로 놓고, 그것을 가장 확실하고 재미있게 표현할 수 있는 기법들을 마음껏 자유롭게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만화의 매력이다.

<그림자 소묘>(김인/새만화책)라는 작품이 소리소문 없이 출간되었다. 홍보는 기본적으로 출판사의 마케팅 역량 문제이기는 하지만, 좋은 작품이 아무런 주목도 못받고 그냥 묻혀버리는 경우는 역시 언제라도 안타깝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시골에 살던 소녀가 미술 공부를 하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와서 새로운 환경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이다. 작품은 두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는 소녀가 서울에 올라와서 미술학원 강사와 친해지며 낯선 사람들이 만든 그 공간 속에 자신을 적응시키는 이야기, 후반부는 자신의 존재감을 잃어버린 다른 소녀가 주인공과의 상호교류를 통해서 비로소 이 세상으로 나오게 되는 이야기다. 두 이야기는 절묘하게 서로 연결되고 대칭되어, 세상과의 만남이라는 하나의 큰 주제를 따뜻하게 이야기한다.

<그림자 소묘>는 위에서 이야기한 만화의 기본원칙에 충실한 만화다. 사람의 존재감이란 것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서 비로소 만들어진다는 것을 미술의 소묘에서 이야기하는 그림자 개념으로 치환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발상이 신선하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 속에 피터팬과 웬디의 그림자 소동을 모티브로 섞어넣어서 자연스럽게 흥미를 돋구는 능숙한 구성 솜씨가 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위해서 다양한 시각기법들이 총동원된다. 사실 주류 상업만화들이 펜과 잉크로 가는 것에 비해서 콘테와 붓으로 그렸다느니 하는 것은 솔직히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화제 거리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콘테 질감의 소묘, 2차원적 형상과 여백의 붓선들이  각각 정말로 가장 효과적으로 이야기의 재미를 확대시켜줄 수 있는 그 순간에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밀도의 소묘 그림체로 묘사되는 인물들, 존재감을 잃었기에 하얀 여백 면과 붓선 만으로 형상화된 소녀. 현실의 거리와 그림으로 그려진 지도, 그리고 그 두가지가 섞여들어가면서 만드는 풍경. 따뜻하고 탄탄한 이야기를 돋보이게 만드는 멋진 ‘만화적’ 표현이다.

물론, 그림 질감의 밀도가 전체적으로 높아서 주류 만화에만 너무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약점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대중문화로서 즐기려는 작품에 대해서는 항상 작품으로 들어갈 진입장벽이 무척 낮기를 바라기 때문이다(이런 경향을 비웃기 위해서, 움베르토 에코는 소설 <푸코의 진자>에서 첫 챕터를 일부러 집요할 정도로 난해하게 썼다). 특히 만화에 대해서는 더욱 더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생명력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라면 언젠가는 결국 독자에게 도달하고 만다. <그림자 소묘>가 그런 작품이 되어줘야 한다고 믿는다.

[으뜸과 버금 2005. 02.]

(*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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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줌의 신인만화작가 계약서… 혹시 개그?

!@#… ‘만화전문’ 무가지 데일리줌. 지난호 <우리만화>에서 그곳의 신인 작가 계약서에 대한 기사가 나갔다. 더헉…;;; 만담난무에 봉한다.

!@#… 이런 엄청난 발상의 계약서를 내민다는 것도 개그고, 이런 걸 덥석 싸인하고 앉아 있다는 것도 개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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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화 05년 1월호] 동향 – ‘ㄷ’신문의 불공정한 신인 연재 계약서 유감 
 
‘노비문서’인가, ‘신체포기 각서’인가?
신인만화가를 날품팔이 취급 말라!
– ‘ㄷ’신문의 불공정한 신인 연재 계약서 유감

편집부

“대~한~만~화 대단한 문화가 되겠습니다.”

지난해부터 무료 만화신문이란 새로운 형태로 독자에게 다가가고 있는 ‘ㄷ’신문의 웹사이트 초기 화면에 떠있는 문구이다. 이 문구의 의지처럼 ‘ㄷ’신문은 그동안 위축되어가고 있는 한국만화시장에서 만화무가지라는 새로운 매체를 만들어 독자에겐 만화를 접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작가에겐 원고를 실을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나름의 역할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속에서 ‘ㄷ’신문은 지난 2004년 12월 제1회 신인공모전을 실시하였다. 12월 4일이 마감이었던 이 공모전은 예전 만화잡지사들의 공모전과 달리 상금 없이 ‘일정기간의 연재자격 부여 및 그에 따른 원고료 지급’이라는, 어려워진 경제사정을 반영한 듯한 시상내역으로 시선을 끌었다. 그런데 최근 확인된 이 공모전 당선자들에 대한 연재 계약서의 내용이 작가들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되어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ㄷ’신문이 계약의 주체인 “갑”으로 되어 있고 작가가 “을”로 되어있는 이 계약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연재원고료’와 ‘저작권’ 부분 등이다.

저작권 양도 대가가 고작 원고료 3만5천원

먼저 이 신인 공모전에서 중심 되는 시상 내역이었던 ‘연재권과 원고료’ 부분을 살펴보자. 이 계약서의 ‘제1조 기본조항’을 보면 작품명과 작품 내용, 연재기간은 시상자에 따라 상이하지만 연재방법 일일연재에 연재료가 ‘1일 3만5천원’으로 되어 있다. 이는 보통 원고 매수 당 계산되던 기존의 원고료와 다른 계산법으로, 1일이라는 단위는 그 일일에 게재하는 원고의 수와 상관없이 하루의 일당으로 3만5천원을 지급하는 조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ㄷ’신문 측에서는 이 계약서를 제의받은 작가에게 하루 2페이지씩 원고를 게재하라고 했다고 한다. 극화도 아닌 카툰작가였던 이 작가의 원고료는 작품 1점당 1만7천5백원이 되는 것이다. 10년 동안 인상되지 않고 있는 일반적인 만화잡지의 신인 극화 원고료 1페이지 당 4만원 선에도 한 참 못 미치는 액수다. 더군다나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서 통상 극화 1페이지보다 높은 금액이 책정되는 카툰 작품 이란 걸 감안하면 더욱 더 박한 원고료라 아니할 수 없다.

다음으로 더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이런 원고료의 대가로 작가가 넘겨줘야 하는 저작권과 관련한 부분들이다. 사실 원고료는 어려운 경제상황을 감안하여 작가와 신문사가 협의하여 조정할 수도 있는 사안이다. 하지만 저작권 부분은 결코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제4조 이용관계’의 내용을 보자.

2. “을”은 본 계약에도 불구하고 위 연재만화의 저작권을 보유한다.
3. “을”은 “갑”에게 위 연재만화의 복제권, 공표권, 방송권, 전송권, 배포권. 2차적 저작물 등의 작성권 등의 저작물을 이용할 수 있는 일체의 권한 (“갑”의 인터넷 사이트에 “을”의 원고를 연재하는 권리 포함)을 부여한다.

3항의 내용은 바로 위 2항을 무색하게 만든다. 2항에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다.”고 하고서 3항에서 바로 저작권의 핵심 알맹이를 ‘ㄷ’신문에게 부여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상 작가에게 저작권 일체를 포기하라는 이야기와 다름없다. 이 조항이 저작권의 내용과 그 하부 내용을 이해하고 그것을 계약관계에서 특약시의 효과를 이해하고 작성한 문건으로서, 이런 ‘사실상의 저작권 일체의 포기’에 대한 대가로 그에 상응하는 처우가 존재한다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이에 대한 대가는 다음의 조항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5. 제1조의 원고료는 제3항, 제4항의 대가도 포함되어 있다.

위 3항의 ‘사실상의 저작권 일체의 포기’에 대한 대가로 제1조의 원고료만을 지급한다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신인이라 하더라도 한 작가의 고뇌와 노력이 들어간 작품의 저작권 일체를 1일 3만5천원의 원고료로 양도받겠다는 듣도 보도 못한 최악의 ‘노비문서’라 불리 울만한 내용인 것이다. (모 변호사는 이 계약서를 보고 “신체포기 각서 수준이네요.”라고 혀를 내두르기도 하였다.) 제5조의 계약의 해지 및 연장의 사유에 보면 작가에 대한 불평등성은 더욱 배가 된다.

제5조 계약의 해지 및 연장
1. 다음 각 호에 해당하는 사유가 있을 경우 “갑”은 “을” 에게 1주간의 기간을 정하여 최고하고 그럼에도 시정이 되지 아니하면 본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가) 위 만화의 인기도가 하락하여 계속 연재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되는 경우
   나) 위 만화가 “갑”의 편집방향과 다르게 진행되는 경우
   다) “을” 이 본 계약의 각 조항에 위반한 경우
2. “갑”이 편집방향을 전환하는 등으로 위 만화의 연재중단이 결정된 경우
3. 위 연재만화의 인기가 높을 경우 “갑”은 “을”의 동의를 얻어 제 1조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연재기간을 1개월 단위로 연장할 수 있다.

5조의 내용에 의하면 “갑”의 사정에 따라 임의로 계약을 해지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명시되어 있다. 더욱이 3항의 내용은 신인공모의 결과로 연재되는 이 작품의 연재 기간 이후에도 이 작품의 인기가 높으면 다른 조건으로 이후 재계약하는 것이 아니라 본 계약을 1개월 단위로 더 연장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인기가 올라 독자의 반응이 좋아도 1일 3만5천원에 저작권 일체의 권리를 가져간 채 이 계약을 더 지속시키겠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작가가 살아야 신문사도 산다

작가 “을”의 의무만이 있고 ‘ㄷ’신문 “갑”의 권리만이 존재하는 이 계약서를 보며 21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한 만화작가와 작품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대해 분노를 넘어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다. 더욱이 저작권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던 예전과 달리 이 계약서는 저작권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하고 저작권에 대한 모든 권리를 거의 공짜로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가 보이기 때문에 더욱 문제시된다.

저작권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는 신인작가들에 대한 이런 행위는 가뜩이나 어려운 만화계의 현실 속에서 또 하나의 대안적인 만화매체로 자리매김한 ‘ㄷ’신문의 위치를 생각해 볼 때 더욱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계약서의 내용이 이번 공모전 당선자들만이 아니라 신인작가들에 대한 처우의 일반적인 표준으로서 ‘ㄷ’신문에서 사용하는 것이라면 한국만화의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 할 신인작가들의 미래를 이 ‘노비문서’를 통해 꺾어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ㄷ’신문 측은 지금이라도 이 계약서의 부당한 조항들을 인정하고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계약을 제시하고 수정하여 작가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기 바란다. 이는 작가만이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더 우수한 신인들이 ‘ㄷ’신문으로 모여들어 ‘ㄷ’신문의 핵심 콘텐츠인 만화작품의 질적 상승과 그로 인한 구독율의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신인작가의 원고료와 저작권을 착취하는 만큼씩 ‘ㄷ’신문의 미래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ㄷ’신문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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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강도영, 강풀만화를 그리다 [시사저널 050130]

!@#… 시사저널 올해 설특집호에 기고한 또 하나 글 기고. 항상 그렇듯이 여기 올리는 것은 원래 보낸 오리지널 버젼, 잡지에 실리는 것은 그쪽 편집부를 거친 버젼. 예를 들어 잡지기사에는 ‘칸을 없앴다’라는 그림설명이 나오지만, 사실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건 ‘경계선을 없앴다’지, 칸 구분 자체를 소멸시킨 건 아니니까. 뭐 원래 전문지가 아닌 일반 저널리즘의 차원에서는 그런 식의 미묘한 문제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누가 행여나 이 글을 퍼나른다면, 개인적으로는 역시 이쪽 버젼이 퍼날라지는 것을 선호.

!@#… 본문에도 언급한, ‘온라인 만화 1세대‘라는 호칭의 작위성에 대한 생각. ‘세대’라는 건, 그 이후나 이전 세대와 확실한 성격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경향성을 파악하기 위한 범주구분이다. 무슨 등수놀이니 원조 경쟁이니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한마디로, 2세대 없이 1세대를 이야기하는 건 완전한 엉터리라고. 특히 1세대, 최초 어쩌고 하는 것은 훨씬 더 많은 주의를 필요로 하는데, 자칫하면 그 이전의 역사를 리셋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순정만화는 80년대에 생겨났다”고 하면, 필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이전 순정만화의 모든 역사 – 민애니, 엄희자 등등 커다란 이름들과 그들의 독자, 문화들 – 이 그 존재 자체를 깡그리 소멸당하게 되는 것이다. 초보자나 문외한들이 그런 부주의한 소리를 하고 다니는 건 일정 정도 어쩔 수 없지만, 이쪽 판의 ‘선수'(또는 선수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그러고 다니는 건 무척 당혹스러운 일이다. 뭐… 그냥 푸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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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강도영, 강풀만화를 그리다

김낙호 / 만화연구가

  작년, 한국의 수많은 온라인 사용자들은 <순정만화>라는 당혹스러운 제목의 만화를 우연히 발견했다. 아니, 작품 제목이 그냥 순정만화라니, 마치 주말 연속극 제목을 ‘멜로드라마’라고 붙이는 격 아닌가. 하지만 작품은 무척 재미있었고, 특히 온라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 결과 조회수가 하루 200만까지 올라 가고, 단행본이 출판 불황 속에서도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며, 일본과 1억원짜리 출판계약을 맺는 등의 성공을 보여줬다. 강도영이라는 본명보다 강풀이라는 필명이 더 잘 알려져 있고 그 이름을 딴 ‘강풀만화’라는 총칭이 어느 틈에 마치 하나의 장르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된 지금, 그 작품들이 폭발적 인기를 끌게 된 매력이 과연 무엇인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온라인에 적응하는 법

  강도영의 그림체는 기존의 만화 장르관념에서 보자면 애매한 위치에 놓여있다. 왠지 4등신스러운 인체비례를 지닌 깔끔하고 귀여운 모습이라고 보기는 힘든 캐릭터들, 그렇다고 해서 강한 개성의 스타일리쉬한 매력을 발휘하지도 않는다. 그 때문인지, 실제로도 데뷔를 위해서 여러 출판사를 전전했지만 거듭 실패했던 과거를 스스로 고백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몇몇 잡지, 그리고 한창 젊은 작가들의 짦막한 개그물을 새로 수용하려고 움직이고 있는 스포츠신문에서 가끔 작품발표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에 그쳤다.

  하지만 강도영이 ‘강풀’로서 대중적 사랑을 받는 스타로 발돋움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인터넷이라는 둥지를 통해서라고 할 수 있다. 강풀만화의 첫 대중적 히트작은 고료를 받고 잡지에 연재했던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홈페이지인 강풀닷컴(http://www.kangfull.com)에 그냥 그리고 싶어서 그렸다는 만화들이었다. ‘지치지 않을 물음표’라는 범주로 묶어서 2002년부터 그려온  이런 일련의 만화들은, 크게 세 가지 이야기 거리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엽기 개그, 생활 속에서 겪은 황당한 상황을 담은 재담, 80년대 대중문화에 대한 향수인데, N세대니 P세대니 하면서 한참 폭발적인 성장세를 타고 있던 온라인 사용자들의 문화적 취향과 시의적절하게 맞아 떨어졌다. 심지어 다소 부족해보이던 그림체마저도 그런 구수한 내용에 오히려 적합하다고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입소문에 힘입어 메일과 각종 개인게시판으로 활발하게 ‘펌질’ 당하고, 온라인의 강풀이 오프라인의 강도영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명성 덕분에 대형 포털 사이트의 만화코너에 영화 해설 만화를 연재하기에 이르렀고, 후속작으로 같은 공간에서 온라인 장편 연재작품인 <순정만화>를 연재하도록 해주었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온라인 만화가 1세대’라는 이유 없이 작위적인 호칭은 곤란하지만, 확실히 강풀만화는 온라인 문화의 특성을 긍정적으로 활용한 좋은 사례다. 특히 온라인에서 자신의 만화를 퍼나름에 대한 공식적인 허락과 몇가지 규칙까지 공지하는 등 온라인 문화의 핵심적인 특성인 ‘커뮤니티성’을 적극 지지함을 독자들에게 증명하기까지 했다. 나아가 천성적인 붙임성을 무기로 하여 동료 작가들끼리의 커뮤니티를 적극 주도했는데, 그 결과 몇몇 온라인 만화 작가들의 친목에서 시작했다가 점점 규모가 커지고 있는 자선 이벤트 “러브콘서툰”이 탄생하기도 했다.

칸 경계선을 버리고 독자에게 말을 건네다

  모니터를 통한 상호대화로 특징지을 수 있는 온라인 공간에 적극적으로 적응해 나가면서, 만화의 표현 형식 측면에서도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중에서도 칸 경계선을 버린 것과 스크롤 효과의 적극적인 채용이다. 즉 만화의 페이지 공간을 개방함으로써, 책으로 만들어진 만화를 억지로 저해상도 모니터 화면에 맞추어 넣었다는 느낌을 없애고 읽기 수월하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원래 만화의 칸 경계선은 각 칸 속에 그려진 장면을 하나의 정해진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로 인지되도록 만든다. 영화의 한 장면이나 취재사진처럼, 그 순간을 목격한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칸 경계선을 지우면 그것은 세상의 모습을 잡아낸 하나의 구체적인 장면이라기보다는, 누군가가 그 상황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해주는 듯한 감각으로 바뀐다. 칸과 칸 사이의 연결이 훨씬 덜 명확해지고, 그 연계성을 서술하는 대사와 이야기의 흐름 자체가 부각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의 주관적 해석으로 받아들여지도록 하기 좋다는 것이다. 사연을 소개하는 재담이나(‘일쌍다반사’), 편안한 설명이나(‘영화야 놀자’), 혹은 주인공들의 주관적인 시점전개에 의한 줄거리 진행(‘순정만화’)에 적합한 양식이다. 이와는 반대로 사건을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보게 만들어서 서스펜스의 집중력을 높이는 데에는 효과적이지 못한데, 납량물 <아파트>(연재 당시는 ‘미스테리 심리 썰렁물’)에 대한 평가가 상대적으로 좋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세상에서 사람 사는 이야기

  강풀만화가 온라인 만화의 범람 속에서도 확고한 인기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결국 한 가지 철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 세상에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만큼 재미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강풀만화의 개그는 대부분 대중문화의 장르패러디 같은 고난이도의 배경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의 황당한 사건들이다. 감동적인 부분 역시 대단히 드라마틱한 만남과 헤어짐보다는, “맞아, 내 주변에도 저런 사람이 있었지”라고 해도 좋을 만한 일상성의 영역이다. 그리고 세상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냉소로 충격을 주기보다는, 희망적인 시선을 던져주는 방향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 대신에, 이야기가 확실히 말이 되고 흡입력이 있도록 구성하는 데에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치밀하고 놀라운 가상세계를 구축하는 부분을 포기하고, 대신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달하는 방법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을 촌스럽다고 치부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가장 우직하게, 확실히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방법인 셈이다.

  최근 연재중인 온라인 작품은 <바보(순정만화 시즌2)>로, 무르익은 연출실력과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 그리고 우리와 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 소외층에 대한 애정이 이전보다도 더욱  농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우직한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는 한, 강풀만화의 인기와 성장은 앞으로도 계속 현재진행형일 것이다.

 

— Copyleft 2005 by capcold. 영리불허/동의없는 개작불허/이동자유 —

커다란 산을 넘어가기 – <태백산맥>(박산하) [으뜸과 버금 0501]

!@#…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재미있게 잘 만든 경우. 아직 1권이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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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산을 넘어가기 – <태백산맥>(박산하)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원작으로 만화로 만든다, 라는 기사를 처음 보았을 때는 기대감보다 걱정이 앞섰다. 태백산맥이 어떤 작품인가. 사람과 시대를 관통하면서 재미와 깊이를 두루 갖춘, 자타공인의 최강급 현대사 대하소설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것을 학원폭력물 <진짜사나이>이래로는 중급 히트는 있지만 확실한 대표작이라고 할만한 것은 못만들어낸 박산하 작가가 만화로 만든다니… 그렇고 그런 보통의 아동 학습만화가 나와버렸다가 금방 잊혀지겠군, 이라고 속단했다. 사실 그 작가의 그쪽 계열 전작인 <칼의 노래>도 무난하기는 했지만 별로 특별히 볼만한 구석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태백산맥이라는 작품은 무려 임권택 감독이 영화화에 달려들었으나 미적지근한 결과물만을 내버린 전력도 있고.

그런데, 1권을 펼쳐들고 보니… 이것 의외로 재미있다. 아니, 사실 꽤 잘 만들었다. 처음 등장하는 수많은 주연급 캐릭터들부터가 벌써 엇비슷하고 밋밋한 미소년미소녀가 아니라 강단이 있고 표정 풍부한 ‘한국 아이들’이다. 이들이 살아가는 공간 역시 적당히 무국적화한 가상공간이 아니라, 한국식 시골 풍경이다. 페이지 연출 역시 무난한 클로즈업으로 점철하지 않고, 역동적이지만 현란하지 않도록 적절하게 칸 배분을 조율해 나아가고 있다. 한눈에 봐도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다고나 할까, 말이 되는 ‘작품’으로서 완성 짓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쓸데없는 해설자도, 귀여움 떠는 억지 조연도, 남녀관계를 맞추기 위한 무의미한 미소녀도 아직 투입된 바 없다. 줄거리의 압축 역시 이전에 임권택 감독의 극장 영화보다 훨씬 페이스의 배분이 좋다. 염씨 형제, 하대치, 김씨 형제, 명자… 주요 등장인물들의 어린시절이 모자람 없이 촘촘히 배치되어 이후 극의 긴장감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해방후 성장한 염상구의 귀환에서 1권을 마무리 짓는 노련함까지. 뭐랄까, 만약 아이에게 단순히 ‘좋은 만화책’ 정도가 아니라, ‘좋은 책인 것은 기본이고, 만화로서 좋은 책’을 골라줘야 한다면 별 망설임 없이 골라줄만한 책으로 나와 주었다. 

물론 문제는 과연 필자가 재미있어한 만큼, 이 책이 원래 목표로 하고 있는 독자층인 아이들도 좋아할 것인지다. 1권은 그나마 주인공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입할 구석이라도 있었겠지만, 이들이 모조리 성인이 되어 정치적 싸움에 휘말리는 이후 이야기들에 어떤 재미를 느낄지, 모르겠다. 온몸에서 빔이 나가는 마법 필살기로 상대를 쓰러트리거나, 화려한 주먹다짐을 하거나, 아니면 스펙타클한 폭발으로 수놓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전체적 색조를 포함한 시각연출 역시, 아이들이 흔히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셀 방식의 감각과는 거리가 있다. 나아가 줄거리 전개 면에서도, 염상구 정도를 제외하자면 명쾌하게 승부를 가릴 수 있는 대결+성장구도가 아니기 때문에 아이들의 취향에 맞추기 쉽지 않다. 사실 이 작품을 보면서 가장 의외였던 점이기도 한데, 작품을 망치는 한이 있더라도 억지로 그런 요소들을 넣어서 적극적인 자기 타겟 공략에 나설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원작의 품격을 존중해주는 쪽으로 기운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은 다시 말하자면 정작 쓸만한 작품을 만들어 놓고서도, 원래의 독자층에게 외면 받아서 묻혀버리는 아쉬운 일이 발생할 위험이 있다는 말이다.

만화 <태백산맥>은, 문학작품을 적당히 만화로 옮기기만 한 것에서 의미를 찾는 여러 “명작만화”류 들과는 다행히도 스스로 차별화를 꽤하면서 1권을 시작했다. 부디 보다 본격적으로 펼쳐질 이후 전개에서 원작의 무게에 눌리거나 나태하게 기대어 버리지 않고 본격적으로 만화 <태백산맥>으로서의 매력을 발산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기를 희망한다.

[으뜸과 버금 2005. 01.]

(*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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