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년들은 지금 – 『소년탐구생활』[기획회의 070201]

그 소년들은 지금 – 『소년탐구생활』

김낙호(만화연구가)

자신이 몸담았던 과거 시절을 회상하는 것은 과거 아름다웠던 자기 생활을 기억하며 재충전을 하는 쪽이든, 우울했던 시절을 기억하며 그래도 지금은 더 나아졌다고 자기위안을 하는 쪽이든 마찬가지로 바로 ‘현재의 나’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보통은 그 때의 나, 그 때 내가 살았던 시절은 지금보다 덜 애매했다. 실제로 더 어린 나이, 특히 소년소녀 시절 정도에는 삶의 폭이 더 좁고 단순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지나온 경험이기에 전지적 시점에서 반추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당시에는 보이지 않았던 의미들을 지금은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이 지금의 나로 이어진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다. 그렇다면 소년 시절의 경험담을 담아내는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 작품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그 시대의 감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유사한 경험을 같이 투사해가며 과거의 자기 모습을 탐구하고, 현재의 나를 돌아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도를 걸어가는 회상체의 작품이라면 무릇 ‘생활’에 대한 ‘탐구’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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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개그의 처절함 -『입시명문사립정글고등학교』[기획회의 070115]

학교개그의 처절함 -『입시명문사립정글고등학교』

김낙호(만화연구가)

고등학교라는 공간은 만화, 특히 주류 장르만화와 무척 궁합이 좋다. 청소년 독자들에게는 현재 진형형으로 그 이상 연령대에게는 과거 경험으로 친숙한 공간이라는 장점 위에, 다양한 인간군상이 폐쇄된 공간에서 지내야 하는 소우주적 특성이라든지 성장의 모티브라든지 경직된 학교 문화에서 오는 다양한 패러디 가능성이라든지 여러 가지 요소들을 맞물리기 좋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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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만화대상 2006 결과발표.

!@#… 2006 독자만화대상 결과가 발표되었군요. 차점자 등을 포함한 전체 목록은 여기로.

대상 「타이밍」| 강풀 | 문학세계사
단편상 「입시명문 사립 정글고등학교」| 김규삼 | 대원씨아이
신인상 「짬」| 주호민 | 동방문고상상공방
온라인상 「26년」| 강풀
심사위원상 「그린빌에서 만나요」| 유시진 | 서울문화사

!@#… 상식적인 수준의 결과가 나온 듯 해서 다행+왠지 모를 아쉬움 약간. 그러고보니 이전 해의 결과들과 비교해서 유난히 출판 순정만화가 약세. 투표인단의 인적구성에 대한 통계까지 나와봐야 알겠지만, 포털들의 홍보 협력 결과 몇몇 편중이 감소한 것 아닐까 추측.

장례, 이별, 남겨진 이들 – 『아버지 돌아오다』[기획회의 070101]

장례, 이별, 남겨진 이들 – 『아버지 돌아오다』

김낙호(만화연구가)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의식인 장례란 세계 어느 문화에서나 많은 의미가 부여되곤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은 제의적인 의식이 거의 없이 오로지 잘 태어나느냐 마느냐의 의학적 관심사로만 가득한 반면,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은 오히려 정작 본인은 이미 죽어서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을 터인데도 온갖 상징적 행위로 가득한 행사들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 행사의 주인은 바로 고인이 떠난 후 남겨진 이들이다. 그 중 가장 가까웠던 이들이 상주가 되고, 각종 지인들이 와서 명복을 빌어주고 간다. 그 와중에서 고인이 인연을 맺었던 여러 사람들이 서로를 확인하며 좁은 세상을 실감하곤 한다. 그렇듯 자고로 장례는 남아있는 사람들의 행사인 셈이다. 고인에 대해서 명복을 빌고 저 세상에서 못 다한 무언가를 이루라고 이야기를 하곤 하지만, 실제로 장례식에서 마음을 추스리는 것은 남아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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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밥이 쌓여가는 일상 -『짬』[기획회의 061215]

짬밥이 쌓여가는 일상 -『짬』

김낙호(만화연구가)

한국에서, 세대를 초월해서 애용되어온 궁극의 격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군대 가면 사람 된다”라는 말이다. 사람도 아니었다가 사람이 되어 나온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분명히 아닐 것이고, 군인으로서 배웠다고 표방하는 각종 살인기술이 인간 본연의 조건이거니 하는 말도 물론 아닐 터이다. 물론 말이야 조국의 소중함을 알게 되며 책임감을 지니고 사회성을 기른다느니 하고 적당히 멋진 말들을 붙여놓고는 하지만, 굳이 맥락으로 보자면 군대 생활을 경험하고 나면 한국의 주류 아저씨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 나갈 만큼 닳고 닳은 생활 요령이 쌓인다는 정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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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독자만화대상 2006 시작했습니다

!@#… 캡콜닷넷에 어울리지 않게, 무려 배너(!)까지 달아주는 행사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독자만화대상’ (http://www.comicreader.org). 2006년으로 벌써 5회째를 맞이하는 행사. 여기까지 오시는 분들이라면 당연히 대부분 아시겠지만, 독자들의 일반 투표를 통해서 부문별로 2006년 한 해 나온 만화 가운데 가장 넓은 지지를 받은 작품을 뽑아내는 행사. 한국만화대상의 인기상 부문이 이 형식을 참조해간 것으로도 알 수 있듯, 주목받아 마땅한 좋은 행사다. 뭐, 상금은 없지만. -_-; 여튼 capcold로서도 처음 설립을 위한 기획 단계에서 이리저리 고개를 들이밀었던 개인적 인연도 있기까지 하니, 이리저리 홍보하고 다닐 만한 행사.

!@#… 여하튼, 올해 행사가 지난주부터 시작되었으니 만화에 관심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너도나도 달려가서 투표인단으로 참여,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시기를. 투표할 만큼 많은 올 한해 나온 한국 만화 작품을 읽어본 적 없다고 할지라도, 어떤 것들이 나와있고 내가 놓친 것들이 과연 무엇인가를 확인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사이트 운영 및 자료집 발간 등 행사 진행 전반을 위한 후원금 모금도 하고 있으니 그것도 도와주면 좋고.

지금까지의 역대 대상 수상작:

2002년 서문다미 | 그들도 사랑을 한다
2003년 정철연 | 마린블루스
2004년 강풀 | 순정만화
2005년 강도하 | 위대한 캣츠비

…자세한 설명 및 부문별 수상작 등은 공식사이트에 가보면 다 나와있으니, 클릭은 필수.

매력의 원천 – 『석정현 소품집 Expression』[기획회의 061101]

매력의 원천 – 『석정현 소품집 Expression』

김낙호(만화연구가)

지난 몇 년 사이, 젊은 전도유망한 재능의 만화작가들이 단편집으로 단행본 데뷔를 하는 일이 연달아 있었다. 장편 연재지면에 곧바로 뛰어들어서 굵직한 작품을 만들어냄으로서 주목을 모으며 데뷔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아무런 기반도 없이 믿을 것이라고는 실력과 패기밖에 없는 젊은 만화작가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적은 지면 안에서 최대한 자신만의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무언가를 이야기하고자 활동을 해온 결과다. 그런 짧은 이야기들을 통해서 작가는 자신의 존재를 업계는 물론이고, 특히 웹을 통하여 독자들에게까지도 직접 증명해보이곤 하여 장편 데뷔작 없이 먼저 ‘스타’로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물론 안정적 고료나 단행본 인세를 받는 완성된 스타라기보다는 우선 지명도를 올리고 가능성을 인정받는 불완전한 예비 스타인 셈이지만, 적어도 자신의 실력으로 첫발을 내딛는 중요한 과정임에는 틀림없다. 그렇기에 이러한 작가들의 첫 단편집이란, 단지 그 작가의 짧은 이야기들의 모음이라기보다 사람들이 이 작가에게 주목한 이유의 재발견이다. 중후장대한 장편의 틈새에서 틈틈이 숨돌리며 만드는 의미의 단편집이 아니라, 작가의 가장 거칠고 원형적인 매력이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 그대로 주어지는 셈이다.

『Expression』(석정현/ 거북이 북스)은 이런 점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실사풍의 화려한 이미지로 만화 지망생층은 물론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는 석정현이라는 작가가 왜 지지를 받았는지 복기해주는 모음집인 셈이다. 이 책은 단편집이라는 분류상의 명칭보다, 작품 개개의 역할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의 ‘소품집’이라는 이름을 고집한다. 실제로 이 책에는 일관성 있게 모인 단편들이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길이와 형식의 작품들이 섞여있다. 다양한 방식의 작품 활동으로 다양하게 두각을 나타낸 작가의 행보다운 결과다. 작품들은 가장 최근작부터 역순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중간 중간의 풍부한 작가 해설과 함께 작가의 매력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으로 인도한다. 작가의 장편 데뷔작 『귀신』이 화려한 필치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문제의식의 수습이나 이야기 서술의 측면에서 한계를 드러냈던 것에 비해, 이 소품집은 훨씬 소탈하고 솔직한 모습, 즉 작가 본연의 매력이 지녔던 호소력을 발휘한다.

수록된 작품들은 시사만평, 일러스트형 카툰, ‘하이라이트 엿보기’ 방식의 작품, 기승전결이 담긴 정식 단편 등 여러가지다. 어느 시기에는 하나만 하고 다른 시기에는 다른 것만 한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작업을 계속 오갔다는 점도 특기할 만 하다. 모든 작업 방식을 총괄하는 것은 특유의 섬세한 실사풍 이미지로, 칸간 연결의 역동성보다는 칸 안의 순간의 힘에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다. 필체에서도 연출방식에서도 고압축 고밀도를 전개하는데, 장편과 달리 짧은 소품에 있어서는 이런 것이 내용과도 썩 좋은 조화를 이루곤 한다. 다만 칸 자체에 주목하게 만드는 연출에서 작품의 역동성을 보충하기 위하여 보통 취하는 과장된 기하학적 구도와 포즈가 적은 편이다. 그 결과 실사풍에 가깝게 그릴수록 작품이 정적으로 느껴지는 효과가 발생, 액션 위주의 작품일수록 표현력이 부족해지는 약점이 있기는 하다.

카툰의 전통 위에 서있는 시사만평이나 일러스트형 카툰의 경우 작가의 이런 재능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순간의 이미지를 가공하되, 실사풍의 필치는 그것을 만화체로 약호화한 감성과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주는 사람 세상의 실제 모습 사이에 있는 영역에서 보여준다. 여타 카툰들이 극도의 희화화와 추상성을 통해서 날 것 그대로의 감수성에 노크를 한다면, 석정현식 카툰은 카툰 특유의 감성을 지니면서도 무언가를 바깥에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에 사람 세상에 대한 거울 역할을 좀 더 강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만화와 실사의 경계, 만화 작품 속 세계와 현실 세계의 경계, 단칸 카툰과 연속 칸 만화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려버리는 ‘Expression’이라는 수록작품의 시도 역시 재미있다.

보다 본격적인 극만화풍 단편의 경우는 효과가 덜 명확하다. 기승전결을 지닌 완결성 있는 단편이나 에피소드식 연재물의 경우 석정현이라는 작가가 그림장이 이전에 본디 이야기꾼의 기질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평범한 인간사에 대한 애정은 『순정만화』의 강풀이나 『비빔툰』의 홍승우에 다다를 정도의 따뜻함을 지니고 있어서 이야기의 좋은 뼈대가 되어준다. 아직은 무거운 사회적 또는 철학적 주제를 다룰 때보다 사람들의 온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더 재능이 빛을 발한다.

다만 아직 긴 이야기를 가지고 계속 상대방을 쥐었다 놓는 식의 이야기꾼은 아직 아닌, 순간 반짝이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끌어와서 단번에 매료시키는 식의 재담에 가깝다. 즉 소재의 힘, 이미지의 압도에 많은 에너지가 할애되어 있고, 그에 비해서 밀고 당기는 연출에는 아직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의 경우 다행히도 짧막한 소품들이기에 앞의 강점은 부각되고, 단점이 드러나기 전에 작품이 끝나서 곧바로 여운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작가의 프로 데뷔작이자 처음 주목을 모으게 한 『노르웨이의 숲』이라든지, 작가 자신의 해병대 전력과 만화가 생활을 바탕으로 그려낸 연재물 『코미커즈』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이런 경향이 한 단계 더 나아가 『귀신 외전』같은 작품에서는 아예 자체적 완결성보다는 전체 장편을 상정하고 그 중 한 대목을 뽑아낸 듯한 방식까지 구사하기에 이른다. 이 경우 작품 자체로서 읽기에는 지나치게 거두절미지만, 보다 큰 작품을 연상시키는 기대효과에서는 효과적인 것이다.

다양한 형식의 작품을 하나의 책으로 일관성 있게 엮어낸 것은 책 만듦새의 뛰어남 덕분이다. 작가의 작품 설명과 세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작품과 동떨어지지 않도록 적절하게 삽입한 것 등 한마디로 ‘잘 프로듀싱된’ 책이다. 다만 소품집이라는 컨셉 자체의 한계 때문에, 이미 작가에게 어떤 식으로든 주목하고 있거나 만화가 지망생으로서 다양한 창작시도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들 외에 새로운 독자를 개척하기에 적합한 책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장편작품들이 더 출간되면서, 작가의 매력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들이 항상 돌아오게 될 원천으로서 자리매김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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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석정현 소품집 Expression
석정현 지음/거북이북스

현재로 이어오는 향수 – 달빛구두 [기획회의 061015]

현재로 이어오는 향수 – 달빛구두

김낙호 (만화연구가)

인간의 기억력이란 오늘을 살아가기에 가장 편리하게 만들어져있기 마련이다. 좋은 기억은 좋게, 그리고 아프고 힘든 기억들도 나름대로 긍정적인 의미를 덧붙여서 끄집어낸다. 그런 자연스러운 과정이 작동하지 못하면 기억은 트라우마로 남아서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악귀로 남지만, 대체로는 이런 식으로 과거의 경험들이 현재 삶의 토양이 되어주곤 한다. 그 기억은 때로는 개인의 좁은 삶의 범위가 아닌 그 사람이 살았던 ‘세상’의 방식에 대한 기억이고, 그 사람의 세상을 만들어냈던 그 이전의 다른 사람들의 방식에 대한 나름의 기억이다. 과거에 대한 ‘향수’는 그런 세상에 한번쯤 돌아가 보고 싶은 마음이다. 다만 정말로 단순히 옛날로 퇴행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생각과 정신을 가진 상태에서 과거의 모습들을 보고 그 당시에는 충분히 느끼지 못하고 지나갔는데 나중에서야 아쉬움이 남았던 것들을 제대로 경험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렇기에 과거에 대한 향수는 복고이면서도 지극히 ‘현재’ 중심적이다.

『달빛구두』 (정연식 / 전3권 / 휴머니스트)는 이런 의미에서 과거 향수의 모범과도 같은 작품이다. 향수 정서를 내세운 많은 크고 작은 작품들이 그냥 과거의 모습을 제시하고 공감을 강요하며 끝나는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처음부터 여러 시대의 모습 사이에 흐르는 다르면서도 같은 느낌에 집중한다. 작품은 광고회사 기획자 이봄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갑작스런 모친상으로 고향에 내려가서 그간 소원했던 어릴 적 아저씨에게 과거 부모 세대의 사연을 듣는 식으로 전개된다. 크게 3개의 시대가 펼쳐지는데, 현재의 이봄이 살고 있는 세계, 6살 당시의 이봄이 살던 부모들의 80년대 세계, 그리고 그 부모들이 젊어 서로의 사랑과 사연을 만들어나가던 70년대 세계가 그것이다. 어머니가 돈을 벌기 위해 집에서 키우던 개를 잡아 팔아서 어린 가슴에 상처를 받았던 딸내미는 다시 자라나 같은 일로 또 그녀의 딸에 상처를 주고, 그때 어머니가 그 어머니를 이해 못했듯 지금 자라난 현대의 이봄도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가 좋아하지만 딱히 고백하지 못하는,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너무나 애잔해서 열병이 되는 그런 것도 아닌 애매하지만 현실적인 짝사랑과 자신에게 구애를 해온 또 다른 좋은 남자 사이에서의 선택이라는 모습 역시 지극히 현대적인 세상의 이봄의 모습이자, 한 세대 거슬러 올라가 어머니의 모습이기도 했다. 속절없이 속 좋지만 과거 운동권 경력 때문에 항상 일이 안 풀리시던 아버지, 억척스런 어머니, 동네에서 가장 친한 아저씨와의 80년대 골목길 생활의 기억은 70년대 그 부모 세대들이 젊었을 때 겪었던 70년대의 허름하지만 서로를 아껴주던 친구 생활과 비슷한 대구를 이루고 있다. 그렇기에, 어떤 시대이든지 간에 결국 사람 사는 세상의 냄새가 나며 현재 세상을 살고 있는 독자들에게까지 이어지는 힘을 지니는 것이다.

물론, 효과적인 과거 향수를 위해서 필요한 가장 중요한 재료는 바로 디테일이다. 어떤 좋은 의도도, 구체적인 기억들을 속속들이 새로 불러낼 수 있는 구체성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달빛구두』의 이야기적 매력은 새로움이 아니다. 모범생과 깡패의 우정이든, 그 사이에 삼각관계가 발생하는 것이든, 기본 인물구도나 큰 이야기의 뼈대는 지극히 고전적이고 익숙하다. 하지만 향수에 있어서는 새로운 요소보다는 익숙함을 얼마나 근본적으로 깊숙하게 자극해서 결국 그 속에서 독자들이 새로운 의미와 정서를 읽어내도록 만드는지가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대, 그 세상의 가장 핵심적인 무언가를 연상시켜주는 세부적 에피소드와 소재들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것, 바로 디테일이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수년간 스포츠신문에서 생활 개그만화 『또디』(이상하게도 많은 이들이 ‘또띠’라고 잘못 알고 있다)에서 잡다한 세속성을 묘사해 온 작가의 재능은 큰 장점이 된다. 세 가지 세상 모두, 각각의 현실감과 디테일로 대단히 효과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위 ‘전문소재 만화’들 마냥 전문 지식 자체를 오락거리로 삼는 식이 아니라, 서정적 감수성을 펼치기 위한 인간 세상의 모습이 제대로 압축되어 있다는 말이다.

현재의 세상은 바쁘고 도시적인 경쟁 관계, 하지만 그 속에서 나름대로 구식으로 또는 쿨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간으로, 주인공 이봄이 근무하는 광고 기획사의 구체적인 업무과정 속에서 트렌디하게 담겨있다. 80년대의 세상, 즉 6살 소녀가 바라본 부모님의 생활고와 친구같은 옆집 아저씨의 공간은 골목길이다. 가계가 기울면서 골목길의 끝 쪽까지 이사 가는 모습, 에나멜 구두에 꿈을 담고 아이들끼리 나름의 사회관계를 만들어가는 모습은 80년대의 삶을 효과적으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작품 초반의 명장면이자 현실보다는 낭만적 꿈에 가깝게 그려진 어머니의 바이올린 연주 일화 역시도, 아줌마스러운 억척 엄마가 사실 멋지고 세련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세밀한 울림을 준다. 봄이의 아버지 어머니와 동네 아저씨, 즉 작품의 진짜 주인공들이 젊은 시절을 보내온 70년대의 세상은 계급과 권력의 세상이고 억압에 짓눌린 저항의 시대다. 고등학교나 동네의 일상의 세밀함도 대단하지만, 특히 주인공들의 평범함이야말로 최고의 디테일을 자랑한다. 운동권에 뛰어든 주인공은 투철한 의지로 불타는 민주 투사가 아니며, 조폭에 뛰어든 다른 주인공은 출세를 위하여 아득바득 기회만 엿보는 대물이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극적인 이야기일수록 오히려 세밀한 디테일에 신경을 써야 등장인물들이 대단한 상징물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온라인 연재 당시 칸 간 연출에 다양한 실험을 넣지 않아서 다소 심심했던 부분은, 책 형태로 재편집하는 것에는 오히려 편리함으로 다가온 듯하다. 물론 시각적 세부묘사보다는 둥그런 그림체로 감성적인 형상들을 구사하는 것에 더 장점을 지니고 있는 작가의 스타일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칸 들이 큼지막하게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은 들지만, 거꾸로 보면 그런 느슨한 여백의 느낌이 좀 더 편한 독법이 가능했던 7-80년대의 만화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향수의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지난날에 대한 회고가 아니라, 지나간 것을 기억하며 그 속에서 자신의 현재를 반추하고 과거와 화해하는 것에 있다. 각자 삶의 경험 속 어딘가에 있는 그 달빛구두를 발견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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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달빛 구두 – 전3권 세트
정연식 지음/휴머니스트

그림을 읽는다는 것의 주관성 –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기획회의061001]

그림을 읽는다는 것의 주관성 –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

김낙호 (만화연구가)

예술을 감상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선 그 의미가 ‘아닌’ 것부터 하나씩 살펴보면서 시작해보도록 하자. 우선, 예술을 감상하는 행위와 가장 거리가 먼 것은 바로 감상에 대한 하나의 모범답안, 절대적인 해답을 요구하는 것이다. 대단히 부실하게 꾸며진 공공교육 미술 교과서에 대한 참고서의 요점 정리마냥 달달 외우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없다. 예술의 감상이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메시지와 감성과, 감상자가 이해하고 싶어 하는 메시지와 감성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이다.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던 사회적 맥락과 개인적 경험 속에서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어 한다. 그것을 그대로 탐정마냥 추리해내는 것은 미술사적 연구의 의미는 있지만, 감상이 아니다. 감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감상자 자신 역시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적 맥락과 개인적 경험 속을 작품 속에 투영하는 행위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간단한 사실은 작가의 작품이 권위의 무게를 뒤집어쓰면 쓸수록 점점 잊혀지곤 한다. 특히 모든 사회적 맥락을 잃어버리고 이제는 거의 권위만으로 사회적 입지를 겨우 유지하고 있는 고전 미술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지나치게 권위로 포장한 나머지 오히려 패러디의 대상이 된다면 모를까, 진정한 ‘감상’이 이루어지기 힘든 상황인 것이다.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김치샐러드 / 학고재)은 바로 감상이라는 행위에 관한 만화다. 원래 블로그의 인기 연재물로 큰 인기를 누렸는데, 미술 전문 출판사에서 책으로 엮여져 나온 것이다. 이 작품은 두 개의 손가락을 캐릭터화한 주인공들이 명화 한편을 놓고, 그 속에 담긴 여러 의미구조들에 대해서 분석해가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그 분석은 결코 교과서적이거나 작품의 무게에 눌린 일방성에 빠지지 않는다. 바로 감상자가 처해 있는 사회적 현실, 바로 인터넷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깊은 집단적 우울함을 지니고도 여하튼 희망도 찾아보는 평범한 현대인들의 세계에 비추어 그림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필리어』그림들은 경직된 현대인들이 ‘미친년’의 내적 평온과 자연성을 갈구하는 매력적인 회귀본능이며, 밀레이의 『눈먼 소녀』속에서 현재의 절망과 미래의 무지개에 대한 희망을 읽어낼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은 어떤 미술 교양 해설서보다 더 현대를 살고 있는 일반 독자들에게 와닿을 수 있으며, 설명에 의한 이해가 아니라 예술의 가장 일차적인 향유 방식인 ‘감상’의 기능을 복귀시킨다.

이 만화의 형식과 서술 방식 역시 이러한 목표를 위한 좋은 도구가 되어준다. 우선, 감상의 각 요소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명화를 조각내고 변형하며 말풍선을 달아가며 상황을 희화화하는 것에 전혀 거리낄 것이 없다. 그림과 사진, 각종 아이콘들을 간단히 포토샵으로 합성한 것에서 오는 아마추어적인 취향 역시 지극히 실용적이다. 하지만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에 걸맞게 쉽게 복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든다는 기법 자체보다는, 그것이 바로 오늘날 인터넷 상의 여러 문화 현상들을 작품 감상의 과정에 깊숙이 개입시키는 것에 일조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바로 이런 표현기법들이, 오늘날 인터넷 게시판과 커뮤니티들의 가볍고도 실용적인 시각문화와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특히 감상자가 처한 사회적 맥락을 설명하기 위해서 실제로 인터넷 게시판이나 소위 ‘짤방’ 이미지를 직접 인용하여 엮어 넣는 자유로움 역시 이런 연장선상에 있다. 그리고 고정된 시각 이미지의 연속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만화 특유의 속성 역시 바로 이런 보여주며 말하는 목표에 가장 적합하게 작용한다. 마치 명화를 자신의 방식으로 감상해내는 내용처럼, 이 작품 역시 독자들에게 자신의 사회적 맥락, 문화 속에서 읽혀지기 쉽도록 친근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소통으로서의 미술, 미술 감상하기의 자세가 과연 작가가 완전히 의도한 것인가 아니면 기술적 한계의 결과인가 의심을 가질만할 법도 하지만, 작가가 자신의 블로그에서 가끔 발표하는 미술작업들(특히 재기발랄함이 살아있는 ‘녹차소년’은 압권이다)은 그런 의심을 말끔하게 제거해주고도 남는다.

하지만 인터넷 상의 만화와 책으로 나온 만화 사이에는 다소의 격차가 있기 마련이다. 비단 길다란 횡스크롤을 책의 형태로 잘라 붙임으로서 나오는 연출 상의 변화 뿐만 아니라, 인터넷의 세계에서 인터넷을 이용하는 평범한 누리꾼들에게 공감을 자아내는 발표형식과 두꺼운 미술서적을 사서 읽고 싶은 사람들 사이의 격차라는 것이 있다. 특히 출판사가 원래 ‘무거운’ 미술 교재 전문 출판사라는 점은 책의 품질에는 플러스, 책의 수용 방식에 있어서는 마이너스로 작용하는 양날의 칼이다.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은 미술 전문 서적이 아니라, 현대 문화 비평 에세이에 가깝다. 인터넷 상에서는 그런 감상을 자아낼 수 있는 작품이었으나, 미술 서적의 형식으로 나온 책 버전은 자동적으로 다른 맥락을 요구하게 되는 셈이다. 작가가 재구성한 듯 한 책의 흐름 역시 그런 점을 어느 정도 의식하여, 우울함의 바다에 빠지는 일화부터 시작하여 후반에는 보다 내밀한 고백과 결국 불안한 독백과 암전으로 끝나는 ‘닫힌 구조’를 취한다. 책으로서는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이지만, 작품의 가장 큰 매력 가운데 하나이자 이 작품이 공감을 자아낼 수 있었던 기반인 열린 감상이라는 측면을 쇠퇴시킨 셈이다. 이 작품의 원래 인터넷 팬들은 한 명의 작가에 의해서 창조된 명화에 대한 한명의 미술전문가에 의한 구조적 해석을 바란 것이 아니라, 감상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즐거움을 원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명화 해설이 아니라 현대 인터넷 문화에 대한 직접적인 통찰이 돋보이는 ‘외전’격 작품이었던 ‘의기양양 조선 고양이’ 라든지, ‘21세기 풍속화첩’이 이번 책에서 제외된 것이 적잖이 섭섭하다. 책의 구성적 일관성 측면에서는 분명히 제외되는 것이 타당하지만, 작품의 진정한 매력에 있어서는 가장 노른자위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도시문명과 인터넷 속에서 소통하며 살아가는 현대 문화에 대한 감성적이고 날카로운 통찰이, 단순히 약간 대중적인 그림 해설서처럼 보이기 쉽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즉 이 작품의 출판과 홍보의 컨셉 조절에 있어서 근본적인 발상의 재정비가 필요한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대적 감수성에 대한 탁월한 통찰, 자신의 감성에 대한 솔직함,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만화적 의지, 이 모든 것에 인터넷 세대의 연결 지향성이 더해지자 명화의 감상이라는 행위는 이 작품 속에서 새로운 차원 – 어쩌면 가장 본질적인 원래의 차원 – 으로 이동했다. 뭉크도 쿠르베도 브뤼겔도, 결국 우리 자신을 읽어내기 위한 도구다. 우울해(海)를 떠도는 이상한 손가락들의 그림 읽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예술의 감상이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약간 다시 생각할 자극을 주는 작품이라는 것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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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
김치샐러드 지음/학고재

이 만화를 노려라! 영화가 탐낼 만한 한국 만화 추천작 [씨네21/570호]

!@#… 지난 씨네21 570호(그러니까 지지난주)의 ‘한국만화의 영화화’ 특집에서 한 꼭지로 실린 글.

이 만화를 노려라!
<돌아온 자청비> <바람의 나라> <폐쇄자> 등 영화가 탐낼 만한 한국 만화 추천작

김낙호(만화연구가)

영화는 만화를 사랑한다. 영화가 오래전부터 스토리보드라는 공정을 통해서 만화언어를 제작과정에 활용한 역사를 고려하자면, 90년대 중반 이래의 만화 원작 영화제작 붐이 오히려 지나치게 늦었다고 느껴질 정도다. 물론 다른 매체양식을 옮겨오는 과정은 생각보다 수월하지 않기에 <비천무>(김혜린)의 경우처럼 어설픈 캐릭터 해석과 낮은 영화적 완성도로 오히려 원작 팬들의 원성만 산 경우도 있다. 하지만 원작의 몇 가지 핵심 정서를 효과적으로 영화만의 색으로 녹여낸 <비트>(허영만·박하)라든지, 원작의 설정과 이야기 뼈대를 전혀 새로운 주제와 결론으로 이끌어낸 <올드보이>(쓰지야 가론·미네기시 노부아키) 같은 매력적인 성공 사례들이 있다. 나아가 최근의 <신 시티>(프랭크 밀러)처럼 아예 만화의 시각적 표현 하나하나를 그대로 이식하는 것만으로도 영화예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디서 어떻게 영화로 이식하면 좋은 도전이 되어줄 만한 원작 만화를 찾아볼 수 있을까. 해답은 간단하다. “드넓은 만화의 바다 그 어디에나 있다.” 이미 영화화 기획이 진행 중인 <위대한 캣츠비>나 <로맨스킬러>(강도하), <26년>(강풀) 등 인기 만화들 말고도 시기나 장르 가릴 것 없이 고르게 한번 후보군을 모아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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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과 표현과 이야기 -『귀신』[기획회의060901]

설정과 표현과 이야기 -『귀신』

김낙호 (만화연구가)

99년부터 한 3-4년간, 한국에는 유럽만화 출간 붐이 일어났던 적이 있다. 홍대 앞 미술전문서점이나 미술평론가들의 소개글에서나 볼 수 있었던 『니코폴』이나 『잉칼』, 『쌍브르』같은 예술적 성취도가 높이 평가받는 작품들이 썩 괜찮은 번역과 출판 품질로 한국 독자들 앞에 선보인 것이다. 비록 그쪽 작품들의 이야기 표현 방식이나 상상력의 방향 등이 아시아 만화권의 화법에 익숙한 국내 독자들에게 큰 호소력을 지니지 못했기에 붐은 저조한 판매 속에서 이내 사라졌지만, 적어도 그 작품들이 주었던 시각적 임팩트만큼은 강렬하게 자리매김했다. 흑백이 아닌 컬러, 그것도 익숙한 셀 애니메이션풍이 아닌 다양한 기법들의 향연은 만화 속 그림 자체의 쾌감을 일깨워주는 힘이 있었다. 주류 흑백 장르만화라는 출판형태에 얽매이지 않는 출판형태가 곳곳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내, 한국 작품 중에도 그런 식의 강력한 그림실력과 표현력을 온전히 발휘하도록 허용 받는 형태의 책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때맞춰 컴퓨터 모니터와 컬러링에 익숙한 젊은 작가 세대가 데뷔를 해주었다. 한국에서 만화라는 분야는 한층 더 자신의 운신의 폭을 넓힌 것이다.

그 중에는, 만화 특유의 과장을 절제하고 사진에 가까운 수채화풍 그림체로 높은 인지도를 쌓아올린 작가 석정현이 있다. 그가 작업해온 일러스트들은 대중적 인기에서 부족함이 없었고, 가끔 선보이는 단편들은 감동 에세이 스타일이든 짧은 개그물이든 감각적인 위트를 갖추고 있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작가의 본격적인 극만화가 완성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폐간된 ‘영점프’ 등 여러 지면에서 작가 자신이 오래 동안 구상하고 있던 근미래 군대경찰 이야기의 설정은 그런 기대를 더욱 부풀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작품, 『귀신』(석정현 / 길찾기)이 출간되었다.

『귀신』은 평화가 너무 오래 지속되어서 군대가 할 일이 없어진 한반도 서울시의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의문의 테러 사건이 일어나고, 사태를 해결하려는 군인들의 활약과 그 이면에 있는 군대와 미디어 등이 뒤얽힌 커다란 음모가 복잡하게 진행된다는 것이 자세한 내용 누설을 방지한 상태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주요 줄거리다. 사회와 미디어, 생체병기로 비유되는 비인간성, 평화의 의미 등에 대한 여러 화두들이 그 속에서 던져진다.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미 예상 가능했듯 시각적 쾌감의 즐거움이다. 섬세한 필치의 고밀도 그림들은 지나친 부담감 없이 페이지 속에서 멋진 사건 시퀀스들을 연출해낸다. 화려하면서도 현실적인 액션 연출, 역동적인 포즈, 많은 구상을 투여한 흔적이 엿보이는 각종 기계와 소품 디자인 등은 이 작가에게서 기대했던 바를 어김없이 충족시켜준다. 세계관에 대한 설정 역시 치밀하여 작품 속에 그려지는 제도와 사회가 정말 “그런 상황이라면 분명히 있을 법한” 곳으로 느껴지도록 만드는데, 근미래 SF로서 중요한 미덕을 충족시킨 것이다. 또한 이 장르 특유의 현실적인 문제제기와 매력은 이 작품을 만화로서 읽고 소장할 정도의 명분은 충분히 채워주고도 남는다.

하지만 아직, 그 이상의 점수를 주기는 망설여지기도 하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좋은 문제의식과 섬세한 세계관의 반대편에는, 그것을 풀어내는 주제와 이야기 전개의 미숙한 부분들이 그림자를 드리우기 때문이다. 우선 가장 큰 차원에서는, 좋은 문제의식 방향 설정을 피상적 고민으로 승화시키는 선에서 머물렀다는 것이다. 미디어의 대중 여론 조작이라든지 평화의 진정한 의미란, 현실 속에서는 다양하고 미묘한 모순들로 가득하다. 평화를 바라는데 그것이 오히려 평화를 옭아맨다든지, 더한 미디어 자극을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자극에 둔감하게 만든다든지, 사회속의 누구나 결국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이며, 보호자이자 동시에 감시대상이라는 점 등 복잡하기에 더욱 중요한 지점들이 많다. 하지만 『귀신』은 아쉽게도 너무나 쉽고 빠르게 주연들과 조연들, 하나의 시스템과 다른 시스템 사이에 선악의 선을 그어버리고 후반으로 갈수록 헐리우드식 주류 액션 활극의 방향으로 달려 나간다. 실제 현실의 중층적 모순을 다루기 좋은 주제와 세계관을 가지고, 어째서 이 정도까지로 타협했는지 아쉬움이 남을 따름이다.

주제라는 큰 차원을 떠나서, 사람들이 펼치는 이야기로서의 재미 역시 아직 미완성이다. 여러 매력적인 설정을 지닌 주요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그 중 누구에게도 공감할 여지가 충분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독자는 등장인물의 행동 동기와 패턴에 어떤 식으로든 공감해야 작품을 행위자들의 이야기로서 즐길 수 있다. 그렇기에 작가는 인물들의 감정과 행동에 필연성을 부여하고 극의 완급을 끌고 나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귀신』에 등장하는 여러 매력적인 인물들은 그런 부분이 피상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오히려 처음 시퀀스의 이름 없는 희생자로 잠깐 출연한 젊은 연인들이 훨씬 효과적으로 이야기 속에서 인물구축이 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주인공이 소위 ‘귀신’이 된 이유에 대해서 궁금증이 일어나지 않으며, 부대원들이 재등장할 때 통쾌한 반전의 기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다시금 인물들의 행위를 통해서 표현되어야 할 주제의식의 효과적인 발현에도 방해가 된다. 예를 들어 미디어를 통해서 주인공들에게 닥쳤던 비극은 공감 가능한 절망이 아닌 ‘설정’으로서만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명실상부한 2005년도 최고의 활극 모험 영화 가운데 하나인 『킹콩』에서 피터잭슨이 3시간 영화 중 무려 초반의 1시간여를 감정이입 가능한 캐릭터의 구축에 할애했던 전례를 참조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전체적으로 『귀신』은 탄탄한 시각표현과 상상력으로 제작되었으나 결정적인 주제 표현과 캐릭터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에 실패한 몇몇 대형 블록버스터 장르 영화들과 비슷한 장단점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은 단위 시퀀스 내에서 감수성 있는 전개를 보여주는 것 까지는 당초 작가에게 기대한 만큼의 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주제와 설정의 무게가 부담을 주었는지, 정작 필연성 있는 캐릭터들의 일관된 이야기로 성립시키는 것에 있어서는 아직 다듬을 여지가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단편과 일러스트에서 뛰어난 감수성을 인정받은 신인이, 중/장편 극만화 작품 첫 데뷔작에서 나름의 희망을 던져주며 동시에 일종의 통과세를 지불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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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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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만화의 선택지 – 『삼인삼색 미학 오디세이』 [기획회의060801]

교양만화가 나아갈 세 갈래 선택지 – 『삼인삼색 미학 오디세이』

김낙호 (만화연구가)

한국에서 만화는 ‘공부를 방해하는 저질 오락거리’로 취급받아온 억울한 과거가 뼈에 사무쳐서 그런지, 교육과 학습에 사실은 도움이 많이 된다는 사실을 상당히 강조하기 위해서 아예 별도의 장르를 발달시켰다. 그것이 바로 학습만화다. 만화를 학습적 목표를 위해서 활용하는 사례라면 세계 어디에나 적지 않게 있지만, 아예 하나의 개별 장르 취급을 하고 유통 측면에서나 독서 문화 측면에서나 독립적 위치를 부여해주는 것은 아직 한국과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들다. 그 와중에서 (필자를 포함) 종종 평론가들이 강변하는 논리가 바로 학습만화가 얼마나 쉽고 재미있게 지식을 전수하는지 알아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만화라는 매체가 지니는 장점과, 장르로서의 학습 교양만화는 반드시 연동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시각적으로 보여주면서 말로 설명하는 것은 강력한 표현력을 지니고, 약호화된 도상이 주는 이입의 폭은 넓다. 하지만 이렇게 접근성이 올라간다고 해서, 어려운 내용이 저절로 쉬워지지는 않는다. 애초에 이쪽 계열 만화의 가장 두드러지는 표현적 장점은 키워드와 핵심 개념들의 효과적인 압축인데, 그 결과 이미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절묘한 요점정리지만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한층 난해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그것이 바로 ‘어려운’ 학습 교양 만화의 딜레마다. 이런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서 많은 학습교양만화들은 애초부터 어려운 지식보다는 ‘쉬운’ 부분들만 골라서 다루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런 우회로가 없다면 어떻게 할까. 『아이콘 총서』시리즈 같이 난해한 지식을 더욱 난해하게 요약한 책이 탄생한다.

그렇다면, 미학이라는 괘 굵직한 인문학적 토양을 주제로 다루고자 한다면 어떨까. 게다가 아예 이미 널리 대학생 이상의 교양서로 자리 잡고 있는 그 분야의 명실상부한 ‘교과서’를 원작으로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한다.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출판 기획자들이 내놓은 하나의 대답이 바로 『삼인삼색 미학 오디세이』(진중권 원작 / 현태준, 이우일, 김태권 만화 / 휴머니스트 / 전3권)에 들어있다. 이 작품의 원작이 되는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는 미학의 고대부터 탈근대까지 인간이 문화예술을 바라보는 인식틀의 발전과정을 친근한, 하지만 결코 만만하지 않는 방식으로 서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어려운 개념을 사람들이 읽고 이해할만하게 설명하려 노력한 책을, 다시금 한 단계 더욱 이해할만하게 하려고 만화의 힘을 빌리고자 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역시 삼인삼색이라는 작가 시스템의 특이함이다. 원시와 근대, 모더니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을 각각 그 해당분야에 가장 잘 어울릴만한 작가들에게 나눠준 후, 비교적 자유롭게 개성을 발휘하도록 해준 것이다. 그 결과 원시와 근대를 다루는 1권은 키치적 감수성으로 장난감과 잡다한 취향에 확고한 위치를 다진 바 있는 현태준이 맡았다. 평소 하던 방식 그대로, 초지일관의 유치함으로 오히려 하나의 경지에 도달하는 말장난, 그리고 가식에 대한 정면도전이 돋보인다. 원시와 근대 미학에 대해서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한다기보다는, 그냥 그 시대의 ‘디오니소스적’인 정서를 스스로 펼쳐 보인 느낌에 가깝다. 이성적 세계관에 기반한 모더니즘의 시대를 다룬 2권의 경우, 체계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전달하는 것이 많아질 수 밖에 없는 영역이다. 그렇기에 다양한 ‘설명적인’ 학습만화나 일러스트 분야에서 효과적으로 활약한 바 있는 이우일이 임무를 맡았다. 한쪽에서는 엽기적 낙서체 개그만화로 유명해졌으나, 『노빈손』 시리즈의 삽화 작업 등 오히려 스트레이트한 분야에서 안정적 작업을 해온 경력 그대로 2권은 착실히 원작의 명제들을 그대로 읊어낸다. 전개 형식 역시 설명하는 박사와 그것을 듣는 두 꼬마라는 전통적 형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을 논하는 3권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의 탈경계성과 복잡성을 효과적으로 만화화해 줄 작가를 필요로 하며, 게다가 가장 어려운 개념들이 난무하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아예 미학 전공자인데다가, ‘어려운’ 학습교양만화 경력이 있는 김태권에게 주어졌다. 3권은 아예 설명보다는 극의 형식을 지니는데, 만화가가 각종 미학개념들의 바다에 뛰어들어 모험을 겪는 과정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틀 위에서 펼쳐진다.

작가가 서로 다른 실질적으로 3개의 작품을 하나의 세트로 묶어낸 것이니 만큼, 당연히 각각의 권은 따로 장단점을 지니고 있다. 1권의 경우 친근하다 못해 그 비속함에 공감하고 킬킬거릴 수 있는 점이 장점이라면, 단점은 몰입해가며 읽기 어려운 산만함이다. 생활 속의 일상적 미감에 대한 사진 정리 등 원작 이상의 재해석이 독서에 도움을 주지만, 기본적으로 매니악한 느낌이 강해서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 남아있다. 표준적인 학습만화의 틀을 따라가고 있는 2권의 경우, 장점이라면 그 표준성 덕분에 학습적 읽기가 가장 수월하며 원작의 내용을 직접 전달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이왕 만화로 읽는 맛이 특별히 더한 것도 뺀 것도 없이 심심하다는 것이 단점이다. 그저 무난하게 읽기에는 작가의 재능이 아깝기도 하다. 가장 만화가의 재해석이 강력하게 개입된 3권의 경우는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소설『소피의 세계』가 철학과 성장소설을 결합했듯, 미학의 세계를 환상문학의 양식에 넣어 만화로 소화해내는 재기가 돋보인다. 하지만 단점이라면, 읽고 나면 오히려 더욱 개념들에 대해서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하기야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그런 성향이 있지만 말이다). 즉 개념들을 간명하게 요약 설명해준다기보다는 다양한 복잡한 현상과 모순들을 독자들에게 접하게 해주는 쪽으로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지적 자극으로 인한 교양에는 도움이 되지만 학습에는 그다지 도움이 안 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의 세 권은 모두 다른 접근, 따라서 다른 종류의 독서경험을 준다. 단적으로, 1권을 읽고 마음에 들어서 전3권 세트를 사는 구매 방식은 그다지 권장하고 싶지 않다. 다양한 접근을 경험하고 싶은 독자에게는 득이 되지만, 한 가지 방식의 일관된 설명을 원하는 독자들은 그냥 원작을 다시 한 번 읽는 쪽이 나을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어떤 권이든 나름의 지적 재미를 보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니 만큼 책장 한 켠을 차지하는 것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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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각각의 권이 모두 컨셉이 다르다는 점은 마케팅 면에서 득보다 실이 크다고 본다. 하나의 통일된 작품으로서 만족을 주기 힘들다면 누가 세트로 사겠는가. 그리고 본문에서는 비교적 점잖게 말했지만, 학습만화 분야를 공략하면서 정작 학습성이 좋지 않다는 것 역시 큰 마이너스. 시장의 반응은 과연 어느 정도까지 나와줄지, 자못 궁금할(걱정될)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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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 이곳의 만화들 [한겨레21 617호 별책부록]

!@#… 한겨레 617호 별책부록 ‘여름사냥’에 게재된 글. 세대론 꼭지 하나와, 작품 추천 꼭지 하나. 쑥스럽게, 제작 크레딧에 무려 직함이 ‘기획’으로 나감. capcold가 기여한 바는 ‘작가 추천‘과 ‘컨셉 설정 협력‘이었지, 작가 작품 관리와 프로젝트 관철, 완수 등 기획 작업의 진짜 앙꼬는 어디까지나 구둘레 담당기자님(이전에 추리소설 별책부록 ‘비밀의 백화점’도 기획하신 바 있음). 여튼 글 자체는 2000년대 만화사를 통째로 쓰려는 것이 아니라, 본문에 언급한 그대로 ‘주목할 만한 경향들’을 묶어내는 서문 정도에 불과하다. 작품 추천글의 경우 종이만화와 온라인 만화를 고르게 배분했는데, 바로 그것이 만화 읽기의 현재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도서 전문 코너에서 리뷰를 써야할 때는 책으로 나온 것 만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단행본 이외의 만화들을 한껏 즐길 수 있는 현재의 상황을 잘 반영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으니까.

!@#… 별책부록 책 자체에 대해서는… 여튼 다행히도 전체적 느낌은 꽤 한겨레틱하게 완성. 모음집이 보통 그렇듯 작품간 편차와 아쉬운 작품 몇 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중 이번 묶음의 개인적 베스트는 ‘납량특집'(장경섭). 여튼 다음에도 또 그 다음에도, 이런 기획이 종종 관철되어 시사주간지가 자신들의 색이 반영된 만화책 부록을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온라인 서비스를 안함으로써 부록, 나아가 잠재적 레어아이템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하는 건 좋지만… 나중에 어떻게 back-order라도 할 수 있게 기회를 주는 센스가 필요하기는 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원래 책은 예쁜 편집, 적절한 삽화가 삽입되어 있음. 궁금하면 알아서들 구하시길. 여튼 본문은 쫌 기니까 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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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이렇게 된 김에 끝까지 읽기(클릭)

공감에 그치지 않는 사색 – 『사랑해』[기획회의 060615]

공감에 그치지 않는 사색 – 『사랑해』

김낙호(만화연구가)

2000년대 초, 짧은 감상주의적 에피소드로 구성되며, 둥글둥글한 그림체에 파스텔톤 색채를 입힌 만화 모음집이 크게 유행한 바 있다. 소위 ‘에세이툰’이라는 이름 하에 특히 인터넷을 중심으로 연재하고 출판물로 출간하여 선물용으로 판매되었는데, 그 중에는 큰 히트를 기록한 것도 더러 있다. 『파페포포 메모리즈』 같은 출판 시장의 밀리언셀러, 『광수생각』같이 일간지 지면이라는 매체력을 바탕으로 문화적 영향력을 떨친 것, 등등 여러 가지가 이에 포함된다. 하지만 유행을 타는 사조가 더러 그렇듯, 이 경우 역시 인기나 대중적 판매량과는 별개로 어설픈 함량 미달의 작품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차피 주관적인 감상주의를 기치로 내거는 에세이툰에 있어서 함량미달이라는 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바로, 그럴듯한 감상적 어휘로 적당히 조합한 멘트 한마디를 말미에 던져놓고는 정서적 공감을 구할 뿐이라는 점이다. 그런 경우는 예쁜 구경거리로서는 의미 있을지 몰라도, 정작 ‘나’라는 존재에게 어떤 실제 영향도 주지 못한다. 그것은 대화와 생각을 전제하지 않는, 공감만으로 이루어진 폐쇄성의 단점이다.

그런데 그 무렵, 특이한 일이 한 가지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포츠조선에서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며 전문 도박 사기꾼들의 인생역정을 선 굵은 드라마로 펼쳐내던 중견 작가 콤비가, 그것도 바로 그 연재 지면에서 젊은 인터넷 만화 신인들의 아성이 높은 분야인 에세이툰의 말랑말랑한 감수성에 도전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런데, 막상 작품이 연재를 시작하자 녹록치 않은 것이다. 독자에게 성찰을 불러일으키며 품격 있게 돋보이는 만화 작품이 탄생해버린 것이다. 이거 대박이다, 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했으나… 어째서인지 단행본은 에세이툰 장르 특유의 예쁜 제책과 거리가 먼, 전형적인 대본소/대여점 공급 위주인 성인만화 단행본의 모습으로 출시되어서 그저 그런 정도의 반향 밖에 일으키지 못했다.

바로 그 작품, 『사랑해』(허영만 그림, 김세영 글 / 김영사 / 2권 출시중) 가 본격적으로 벼르고 재출간되었다. 재출간 버전은 이전 출시본이 지녔던 여러 약점들을 보완해가면서, 12권 세트 완결을 목표로 출시를 시작했다. 이 작품은 에세이툰의 거품 유행이 다소나마 진정된 지금 다시 볼 수록, 더욱 진가가 드러난다. 원래 김세영 글 허영만 그림의 만화 콤비는 『오!한강』, 『카멜레온의 시』,『타짜』등 워낙 굵직하고 진지한 이야기들을 탄생시킨 것으로 유명한데, 그 작품들의 바탕에 깔려있던 것은 단지 남성적 에너지로 가득한 출세 지향 활극 모험이 아닌 인간사에 대한 통찰이었다. 사람 산다는 것이란 뭐 다 그렇듯이, 적당히 비열하고 적당히 남 속이고, 또 속으면서 하나씩 자신의 길로 가는 것. 그 와중에서 어떤 주인공은 허탈하게 파멸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길을 발견하여 득도하다시피 하기도 한다. 만약 어깨에 힘을 빼고, 굵고 격정적인 드라마의 옷도 좀 벗고, 그냥 편안하게 사람 사는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어떨까. 뭐 너무 이것저것 이야기하기보다, 아예 사람들 간 관계 가운데 가장 강력한 연계고리인 ‘사랑’에 대해서 논해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렇기에 풋풋한 젊은이들의 호기심어린 감상주의로 절여지기 일쑤였던 여타 에세이툰과는 달리, 『사랑해』는 시작부터 결혼과 아이 낳는 것부터 들어간다. 내용으로 치자면, 이 작품은 글 읽기 좋아하는 30대중반 만화스토리 작가(김세영 작가가 자신을 모델로 삼았음직하다)와 20세 여자의 가족 꾸리기가 전부다. 그 중에서도 사랑이라는 하나의 현상에 대한 다양한 감성적 느낌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계속 풀어나간다. 굉장히 리얼리즘적으로 생활의 찌든 때를 묘사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해』는 구체적인 주인공들의 구체적인 생활이 있다. 그렇기에 실제로 살아가는 상황 속에서, 잠시 사랑에 대한 생각을 해볼 수 있도록 하는 묘미가 있다. 작가의 폭넓은 인문학적 소양에서 건져내는 다양한 격언들의 향연조차도, 결코 작품의 주역으로 기능하기 보다는 이들의 그러한 구체적인 삶의 장면을 해석해내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될 뿐이다. 즉 이 작품에서 감상적인 문구들은 감성에 대한 동조를 강요하기 보다는, 독자 역시 자신들의 구체적인 생활을 살아나가는 속에서 그러한 성찰을 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사색의 과정을 만들어낸다.

이 작품이 사색을 자극하는 또 다른 요소는 바로 대화다. 사랑을 다룬다고 해서, 그냥 눈빛만 보고 감성을 공유하고는 세상을 찬양하는 공식을 밟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감상적인 독백보다도, 문답과 설명의 방식으로 자신들이 처한 지금 그 상황 속에서 사랑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기를 즐긴다. 자신들의 현재 사랑의 모습에 자아도취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라는 소통을 통해서 서로의 사고과정에 개입하여 사랑을 만들어나가는 매력을 지니는 것이다. 두 주인공 및 가족의 관계가 보수적 가정 구도의 틀에 들어있기에 지니는 약점도, 대화라는 소통기제가 중요하게 부각되는 덕분에 대체적으로 무해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시각 연출 역시 간략한 그림체를 바탕으로 여유로운 호흡을 부여한다. 능숙한 칸 흐름이 주는 편안한 독서경험은, 다른 만화들에 비해서 다소 글이 많은 편인 이 작품을 읽어나감에 있어서 큰 득이 된다. 주인공들이 이끌어나가는 일반적인 극만화의 형식을 기틀로 삼으면서도 종종 다큐멘터리적 느낌으로 명언의 주인공이나 사색적 도해를 자연스럽게 엮어넣는 점 역시 대단히 매력적이다. 다만 이번 재출간 버전에서 아쉬운 점이라면, 원래 흑백으로 연재된 작품 위에 파스텔톤의 컴퓨터 컬러를 입혔다는 것이다. 주류 셀애니메이션풍의 인터넷만화라면 모를까, 열린 선이 많은 허영만 특유의 그림체와는 그다지 조화를 이루지 않는 화사첨족이다. 더욱이 내용의 여유로움을 시각적 여백에서도 뒷받침해주는 그 조화의 효과가 파괴된다. 물론 “선물하고 싶은 책 1위” 등의 이야기가 보도 자료에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 선물 아이템 시장을 노리고자 트렌드를 따라가려는 시도를 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만화 작품의 매력 자체를 감소시키는 처사는 좋은 선택이라고 보기 힘들다. 사실 그 것 말고도, 애인 선물용으로 하기에는 전 12권 완결 예정이라는 방대한 볼륨 자체가 지나치게 푸짐하다는 단점을 어떻게 극복할지도 추후 과제지만 말이다.

『사랑해』는 단절적이고 마취적인 편안함과 감상주의를 강요하는 것이 아닌, 실제 생활 속의 사색이 주는 즐거움을 대화로 같이 나누자고 제안하는 작품이다. 생각에 싹을 틔워주는 이 작품이 다시 독자들과 만나게 되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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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광고] 한겨레21 617호에 만화특집 별책부록 들어있습니다.

!@#… 한겨레21 (지금 가판대에서 판매중인) 이번 617호에 만화 특집 별책부록이 있습니다. ‘여름’이라는 테마로 실력있는 작가들이 진지하고 재미있고 여하튼 좋은 만화를 만들어 묶은 책이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예전 한겨레21의 추리소설 특집 별책부록을 기억하시는 분들이라면, 어느 정도의 품질일지 예상하실 수 있을 겁니다. 단 이번 별책부록에 한가지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면, capcold 라는 인간이 참여했다는 것… -_-; (먼산)

!@#… 이번주 지나고 절판되기 전에 너도나도 사봅시다. 나중에는 레어아이템입니다.

태왕사신기 vs 바람의 나라, 현재 스코어 1:0

!@#… 법원, “‘태왕사신기’는 ‘바람의 나라’ 표절작이 아니다” 판결. 도대체 만화판 쪽은 변호사를 어떻게 고르길래 뭐 하나 이겨보는 일이 없는지 모르겠다.

!@#… 물론 시놉시스 단계는 실질적 침해를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야 이미 처음부터 알려진 법적 구멍 이었으니 사실 당장 바뀔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결국 ‘역사‘와 ‘역사를 바탕으로 한 창작‘ 사이를 구분 못하는 전형적인 “보통 이하의 문화적 식견을 가진” 판사가 내린 어찌보면 예상 가능했던 판단. 바람의 나라가 ‘역사’라면, 여러명의 눈동자도 ‘역사’고, ‘모레시계’도 ‘역사’겠지. 여하튼 항소심 들어가고, 대법원 가고 앞으로 더욱 갈 길이 멀 것이다. 김진 씨가 중도에 지쳐 포기하지 않으시길 빌 뿐.

(7.4. 약간 추가)

!@#… 게다가 이번 판결은 애시당초 중재 시도에서 나왔던 결론 그대로일 뿐. 법적 판단으로 보자면 심지어 그다지 잘못된 것도 아니다. 완성된 만화와 드라마 시놉시스를 법적 차원에서 비교할 수 없다는 것 자체는 이미 그 당시에 판단이 내려진지 오래니까. 다만 이해가 안가는 것은, 어째서 원고측이 단순히 유사성에 의한 저작인격권 침해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었는지 하는 것. KBS와의 드라마화 진행 무산이라든지 하는 등의 “시놉시스 발표로 인하여 입은 물질적 피해”를 강조해서, 유사한 내용의(내용 유사성에 대해서는 법원도 인정하였고) 시놉시스 발표가 지니는 사건 정황의 의도성을 부각시키고, 바람의 나라 드라마화 무산 등 구체적인 피해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가서 손해배상의 측면에서 접근해야 할텐데.

‘표절’은 법적 개념도, 판단기준도 아닌 그냥 도덕적 잣대일 뿐이다. 법적으로 정해지는 것은 저작권 침해를 “했느냐” 아니면 “했다고 판단할 수 없느냐”일 뿐. 물론 무죄추정의 원칙 때문에,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은 ‘저작권 침해를 하지 않았다’ 라고 민간 뉴스 보도에서 해석되어 뿌려진다고 할지라도 어쩔 수 없고. 표절 여부를 증명하는 것과 법정에서 저작권 침해를 가리는 것은 서로 연동되어 있기는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별개의 사안이다.

!@#… 만화계와 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리니지 저작권 사태가 어떻게 극적 합의를 이끌어냈는지 잘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당시 사안에서 신 작가가 법적으로 명백히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법적인 분쟁이 지속되는 것이 엔씨소프트측에 있어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 상당한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합의를 본 것이다. 표절이라고 베꼈다고 백번 천번 사실을 증명해봐야 소용없다 (아니 사실 증명할 것은 이미 오래전에 다 증명하지 않았던가). 피해를 끼쳐줘야 상대는 협상 테이블에 앉을 것이다. 김종학 프로덕션이 도저히 협상에 응하지 않고는 버텨낼 수 없을 정도로 흔들어라. 태왕사신기가 상정하는 타겟층에 고추가루를 뿌려라. 퓨전사극에 재미 붙인 젊은 층 뿐만 아니라, 역사사극을 좋아하는 아저씨 세대들까지 포섭하라. 한류 붐(…)을 노리고 있는 것인 만큼, 일본어, 중국어로 번역해서 하염없이 뿌리는 것도 고려해봄직하다. 이 모든 것에 있어서, 김종학 프로덕션의 (아니 송지나 작가의) 부도덕함을 지적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태왕표절기는 물론 김종학표절덕션에서 만들어내는 모든 드라마들의 시청율이 안나와서 쫄딱 망할 전망이 명백해지도록 하라.

!@#… 여하튼, 현재 스코어는 태왕표절기 1:0 바람의 나라. 전통의 강호가 심판의 유리한 오심 속에 오프사이드를 무시하고 핸드링으로 한 골 넣었다. 하지만 아직 전반전도 채 안 끝난 상태인 만큼, 조속히 추스려서 역전의 물꼬를 열어내기를 희망한다.

PS. 그러고보니 capcold 네이버 분점에 올라왔던 고리짝 이 사안 관련글에, 왠 사람이 악플을 남기고 도망갔다(여기 백업한 글의 원본). 알바가 의심되나, 세상에는 대단히 강한 자의식으로 대단히 희박한 지능을 열정적으로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가히 적지 않다는 것을 내 모르는 바 아니니 관대하게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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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성인 대상의 보편적 오락성 – 『불친절한 헤교씨』[기획회의 060530]

!@#… 굿모닝서울에서 시작해서 엠파스를 거쳐서 결국 파란에서 완결짓고 만, 근성의 연재작. 매체의 독자층으로 볼 때는 사실 맨 처음의 지하철 무가지 쪽이 더 적합했을터인데, 여하튼 포털에서 둥지를 틀 수 밖에 없었던 경우. 좀 더 본격적으로 들어가줬으면 하는 부분들이 참 많았는데, 그래도 완결을 해줬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연재만화에서 작품의 최종분량에 대한 사전합의 등 쌍방 합의 연재 조건 도입의 필요성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더 자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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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성인 대상의 보편적 오락성 – 『불친절한 헤교씨』

김낙호(만화연구가)

오늘날 한국에서 일반 성인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트렌디물이 가장 선호하는 장치들은 무엇일까. 즉 장르 영화나 드라마, 장르 소설, 만화의 인기작들에 응당 들어있기 마련인 어떤 소재들의 경향 말이다. 우선 간단히 떠오르는 것은 세 가지 정도다. 첫째는 ‘조직폭력’. 조폭 장르가 인기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연애가 핵심인 드라마에서마저도 조폭 또는 사실상 조폭을 연상시키는 구도가 꽤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조폭은 상처받은 거친 남성, 비합리적인 위계로 꽉 짜인 사회구도, 비열한 현실감이 넘치는 등장인물들을 등장시키기 좋은 소재로, 어두운 면모를 간직한 매력적인 남자캐릭터를 만들어내 주는 역할을 한다. 둘째는 전문성. 특정한 분야에 대한 전문적 내용이 들어 있어 줘야 이 복잡하고 전문적으로 분업화된 세상 속에서 일종의 극적 현실감을 확보한다. 카지노 딜러의 세계든, 과자 제빵 장인의 세계든, 조선시대 여형사든, 한쪽 세계의 전문성이 가져오는 낯설음이 오히려 몰입을 하기 위한 징검다리로 쓰이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뭐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듯, 멜로 코드. 사람과 사람이 서로 끌려서, 사귀든지 헤어지든지 여하튼 인간적 애정으로 움직여주며 극의 뼈대를 생성해 주는 것이다. 조폭 코드도 전문성 코드도, 결국 이 멜로라는 핵심 뼈대 위에 발라지는 살과도 같다. 여하튼 이러한 장치들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잘 구사하는가에 따라서 대중 오락물로서의 호소력이 결정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하지만 이러한 코드들을 능란하게 균형 잡아가면서 구사함으로써 결국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주로 저녁시간대 TV 드라마였다. TV라는 형식 덕분에 넓은 향유층을 거느릴 수 있으며 연속극이라는 형식 덕분에 충분한 방영시간과 연재가 주는 지연효과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연재만화는 어떨까. 매니아 지향 만화잡지가 아니라, 신문이나 대형 포털 사이트에서 연재되고 있는 만화라면 성인 대중 일반이라는 향유층 확보가 수월하다. 그리고 연재를 통한 관심끌기라면 만화 또한 결코 빠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아주 조폭 장르물로 가거나, 아주 전문분야 정보전달에 쏠리거나, 아주 멜로물로만 가버린 경우들이 대부분이라서 강력한 성공사례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불친절한 헤교씨』(박기홍 글, 김선희 그림 / 작은책방/ 2권 발행중)는 연재만화에서도 그러한 균형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지면이 사라지면 작품도 중단되는 연재 만화의 일반적 사례와는 달리, 이 작품은 처음에는 지하철 무가지 <굿모닝서울>에서 연재를 시작했다가, 포털 사이트 <엠파스>로 자리를 옮겼다가, 그 곳 지면이 사라진 후에는 또 다른 포털 사이트인 <파란>으로 다시 둥지를 옮겨서 연재를 지속해온 특이한 경우다. 그 작품이 이번에는 종이 단행본으로 출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작품의 내용은 대단히 유능하지만 오히려 그 유능함 때문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30세 여자주인공 소헤교가 게임회사에 취직하여 커리어를 추구하는 이야기다. 이 와중에서 사채업자인 그녀의 아버지가 조폭과 금융사기 등으로 또 하나의 이야기축을 이루고, 회사를 둘러싼 사람들의 관계가 여러 층으로 겹겹이 쌓여간다. 반은 조폭물, 반은 게임회사 커리어물로 이루어진 기묘한 균형의 이야기인 셈이다. 그런데 그 속에서 코믹한 티격태격과 진지한 가족사 문제를 오가는 여러 트렌디 멜로의 구도와 에피소드들을 섞어 넣으며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 나간다.

이 세 가지 요소들을 섞으면서, 작품은 꽤 정면돌파를 시도한다. 조폭과 사기가 난무하는 이야기축에서는 비열한 정치적 관계들을 거침없이 묘사하여 극적 재미를 부여하고, 동시에 게임회사 이야기로 나타나는 전문 영역의 분야는 게임업계의 실제 모습들과 여러 현실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확실한 리얼리티를 확보한다. 그러면서도 콩가루 가족의 한 쌓인 관계, 남녀간 애정 구도가 들어있는 (비록 특이하게도 정작 여자주인공은 특별히 연애를 추구하지는 않지만) 멜로의 뼈대로 구심점을 부여한다. 이렇듯 열심히 섞이지만, 이야기는 복잡하지 않게 독자들을 뛰어난 오락성의 바다로 몰입시킨다. 여기에 남성 위주의 가족과 사회현실 속 유능한 여성의 수난이라는 주제 의식이 지니는 동시대성 역시 작품을 더욱 호소력있게 만들어주는 요소다. 특별히 교훈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일정 부분 진취적인 주제의식을 넣어줌으로써 향유자들로 하여금 죄책감 없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해준다는 말이다.

남성 글 작가와 여성 그림 작가라는 조합 역시 작품의 보편적 호소력에 상당 부분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둘이 부부지간이라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강력한 정치적 드라마 부분과, 여성들에게 호소력 강한 섬세한 인간관계와 심경변화라는 부분을 잘 녹여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순정만화 특유의 그림체와 연출방식이 일반 성인 남성 독자들에게 주곤 하는 거리감 또는 거부감을 최소화하는 남성극화에 가까운 직선적 사건 중심의 연출 역시 이러한 조합이 영향을 주었으리라 본다. 물론 거꾸로 보자면 각각 장르의 코어 팬들에게는 외면 받을 이유가 되지만, 적당한 정도의 취향을 지니는 일반 성인들에게는 그 정도가 좋은 균형이다.

어디로 보나,『불친절한 헤교씨』는 잘 만들어진 연재 오락물이며 일반 성인 독자층에게 보편적 호소력을 가지는 좋은 사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작품은 연재 지면이 여러 번 바뀌어 온 것이 독자의 꾸준한 확보에는 감점요소가 되었으며, 흑백 극화의 형식이기에 종이가 아닌 웹 연재로서는 그 호소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바 있다. 이번에 출시된 단행본이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까? 사실 이 작품은 단행본보다는 연재로 한편씩 보며 그 다음을 기다리는 형식에 더 어울린다. 게다가 소장하고 두고두고 곱씹어보는 장르라기보다는, 실시간으로 웃고 울며 즐겨야 재미있는 쪽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행본에는 연재에서 공개한 바 없던 내용들을 더 넣는다고 하니 한번 두고 보며 즐겨볼 일이다. 단행본으로 완결이 나면 연재 당시보다도 더욱 재미있는 작품으로 완성되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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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에피소드적 생활 – 『크래커』[기획회의 060415]

!@#… 전작 ‘남자친9’ 보다 표현은 세련되어지고, 신선함 측면에서는 좀 심심해졌다. 안정기에 들어선 작가가 되어버리는 건가? 그게 좋은 건지 나쁜건지는 뭐라 하기 힘들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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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적 생활 – 『크래커』

김낙호(만화연구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성공적인 이야기꾼이 되는 것이란 쉽지 않다. 그런데 그 중 가장 커다란 난점 중 하나는 바로 독자들이 이야기를 기억하는 방식이 이중적 구조로 되어있다는 점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니, 우리가 이야기를 ‘경험’하는 방식은 큼지막하고 연속된 서사의 흐름을 따르지만 ‘기억’은 분절적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이야기가 서사적 흐름으로 경험된다는 말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기억이 에피소드라는 말은 무엇일까? 전체적이고 커다란 줄거리의 흐름을 기억하기보다, 강렬한 순간들, 뚜렷한 인상이 남는 어떤 상황과 그 속에 처해진 인간들의 당장의 대처 패턴 위주로 기억이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에피소드들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교량 역할로서 비로소 하나의 줄거리와 서사적 흐름이 떠오른다. 특히 우리들의 진짜 삶 자체부터가 특별한 세계 속 특별한 사건의 경험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무언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더욱 더 그렇다. 따라서 만약 일상적인 상황을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한다면, 당연히 굵은 서사적 흐름보다는 일관된 분위기 속에서 반복적 구도의 에피소드 위주로 제시해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굵은 서사적 사건을 만들만한 소재가 없어서라기보다, 그쪽이 훨씬 더 말 그대로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크래커』(토마 / 애니북스)는 문자 그대로 그냥 같이 살고 있을 뿐인 두 동거 남녀의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다. 서로 연인도 아니면서 단지 방세를 줄이고자 같이 사는 남녀라는 설정이 일상적이라기보다, 여하튼 그렇게 살고 있는 두 사람이 겪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공감시키기 위해서 극단적일 정도의 에피소드 중심 이야기를 구사하고 있다. 짧은 몇 페이지 속에 벌어지는 각자의 성격을 드러내는 사소한 다툼, 작은 오해, 또는 단순한 잡상이 파스텔톤의 간결한 낙서체 그림으로 펼쳐진다. 하지만 이 작품은 소위 에세이툰이라고 불리우는 감상에 그림을 삽입하는 것에 가까운 장르의 만화류들과는 다르게, 실제로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교훈이나 단상을 전달해주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 짤막한 에피소드들의 연속 속에서 꾸준히 인간사가 진행된다. 남자는 연애를 하게 되고, 여자는 그것을 옆에서 바라보며 여러 상황들을 벌이고, 누군가는 누군가에게 차이기도 한다. 밴드 매니저가 직업인 남자는 잘 못나가지만 자기가 지지하는 음악가들을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프리랜서 디자이너인 여자는 조직 없이 스스로를 관리해야하는 압박과 자유를 동시에 느끼며 직업생활을 꾸려나가야 한다. 특별히 처절하다거나 극사실적으로 먹고 사는 이야기를 해서 현실을 환기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일상’으로 독자들에게 경험시켜준다는 것이다.

『크래커』에서 다루는 남녀간의 관계 역시 이런 맥락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이 둘은 알고 보니 서로를 갈망하지만 겉으로는 쿨하게 서로를 외면하는 주말 드라마 같은 방식과 상당한 거리가 있고, 문자 그대로 그냥 살다가 이런 저런 서로에 대한 모습을 관찰하고 또 관망하는 사이다. 대변을 보고 깜빡 잊고 물을 안내린 적이 있는 여자와 연애를 하지는 않으리라 다짐하는 남자의 결심이 이런 사이를 잘 나타내준다. 작가는 이전 작품인 『남자친9이야기』에서도 이미 이런 적당한 거리감을 지닌 쿨한 인간관계 설정을 선보인 바 있지만, 헤어진 남자친구라는 나름대로 끈적한 설정이 깔려있던 바 있다. 하지만 『크래커』에서는 그 정도의 설정마저도 부여하지 않고, 정말 문자 그대로 서로를 관망하는 인간관계 자체에 전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훨씬 더 높은 완성도의 트렌디함, 쿨함,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드라마틱함으로 다가온다. 확실하게 작가는 한층 더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성에 한층 능숙하게 다가선 셈이다.

일상의 에피소드로 서사적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바로 세밀함이다. 기이한 사건으로 시선을 휘어잡는 방식이 아닌 이상, 독자들의 관심을 붙들어 맨다는 것은 바로 하나의 주어진 상황을 세밀하게 파고 들어가서 복잡 미묘한 관계들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끄집어내어 공감으로 무릎을 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하나의 에피소드가 ‘리얼함’을 획득하여 수많은 생각의 가지들이 뻗어져 나오고, 전체 이야기를 구성하는 틀이 완성된다. 『크래커』의 경우 연인은 아니지만 연인이 될 수도 있는 현실적 조건에 처해있는 두 남녀가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에 있어서 그런 세밀함이 상당한 수준이다. 예를 들어 한 에피소드에서, 여자는 남자가 돈 안되는 밴드 매니저 일을 하고 있기에 그저 그렇게 수주를 받고 있는 프리랜서인 자신과 비슷하게 곤궁한 처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보고 있자니까 원하는 CD들을 대량으로 잘만 사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내리는 결론은 하나다: “있는 집 자식들이란…”. 이런 종류의 것들이 바로 실제로 우리들이 현실 속에서 종종 구사하는 우리 주위 세상에 대한 세밀한 관찰 아니던가.

물론 에피소드 단위의 감수성에 기반한 접근 방식이 모든 면에서 효과적인 것은 아니다. 약간만 독자들과의 공감대 형성에 실패해도 등장 인물간 관계에 대한 피상적 묘사에 머무르기 쉬우며, 쿨함을 추구하던 의도가 경박함으로 오도될 수 있다. 즉 독자들의 상황적 트렌드를 강하게 탄다는 것이다. 물론 그 트렌디함 마저도 넘어설 수 있는 강력한 근본적인 매력을 겸비할 수 있으면 가장 좋다. 하지만 『크래커』의 경우 에피소드들이 축적되어 만들어내는 전체 이야기의 짜임새가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서 긴밀하게 묶여지고 있기보다는, 한회씩 순간순간 펼쳐보게 만드는 연재물로서의 재미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크래커』는 재미있다. 공감을 보내는 독자층을 충분히 끌어들일 힘도 있다. 에피소드 묘사의 능숙함도 즐겁다. 온라인에서 한 회씩 연재로 보는 것의 즐거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책도 좋은 품질로 제작되어 출판되었다. 작품 분위기와 어울리는 팝 성향 독립밴드들의 노래들을 모아 놓은 음반도 같이 출시되어 분위기를 돋아준다 (다만, ‘최초’의 카툰 사운드트랙이니 하는 명백한 거짓말을 홍보자료에 늘어놓는 과유불급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이 정도면 마음 편하게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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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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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만화 시스템의 르네상스를 꿈꾸는가 [만화규장각웹진0603]

!@#… 부천 만화규장각 웹진의 2006년 지면개편 첫호에 나갔던 글 (게재 버전 클릭). 좀더 본격적인 이야기까지 꺼내려면 아예 기획연재를 해야겠지만, 우선 그런 것을 위한 간단한 인트로 정도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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