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대로 선생이 꿈꾸는 가부장 유토피아[인물과 사상 2005/02]

!@#… <인물과 사상> 올해 2월호에 실린 원고. 조선중앙에 이어서, 당연히 동아. 이후에는 반대쪽 선수들도 다루겠지만. 보통 월간 인물과 사상 -> 미디어오늘 온라인 -> 개인 블로그에도 백업조로 올려놓기 순으로 가고 있음.

!@#… 글 독서의 연출상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접어서’ 올리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지만… 앞으로는 원고지 30매를 넘는 나름대로 장문의 경우는 접어서 보여주기로 결심. 현대인의 문자해독력 퇴행(즉 한두화면 이상 넘어가는 글은 못읽는다는 말. 일부 사람들은 벌써, 3줄로 요약해줘야만 겨우 무슨 뜻인지 알아먹는다)을 넓은 마음으로 포용해주기로 했다는 말이다. -_-; 자, 그럼 밑에 클릭을 하면서 시작. (주: 그림 이름은 모두 해당 개제일. 예: 041218 -> 2004년 12월 18일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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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대로 선생>이 꿈꾸는 갈등 없는 가부장 유토피아

김낙호(만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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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독자는 진화한다 [계간만화 2004 여름]

!@#… 계간만화 2004년 여름호 글. 에에… 까먹고 안올려놨었더라는. 실제 잡지에는 20매짜리 축약버젼으로 올라갔지만. 사실 계간만화의 특집은 항상 헤비한 편이라서, 개별 꼭지들을 집중해서 읽기가 쉽지 않은 편이다…;; 희망적 비전을 듬뿍 넣은 글. 만화독자를 자청하지만 사실은 찌질이에 불과한 일련의 암적 생명체들에 대한 이야기는 언젠가 다른 기회에 다루어보도록 하고… 여기서는 긍정적 독자상만.

!@#… 글 말미에서 언급된 독만상 (http://www.comicreader.org)에서 요새 한참 올해 투표 진행중이다. 가서들 투표하시길. 아 물론 이 글을 그쪽으로 퍼가고 싶다면 흔쾌히 승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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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독자는 진화한다

김낙호 (계간만화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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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만화정책 제언: 정책의 기본을 다지자[계간만화 2005 겨울]

!@#… 계간만화, 이번 겨울호에 기고한 글(의 원 버젼). 지난 한 해 동안 목격한 바보같은 작태들에 대한 나름의 진단과 솔루션을 내뱉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여러 꼭지들이 어우러진 특집 코너 전체를 같이 놓고 볼수록 좋다. 특히 이번 호 특집은 더욱 더 그렇다. 현재 한국만화’판’의 거시적 틀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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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정책의 기본을 다져야한다

김낙호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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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시작하는 풍경에 관하여 [경향신문 만화풍속사 041231]

!@#… 이번회부터는 좀 더 형식을 자유롭게 가려고 시도. 특정 작품 하나 찍고 가는 게 아니라 폭넓게 잡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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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시작하는 풍경에 관하여

  일본 만화, 그 중에도 현대 일본을 배경을 하고 장기연재 중이며 에피소드 방식의 전개를 지니는 작품들을 보면, 이맘때면 소위 ‘연말/정월 이벤트’라는 것이 종종 있다. 주인공들이 모여서 기모노를 입고 신사에 새해소원을 빈다든지, 깃털치기 놀이를 하며 정월 도시락을 먹는다든지 하는 기초설정을 우선 놓고 그 위에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 것은 일종의 장르적 규칙인데, 발렌타인 데이 즈음에 괜히 쵸콜렛 선물을 놓고 남녀주인공들이 고민스러운 연애모드로 돌입하는 것과 함께 명절 이벤트의 양대산맥이다. <유리가면> 같은 고전이든, <아즈망가 대왕> 같은 최근의 4칸 개그 드라마물이든 말이다.

  민족감정이라는 애매모호한 가치를 내걸면서 일본 만화를 애써 마치 한국만화인양 억지로 번안(?)해서 들여오는 것이 당연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 작품들의 경우, 이 신년 이벤트는 항상 애물단지 신세였다. 주요 캐릭터들이 난데없이 기모노를 입고 일본 전통 풍습을 따르기 때문이다.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아예 에피소드를 통째로 빼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내용전개상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엄청난 수정신공, 즉 장면 위에 덧칠을 해서 다른 내용으로 바꾸어버리는 편집기술으로 기모노를 한복으로 개조하는 일도 허다했다. 그 경우 무려 한복을 입고 깃털치기 놀이를 하고, 일본의 끈적 쫄깃한 스타일의 떡을 먹는 엽기적인 문화 퓨전 현상이 발생하기 일쑤였다.

  그렇다면 한번 물어봄직한 질문은, 과연 현재의 한국만화에서는 한국의 설 풍경을 어떻게 소재로 활용하고 있을까 하는 점이다. 유감스럽게도 거의 써먹지 못하고 있다. 이런 것에 대해서 패배주의적인 시각의 소유자는 “일본과 달리 한국은 설 전통이 미미해졌기 때문이다”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일본이라 할지라도 만화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다들 기모노 입고 돌아다니는 일은 그다지 없다. 다만 하나의 장르적 규칙으로 승화를 시킨 것 뿐이다. 한국만화에서 그 소재를 제대로 못다루고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현실, 스스로의 생활을 효과적으로 작품 속에 반영해내는 것에 게을렀기 때문이다.

  가족친지들이 모여서 차례 지내는 풍경, 설 귀향으로 쓸쓸해진 도심에서 호호 불어가며 떡국을 먹는 궁상 같은 훌륭한 이벤트 소재를, 개발도 안해보고 그냥 날려버리면 너무도 아깝다. <우주인>(이향우 작) [주: http://www.uzuin.com 의 ‘우주인’ 연재 또는 단행본으로 1권 14화를 찾아보시길] 의 신년 에피소드 같은 멋진 이벤트로 한국적인 장르 컨벤션들이 무럭무럭 자라나서 새로운 재미를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희망을 품어본다.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경향신문 04.12.31]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금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여기 올라오는 것은 신문편집과정을 거치지 않은 ‘원본’입니다… 별 차이 없지만;;)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이야기의 이야기 – <천일야화> [기획회의041214]

이야기의 이야기 – <천일야화>(전진석/한승희)

‘이야기’라는 것의 매력은 무엇일까?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주인공들이 행동하는 방식들을 간접적으로 바라보는 행위가 우리에게 왜 즐거움을 주는 것일까. 여러 가지 설명이 나올 수 있겠지만, 크게 바라보자면 한 가지는 공감의 재미, 즉 주인공들의 감정과 활동상에 이입을 해서 같이 난관을 극복해 나아가는 듯한 쾌감을 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의외성의 재미, 즉 자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세상과 “나라면 결코 했을 리 없는 선택”을 내리는 주인공을 보면서 자신의 인식의 지평을 넓혀나가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를 얼마나 잘 배합할 수 있는가에 따라서 이야기의 재미가 좌우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모든 것을 다 풀어나가기는 쉽지 않고 욕심이 나기 마련이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수많은 요소들이 들어가 있는 복잡하고 큰 대하 서사극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이야기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수많은 작은 이야기들로 묶여져 있으면서, 그것 자체가 하나의 큰 이야기가 되는 구조로 끌고 간다는 말이다. 작은 이야기들이 각자 자신만의 매력과 기승전결, 이입과 의외성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모든 이야기들이 특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하나의 커다란 묶음으로 뭉쳐진다. 이런 구조 덕분에 세월의 흐름 속에서 독자들의 반응에 따라 새로운 이야기를 추가하거나 삭제하는 것이 쉽고, 각각의 세부적인 디테일 역시 쉽게 수정할 수 있게 된다. 즉 ‘시대와 함께 진화하는 이야기’가 되어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장르의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베스트셀러라면 역시 기독교의 “구약성서”겠지만, 가장 ‘재미있는’ 것을 고르자면 큰 이견 없이 아마도 “천일야화(아라비안 나이츠)”가 꼽힐 것이다. 연소된 그림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지만 결국은 이야기로 승부하는 장르인 만화에서, 이런 매력적인 이야기를 가만히 놔두었을 리가 없다. 때로는 통째로, 때로는 몇몇 작은 이야기들만 뽑아서 만화로 만들어져왔고, 성공도 실패도 있었지만 그 시도만큼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최근 좋은 반응을 얻은 <아라비안 나이트>(신일숙), 인터넷에서 붐을 일으키고 있는 온라인 연재만화 <1001>(양영순), 그리고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천일야화>(전진석/한승희) 등이 좋은 사례다.

<천일야화>는 <라스트 환타지>, <멀린의 신비한 마술학교>등 소년향 만화의 기반 위에서 익숙한 장르적 규칙을 비틀어 내는 것을 특기로 삼고 있는 스토리 작가 전진석의 글과, <연상연하>, <웰컴 투 리오>등 사건 위주의 드라마성이 강한 순정만화 계열 작가인 한승희씨의 그림이 만난 작품이다. 이질적일 수 있는 두 창작자의 성향이지만, 원래 다양한 이질적인 요소들을 하나의 용광로로 녹여내는 이야기인 천일야화의 세계 속에서 이 만남은 의외로 썩 어울린다.

아라비안 나이츠에서 여러 이야기들을 묶어내는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은 잘 알려져있다시피 바로 왕과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다. 사랑에 대한 깊은 불신을 가진 왕이 온 나라의 처녀들을 섭렵하며 다음날 아침 참수하는 횡포 속에서, 대신의 딸 세헤라자드가 들어가서 매일 밤 왕에게 진기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1000일(혹은 1001일)동안 공략, 결국 왕을 제정신으로 돌려놓고 해피엔딩. 첨삭의 자유를 누리는 이야기인 만큼, <천일야화>에서 작가는 아예 세헤라자드를 남자로 설정해버린다. 연인이자 가족인 여동생을 대신해서 끌려가는 것이다(여성향 만화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야오이 코드, 근친애 코드 등의 도입으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아직 좀 더 두고볼 일이다). 그리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역시 침대 머리맡에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감옥 골방에서 유언처럼 읊조리는 이야기가 되어 비극적 처절함의 분위기가 좀 더 부각되고 있다.

첫 번째 날의 이야기로 푸치니의 오페라로도 유명한 투란도테 공주 이야기를 꺼낸 것 역시 꽤 파격적인 발상이다. 초반에는 짧고 교훈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점차 복잡한 인생사와 애정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될 것을 기대하는 일반적인 패턴에서 벗어나, 첫 주자부터 이미 장엄한 이미지의 비극으로 시작해버리는 것이다. 전체 이야기의 흐름은 푸치니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그 선택 자체로 인하여 이미 <천일야화>가 지니는 독특성을 선전포고한 셈이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구체적인 형상의 선은 사건의 전달에 깔끔한 소화력을 주고 있으며, 남성향 장르와 여성향 장르에 익숙한 독자들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중성적인 칸 연출방식 역시 작품의 독서에 큰 도움이 되어준다.

물론 아직 1권만 발간된 상태이기 때문에 섣부른 칭찬도 비판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서 아라비안 나이츠를 모태로 하는 재해석 작품들이 빠지기 쉬운 “잡다한 이야기들의 일관성 없는 모음”이라는 함정을 어떻게 피해갈지, 아직 판단 내리기 힘들다. 원래 아라비안 나이츠의 다양한 이야기는 확실한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의 미덕, 지혜와 현명한 판단의 중요성 등의 교훈을 남겨주는 것이다. 이런 것을 효과적으로 잘 전달하기 위해서 다양한 사건과 진기한 세상 문물들이 소재로서 동원되고 있을 뿐이다. 설정 자체가 “왕에게 사랑과 지혜를 깨우쳐줘서 정상으로 돌려 놓자”라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당연한 말이다. 그런 목표의식이 좀 더 희미했던 이야기인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이라든지 “알라딘과 마술램프” 등은 사실 나중에 서양인들이 끼워넣은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도 비록 <천일야화>에서 첫 이야기로 사용한 것은 아라비안 나이츠의 설화 ‘칼라프 왕자와 중국공주 이야기’ 보다는 그것을 서양식으로 각색한 오페라 ‘투란도트’의 모습에 가까웠지만, 상당히 모험활극스럽게 시작한 이 작품의 전체적 스타일이나 주제면에서 잘 어울리고 있다. 첫 단추는 잘 들어간 셈인데, 이런 페이스를 놓치지 않고 계속 천일어치 동안 지속시키는 것이 관건인 셈이다.

이런저런 수식어나 분석 이전에, <천일야화>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만화 독서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이 바로 만나기에는 약간 부담스러운 부분도 없지는 않지만, 남성향과 여성향 독자들 모두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재미를 고루 갖추고 있다. 독자들의 많은 호응,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대급부로 작품 자체도 계속 좋은 퀄리티를 유지하면서 이후 이야기들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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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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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기의 오락 – 강철의 대지 [기획회의 041130]

밀리터리(군사) 매니아라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젊은 남성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은 탱크, 전투기, 총기, 제복 등 군대 및 전쟁과 관련된 아이템에 지대한 관심과 지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살상용 병기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상황에 대한 애정이라니, 혹시 잔학하고 반사회적인 인간들의 집단이 아닐까? 다행히도, 대부분의 경우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뚜렷한 대결구도와 그 대결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 발달한 각종 기술과 전략들을, 하나의 취향이자 오락으로서 관심 있게 즐기고 있는 것 뿐이다. 마치 평범한 사람들도 전쟁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전략 놀이인 장기나 바둑이 즐거운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들의 관심사를 잘 반영해주는 장르가 바로 ‘밀리터리물’, 즉 군사대결물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교양필독서라고 항상 칭송받는 ‘삼국지’ 역시 큰 의미에서는 밀리터리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보통 밀리터리물이라고 부르는 작품들은 1차 대전 이후의 현대전을 다룬다. 인데, 이 장르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단지 전쟁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각종 전략 대결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병기 아이템의 먹이사슬 관계를 세밀한 디테일로 풀어나가는 방식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인기요소인 다양한 현대적인 병기가 일거에 발달해버린 시기는 바로 1차 대전 이후다. 전황을 일거에 뒤집어 놓을 수 있는 비밀의 신형탱크 등장, 그것에 맞서기 위한 또다른 특급 돌격 장갑차, 장갑차 위주의 전략에서 전황이 불리해지자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새로운 개념의 전투기의 도입… 이렇듯, 병기 아이템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 종종 밀리터리물은 사람보다 병기가 주인공이 되어버리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더욱 더 매니아 위주로 흘러가고, ‘바깥’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이해가 안가는 경지에 도달하기 쉽다.

최근 출간된 <강철의 대지 - 어나더 월드워2>(문효석/길찾기)는 이런 의미에서 밀리터리물의 기본 뼈대를 간직한 채, 아기자기한 대중적 요소들이 결합된 좋은 사례다. 작품의 제목이 시사해주듯 무대는 2차 세계대전인데(원래 밀리터리물의 최고 인기 배경이 바로 2차 대전이다; 인류의 전쟁 역사상 신병기와 그것을 운용하는 전략이 가장 급격하게 발달해 나아갔던 시기 아닌가), 페이지를 펼쳐보면 뭔가 다르다는 것을 곧바로 느낄 수 있다. 우락부락하고 험악한 군인들 대신, 군복을 입은 북실북실한 동물들이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그림체 자체도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컬러로 되어있어서, 딱딱한 놋쇠의 질감보다는 프라모델로 만든 디오라마를 연상시키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각종 탱크와 장갑차들이 난데없이 로봇으로 변신한다든지 하는 자유로운 시대착오가 이루어지고 있다. 나아가, 이들이 벌이는 소동 역시 처절한 살육과 파괴 보다는, 신형 탱크로 경주를 하는 등 어쩐지 ‘생각보다 건전한’ 경연장이 되어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강철의 대지>가 밀리터리물로서 조금이라도 부실하다는 말은 아니다. 미국군, 독일군 등 기본 진영은 현실 그대로 남아있고, 전략 개념에 대한 접근이라든지 병기에 대한 세심한 설정 등은 결코 녹녹하지 않다. 하지만 반대로, 전쟁에 관한 작품이라면 흔히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중후장대한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 역시 곤란하다. 의인화된 동물 주인공들의 이야기라고 해서 웰즈의 <동물농장> 같은 사회풍자극을 상상할 필요는 없다. 또는 전쟁 이야기라고 해서 헤밍웨이의 소설들 같은 드라마틱한 인생역정과도 그다지 큰 관련이 없다. 단지 다양한 상상력으로 가득한 병기 경연과 대결구도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이 장르의 가장 원초적인 목적 – 전략과 병기에 관한 상상력을 통한 오락 – 을 더욱 근본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것을 단점이라고 지적할 수도 없지는 않겠지만, 장점이라면 이것만큼 확실한 장점이 어디 있겠는가.

이렇듯 부담을 잔뜩 덜어내고 보다보면, 이 작품의 재미에 본격적으로 눈뜰 수 있다. 이 작품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사람(그러니까, 동물)들이라기보다는, 변신 탱크 등 다양한 병기들이다. 이런 덩치 큰 주인공들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책의 판형 역시 큼지막하게 나와 주었으며, 긴 서사 모험담이 아닌 짦막한 에피소드 여러 개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치 각종 캐릭터 소개를 따로 하듯이, 맨 뒤에는 병기들에 대한 설정자료가 빼곡하게 들어가 있다. 어떻게 이 탱크가 로봇으로 변신하고, 목적은 무엇이며, 언제 개발되어 활용되었는지 등등, 무한한 애정으로 뒤덮여있다. 그것은 어린 시절 수많은 소년들이 태권브이와 마징가의 대결을 꿈꾸었듯이, 그 과정에서 “사실은 팔꿈치 뒤에서 미사일이 나간단 말이야”라고 주장을 하고 그 억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팔 속에 미사일이 장착되어 발사되는 과정을 그림으로 친구에게 설명해주는 그런 즐거움과 같다.

<강철의 대지>는 밀리터리물이 뭐가 그리 재미있다는 것인지 호기심이 들었지만, 딱딱한 군대의 이미지가 주는 거부감이라든지 지나치게 매니악한 세부설정을 강요받는다는 느낌 때문에 접근이 힘들었던 사람들이 입문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작품이다. 상상력으로 점철된 병기 대결구도가 주는 신기함과 시각적 쾌감은 그 자체로서 이미 훌륭한 오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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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추신: 여담이지만, “진정한 병기 매니아는 전쟁을 반대한다!”라는 격언이 있다. 왜냐고? 전쟁이 일어나면 그 사랑스러운 병기들이 모두 부서지니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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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온라인, 커뮤니티 – <러브콘서툰> [경향신문 만화풍속사]

!@#… 그간 쌓인 원고 창고대방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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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온라인, 커뮤니티 – <러브콘서툰>

200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뉴미디어’라는 단어만큼 진부한 것이 또 있을까. ‘뉴’미디어의 대표주자로 꼽히며 한껏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인터넷 (및 그 이전부터 있었던 컴퓨터 통신 일반)과 그것이 만들어낸 의사소통 시스템의 세계인 온라인은 이미 단순한 기술적 용어가 아닌, 하나의 삶의 방식이다. 쌍방향성에 기반한 참여니 원본과 카피의 경계 상실이니 하는 이야기들은 이미 매체 이론가의 영역이 아니라 역사학자의 담당구역으로 넘어와 버렸다. 특히 그 중에서도 일반 사용자들과 가깝게 살을 맞대고 있는 대중문화라는 분야에서, 온라인이라는 환경은 적극적으로 새로운 향유 양식들을 진화시키고 있다.

온라인 대중문화의 성격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바로 커뮤니티성이다. 온라인 세상의 향유자들은, 온라인을 돌아다니다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면 자신들이 소속감을 느끼는 공동체에 열심히 퍼나른다. 메일로 보내고, 동호회 게시판에 올리고, 블로그에 올린다. 그리고 올라온 것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사람들이 각자의 감상을 올리거나, 아니면 올린 사람에 대한 창찬/비난을 하면서 더욱 커뮤니티의 내적 소통이 강화된다. 창작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작가들의 온라인 동호회 결성을 통한 정보 및 노하우 교환, 공동 프로젝트 진행 등이 프로와 아마투어의 경계선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온라인이라는 공간과 여러모로 상성이 상당히 좋은 매체인 만화에 있어서 이러한 경향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2003년에 시작된 ‘러브콘서툰’(http://www.lovetoon.co.kr)라는 자선 콘서트 프로젝트가 좋은 사례인데, 온라인에서 만화연재를 하거나, 그리고 비록 스포츠 신문 등 종이지면에서 연재를 하고 있지만 (언론사 홈페이지를 거치면서) 사실상 온라인에서 더욱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작가들이 주축을 이루며 시작했다. 러브콘서툰은 사실 원래는  젊은 작가 몇 명이 한바탕 유쾌한 음악 공연을 펼치면서 불우이웃 돕기 같은 좋은 일을 해보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그런데, 온라인 입소문 등에 힘입어 독자와 작가 양쪽으로 모두 높은 호응을 얻어, 행사 직전에는 참여 멤버가 배 이상으로 불어났다. 그리고 행사가 성황리에 끝난 후에도 커뮤니티의 결속력은 계속 유지되어, 어느 틈에 젊은 만화가들의 대표적인 커뮤니티 가운데 하나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올해 11월 21일, 이 커뮤니티가 준비한 두 번째 행사인 <2004 러브콘서툰>이 펼쳐질 예정인데, 이 행사를 홍보하기 위한 릴레이 만화와 홍보 플래시 애니메이션이 열심히 온라인에서 ‘펌’ 당하고 있다. 이미 사전홍보 단계부터, “만화라는 것의 매력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던 작년 행사보다 한층 발전한 모습이다.

대중문화는 창작이든 향유든, 결국 취향으로 의기투합하여 같이 즐기는 자의 몫이다. 온라인이라는 환경을 만나면서, 그것이 좀 더 명확해진 셈이다.

 

[경향신문 04.11.19]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금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여기 올라오는 것은 신문편집과정을 거치지 않은 ‘원본’입니다… 별 차이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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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만화, 펌질 열풍! [한겨레21/534호/041111]

!@#… 이번주 한겨레21 기고글. 다행히도 3면이나 할애해줘서 하고 싶은 말을  어느 정도까지는 할 수 있었음.  하지만 독자층을 고려해서, 마지막에 작품 소개 파트는 무척이나 일반적인 것 위주로 소개. 개인적 기호가 듬뿍 담긴 매니악한 아이템을 소개하고 싶은 욕구는…그냥 참았다. 블로그에는 투고글 그대로고, 게재 버젼은 여기에 (아마 로그인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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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인터넷에 자리잡다
 – 만화는 어떻게 온라인에서 새로운 성공을 거두고 있는가

  대중문화의 각 장르 가운데, 온라인이라는 환경의 수혜를 제대로 누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온라인 영화관의 붐은 일어나기도 전에 져버렸고,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는 분쟁의 와중에서 지지부진한 고착상태에 빠졌다. 온라인에서는 “자본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독립 아티스트들이 향유자들과 직접 만날 수 있는 자유로운 발표의 장이 펼쳐진다”는 옛 희망들은 이제는 좀처럼 설득력이 없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의 움직임을 볼 때, 아직도 예의주시할 만한 분야로 꼽히고 있는 것은 바로 ‘만화’다.

  그도 그럴 것이, 출판계 전반의 불황, 특히 애초부터 제작 유통망이 부실했던 만화 분야에 대해서 들려오는 여러 암울한 전망들은 온라인 세계에서 만큼은 전혀 공감이 가지 않는다. 수많은 커뮤니티와 개인 홈페이지에서 너도나도 유명 만화를 돌려보고 있으며, 대형 포털 사이트들은 만화 연재 지면을 지속적으로 늘려나가고 있다.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 연재된 강도영의 <순정만화>가 매회 연재가 갱신될 때마다 1일 200만회라는 기록적인 조회수를 올렸다는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온라인 만화는, 고작 수천부의 판매고를 올려도 안도의 한숨을 쉬는 현 출판만화 업계의 현실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호황 국면을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온라인 만화의 인기는 단지 온라인에 머물지 않고 만화계 전체로 영향력이 확장되고 있다. 이미 작년에, 인터넷 연재 만화인 <마린블루스>이 독자만화 대상과 대한민국 만화대상을 동시에 석권한 바 있다. 또는 고우영의 <삼국지> 무삭제 복간본이나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처럼 온라인 연재를 통한 인기몰이를 바탕으로 단행본을 출판하여 히트하는 경우도 이제 전혀 낮설지 않다. 더욱 주목할 만한 현상은, 온라인이 전통적인 종이만화까지도 흡수해 나아가는 경향이다. 현재 가장 널리 ‘펌’(또는 ‘펌질’. 특정 사이트의 그림이나 글을 다른 홈페이지로 ‘퍼 나르는’ 행위를 일컫는 은어) 당하는 작품인 <츄리닝>이나 <트라우마> 등은 원래 스포츠 신문의 일간 연재물이지만 온라인 상에서 더 큰 독자층을 누리고 있다.

만화, 온라인에서 인기몰이를 하다

  만화가 온라인이라는 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한 시도는 비교적 일찍부터 있었다. PC통신의 온라인 만화방 서비스를 필두로, 인터넷 보편화가 막 이루어지고 있던 99년에 이미 ‘이코믹스’, ‘N4′, ’코믹스투데이‘ 등 대형 만화 포털 사이트가 독자몰이에 나섰다. 하지만 만화방이라는 표어대로 해당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하고 유료결제를 하면 기존 종이만화의 스캔본을 볼 수 있도록 서비스하는 방식에 그쳤고, 그 결과 일부 성인 에로 만화를 제외하고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인쇄를 전제로 하는 장편 만화 작품들을 모니터 화면으로 온전히 즐기기에는 해상도 문제, 독서 자세의 불편함 등 기술적 난맥상이 있었던 것이다. 컴퓨터로 만화를 본다는 특성을 살리기 위해서 소리를 넣거나, 작은 움직임을 부여하는 식의 시도도 일부 있었지만, 만화 독서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간주될 뿐이었다.

  온라인 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하고 키워준 것은 바로 독자 자신들이었다. 인터넷 메일과 게시판을 통한 소통이 생활화되면서 서로 온라인에서 발견한 재미있는 만화 작품을 1-2개짜리 첨부 파일로 올려주는 새로운 유행이 생겨난 것이었다. ‘N4’에서 연재되었던 플래시 애니메이션 작품인 <마시마로 숲 이야기>가 언젠가부터 ’엽기토끼‘라는 별명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며, 신문사의 온라인 사이트에 올라오는 카툰 연재물 역시 각광받았다. 이러한 트렌드 속에서, <스노우캣>을 필두로 하는 인터넷 상의 일기체 만화들이 특히 주목을 모았다.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에 짦막한 이야기를 며칠 간격으로 올리는 방식을 통해서, 비슷한 취향을 공유하는 독자층에게 거의 중독적인 흡입력을 행사한 것이다. 그리고 이내 수많은 아마추어 만화 작가들이 유사한 작업을 시도했고, 하나의 장르를 이루게 되었다.

  이렇듯 ‘펌’과 취향 공유에 기반을 둔 자발적인 확산에 의해서 온라인 만화는 삽시간에 거대한 독자층을 확보해 나아갔다. 그리고 사람들이 온라인에 접속해 있는 시간이나 돌아다니는 폭이 점차 늘어남에 따라서, 온라인 만화 역시 한층 깊숙하게 독자들의 일상 속에 자리 잡았다.

온라인 환경에 적응하다

  온라인이라는 환경은, 그것에 잘 어울리는 특정한 양식의 만화들을 선호하도록 만들었다. 우선, 펌질을 중심으로 확산되다 보니 수십 수백 페이지로 이루어진 장편 보다는 짧은 호흡으로 끊어지는 만화들이 쉽게 주류로 부상했다. 또한 단행본으로 출간된 만화의 스캔본 보다는, 개인이나 포탈, 언론사 사이트 등을 통해서 온라인 연재 중인 작품들이 선호된다.

  마찬가지로, 온라인 만화 작품들 역시 온라인에서 효과적으로 감상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종이의 페이지 넘김에 해당되는, 스크롤이라는 화면 이동 기능이 온라인 만화에서 중요한 표현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대형 포털 사이트에서 인기리에 연재중인 양영순의 <1001>의 한 화에서는 주인공들이 물 속에서 재회하는 모습을 긴 세로 칸 한 개로 그려냈는데, 이것을 위아래 크기의 제한이 있는 컴퓨터 화면 창 속에서 스크롤해서 내리면 자연스럽게 바다 속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느낌과 함께 장면이 전환되는 효과가 만들어지도록 연출했다. 물론 이것은 기존의 종이만화에서는 구현할 수 없었을 연출방식이지만, 온라인으로 만화를 읽는 독자들에게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소위 ‘무한 캔버스’라고 불리우는 이러한 창틀 효과 이외에도 하이퍼링크 기능이라든지, 선택형 스토리, 다방향 만화 등 다양한 온라인 특유의 표현방식들이 이미 독자들에게 자연스러운 독서방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온라인 만화에서 가장 특기할만한 현상은, 전자게시판의 활성화 덕분에 독자와 작가 사이에 다양한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편집부를 거쳐야 했던 독자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전혀 걸러지지 않고 매 연재분량마다 덧글로 달리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즉 독자의 취향에 한층 민감해 질 수 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독자-작가 간 뿐 아니라, 작가들 사이에서도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있다. 온라인을 주요 활동무대로 삼고 있는 젊은 작가들이 주축이 되어 하는 연례 자선 콘서트 ‘러브콘서툰’ (http://www.lovetoon.co.kr)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올해 초에 여러 온라인 작가들이 서로 돌아가며 한 화씩 그려나간 <탄핵반대 릴레이 만화> 역시 이러한 커뮤니티적인 결집력의 결과물이었다. 물론 이외에도 수많은 만화 창작 동호회, 취향 공유 만화 동호회들이 온라인 상에 수도 없이 많이 활동중이다.

온라인 만화의 향후 전망

  하지만 온라인 만화의 앞날이 현재의 액면 인기만큼 밝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수익성이다. 대부분의 온라인 콘텐츠가 무료 공개 서비스 위주로 배치되어 있는 국내의 실정에 비추어 볼 때, 수십 수백만 번의 열람이나 펌질은 수익증대를 보장해주지 못한다. 온라인 만화 작품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수익은 현재는 포탈 사이트나 언론사에 연재할 경우 받을 수 있는 원고료, 그리고 만약 종이책으로 출판했을 경우 얻는 인세가 전부다. 유명세에 비해서 실익이 적은 셈인데, 대중문화라는 영역에서 이 점은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한다. 대중문화는 재능 있는 인재의 신규 진입이나 활동 중인 창작인력의 유지, 다양한 장르의 실험과 발전에 대한 동기부여 등 다양한 측면에서, 산업적 성공과 문화적 활력이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 만화의 인기를 직접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익모델을 고안해내지 못할 경우, 온라인 만화의 대중적 인기는 물론 질적인 발전 역시 결국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

  또 다른 문제는 일상화된 조급증이다. 일일 또는 격일 단위로 신작 연재분량이 나오는 짧은 호흡의 일기 만화나 일간지 사이트 연재물에 익숙해진 온라인 만화 독자들에게, 종이로 된 기존의 월간 잡지 마냥 다음 화를 위해서는 다음 달까지 기다리라고 부탁하는 것은 이미 무리가 되어버렸다. 창작의 측면에서는 장기적인 사전 준비라든지 연재 진행 과정 중에 성찰이 필요한 작품을 시도하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의미이며, 특히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은 개인 홈페이지 연재물인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 결과 다양한 작품이 만들어지지 못해서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다시금 독자들 자신이다. 이미 현재 <1001> 같은 극히 소수의 작품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온라인 만화들이 짦막한 에피소드 방식의 개그물로 수렴되고 있는 불길한 징조가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라인 만화의 향후전망을 종합해보자면 적어도 한동안은 계속 양적, 질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설득력 있다. 사람들은 앞으로도 더욱 더 많이 온라인의 세계를 떠돌아다닐 것이고, 그림들과 글들이 효율적으로 결합한 표현 방식인 만화는 그곳에서 무척 효과적인 장르다. 게다가 출판시장의 장기적인 불황 덕분에, 작가와 기획자들은 온라인에서라도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종이만화를 완전히 대체해 줄 것이라든지, 온라인에 한국만화계의 미래가 달려있다든지 하는 근거 없는 과도한 희망을 걸지만 않는다면, 온라인 만화는 앞으로도 충분히 기대해볼만한 영역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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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특기할 만한 국내 온라인 만화 5선

– 1001 (양영순) : ‘아라비안 나이트’의 독창적인 재해석. 장편의 호흡으로 연재중.
http://news.paran.com/scartoon
– 순정만화 (강도영/완결) : 이야기성과 온라인 만화로서의 연출력이 돋보이는 연애드라마.
 http://cartoon.media.daum.net
– 츄리닝 (이상신, 국중록) : 온라인 상에서 더 지명도가 높은 스포츠 신문 연재 개그만화.
http://cartoon.stoo.com
– 스노우캣 (권윤주) : ‘귀차니즘’, ‘혼자놀기’ 등 일련의 트렌드를 촉발한 작품.
http://www.snowcat.co.kr
– 마린블루스 (정철연) : 작가 자신의 일상생활을 바탕으로 한 의인화-해물-개그만화.
http://www.marineblue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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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만화의 오늘 – <츄리닝> [기획회의041019]

빌딩과 ‘삘띵’의 차이는 뭘까? ‘빌딩’이라고 하면 63빌딩이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떠올리지만, ‘삘띵’이라고 발음하면 동네 골목길 어귀에 서있는 4층짜리 상가 건물을 떠올리게 된다. 미묘한 뉘앙스에서 오는 커다란 이미지의 차이. 그런 비슷한 경우가 바로 ‘츄리닝’이다. 우리가 트레이닝복이 아니라 ‘츄리닝’이라고 할 때, 그 어감이 주는 임팩트는 남다르다. 굳이 운동을 하기 위해서 입는다기보다는 단지 헐렁하게 대충 걸치고 무언가 시시껄렁한 짓거리를 하면서 돌아다니기 위한 복장. 잔뜩 폼 잡고 조깅이라도 할 듯 나왔다가,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나 한모금 빨고 다시 들어가서 TV나 보는 패턴이 어울리는 복장이다.

<츄리닝>(이상신, 국중록 저 / 애니북스)은 스포츠신문 연재만화 가운데 하나를 단행본화한 것이다. 애초에 주 2회 연재의 마이너한 코너에 불과했던 시리즈로 시작했다가, 금새 주 6회씩 연재되는 정규 꼭지로 격상되었다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최근 1년여 동안 가장 좋은 반응을 얻어내고 있는 연재물 중 하나다. 실제로 신문 판매량 증가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수많은 개인 블로그와 게시판으로 ‘펌질’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 인기를 여실히 실감할 수 있다. 제목 그대로, 여러 가지 다양한 상황 속에서 결국 헐렁하게 사는 방식이나 시시한 (하지만 꽤 욕망에 충실한) 결말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짧막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흔히 연재물이라고 할 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를 주욱 연결해서 이야기해주거나, 에피소드 방식을 취할 경우라고 하더라도  하나의 캐릭터가 겪어나가는 하나의 세계의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트라우마>, <애욕전선 이상없다>등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연재물과는 다소 다른 특징을 지닌 작품들이 주류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이 연재물들은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나 캐릭터를 담아내기 보다는, 서로 전혀 연관성이 없는 에피소드들이 매일 새롭게 펼쳐질 뿐이다. 이 시리즈를 하나의 작품으로 묶어주는 것은 캐릭터나 커다란 이야기가 아니라, 작품의 브랜드다. 하지만 단편 모음집과도 다른 것이, 일간이나 최소한 주 1,2회 이상이라는 빠른 연재 페이스 속에서 분명히 이것이 연속된 연재물임을 느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츄리닝>은 바로 이 분야에서 성공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작품이다.

이러한 방식이 개그라는 장르에 효과적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정해진 캐릭터와 상황으로 이야기를 끌고나가면서 개그를 발휘하는 것은 물론 장점도 많지만, 한계가 명확하다. 우스운 이야기를 나눌 때, “…너네들, *** 알지? 아 그 사람이 말이야 지난번에…” 라고 하는 것과, “…참새 두 마리가 전신주 위에 앉았는데 말이야…” 라고 시작하는 이야기는 자유도의 폭이 다르다. 웃겨야 한다는 지상목표를 위해서는 어떤 자유롭고 황당한 설정이라도 새로 만들고, 또한 생명력이 다하면 그대로 버리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 중 많이 웃겼던 설정은 나중에 한번쯤 더 써먹으면 그만이다. 독자 입장에서도, 세계관이 이 에피소드 다음에도 계속 지속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그 한 회를 보고 가볍게 웃고 나면 끝이다.

<츄리닝>은 이러한 전략에 무척 충실한 만화다. 모든 개그는 그 한 회 한 회로 자기 설정을 만들어내며, 네 페이지 안에 확실한 결말을 본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이어나간다기보다는, 매번 새로운 코너에 도전하는 개그맨들과도 같다. 같은 얼굴, 같은 성격의 소유자들이지만 사실 전혀 다른 이야기, 다른 캐릭터를 소화하고 있다는 약속을 독자들과 이미 공유하고 있다. 물론 연재물 안에서도 연속성을 지니고 반복해서 등장하는 ‘탱구네 가족’ 등의 캐릭터들이 있지만, 그것은 마치 고전적인 우스개인 ‘참새 시리즈’에서 전신주의 참새들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덕분에, 어느 한 화를 떼어놓고 따로 읽어도 아무런 부담이 되지 않는 자기완결적인 호흡이 만들어진다. 쉽게 입문하고, 크게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어, 장편연재의 호흡을 지니는 작품인 <식객>의 하루 연재분량(6페이지)을 자기 블로그에 올려놓고 사람들보고 즐기라고 해봤자 무슨 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 하지만 <츄리닝>은 된다.

그 결과, <츄리닝>의 핵심은 개별적인 에피소드를 만들어내는 작가들의 능력이다. 비록 통일된 큰 이야기의 흐름이 없더라도 그림이나 개그 센스가(효과적인 분업의 힘이다) 시리즈로서의 구심력이 되어준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그만큼 위태로운 측면도 있다. 순간적인 임팩트의 강도를 위해서, 장기적인 이미지 구축을 상대적으로 게을리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분야의 선배격인 <누들누드>의 사례처럼, 나중에도 길이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식 연재 만화는 단지 순간순간의 빛나는 아이디어만으로 차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일관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 만약 <츄리닝>이라는 작품을 순간의 즐거움 이상의 의미로 만들고 싶다면, 우수한 개그 이상으로 좀 더 명확한 자기 색깔을 만들 필요가 있다. 만약 작가들이 지금의 빛나는 개그 재능이 소진되고 나면, 사람들은 <츄리닝>을 무엇으로 기억하게 될 것인가, 라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츄리닝>의 개그보따리는 도저히 마를 줄을 모르고 있다. 더군다나 이번에 출시된 단행본은 순서대로 작품들을 모은 것이 아닌, 베스트 에피소드 선집이다. 큰 흐름보다는 각각의 화에서 보이는 순간의 기지가 핵심적인 이 작품에 어울리는 방식이다. 한마디로, 누가 보더라도 충분히 유쾌할 것이다. 그 성과를 조금이라도 폄하할 이유는 없다. 현재 <트라우마>, <애욕전선 이상없다> 등 이 계열의 인기작들 역시 같은 출판사에서 계속 출간 진행중인데, 이들 역시 성공을 거두기를 기원한다. 누구나 자신의 서가에, 언제라도 한번씩 중간에 펼쳐들고 피식 웃을 수 있는 생활 속의 웃음창고를 보관해두는 습관이야말로 진정한 웰빙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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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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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질서에 관하여 – <니나잘해> [경향신문 만화풍속사]

각각의 개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마찰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 갈등을 해결해야만 하는데, 모든 것이 원만한 합의로 이루어지면 참 좋겠지만 많은 경우 강제적으로 선택을 내려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런 선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공인받은 강제적인 권위와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누가 어떻게 누구를 감시하고 심판할 것인가에 대한 질서가 필요하고, 그러한 권력의 양을 비교할 수 있는 방법이 요구된다. 서열, 계급, 직급, 사회원로, 뭐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다. 

국산 학원폭력물 가운데 가장 오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는 작품을 꼽으라면 역시 <니나잘해>다. 무엇보다, 재미있다! 줄거리를 살펴보면, 명문 학생 주먹조직 스콜피온, 그 리더인 이후, 그리고 차기 리더 후보 3인방의 수련과정이 전체 스토리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사실 이런 내용은 장르의 법칙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학교의 주먹 조직이 있고, 그 조직 내부에서 또는 다른 학교 조직들과의 마찰 속에서 완력이 탁월한 주인공들이 싸움을 통해서 자기 위치를 굳혀나아가는 이야기. 그 와중에는 우정도 있고, 배신도 있고, 연애담도 있고, 개그도 있다. 하지만 핵심적으로는 조직적 서열 관계 속에서 실력을 증명하고 점차 위로 올라가는 이야기로서, 성인만화의 가장 인기있는 장르인 조직폭력물(넓게 보자면, 무협만화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범주에 속한다)을 청소년용으로 변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바로 이들의 조직이 아예 학교의 평화와 안녕을 다스리는, 일종의 공인된 조직이라는 것이다. 완력이라는 단순명쾌한 비교척도와 선후배라는 서열개념이 결합되어, 완연한 힘에 의한 질서를 구축한 이상적인 조직형태. 심지어 문제아 집단이 아닌 치안유지자로 받들어지기까지 한다.

오한이 든다. 아무리 포장해도 결국 폭력은 나쁜 것이니까? 아니다. 이유는 좀 더 단순한 곳에 있다. 바로, 누구나 그러한 방식의 ‘질서’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이지도 않고 모두에게 득이 되는 것도 아닌, 단지 질서를 위한 질서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하나의 당연한 미덕으로 떠받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즐겁게 만화를 읽다가도 난데없이 머리 속에는, 관습헌법 같은 궁색하기 짝이 없는 논리를 가져다 붙이면서 자신들이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질서’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괴인들과, 여기에 아무 생각 없이 환호하는 수많은 박테리아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을 억누를 길이 없다. 이왕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즐기고 싶어서 뽑아든 장르오락물인데… 현실도피에 또다시 실패했다.

/김낙호·만화연구가·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경향신문 / 2004. 11. 5일자]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금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여기 올라오는 것은 신문편집과정을 거치지 않은 ‘원본’입니다… 별 차이 없지만;;)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허 —

<순정만화>(강풀) 또 대박치다.

!@#… 박수. 간만에 이 동네에 좋은 소식이 나왔군…

“순정만화”, 일본에 최고가 수출

YTN 2004-11-09 17:04]

[이경아 기자]

온라인으로 연재돼 큰 인기를 모은 만화 ‘순정만화’가 사상 최고가에 일본에 수출됐습니다.

이 만화는 우리나라 단행본 만화로는 가장 높은 금액인 천 만엔에 일본 후타바샤 출판사와 출간계약을 체결해 내년 단행본과 잡지로 일본 독자들에게 선보이게 됩니다.

여고생과 30대 직장인의 순수한 사랑을 담은 이 만화는 일본 뿐 아니라 중국과 태국 등 아시아 출판사들과도 계약을 체결했으며 국내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질 예정입니다.

[저작권자(c) YTN & Digital YTN.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한국만화 무엇이 OSMU 성공을 끌어들이는가 [계간만화 04/가을]

!@#… 계간만화 04년 가을호 원고. OSMU라는 ‘누구나 다 이야기하기에 오히려 뻘쭘해지기 쉽상인’ 주제를 과감하게 정면돌파..; 언제나처럼, 여기 올리는 건 ‘오리지널 버젼’. 실제 버젼, 그리고 무엇보다 이 글이 속해있는 특집기획 전체를 제대로 읽으려면 <계간만화> 가을호를 구해보시길 (http://www.qcomic.com). 아니, 꼭 구해 볼만한 가치가 충분함.

!@#… 어차피 항상 나오는 이야기인 ‘만화에는 OSMU가 중요하다 / OSMU에는 만화가 중요하다’ 같은 이야기나 ‘만화는 원작산업이니까 이제 라이센싱 개념을 제대로 잡자’ 식의 이야기는 다른 분들이 이미 오랫동안 열심히 하고 계시기 때문에, capcold 성격상 남들이 안하고 지나간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봤다. 뭐냐하면, “그럼 만화가 좋은 원작이 되려면 구체적으로 뭘 갖추어야 하는가?” 라는 것. 만화를 만드는 입장에서도, 혹은 좋은 만화를 고르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다른 분야의 입장에서도 먼저 짚고 넘어가야할 지점 아닐까, 라고 생각한 것이다. 뭐 그래서 이런 글이 되었다. …꽤 길다… -_-;

!@#… 그러고보니 요새 기억력이… 지난 여름호에 쓴 ‘독자의 진화’ 글도 여기 안올렸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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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라는 소스, 그 맛의 비결을 찾아서

 – 한국만화의 무엇이 OSMU를 성공으로 끌어들이는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자. 원소스멀티유즈(줄여서 OSMU)를 하는 이유는 뭘까? 대답은 한 글자면 충분하다. “”. 이런 단순명료한 전제만으로도 OSMU가 추구해야할 핵심적인 방향성은 확실해진다. OSMU는 문화의 논리가 아닌, 산업의 논리다. 문화의 논리를 조금이라도 고려하는 것은, 재료로 다루는 문화상품의 품질을 관리할 때 뿐이다. “모두를 감동시키는 훌륭한 작품이 나와주면 저절로 모든 분야로 뻗어나가면서 대박이 터질꺼야”라는 순진발랄한 문화 논리와 산업적 성공은 대략 900광년쯤 떨어져 있다. 이것은 그다지 분노할만한 일도 아니고, 거부감을 가질 일도 아니다. 애초에 OSMU는 그런 개념이니까.

  한국의 만화에 있어서, OSMU는 좀 더 복잡미묘한 상대이기는 하다. 만화는 단지 산업적 이해 이상으로, 문화적 위상 자체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지난 10여년 동안 이 개념에 매달려 왔으니까. 물론 이러한 개념혼동은 많은 시행착오와 멍청한 발상들(‘정부가 주도하는 중견 작가 인큐베이팅’이라든지)을 탄생시켰지만, 지금에 와서는 적어도 대중문화 산업 일반이 만화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도록 하는 경지까지는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하지만 과연 만화가 OSMU 거래의 현장에서 내밀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밀 준비는 되어 있는걸까? 점검의 시간이다.

[] 비주얼과 이야기

  만화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역시 그림이다. 카툰화법으로 그려진 그림 한 장만 봐도 앗 만화다!라고 할 정도로 익숙하며, 쉽게 받아들여진다. 캐릭터 라이센싱/프랜차이즈 사업에게 ‘캐릭터 산업’이라는 (오해의 여지가 많은) 호칭을 붙여주고 한창 거품을 키워낸 것도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이쪽 분야 대다수 상품들이 명백히 만화라는 장르에서 발달시켜온 시각적 기법들(그림체, 표정, 상황 묘사 등)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만화가 비주얼이라는 측면으로 큰 매력을 행사한다는 인식은 꽤 그럴 듯 하다.  만화의 비주얼 속성으로 승부한 아기공룡 둘리 프랜차이즈의 성공이라든지, 박희정, 권신아 등 화려한 비주얼을 뽐내는 만화 계열 일러스트레이션의 인기가 좋은 사례다.

  하지만 비주얼 그 자체만으로 행사할 수 있는 힘은 무척이나 제한적이다. 94년, 이현세/야설록의 만화 <아마게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개봉되었다. 당시 제작사측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내세운 부분이 비주얼의 완성도였는데, “이현세 그림이 움직인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강조했다. 즉 이전의 TV물에서 망가졌던 그림체가 아니라 이현세 만화 특유의 비주얼을 제대로 구현했다는 자랑이며, 당시 이현세 만화의 비주얼이 가지고 있던 대중적 인기를 노린 발언이었다. 물론 애니메이터들의 노고에는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문제는 관객들은 그런 부분은 그다지 신경을 안썼고, 결국 흥행참패를 했다는 것이었다. 비록 원작만화의 그림체를 형편없이 뭉개버리고도 <달려라 하니>, <머털도사>등의 애니메이션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애니메이션 같은 미디어 상품 분야에서는 이야기의 재미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재미있는 이야기와 결합한 훌륭한 비주얼은 더욱 재미를 배가시켜 주지만, 이미 재앙급으로 망가진 이야기를 구원해줄 힘 따위는 애초에 없다.

  비주얼의 매력만으로 승부할 수 있는 분야는 팬시 상품 프랜차이즈의 일부 분야일 뿐, 현대 OSMU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는 미디어 문화상품의 핵심적인 매력포인트는 ‘이야기’다. 이야기가 재미있고, 그것에 어울리는 비주얼이라면 심지어 초등학생 낙서 같은 작대기 인간(‘졸라맨’)이라도 대형 스타 캐릭터가 되는 것이 오늘날의 풍경 아닌가. 만화는 애초부터 이야기 매체다. 비주얼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서술하기 위하여 비주얼을 도입한다. 게다가, ‘한국만화는 비주얼이 너무 구려서 못써먹겠어’라고 푸념할 정도로 그래픽 기술력이 떨어지는 시대도 아니지 않는가. 설령 정말로 구리다면, 더 유능한 그래픽 디자이너 인력들을 동원해서 다시 디자인하면 된다. 한마디로, OSMU 프로젝트 속에 있는 만화의 입장에서라면, 비주얼은 (비록 욕심은 날지언정) 굳이 끝까지 책임져야할 분야가 아니라는 말이다. OSMU라는 네트워크에서 구석구석 만화의 힘을 발휘하고 싶다면 명백하게 신경써야할 우선순위는 이야기다.

[] 이야기성: 줄거리인가 캐릭터인가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가 연달아서 히트를 쳤다든지, 만화 원작의 영화가 무더기로 제작된다든지 하는 것은 별로 새로운 뉴스거리도 아니다. 영화를 필두로 하는 영상 미디어 분야가 워낙 급속하게 부흥하면서, 소재로 쓸 수 있는 이야기 거리에 대한 수요 역시 급증한 것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만화라는 분야가 꽤 흥미로운 것이다. 이미 비주얼로 풀어서 서사를 하고 때문에, 그 이야기가 영상화에 적합한지 좀 더 확실한 선택을 할 수 있다. 게다가 연재물 만화의 경우 극 진행의 독자와 밀고 당기기 호흡이 이미 레디메이드로 갖추어져 있기까지 하다. 이제야 만화 원작이 이렇게 붐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만화와 영상의 파트너쉽은 천생연분이다.

  사실 만화의 입장에서도 영상과의 결합은 매력적이다. 문화상품의 OSMU 프로젝트가 성공하려면, 강력한 핵심 미디어 상품 하나가 전체 프랜차이즈의 이미지를 강력하게 통제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만화가 OSMU 논리를 필사적으로 추구해왔다는 점을 뒤집어본다면, 그만큼 만화가 그 자체로서는 산업적 활력이 소진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인식이 나온다. 즉 만화 산업은 현대적인 OSMU에서 ‘허브’역할을 할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다(주1). 하지만 현재 영화나 TV드라마는 히트작 한번만 나오면 ‘경제효과 수백억’이라는 등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주고 있다. 윈-윈의 공생관계를 노릴 이유가 충분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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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만화시장 자체가 기형적으로 크기로 소문난 일본의 경우라 할지라도, 히트작의 일반적인 성공 패턴은 인기를 검증받은 만화를 애니메이션화(특히 텔레비전 장기 방영 시리즈)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2001년부터 월간지 ‘소년 강강’에 연재중인 <강철의 연금술사>의 경우 단행본 권당 20만부 가량 판매되던 중형 인기 만화이었다가, 2003년에 애니메이션 방영개시된 이후 수요가 급증, 2004년 7월 현재 발매중인 단 7권만으로도 누적판매 1200만부라는 어마어마한 히트로 피드백된 사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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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식적으로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야기를 통째로 가져가는 것이다. 이왕 기승전결 다 맞추어놓은 것, 그냥 그대로 쓰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날로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연재든 단행본이든, 만화는 독자적인 매체로서 특유의 소비/향유 양식을 구축해왔다. 그것에 알맞도록 구성된 이야기 전개나 호흡이 다른 곳에서 그대로 통한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예를 들어서 최근 영화화 논의가 진행중이라는 <도시정벌>의 경우, 만화원작이 대본소용 성인만화의 독서패턴 – 즉, 만화가게에서 수십권 분량의 책을 잔뜩 쌓아놓고, 밤새 가끔 딴짓도 하면서 물 흐르듯 줄줄 읽어내려가는 식이다. 두 시간 동안 어두운 극장에 앉아서 스크린에 집중해야 하는 극영화에서 그런 이야기 전개를 구현할 수 있을리 만무하다. 즉 이야기의 큰 얼개만을 따온 상태에서 전체 내용을 완전히 새로 짜맞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최근 제작되어 나름의 성과를 올린 영화  <바람의 파이터> 역시, 방학기 원작만화로부터는 거의 제목만 빌려왔다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전체 구성이 확연히 다르다.

  덤으로 시기적인 유행의 문제도 있다. 만화 원작이 발탁(?)되는 시점은 보통 연재가 한참 징행되었거나 아예 완결이 된 이후다. 영화나 드라마 등 이후 미디어 상품의 제작기간까지 고려하면 그 시간차이는 더욱 벌어진다. 특히 한국같이 자고 일어나면 사람들이 다른 곳에 우루루 모여 있는 사회에서, 시대에 뒤떨어지는 요소들의 재창작은 필수적이다.

  이러한 방향의 극단으로 갈 때, 원작의 줄거리는 커다란 기본 이벤트 몇 개만 남길 뿐, 나머지는 새로운 창작으로 채워진다. 그 때 결국 이식되는 것은 줄거리라기보다는 ‘캐릭터’다. 엄밀하게 말해서 등장인물들의 특정한 현재 성격, 그것을 형성해준 과거 경험,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서로 엮어주는 관계설정 등을 말하는 것이다. 폐인 신드롬을 낳은 미니시리즈 <다모>를 생각해보자. 만화팬 사이에서는 “방학기에서 김혜린으로 변신”했다고 불리워질 정도로 전체적 감각에 차이가 크다. 남은 것은 잠입 여형사라는 설정과 기본적인 주변 인물들의 관계다. 정작 히트를 친 요소들인 멜로드라마적인 이야기투르기, 와이어 액션 무협, 장중한 대사 등은 원작과 관계없다. 게다가, 캐릭터를 이식한다고 해서 반드시 원작의 캐릭터 설정 전체를 가져올 필요도 없다.  엘리와 라이더가 그냥 한국인 이야기로 바뀐 <풀하우스>는 어떨까? 원작과 다른 주인공 성격 때문에 원작팬들과 풍파를 일으키지 않았던가. 일본만화 원작의 영화 <올드보이> 역시, 쫒는 자와 쫒기는 자의 현재 구도는 가져오되, 그들을 형성한 과거의 사연은 완전히 다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만화원작의 역할이 미미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만화에서 창작자가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서 완성도를 높이고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활용하고자 하는 다른 분야의 입장에서 보자면 말 그대로 ‘소재’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OSMU의 관점에서 만화가 할 역할은, 어떤 특정한 줄거리와 캐릭터들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하나의 사례를 증명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최초’, 혹은 ‘현존 최강’의 사례일 경우 비로소 줄거리와 캐릭터를 다른 분야에 대여해주면서 원작으로서 가치를 획득하고, 결국 비싼 라이센스비를 챙길 수 있다. 따라서 OSMU를 통한 성공을 꿈꾼다면, 현재 각 분야에서 유행하는 요소들을 매 순간 반영한 캐릭터와 이야기를 무한대로 이어가면서 ‘기본빵’을 지키는 것이 대수가 아니다. 일관성있는 완성된 이야기를 만들어내서 특정한 소재로서 활용될 수 있도록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것이 중요하다. 연재의 와중에 캐릭터의 성격이 통일성 없이 망가지면 아웃이다. 어설픈 전개로 인하여 줄거리의 얼개 자체가 이해불능의 경지로 떨어져도 아웃이다. 괜히 “나중에 드라마화하려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려면 어떤 줄거리, 어떤 캐릭터들이 필요할까”라는 고민에 귀중한 시간과 뇌세포를 할애할 필요도 없다. 만화로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져서 많은 독자들을 감동시키고 높은 인지도를 끌어냈다면, 그것을 소재로서 활용할 방법을 궁리하는 것은 그쪽 분야 전문가들의 몫이다(그리고, 그들의 실력은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 쉽게 생각하자. 만화가 OSMU에서 당당하게 자기 위상을 획득하고 싶다면 생각할 것은 단 하나, 매력적인 줄거리와 캐릭터로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서만화로서 독자들을 설득시키는 것 뿐이다.

[] 세계관

  앞서 스쳐지나가듯 OSMU의 ‘허브’라는 개념을 언급하면서 영화나 TV드라마를 예로 들었다. 그런데, 최근 수년간 한국에서 허브 역할을 해줄 강력한 매체로 떠오른 신흥 강자가  있다. 그것도 심지어 산업 성장성 등에 있어서 무척 전도유망하기까지 하다. 그 이름도 찬란한 ‘온라인 게임’이다. 확실히 한국에서 온라인 게임의 사용자층, 확산력, 영상으로서의 비주얼, 응용분야의 다양성 등을 놓고 볼때 만화는 당장 온라인 게임과 혈맹이라도 맺어야 할 것만 같다. 하지만 문제는 (항상 그렇듯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온라인 게임에서는 캐릭터와 줄거리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이야기 매체에서 독자는 특정한 캐릭터, 즉 주인공이나 그 주변인물들의 모험을 관찰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게임 속에서는 자기 자신이 하나의 캐릭터로서 주인공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정해진 줄거리에 따라서 정해진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과 의지에 따라서 움직인다. 그 결과 바로 앞에서 이야기했던 만화의 핵심적인 역할, 즉 이야기 소스로서의 기능이 무용지물이 된다. 곤란하다. 그렇다면 만화는 게임이라는 멋진 허브를 포기해야할까? 물론 아니다. 만화 원작이 이러한 OSMU 모델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은 따로 있다. 바로 ‘세계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세계관은 작품의 시공간, 그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 등장인물들의 특성 등을 직접적으로 관할하는 규칙이다. 그것은 크게는 <팔용신전설> 마냥 전체 세상을 통째로 창조해내는 것일 수도 있고, 작게는 <파이트볼>처럼 단지 스포츠의 룰 정도에 해당하는 작은 것일 수도 있다. 작품 속에서 모든 등장인물들은 이 규칙을 지켜나가며, 모든 갈등의 발생과 극복 역시 그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전형적인 무협만화의 세계관에서는 레이저 병기로 상대를 날려버리지 않는다; 비급을 찾고 수련을 해서 무예의 힘으로 상대를 극복하는 것이 이 세계의 규칙인 것이다. 하지만 총과 미래형 병기들이 허용이 되는 세계관을 지닌 작품이라면 어떨까? 새로운 방식의 대결이 가능해질 것이고, 총보다 빠른 무공이 소재로 도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를 관장하는 규칙을 지켜가면서 목적을 이루는 서사구조’라는 차원으로 놓고 봤더니, 이제야 만화와 게임의 중요한 연결고리가 생겨났다. 게임은, 다양한 만화원작에서 창조한 세계관을 차용해서 멋진 작품을 탄생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실제로 만화는 그 표현적 자유도 덕분에, 현실 세계의 제약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허용되었다(그 덕분에 황당하고 허황된 것을 “만화 같은” 이라고 폄하하는 기분나쁜 관습도 생겼지만 말이다). 따라서 다양한 특이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작품들이 많다. 비단 본격적인 환타지나 SF뿐만이 아니라도, 생략과 과장을 통해서 특정한 하나의 요소를 ‘작품 속 세계에서 그 어떤 다른 것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포장해내는 이야기가 많다. 예를 들어 일본만화 <유희왕>의 세계관 속에서는 특정한 규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트레이딩 카드를 통해서 격투를 하고, 그 속에서 강적을 물리치고 승리해야 세계를 구원한다. ‘고작’ 초등생들 사이의 카드게임이 이 작품 속에서는 세계의 운명을 좌우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만화가 일정정도 인기를 끌자 TV 애니메이션이 방영되고, 이 세계관을 바탕으로 당연히 실제 카드게임을 만들어서 상품화했다. 그것은 경쟁심 강한 남자 초등학생 층에게 크게 어필했고, 그 결과 세계적인 OSMU 대형 성공 사례로 자리매김했다.

  한국 온라인 게임의 대명사격으로 군림해온 <리니지>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신일숙의 동명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만화원작과 비주얼도 다르고, 특별히 줄거리나 캐릭터를 가지고 온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단지 제목이 같기 때문에 원작이라는 말인가? 만화 <리니지>를 원작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혈맹이라는 세계관 때문이다. 혈맹이라는 단위로 아군을 만들고 적군을 구분하는 방식은 온라인 세계의 패거리 문화와 찰떡궁합을 이루어 이후 ‘공성전’ 등 특유의 집단 놀이문화의 촉발점이 되어주었고, 그 결과 큰 히트를 쳤다. 온라인 게임 <라그나로크 온라인>의 경우는 더욱 흥미롭다. 동명 원작만화의 작가인 이명진이 게임 디자이너로 직접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작의 주인공 캐릭터들이나 핵심 줄거리는 전혀 인계되지 않았다. 심지어 온라인게임의 인기를 바탕으로 일본에서 제작된 TV애니메이션 시리즈 역시 원작만화와는 아예 연결고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세계관 구성만은 이 다양한 활용처(‘멀티유즈’)들을 하나의 프로젝트로 묶어주는 진정한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작품을 만들어나감에 있어서, 사실 세계관을 신경써서 만들어 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당히 원래 있는 굉장히 잘 구축된 세계관 위에서 자기 캐릭터들로 다른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정도로 만족하는 작품들도 많다. <반지의 제왕>의 중간계 세계관을 고유명사만 조금씩 바꾼 채로 그대로 가지고 와서 적당히 스토리를 꾸미는 수많은 환타지 만화가 범람하는 것은 사실 비단 한국만의 예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OSMU의 입장에서 다른 미디어 상품이 그런 작품들을 소재로서 발탁해야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여하튼, 만화가 OSMU에서의 폭넓은 성공을 꿈꾼다면, 세계관이라는 요소를 주의깊게 가꾸어야할 필요가 있다. 꼭 방대한 설정자료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야기의 전개 과정 속에서 이 작품의 세계에서 중요한 핵심 가치, 사람들의 행동 원칙을 통일성 있고 집요하게 강조해주는 작업이면 충분하다. 이쯤 되면 이미 눈치챈 분들도 있겠지만, 세계관이라는 것은 바로 작품의 주제 자체를 형상화한 것이다. 세계관이 부실하다는 것은 작품의 주제(즉 작품을 통해서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 자체)가 명확하지 않고, 구심점이 되는 핵심 소재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말과 동의어다. 한마디로, 작품으로서 부실하다는 이야기다. 만화자체로서 좋은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이렇듯 여러 가지 의미로 만화 원작 OSMU 성공을 위한 필수조건인 셈이다.

[] 매력을 유지해주는 미덕: 지속성과 스타성

  작품의 구성요소는 아니지만, 만화가 강력한 원소스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핵심적인 미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바로 지속성이다. 문화 상품의 소비라는 것은 결국 그 안에 담긴 ‘이야기’의 소비다. 성게군이 그려진 다이어리를 사는 이유는 단지 그림이 예뻐서가 아니라 성게군이라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매력 때문이고, 그 매력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실제 작품인 <마린블루스>의 개별적인 이야기 속에서 펼쳐진다. OSMU라는 말 자체가 결국 속되게 표현하자면 한가지 매력적인 아이템을 가지고 끝까지 뽕발을 뽑자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매력의 핵심이 되는 이야기 자체가 계속 새로 만들어지거나, 적어도 한번 만들어진 이야기가 계속 인기를 끌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마시마로>의 사례처럼, 팬시상품 시장에서 잘나가고 있는데 정작 그 유행의 근원이 되었던 원작 이야기 자체가 기약 없이 중단되어 버렸다고 한다면 전체 프로젝트는 아주 쉽게 김이 빠진다.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것은 토끼 주인공의 허를 찌르는 성격과 에피소드들, 즉 ‘엽기토끼’ 였지, 무슨 귀여운 외모의 다양한 캐릭터들이니 어쩌니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두 번째는 ‘스타성’이다. 반드시 만화로서 대박을 터트려야한다거나, 엄청나게 작품성이 우수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수많은 만화들 가운데, 소재를 찾고 있는 OSMU 종사자들의 눈에 들어올 수 있기 위해서는 뚜렷한 지지층이 있는 것이 좋다. 즉, 이 작품을 누가 왜 좋아하고 싫어하는 지가 명백하게 드러나 주어야 산업적인 전략 구상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구상이 가능해야만 OSMU 산업으로서 성립이 된다. 또한 비슷한 작품군들 가운데 바로 이 작품이 선택되어야 하는 이유가 명확해야 한다. 그것 역시, 단지 일개 전문가의 식견이 아니라 작품의 지지층을 보고 판단하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서 <신암행어사> 애니메이션이 만화를 어느 정도 이상 친숙하게 읽고 있는 청소년층을 타겟으로 하는 극장용 장편으로 제작되고 있는 것은 분명히 만화 원작의 지지층 성향에 맞춘 기획인 것이다. 성공을 할지 실패를 할지는 나중에 차차 증명될 일이지만, 적어도 명백한 전략을 짜고 제대로 부딪혀볼 수 있는 최소조건은 되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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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으로 수박 겉햝기로나마, OSMU 프로젝트에서 만화가 내밀 수 있는 카드패, 그리고 그것이 정말 쓸만한 것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을 주욱 훑어보았다. 다양한 요소들을 언급했지만, 정작 이야기의 결론은 결국 하나로 돌아오고 있다: 우선 만화로서 완성도 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놓고 나서 협상 테이블에 올려야 한다. 애니메이션 풍, 영화 풍, TV드라마 풍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화로서 취할 수 있는 자유로운 발상으로 흥미로운 세계관을 구축하고, 그 속을 모험하는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만화 특유의 표현법과 향유 패턴 속에서 팬층을 다지고 명망을 얻으면 된다. OSMU는 작품의 부족함을 메꾸어주거나 문화적 위상을 높여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원래부터 가능성 있는 작품의 상업적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비즈니스 개념이다. 문화산업 논리의 성공적인 정착에 따라서, 멀티유즈를 하겠다는 – 즉 자신들의 훨씬 더 장사가 잘 되는 미디어로 만화의 어떤 부분을 같이 데려가 주겠다는 – 파트너들은 속속 나타나고 있다. 이제, 만화가 득의양양하게 보따리를 풀어놓을 차례다. 사실, 한국만화는 많은 것을 비축해놓고 있다. 하지만 소진되기 전에, 계속해서 그 보따리를 다시 채워 넣는 것은 이제부터의 임무인 셈이다.

 

—- 2004. Copyleft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물을 만난 만화-<워터보이> [기획회의041005]

  ‘물’이란 우리에게 무엇일까. 무슨 자연보호 캠페인 내지 수돗물 절약 구호 같이 들릴지도 모르지만 원래 물은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 마땅한, 기이한 매력으로 가득한 물질이다. 특히 아주 약간의 예술적 상상력만 동원해보면 더욱 그렇다. 자, 그럼 상상해보자. 물은 기존의 공간을 채우면서 동시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물로 인하여 생겨난 그 곳은 공기의 공간과는 다른, 아니 숫제 상반되는 듯한 장소가 된다. 물과 물이 아닌 공간은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생명이라는 현상을 위해서는 서로 섞여들어가야하는 곳이다. 공간, 분리, 혼합, 흐름의 일체형,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매개체. 어떤가, 깊숙이 묻어두었던 예술혼이 마구 불타오르지 않는가? (…아니면 어쩔 수 없지만)

최근 출시된 <워터보이>(아이완 作 / 아트북스)는, 물의 공간적 속성이 지니는 매력을 마음껏 발산하는 만화다. 아닌게 아니라, 이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물로 가득하다. 우선 주인공인 ‘워터보이’를 살펴보자. 항상 발이 물에 잠겨있고 그 물이 몸의 절반쯤까지 올라와있는, 살아있는 물주머니 같은 존재다. 모든 이야기는 주인공의 방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곳은 항상 물로 반쯤 차있다. 그리고 어느날 물고기 아저씨가 와서 어항을 주고 가는데, 그 속은 물로 차있으며 물고기가 살고 있다. 그리고 물고기들은 어항, 주인공의 방, 나아가 워터보이의 몸까지도 물을 통해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헤엄치며 논다. 그런 방식으로 물은 공간과 공간, 나아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 이 작품 속에서 물은 더 이상 하나의 소재나 소품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다.

하지만 말로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은, 다소 난해한 작업이다. 그 점을 잘 인지하고 있는 듯, <워터보이>는 시각적 표현력에 신중을 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물이 만들어내는 열린 공간이 주는 매력을 잘 살려내는 커다란 가로판형, 일관되게 한 페이지에 한 칸씩만 담겨진 담담한 이미지의 흐름 등이 이러한 노력의 일부다. 또한 연필화 질감의 푸른 화면 속에 흑백 또는 단색톤의 캐릭터들이 펼치는 작가 특유의 연필화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환상적인 느낌을 한층 배가시켜준다. 특히 이 작품에서 묘사되는 물은 험난한 파도라기보다는 공간을 채우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러한 시각묘사 전략은 더욱 더 효과적이다.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물은 마치 작품의 주인공 그 자체라고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으로 묘사된다.

<워터보이>는 줄거리의 재미를 즐기는 만화가 아니다. 확실히 이 작품은 전통적인 기승전결, 주인공이 난관을 극복해나가면서 결국 성장하고 강해져서 세계를 구하는 이야기와는 무척이나 멀리 떨어져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단순한 그림 구경에 머무르지 않고 나름대로 독자들을 몰입시키며 다음 페이지를 넘기도록 만들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묘사로서의 이야기’라는 힘 덕분이다. 워터보이의 세계는 하나의 그림 속 이미지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공간을 옮겨가며 헤엄치는 물고기, 의자 밑으로 기어들어갔다가 사막으로 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서 비로소 완성되어 간다. 마치 수백년전에 단테의 <신곡>이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그러하였듯이, 나름대로 장구한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묘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워터보이의 시각에서 보자면) 나름대로 평범하고 소소한 행동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스며나오기 때문에 독자들로 하여금 묘한 일상성을 공감하도록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만화라는 장르를 선택한 것은 탁월했다. 즉 묘사로서의 이야기의 매력과, 실제로 매력적인 시각적 묘사를 결합시켜서 워터보이가 사는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상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만화라… 여담이지만, <워터보이>는 ‘어른을 위한 그림책’이라는 레이블로 출간되었다(아마도 마케팅 상의 이유에서 내려진 명칭 선택이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곁들인 그림의 연속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하는 예술양식이라는 속성에서 조금도 위배될 것이 없기에, 좋은 ‘만화’ 작품으로 칭함에 거부감이 없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용감한 동시에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미지의 흐름이나 경계선 없는 환상세계를 즐기는 것은 좋지만, 동시에 독자들로 하여금 낯선 독법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화 작품 감상인양 개별적인 그림의 묘사에 완전히 빠져서도,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오락만화인양 줄거리 진행에 집착한 나머지 답답해 해서도 안된다. 즉 <워터보이>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즐기기 위해서는 기존의 독법이나 줄거리의 재미를 버리고 새로운 균형점을 찾으라고 독자들을 종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둘 사이의 간극은 결코 좁지 않다. 보통은 작가가 그런 새로운 비젼을 고집스럽게 내세울 때, 독자와의 균형관계를 생각해서 접점을 마련해주고 타협책을 찾아 나서는 것이 편집자/기획자의 몫이다. 즉 첫 번째 독자로서 ‘좀 더 편한’ 독법이나 구성으로 다듬어달라고 조르는 – 혹은 직접 다듬는 역할이다. 가장 구차한 차원에서라면, “이 책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즐길수 있다”는 식의 홍보 카피나 해설 칼럼 따위를 첨부하는 식으로라도 말이다. <워터보이>의 경우, 그러한 노력이 부족해보인다는 아쉬움을 떨칠 수가 없다.

불평은 이 정도다. 만약 충분히 오래 서가에서 밀려나지 않고, 넓은 층의 사람들에게 제대로 소개가 된다면 결국은 안정된 독자층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매력과 완성도를 갖춘 작품임에는 틀림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필자는 여전히, 이 작가의 홈페이지(http://www.iwanroom.com)에서 봤던 예전의 온라인 작품 <점핑4>를 더 선호한다. 이야기라는 표현법에서 줄거리의 재미는 쉽게 포기하거나 가볍게 여길만한 지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입장인데다가, 작가가 그 것에 결코 무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해준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독자로서, 작가의 다음 책에 대해서 바라는 한가지 소망이다.
2004. 10. 5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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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만화세대의 부활 – 월간 <허브> [으뜸과 버금 0408]

웰빙의 폭풍이 이 땅에 상륙해서 파괴력을 발휘한지 이제 그래도 좀 시간이 지났다. 사실 따지고 보면 웰빙이라는 게 자기 몸 자기 마음 좀 지키면서 행복하게 살아보자는 아주 단순한 컨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구체적인 형태로 우리와 조우했다. 난데없이 요가, 유기농 채식, 아로마 테라피 같은 것들이 행복한 생활의 잣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 그리고 덧붙이자면, 꽤나 바가지성 가격표를 하나씩 달고 다닌다. 그리고 결국 최강의 코미디, 패스트푸드점의 ‘웰빙버거’ 붐까지 이어졌다. 진짜 웰빙은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하고 많은 얼굴을 하고 있을 터인데 말이다. 진짜 웰빙은 특정한 상품, 상표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잃어버렸던 자신의 취향을 스스로 다시 깨닫고 추구해나가는 것에 있다.

뜬금없이 웰빙 이야기로 시작했다. 만화 읽는 것을 업의 일부로 삼고 있는 필자에게 웰빙은, 좋아하는 취향의 만화들을 지속적, 정기적으로 한 보따리씩 만나서 즐기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필자의 취향이 유별나서인지, 묶음으로 존재하는 것 없이 스스로 하나하나 찾아나서야 할 때가 대부분이다. 굳이 여기서 한국의 척박한 출판유통 환경 속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책을 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하소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여튼 수많은 잠재적인 만화독자들을 질려서 만화로부터 떨어져나가도록 한다는 것 정도는 꽤 자명하다. 음… 이런 상황은 어떨까? 원래 만화를 좋아했던 한 세대의 폭넓은 독자층이,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만화책을 펼쳐들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동안 먹은 나이에 따른 사회적 환경과 감성의 변화를 충족시켜줄만한 새로운 만화들을 이제와서 다시 찾아나서기에는 너무 품이 많이 든다. 게다가 당시에는 당시 취향을 충족시켜줄 잡지들이 넘쳐났는데 이제는 그런 것도 없다. 하지만 그 당시 감동을 주고 자신의 취향을 생성시켜 주었던 그 작가들, 그 감수성은 여전히 그립다. 만약, 그 때 그 작가들 또는 그러한 감수성이 고스란히 나와 함께 나이를 먹고 더 성숙해졌다면 어떨까. 피차 서로 성장한 그런 상태로 다시 만나보면 얼마나 멋진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까.

바로 그런 모습으로 <허브>라는 순정만화잡지가 최근 창간되었다. 80년대의 순정만화붐 속에서 만화에 심취했던 그 폭넓은 여성독자층이 이제는 2-30대가 되어 좀 더 성장한 무언가를 바라고 있을 때, 이들을 위한 만화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김진, 우양숙, 박연 같은 그 세대에게 무엇보다 가장 반가운 이름들이 있고, 강경옥, 김혜린 등의 이름들이 대기자명단에 버젓이 올라와있다. 그리고 같은 시대를 호흡하는 새로운 세대의 작가군들도 어깨를 나란히하며 섞여있다. 하지만 작가군이야 어차피 이름정도일 뿐이고 정작 중요한 것은 작품 아니겠는가. <도깨비신부>의 이야기적 매력, <들꽃이야기>의 구수한 냄새, <미시 박>의 성인취향 생활담, <조우>의 현학적이지만 흡입력있는 모양새 등은 초반의 우려를 상당부분 제거해주고 있다.

물론 작품과 기사들의 전체적 방향성이 다소 산만한 구성을 보이고 있는 등, 신생 잡지인 만큼 아직 부족한 지점도 더러 있다. 하지만 그 동전의 뒷면은 바로 작가 수익배분 시스템이나 인터넷 중심의 정기구독모집(http://www.c-herb.net) 등 다양한 패기넘치는 실험들이다. 월간 <허브>의 향이 한 세대를 다시 만화에 눈뜨게 만드는 것에 일조하기를 기원한다.
[으뜸과 버금 2004. 8.]

(*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분량도 capcold답지않게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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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이라는 오락거리: <궁> [으뜸과 버금 0407]

유럽의 한 섬나라에는, 한 왕자님이 살고 있다. 나름대로 동화같은 풍모가 있는 나라에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명예롭게 생활하는 귀티나는 왕자님. …그런데, 그 사람의 어머니되는 여왕님이 워낙 오래 살며 왕직에 눌러앉아있는 바람에 중년이 넘어가도록 계속 왕세자다. 그 왕자의 부인인 세자비는 진정한 ‘공주’의 풍모를 풍기며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듯 했으나, 악성 파파라치들에게 쫒기다가 허무하게 생을 마감해버렸다. 예산낭비를 줄여야 한다고 왕실폐지를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심심치않게 나타나지만, 각종 스캔들과 가십을 소비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자 하는 국민들을 위해서 제단에 올라가야 하는 운명이다. 뭐, 현실이라는 것은 대충 이런 것이다.

<궁>은 한국에 만약 왕실이 있다면, 하는 설정을 핵심으로 하고 있는 만화다. 조선 왕가의 혈통이 이어지면서 현대까지 경복궁에서 살고 있는 로얄 패밀리를 상정하고 가는 것이다. 그리고 평범한 여고생이 할아버지들의 약속에 떠밀려서 왕실로 시집을 가면서 겪는 좌충우돌 소동과 로맨스가 이 만화의 줄거리다. <궁>은 너무 늘어지지도 가쁘지도 않은 깔끔한 연출 패턴, 궁중의례 등에 대한 성의있는 고증, 현대 한국에서 입헌 군주제가 이루어진다면 있을 법한 다양한 일화들의 세심한 편성 등 많은 미덕을 지닌 만화다.

하지만 <궁>의 인기 비결은 무엇일까? 사실 <궁>에서 왕실이 담당하는 역할은 기존 여러 ‘들장미소녀 캔디류’ 순정만화 작품들에서 재벌 가문이나 유럽 귀족 가문이 해왔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낮은 신분의 저돌적인 여자 주인공이 높은 신분의 고고한 남자 주인공을 후려쳐서 결국 반하게 만들기 위한 통과의례 정도인 것이다 (솔직히 대체역사물이라고 보기에는 입헌군주제가 된 한국이라는 역사적 흐름과 그 의미에 대한 고민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해서 단지 ‘여주인공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 재미있으니까’ 라고 편리한 해답을 제시하기에는 한국의 왕실이라는 소재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력을 과소평가하는 듯 하다. <궁>에서 왕실이라는 설정을 끌어들이는 방식은 현대 사회에서 입헌군주제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 그 자체다. 중학교 사회시간에 배우듯이, 실질적인 통치제도로서의 민주주의와 왕실이라는 개념을 양립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제도가 바로 입헌군주제다. 입헌군주제에서 왕실은 통치자가 아니라. 한 나라의 권위와 정통성을 구체화한 궁극의 마스코트다. 이 사회에서 왕실은 범접하기 어렵고, 권위있고 전통을 따지는 고고한 사람들의 집단으로, 내부에서 권력다툼과 스캔들이 벌어지는 대가족이다. 한마디로, 해당 국가의 전통문화 가운데 가장 고급스러운 부분들로 잘 포장된 최고의 오락거리라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훌륭한 오락거리로서 만들어진 제도인 입헌군주제 왕실을, 트렌디 연애물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도입해 들여온 셈이다. 좋은 선택이다.

<궁>은 독자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며, 최근에는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하는 등 상복도 다분히 많다. 게다가 tv드라마로 제작 진행중이라는 소식도 들려오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작품이다. 오락으로서의 왕실이라는 본래의 본분을 넘어서서 갑자기 심각한 노선으로 돌변하지만 않는다면, 앞으로도 많은 재미를 줄 수 있는 멋진 작품으로 남게 될 것이다.

 

[으뜸과 버금 2004. 7.]

(*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분량도 capcold답지않게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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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결국은 사람 사는 곳 – <남측 손님> [으뜸과 버금 0406]

  90년대 중반, ‘라구요’라는 대중가요가 잔잔한 화제를 모은 적이 있었다. 한번쯤 북녘땅을 밟아보고 싶다고 한숨 쉬시는 아버지 – 여기까지는 단순한 이산가족 상봉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이 노래가 특별했던 것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는”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두만강 푸른물에 노젓는 뱃사공을 본 적은 없지만, 아버지 덕분에 그 노래만은 잘 아는 그런 상황이라는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전쟁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이 무슨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겨레 살리는 통일이란 말인가. 북한이라는 존재에 대한 감정은 상당히 애매할 수 밖에 없다. (일상생활 속으로 완전히 뿌리내린) 뭔지 모를 소위 민족적인 사명이라는 것과, 현실적으로 전혀 다른 낯선 나라라는 두 가치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전후세대의 모습이다.

  오영진의 <남쪽손님>은 북한 생활상에 대한 관찰로 이루어진 만화지만, 사실은 바로 이러한 우리들 자신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다. 작가가 경수로 건설하러 출장갔던 북한. 작가의 자화상인 오대리에게 북한은 무슨 염원의 땅이 아니다. 그 곳에는 모든 것을 뛰어넘은 뜨거운 동포애가 넘쳐나기보다는, 엄격한 제한사항들에 대한 조심성과 서로에 대한 차이 확인이 자리잡고 있다.  마치 7-80년대의 중동처럼, 이곳 역시 단순한 출장지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제3국인이 아닌 ‘남쪽 손님’에게 북한이 가지는 의미는 결코 평범할 수 없다. 북쪽과 남쪽의 사람 살아가는 모습들은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다른 듯 하면서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커다란 기념비부터 세워놓기 좋아하는 습성부터 시멘트 빼돌리기, 막무가내로 자존심 건드린다고 고집부리는 아저씨까지. 심지어 ‘수령님 살아계실 때가 좋았지’라는 북한 주민의 대사와, 당장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박통 때가 좋았지’라는 푸념의 그 섬뜩한 유사성이란! 특히 만화라는 장르의 장점을 듬뿍 살린 낙서체의 열린 선들과 짧은 호흡의 일화들이, 마치 틈틈이 적어놓은 메모장 같은 느낌으로 더욱 그곳에서 겪은 일들의 역설과 희극성을 돋보이게 해준다. 강박적인 민족주의라든지 제대로 소화해내지도 못하는 정치논리 또는 맹목적인 통일 타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자신이 보고 겪은 만큼의 북한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것이다. 사이사이에 교차하며 등장하는, 전문필자가 집필한 북한 사회와 문화에 대한 설명문 역시 이 책을 더욱 맛깔스럽게 만들어주고 있다.

  오랜 시간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동질감이니 형재애니 하는 것은 곤란하다.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를 가감없이 서로 발견하고 이해하는 것 부터 새로 시작해야 한다. 돼지 김일성이 지배하는 악의 제국이 등장하는 70년대 <똘이장군>의 시대는 지나간지 오래지만, 그 빈 자리에는 아직 새로 들어선 것이 많지 않다. <남쪽손님>의 오대리처럼 우리들도, 그 곳에 이쪽과 비슷비슷하게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 조금씩 배워나가는 세상 – 이천년대 한국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으뜸과 버금 2004. 6.]

(*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분량도 capcold답지않게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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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복의 목적-<몬스터즈>[경향신문 만화풍속사]

“자본주의는 정글이다” 라는 말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 같은 용어들이 자연스럽게 삶의 지표로 교육되고 있을 지경이니 말이다. 특히 변화의 속도가 거의 매트릭스급인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그 급물살의 흐름에 같이 뛰어들지 않고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해본다는 것은 도태라는 험악한 말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든다.

근래 나온 국산 SF(?) 개그만화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몬스터즈>라는 작품에서, 작가는 이 문제에 대한 꽤 날카로운 통찰을 해학적으로 던져주고 있다. 이 작품은 ‘세계정복 일상물’이라고 불리우는 범주의 작품인데, 세계정복을 꿈꾸는 거대한 악의 조직과 말도 안되게 강한 정의의 히어로들이 사실은 우리들의 아주 평범한 생활세계 속에서 적응하면서 살아가며 몰래 세계의 운명을 좌우할 엄청난 싸움들을 벌이는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당연히 이런 설정에서는 엄청나게 하드한 스릴러물이나 대놓고 웃기는 개그물 중 하나로 흘러갈 수 밖에 없는데, 운 좋게도 <몬스터즈>는 후자에 속한다(진지한 SF를 표방하기에는 어딘지 헐렁한 그림체, 패러디와 반전이 몸에 베인 연출력은 개그물이 얼마나 탁월한 선택이었는지를 증명해준다).

이 작품에서 세계정복을 노리는 오메가 박사는, 광화문을 점거하고는 시민들에게 생중계로 동화 한편을 들려준다. 한 노인이 원숭이들에게 팔찌를 주고 팔찌의 개수에 따라서 먹을 것을 퍼주었더니 원숭이들이 인간들처럼 아귀다툼을 하며 앞다투어 주인에게 복종하였다는 우화. 인간의 우매함, 사회의 무질서함에 대한 통찰력을 동원한 것이다. 자, 이제 악의 박사는 깨끗하고 통제된 신세계를 주장하며 세계정복을 선언하겠지? 아니다. 이 만화는 뼛속까지 개그만화니까. 오메가 박사의 목적은 원시사회로의 회귀다. 단순하고 행복한 사회로 돌아가는 것이 인류에게 주어진 유일한 갱생의 길이다! 무릎을 탁 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발상의 전환이다. 이렇게까지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건전무쌍한 악의 화신을 본 적이 있던가.

권력의 차별화, 그것에 따른 물질의 불균등한 분배, 다시금 소유물에 따른 권력획득으로 이어지는 나선 구조는 섬뜩하다. 어떻게 그 말도 안되는 폭주를 멈출 수 있을까. 주류 정치경제나 교육에서 여기에 대한 고민을 완전히 멈춰버린 지금 이 시대, 아직도 꿋꿋하게 딴지를 날리는 것은 오히려 가장 일상적이고 사소한 즐김의 영역들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뼈있는 농담이야말로 최고의 힘을 지닌 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기이한 세상사 속에서, 만화라는 절대고수가 그 역할을 맡아서 강호를 평정해줘야 할 타이밍이다.

 

/김낙호·만화연구가·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경향신문 / 2004. 10. 8일자]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금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여기 올라오는 것은 신문편집과정을 거치지 않은 ‘원본’입니다… 별 차이 없지만;;)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허 —

특별한 일상의 조건-<구미의 유학만화> [경향신문 만화풍속사]

최근 몇 년 동안 온라인 세계에서 새로운 붐을 일으킨 미니홈피나 블로그 등의 특징을 단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뭘까? 바로 일상성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전문분야의 엄청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웹을 뒤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일상적이고 소소한 이야기나 생각들을 보고 즐거워한다. 물론 생각해보면 시시콜콜한 일상사로 수다를 떨거나 안주거리 삼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현상이라고 보기 힘들다. 하지만 온라인의 발달, 그 중에서도 앞서 언급한 여러 기술과 서비스의 도입으로 인하여 한층 더 개인화된 미디어가 가능해진 덕분에, 잡담의 네트워크는 더욱 광대해졌다.

그렇다면 평범한 일상이 멋진 이야깃거리가 되기 위한 조건은 도대체 무엇일까? 물론 평범한 일상은 쉽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좋은 이야깃거리일 수는 있다. 하지만 굳이 그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들도록 하기 위해서는 즉, 이야기로서 매력이 있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과는 다른 무언가를 줄 수 있어야 한다. ‘다르지만 같은’ 일상성이 필요한 것이다.

‘구미의 유학만화’(http://chkoomi.cafe24.com)라고 제목이 붙여진 한 사이트에는, 한 평범한 일본 유학생의 일상적인 생활 관찰(?) 일기 만화가 연재되고 있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특히 ‘교포가족’이라는 시리즈다. 교포 3세인 작가 자신과 가족들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첫 화부터 ‘강제 징용당했다가 허리디스크 덕분에 무사히 돌아온 할아버지’라든지, ‘한국말 못하는 아버지와 일본말 못하는 어머니의 결혼’ 같은 범상치 않은 사연들이 둥그런 구미 과자 캐릭터로 표현되어 독자들을 단번에 미소 짓게 만들어버린다.

최근 이 시리즈는 93년 일본의 쌀 부족 사태를 가족 경험담으로 풀어냈는데, 식량 자주성을 부르짖는 뭇 세미나 수십회보다 더 명쾌한 설득력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일상성에서 오는 공감의 힘이 있다. 가족 밥상의 밥맛만큼 일상적이고 공감 가는 방식이 어디 있겠는가! 동시에 그것은 다른 환경의 일상성인 덕분에, 소재의 매력 역시 돋보일 수 있다. 즉 공항에서 일본 방문 손님들이 쌀을 한 포대씩 들고 오는 대목에서 박장대소하면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일본이라는 ‘다름’과 교포, 또는 가족이라는 ‘같음’이 주는 균형관계 속에서 일상성은 특별한 재미를 확보한다.

타인의 생활 속에서, 나의 생활과 같으면서도 다른 일상성을 찾아나서는 여정. 때로는 그 여정 자체에 중독될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풍속도- 아니 우리 일상의 일부분인 셈이다.

/김낙호·만화연구가·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경향신문 / 2004. 9. 17일자]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금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군대라는 기억의 함정 – <돌격 앞으로> [경향신문 만화풍속사]

인간의 기억은 과거를 기록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도구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가 아닌 일부분만을, 그것도 지금 순간을 무사히 보내기 위해서 가장 적합한 방향으로 살짝 바꾸어서 기억을 하곤 한다. 그리고 그 방향은 대체적으로 ‘미화’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과거는 현재의 고난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한 이상적인(즉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안식처로 활용되기 때문에 아름다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덕분에 쓰리디 쓰렸을 젊은날의 고뇌는 청춘의 열정으로, 가슴찢어지는 실연은 성숙을 위한 디딤돌로 재해석되곤 한다. 실제로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기억해두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뇌세포들을 엉뚱한 조합으로 새로 이어붙이는 것이다.

군대 생활, 일명 ‘한국 남자들의 궁극적인 집단적 공유기억’이라고도 부르는 것이 있다. 사실 솔직히 말해서, 대부분의 병영생활은 뭐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당시의 가학/피학적인 고통은 최고의 안주거리로 즐거움의 대상이 되고, 심한 경우 심지어 전우애를 다질 수 있었던 뜻깊은 시절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마치 당연하다는듯이, 군대를 다루는 만화들 역시 대부분 과거의 턱없는 미화라는 함정에 깊숙이 빠져있다. <빤빠라 선착순>이나 <굳세월아 군바리> 같은 작품들이 묘사하는 인간적인 군대 생활의 이면에 담겨있는 원칙인 셈이다. 보다 흥미로운 경우는 마재권의 4칸 만화 <돌격! 앞으로>(잡지 <부킹>에서 99-02년까지 연재, 단행본 전 4권 발간)의 경우다. 이 작품은 처음 시작 부분에서는 군대에서 어처구니 없는 결정 때문에 이어지는 황당한 결과를 핵심으로 하는 짤막한 개그로 신선한 웃음을 선사했다. 즉 군대라는 기형적인 폐쇄사회의 모순을 제대로 웃음꺼리로 삼아주는 통렬한 블랙코미디로 첫 단추를 끼운 것이다.

하지만 연재가 진행됨에 따라서 점차 이야기는 주인공들 – 즉 내무반 성원들끼리의 캐릭터 드라마로 변해갔다. 그리고 캐릭터 드라마로 변하면서 다시금 군대만화가 흔히 빠지는 그 함정 – 아름다운 전우애와 추억 – 속으로 급속하게 빨려들어갔다. 그것이 당시 통신 게시판에서 다수 올라왔던 “군대를 희화화하다니! 너 방위 출신이지?” 따위 독자 반응들 때문인 것인지 아니면 작가 스스로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한계 때문인지는 사실 알 길이 없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여전히 군대라는 기억을 ‘더럽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려는 미묘한 습성을 조금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의 현 풍속도 속으로 결국 돌아와버렸다는 점 뿐이다. 

/김낙호·만화연구가·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경향신문 / 2004. 9. 4일자]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토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허 —

대서사가 붕괴할지라도: <저수지의 걔들> [경향신문 만화풍속사]

!@#… 이번 것은 여차저차하다보니 내용이 좀 어려울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담당 기자님은 오히려 이번 것이 평소보다 더 쉬웠다고 하시더군요. -_-;;; 여튼 요새 ‘요즘 젊은 것들은 긴 안목이 없어’ 투의 이야기가 자주 들려서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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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사가 붕괴할지라도 – <저수지의 걔들> 이동욱 作

90년대, 이 땅의 젊고 똑똑한 사람들의 관심분야가 급격하게 달라졌던 때가 있다. 그것이 소련붕괴 때문이니 자본주의적 개인주의가 만연해서 그랬다느니 나름대로 분석들을 했는데, 여튼 확실한 것은 결과로서 나타난 한가지 현상이었다. 바로 “대서사의 붕괴”인데, 포스트모던이니 시뮬라크르니 하며 폼잡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단골메뉴이기도 하다.

커다란 흐름이라든지, 중후장대한 구조라든지 하는 것들이 어느틈에 구닥다리 취급을 받는 세상이다. 세상사는 큰 법칙과 통찰로 이루어지기보다는 파편화된 요소들의 결합이라는 것이다. 만화로 치환해보자면, 중후장대한 스케일의 드라마가 점차 쇠퇴하고 짧은 호흡과 작은 성찰의 찰나적인 이야기들이 득세하게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그것에 대해서 최근 심각한 우려의 목소리도 꽤 나오고 있다 – “장편만화의 위기”라는 꽤 자극적인 말로 신문지면에까지 올라오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상은 약간 다르다고 생각한다. <저수지의 걔들>이라는 작품이 좋은 예가 된다. 우주선을 타고 각 행성들을 여행하는 탐험단의 모험을 코믹하게 그려나가고 있는 최근 주목할 만한 작품인데, 짦막한 4칸만화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4칸만화는 완결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의 행성에서 일어나는 모험은 보통 4칸만화 8~12편 정도가 내용적으로 연결되면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한 편에서 소개된 캐릭터는 한참 나중의 모험에 다시 재등장하기도 하면서 시리즈로서의 전체적 맥락이 만들어진다. 이것은 원래 미국에서 현대 신문만화의 시작과 함께했을 정도로 오래된 방식이지만, 몇년전 <아즈망가대왕>의 히트로 인하여 재발굴된 형식이기도 하다.
대서사가 파괴되고 장편이 부진하다고 해도, 그것은 갑자기 작가들이 이전보다 게을러져서도, 독자들이 얄팍해져서도 아니다. 작품 전체를 통해서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읽어내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그 방식이 바뀌었을 뿐이다. 이전의 장편 개념이 하나의 스트레이트한 스토리로 그런 목표를 향해서 직선질주를 했다면, 지금의 짧은 호흡 작품들은 하나씩 벽돌을 쌓아가듯 결국 같은 목표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도 지금도 그 목표에 도달하는 것에 성공하는 작품들보다는 실패하는 작품들이 많을 뿐이다.
결국 현실세계도 마찬가지다. 직선적인 줄거리 – 즉 중후장대한 사회규범의 틀을 통해서든 다양한 일상적인 부분들의 결합을 통해서든, 결국 합리적이고 상식이 통하는 전체적인 사회상으로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여전히 중요한 것이다. 문제는 대서사의 붕괴가 아니라, 그것을 시대의 흐름이니 도통 이해가 안되는 콩가루 사회이니 말하며 변명꺼리로 삼고 세상에 대한 무관심을 정당화시키는 우리들의 세태일 뿐이다.

/김낙호·만화연구가·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경향신문 / 2004. 8. 21일자]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토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