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있는 세상 이야기 – 『사이시옷』[기획회의 060315]

!@#… 인권위의 인권만화 2탄. 원래 이 프로젝트는 초창기에 기획 참여 기회가 주어진 적이 있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냥 지나간 경우. 뭐 계속 10탄이고 20탄이고 진행되다보면 또 다시 연이 닿을 일이 생길지도?

—————————–

차별 있는 세상 이야기 – 『사이시옷』

김낙호(만화연구가)

인권 보호를 위한 공식 기구로서 설립된 국가인권위원회는 그 광범위한 임무 범위 만큼이나, 정부 기관 가운데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대중 홍보 활동을 할 줄 아는 곳으로 정평이 나있다. 여기에는 정부기관지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세련된 기획 컨셉과 완성도를 자랑하는 <월간 인권>, 의식 있는 영화감독의 인권에 대한 단편영화를 묶어내는 인권 영화와 애니메이션 제작, 그리고 만화 단편과 에피소드들을 묶어서 책으로 발간하는 작업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단지 허울만 좋은 것이라면 또다른 의례적인 공무원 행사에 불과하겠으나, 다행히도 작품 자체로서 어느 수준 이상의 재미를 담보하고 있기에 진정한 의미에서 홍보와 소통의 기능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특기할만한 점이다. 특히 공공기관이 의례 빠지기 쉬운 단발성 이벤트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지속적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더욱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런 기조 속에서 최근 발간된 『사이시옷』(손문상 외 7인 / 창비)은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한 두 번째 만화 작품집이다. 첫 번째였던 『십시일반』이 불러온 기대 이상의 대중적 호응 덕분에 큰 문제없이 2집의 기획이 수월하게 착수될 수 있었고, 그 결과 새로운 작품집으로 다시 우리 앞에 나오게 된 것이다.

사실 『사이시옷』은 “만화가들이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이라는 부제와는 달리 사실 차별 있는 세상에 대한 고발이 주종을 이루어, 사실상 『십시일반』의 컨셉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장차현실의 『여배우 은혜』와 이애림의 『그는…』이 차별을 극복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이다. 한 권 만으로 차별의 모습을 다 보여준 후 다음 권에서 벌써 극복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에는 우리 사회 속 차별의 양상이 너무 다양하고 뿌리 깊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의 어두운 측면에 대한 비극적 정서가 지배적이다. 여덟 개의 작품들은 각각 비정규직 차별 문제부터 비혼모 출산에 대한 차별까지 넓은 차별의 스펙트럼 속에서 소재를 취하고 있다. 각 작품들이 해당 소재에 접근하는 방식은 진중하며, 주제에 대한 전달력 역시 그다지 오해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확보되어 있다. 각각 차별의 이슈들을 소개한다는 목표에는 충분히 합격점을 얻고도 남는다는 말이다. 이런 컨셉으로 이런 기획으로 계속 출간이 되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생기는 만화책 시리즈이기에 이런 점들은 더욱 소중하다.

하지만 소위 소포모어 징크스의 조짐이 보이는 구석도 여럿 있다. 앞서 말했듯 이전 『십시일반』의 컨셉에서 크게 발전적으로 벗어나지 못하다 보니 여전히 특정한 이슈 소재를 소개하는 것에 전체적으로 머물러 있고, 그것은 홍보활동 그 이상의 것으로 나아가기 힘들게 만드는 장벽이 된다. 즉 인권 홍보물으로서의 의의가 아닌 “작품”집으로서 가치를 부여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어떤 요소들이 제한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바로 가시적이고 뚜렷한 차별이라는 외관 속에 담겨 있는 훨씬 복잡하고 상호 모순되는 단면들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작품적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핵심이고, 교과서적 설명이 아니라 현실적 감동과 깨달음의 힘을 부여해주는 요소다. 무엇보다, 우리네 사회와 인생 자체가 원래부터 복잡 미묘하고 모순된 순간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현실속의 차별의 가해자 또는 피해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항상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다. 또한 그 속에는 우리 자신들의 습관과 의지, 그리고 사회의 시스템적 문제가 동시에 작용하는데 때로는 서로 같은 방향으로, 때로는 모순된 방향으로 일어난다. 인권 매뉴얼로서 차별에 대해서 학습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감동을 통해서 차별에 대해서 스스로 성찰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런 점들에 더욱 집중해야한다고 본다. 나아가, 만화라는 미디어를 택한 이상 그것이 만화 특유의 표현력 및  대중 친화력과 어떻게 효과적으로 결합하여 독자들에게 “읽는 즐거움”을 줄 것인가에 대한 것 역시 더 고민해야할 숙제다. 반드시 과장과 희화화를 해야 한다는 식의 일차원적 이야기가 아니라, 만화 양식이기에 더욱 강렬한 느낌을 주도록 만드는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차용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 ‘작품’으로서의 기준에서 볼 때, 개별 단편들 사이에는 분명히 편차가 존재한다. 마치 십시일반에서 마지막에 실린 작품인 최호철의 『코리아 판타지』가 그랬듯, 이번에도 마지막에 실린 최규석/연상호의 『창』이 가장 발군의 수준을 자랑한다. 사실 젊은 남자 작가들이 가장 진중하고 섬세하게 삶과 사회의 단면들을 붙잡아내곤 하는 소재가 한국 성인 남성 공통의 트라우마인 군대 생활이라는 것은 참 아이러니컬한 이야기다. 그도 그럴 것이, 군대의 씨줄 낱줄로 얽힌 엄격한 차별구조는 누구도 완전한 피해자도 완전한 가해자도 될 수 없게 만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흑백의 현실적 모습의 거친 연필화로 그려내는 한 ‘모범군인’과 한 ‘고문관’의 관계 속에서, 복합적인 피해 – 가해 관계가 솜씨 좋게 독자들의 성찰을 자극한다. 군대라는 소재 자체보다 이러한 미묘한 모순들이 바로 이 작품의 핵심이기에, 단연 이번 작품집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유승하의 『축복』도 누구에게는 축복이고 누구에게는 사회적 따돌림의 원천인 생명 잉태에 대한 모순된 시각들을 대치시키며, 이를 위해서 비혼모 임신을 강간이 아닌 합의 방식의 성에 의한 것으로 그렸다는 측면에서 분명히 눈여겨볼 작품이다. 그에 비해서 손문상의 단편들은 정규직/비정규직 문제라는 지극히 모순된 피해-가해 관계를 지닌 중요한 소재를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비정규직은 차별받는다는 단일한 명제를 주장하는 선에서만 소화해내서 아쉬움을 주고 있다. 다른 작품들 역시 크고 작게 장점과 단점들을 지니지만, 전체적으로는 차별이 있다는 것을 교과서적으로 알려주겠다는 의지가 아무래도 앞서서 오히려 더 큰 이야기를 못하고 있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사이시옷』은 무사히 두 번째가 나온 것만으로도 이미 높은 평가가 불가피한 시리즈의 일원이다. 그리고 아쉬움은 토로했지만 여전히 재미있게 읽을 만한 만화책이다. 다만 앞으로 나올 3탄, 그리고 그 이후에는 일정한 선택이 필요하다. 교과서적인 학습의 효과에 집중할 것인가, 아니면 직접적 교육효과는 줄이더라도 차별 양상의 현실적으로 모순된 미묘함에 매진하여 자발적 성찰을 유도할 것인가.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잡지를 읽게 만든다는 것 – <격월간 새만화책> [기획회의 060301]

 !@#… 참고로, 블랙잭님이  “사람들이 대안만화 잡지를 사는 것은 독창성을 즐기고 싶어하는 욕구때문이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말아 주었으면 합니다” 라고 하셨는데 120% 공감.

——————————

잡지를 읽게 만든다는 것 – <격월간 새만화책>

김낙호 (만화연구가)

사람들이 잡지를 읽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잡지라는 읽을거리는 최신 사항을 빠른 기간 안에 널리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신문과, 진득하게 한 가지를 파고들게 만드는 단행본 서적의 중간에 있다. 즉 하나의 긴 것 보다는 다양한 짧은 내용물들을 조합하여 일정한 기간 안에 발간하며, 다소의 현재성을 가지고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예, 뉴스가 아닌 창작 문화예술을 다루는 잡지의 경우는 어떨까. 시의적으로 출간되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대략, 그 장르를 일상적으로, 항상 정기적으로 즐기는 생활을 하도록 함이라면 좋을 성 싶다. 10년 동안 작업한 방대한 작품을 10년 동안 기다리게 한 후 읽히는 방식도 있고 1년마다 단행본 1권씩 쪼개서 출시해서 1년 주기로 10번 즐기게 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아예 잡지에 ‘연재’를 해서 10년 내내 일상적으로 즐기게 하는 방법도 있는 것이다. 즉 잡지는 작품을 생활의 일상성에 보다 가깝게 만들어준다. 또한 여러 작품들을 같이 묶어서 제시한다는 점 역시 대단히 중요한데, 하나의 작품에 심취하도록 하기보다는 일련의 작품들이 만들어내는 문화적 취향으로 감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것은 거꾸로 말하자면 창작 문화예술 잡지가 그런 기능이 가능하기 위해서 필요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바로 잡지의 작품들이 일상적으로 즐기고 싶어할 만큼의 지속적 매력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하나의 문화적 취향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색깔이 뚜렷해야 한다는 것이다. 1920년대의 문예동인지들 이래로 항상 그것이 좋은 창작 잡지와 쉽게 잊혀지는 잡지들의 가늠쇠가 되어왔다.

최근, 창작 만화지 <격월간 새만화책>(새만화책 발간)의 창간호가 출시되었다. 주류 장르공식을 따르는 만화보다는 작가의 개성적인 작품 성향을 중시하는 단행본을 위주로 작업했으며 지난 2003년 <계간만화> 1,2호를 제작한 바 있는 출판사답게, 이 잡지는 명시적으로 작가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실제로 창간호에 실린 작품들은 장르만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실상 표준화되어 있다시피 한 미형 그림체를 벗어나 있으며, 그 안에 담긴 이야기 역시 삶의 거친 측면들을 소설의 문예사조로 치자면 ‘리얼리즘’내지 ‘자연주의’에 해당될 방식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총 12편의 작품과 하나의 글이 실려 있는데, 작품들은 대체로 한 호흡으로 끝난다. 절반 이상이 단편이며, 연재물 역시 다음호에는 과연 어떻게 될까 하는 방식보다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내적 완결성을 지닌 것이 보통이다. 한국 작가가 주가 되지만, 해외 작가 가운데 잡지의 성향과 비슷하다고 판단되는 작가의 작품들도 네 편 포함시켰다.

작품들은 자전적 느낌을 구체적으로 강조한 작품들 (열아홉, 내 어머니 이야기, 푸른 끝에 서다 외), 또는 작가 자신의 페르소나를 캐릭터로서 직접 활용한 ‘정신적인 자전 에세이’ (미스터 워터멜론의 오류, 나 그리고 얌전한 고양이의 동거 외) 가 대부분이다. 극적 상상력으로 새로운 서사를 꾸며낸 작품(불행한 뱃사공, 도쿄 고려장 외)들이 오히려 전체적 분위기에서 뜨는 느낌이 강할 정도로, 그 분위기는 일관적이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통일된 컨셉을 통한 뚜렷한 취향 구축이라는 측면에서는 충분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자전적 느낌의 이야기는 작가의 세계관을 효과적으로 보여 주는 것에 용이한 장르다. 새로운 극적 창작물의 경우 뚜렷하고 일관성 있는 ‘작중 현실성’을 구축하기가 훨씬 어렵지만, 자전적인 느낌의 이야기의 경우 자기 삶의 경험이라는 뚜렷한 참조모델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상적 향유를 하고 싶게 되는 지속적 매력, 즉 넓은 의미의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어떨까. 사실 잡지란 결국 여러 작품들의 모음집이기 때문에, 각 작품들의 격차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 <격월간 새만화책> 역시 보다 뚜렷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 작품, 확실히 한 장르를 개척했다 싶을 정도로 이미 검증 받은 고전 명작 등이 한쪽에 분류될 수 있는가 하면, 재능은 보이지만 아직 덜 다듬어진 티가 나는 작품들이 다른 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전체적 수준에서 볼때, 시각적 만족이라는 명제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계간만화> 1,2호의 경우와는 달리 이야기로서의 재미가 상당히 준비되어 있다. 즉 잡지의 작품으로서 읽을 만한 매력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다만 아직 몇몇 작가들이 자신이 받아온 다른 해외 유사 장르 – 즉 ‘작가주의’ – 작품들의 영향을 스스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점은 명백하게 지적받아야 옳다. 작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들의 영향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을 자신의 이야기와 감수성을 전달하기 위해서 효과적으로 변용하고 수용해내는가 아니면 아직은 단지 모습을 쫒아가는 것에 불과한가, 라는 문제인 것이다. 예를 들어 『내 어머니 이야기』는 같은 출판사에서 작년에 출시한 바 있는 『페르세폴리스』(사트라피 저)의 시각 스타일과 연출방식을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다, 하지만 『페르세폴리스』는 아이의 맹랑한 천진함과 난해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역설적으로 충돌시키기 위해서 흑백 아이콘화된 그림체를 활용한 것인데, 이 작품의 경우는 차용해온 시각스타일과 자신의 이야기가 서로 녹아들어가지 않고 있다. 이외의 몇몇 작품들에서도 보두앵의 붓터치, 체스터 브라운의 방백 연출 등이 채 소화되지 못하고 거칠게 원용되고 있다. 이런 지점들은 반드시 편집자의 역량으로 적절한 조율을 해 나아감이 바람직하다.

무엇보다, 잡지의 진짜 매력과 위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발간의 지속성이다. 부디 <격월간 새만화책>이 창간호의 포부를 잘 이어가서, 뚜렷한 취향과 상당한 완성도를 지닌 만화지로서 확고하게 자리잡기를 기원한다.  ***

약간의 사족: 하지만 <격월간 새만화책>이 ‘대안만화를 다룬 최초의 잡지’라느니 ‘본격적으로 작가주의를 표방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느니 하는 식의 언론 보도들 앞에서 필자는 곤혹스러움을 거두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화끈>이나 <히스테리> 등 걸출한 사례들을 90년대 한국 인디만화의 성과들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자는 것인지. 하나의 대상에 대한 의미부여와 칭찬은 그 자체의 절대적인 우수함과 매력에 기반해야 하는 것이지, 결코 여기까지 오도록 기반을 닦아준 기존의 모든 성과들을 부정하는 방식을 통해서는 안된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위스컨신대 동아시아 연구 강좌에서 한국만화 특강하다.

!@#… 위스콘신대학 Communication Arts 학과의 강인규 선배님이 강의하는 학부생 강좌 East Asian Studies, 한국 대중문화 스페셜. 이번 주 토픽인 ‘한국만화’ 세션을 초청강연. 오랜만에 강단에 선 것으로도 모잘라 영어로 하려니 가히 난이도가 좀 있었음. 뭣보다, 실없는 농담 섞어넣기가 쉽지 않아서…(어디까지 농담으로 받아주고, 어디서부터 모욕으로 받아들일지 아직 가늠하기 어려우니까). 여튼 그래도 적당히 무사히 지나간 듯.

전에 앙굴렘 당시와 마찬가지로, 외국의 초심자들에게 한국만화를 선보이는 capcold식 정석은 한국만화의 역동적이고 다양한 지형을 통째로 던져주는 것. 어안벙벙하게 퍼억 충격을 준 후, 알아서 각자 천천히 수습하면서 관심을 찾든지 깡그리 잊든지 하도록 만드는 방식. 어차피 짜잘하게 대가 몇명 붙잡고 원화나 구경시켜주는 방식은 재미없으니까. 그래서 고작 한 시간 안에, 1) 한국만화의 세계적 맥락. 세계만화권역, 아시아권에서 만화와 망가의 관계 등등 한국만화라는 범주를 이야기하는 이유. 2) 한국에서 만화의 역할, 산업, 장르 등. 3) 사회사와 밀접하게 결부되어온 한국만화 발전사. 4) 한국만화 해외교류의 특성. 5) 덤으로 애니메이션(‘움직이는 만화’) 이야기까지. 너무 정보량이 많아서, 듣고 있어야 했던 학생들에게 약간은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다. 아니 사실은 하나도 안 미안하지만. -_-;

!@#… 강의 녹음은 파일 받고 먼저 들어본 뒤에 공개여부 결정. 즉, 정말 바보같고 버벅댔으면 곧바로 역사의 뒤안길로. 뭐 하지만 PT 파일은 여기 바로 공개하도록 하겠다. 위의 첨부파일 클릭. 당연히 영어지만.

!@#… 한국만화에 대한 깔끔한 영어 자료를 만들어 공개해야겠다는 생각이 한층 더 강해졌다. 콘진이나 만협서 하겠다고 하는 작품 포트폴리오 뭐 그런 것 말고, 그런 곳에서는 (당혹스럽게도) 아직까지도 전혀 신경도 안쓰고 있는 듯한 영역인 말 그대로 ‘한국만화라는 것 자체에 대한 비평적 설명’. 우선 앙굴렘 때 썼던 것들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영문 홈피로 공개를… 하려면 근데 어서 capcold.net 을 정비해야 할텐데. 과연 어느 세월에?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90년대 만화/애니사

(추가: 아래 내용의 확장판 및 다른 시대의 이야기들까지 합쳐서, 2010년 말에 책으로 묶여나온 바 있습니다: 클릭 )

!@#… 한국의 각 문화예술분야의 역사를 10년 단위로 종합하여 집대성한 역작, <한국 예술사대계>. 그 90년대편에 수록된 90년대 만화/애니메이션사. 나중에 소위 ‘정사’ 로 불리울 물건이다(원튼말든). 여튼 최근 오마이뉴스 사건에서도 드러났듯 만화판을 걱정하기 좋아하는 아저씨 아줌마들이 의외로 90년대의 역학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해서, 80년대 기준으로 2000년대를 이야기하는 괴이한 현상들이 난무. 그래서 이번 기회에 본문을 여기에 공개. 어차피 연구비 형식으로 작업한 것이고 이미 책은 나왔기 때문에 여기 공개하는 것에 문제는 없음. ‘사관’과 ‘자료’로 뒷받침되는 역사 서술을 하고자 했는데, 여튼 당시 지면이 부족해서 참 많은 내용을 오히려 커트. 당연한 이야기지만 본 책에는 도판도 좀 들어가 있으나… 이 황폐한 문자 블로그에서는 문자만 그득.

!@#… 이외에도 90년대 이후 만화판도에 대한 종합적 접근을 더 보시고 싶다면, <만화세계정복>(두고보자 저, 2003)을 보시길. 지금은 나름대로 레어아이템. 자 그럼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클릭.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끝까지 읽기(클릭)

소심한 낙천주의자의 도시 잡상: 『올드독』[기획회의060201]

!@#… 이번 호 원고는 책내 서평용으로 쓴 글을 약간만 개조했음. 같은 원고의 부분적 재활용은 별로 좋아하는 방식은 아니라서 나름대로 양심선언. -_-; 올드독의 네이버 블로그는 http://blog.naver.com/hhoro 에 가면 있음.

 (나중에 추가) 에에에엣! 이런 실수를. 단행본에는 경향신문의 ‘고충상담실’ 부분 미포함. 이게, 책이 완성되기 전에 미리 읽고 쓰는 글이 빠질 수 있는 함정. 영화로 치자면 러프편집본으로 시사회보고 평했다가 최종본이 결론이 바뀌는 격이라고나…-_-; 여튼 참 송구스러운 일이;;;

——————————————–

소심한 낙천주의자의 도시 잡상: 『올드독』

김낙호(만화연구가)

눈에 확 들어오는 개성적이면서도 간명한 그림체, 작가의 자화상격인 동물 캐릭터, 일상에서 발굴하는 소재들, 대중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 순간의 잡상들로 가득한 에피소드. 아,  『스노우캣』. 이쪽 분야의 선구자 중 하나. 그럼 개인 블로그와 미니홈피를 휩쓰는 팬시적 인기까지 누린다면? 이런, 그러고 보니 『마린블루스』가 있다. 아예 작가가 이 만화를 그리다가 팬시 전문업체에 취직해서, 회사생활까지도 다시금 만화 소재로 사용하기까지 했다. 음, 하지만 여기에 지리멸렬한 인간사를 가로지르는 묘한 통찰력이 출동한다면 어떨까. 아마 자칭 ‘늙은 개’ 한 마리가 소심한 표정으로 살짝 걸어나올 듯 하다. 

사실 이름만 늙은 도시형 청년 견공(이라고 해도, 설정상 작가의 14살이나 먹은 실제 개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인 올드독은 시사만화계를 거친 정우열 작가의 페르소나로, 현대 도시 생활에서 겪는 일상적 경험들과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생각들을 풀어놓는 것이 특기다. 『올드독』(정우열/거북이북스)는 일상만화 컨셉으로 작가의 개인블로그에서 연재중인 『일일꼼지락』과 경향신문 만화섹션 <펀>에서 연재되었던 바 있는 『올드독의 고충상담실』을 위주로 묶인 첫 단행본이다. 올드독식 세상읽기의 극치를 보여주며 온라인 <씨네21>에 연재중인  『TV감상실』 시리즈가 빠진 것은 못내 아쉽지만, 그만큼 일상만화로서의 특징이 강조되어 있는 셈이다. 책으로서의 만듦새 역시, 페이지 귀퉁이에 플립북 애니메이션 효과를 부록처럼 삽입하는 등 소소한 숨겨진 재미를 강조한 점이 작품의 컨셉과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원래 일상만화, 또는 생활만화라는 장르는 극적인 드라마 구조보다는 생활 속의 일상적 에피소드와 단상을 독자들과 공감해 나아가면서 생명력을 얻는다. 그래서 일상생활 속 유머러스한 사건들을 꽁트로 꾸미거나, 친숙한 평범한 생활을 새로운 눈으로 재발견해주곤 한다. 올드독의 이야기들은 명백하게 후자의 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각종 일러스트에서 보이는 화려한 필치에서 추론할 수 있을 법한 ‘감상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각종 잡생각으로 상황을 풀어나간다. 그런데 올드독식 잡생각의 주제는 흔히들 그렇듯 자기 취향에 대한 함몰이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어디 커피가 맛있었다, 어떤 장난감이 멋있었다는 것보다, 이사 온 새 이웃에게 어떻게 자연스럽게 접근해서 엉뚱한 질문을 나눌 수 있을지가 더 중요한 잡상의 대상인 것이다. 편협한 감상주의와 자기감정 토로의 울타리에 갇혀버리기 쉬운 이 장르에서, 이러한 인간사에 대한 통찰은 올드독의 중요한 미덕이다.

그런데 잡생각이 많으면 기본적으로 소심하기 마련이다. 소심하기에 자꾸 상황을 다시 끄집어내고, 잡생각을 한다. 게다가 인간사에 대한 것들이기 때문에 다분히 성찰적이며 냉정한 측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드독이 냉소주의자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특유의 삶에 대한 자세에 있다. 이 장르의 선배격인 스노우캣이 게으름의 외피와 신경질적 까다로움으로 도회적 감수성의 공감대를 자아냈다면, 올드독은 소심함의 외피를 쓰면서도 특유의 낙천성으로 정반대 지점에서 같은 목표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올드독은 좋아하는 가수인 노라 존스 콘서트장 맨 끝에 줄에 앉아 곤혹스러운 땀을 흘리며 목을 주욱 빼며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하면서도, 그 와중에서도 같이 음악을 흥얼거리는 모습의 낙천성을 지니고 있다. 소심하기에 곤혹스럽지만, 낙천적이기에 비굴하지 않다. 위대한 광대로 치자면 우디앨런보다 찰리채플린에 가깝다고나 할까. 올드독의 또 다른 미덕은, 그 구김살 ‘있는’ 낙천성인 셈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올드독 최고의 매력은 바로 앞의 모든 미덕들을 효과적으로 감싸 안는 확실한 재미다. 이제는 부담스럽기까지 한 무리하게 둥글고 깔끔한 팬시 캐릭터들과는 궤도를 달리하는 독특한 화풍이 재미있고, 완전히 낙서체라고 하기도 힘들지만 마치 솜씨 좋은 친구의 연습장 마냥 자유롭게 흘러가는 배치와 연출도 재미있다. 극적이고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누군가의 머리 속 망상을 살짝 끄집어내서 훔쳐보는 듯한 느낌을 강조하기에는 이쪽이 훨씬 적합하다. 다만 아무래도 생각의 분량이나 시각연출의 밀도가 은근히 높다 보니 한꺼번에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독파하기에는 아무래도 다소 부담이 있고, 하루에 한두편씩 들춰본다는 느낌으로 읽어나가는 것이 가장 적합한 독서 방식일 듯 싶다.

소소한 상황에 대처하는 소심함, 이내 이어지는 통찰력 있는 잡생각, 그리고 의기양양한 낙천성으로 이야기를 맺어내는 연쇄작용이 재미있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수다이면서도, 정작 수다스럽지 않아야 할 때를 잘 아는 이야기 솜씨가 재미있다. 덕분에 무엇보다 올드독은 재미있는 만화로 우리 앞에 선보이게 되었고, 지금 여기 여러분의 손에 안착한 것이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미덕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일기체 만화들이 대개 그렇듯이 에피소드별 질적 편차도 있고, 개별 에피소드의 시기적 맥락이 중요한 경우도 있다. 때로는 확실한 통찰이 통렬한 웃음을 주기도 하지만, 피상적 개그에 안주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미 올드독의 매력에 빠져본 결과, 소심하게 일일이 단점을 지적할 때는 하더라도 작품의 총체적 재미와 통찰을 낙천적으로 즐기는 쪽을 택하고 싶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도시에는 인간사에 관심 있는 소심한 낙천주의자들이 더욱 더 많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만약 이 책을 즐겼다면, 독자 여러분들도 어느 틈에 그 대열에 합류해 있을지도 모르겠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일상적 인간사의 수취 관계 -『왕비님 이야기』[기획회의 060115]

일상적 인간사의 수취 관계 -『왕비님 이야기』

김낙호(만화연구가)

여느 다른 매체보다도 특히 만화라는 분야에서, 독자들은 강하다. 독자라는 수용자와 작가라는 창작자 사이의 경계선은 영화나 대중음악 등의 분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으며, 오랜 저평가의 역사 속에서 만화 독자들은 강한 취향 결속력을 다져왔다. 하지만 단순히 만화광들이 결국 만화가가 된다든지 하는 정도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독자로서의 정체성을 그대로 지니면서, 출판이나 제작 등에 직접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재작년 『먹통X』(고병규 / 코믹팝)라는 작품의 복간의 경우, 어떤 독자가 한 출판사와 일종의 조건을 걸고 진행했던 재미있는 사건이었다. 그 독자가 캠페인을 벌여서 복간되었을 때 책을 구매하고자 하는 특정 인원수의 사람들을 모아오면, 복간본을 출간하겠다는 조건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진짜로 독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퍼트리고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긁어모은 결과, 결국 조건을 충족시키고 책은 출간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어떤 ‘회사’도 정식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그만큼 독자 자신들의 결속력과 파워가 실제적인 제작 프로세스에 작용할 힘이 크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왕비님 이야기』(권교정 / 절대교감) 역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탄생했다. 작품은 만화 전문지 <계간만화>에 게재되었던 24페이지짜리 단편인데, 잡지의 휴간과 다른 단편들이 축적되어 단행본을 만들기가 애매하다는 난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해답은 엉뚱한 방향에서 도출되었다. 그냥 24페이지짜리로 책을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비상식적인 일을 할 출판사가 어디 있냐고 물어볼 수 있다. 하지만 해답은 또 금방 나와 버렸다. 독자들이 출판사를 하나 만들어서 내버리자, 라는 것이다. 기존의 독자 세력화가 독자들이 모여서 출판사에 압력을 가하는 형식이었다면, 이번에는 아예 그냥 직접 출판을 했다. 그것도 ‘동인지’ 또는 ‘자가출판’의 형식이 아니라, 정식 유통망의 정식 출판물로서 말이다. 이러한 발상 속에서 탄생한 출판사 ‘절대교감’은, 어디까지나 여성향 만화에 대한 독자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곳이다. 잡지의 폐간으로 갈 곳을 잃어버린 연재 작품들이 다른 식으로라도 계속 지속되었으면 하는 시도였던 ‘드림서명운동’, 잡지 <오후> 휴간 당시 작가 팬클럽에서 제기되었던 만화출판 아이디어 등이 결국 현실화된 것이다. 회사라는 형식으로 보자면 다른 ‘정식 밥벌이’가 있는 소수 인력과 지원자들로 이루어진 가내수공업적 구성이지만, 제대로 된 책을 만드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물론『왕비님 이야기』라는 작품 자체의 매력이, 단지 출판의 과정이 특이하다고 해서 생겨난 것은 아니다. 24페이지 하드커버라는 형식도 만화책이라는 범주에서는 이질적이지만, 그림책 분야에서는 그리 낮선 것도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실제로 이 작품을 좋아하고, 책을 사줄 것인가가 관건일 뿐. 사실 원래부터 권교정이라는 작가가 상당히 강한 결속력을 지닌 팬층을 지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짧은 단편 하나로 책을 만들어 독자를 설득시킨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비님 이야기』는 충분히 그런 조건을 충족시켜줄만한 작품이다.

작품의 내용은 동화적인 설정에, 인간관계의 깊은 질문에 대한 알레고리를 넣어주는 작가 특유의 접근법을 능숙하게 담아내고 있다. 주인공인 왕비는 원래 마을의 인기 처녀였는데, 말을 하면 주위에 소박한 꽃들과 보석이 생겨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왕의 눈에 들어와서 왕비가 되고, 왕비를 독점하고 싶은 왕의 독점욕 때문에 궁 안에만 머물게 된다. 그 결과 마을은 꽃과 보석이 없는 곳으로 변모하고, 사람들은 왕에게 항의한다. 그런데 왕을 사랑하는 왕비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주변에 도움을 주는 능력을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독점시켜주는 것은 과연 잘못된 행동인가? 좋아하는 대상을 독점하고자 하고, 상대도 동의한다면 그것은 문제일까? 그런 능력의 혜택을 받아온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히 계속 요구할 권리가 보장되어야만 하는 걸까? 사실 꽤 복잡한 인간사의 문제다.

이 작품 속에서는 어떤 결론을 내리는지, 그것은 책을 읽어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서 여기서는 언급을 피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하지만 이런 구도가 지니는 다층적인 감성 자극은 그 자체만으로도 꽤 흥미롭다. 왕비의 능력을 작가라는 존재의 창작 능력으로 바꿔도 되고, 아니면 그다지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냥 우리가 주변에 행사하는 일상적인 사회관계 속 매력으로 대입해 봐도 좋다. 사회적 삶이라는 것은 어차피 그런 관계가 오고가는 것이고, 사실 우리는 이야기 속의 왕비, 왕, 마을 주민의 입장에 동시에 처해있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발산하고, 무언가를 독점하고 싶어 하고, 무언가를 얻고 싶어 한다. 모순될 것 없는 자연스러운 일상의 복합성이다. 물론 우리는 작가가 이야기 속에서 내리는 각 등장인물들의 선택, 즉 결론에 동의할 필요는 전혀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세상사에 대한 통찰을 지적당하고는 스스로 자극받는 감상행위 그 자체다.

시각 연출은, 『매지션』등 당시 작가의 작품 경향을 반영하는 듯 다소 황폐한 느낌이 강하다. 화사한 풍경을 묘사한 장면에서도 건조한 분위기를 풍기며, 인물들의 표정은 무심하다 못해 공허한 느낌까지 주고 있다. 마치 왕비가 떠나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량한 마을의 들판이 이 작품의 핵심 정서라는 지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듯, 일관성 있게 그 분위기가 유지된다. 사고를 자극하기에는 좋은 조건이자, 평소 권교정을 풍부한 유머감각으로 기억하는 일부 독자들에게는 이질감을 줄 수도 있을 듯 하다. 하지만 24페이지짜리 짧은 작품이니, 독서는 짧게 감상의 여운은 길게 가져가고자 하는 본래 목적에는 충실한 선택이다.

작가라는 마을처녀는 마을 사람들이라는 대중 독자들에게 창작능력이라는 보석과 꽃을 뿌린다. 받는 것만 익숙하던 마을 사람들은 왕이 그녀를 독점하자 화를 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마을사람들은, 왕비가 재능을 다시 그들에게 베풀어 주도록 출판사까지 차리고 책을 만들어낸다. 작품 속 사람들의 구도와는 다소 다르지만, 인간사의 수취관계라면 나는 이러한 현실 쪽의 사례를 훨씬 더 선호하고 싶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외로움과 함께 사는 일상 – <그와의 짧은 동거> [기획회의051230]

!@#… 지난 호 <기획회의>에 들어간 원고. 장모씨 이야기 연작 가운데 가장 이야기로서 완성도가 뛰어났던 파트가 책으로 나오니, 대략 흡족. 하지만 성찰적이고 비유력 깊은 작품이 대형히트를 치기에는 출시 타이밍이 다소 애매. 미디어 노출도 그리 많이 되지 않은 듯 하고… 음. 아쉽다고나.

 —————————————-

외로움과 함께 사는 일상 – <그와의 짧은 동거>

김낙호(만화연구가)

바퀴벌레라는 존재는, 인간들의 사회에 있어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들은 자신들만의 룰에 의해서 자연계를 멋대로 바꾸어버렸고, 대다수의 동물들은 내쫒기거나 또는 인간에게 식료품이나 노예로 이용당하는 입장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바퀴벌레는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생태 규칙을 그대로 고수하면서 지금 이곳에서 인간 세계와 공존한다. 물론 인간들로서는 그런 낯선 존재들을 반길 이유가 없기 때문에 갖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바퀴벌레가 병균을 옮긴다고는 하지만, 사실 인간들이 옮기고 다니는 병균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을 ‘소탕’하려고 하지만, 지금껏 빈번히 실패해왔다. 굳이 말하자면 바퀴벌레라는 종은 인간세계의 일부가 되어버린지 오래인 셈이다. 인간세상의 일부지만 조금은 다른 존재. 다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은 내면에 귀중함을 감추고 있는, “언젠가는 백조가 되어 날아오를”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니다. 벌레는 다르면서도 그냥 범속한 존재다. 혐오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냥 일상적인 무관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벌레는 심지어 어떻게 되든 동정조차 가지 않는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문학에서는 바퀴벌레, 또는 실제로 바퀴벌레를 지칭하지만 그냥 ‘벌레’라고 표현되는 존재들은 아주 흥미로운 비유로 활용되고는 한다. 벌레로서의 인간은 범속하면서도 범속 이하인 처지, 또는 세상 속에서 가치가 없음에 대한 자기 환멸의 표현으로 활용하기 좋은 것이다. 세상 속의 부조화, 부조화의 결과인 외로움에 대한 자학적인 변명의 수단으로서 이보다 더 강력한 비유를 찾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관료주의 체코 사회 속에서 카프카가 “어느 날 일어나보니 커다란 벌레가 되어” 있지 않았던가.  

최근 출간된 <그와의 짧은 동거>(장경섭 / 길찾기)는 바퀴벌레와 동거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이 작품은 작가의 페르소나를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자아의 충돌, 일상화된 소외에 대한 성찰 등을 핵심주제로 삼으며 독립적인 이야기들을 풀어나가는 <장모씨 이야기> 연작 가운데 하나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바퀴벌레와 동거하게 된다. 단칸방에서 자취하는 젊은 남자의 집에 바퀴벌레가 공존하는 것은 그다지 신기한 일이 아니지만, 어느 날 진짜로 본격적인 룸메이트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같이 라면도 끓여먹고, 술도 먹으러 가고, 청소도 분담하는 사이 말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장모씨와 바퀴벌레의 짧은 동거생활을 따라가며, 사람이 만나고 우정을 발휘하다가 다른 인간관계 속에서 소원해지기도 하며 결국 갈라서고는 여운이 남게 되는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어떤 마법의 계기가 있거나 갑작스러운 놀라움이 있기 보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인간 사이즈의 바퀴벌레와 함께 해도, 주인공은 특별히 놀라지 않는다. 아니 사실 특별히 놀라는 것은 전 작품을 통틀어 주인공의 여자친구 한 명 밖에 없는데, 그녀마저 사람 사이즈의 바퀴벌레라서 놀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장모 씨가 진짜 바퀴벌레와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놀랄 따름이다. 다르고 비속해도, 어차피 이 세상의 일부다.

바퀴벌레는 이 사회에서 비루한 처지에 있는 어떤 계층에 속해 있는 자다. 실제로 <장모씨 이야기> 연작 가운데 인권만화 모둠 <십시일반>에 실린, 동남아 노동자와 동성애 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작품에서 보여준 작가의 세계관을 고려할 때, 이 부분에 대한 섬세한 비유력과 묘사는 경탄할만 하다. 하지만 동시에, 바퀴벌레는 일상화된 외로움을 살아 나가고 있는 주인공의 또 다른 자아이기도 하다. 이미 무덤덤해진 자기 자신의 좀 더 비속하지만 나름의 생활 패턴이 있는 또 다른 파트너, 가상의 생활 상대 말이다. 뜨거운 우정이나 불타는 애정이 아니라, 그냥 같이 사는 룸메이트. 적당히 배려해주고, 적당히 무관심해지는 그런 사이. 필요 이상으로 개입해서 내 생활을 바꾸어 놓지도 않지만, 영향을 미친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남을 대할 때보다, 우리 자신의 어떤 일면을 대할 때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던가. 그리고 그것을 ‘일상’이라고 불러 왔다. 기묘하게 현실적인 판타지이자, 단절된 자아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매력 말이다. 스스로 무너질 정도는 아니지만 일상화된 외로움이 있는 어떤 자아가, 이 사회 속에서 어떤 일상화된 비속함과 소외를 지니는 어떤 자아와 만나서 서로를 보충해준다. 하지만 그것은 외로움의 해소가 아니라, 외로움과 함께 사는 법을 좀 더 부드럽게 터득해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모씨와 바퀴벌레의 생활은 무언가 버디무비와도 같은 티격태격거림과 달리 은근슬쩍 시작하고 은근슬쩍 끝난다. 그 이별은 슬프기 보다, 자연스러운 성장의 일부분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상징의 무게에 짓눌린 무겁고 우울한 작품이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부드럽고 열린 선의 흑백 그림이 전해주는 풍부한 감성은 이 작품의 균형감각을 대변해준다. 이러한 필체 속에서 공간의 묘사는 현실의 남루함이 과장되지도 은폐되지도 않는 정도의 수위로 조절된다. 장모씨와 바퀴벌레가 동거하는 자취방 공간에 베어 있는 생활의 냄새는 어떤 자세한 사진으로도 따라할 수 없는 자연스러움으로 가득하다. 이야기의 연출 역시 적당한 반전과 효과적인 시간 이동이 돋보이는 극적 구조를 활용하면서도 특유의 담담함을 잃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섞여 들어가며, 오랜 시간 공들여 구상해낸 작품이라는 흔적이 역력하다. 책에 같이 실려 있는 다른 짤막한 단편들과 비교할 때 이러한 요소들은 더욱 돋보인다.  

만약 <그와의 짧은 동거>가, 한국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히트를 기록하던 수년 전에 나왔더라면 아마 대형 히트를 쳤을지도 모르겠다. 유감스럽게도 연재지면이 없어지는 바람에 거의 5년여를 너무 늦게 출간한 템포 늦게 출간되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환상적 비유를 생활의 남루함 속에서 활용하여 일상 속의 성찰을 이야기했던 감수성이 지니는 힘은 여전히 강력하다. 외로움에 대해서 청승을 떨기에는 너무 그 상태에 오랫동안 처해있던 이야기. 모든 이로부터 버림받았다느니 하는 과장이 아니라, 그냥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어딘가가 비어있는 것 말이다. 바퀴벌레와의 동거 속에서, 약간은 그 생활에 더 능숙해진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낭만주의 – <위대한 캣츠비> [기획회의051030]

!@#… (이미 다 넘어간 후 반성문) 작가가 인터뷰에서 밝힌 바처럼, 캣츠비는 사실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원작으로 하거나 특별히 구체적인 모티브를 빌려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리뷰 본문에서 언급했듯, 일정 부분 기본설정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굳이 개츠비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만큼 그 ‘낭만’의 공식이 지극히 원형적인 모티브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건데, 다시 읽어보니 그 이야기를 참 애매하게 풀어냈다는 점을 깨닫고는 후회중. -_-;

==========================

낭만주의 – <위대한 캣츠비>

김낙호(만화연구가)

‘위대한 개츠비’라는 미국 소설이 있다. 영미권 문학의 나름대로 걸작으로 칭송받는 작품이지만, 사실 필자에게는 ‘맨 온더 문’이라는 영화에서 짐 캐리가 분한 코미디언 앤디 카우프만이, 자신의 코미디 쇼를 보러온 관객들 앞에서 뜬금없이 하루 종일 걸려서 처음부터 끝까지 낭독을 함으로써 황당한 물의를 일으킨 그 소설로 더욱 기억에 남아있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대충 이렇다: 가난한 농부집안 출신의 개츠비라는 청년이 있다. 그는 데이지라는 상류층 처자와 서로 좋아한다. 그런데 아뿔싸, 이 사람이 군대에 끌려가 있는 동안에 데이지는 부자집 남자와 결혼해버린다. 그래서 수단방법 안 가리고 자기도 부자가 된다. 돈으로 데이지에게 당당해진 개츠비. 하지만 데이지는 부자남편의 정부를 자동차로 치어죽이고 개츠비가 죄를 뒤집어 쓴다. 결말까지 폭로하자면(설마 이 정도로 오래된 이야기에도 누설방지 유통기한이 적용되지는 않으리라 보고), 개츠비는 결국 죽은 여자의 남편 총에 맞아 죽어버린다.

한눈에 봐도 알아볼 수 있겠지만, 이 공식은 한국 환경으로 그대로 옮겨도 사실 전혀 위화감이 없다. 신분의 차이, 오기에 찬 물리적 조건 극복, 그 속에서의 인간성 상실, 하지만 단 하나의 가치를 위하여 결국 비극적 희생. <공포의 외인구단>을 위시한 수많은 비장미 넘치는 80년대 극화체 만화들이 흔히 써먹었던 기본구도다. 그래서 고전인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언제라도 한국으로 번안된 개츠비 이야기가 인기 연재 만화로 등장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생각은 당연하다. 아니나 다를까, 온라인에서 <위대한 캣츠비>라는 만화가 연재를 시작했다고 한다. 아하, 내용은 “안봐도 비디오”겠구나. 결과는? 부자와 결혼해버리는 여자, 별 볼일 없는 주인공, 시대 속에서 꼬이는 사랑이 이야기 전체의 원동력이라는 정도의 기본설정이 공통점. 하지만 화려한 활극의 느낌마저 있었던 개츠비의 이야기와는 달리, 이쪽의 주인공 캣츠비는 훨씬 더 구차하고, 소심하고, 끝까지 별 볼일 없는, 그냥 어떤 참 운명이 꼬인 현대 한국의 궁상 백수 청년의 사랑담이다.

최근 연재종료를 맞이했고, 종이 단행본 2권이 출간된 온라인 만화 <위대한 캣츠비>(강도하/애니북스)의 연재 당시 인기비결은 무엇일까. 에피소드 중심으로 끊어지기 쉬운 온라인 만화에서는 아직 비교적 희귀한 쪽에 속하는, 장편 연재물이라서? 확실히 그런 측면도 있다. <슬픈나라 비통도시>같은 모음집에서 볼 수 있는 강도하, 또는 강성수라는 작가의 거칠고 실험적인 – 즉 독자들과의 소통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 기존 작품성향을 보면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이 작품은 정제되어 있는 드라마적 투르기와 독자의 관심을 고조시키는 연출과 끊어내는 타이밍 등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시각적 표현 역시, 모든 주인공을 의인화된 동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만화적 표현의 재미’를 부여하면서도(하지만 뚜렷한 상징체계를 느끼기는 힘들다), 대단히 세밀하게 감정선을 따라가는 배경 구도와 풍부하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표정묘사로 눈길을 집중시킨다.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주인공들의 감정 상태를 배경 또는 소품의 묘사를 통해서 보여주는 연출을 너무 남발해서 부담스러워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몰입하는 독서를 완전히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심지어 온라인 연재 당시에는 스크롤의 기본문법을 따르는 칸 연출을 하면서도, 종이책으로 출간하면서 그것을 전통적 의미의 종이만화의 칸 배열로 완전히 재편집하는 노력을 투자하는 등 한마디로 세심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분명히 시각 연출이든 이야기 연출이든, 표현적인 측면에서 <위대한 캣츠비>는 우수한, 최소한 독자들에게 지극히 성실한 만화다.

하지만 역시 그런 기술적인 완성도만으로 만화가 공감대를 자아내는 것은 그다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생활 묘사가 리얼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아 그래, 내 생활도 그렇지” 하는 마음을 품게 할 정도로 주인공들의 일상 생활 모습 자체에 통찰력을 집중한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리얼한 환경묘사와 달리, 생활은 솔직히 그다지 리얼하지 않다는 말이다. 오히려 백수생활의 리얼함이라면 고리타의 <룸펜스타>같은 개그만화가 한 수 위다. 아니 사실 그다지 일상적이지 않은, 꼬일대로 꼬인 치정극 이야기가 훨씬 더 작품 줄거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대와 인기를 끌어낸다면 무언가 다른 좀 더 근본적인 덩어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루어지는 사랑과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엇갈리는 우정? 글쎄. 발랄한 여자와 불행한 여자, 발랄한 남자와 궁상맞은 남자의 캐릭터성? 글쎄.

오히려 열쇠는 작가가 스스로 누차 강조하듯이 ‘청춘의 아픔’이라는 엄청나게 구식 느낌을 주는 창작의 변에서 찾아야 할 듯 싶다. 사랑이 존재방식이 되는, 그리고 사랑의 꼬임이 존재의 흔들림으로 이어지는 가히 근대 독일 문학을 연상시키는 이런 고전적인 접근이 다시 복고풍으로 트렌드를 맞추어 냈다는 것인가. 고전적이고 다소 남성 편향적인 청춘의 고뇌에 대한 과잉된 환상이 2000년대 독자들의 취향과도 일치한다고 생각하기는 좀 섣부를 것 같다.  글쎄. 그보다, 애초에 사람들은 그 취향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적합할 것이다. 지난 수년간을 강타했다가 최근 좀 거품이 가라앉은 감성파 에피소드 만화, 속칭 ‘에세이툰’의 히트를 기억해보면 더욱 그렇다. 한국에서 대중문화는 각종 미디어를 통해서 더욱 세련되고 쿨한 것을 소비(!)하도록 종용하고 있지만, 진짜 ‘취향’이라는 것은 소비 트렌드만큼 빠르게 바뀌지 않는다. 아니 소비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오히려 더욱 공고하게 원형적인 것으로 회귀하기도 한다. 그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은? 소재와 표현은 세련되게, 알맹이는 오히려 더 고전적으로. 예를 들자면 결국 비극적 인간관계 사건들이 꼬리를 물지만 여하튼 사랑이 존재의 원동력이다, 뭐 그런 방식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캣츠비>는 80년대적 비장미 성인극화와 2000년대적 에세이툰 부류의 이종교배에 성공한 셈이다. 나머지는 그냥 연출 표현을 위한 양념일 뿐이다. 작품의 장점도 단점도, 개별 독자들의 취향에 맞고 안 맞는 것도, 이 틀 안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듯 싶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만화언론 ‘만’ 창간기념 인터뷰. “그들에게 길을 묻다”

!@#… 만화언론 ‘‘ 창간 기념 인터뷰 시리즈 (물론 capcold의 경우는 서면 인터뷰). ‘만’ 출범에 대해서 말 많은 사람들 위주로 주욱 시리즈로 가고 있는 중인데, 3번째 타자가 capcold. 이 사람들 각각의 사고방식에 대한 나름대로 멋진 비교자료(?) 라고 생각된다. 조화롭게 잘 어울려들어가서 좋은 결과를 내면 더욱 더 좋겠지.

[창간 기념 대담] 그들에게 길을 묻다 (1) – 서찬휘

[창간 기념 대담] 그들에게 길을 묻다 (2) – 주재국

[창간 기념 대담] 그들에게 길을 묻다 (3) – 김낙호

!@#… 클릭 한번 하고 ‘만’으로 가서 읽기 귀찮으신 분들을 위해서 (사실은 자료 백업용으로), 특별히 capcold 파트에 한해서는 여기서도 읽을 수 있도록 해놓겠다. -_-;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끝까지 읽기(클릭)

여하튼 먹고 사는 생활 – <습지생태보고서> [기획회의051016]

!@#… 앞으로는 여기에 글을 올릴때 기본적으로 본문중의 작품에 링크를 걸어서 구매 사이트와 연결되도록 할까 한다. 어디가 가장 좋을까? 리브로? 예스24? 이왕이면 나한테 적립금도 쌓이는 곳이면 더 좋고. (과연 몇백원쯤 쌓이기는 할것인가? -_-; )

!@#… 하지만 마지막회의 희망찬 메시지는 좀 닭살이다. -_-; 전체 분위기에서도 튀고. 하지만 책소개 비평글에서 엔딩에 대한 스포일러를 넣는 건 역시 범죄겠지(식스센스는 아니지만);;;

====================

여하튼 먹고 사는 생활 – <습지생태보고서>

김낙호(만화연구가)

판도라의 상자라는 그리스 신화가 있다. 신들이 인간 세상의 여러 근심걱정들을 상자에 봉인해놨는데, 어떤 호기심 많은 처자가 그것을 칠칠치 못하게 열어버린 덕분에 그것들이 인간세상으로 모두 뻗어져 나왔더라, 라는 이야기다. 그 후 수 천년 동안, 갖가지 인간들이 그것을 가지고 여러 가지 교훈들을 나름대로 주장하곤 한다. 어떤 이들은 그래 역시 호기심이 문제의 근원이야, 라고 이야기하며 무지의 행복을 설파하곤 한다. 또 다른 이들은 왜 자꾸 그리스 신화고 기독교 창세기고 간에 여자들이 호기심으로 말썽을 일으키는 것으로 묘사하고 난리인가, 라고 XY염색체 소유자들의 역사 깊은 남존여비의 반증으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 가장 보편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교훈은 이 이야기의 마지막과 관련되어 있다: 걱정이니 질투니 노환이니 하는 오만가지 인간사의 부정적 문제들이 우루루 다 쏟아져 나온 뒤, 상자 맨 아래에 몰래 있던 마지막 하나. 바로 ‘희망’이라는 녀석이 남아있었기에 결국 아무리 험난한 세상이라도 희망을 가지면 대략 살만하다는 나름대로 낙천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모 영화에서 열심히 설파한 “카르페 디엠!(오늘을 불잡아라)” 하는 교훈을 훨씬 더 좋아하는 필자로서는 좀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지만, 오랜 인류역사 속에서 여러 사람들을 감동시킨 듯 하니 나름대로 인정해 주기는 해야 하겠다. 

최근 출간된 <습지생태보고서>(최규석 / 거북이북스)에는 이런 희망에 대한 약간 다른 접근, 좀 더 현실적인 접근이 담겨있다. 따지고 보면 굳이 희망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고난을 이겨내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낙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보람찬 것이다. 현실의 무게는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공상으로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무게 그대로를 여하튼 짊어지고 가야할 대상이다. 익숙해지면 좌절 같은 것은 굳이 할 이유가 없다. 갑자기 해탈의 경지를 논하고 있는 것이냐고? 해탈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당장 우리들의 일상이고 생활이다. 그것을 만화적 재미라는 양념을 쳐서 살짝 직면시켜주는 작품인 것이다. 이미 전작인 단편집 <공룡둘리>를 통해서 남루한 현실의 무게와 만화적 표현력의 재미를 효과적으로 실험해온 작가다운 행보다.

<습지생태보고서>는 <경향신문>의 만화 전문 주간 섹션에서 연재되었으며, 디씨갤러리를 통해서 인기를 모으는 등 이미 연재 당시부터 팬층을 결집시켰던 작품이다. 내용은 한 방에서 자취생활을 하는 네 명의 그다지 풍요롭게 생활하지 못하는 대학생들과, 이런 방 일수록 하나쯤 생겨나기 마련인 빈대 식구 한명(한 마리?)의 생활 속 에피소드들이다. 아하, 대학생들의 청춘의 고뇌와 우정이 다루어지겠구나, 어쩌면 연애 문제, 취직 걱정 등이 소재로 들어가겠구나, 라고 대충 머리 속에 그려질지도 모르겠다. 사실, 실제로 이 모든 것들이 이 작품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이 모든 것들 위에 서있는 중요한 대 전제가 이 작품에서는 무척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그것은 바로 “먹고 사는 것”이다. 방세도, 학비도, 식비도 모두 먹고사는 문제로서 해결을 해야 할 대상이다. 자취생활의 여러 습관들은 여타 작품에서처럼 단순히 하나의 ‘취향문화’ 처럼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겨울 난방을 하면 등은 타고 코는 얼어 붙는 옥탑방을 무슨 ‘펜트하우스’ 처럼 묘사한 <옥탑방 고양이> 같은 드라마가 좋은 예다), 진짜로 먹고 살기 쓸 돈 빼면 따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만들어진, 생활의 때가 묻어있는 패턴들이다. 단순한 포장이 아니라 살아가는 필연적인 방식인 ‘생태’이며, 그 곳은 폼나는 양지도, 위악적인 어둠과 비참함의 음지도 아닌, 적당히 구질구질한 ‘습지’다.

시각적 묘사에 있어서도 이 작품은 탁월하다. 남루함이 과장되지 않게 묻어나는 ‘습지스러운’ 생활 공간과 사람들을 제대로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극화체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지나친 기교나 딱딱함을 배제한 화풍, 그리고 원색의 화려함이나 파스텔톤의 감상주의를 모두 비껴난 탁한 질감의 컬러링 등에서 드러나는 필력 역시 이야기의 내용과 좋은 조화를 이루어주고 있다. 페이지 연출에 있어서 아직 4페이지 단위라는 짧은 호흡에 익숙하지 않은 듯 마무리 임팩트 타이밍이 슬쩍 어긋나는 에피소드도 초반에 더러 있지만, 작가의 첫 고정 연재작이라고 도저히 보기 힘들 정도로 이내 능숙한 페이스를 찾아나간다.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생활만화다. 하지만 생활 속 감상을 적당히 감상주의적으로 포장한 소위 ‘에세이툰’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이 작품은 4페이지짜리 짧은 호흡으로 에피소드를 구성하며 (나름대로) 개그 만화다. 그런데 <츄리닝>이나 <트라우마> 같은 다른 히트 ‘넌센스반전패러디개그만화’들과는 뭔가 방향이 많이 다르다. 남루한 현실이 들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얼리즘과 비극으로 점철된 작품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래도 생활 속 위트와 히트급 개그와 현실적 공감대로 가득하다. 그 이상한 원동력은 바로 솔직함이다. 풍족하지 못한 자취생활이지만, 솔직하게 그렇게 궁하게 그냥 산다. 하지만 폼나는 것들을 한번 걸쳐볼 기회가 생긴다면, 비굴해질 필요도, 마다할 이유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낙관적으로 실실거리는 따듯한 낭만이 살아 숨쉬어야할 대목이 올 듯 하다가도, 당장 이번달 생활비를 계산해봐야 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처음에는 주인공 최군의 복잡한 머리 속과 다른 3명의 괴짜 룸메이트들의 티격태격 거림 속에서 주로 표현되다가, 나중에는 숫제 현실의 비열함과 욕망을 응축시킨 전용 캐릭터의 등장으로 더욱 고조된다. 자취방의 제 5의 주민, 작품 자체의 흥망과는 별개라도 대형 히트를 기록함이 마땅한 걸작 의인화 사슴 캐릭터 ‘녹용’이 바로 그 존재다. 가장 비현실적이고 나름대로 희망찬(?) 외모를 지닌 녹용이, 나름대로 낭만과 감성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현실의 무게를 줄이며 희망을 이야기해보려는 주인공들에게 차가운 현실을 깨우쳐주곤 한다. 최소한의 비굴함도 미안함도 없이, 생활의 사사로운 욕망 그 자체에만 집중하고 또 룸메이트들에게 그 교리를 설파하는 명언 제조기인 셈이다. 단지 현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뜬금없을 만큼 솔직하게 던져준다는 것, 그것이 유머의 원천이고 공감대의 핵심이다.

판도라의 상자가 주는 진짜 교훈은, 불확실한 미래형인 ‘희망’이라는 것 정도만으로도 그 많은 삶의 고난들을 마음 속에서 억지로 상쇄시켜버릴 정도로 인간의 사고회로가 멍청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삶이 아름다운 것은 찬란한 희망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주저앉지만 않는다면, 여하튼 살아갈 만 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습지’는 반지하 단칸 자취방이 아닌,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바로 이곳 이 공간이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모범적 일상은 아니지만… <생활의 참견>[기획회의050919]

!@#… 그간 밀린 포스팅 떨이. -_-;

===========================

모범적 일상은 아니지만, 모범적 일상만화 – <생활의 참견>

잘 알려져 있다시피 라디오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코너들 가운데 상당수는, 청취자들이 보낸 사연을 소개해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경험담을 털어놓는다는 것의 재미는 과연 무엇일까. 충격적인 소재와 극적인 전개, 놀라운 특수효과가 들어가지 않더라도 이야기 자체의 힘만으로 사람들을 휘어잡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일상성의 매력, 공감의 힘이라고 불리우는 그 이상한 흡입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일상성의 재미 가운데 하나는 바로 ‘공감’이다. 원래 인간이라는 동물은 그다지 상상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라서, 모든 것을 자신의 직접적인 생활 경험과 가까운 것으로 적극적으로 변환시켜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촉진하는 가장 강력한 두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는 바로 디테일이다. 타인의 이야기 속에 담긴 소소한 디테일이 내가 경험적으로 기억하는 어떤 것과 일치하면 마음 놓고 전체 맥락에 공감해버린다. 거꾸로, 전체 맥락이 공감 갈 만한 내용이라도 디테일이 미묘하게 다르면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다른 하나는 실존하는 화자다. 이야기가 가상적인 캐릭터들의 모험담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가의 생활이다, 라고 현존하는 주체가 부여되면 공감의 수준은 더욱 올라간다. 이 두 가지가 갖추어질때, 남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우리네들 사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 측면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아예 소재로서 일상적 살아가는 이야기나 생활을 다루는 것을 ‘일상물’이라고 한다.

상상력 풍부한 모험담, 자유분방한 표현법을 주로 발달시킨 만화에 있어서 이 분야는 사실 비교적 늦게 개척된 것 가운데 하나다. 논픽션(다소의 각색과 과장은 너그럽게 허용한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에세이, 일기, 사연소개라는 컨셉이 한국에서 만화와 만나서 대중적 성공을 거두기 시작한 것은 사실상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어 “그런 시시한 이야기들을 가지고도 만화를 발표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이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성장은 대단히 빠르게 이루어져서, 지금은 당당한 주류 장르 가운데 하나가 되어있다. 물론 항상 그렇듯이 함량미달의 물건들도 많지만, 정말 무릎을 치게 만드는 작품들의 맥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최근 단행본으로 출간된 <생활의 참견>(김양수 / 애니북스)을 이러한 장르적 유행에 편승한 작품이라고 평한다면 무척 당혹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오히려 이 작품은 이 장르의 사실상 선구자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작가가 월간 의 기자로 근무하면서, 지난 98년부터 꾸준히 연재해오던 것들의 묶음이다. 월 1회 한 페이지 남짓 연재되던 것이기에 7년만에야 단행본 분량이 축적되었고(사실 그나마 글이 절반이다), 웹사이트에서 연재한 것이 아니라 종이잡지에서 한 것이기에 여타 일상만화보다 전파가 덜 되었을 뿐이다. 

<생활의 참견>은 좋은 일상만화의 장점을 고루 지니고 있다. 자신과 자신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부여되는 현실감, 세부적 디테일을 맛깔스럽게 포장해내는 솜씨,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마치 10년만의 동창회 술자리에서 입담 풀어놓듯이 재미있게 전개시키는 이야기꾼 기질. 또한 각 이야기를 짧게 끊어주면서 일상 속 ‘에피소드’를 각인시키는 솜씨 역시 출중하다. 독자들은 작가의 삶 자체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공감하고 즐길만한 편린들을 원하니까 말이다. 특히 책의 전반부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것은 80년대 초의 청소년기인데, 그 때가 한국에서 대중문화의 격변기였기에 참 기억을 같이 나눌 일들이 많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대단히 유리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아 그때는 이런 게 다 생겨났었지. 우리 동네에도 그게 있었는데, 그 때 그런 친구 녀석이 하나 있었는데 말이야, 엉뚱하게도 **한 짓을 해버렸어!” 물론 좋은 마무리를 하려면, 결코 “그때가 그리워요” 식의 이상한 감상주의로 끝나면 안된다. 단편적인 재미있는 기억이 샘솟는 것과 정말로 그때를 그리워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니까. 예를 들어 군대 개그를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좋은 일상만화의 또 다른 조건은 바로 일상의 공감 이상의 대단한 무언가로 독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인데, <생활의 참견>은 이 것 역시 잘 충족하고 있다. 억지로 감상주의를 강요하지 않고, 억지로 웃기려고 오버하지도 않고, 심지어 그림체마저도 부담없고 푸근하기 이를 데 없다. 세밀하거나 박진감 넘치는 데생과는 애초부터 방향이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더그라운드 만화에서 종종 활용하는 위악적인 낙서체의 느낌도 아니다. 그림과 글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만화라는 매체의 매력을 확실하게 활용하면서도 절제할 줄도 아는 균형감각 역시 좋은 이야기꾼의 증거다.

하지만 모든 일상물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인 소재의 고갈로부터 자유롭기는 힘들 듯 하다. 사실 사람의 일생이란 워낙 재미있는 일들이 한정되어 있는데, 남의 이야기를 잘 포장하는 것은 자기 이야기를 포장하는 것과 전혀 들어가는 힘이 달라진다. 당장 이 책 한권 안에서도 직접 겪은 일과 ‘사연을 소개받았다’는 일들은 특히 디테일의 활용에 있어서 워낙 재미의 격차가 상당히 크다. 그렇다고 해서 작품 컨셉을 이제부터 사연보다 잡상으로 바꾸기 시작한다면? 책 말미의 섹션을 차지하고 있는 잡상류 작품들의 면면을 볼 때, 작가의 특기분야가 어느 쪽인지는 너무나 명확하다. 아니 사실 책으로서 컨셉 통일성과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아예 말미 섹션 자체를 넣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결국, 방법은 끊임없이 폭넓은 재미있는 생활을 만들어나가서 자꾸 현재진행형으로 소재를 만들어 나갈 수 밖에 없다. 잘 해나가면 7년 뒤에 또다시 단행본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고, 아마 독자들 역시 기쁜 마음으로 그 순간을 기다리게 되지 않을까. 여하튼 지금은, 일상에 즐겁게 참견당해서, 또는 참견하는 일상의 즐거움을 같이 공감하며 느낄 수 있는 책이 나와줘서 즐거울 따름이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불 붙은 쿼터제 논의에 찬물 끼얹기.

!@#… 해외 만화 쿼터제 도입 제안에 대한 뉴스가 나간 뒤로 여기저기서 반발 반응이 나오고 있는데, 어차피 대부분은 그냥 그 기사만 달랑 읽고 0.5초만에 분노, 0.94초만에 욕설이나 대충 갈겨버린 것들이니 무시. 아주 소수는 그나마 좀 더 현실적으로, ‘그러다가 공멸한다’라는 이야기를 함. 다만 이해가 전혀 안가는 부류들은, “그러다가 공멸한다고! 그러지 말고 대여점이나 없애!”라고 주장하는 부류. 대여점을 인위적으로 없애는 것이 차라리 더 공멸의 지름길이라는 정도는 생각을 좀 했으면 좋겠지만 뭐 그건 몇년째 이야기하고 나니 피곤해서 패스.

!@#… 이전에도 이야기했듯 capcold는 쿼터 반대론자는 아니지만 회의론자. 쿼터제 도입만이 살길이다!가 아니라 쿼터 배분의 효과를 지닌 우회로를 만들자, 라는 지극히 현실주의적 입장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https://capcold.net/blog/?p=593 에서 했으니 생략. 한문장으로 요약하면, 수입배급업자와 창작출판사를 따로 분류한 후 문화산업 지원을 후자에게 몰아주는 것).

…한마디로, 찬쿼터/반쿼터로 단순하게 나누어버릴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아니 그렇게 나눠버리는 순간, 건설적인 발전방향과 실천은 20억 파섹 너머로 날라가버린다. 반쿼터를 부르짖고자 하는 사람들은 하다못해 왜 이런 정책제안을 하는지 자료를 좀 찾아보기나 할 것이며(찾기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쿼터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좀 열정과 의지를 잠시 가라앉히고 현실적으로 머리를 식혀가며 현실적 방안들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법을 제안하는 것은 원론 수준에서의 문제제기가 아니니까. 너도나도 잘못했다는 양비론이 아니라, 현실적인 방안을 다듬어내고 밀어붙이자는 말이다. 민병두 의원측에서 제시한 안은 분명히 그 구체적인 듯한 이미지에 비해서 아직 너무 거칠다. 문제의식만 있지, 도입방법에 대한 현실적인 조율이 전혀 없다. 한마디로, 아직 발표할만한 단계의 물건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 그래서 정말 아쉬운 건, 미숙한 이슈메이킹이다. 원래 쿼터제의 도입취지가 무엇이든 간에, 뉴스보도는 어디로보나 한국만화 확보가 아닌 수입규제로 다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50%니 1%당 벌금 100만원이니 하는 비현실적 수치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보도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문제다. 이렇게 해서야 결코 도입의 본래 취지가 전달되는 일이 없이, 다만 “정부가 엄청난 뻘타를 날린다!”(보통, 사람들은 국회의원이든 뭐든 다 정부라고 생각한다) 고 생각하게 될 뿐. 대형 출판사로 하여금 종수를 줄이도록 유도한다는 것 역시 이면의 기획이어야지, 드러내놓고 수입규제로 비추도록 하면 역효과를 일으킬 뿐. 그보다 애초에 이해가 안가는 것이, 만화판의 현재 상황 – 특히 대형 출판사들의 무분별한 종수경쟁과 그에 따른 과다물량 – 에 대한 개요와 여러 종합적 대안 등이 담겨있는 종합보고서, 내지 하다못해 공식 보도자료의 형식으로 먼저 기사화를 하면서 그 후에 공식 제안을 하는 것이 정상적인 이슈메이킹 과정이어야 할 텐데… 어째서 먼저 쇼크!부터 터트린 후 그저 아무도 서로 말을 안듣고 시끄러워진 판에서 이야기를 이어가려는 것인가. 건설적인 담론형성과 정책입안에 해가 되면 해가 되었지, 결코 득될 것이 없는 미숙한 언론전략이다. 또한 다양한 종합 발전 정책을 아우르는 마스터플랜을 발표하면서 그 취지 속에서 이런 것을 추진한다는 비전을 보여주지 않고 막무가내로 쿼터 이야기만 툭 꺼내면 누구라도 반발심이 생길 수 밖에. 규제책이란 그런 것이다. 아, 정책제안서에 여러 개념들이 언급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왜 대여권이 추진되다가 고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현실적 재검토 없이 곧바로 ‘역시 대여권은 필요하다’라는 원론을 반복하는 식으로는 그다지 현실감이 없다. 정확한 통계, 공공 출판 시스템… 이미 몇년 전에 다 제시되었는데 여러 사정으로 제대로 진행이 안된 것들 투성이(자세히 소개하자면 길다). 그런데 쿼터제 이야기만 새롭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부분만 부각될 수 밖에. 또한 쿼터제가 대여권이나 다른 정책들과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될지에 대한 제시보다, 이것도 저것도 필요하다는 수평적 요소 나열으로는 더욱 설득력이 부족하다. 각각의 요소들은 멋진 말이지만, 합쳐놓고 볼 때 인과성이 떨어진다. 한마디로, 아직 베타버젼, 아니 알파버젼의 제안서다.

… 민 의원 진영에 냉철한 담론 전략가가 개입되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앞으로 갈 길이 천리만리길인데, 첫 걸음부터 벌써 똥을 밟아버리면 곤란하다. 다만 절대 잊어서는 안될 것이… 갈 길의 종착지는 한국만화판에서 한국만화가 안정적인 양적/질적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며, 쿼터제는 그곳으로 가는 작은 길목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만약 곤란하겠다 싶으면 당연히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우회로를 택하는 것이 맞지, 그 앞에서 주저 앉아있어서는 안된다는 것. 이미 대여권 도입 시도와 올해 입안 실패에서 겪은 일 아닌가.

!@#…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쿼터제는 좋든 싫든 규제책이다. 쿼터제라는 규제책이 아닌, 의도한  긍정적 효과와 비슷한 결과를 낼 수 있는 지원책에서 우회로를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 수입사에는 배급업자로서의 세금을, 창작사에는 창작지원의 혜택을.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 수정 영리 자유 —

상상의 자유와 발언의 무게 사이: 만평의 책임 [인물과 사상 0510]

!@#… 인물과 사상 2005년 10월호 수록(원래는 9월호용이었으나, 마감 시간의 문제로 – 편집부 잘못 1%, capcold 잘못 99% – 10월호에 들어감). 인물과 사상에서 하고 있는 ‘시사만화’ 이야기는  아무래도 통일된 주제를 상정하다보니 각론과 총론을 배합해가면서 쓰는 중. 그런데 개별 시리즈/작가를 해부하는 각론과는 달리, 종합적 이야기를 하는 경우에는 별로 인기가 없다. 이번에는 후자쪽 부류인데다가, 왠지 단행본으로 치면 결론 챕터에 들어가야할 듯한 내용… -_-; 하기야, 조선일보 곤란하다!라고 하면 다들 맞아맞아 하면서도, 신문의 책임은 이런 것이야!라고 하면 어려워하는 것이 사람심리.

!@#… 앞으로도 각론 분야에서는 뉴스툰이라든지, 시사뒷북 등으로 대표되는 서사형 시사만화, 박순찬의 장도리를 위시한 90년대 이후 동향… 등등, 그리고 총론 분야에서는 포털과 시사만화, 프로파간다로서의 만화, 만화와 사회참여, 한국 시사만화의 흐름(단순히 자료로서의 ‘역사’가 아닌, 진짜 변화과정) 등등 여러가지를 건드릴 생각. 확실한 틀을 좀 더하면 언젠가 단행본화할수 있을지도(누가 사본다고…;;).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끝까지 읽기(클릭)

신파의 미덕 – <바보> [기획회의050904]

신파의 미덕  – <바보>

통상적인 의미와 실제 대상의 괴리를 느끼도록 하는 호칭들이 가끔 있다. 예를 들어서 ‘미친년’은 어떨까. 통상적으로는 어떤 여자가 뭔가 황당한 짓을 했을 경우 그냥 피식 웃으며 내뱉는 호칭이다. 하지만 원래 이 단어가 진짜로 대상으로 하고 있던 것은, 무언가 엄청난 비극적인 사건을 겪고 그 충격으로 인하여 실성, 진짜로 정신병리학적으로 큰 문제가 생겨서 동네를 배회하던 그 사람들이다. ‘지랄한다’, ‘병신 삽질한다’ 등 일련의 비속어들이, 다들 훨씬 더 비극적이고 끔찍한 상태인 무언가를 일상의 친근한 이미지로 자연스럽게 바꾸어 놓는다.

<바보>(강풀(강도영) / 문학세계사)의 첫 머리는 바로 이 지점을 한번 긁어주면서 시작한다. “어린 시절 어느 동네에나 하나쯤 있었던 바보.” 어라, 생각해보니 필자가 어렸을 때도 동네에 바보가 하나 있었다. ‘이런 바보 같은 놈’이라고 할 때의 바보가 아니라, 진짜 바보 말이다. 아니 더 자세히 생각해보니 이사 다니던 어느 동네에나 하나씩은 있었던 것 같다. 놀림 받고, 애들이랑 어울리는 어른. 지저분하게 하고 다니면서, 어떤 애들보다도 더 애들 같았던 사람들.

<바보>는 ‘<순정만화 씨즌2>’라는 다소 안전한 선택의 부제를 달고 미디어 다음에 연재되었던 작품이다. 이야기는 동네 바보 승룡이, 미국에 유학가서 피아노를 치다가 좌절해서 돌아온 지호, 승룡이의 친구이자 동네 양아치인 진수 등 여러 주인공들의 과거 사연과 현재의 응어리가 점차 풀려나가는 식이다. 그 방식은 무척이나 고전적이고 드라마틱하다. 엇나간 애정, 끈끈한 우정, 조건없는 희생 같은 구식의 감성은, 선천적 유전병, 어린 시절의 사고, 어린 시절의 약속 등 구식의 소재들과 만나면서 하나의 전형을 이룬다. 그런데 그것이 ‘지겹다’기 보다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재미로 녹아들어가는 자연스러움을 보이고 있다.

<바보>는 만화가 강풀(강도영)을 대중적 스타로 만들어준 <순정만화>,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연재했던 <미스테리 심리 썰렁물>(출간시에는 ‘아파트’로 제목 변경)과 마찬가지로 2권짜리로 묶여 나왔다. 항상 사전에 스토리를 완성하여 4개월 동안 집중 연재를 하고 수개월 휴식을 취하는 이 작가의 방식은, 무한 연재 속에서 스스로 망가지는 많은 연재만화들의 함정에서 의연하게 벗어나 잘 구성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좋은 작품 발표 방식이기도 하다. 전작의 인기에 버금가는 호응을 불러일으켰다느니, 곧바로 영화화 판권이 팔려나갔다느니 하는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들은 대충 넘어가더라도, 여하튼 이 작품의 특징과 미덕은 무척 분명하다. 형식적 특성인 칸 경계선을 흐리게 처리하고 그 대신 독백 대사로 연결하는 주관적 서술, 간혹 등장하는 스크롤 넘김 효과의 표현력을 활용하는 한 화면 이상 길이의 세로로 긴 칸(이것은 마치 책 만화의 경우 한 칸으로 두 페이지를 가득 채워서 시선을 제압하는 것과 비슷한, 아니 그 이상의 효과를 지닌다)은 이제는 굳이 다시 이야기하기도 뭣할 정도로 완전한 스타일로 완성되고 있다. 여러 주인공의 심리적 엇갈림에 의한 다중 시점 전개 역시 인간사의 감성적 면을 강조하는 이 작품에서 강한 효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어떤 형식적인 실험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결국 그 형식을 통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전달하여 독자를 휘어잡는가 하는 측면인데, 능란한 이야기 페이스 조절과 무엇보다 여전한 – 아니 한층 더 강력해진 신파 정서가 <바보>의 가장 큰 미덕이다. 이 작품에서는 누구하나 내심 순수함을 간직하지 않은 사람 없고, 다양한 인간관계의 엇갈림 속에서 모든 문제는 정서적인 방식으로 해결된다. 항상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개연성 없이 몰려오는 여러 비극 속에서 주인공들은 사랑과 우정 말고는 기댈 곳이 없다.

이런 각박한 현실 세상에서 그런 것이 가능하겠냐고? 그렇기 때문에 현실세계 속에 있으면서도 현실과 떨어져 있는 순수와 서정의 전도사가 필요하다. 바로, 바보 말이다. 바보 승룡이는 기본적으로 과거의 존재다. 정확히는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 성장을 그만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성장하면서 잊어버린 여러 가치들, 어릴 적의 어떤 빛나는 순간을 계속 현재진행형으로 기억한다. 작은별 행진곡이든, 동생을 돌봐줘야 한다는 단 하나의 약속이든 뭐든 말이다. 승룡이라는 바보라는 존재는 현실에서 잊어버린 소중한 무엇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나 다름없고, 그를 낙오자로 보지 않고 자신들의 거울로 받아들이는 순간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그것은 과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소중히 끌어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일종의 우화처럼 포장된다. 누구나 순수한 삶에 대한 애정을 되찾는 이 따뜻한 작품에서 (나름대로 사연은 있지만) 유일한 악역이자 삶의 회복에 실패하는 ‘사’장이라는 자가 이 작품의 매개체인 바보 승룡이와 유일하게 교류하지 않은 캐릭터라는 점이 가정을 뒷받침해준다. 그렇게 해서 이야기는 완성된다.

이 말은 반대로 하면 고스란히 작품의 약점이 된다. 기본적으로 과거와 순수를 매개로 해야 현실에서 깨달음을 얻도록 한다는 것, 무조건적인 – 따라서 비현실적인 – 감상주의를 통해서 인간사가 진행된다는 것은 지나치게 달콤한 환상이다. 심지어 비극이라 할지라도, 달콤한 비극적 환상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전작 <순정만화>가 다양한 남녀 간 사랑을 통해서 나름대로 사람 사이 현재에 충실한 솔직한 소통의 중요함을 자연스럽게 강조한 것에 비해서, <바보>는 작품의 줄거리에서 진행되는 감동 이상의 지속적인 무언가가 부족한 측면이 있다. 애초에 사회파 만화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온 작가의 이력으로 볼 때 아쉬운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재미와 감동을 부인하거나, 심지어 약간이라도 덜 즐겨야할 필요는 없다. 능란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따뜻한 감성의 완성된 이야기의 매력을 폄하하는 것은 절대 부당하다. <바보>는 재미있는 작품이고, 따뜻한 이야기가 그리운 모든 이들을 위한 멋진 선물이 되어줄 것이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연재중단의 논리.

!@#… 김은희의 <더칸> 연재중단 건과 관련해서.

http://jumosee.egloos.com/504110

http://www.manhwain.com/main.html?no=120

http://blog.naver.com/johnsilver9/20015555098

!@#… <더칸>이라는 작품을 특별히 좋아한 적은 없지만, <윙크>를 현재 구독하고 있지는 않지만, 연재중단이라는 것은 언제라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작가의지든 편집부 의지든.

!@#… 하지만 솔직히 <해와달>이 아이큐점프에서 연재중단 밀려났을 때보다 더 가슴아프다든지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안타깝지만, 그 결정에 이성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반대했지만, 그래도 납득은 갔습니다. 잡지니까요. 연재니까요. 고료가 들어가는 작업이니까요. 그나마 예고라도 있고 반항할 여지라도 있지, 영챔프에서 <맘보 파라다이스>, <그의 나라>가 사라졌을 때에는 참… 당혹스러웠죠. 하지만 납득은 합니다. 작품의 수준이 어떻든, 편집부와 ‘주독자층’의 수준이 모든 것을 결정할 따름입니다. 극단적인 비유로, 신일섭씨의 <코믹스> 웹진에서 연재하는 마고딕 작가의 그로테스크한 작품이 난데없이 <팡팡>에 연재된다고 칩시다. 당연히 밀려날 겁니다. 물론 애초에 장기적 포석을 못하고 근시안적이었던 편집부의 실수가 큽니다. 하지만 결국 밀려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작품이 좋든 나쁘든, 잡지는 자신의 성향을 가지고 다른 것을 밀어내는 것이 정상입니다. 문화적 종 다양성, 저는 200% 지지합니다. 하지만 일개 잡지가 그것을 맡아서 해줘야할 의무나 책임감을 바라는 것은 애초에 무리입니다. 그런 희생이 어디있습니까. 만화사랑의 이름으로 희생해야 하는겁니까?

!@#… 만화 팬 여러분, 만화 좀 그만 사랑하십시오. 사랑의 열기는 좀 덜 해도 되니까, 대신 차갑게 지갑을 여십시오. 10대 팬클럽들이 지갑을 열고 보이밴드들의 음반을 사재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의 모든 꽃미남들은 가수로 데뷔하기 시작했습니다. 초등생들이 부모를 시켜서 학습만화를 빙자한 아동 오락만화에 지갑을 열었습니다. 수많은 출판사들이 그쪽으로 달려들었고, 너도나도 제2의 그리스로마신화를 꿈꾸고 있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더칸>을 살리고 싶다면 <더칸>에 지갑을 여십시오. 그 중에서도, 시장성을 과시하는 쪽으로 여십시오. 예를 들어, 빌려보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빌려보는 것으로 증명되는 종류의 시장성은 용도가 제한되어 있어서, 적어도 잡지연재를 지속시켜주지 쪽에는 써먹지 못합니다. 돈은 없지만 사랑은 한다구요? 그렇다면 작가분도 돈은 없지만 사랑을 하시기를 – 즉 연재비를 포기하고 단지 만화사랑만으로 작품을 완간시켜주기를 간절히 기도해보시기 바랍니다.

!@#… 많은 팬들의 당혹스러운 점이, ‘만화사랑’이 모든 것을 정당화해주고, 또 ‘만화사랑’에 대한 보답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바란다는 겁니다. ‘사랑과 분노’가 아닌, ‘시장성’을 보여줘야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전설처럼 인용되곤 하는 말인 “일본의 어떤 출판사에서 500부 팔릴 내용이라도 만든다더라”라는 건, 그 500부로도 돈을 뽑을 만큼 운영을 짜게 하고 책을 비싸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는 곳은 한국에도 넘쳐납니다. 만화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시장성이 열악한, 시집들을 보세요! 비록 마이너하지만 나의 취향을 즐기고 싶다, 라면 그 취향이 산업적으로 버틸 수 있을 만큼의 돈을 소비해줘야 합니다. 완전히 오타쿠화되어버린 일본의 만화/애니 시장이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오타쿠들이 목숨 걸고 돈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취향을 지킬 – 즉 물질적 투자를 할 – 각오도 없으면서 나무에서 모든 것이 떨어지길 바라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겁니다. <더칸>이 나이대 때문에 윙크에서 밀려난다면, 나이대에 맞는 지면으로 옮기면 됩니다. <허브>라는 성인 순정지의 존재조차 모르는 자칭 만화팬들이 태반이지만. 나이대는 맞지만 장르 성향이 안맞는다면, 또 다른 방법들을 모색해야 되겠죠. 단행본 단위로 가든, 웹 연재로 돌리든, 사전 주문 동인지나 이슈 형태로 가든… 쉬운 길은 아니죠. 하지만 특정 지면에서 밀려났다고 해서 사라져버릴 만한 작품이라면, 사라질 만한 정도 밖에 안된다는 것 뿐입니다. 독자층이 확고하고 그 독자층이 바로 시장층이 되어준다면, 어떤 형태로 가더라도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 서명운동으로 10만명을 모으는 것보다, 단행본 판매부수 1만권을 해주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됩니다만. 아니, <윙크> 구독 부수를 단 5000부만이라도 더 늘려주고, “<더칸>때문에 윙크를 사봅니다! 화이팅!”이라고 한마디라도 게시판에 남겨주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되지요. 별로 어렵지도 않고 귀찮을 것도 없습니다. 윙크 항의 서명운동을 할 것이 아니라, 연재를 못하게 될 5-10권까지가 담긴 박스세트를 사전예약 판매를 하십시오. 애장판 가격으로 해서, 1000세트만 사전판매 달성한다면 연재지면이 생길 겁니다. 이런 것이 ‘무언가를 이루어낼 수 있는 운동’ 입니다. 서명운동보다 불매운동, 불매운동보다는 구매운동, 구매운동보다는 자연스러운 구매활동이 필요하다는 무지하게 간략명쾌한 논리를 좀 효과적으로 설파하고 싶습니다.

 

— 2005 copyleft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한국만화는 볼 것이 없다고 하는 바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 주모씨님의 글에서 트랙백. “한국만화 볼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이상한 일이다. 나는 별 문제없이 제가 즐길만한 ‘우수한’ 한국만화들을 잘만 읽고 있는데. 현재 출간중인 것들이든, 과거의 명작들이든. 한국만화가 일본망가에 비해서 우수하다 또는 열등하다? 그런 대단한 전체 차원 같은 건 알 길이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엄마가 더 좋아, 아빠가 더 좋아 만큼이나 철학적인 질문.

그냥, 만화라는 커다란 풀 속에서 볼만한 것을 뽑을 때, 한국 만화가 상당 비율 들어간다는 것이 내게는 너무 당연하다. 한국 독자이다 보니, 한국 특유의 요소들에 대한 코드 공감도가 높으니까. 예를 들어 <츄리닝>이나 <트라우마>의 군대개그들은 어느 다른 나라 만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소중한 문화적 종 다양성이다. 아 물론 한국이라는 현실사회 – 아니 현실 자체를 별로 안 느끼고 사는 사람들은 경우가 다르겠지만.

물론 장르에 따라서 일본망가가 압도적으로 더 강세인 경우도 있고, 미국만화가 강세인 경우도 있다. <드래곤볼>의 유구한 전통위에 서있는 ‘점프식 스펙타클 격투 성장물’이나, 요리만화류 같은 소위 ‘전문소재 만화’가 일본의 주류 잡지연재 시스템에서 가장 효과적/효율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이제는 상식이다. 적어도, 만화가 어쩌느니 떠들 수 있으려면 그 정도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어야겠지. 미국이 수십년간 고안한 이슈 단위 분업화 제작시스템보다 더 슈퍼히어로물을 효과적으로 뽑아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예외적인 개별 작품들은 나올 수 있지만, 하나의 ‘경향’은 그렇지 않다. 비록 만화가 상대적으로 덜 자본 소모적인 대중문화장르라고 할지라도, 시스템의 힘이란건 그런거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장르적 장점은?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기회에 따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그런데 “생각없이 때려부수면서 괜히 지적인 풍미도 살짝 넣어주는 SF액션 영화” 라는 장르에서 헐리웃 블록버스터가 우위를 지닌다고 해서, 미국영화 이외의 것들은 모두 ‘볼 것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생각없이 때려부수면서 괜히 지적인 풍미도 살짝 넣어주는 SF액션 영화”만 보는 것은 뭐 취향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그것이 영화의 전부라고 주장하면 그건 그냥 미친놈일 뿐. 심지어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아아…한국영화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라면서 짐짓 걱정해주는 제스쳐까지 나오면 그건 정말 구제불능일 뿐. 뭐랄까,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대단히 좁고 특정적인 취향을 성급하게 판 전체로 일반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그 범주에서 벗어나면 인정해주지 않아버리고. 이런 부류를 일반 용어로는 ‘초딩’이라고 하기도 하고, ‘찌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마 현재 한국 – 아니 세계 인구의 95.3204%를 차지하고 있지 않을까 가설을 세워본다. 통계적으로 검증할 생각은 당연히 없다.

식당에 비유를 하자면… 오로지 햄버거만을 세상 음식의 전부로 생각하면서, “이 동네에는 먹을 것이 없어”라고 투정하는 회사동료가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 동네는 사실 바지락 칼국수 전문이다! 그렇다면 보통은 이렇게 말해주기 마련이다: “야 그런 것도 좋지만, 맨날 편식만 하지 말고… 이 동네는 바지락 칼국수가 죽여주거든? 한 번 먹으러 가자!”. 그 결과 그 친구는 어쩌면 새로운 맛의 세계에 눈을 뜰지도 모른다.

!@#… 칼럼이나 리뷰 등의 저널리즘으로서 만화 글쟁이들이 해줘야 하는 역할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에서 <배가본드>가 일본에서만큼 안팔린다고 해서 한국만화판이 존내 망해간다고 확신하는 바보들에게 제발 만화 선택의 폭을 좀 넓혀주는 것. “한국만화 사랑하자!” 뭐 이런 것이 아니다. 제발 만화 좀 제대로 즐겨봐라, 사실 너 같은 생활이면 이런 만화가 훨씬 더 재밌을 것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도록 좀 도와주고 한번 시도해보라고 용기를 북돋아주마, 뭐 그런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스스로 참 여러 장르와 취향의 만화들에 익숙하고 또 즐겨야만 한다. 편협한 미식가가 소개하는 편협한 맛집소개가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 그래도 결국 열쇠를 쥔건 독자들 자신이다. 한국만화가 볼 것이 없다는 엄청난 주장을 남발하기 전에, 만화라는 거대한 카테고리가 아닌 내가 좋아하는 어떤 취향 장르라는 작은 카테고리로 줄여서 생각하는 법을 좀 익히기를. 햄버거가 지겨우면 밥먹는 걸 포기하는 게 아니라, 하다못해 떡라면으로라도 바꿔볼 수 있도록 말이다. 어쩌면 그 떡라면이 바로 신이 내린 궁극의 떡라면일수도 있다. 그정도까지는 아니라도, 적어도 지금의 나 자신에게 가장 맞는 맛있는 물건일 수 있다. 사랑의 실의에 대해서 느껴보고 싶다면  30대 1 구도의 주류 하렘물을 찾을 것이 아니라 애정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은 단편집을 골라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한국이라는 이 현실공간의 정치적 현실에 분개하고 싶다면 <쿠니미츠의 정치> 같은 경파물보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지 않는다> 같은 스릴러가 더 효과적이다. 전문만화를 통해서 전문 지식을 쌓는다고? 그럼 아예 교양 정보만화를 보면 될 것 아닌가. <십자군 이야기>가 <마스터키튼>보다 덜 재미있는 것도 아닌데(적어도 나라는 독자에게는). 한국만화가 볼 것이 없는 게 아니라, 일본 주류 장르만화가 아니면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아예 만화가 아니다 라고 먼저 굳건하게 가정을 세우고 들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안얹어도 된다) 생각해보기를.

별로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다. 재미있는 것이 없다고 단언하고 스스로 재미를 포기해버리지 말고, 재미를 좀 적극적으로 추구해보라는 말이다. 그 과정에, capcold가 글쟁이로서 도와줄테니.

 

— 2005 copyleft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전쟁이라는 지리멸렬한 파멸 – <십자군 이야기2> [기획회의050804]

!@#… 2년이 걸리고, 200페이지를 새로 그리고 나서야 나왔다는 2권. 3권에서는 그 콤비네이션을 따르지 말아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전쟁이라는 지리멸렬한 파멸 – <십자군 이야기2>

성격 안좋고 힘센 나라가, 자신의 잇속을 위해서 마음대로 다른 나라를 침공하고는 그것을 ‘전쟁’이라고 불렀다. 그 다른 나라의 지도자도 하필 상당히 문제많은 인간이었기에, 그 명분은 무려 민주화였다. 여하튼 침략은 전쟁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썼고, 잠시의 화려한 쑈를 거치더니 이내 전쟁은 끝났다. 아니 단지 이번에도 일방적으로 끝났다고 선포를 당했다. 실제로는 전혀 끝나지 않아서, 그 뒤 2년여가 다 지나도록 아직도 세계 도처로 무대를 확장하고,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추악한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민주화 해방’ 되었다는 이라크는 국가 분열과 내전의 위기에 몰렸고, 런던에서 많은 안타까운 죽음을 낸 지하철 폭탄 테러가 일어나고… 모든 것은 이 지리한 과정의 일부에 불과하다. 전쟁을 처음 시작하는 책동가들은 모든 것이 자신들의 승리로 마무리되어 깔끔하게 털고 일어설 것을 항상 계산하지만, 실제로는 길고 긴 늪으로 빠져들어 버린다. 미국의 또다른 현대사에 길이 남을 전쟁 책동 공작이었던 베트남전으로부터 인류가 얻은 교훈 따위는 전혀 없는 듯 하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전쟁이라는 충돌형태의 원인에 대하여 날카롭게 분석해서 독자들을 전율시켰던 한 만화가 있었다. <십자군 이야기>라는 제목의 이 만화는, 중세 십자군의 ‘성전’을 통해서 누군가에 의해서 전쟁이 책동되고,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동원되고, 그 와중에서 누군가가 희생당하고 누군가는 잇속을 챙기는 메커니즘을 해학적으로 풀어놓았다. 그리고 2년여가 흐른 후, 여전히 전쟁이 진짜로 종식될 가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오랫동안 고대했던 속편이 나왔다. <십자군 이야기2>(김태권 / 길찾기)는 전작이 끝난 부분에서 새로운 시작을 한다. 1권이 군중십자군의 우매하고도 비극적인 개전을 통해서 십자군 전쟁의 전체 패턴을 압축적으로 묘사해냈다면, 이제 2권에서는 본격적으로 정규군에 의한 전쟁이 시작된다. 귀족 제후들, 종교지도자들이 정식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동쪽으로 간다. 군중 십자군이라는 무지한 욕심꾼들을 슬기롭게(?) 극복한 동방 로마제국은 이번에는 아예 자신들을 통째로 먹어 삼키려는 진짜 침략자들을 맞이하게 된다. 이슬람은 오합지졸 군중십자군을 퇴치하고는 방심하다가, 예루살렘까지 일시적으로 빼앗기는 패배를 겪는다. 그리고 물론 그 와중에는 정복에 눈이 먼 십자군이 자행하는 비인간적인 학살과 (문자 그대로) 포식에 희생 당하는 불특정 다수의 주민들이 있다.

2권의 핵심 정서를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주인공은 바로 기사 보에몽이다. 그는 강력한 무력과 높은 지도력으로, 전형적인 전쟁 서사극 주인공의 됨됨이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것은, 멋진 영웅담과는 무척 거리가 멀다. 승리의 순간에 이야기를 끝내거나, 비장한 죽음으로 여운을 남기며 나머지 이야기를 바람속에 흐트려놓을 수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전쟁에 쉬운 결말 따위는 없다. 당초 십자군의 명분이었던 예루살렘 탈환을 이루고 난 후에도, 십자군은 끝나지 않는다. 1차 십자군의 강력한 군사적 리더 보에몽이 완전히 몰락해버리고 나서도, 끝나지 않는다. 끝끝내 질리지도 않고 계속 지리멸렬하게 계속 꿈틀대는 전쟁의지 속에서, 당초의 책동가들도 이미 스스로 예상한 이득의 궤적에서 벗어난지 오래다. 앞으로 훨씬 더 많은 횟수의 “제*차 십자군 원정”이 이어질 것을 역사적 지식으로 알고 있는 현대 독자들은 정말이지 질려버릴 노릇이다. 전쟁은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예상치 못한 요소들이 점차 붙어나가면서 결국 헤어나오기 힘든 커다란 수렁이 되어버린다.

전작의 프롤로그가 서방세계의 중세 이전 전쟁사를 다루었다면, <십자군 이야기2>는 우리가 ‘이슬람 세계’라고 부르는 그 중동 공간에 존재했던 이슬람 종교 이전의 문명사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현재까지도 사람들은 종교가 어쩌니 하고 명분을 세워서 싸움을 찾고 있지만, 사도 마호멧 이전의 문명사도 사실 별다를 바가 없다! 원래부터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는 야욕을 엔진으로 하는 전쟁들이 넘실댔으며, 그 속에서 균형과 부조화가 번갈아가며 세상을 지배했다. 1권에서만큼 프롤로그와 본 내용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느낌은 적지만, 십자군에 맞서는 이슬람 진영의 처지를 좀 더 본격적으로 집중할 3,4권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연결다리를 시사하고 있다.

전작 이후로 흘러간 2년여의 시간은, 작가의 표현능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고전적 드라마와 현대적 풍자, 극중 이야기와 작가의 직접 개입을 넘나드는 서술 솜씨는 한층 능란해졌고, 그림 역시 더욱 통일성 있게 다듬어졌다. 각종 해학적 농담은, 더욱 농밀하면서도 전작에서 가끔 보였던 지나친 집착에서 벗어나 양념의 역할로 좀 더 확실히 자기 자리를 찾고 있다. 200여 페이지를 다시 그려야 했다는 작가의 후기가 그간의 과정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줄 뿐이다. 지적인 성향 역시 여전해서, 작품 뒤 빼곡이 차있는 참조도서에까지 해설을 한마디씩 더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물론 아직 좀 더 다듬어졌으면 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예를 들어 정사와 야사, 가설을 만화 자체의 서술 속에서 뚜렷이 구분되게 묘사해 내는 방법론이 더욱 연마되어야 한다.  분명히 극중 십자군이 벌이는 이야기는 것을 전제로 하는 작가의 여러 현실풍자적 해설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군중십자군의 은자 피에르가 1차십자군에서 롱기누스의 창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그 피에르와 동일인물이라는 가설을 실제 극 속에 풀어 넣음으로서, 픽션의 요소들이 녹아들어가버린다. 그리고 모든 것을 직접 현재진행형의 사건이자 사실로서 보여주는 관행에 익숙한 만화라는 매채에서, 그것은 자칫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는 인상, 나아가 전체 내용의 신뢰성을 흐리는 폐단을 낳아서 작품의 큰 주제와 맥락에 누가 된다.

분명히 <십자군 이야기2>는 이 시리즈의 전작을 뛰어넘는 명작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또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십자군 이야기3>이 더욱 뛰어난 모습으로 돌아와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역시, 인류가 조금만 더 현명해져서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과 메시지들이 하나도 신선하고 충격적이지 않은 조화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이상주의적일까.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야채와 과일 사이의 토마토 – <한국 일본 이야기>[으뜸과 버금]

!@#… 여러가지 이유로, 업데이트가 뜸한 상태. –;;;

——————————–

야채와 과일 사이의 토마토 같은 – <한국 일본 이야기>

<한국/일본 이야기>는 한 ‘2.5세대’ 재일교포 유학생의 한국 유학 생활과, 이전의 경험 및 유학 과정을 통해서 정리하게 된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삶의 공간에 대한 생각들을 담아낸 만화다. 원래는 인터넷 개인 홈페이지 ‘구미의 유학만화’(http://www.koomi.net)에서 연재되었던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단행본이다. 물론 연재작의 단행본이라고는 하지만,, 캐릭터의 독창성에 대한 지적을 받은 후 거의 모든 원고를 다시 그려냈으며, 책을 위해서 완전히 새로 만든 에피소드도 다수 있기 때문에 단행본으로 보는 것이 충분히 의미있다. 또한 유학생활의 경험담을 중심으로 하여 작년 히트작 <요코짱의 한국일기>와 비슷한 느낌을 줄 수도 있는 원래 연재와는 달리, 단행본은 유학생활 이야기의 비중을 줄이고 중간자, 또는 경계인으로서 바라보는 한일 차이와 관계에 대한 생각에 크게 집중하고 있다.

2.5세대, 즉 2세대 교포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3세대도 아닌 2.5세대인 작가가 경험하면서 살아온 에피소드들인 셈이다. 그리고 이야기하는 방법은 결코 무겁거나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고, 그림일기를 연상시키는 가벼운 듯한 그림체와 무릎을 치게 만드는 일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전반부를 차지하는 유학 이야기와 생활경험에서는 주로 코믹한 에피소드, 오해와 호기심을 위주로 진행되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한국의 긍정적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고 이해와 화합을 강조하는 교훈적인 내용이 되어가는 흐름으로 가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 수년 전 이 땅의 대다수 편협한 국수주의자들에게 자위행위를 시켜줌으로써 히트를 치고 그 저자를 출세가도로 올려놓았던 출판쓰레기 <일본은 없다> 식의 ‘우리는 잘났다 그 놈들은 변태다’ 식 서술과는 완전히 차원을 달리한다. 일본도 한국도 둘다 애정의 대상이고, 무조건적인 서로 모든 것을 용서해라가 아닌 서로를 이해하는 것의 즐거움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설파하고 있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뚜렷한 메시지를 위해서 진행되어 가는 단행본으로서의 완성도를 위하여 버리고 간 잔재미가 적기 않기 때문이다. 연재 당시 돋보였던 몇몇 에피소드들이 단행본의 일관성을 위해서 빠졌고, 대화형 글과 만화/에세이의 혼합, 각종 소식들이 자유롭게 섞여서 유희적 분위기를 잔뜩 자아냈던 홈페이지의 매력은 만화만 선별하여 빼곡이 담아놓은 단행본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책 말미의 교훈성이 왠지 닭살스럽게 느껴지는 독자들도 상당할 정도로 전반부 ‘유학생활’ 이야기와 그 이후의 교포 이야기 사이의 연결고리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출판 기획에 있어서 아쉬움으로 남는 대목이다.

“교포는 토마토야. 과일 나라에서 자라온 토마토. 오늘날 나는 과일이 아니라고 느꼈다. 과일나라에서 토마토를 먹을때는 소금을 뿌리는데, 생긴 그대로를 인정받고 싶었던 토마토는 야채 나라에 갔어. 조국에 간거지. 하지만 야체 나라는 토마토를 과일 같이 취급할 때가 있었다. 게다가… 설탕을 뿌리는 습관이 있었다.”

작가의 아버지가 해주었다는 이 대사가 바로 작품 전체의 세계관을 명확하게 대변해준다. 이런 즐거운 작품을 통해서 토마토가 과일이자 야채로서, 과일과 야채를 이어주는 다리로서 좋은 역할을 해줄 수 있도록 격려를 보낸다.

[으뜸과 버금 2005. 07.]

====================================================

(*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만화 쿼터제에 대한 회의론, 그리고 대안.

!@#… 만화저널 토론에서 중요한 곁가지로 제기되어버린 만화 쿼터제. capcold는 만화쿼터제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취해왔는데, 그렇다고 해서 쿼터제는 안된다!!!라는 입장이기보다는 만화에서 쿼터제의 적용 현실성이나 효과에 대해서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물론 대형출판사들의 일본만화 과잉수입에 대한 문제제기를 시작한지는 벌써 4년도 넘었고 지금 쿼터제를 이야기하시는 분들의 취지에는 천번만번 동의하지만, 이것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인가 확신이 생기지 않습니다. 아마 이런 제게 확신을 심을 수 있는 논리라면 누구에게나 통할 거라고 믿기 때문에, 한번 제 회의론의 근거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 쿼터제에 대해서, 몇가지 먼저 이해하고 넘어가야할 지점이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다른 매체에서 운용중인 쿼터는 유통에 관한 쿼터지, 제작에 관한 쿼터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애니메이션의 경우 방송 편성 시간에 한국산 애니를 특정 비율 집어넣기지, 제작이나 유통사에게 만화를 어느정도 직접 국내산으로 만들어라, 해외 수입을 이 정도만 해라, 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작사나 유통사에게 쿼터를 거는 것이 아니라, 바로 방송국에 쿼터를 거는 것이죠.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작사나 배급업자에게는 쿼터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쿼터는 어디까지나, 극장주들에게 적용되는 것이죠.

…왜 그럴까요? 실제로, 66년 처음 시작되었던 당시와 70년대에는 영화 쿼터가 배급업자에게 직접 부과되었습니다. 즉 외화 수입추천 1편을 받기 위해서는 일정 편수의 한국영화를 제작해야만 했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는 다들 쉽게 짐작하시다시피, 날림 새마을영화의 범람이었습니다(-_-;). 그래서 결국 쿼터제는 유통의 가장 말단, 극장으로 내려옵니다. 1년 중 일정일 이상을 의무적으로 한국영화를 틀어주기.

쿼터제도는 향유자에게 직접 다가가는 통로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의 또다른 전제는, 그만큼 그 통로가 좁고, 확장이 어려우며, 독점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영화라고 할지라도, 극장에는 쿼터가 있지만 비디오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디오는 극장과는 달리 통로가 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매장 창고 용량이야 물론 한계가 있지만). TV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죠. 텔레비젼 방송국은 제한적으로만 참여할 수 있고, 어디로보나 자원이 지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쿼터제가 의미가 있는 셈이죠.

그런데 만화의 최종 소비 통로는 극장이나 TV방송국의 모델보다는, 비디오의 모델에 더 가깝습니다. 통로가 한정되어있지 않다는 말입니다(그러니까 90년대 중반 이후로 그렇게 엄청난 고무줄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이고). 많은 종수를 찍어서 곤란한 것은 제작의 차원에서 그것을 담당할 인력과 마케팅 능력이 잠식당하고, 독자의 판별력이 떨어지게 되어서인 것이지, 통로 자체가 독점화되어 버리기 때문이 아닙니다. 통로 점유의 측면에서 일본만화를 놓느라고 한국만화를 못 놓는 것이 아니라, 단지 비용의 측면에서 한국만화를 상대적으로 안 만들고 못 띄워주기 때문에 한국만화가 안보이는 겁니다.

자, 이제 문제입니다. 쿼터를 ‘어디에’ 적용해야 할까요? 쿼터를 도입해야 하는 이유는 박인하님이 글에서 지적하셨다시피 일본만화 종수 줄이고 이성적/상식적 시장구조를 회복하자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1) 제작(=출판사)에 쿼터제 도입: 이것은 출판사의 전체 만화 출판 종수 가운데 특정 퍼센트 이상의 한국만화를 제작하도록 법적으로 강제하는 방식입니다. 70년대 영화에서 생긴 쌈마이스러운 일이 그대로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히트작 하나를 수입하기 위하여, 졸속 어거지 함량미달 찌라시 책을 10종, 한 50부 정도씩만 찍어서 대충 묶어버리고 다음주에 파지처리해버리는 것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수가 아닌 발행 부수로 쿼터제를 한다면 그건 말도 안되는 명백한 시장 침해. 이 경우 당연히 한국만화에 대한 이미지 자체가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죠.  우수한 외화와, 허접한 ‘방화’로 인식이 이분화되었던 그 시절 영화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처럼 말입니다.

출판사가 그런 자기 이미지 깎아먹기를 할까, 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연간 1000종을 내는 출판사들은, 자사 작품들을 통한 브랜드 이미지 구축과는 거리가 멀죠. 게다가 한 회사 내에서 출판 라인의 브랜드만 다르게 해서 개별적으로 관리할 수도 있고. 이것은 위반시 과징금제도로 하든, 준수시 지원금으로 하든 마찬가지로 사용할 수 있는 꽁수입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한국 번역판 제작을 하기 이전의 단계에서 쿼터제를 도입하는 것은 어떨까요. 출판 수입추천에 쿼터제를 도입하는 겁니다. 즉 어느 출판사는 전년도 전체 출판 종수의 60% 이상 가는 수의 수입추천을 신청할 수 없다, 라고 못박는 겁니다. 이 경우도 이 꽁수를 여전히 쓸 수 있습니다(사실, 양적인 개념에서는 항상 쓸 수 있습니다). 대형출판사들이 capcold보다 사악한 잔머리를 덜 굴려보리라는 보장은 절대 없습니다.

2) 유통에 쿼터제 도입: 영화나 TV애니 같이 유통에 쿼터제를 도입하는 방식을 궁리해볼 수도 있습니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유통의 최말단인 개별 서점. 하지만 예를 들어서 “매장에 한국 만화 진열 비중이 종수 기준으로 30% 이상이어야 한다”, 라고 강요하기는 정말 애매합니다. 앞서 말했듯, 한정된 통로가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말단보다는 좀 더 위에 있는 총판은 어떨까요. ….(10분 경과)… 옙, 총판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맙시다. 머리아파집니다. 총판 구조는 쉽게 어떻게 뭘 새로운 원칙을 도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미 많은 곳에서 이쪽 이야기는 나왔으니 패스.

그럼 또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총판으로 가기 전의 ‘배급’ 단계. 얼마나 국산을 만들고 얼마나 수입을 하든지간에, 그것을 유통망에 뿌릴 때 쿼터를 걸고 견제하기. 아까 1)에서 한 이야기와 차이가 없어집니다. 아니면, 만화에서 아예 수입과 제작을 같은 출판사에서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있습니다. 즉 수입 및 유통 전용 출판사와 한국만화 제작 전용 출판사의 역할분리. 마치 영화에서 제작사와 배급사가 분리되어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물론 당연하게도 하나의 모기업에서 양측을 모두 소유하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소규모 제작사로부터 가능성 있는 영화를 사들여서 배급하는 바람직한 경우도 많죠. 실제로 유통력을 가진 확고한 메이저와 소규모 제작사들이 나뉘어 있는 미국 만화계의 경우 이런 비슷한 사례가 더러 있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유통사의 단계에서 쿼터를 거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한국 만화산업판이나 개별 출판사들의 영세한 구조상, 이런 식으로 전체 판을 뜯어고쳐버린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상당히 요원한 아이디어입니다. 게다가 산업적 필요성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간다면 모를까(사실, 산업적으로는 이미 필요합니다), 법적으로 강요하기는 참 애매한 문제입니다.

!@#… 즉 제 회의론의 핵심은 이겁니다: 쿼터 제한을 둘 만한 곳이 없습니다. -_-;

!@#…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대안은 무엇이냐? 라고 물어볼 겁니다.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쿼터제도의 효과를 지닐 수 있는, 좀 더 우회적인 방식들을 찾아볼 수 밖에요. 그런 것이 과연 가능한가? 가능합니다. 예를 들자면 주모씨님이 일종의 ‘자발적인 쿼터제’가 유지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연재만화 잡지의 경우, 사실은 일본 만화 수입시 단행본 계약과 연재 계약이 따로 들어가야 하는 계약상의 번잡함과 추가적인 비용부과가 상당부분 작용하리라고 봅니다. 게다가 잡지에서 수익을 못내는 기이한 구조상, 굳이 아주 특A급의 독자동원력이 아니라면 수입 작품들을 연재를 해넣어야할 이유도 별로 없는 셈이고. 산업적 시스템이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하지만 저는 물론 그보다는 훨씬 제도적인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종수에 의거한 ‘쿼터’가 아닙니다. 총체적 경영 투자 자료에 의거한 ‘창작 출판사’와 ‘수입배급사’의 분류고(물론 이 평가는 매해 새로 갱신되어야 합니다), 각각에 합당한 지원책과 규제책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수입위주 출판사로 분류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종수가 아니라 국산 창작에 대한 투자비중 자체를 입체적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각 출판사에 자료를 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판독해내는 문광부/콘진 담당부서의 전문성이 역시 반드시 선결되어야 하는 과제죠. 아니, 애초에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을 연구용역을 통해서 만들어 내는 것도 역시 선결과제입니다.

쿼터로 영업을 제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업은, 지들 맘대로 하면 됩니다. 다만 영업의 결과로 ‘수입 배급사’로 분류되어버린다면, ‘창작 출판사’를 대상으로 하는 각종 제도적 혜택에서는 제외되도록 만드는 겁니다. 당연히 그 분류결과는 일반 대중에게도 전면 공개되어야 하고.

사실, 박인하님이 언급한 각종 제도적 지원에서 특정 출판사를 제외시키는 것 역시 이러한 틀 속에서 좀 더 발전시켜 볼 만한 발상입니다. 다만 시상식 등 작품에 주는 상을 거부할 경우 창작자만 피해를 보게 되니까 그 부분은 명확하게 구분해야죠. 어디까지나 출판사에 대한 자금지원에서만 상대적 불이익을 줘야 합니다. 수입배급사가 창작을 하는 것도 자유입니다. 다만 창작사로서의 혜택을 못받을 뿐. 창작사에는 없고, 수입배급사에게 돌아오는 혜택? 그런 거 없습니다. 왜 필요합니까. -_-;

!@#… 물론 이 정도 제도장치로 인하여 그 출판사들이 난데없이 일본만화 출판을 팍 줄인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사실 그건 수입 원자재 고갈이라는 현상이 자연스럽게 해결해주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여튼, 국산 창작에 대한 지원이 정말로 국산 창작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도록 정비를 해보자는 겁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가장 현실적인, 만화계에 대한 ‘쿼터의 효과를 지닌’ 제도적 제안입니다.

 

PS. ‘아무도 원하지 않게 되어버린’ 대여권에 대한 이야기도 다음에 언젠가 다시한번…;; 엉망진창으로 결단난 후 한참 뒤인 지금 난데없이 불타오르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회적 대안’으로서 좀 더 정리해보겠습니다.

PS2. 이노무 네이버블로그는, 네이버 바깥의 블로그에 트랙백 걸어놓은 건 제대로 엮인글 표시조차 안되는군요. -_-;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 자유/동의없는 수정 불가/영리자유 —

만화를 잡지로 읽는다는 것의 어려움 [만화규장각 0507]

!@#… 만화인에서 진행중인 등-대-등 만화언론 토론에 본격적으로 같이 뛰어들기 전, 약간의 준비운동 격으로 먼저 올리는 글. 사실은 부천 만화규장각 웹진에 기고한 글(당연히 직접 가서 봐야 예쁜 편집이 된 버젼을 볼 수 있음)으로, 만화잡지에 대한 현재 생각들을 정리해본 물건. 핵심은, 만화산업의 논리니 문화와 예술의 의미니 하는 거창한 것들보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무슨 메리트가 있기에 이들을 독자로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만화잡지든 만화언론이든 만화의 세상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온갖 미디어와 비 미디어들이 치열한 경쟁을 펼치는 그냥 세상이 바로 상대다. 그것을 용어 좀 발명하면서 약간 더 길게 말하면 이런 식이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끝까지 읽기(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